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왜 안 나가시고 남의 다리는 뚫어지게 보십니까.”
“보기에는 매끈해 보이는데 만져 봐도 그럴까 싶어서.”
“…뭐요?”
군에 입대하고 난 뒤부터는 다나까 말투만 쓰던 치영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귓구멍에 쓰레기가 박히는 기분이었다.
멀쩡한 얼굴로 희롱을 해 대는 것이 제일 어이없었다. 마치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에스퍼‧가이드 보육원에 장난감이라도 보내자며 다정하게 말하는 투로 사람을 희롱하는 것 같았다.
사실 손진화보다 저 하마 새끼가 더한 새끼인 건 아닐까. 치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설주에 기댄 백한에게 다가갔다.
“중령님은 잠도 안 주무십니까? 좀, 나가십시오.”
“오, 쫓아낼 줄도 알아?”
백한은 저를 밀어내는 치영의 행동에 꿈쩍도 하지 않으며 킬킬거렸다.
짜증이 솟았다. 백한은 그런 치영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품 안으로 끌려가는 볼썽사나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남자가 지척에 와 닿은 것만은 분명했다.
치영은 숨을 훅, 들이마신 채 그대로 멈췄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좀 전과는 그 눈빛의 온도 자체가 달랐다. 열기를 품고 있어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를 듯 일렁이는 두 눈. 치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선조차 피하지 못한 채 올가미에 꿰인 작은 짐승처럼 두 눈만 크게 떴다.
“훈련이 무슨 내용인지 조금 더 물어봐도 돼.”
“…됐습니다.”
“아니면 네 방에 나를 들여도 되고.”
“제가 왜.”
“쉬었다 가라느니, 그런 말들 많잖아.”
이상한 새끼.
자기가 먼저 밀어낸 주제에 치영이 돌아선다 싶으면 금세 다가와 간극을 좁혔다.
이 관계에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일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는 듯이. 치영의 의지와 의사는 무시한 채로, 저 하고 싶은 대로 구는 것이다.
욕심 많고 심술 넘치는 하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 정을 대고 세심하게 조각한 것 같은 얼굴에 대고 하마라 욕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치영은 백한이 싫었다. 싫은 만큼 제 마음에서 밀어내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웠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남자가 원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인 듯하다.
남자가 치영이 제게서 멀어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영은 그를 지우지 못했고, 제게 가까워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멀거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치영이 제게서 멀어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영은 그를 지우지 못했고, 그렇다고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 거리를 좁히지도 못했다.
위성이 행성의 중력에서 벗어나지도, 다가오지도 못하는 것처럼. 달이 지구를 돌 듯이, 너의 유일한 위성이라도 된 것처럼.
기백한은 치영이 중력에 끌려 궤도 안을 돌면서도, 바로 그 중력에 밀려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로 영원히 제자리를 맴돌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쁜 새끼.”
“…….”
그래서 그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저도 모르게. 앞에서 내뱉고 나니 후련하면서도 수치스러웠다.
그를 원망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감정이 깊다는 걸 광고하는 꼴이니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영은 이미 뱉은 말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치영의 삶이 인내보다는 감내와 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치영은 무언가를 참고 기다리는 인내보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감내가 어울리는 쪽이었다.
그러니 꼴사나운 말을 내뱉은 것까지 감내해야겠지.
치영이 표정을 갈무리하는 동안, 기묘한 눈동자가 치영의 얼굴 구석구석을 핥고 있었다. 금세 사라진 원망의 기색을 찾는 듯했다.
색소가 옅은 줄 알았는데 저를 내려다보는 두 눈동자는 검기만 했다.
검은 호수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검은 뱀의 비늘과 같이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곧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더니, 아주 맛있는 것을 목전에 두었다는 양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험한 말 할 때마다 꼴린다고 했지.”
“…….”
그 말을 끝으로 백한은 치영을 방으로 밀어 넣더니, 단번에 거리를 좁혀 초대한 적 없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가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자 열려 있던 문이 그의 등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주먹을 쥐는 동작만으로도, 울뚝 튀어나온 정맥이 장미 덩굴처럼 팔뚝을 칭칭 휘감듯 도드라졌다. 백한은 계속해서 예의 그 눈으로 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이러는…….”
“내가 해피타임 가질 때는 말 많이 하지 말라고도 했는데.”
백한이 치영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목련꽃이 흐드러진 꽃밭에 들어선 것처럼 달큼한 체향이 났다. 그렇게 청초한 향인데도 불구하고 백한에게서 맡으니 야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단단하게 맞닿은 가슴팍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 향이 물밀 듯 밀려드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치영은 놀라 몸을 뒤척였다. 벽과 백한 사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허리를 뒤척였다.
백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무언가 사랑스러운 것이라도 보듯.
“귀엽네. 더 해 봐. 흥분되니까.”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에도 불구하고, 눈동자 속에 들어차 있는 것은 욕정밖에 없었다.
뚝뚝 흐르는 정염이 제 얼굴 위로 흐를까 두려워, 치영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백한은 치영이 그렇게 하게끔 두지 않았다.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리게 하더니 단단한 허벅지를 그대로 치영에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밀어붙이는 힘이 너무도 강해 치영은 절로 윽윽 거리는 신음이 나왔다.
백한이 치영을 한껏 껴안고 낮은 숨을 내뱉었다.
“하…….”
귓가에 내려앉는 숨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가이딩은 진짜 죽이는데.”
치영은 그제야 제 안에 고여 있던 가이딩이 그대로 백한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그랬던 것인지 모를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가져가면 저와 같은 저등급 가이드는 위험해지는데도, 상대는 제멋대로였다.
그래,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
눌린 날개뼈가 아팠다. 끌어안긴 품이 딱딱하기만 했다. 기백한의 체온은 치영에게 너무도 뜨겁기만 했다.
백한은 이제 아예 치영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로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닿은 목이 간지러웠다. 전신에 소름이 달렸다. 치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제 가이딩 받아 봤자 또 토하실 거잖습니까.”
“그게 신경 쓰였어?”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로 짐승이 먹이 냄새를 먼저 맡듯 킁킁거리던 백한이 킥킥 웃었다.
“좋은 냄새 난다.”
백한이 흘린 말에 치영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내가 너 안 좋아하는 게 신경 쓰여?”
“…….”
“내가 네 가이딩 받을 때마다 웩웩거리는 게 눈물 나? 속상해 죽을 것 같아?”
“…….”
“아닌데. 우리 자기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는데.”
백한은 고개를 목에서 떼더니 치영의 이마에 제 얼굴을 톡, 가져다 댔다.
애정이 있는 상대에게 할 법한 제스처에 기만당하는 기분이었다.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다는 듯, 백한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꼭 밀어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게 신경 쓰였으면 이렇게 뻣뻣하게 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뭐 어떡하라는 얘깁니까.”
“팔 둘러 봐. 입술 좀 부비게.”
“…저녁 먹은 거 다 토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왜, 마누라 걱정돼?”
…미친 하마 새끼. 그 와중에 저 자신을 두고 마누라란다. 이렇게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마누라는 둔 적이 없는 치영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치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백한은 여전히 치영을 껴안고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너 지금 자벌레 같아. 왜 이렇게 꼿꼿해. 좀 안겨 보래도. 잘해 줄게, 형 믿지?”
“중령님은 미친 새끼 같으십니다.”
백한이 피식 웃었다. 맞닿은 이마를 통해 그의 울림이 전해졌다. 치영은 고개를 피하고 싶었지만, 백한의 시선은 쉽게 그를 놔주지 않았다.
“나랑 연애 스텝이라도 밟고 싶은가 보지. 천천히 손깍지부터 시작하기, 뭐 이런 거? 치영아, 솔직해지자. 우리가 그런 거 할 짬은 아니잖아.”
“…….”
“너도 나랑 연애할 생각 없으면서 어지간히 해라. 그래서 딴 주머니 차려고 손 처장 찾아간 거 아니었어?”
백한이 이마를 떼어내곤 씩 웃었다. 이지러지는 눈매에 저절로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살짝 접힌 눈꼬리 아래 눈물점이 예뻤다. 사람 홀리는 하마 새끼. 치영은 이를 아득 갈았다.
“할 생각 있으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그럼 진짜 사귈까, 너랑?”
“좆 까시지 말입니다. 내 몸에 닿기만 해도 구역질이나 해대는 에스퍼, 저도 싫습니다.”
“아, 방금 건 좀 상처였다. 정말? 정말 싫다고?”
백한이 애교라도 부리듯 투욱, 제 이마를 치영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모로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미친 하마 새끼가 대체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손 처장한테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걸까? 하지만 손 처장은 지난번 일로 백한과 원수 사이가 되었을 텐데.
기백한이 아무리 치영을 씹다 뱉은 껌 취급 한다고 해도, 에스퍼인 이상 저와 각인까지 맺은 가이드가 저 몰래 전역하려는 것을 그냥 둘 리가 없다.
게다가 백한은 치영과의 스킨십이나 치영의 성별이 싫은 것이지, 치영의 가이딩까지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렇게 치영을 혐오하는 주제에 부득불 찾아와 가이딩을 빼앗아 가는 것 아니겠나.
치영의 앞에서 토할지언정, 입을 맞추고 치영의 몸 아무 곳에나 아랫도리를 비벼 대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가이딩을 얻고 싶으니 토하는 것 정도는 기회비용으로 여기는 것이겠지. 제멋대로 사는 하마 새끼 속이야 뻔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치영으로서는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치영은 낯빛을 굳히고 백한을 떼어내려 노력했다.
“무겁고 짜증 납니다. 저리 꺼지시지 말입니다.”
“그럼 네가 올라탈래? 넌 존나 가볍잖아.”
뭐? 하고 반문하기도 전이었다. 백한이 아예 치영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두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