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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26화 (26/114)

26화

“아, 쉽지 않네.”

백한이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색이 다소 연한 잿빛 머리카락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남자다운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머리와 비슷한 연한 색의 눈동자가 숲속을 헤맸다. 햇빛을 받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알맹이가 어떻든지, 아주 훌륭한 겉껍데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백한은 팔을 쭉 기지개 켰다가 소나무 가지에서 솔잎 하나를 따냈다. 그러고는 유려한 입술 사이에 솔잎을 하나 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 길을 잃은 상태였다.

치영을 두고 신나게 뛰어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동안 너무 사막에서만 굴러서 그런가, 나무가 울창해 좀 헷갈리던 참이었다.

때마침 갑작스레 추적하던 놈의 기척이 사라졌다.

순간 이동 이능력자인가 싶었으나, 느껴지는 에스퍼 파장이 없었다. 물론 이능을 사용하며 파장을 지우는 것이 완벽할수록 훈련이 잘되고 고등급인 에스퍼인 것도 맞지만, 이 산중에? 그런 인물이?

거기다 기백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은신이라니.

기척을 놓친 것은 아닌데. 참으로 이상했다.

“…이 새끼 환각사인가?”

환각사의 이능은 타인을 환각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그것이 기억이든 상상이든 또 이런 울창한 숲이든 말이다.

환각을 쓴 에스퍼의 등급이 어지간히 높지 않으면 백한이 헷갈릴 일은 없다. 그것은 기백한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각사의 환술에 속지 않는다.

애초에 기백한에게 환술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도 미묘한 개념이었다. 그저 뇌파의 작용일 뿐인데, 자살 충동을 일으키거나 분노하여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나.

혀 한 번 깨물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정신력 정도는 갖춰야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기백한의 군인으로서의 정의를 부정하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백한이 범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전투에 최적화된 인간이다.

무기 같은 신체, 가공할 만한 돌연변이가 선사하는 지고의 이능력, 범인에 비해 놀랍도록 출중한 IQ. …뭐, 물론 EQ는 낮지만.

하드웨어가 놀랍도록 강한데, 소프트웨어까지 누굴 죽이고, 끌어내고, 폭파시키고, 징벌하는 데 출중했다.

고작 이런 곳에서 오줌 싸던 놈의 대갈빡이나 뚫은 머저리 추적에 실패할 깜냥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상한데.”

이상했다. 놈의 기척이 사라진 것은 불과 몇십 초 차이였다. 그사이에 증발하듯 사라진 놈은 에스퍼 파장 하나 남기질 않았다.

백한은 목을 투둑 꺾었다. …간만에 열 받네.

일단은 컨트롤타워로 돌아가 치영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다.

그는 곧 굵직한 소나무의 밑동을 도움닫기 삼아 위로 뛰어올랐다. 이곳이 어디인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중력이 그의 몸에만 낮게 걸린 탓에 뛰어오르는 것이 한결 손쉬웠다.

나무 끝에 발 하나로 지탱하여 선 백한은 곧이어 컨트롤타워를 발견했다.

아쉽게도, 라면은 다음에 먹어야 할 것 같다.

* * *

치영이 눈을 뜬 것은 그날 밤이었다.

훈련은 라면 물이 끓기도 전에 종료되었다. 적응 훈련을 시키기 위해 치영을 데리고 나갔던 것인데 당사자가 졸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깨어난 치영은 제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가, 곧이어 센터의 가이드 전용 병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냥 평범한 병실이 아니었다.

출입문에 칠해진 노란색 표시를 보니, 에스퍼의 파장이 상태가 안 좋은 가이드의 파장을 교란시킬까 봐 에스퍼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병실 중 하나였다.

“뭐야…….”

이상했다. 자신은 이런 곳에 들어올 만큼 가이딩의 총량이 많지가 않다. 교란될 가이딩이라도 있어야 교란이 되지.

센터 생활 동안 입원을 수없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들어올 만한 병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치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충 정신을 차렸으니 가면 될 것 같았다. 간호장교를 부를 생각도 않고 치영은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발바닥에서 병실 바닥의 냉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슬리퍼가 없었다.

꼭 센터에 들어온 첫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혼자 깨어나 맨발로 돌아다녔었는데.

치영은 제 손등과 연결된 링거병이 걸쳐진 폴대를 잠시 보다가, 이번에도 그냥 손등에 꽂힌 것을 쭉 잡아 뽑았다.

약액이 뚝뚝 떨어지고, 손등에서는 묽은 피가 흘러내렸다. 치영은 그것을 환자복에 슥 닦아 내고는 병실을 나섰다.

밖은 고요했다. 시간은 새벽 1시. 2교대인 간호장교가 의국 안쪽에서 누군가와 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다는 것을 알릴까 하다가 도리어 붙잡힐까 봐 그대로 걸었다. 그렇게 치영은 병동을 나갈 수 있는 비상구로 향했다.

“뭐야……. 닫혀 있네.”

문이 닫혀 있었다. 한숨을 내쉰 치영은 다시금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갑작스러운 현훈이 인 탓에, 비틀거리며 병동 복도에 설치된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몸이 미끄러지며 그 옆에 있던 문을 본의 아니게 툭 밀었다.

잠겨 있는 줄 알았는데 문은 소리 없이 스르륵 밀렸다. 치영은 그 문 안쪽에 푹 주저앉아 버렸다.

“아…….”

하체에 힘이 빠진 나머지 인어공주 자세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체에 힘이 부족한 남자는 쓸모가 없다고 하던데, 하체 힘을 대체 어디에 쓰길래?

뭐, 하체에 힘이 넘쳐난다고 해도 치영이 쓸모 있어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치영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단호하게 내리며 일어섰다.

방 안은 고요하고 어둠에 잠겨 있었다. 왜 병동에 이런 곳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치 어떤 실험실처럼 보였다. 온갖 기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의국에 있는 군의관의 연구용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진기가 널려 있기도 했고, 링거병이 진열되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얼른 나가자고 생각한 무렵이었다.

치직, 파악—!

무언가 쩡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치영의 뺨에도 유리 조각이 스쳤다. 안쪽에 암살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가 터져 유리가 날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치영은 굳어 있다가 이내 문 옆 스위치를 눌러 방의 불을 밝혔다. 잠시 잠깐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적응을 한 것인지 넓어져 있던 동공에 쏟아지는 빛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것도 잠시, 이내 앞을 분간할 수 있게 된 치영은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야…….”

실린더가 깨진 것은 구식 가이딩량 측정기였다.

가이드 의학 총론이 17개정판까지 나온 지금, 의대생들이 사용하는 교제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구식 기계였다.

유리관으로 된 실린더가 안쪽에 덧대어진 채로, 방 안에 풀어져 있는 가이딩 파장을 측정하는 기계였는데, 실린더에 박혀있던 수은 기록계가 터진 듯했다.

높은 눈금까지 꽉 차오른 탓에 팽창을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가 버린 것이다.

“고물이네…….”

치영은 조용히 혼잣말을 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기계에 오래된 탓에 저절로 터진 듯했다. 제대로 작동하는 물건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대로 방을 나선 치영은 몇 걸음 더 걸었다. …그냥 오늘은 여기 있을까.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춘란대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다 같이 훈련을 나가게 됐으나, 저는 기어코 쓰러져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다.

남들이 사탕 껍질 취급해서 그렇지, 치영은 나름 공용 가이딩실에서 인정받는 인재였다. 그걸 가이딩실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도 알아봐 주었으면 하고 빌 때가 있었다.

그런 때로부터 지금은 너무 멀리 왔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제 모자란 부분만 부각되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아마 자신은 ‘가이드’라는 것과 맞지 않은 것 같다. 가이드인데 가이드와 맞지 않는다니.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치영이 몇 걸음 더 걸어 원래 제가 있던 병실로 돌아가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밤 산책을 왜 이렇게 오래 다녀와. 자기 바람도 피우니?”

치영의 침대에 반쯤 누워 등을 기댄 채 사과 한 알을 껍질째 우걱우걱 먹고 있던 백한이 치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 시—.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치영은 인상을 썼다.

“…여기에 왜 계신 겁니까.”

“우리 서방님이 쓰러지셨다는데 제가 와 봐야지요.”

백한이 아주 공손하고 단아하게 말했다. 비록 태도만은 침대에 기댄 그대로 시정잡배처럼 낄낄거리는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치영은 두통이 도지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울적한 참이라, 저 얼굴을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면회 금지 표지판 못 보셨습니까? 그리고 여기는 에스퍼 통제 구역입니다.”

“누가 날 통제해.”

미친놈인가. 치영은 말을 않기로 했다. 그냥 이대로 병실을 나서 가이드 숙소에 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치영의 숙소 바로 옆방을 창고로 쓰는 것을 몰랐던 백한이 치영의 방 짐만 옮긴 탓에, 얇은 이불 정도는 아직도 창고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어 덮고 자면 될 것이다.

그러나 치영이 막 몸을 돌린 순간, 사과 향이 났다. 백한이 그대로 치영을 안아 올린 것이다. 무릎 뒤에 팔을 끼우고, 한 팔로 등을 받친,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뭐, 뭐 하는—!”

“쉿. 지금 옆방에 치질 수술 환자 있대. 수술로 항문에 평화를 찾은 불쌍한 가이드를 깨울 참이야?”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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