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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8화 (18/114)

18화

저 미친 하마 새끼. 치영의 미간이 대번에 좁혀졌다. 백한은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로 치영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니까 얼른 잠들어야겠지?”

치영은 대꾸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짐이 이리저리 널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군데 모인 짐을 빼고 방은 꽤 깔끔한 편이었다.

방만 보면 가이드 전용 숙소에서 쓰던 집과 꽤 차이가 났다. 꽤 넓기도 했다. 전용 숙소의 방과 좁은 거실을 합친 크기였다.

“TV도 있네…….”

한쪽에 세워진 TV는 요즘 유행하는 스탠드 형식이었다. 어떻게 쓰는 건지 몰라 모서리만 검지로 툭 건드려 보던 치영은 한쪽에 놓인 1인용 소파에도 앉아 보았다.

“…….”

곧 나가야겠지만 방이 깨끗하고 훌륭하니 기분이 좋기는 했다.

센터에 들어온 뒤 처음 2년간은 얼떨떨하기도 하고, 제게 이런 행운이 생긴 것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게 곧 끝날 행운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시간을 더 즐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이 숙소에 들어와서 이런 좋은 방에 묵는 것이 곧 끝날 행운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마음 편하게 즐기자 싶기도 했다.

어차피 작전처에서 배당된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손 처장과의 약속대로 자신은 제대하게 될 것이다.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욕심이 많은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려 법과 계약으로 여러 굴레를 만들어 놓았지만, F등급에게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단기 계약직으로 밖에서 지내며 센터로 출퇴근하는 비상근직으로 전환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전역을 결심한 뒤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애초에 왜 그렇게 지난 5년 동안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르겠다.

안 되는 일을 굳이 붙잡고 악을 쓰며 버티는 것과 다름없는 시간들이었다.

어떻게든 백한의 옆에 붙어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의 가이드로, 각인을 나눈 가이드로서 제값을 하기를 바랐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백한에게 인정받고 싶지도 않고, 타인의 인정은 더더욱 필요가 없어졌다.

공용 가이딩실에 오는 가이드들은 늘 성희롱과 무시를 일삼았다.

예전엔 그게 너무 괴로웠었다. 잘해 보고 싶었는데,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그런 기대나 바람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다.

인간 이하 취급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이쪽이야말로 뭇 인간들이 개새끼 이상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모든 기대와 바람들이 함몰된 지금에 와서야, 치영은 겨우겨우 마음이 편해졌다.

“와아…….”

결국 감탄이 나온 것은 방에 딸린 작은 욕실을 본 순간이었다. 새것으로 보이는 세면 용품들과 깨끗한 연회색의 정사각형 타일들이 마음에 들었다.

집 안 어디든 형광등의 쨍한 불빛이 없더니, 작은 욕실도 마찬가지였다. 주백색의 불빛이 세면대 거울 바로 위에 짧은 직선 형태로 달려 있었다.

치영은 내내 짜증이 나 있던 마음을 치워 내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정작 어이없는 일들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안 소위, 계란프라이 할 줄 알죠?”

“아, 네.”

박형인 대위가 무표정 사이에서도 살짝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치영에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 치료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붙잡혀 이런 질문을 듣다니.

박형인은 기백한과 달리 우직한 생김새에, 키가 180cm 후반은 되어 보이는 덩치에 맞지 않게 작은 앞치마를 두른 채로 뒤집개를 들고 있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약간 지쳐 보이는 표정은 종갓집으로 장가를 잘못 간 사위가 명절이라도 맞이한 몰골이었다.

치영은 그의 말에 가방을 메려다 말고 멈칫했다.

“지금 얼른 계란프라이 60장만 해 주세요.”

“네?”

“자, 뒤집개. 앞치마도 여기.”

첫날부터 시집살이를 시키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에스퍼들은 다 각자의 집안 살림으로 바빠 보였다.

막내 이인교는 마당에서 잔디 깎기 기계를 움직이고 있었고, 김민우는 급식소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솥에 무를 한가득 썰어 넣고 있었다.

허인나는… 허인나는 거실 소파 밑에 숨어서 졸고 있었다. 이 집단 노동에서 홀로 탈출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게 다 뭡니까?”

한 솥 가득한 제육볶음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치영이 형인에게 물었다.

형인은 상추 겉절이를 할 요량인지 두 박스 정도의 상추를 썰다가 말고 치영에게 대답했다.

“아침 식사 준비 중입니다.”

아침 식사인 것은 알겠는데 이 어마어마한 양이 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치영은 약간 아연해진 얼굴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가 먹을……?”

“당연히 우리죠.”

김민우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투로 대신 대답했다.

성인 남성 스무 명 이상은 너끈히 먹을 만한 제육볶음과 한 솥 가득한 쇠고기뭇국, 계란프라이 60장과 텃밭을 아예 옮겨 온 듯이 쌓여 있는 상추 겉절이를 바라보던 치영의 안색이 허옇게 질려 버렸다.

“얘는 새 모이만큼 먹어. 우리 먹는 거에서 한 숟가락씩만 줘도 모레까지 먹을 거다.”

현관 밖에서 가져온 건지 신문을 옆구리에 낀 채로 우유와 요구르트, 녹즙이 가득 든 바구니 두 개를 가지고 들어오며, 백한이 말했다.

“사람이 그거 먹고 어떻게 삽니까.”

김민우가 먹을 걸로 야박하게 군다며 투덜거렸다.

“대대장님은 그게 문제십니다. 어쨌든 안 소위를 데려오신 분은 대대장님 아닙니까. 잘 챙겨 주셔야지 사람 먹는 걸로 차별하고……. 인성이 저래서 큰일 났어.”

동네의 젊은 망종을 걱정하는 노인처럼 김민우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백한은 타격 없는 얼굴로 들고 있던 바구니 두 개를 내려놓더니 그 속에서 커피 우유를 꺼내 치영의 치료복 앞주머니에 툭 넣어 주었다.

뒤집개를 들고 계란프라이를 뒤집고 있던 치영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주머니 앞이 빵빵해졌다.

“학교 가서 혼자만 먹어라?”

“아, 짜증 나게 진짜…….”

엉덩이까지 톡톡 두들기길래 짜증이 나 백한의 발등을 뒤꿈치로 퍽 밟았다.

“아이고! 가이드가 에스퍼 죽이네. 아이고.”

가렵지도 않다는 얼굴로 백한이 엄살을 부리며 신문을 펼쳤다. 좁은 부엌에서 신문을 펼친다며 김민우가 짜증을 냈다.

헤드라인만 훑어본 것인지 금세 신문을 접은 백한이 다시금 그것을 옆구리에 낀 채로 치영에게 참견하기 시작했다.

“어허, 뭐 하는 거야. 반은 반숙으로 굽고, 반은 완숙 프라이를 해야지. 얘 봐라, 계란프라이에 근본이 없네.”

“…이딴 게 근본도 있습니까?”

기가 막힌다는 듯 대답한 치영의 뒤편에서 백한이 몸을 기웃거리며 계속해서 치댔다.

동네 불량배가 이삭을 골라 내고 있던 동네 처녀 뒤에 붙어 껄떡거리는 모양새였다.

등 뒤에 와 닿는 기백한의 단단한 가슴팍이 거슬릴 정도였다.

“근본 없는 요리가 어디 있어. 나와라, 넌. 안 되겠다.”

백한은 기어코 치영을 뒤로 물리더니 제가 대신 뒤집개를 잡고 휙휙 프라이들을 뒤집기 시작했다.

속도가 무척이나 빠른데, 기름이 튀지도 않았다. 잠깐 사이에 계란프라이가 접시에 수북하게 쌓였다.

곱게 자란 데다가 워낙 왕처럼 굴어서 이런 일은 도통 못 할 줄 알았는데, 완숙과 반숙을 반으로 나누라더니 말뿐이 아니었는지 뒤집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숙련된 장인의 솜씨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넋을 놓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게 만드는 법이다.

치영은 백한을 질색하던 것도 잊은 채로 멍하게 프라이를 척척 뒤집는 손끝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원체 깔끔하게 잘하니 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안 됐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기백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에스퍼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제 몫을 넘칠 정도로 해내고 있었다.

잘 훈련된 취사병들의 작업실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특히나 박형인의 칼질은 몇 년 전 유행했던 뮤지컬처럼 리드미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인나 이 새끼는 또 쳐 자나?”

김민우가 뭇국에 조선간장을 넣기 위해 꺼낸 국자를 번쩍 들고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박형인이 그를 만류했다.

“자게 둬라. 인나가 손만 대면 개죽 되는 거 몰라?”

“아니, 그 자식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손으로 하는 건 다 못하잖아. 두라니까, 그냥.”

“잔디 다 깎았습니다—! 거실 물걸레질도 할까요?”

김민우와 박형인이 대화하는 사이, 잔디를 다 깎고 들어온 이인교가 짧게 경례하며 의욕적으로 물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숙소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도 마지막에는 기백한을 볼 수밖에 없었다.

숙소가 편한 분위기인 것은 대대장인 기백한이 의외로 권위적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또라이로 소문난 주제에 팀원들에게는 꽤 괜찮은 상사인지 평화로운 생활감이 흐르고 있었다.

하마 새끼가 의외네. 치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가방을 멨다.

계란프라이를 하라는 명령은 백한이 대신 가져갔으니, 저는 이제 출근해도 좋겠다 판단한 것이다.

앞치마를 벗어 식탁에 올려 둔 채로 조용히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불쑥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도 모를 목소리였다. 치영이 살짝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소파 밑을 통해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허인나의 머리통이 보였다.

그녀는 침 자국이 난 입가를 추스르지도 않은 채 짓눌린 볼살로 치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출근, 하러…….”

“아침 드시고 가셔야지 말입니다.”

“전 원래 안 먹습니다.”

“원래 안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새 벌떡 일어난 허인나가 머리에 새집을 지은 채로 다가왔다. 치영은 드물게 위협감을 느꼈다.

기백연처럼 키가 장대하게 큰 것은 아니지만, 허인나 역시 180cm는 넘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춘란의 에스퍼들은 모두 키가 컸다. 가장 큰 것이 기백한이라 티가 잘 안 났을 뿐. 미묘하게 높아진 시선으로 치영은 말을 이었다.

“아침 안 먹어도 됩니다.”

“안 됩니다.”

이쪽의 거절을 단호하게 거절한 허인나가 치영의 가방을 착 잡더니 착 돌려, 등을 휙 돌리게 만들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몸이 돌려진 치영은 가방을 그대로 미는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주방의 식탁 근처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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