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너 오늘 어디 갔었어?”
“…네?”
보통 때 같으면 백한을 대충 쳐다본 뒤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나왔다. 어디 갔었냐는 물음에 자동적으로 그가 손진화와 싸웠단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딱히 찔리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면서 괜히 찔린 얼굴이 된 치영은 백한의 눈치를 보았다.
눈치 못 챘을 수도 있다. 자신은 그저 되물었을 뿐이니까.
“수상한데. 오늘따라 대답을 바로 하네?”
…예리한 하마 새끼. 치영은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시금치를 다듬었다.
만들어야 하는 요리량이 너무도 많은 터라 웬만하면 구내식당이나 누림동에서 먹고 들어온다고 해 놓고, 에스퍼들은 또 한 번 주방에 모여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에 솥을 가져다 놓고 물을 팔팔 끓이는 중이었다.
가정집이 감당 못 할 열기와 수증기를 어쩌나 싶었는데, 설계자는 그런 에스퍼들의 먹성을 아주 잘 알고 파악하고 있는지 대형 팬과 공조 시스템을 설계해 두었다.
덕분에 공기는 뽀송했지만 그래도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기는 했다. 치영은 백한의 말이 안 들리는 척하며 시금치를 계속 다듬었다. 다듬어야 할 시금치 양이 웬만한 식당 버금갈 정도였다.
“씹어? 깜찍하긴. 형이 봐준다.”
백한은 옆에 앉아 식탁에 올려진 팔에 턱을 괸 채로 치영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해서 뚫리겠습니까? 애 좀 써 보세요. 안 소위 얼굴에 구멍 좀 뚫리게.”
지나가던 김민우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물이 가득 담겨 팔팔 끓고 있는 솥 안에는 파스타 면 다섯 봉지가 들어갔다. 한 봉지가 일반인 5인분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 인당 한 봉지씩은 먹겠다는 포부였다.
향만 입히려고 넣는 요리용 백포도주만 해도 한 병이 통째로 콸콸 부어졌다. 조용한 태도로 시금치를 다듬는 치영을 향해 막내 인교가 말했다.
“근데 안 소위님은 한 젓가락밖에 안 드시는데, 식사 때마다 일 시키는 건 불공평하지 말입니다.”
그 말에 김민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럼 네가 허인나 좀 잡아 와.”
“노동 뒤 먹는 밥이 꿀맛이지 말입니다.”
이인교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태도를 바꿨다. 뻔뻔한 것은 대장이나 그 부하나 똑같구나, 생각하며 치영은 계속해서 시금치를 다듬는 것에 열중했다.
다듬는 즉시 박형인이 가져가 물에 씻기를 반복했다. 포항산 시금치라 싱싱하고 잎이 푸르렀다.
흙냄새가 나지 않게 잘 씻어서 면이 소스를 머금을 때쯤 넣어 숨만 죽인 뒤 바로 식탁으로 내갈 예정이었다.
“어떤 빡대가리가 다 삶은 파스타를 물에 빠냐. 이게 비빔국수야? 나와, 넌 안치영이나 도와줘.”
그 틈에 건져 낸 면을 물에 한 번 씻으려는 생각인지 채에 받치던 김민우를 보고 기백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치 그가 찰나에 모든 음식을 망치기라도 한 것처럼 기세가 험악했다.
대대장이라고 부르기는 해도 평소에 코웃음을 잘 치던 김민우는 웬일로 기가 죽어 보였다.
버럭 화를 내는 백한에게 기세가 밀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이 요리를 망친 거면 어떻게 하지 하고 걱정하는 듯했다.
기백한은 심각한 얼굴로 면수를 다 버리면 죽여 버릴 거라며 엄포를 놨다.
…웃겨. 치영은 약간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기백한이 밥상에 수저 하나 놓지 않을 것처럼 생겨서는 먹을 것에 진심인 점이 웃겼다.
아침에 일어나 블랙커피 한 잔에 자몽 반 조각을 짜 넣어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울 것같이 생겨서는.
치영은 어느새 숙달된 솜씨로 시금치의 꼬투리를 제거하며 백한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신장이 월등히 큰 에스퍼들을 위해 크게 설계된 주방인데도 그가 들어서니 꽉 차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집에서는 편하게 입는 타입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무늬도 없는 흰색 티셔츠를 입은 상태에서 팔을 움직이니 등이 팽팽하게 당겨져 날개뼈와 날개뼈를 감싸는 근육들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저 사이즈밖에 없나. 약간 작아 보이는데.
치영은 멍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티셔츠의 사이즈 자체는 큰 것 같은데 기백한이 입으니 작아 보였다.
팽팽하게 조여진 근육을 감싼 티셔츠는 가슴 부분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팽창해 있었다.
어쩐지 민망해져 치영은 다듬던 시금치에 열중하는 척했다.
“와, 손이 꽤 빠르네요.”
불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백한의 요리용 젓가락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김민우가 치영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아닙니다, 그냥 쉬운 일이라서…….”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며 말꼬리를 잘랐다. 처음에는 저를 반대하는 기색이라 센터의 다른 이들처럼 저에게 악감정이 있나 싶었는데, 순순한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가 싶어졌다.
자신을 반대하는 것에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면 서운함이 남을 일도 아니건만, 이 숙소에 신세 지게 된 것 자체가 민망한 터라 그의 앞에서 그다지 당당하지 못했다.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김민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저도 과도를 가져와 시금치를 다듬기 시작했다.
허인나가 주방으로 내려온 것은 그때였다.
“배고파. 밥은 언제 줘요?”
“저 새끼는 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내네. 아이고, 곡식 아까워라.”
“엄마가 나 손에 물 묻히지 말래요.”
“상관들 손에 대신 물이 묻는다고 말씀드리면 다른 충고를 하시지 않을까?”
박형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웍에 넣은 화이트 와인의 알코올기가 불에 닿아 날아갔다. 불길이 치솟는 것이 꼭 요리 전문점 주방 같아서 신기했다.
올리브 오일과 알코올이 날아간 화이트 와인의 풍미, 갈아 넣은 흑후추와 치킨스톡의 향이 주방을 메웠다.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쯤 되니 먹성이 크지 않은 치영도 궁금해지기는 했다.
박형인이 칼집을 넣은 방울토마토를 팬에 넣더니 나무 스패출러로 그걸 꾹꾹 눌러 터트렸다. 치이익— 소리가 나며 열기에 닿은 토마토의 채즙이 금세 증기로 끓어올랐다.
면을 넣고 볶는 것은 간단했다. 열기가 식지 않은 파스타 면이 빠르게 볶아지며 윤기를 머금었다.
“다 됐습니다.”
박형인이 씩 웃으며 커다란 웍을 두 개 가져와 식탁 위에 그대로 얹었다.
그릇에 덜지는 않는 건가 싶다가, 이만한 양을 수용할 수 있는 대접이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대신 각자의 앞에 앞접시가 놓였다. 누구의 그릇에 덜어 주는 것 없이,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다.
“진짜 작작 가져가세요들. 양심적으로 먹자.”
“너나 앞접시에 쌓아 두고 또 가져가지 마라.”
“어딜 보시는 거죠? 그건 파스타의 잔상입니다만.”
에스퍼들은 양을 두고 싸워 댔다.
그동안에도 기백한은 혼자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아까 전, 요리에 쓰고 남은 그 와인이었다.
어디에 따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병 주둥이에 입술을 댄 채 목을 젖혀 콸콸 들이붓는 모양새가 꼭 와인이 아니라 갈증을 풀기 위해 보리차를 마시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한입 줘?”
“더럽게 먹던 걸…….”
“그럼 왜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봐. 내가 술 마시면 안 설까 봐? 걱정 마. 지금 당장도 가능하니까.”
옆에서 정신없이 파스타를 먹고 있던 허인나가 웩, 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척했다.
다른 에스퍼들도 밥상머리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황당함에 얼굴을 붉힌 치영만이 반박할 기회를 놓쳤다. 한숨을 쉬며 아까부터 향이 굉장히 좋았던 파스타나 먹기로 했다.
치영은 제 몫을 앞접시에 덜어 냈다. 시금치 향이 토마토 채수와 어우러져 무척 향긋했다.
돌돌 말아 먹을 때마다 배가 묵직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치영은 이게 남들이 다 말하는 ‘집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겪어 보지 못한 것들 중 하나였다.
조용히 고개를 들어 왁자지껄 떠들며 입안 가득 파스타 면을 밀어 넣고 떠드는 에스퍼들을 바라보았다.
치영도 그들을 따라 짧게 웃었다. 식탁에 있던 그 누구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 *
“어이쿠, 실례.”
실례라고 했으면 나갈 것이지, 손가락을 다 벌린 채로 두 눈을 가리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어이없었다.
치영은 물기를 닦은 상체 위로 티셔츠를 입던 그대로 살짝 굳어 있다가 옷을 마저 내렸다.
막 씻고 나온 치영의 방문을 백한이 노크도 없이 열고 들어와 벌어진 일이었다.
치영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조용히 백한을 바라보았다.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라는 눈빛이었다.
백한은 서늘한 제 가이드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너 내일부터 훈련 합류해.”
“무슨 훈련 말씀이십니까.”
“글쎄, 묻지 말고 하라면 해.”
…하마 새끼, 또 지랄이야. 내가 지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사람인 줄 알아.
치영은 달력을 보며 내일 가이딩실에 특별한 스케쥴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동그란 뒤통수를 보던 백한이 문설주에 기대 피식 웃었다.
“근데 자기는 잘 때 원래 그렇게 짧은 거 입고 자?”
“…네?”
드로어즈만 입고 자는 놈한테 지금 건전한 홈웨어용 반바지가 지적을 당한 건가? 치영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백한을 바라보았다.
백한은 실실 쪼개며 치영의 다리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째 오늘 낮 손진화가 제 몸을 훑던 눈빛과 비슷해 보였다.
둘 다 번들거리는 것이, 닿은 부분부터 소름이 돋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