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19화 (19/114)

19화

그 사이, 허인나는 기어코 치영의 가방까지 빼앗아 거실 소파에 툭 던져 버렸다.

“포기하시지 말입니다. 인나 자식이 원래 남이든 자기든 밥 굶는 걸 못 참아 합니다.”

김민우가 아주 커다란 대접 여러 개에 국을 퍼담으며 말했다. 그사이 프라이를 다 마친 것인지 뒤집개를 설거지한 기백한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린 채로 연행되어 온 치영을 바라보았다.

“토끼려다 붙잡혔구나, 너?”

“…출근 시간에 늦었습니다. 지금 가 봐야 합니다.”

“다 먹고 태워다 줄 테니까 까불지 말고 앉아.”

백한은 치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제가 먼저 앉은 뒤, 제 옆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더니 앉으라는 듯 턱짓했다. 하마 새끼의 수하인 허인나 중위가 치영을 자연스럽게 거기에 앉혔다.

치영이 앉자마자 그의 앞으로 한가득 퍼담아진 밥과 국, 겉절이와 프라이가 배달되었다. 치영은 저절로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상대하기에는 음식의 양이 너무 많았다.

“…다 못 먹습니다.”

“남겨. 내가 먹으면 되니까.”

간단하게 대답한 백한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앉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에 치영이 멈칫하자, 그 모습을 흘끗 본 박형인이 말했다.

“안 소위 늦었으니 대대장님이 태워다 주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먼저 먹고 있으면 됩니다.”

치영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백한이 저를 태워다 주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백한도 형인의 그 말에 별다른 핀잔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그게 박형인의 말이 맞다는 긍정처럼 보였다.

치영은 급기야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호의인지 아니면 팀 내의 분위기가 원래 이런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숟가락을 쥘 수밖에 없었다.

밥을 고봉으로 퍼 줬길래 신종 왕따 방법인가 잠시 생각했으나, 자리에 앉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릇의 크기 자체가 달랐다.

“그 정도는 먹어야지. 아침을 먹어야 힘쓸 수 있습니다.”

“할배 같아…….”

“인나야, 다 들린다.”

아직도 반쯤 덜 뜬 눈으로 중얼거리는 허인나의 말에 김민우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이인교는 밥그릇 위로 완숙과 반숙 프라이를 교대로 쌓고 있었다.

그대로 밥을 푹푹 퍼먹는데 무척 빠른 속도로 산처럼 쌓여 있던 것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치영이 넋 놓고 그걸 바라보자, 백한이 커다란 손으로 치영의 정수리를 푸욱 눌렀다.

“외간 남자는 왜 쳐다봐. 먹기나 해.”

손에 힘을 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짜증이 난 치영이 팔을 휘저어 백한의 손을 치워 내자 그제야 거둬 준다.

그때부터는 그저 먹기만 했다. 아침을 챙겨 먹는 것이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먹힐까 싶었는데 먹다 보니 또 넘어갔다.

국의 간이 심심하여 치영의 입에 잘 맞았다. 겉절이로 쓴 상추는 싱싱했고, 계란프라이 역시 기름을 많이 먹지 않아 먹기 편했다.

제육볶음은 아침치고는 조금 간이 세고 매운 편이었지만, 나머지 반찬들이 담백한 탓에 넘기기가 좋았다.

자주 집어먹자, 박형인이 그걸 흘끗 보고는 그릇을 슥 밀어 주었다.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턱을 열심히 움직였다. 일단 다 먹어야 이곳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았다. 치영이 먹던 양보다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퍼 준 밥이니 다 먹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숟가락질이 점점 느려졌다.

“입 짧은 거 봐라.”

쯧, 하고 혀를 찬 백한이 치영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 그대로 제 그릇에 덜어 낸 것도 그때였다. 그는 두세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제 몫을 모두 비웠다.

어떻게 저렇게 많이 먹는 거지. 얼굴을 보아서는 이슬만 먹고살 것같이 생겨서는.

입이 짧고 예민할 것 같은 생김새는 치영과 비교했을 때 단연코 백한 쪽이 우위였다.

전속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요리를 두어 번 끄트머리만 찍어 먹고도 배부르다는 얼굴을 할 것처럼 생긴 주제에, 밥은 농번기 머슴밥처럼 수북한 걸 쉽게 해치우는 것이 기가 질릴 정도였다.

이인교가 벌떡 일어나더니 물을 담은 컵을 들고 와 치영의 앞에 두었다.

“…아,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지 말입니다.”

이인교가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었다. 백한이 옆에서 짜증을 냈다.

“이 새끼들이 근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껄떡거리지? 적당히들 안 해?”

“집착도 하십니까? 의외지 말입니다.”

허인나가 제육볶음을 한 주먹 퍼먹으며 낄낄거렸다. 백한은 대꾸 없이 치영을 툭툭 치며 차 키를 건넸다.

“야, 밖에 나가서 시동 걸고 있어. 내 차 알지?”

“잘 먹었습니다.”

“인사 없이 그냥 나가라니까?”

차 키를 받아 들고 고개를 꾸벅 숙이자, 백한이 또 한 번 짜증을 냈다.

치영은 자신이 알 수도 없는 이유로 또 난리를 치는 백한에게 질린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을 나서려는데 주머니가 걸리적거려 내려다보니, 팩으로 된 커피 우유가 담겨 있었다. 그걸 그대로 현관 옆 탁자에 올려 두고 숙소를 나섰다.

현관부터 아침 햇살이 부지런히 치영의 뒤를 쫓았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선선한 아침 특유의 날씨가 기분 좋았다.

잔디를 깎고 물까지 준 것인지 잔디를 밟는 감촉마다 물기가 가득했다. 어쩌면 밤사이에 내린 이슬일 수도 있겠다.

푸릇한 것이 기분 좋아도 완전히 밟으며 걸으면 안 되겠다 싶어, 넓고 납작한 화강암을 박아 둔 정원석을 디디며 걸었다.

“안치영이.”

“아,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숙소를 나서던 것인지 백연이 동죽의 숙소에서 나오며 선글라스를 위로 올려 썼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넘긴 그녀의 짧은 머리 위에 보잉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었다.

냉엄한 인상을 풍기는 기백연의 무표정이 약간 풀렸다. 치영을 반가워하는 듯했다.

치영 역시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경례를 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춘란대 숙소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지?”

“…예,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기백연은 옅게 웃더니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 딴에는 그것이 꽤 환하게 웃는 표정이라는 걸 치영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기계로 만든 군인이 있다면 기백연과 같을 것이다, 라는 농담 같은 말이 맞았다.

동죽의 일만으로도 바빠 가이딩실에는 자주 오지 못하지만, 쌓인 세월 동안 그녀를 상사로 모시며 치영 나름대로 기백연의 표정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저를 걱정하고 있는 마음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센터 생활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가이딩실 사람들과 기백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가타부타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이 비슷한 상사와 부사수가 서로 짧은 안부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내가 외간 에스퍼랑 시시덕거리지 말라고 했지.”

단단한 팔이 강한 힘으로 치영을 훅 끌어당겼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누군가의 가슴팍에 뒤통수가 부딪혔다가 통 하고 튕겼다.

목소리와 익숙한 향수 냄새 때문에 그가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치영은 짜증이 났다. 언제는 외간 남자라며. 왜 또 에스퍼로 바뀐 건데.

그러나 치영은 속엣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어떤 자식이 신문 훔쳐 갔나 했더니……. 내놔라.”

백연이 백한의 옆구리에 끼워진 신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백한은 대꾸하지 않고 치영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뒤 속닥거렸다.

“시동 걸고 있으랬더니 질질 흘리고 다녀?”

“…갑니다.”

연달아 이어지는 한심한 발언에, 치영은 조금 질린 얼굴이 되었다.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의 팔을 제 허리에서 떼어내고는 등을 돌리려다가, 백연에게 짧게 경례했다.

팔을 내리기도 전에 백한이 손목을 잡고 휙 내려 버렸지만 말이다.

기가 막혀 백한을 흘겨보자,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이 싱글싱글 웃는다.

치영은 더 말하기도 귀찮아 등을 돌려 버렸다. 어젯밤처럼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험비에 올라타려는데, 두 에스퍼들의 대화가 들렸다.

“가지가지 한다. 누가 훔쳐 간댔나? 작작 하도록 한다.”

“연아, 긁지 마. 나 요즘 마음 수양하잖아. 요가도 한다니까?”

“너는 수양할 종자가 못 된다.”

“자매님 또 말 서운하게 하네. 나도 수틀리면 너네 집 사탕 훔쳐 먹을 거야. 간수나 잘하자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쾅— 하는 소리에 치영이 차에 올라탄 뒤 시동을 걸려다 말고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백연이 정원의 모종삽을 공중에 띄운 뒤, 발로 차 백한의 머리 위로 날리고 있었다.

모종삽이 그대로 날아가 보도블록에 박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백한은 싱글싱글 웃으며 등을 돌려 치영이 올라탄 험비 쪽으로 향하다, 깜빡했다는 듯 등을 돌려 백연의 손에 신문을 들려 주다가 정강이가 까였다.

“으, 씨발, 너 꼭…….”

“방심한 네 탓이다. 안치영이, 가이딩실에서 보자.”

“네, 실장님.”

열린 차 문을 통해 인사하자, 백연은 미련 없이 신문을 쥐고 몸을 돌려 동죽의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치영은 백한이 호들갑을 떨며 다리를 저는 것을 다소 한심하게 보다가 차 문을 닫았다.

백한은 운전석에 올라탄 후에도 계속해서 찡찡거렸다. 정강이가 너무 아픈데 네가 가이딩 해 주면 싹 다 나을 것 같다는 말이 요지였다.

치영은 무시하며 차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치영은 눈매를 가늘게 뜨고 바람을 맞이했다.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그의 머릿결을 갈랐다. 나름 나쁘지 않은 출근길이었다.

험비는 숙소에서 꽤 먼 공용 가이딩실 앞에 멈췄다. 난슬동에서 가이딩실까지 늘 멀게만 여겼는데, 험비를 타니 금방이었다.

내릴 타이밍이 되자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백한에게 감사한 것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냥 내릴까 고민하는 중에 백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내리고 왜 꾸물거려. 형이랑 데이트 더 하고 싶어?”

짜증이 난 치영은 대꾸 없이 그대로 내려 문을 쾅 닫아 버렸다. 핸들에 기댄 백한이 이쪽을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