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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24화 (24/114)
  • 24화

    그러나 불행하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새날이 밝았다.

    오늘은 좆같은 훈련일. 새벽부터 중대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인 탓에 늦지 않게 훈련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 공기 좋네요, 그쵸. 안 소위님.”

    상쾌해 보이는 이인교의 말에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은 분명 동죽대인데 왜 여기에 끌려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저혈압인 탓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왜 맹하게 굴어. 매력 어필하는 거야?”

    치영은 백한의 말을 씹었다. 머리를 감고 바로 자는 바람에 짧은 머리가 새집처럼 뻗쳐 있는 것도 모른 척 중인데, 기백한의 말 따위 골백번도 더 씹을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늘 기분이 좋지 못했다. 지난밤 안 죽고 또 살아남았군, 싶은 마음과 나 빼고 다 찬란해 보이는 햇빛까지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훈련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푹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훈련까지 끌려온 터라 더욱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 치영의 상태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백한이 낄낄거렸다.

    “그래, 그래. 형아가 묶어 줄게.”

    “뭡니까?”

    갑작스레 제 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백한의 모습에 치영이 흠칫 놀라 물었다. 치영이 놀라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남자는 흥얼거리는 어조였다.

    “전투화 묶을 줄도 모르고. 은근 손 많이 가, 안치영이.”

    치영은 백한이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는 모습에 놀라 뒷걸음질 쳐야 했다.

    덩치가 커다란 에스퍼는 치영의 앞에 쪼그려 앉았어도 태산같이 커 보이기만 했다.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질기고 단단하게 직조된 가이드들의 훈련복과는 달리, 에스퍼들의 훈련복 상의는 몸에 달라붙는 형태의 흡한속건 섬유로 제작되어 있다.

    검은색의 광택이 미미하게 도는 얇은 섬유가 피부처럼 온몸에 달라붙어 있으니, 가뜩이나 대공포처럼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치영은 제 군화 끈을 조여 주는 백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또 저래. 하여간, 변덕이 죽 끓듯…….

    흉골 부근쯤이 간지러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작작 하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태도가 살가운지 영 미심쩍었다.

    그러나 마냥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치영이 군화를 묶을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센터에 들어와서 훈련을 받았을 때도 전투 훈련은 아니었다.

    가이딩의 방법, 이론과 실재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가이드가 팀에 소속되면, 그 팀에서 소속 에스퍼와 합동 훈련을 진행한다. 서로 합을 맞춰 보는 필수적인 훈련이다.

    치영은 동죽대 소속이긴 하지만 그들과 따로 훈련을 해 본 적이 없다. 백연 외에 얼굴을 아는 이도 드물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물경력이 되어 버린 기분이라 저도 모르게 귓등이 발개졌다.

    백한에게만은 얕보이기 싫었다. 그것이 치영이 하고 있는 을의 사랑이니까.

    치영이 무언가를 인내하고 있는 사이, 전투화를 단단히 묶어 준 백한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수그리고 있을 때도 작지 않던 이가 바로 서니 월등하게 커지는 바람에 치영의 시선이 저절로 올라갔다.

    백한이 씩 웃었다. 왼쪽 눈꼬리에 붙은 점이 살짝 접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계속 넋 놓고 있다가 이마 깨진다. 정신 차려, 안치영아.”

    지가 뭔 상관이야.

    치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느새 부터 얼굴에 표정이 사라진 탓에, 속으로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단정하게 생긴 얼굴도 한몫하는 듯했다.

    “안 소위님, 합동 훈련은 처음이십니까?”

    막내 이인교가 붙임성 있게 자재를 나르며 말을 걸었다. 치영은 “예.” 하고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오늘의 훈련은 센터 외부에서 진행된다. 센터 동쪽에 연병장과 붙어 있는 체력 센터, 훈련 센터가 따로 있어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훈련을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야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따로 있다.

    춘란대와 훈련을 하기에는 춘란대가 아니고, 그렇다고 소속된 동죽대와 훈련을 하기에는 공용 가이딩실에서 근무한 경력밖에 없는 치영에게는 색다른 일이었다.

    …하마 새끼가 수상하기는 한데 이제 저도 임무에 나갈 것이니 훈련을 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해가 뜨지도 않을 시간에 센터를 나서 군사 지역으로 묶인 야산으로 이동한 터라, 이제 막 아침 햇빛이 녹음을 비추고 있었다.

    이인교와 김민우가 작전 차량에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있었다. 치영은 멀거니 서서 뭘 해야 할까 두리번거리다가, 허인나가 나르는 장비를 같이 들어 옮겼다.

    그녀는 돕고 싶어 알짱거리는 치영을 보고 픽 웃으며 어깨에 장비를 짊어지고 상자 네 개 정도를 한꺼번에 들어 올렸다.

    “두십쇼. 이런 건 제가 하는 겁니다.”

    “…이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크게 도움은 되지 못했다.

    B급 에스퍼와 일반인의 악력은 다섯 배 정도 차이 난다. 에스퍼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그 차이는 심해지니, A급 에스퍼인 허인나에게 일반인 남성과 신체 조건이 똑같은 치영의 도움은 미미하기만 하다는 얘기다.

    그게 아니더라도 허인나는 치영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각 있는 에스퍼라면 가이드들을 귀중하게 대우한다. 물론 기백한은 그러한 자각도 못 갖춘 편이지만, 본인보다 나은 존재를 본 적이 없는 탓에 다른 인간들을 모두 개미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춘란의 에스퍼들은 의외로 다들 정중하고 사려 깊었다.

    그런 에스퍼들의 매너를 이용하는 가이드도 있다. 그러나 치영은 딱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아주 미미한 등급의 가이드라고 해도, 인성의 좋고 나쁨은 등급에 달려있지 않다.

    훈련에 함께 나왔음에도 에스퍼들이 야전 천막을 설치하는 동안 차량에서 나오지 않는 가이드들도 많았다. 먼저 나서서 제 일을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춘란대 에스퍼들의 심금을 울렸다.

    게다가 치영은 뭘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다. 조용하여 바라보면 구석에 앉아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무전 장비 앞에 돌탑을 쌓고 있지 않은가. 통신 장비에 바람이 불면 신호가 안테나로 모이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훈련엔 참여해 본 적도 없다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조교용 교제랑 구글…….”

    김민우가 피식 웃으며 묻는 말에 치영은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구글이라니. 저 나름으로 훈련에 대해 꽤 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부대장인 박형인도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제 몸에 중력을 낮춰 공중으로 뛰어올라 산등성이를 살피고 온 백한이 에스퍼들의 기색을 보고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뭐야, 분위기 왜 말랑해. 기분 더럽게.”

    “대대장님 기분이야 원래 널을 뛰지 말입니다.”

    “라면 끓일까요?”

    허인나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이인교가 재빨리 백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훈련 시작 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들먹이는 중대원의 제안을 거절할 만큼 백한은 제대로 된 군인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빨리 끓여. 파 뜯어 올 테니까.”

    “야산에 파가 어디 있습니까.”

    “산 밑에 텃밭 있던데.”

    “대대장님이 도둑 새낍니까.”

    “군사 지역에 텃밭 만드는 놈이 서리 정도로 신고하지는 않겠지. 물 끓여 놔, 다녀올 테니까. 가자, 안치영이.”

    나는 왜?

    이번에는 치영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영의 뒷덜미를 팔로 감아 끌어당긴 백한은 걸음을 빨리했다.

    두 눈이 커진 채로 끌려가는 치영을 아무도 구출해 주지 않았다.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구조 요청 사인이라도 보내고 싶었는데 에스퍼들은 저들끼리 라면을 스무 개 끓이니, 스물다섯 개 끓이니 하며 싸우고 있었다.

    “잠, 깐, 저는—.”

    “꽉 잡아라. 뛰어갈 거니까.”

    뛰듯이 빨리 걷더니 종내에는 아예 치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치영은 제 두 다리를 쓸 수도 없었다. 백한에 의해 공중에 띄워진 채로 빠른 속도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이 미친 새끼, 요즘 왜 이렇게 엉겨 붙지?

    스킨십이, 정확히는 남자 가이드가 싫어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웩웩거리던 놈이다. 근데 어느새 부터 들러붙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치영은 내려 달라고 소리쳤지만, 산악용 오토바이만큼 빨리 달리고 있는 백한 때문에 입에서 소리가 나오는 대로 뭉그러져 버렸다.

    지금이라면 안 들릴 것 같아 단전에 힘을 주고 욕을 갈겨 볼까 생각하던 때였다. 백한이 돌연 멈추더니 관성에 튀어 나가려고 하는 치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제 품으로 당겼다.

    “무슨—!”

    “쉿.”

    백한이 치영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빠르게 뛴 탓에 숨이 조금 거칠어져 있었지만, 가슴을 한 번 크게 들썩이는 것만으로 금새 잠잠해졌다.

    그는 뭔가를 살피면서 치영을 제 품 안으로 욱여넣듯 끌어안았다.

    덕분에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치영은 짜증이 난 상태였다. 단단한 근육에 둘러싸인 흉곽에 끌어안긴 터라 딱딱하고 아팠다. 볼이 뭉개질 정도였다.

    “씨이벌, 아주 그냥 죽사발을 만들어 놓네.”

    그때였다.

    퉤, 하고 가래침을 뱉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백한이 제 품에서 치영을 놔 주며 정수리를 꾹 천천히 눌렀다. 조용히 몸을 낮추라는 뜻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짓눌린 채로 치영 역시 몸을 긴장시켰다.

    가래침을 뱉은 남자는 사타구니를 두어 번 긁더니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제 것을 꺼내 아무데나 오줌을 갈겼다. 뜬금없는 노상 방뇨에 치영의 미간이 혐오감으로 좁아 들었다.

    오줌발이 잦아들자 툭툭 털어 집어넣고는 옆에 서 있던 동료에게 개발새발 하며 욕을 해 댔다.

    서울‧경기 센터는 경기 북부에 위치해 있다. 자연스럽게 야전 훈련지 역시 경기 북부의 군사 지역이 되었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군사 지역 야산에 들어올 수 있는 민간인이라고는 백한이 확인한 텃밭 주인이 끝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도저히 텃밭이나 일구며 소일거리로 삼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치영이 숨을 죽이고 있던 그때, 백한이 그런 치영을 향해 속삭였다. 귓불 옆에 입술을 붙인 채로 아주 작게 속삭인 터라 숨결까지 넘어들어 왔다.

    “내 건 더 커. 기대해.”

    …진짜 미친 건가?

    치영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경멸이 가득 담긴 치영의 표정을 바라보며 백한이 소리 없이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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