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등을 돌려 가이딩실 건물을 향해 걷는 와중에도 등 뒤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치영은 계속해서 걸어 가이딩실로 들어섰다.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치영이 가방 속에 들어 있는 팩 커피 우유를 발견한 것은 자리에 앉아 짐을 풀 때였다.
“…이게 왜 여기…….”
분명 현관 옆 탁자에 두고 온 것인데 이게 언제……. 치영의 얼굴이 흐려졌다. 희정이 지나가다 치영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어, 안 소위님 커피 우유 못 드시잖아요. 알레르기 비슷한 거 있지 않으세요?”
“…그러게요.”
커피도 되고, 우유도 되고, 카페라테도 가능한데, 유독 커피 우유에만 알레르기가 올라왔다.
심각한 것은 아니고 입술 근처에 두드러기가 나는 정도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라, 깨닫고 난 뒤부터는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아마 어릴 적 고아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커피 우유를 먹고 난 뒤부터 그랬던 것 같다.
치영을 오래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치영은 표정 없이 그걸 바라보다가 희정에게 물었다.
“…드실래요?”
“저야 좋죠.”
희정은 안 그래도 배가 고팠다는 말과 함께 치영의 손에서 커피 우유를 받아 갔다.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치영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시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위잉—. 이제 막 부팅시킨 컴퓨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치영에게만 요란하게 들렸다.
* * *
치프는 희한하다는 얼굴이었다.
‘그쪽에서 왜 안 소위를 부르지?’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그가 말하는 ‘그쪽’과 안치영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작전처장 손진화가 F등급 가이드 안치영을 제 집무실로 호출한 것이, 대통령이 말단 공무원을 청와대로 불러 1년 치 국가예산안을 의논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치영은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일어나 작전처로 향했다.
행정처, 작전처, 센터장실 등 굵직한 부서들이 모여 있는 건물은 센터 중앙부에 있었다.
가려면 카트를 타고 가야 하니 조금 일찍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치료복 차림으로 갔다가는 눈에 띌 것 같아, 가이딩실 캐비닛에 있던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혹시 모르니 다른 분들께는 의무 병동 쪽에서 콜이 들어와 갔다고 해 주시면…….”
“그래,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게. 얼른 가 봐. 높으신 분이 부른다니 걱정되네.”
치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치영이 걱정되는지 등을 떠밀어 보냈다. 연신 고개를 꾸벅인 치영은 그대로 가이딩실을 나서 카트를 기다렸다.
카트에는 아무도 타 있지 않았다. 치영은 차 창문을 조금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여러 개의 정류장을 거친 뒤에야 치영은 작전처가 있는 중앙부 건물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로비로 들어서니 일반군이 치영의 앞을 막았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정복이나 전투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것이 문제인 듯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작전처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일반군은 인이어를 통해 무언가를 확인해 보는 듯하더니 반 발자국 물러서 치영에게 들어가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치영 역시 가볍게 묵례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마침 1층에 있었다.
바로 올라타면서도 치영은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 백한이 작전처장을 무시한 것 때문에 혹시나 임무에서 저를 배제하면 어쩌나 했는데, 오늘 부른 것을 보니 그는 아닌 듯했다.
조금 성질을 부리기는 하겠지만 일을 안 줄 마음은 없어 보여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이 임무만 완료하면 진급도 아니고 전역 허가 정도는 작전처장에게 쉬운 일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자신이 백한과 말도 안 되는 각인에 묶여 있지만, 센터로서는 반쪽짜리 각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S+급 에스퍼를 F 등급 가이드에게 묶어 놓는 것보다 새로운 가이드를 들이는 편이 그들에게도 더 나을 것이다.
각인 해제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센터로서도 무언가 방법이 있으니 치영의 제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
지난 몇 년간 고작 F등급의 가이드에게 묶어 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해제법을 찾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치영은 손진화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쪽에서 손진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영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 소위 왔군. 앉아.”
“안녕하십니까.”
“됐어, 경례는 무슨. 쉬엄쉬엄해.”
그의 말에 치영은 천천히 눈썹 끄트머리에 붙였던 손날을 내렸다.
들어오기 전 살짝 긴장했던 것과 달리, 손진화는 치영에게 자리부터 권했다.
치영이 천천히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걸 내내 지켜보고 있던 손진화가 피식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혼내려고 부른 것도 아닌데.”
“…예.”
“지난번에 말하다 말았었지?”
“예, 그렇습니다.”
치영은 주먹을 쥔 손을 양 무릎에 내려놓은 채로, 가만히 손진화의 말을 기다렸다.
손진화는 슬쩍 웃음을 지었다. 얇은 눈매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를 본 치영은 저도 모르게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끼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딱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 이거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치영은 간신히 군인다운 인사치레를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나마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침착해 보인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내가 그냥 말할게.”
제법 긴 시간 뜸을 들인 후에야 손진화는 겨우 입을 열었다. 입가에 살짝 지은 미소는 지우지 않은 채였다.
“자네가 내 작전용 P—77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P—77은 무전기의 일종으로 군의 첩보원을 뜻하는 은어였다. 치영은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제가 작전처장님의 첩보 대원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아.”
“정확히 어떤…….”
“반정부군이 운영하는 소프숍이 있네.”
소프숍? 치영은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이 묘해 속으로 몇 번이나 발음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손진화는 그런 치영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소파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제 입술을 슬슬 쓸었다.
또 그 눈이다. 번들거리는 눈빛을 피해, 치영은 손진화의 어깨 언저리 정도를 바라보았다.
손진화는 치영이 제 시선을 피해도 상관없다는 양 말을 이었다.
“이제 막 발현한 고아 가이드들을 납치하거나 빚에 팔려 온 이들을 종업원으로 밀어 넣고 가이딩 매춘업을 하는 곳이지.”
“…….”
들어 본 적이 있다. 술에 취한 이악의 부대원들이 저를 가리키며 등급이라도 높아야 소프숍으로 보낸다는 얘기를 왕왕 하고는 했었다.
그때는 그게 어디인지도 몰랐다. 기분이 나빴을 뿐.
기억을 반추하다가 불쾌해진 치영의 미간에 슬쩍 금이 갔다.
다른 이가 보기에는 미미한 표정 변화라 손진화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자네가 할 일은 간단해. 거기에 위장 잠입을 하는 거야. 아, 오해는 말아. 그냥 심부름이나 접객을 하는 단순 업무니까.”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손진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러시아군에 소속된 바람 이능 에스퍼 하나가 기지 내에서 폭주를 한 모양이야. 태풍이 워낙 커서 통신 파장이 크림반도에서 서울‧경기 센터까지 흘러들었는데 우리 쪽 통신 에스퍼가 그걸 잡았어.”
“…….”
“곧 이악의 대장이 그 소프숍 지하에 있는 벙커에 방문한다는군.”
“그럼…….”
“그래. 그때 그의 얼굴을 기억해 오기만 하면 돼.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에스퍼를 시켜 몽타주를 만들게 하면 되니까.”
손진화는 어려울 것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치영은 말이니 쉽다 생각했지만, 일단 그런 임무가 제게 왔다는 것 자체가 쓰고 버릴 패가 필요해서라고 여겼기 때문에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딱히 대답 없는 치영을 재촉하지 않겠다는 듯, 손진화는 약속을 핑계로 치영을 그만 일어서게 했다.
경례를 한 뒤 집무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치영은 손진화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소프숍이란 일제 강점기가 남긴 유곽 문화였다.
가이드들을 여러 이유로 억압하여 가이딩을 통한 매춘을 시키는 형태의 사업장은 강점기 때부터 매우 크게 유행했다.
관련 법규들이 강화되기 시작하며 가이드들의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반정부군은 아직도 이를 돈벌이에 이용했다,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가이드들을 납치하거나 빚에 팔려 온 가이드들을 사들여 소프숍에서 일하게 했다.
반정부군은 군사들에게 준 월급을 소프숍을 통해 돌려받기 위해, 오히려 그런 가이딩 매춘을 권장했다.
그렇다고 그런 곳에 반정부군만 가는 건 또 아니었다.
에스퍼들이 훈련생도 시절 신고식으로 상관의 엉뚱한 명령을 받아 소위 딱지를 떼고 돌아오는 일 역시 잦았다.
그런 가이딩 매춘은 에스퍼로 하여금 가이드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돈을 주고 흥정할 수 있는 물건으로 보이게끔 했기 때문에, 가이드 인권 위원회에서는 그곳에 출입한 병사들을 강력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다.
“내가 안 소위한테 그런 일을 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걱정 말라니까.”
이쪽에 대해 아는 것이 하등 없으면서 은근슬쩍 친근한 말투를 쓰는 것이 기분 나빴다.
작전처 건물을 빠져나오면서도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제안에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번 일이 아니면 제대는 또 물 건너 가 버릴지 모른다.
사실 치영이 제대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끔찍해하는데.”
그렇게 끔찍해 제 가이딩을 받기만 해도 토악질을 해 대는 에스퍼를 놓아 주고 싶었다.
미워 죽겠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그것이 치영이 제 사랑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성의였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걸 더는 보기 싫었다.
물론 저 역시 손만 잡아도 좋던 시절은 다 지났다. 그때는 그래도 언젠가 저를 봐 줄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지금? 글쎄. 지금은 어떨까…….
치영은 마저 걸어 건물을 아예 빠져나왔다. 그 방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걸었다.
치프도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바로 퇴근하라고 했으니 남은 건 그저 걷는 것뿐이었다.
하룻밤 묵었을 뿐인데, 그래도 집이라고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걸음이 향하고 있었다. 치료복을 갈아입지 않았단 것도 까먹고, 치영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