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17화 (17/114)
  • 17화

    그렇게 춘란의 숙소에 한 발 내디디자마자, 치영은 옛 기억을 반추시키는 해마의 명령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춘란의 대원들을 소개받기를 권하던 기백한이 막을 새도 없이 떠올랐다.

    “…포장해 가면 되니까 피난민처럼 먹는 것 좀 그만둘까?”

    당시 18살이던 치영은 처음으로 햄버거라는 것을 먹어 보았다. 요즘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하는 말도 치영에게는 우스울 정도였다.

    고아원 원장은 딱히 학대를 하거나 아이들을 핍박하지는 않았지만 보조금이나 기부금을 살뜰하게 떼어먹었다.

    어린이날이나 가을 운동회의 명목으로 뜯어낸 돈은 당일에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증명될 뿐이었다.

    가을을 맞이해 개최한 운동회,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선물 상자를 들고 웃는 아이들의 사진 등은 보조금의 증거가 되었다.

    열리지도 않은 운동회는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두 명이서 나눠 먹어야 하는 한 줄 김밥으로 끝을 맺고, 벽을 이룰 정도로 그저 잘 포장된 빈 상자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악으로 납치된 다음에는 산골에서만 살았다. 이악의 이름 앞에 ‘반정부군’이 붙은 이상 그들의 생활 반경은 정해져 있었다.

    이익을 노린 주변 국가나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원조를 받는 이악은 현대 사회의 CCTV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 같은 에스퍼들도 현대 문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치영은 그렇게 산골에 갇혀 살았다. 부엌데기나 하면서 말이다.

    그날은 매칭률 결과가 나온 날이었다.

    95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인다는 결과를 듣자마자 남자는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얼굴로 치영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환희, 어떤 갈망, 그를 상회하는 욕망, 꽉 담아 눌러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터질 듯한 희열까지.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 아름다운 얼굴을 기묘해 보이게 만들었다.

    당황하여 그 눈빛을 마주 보는 치영을 향해 남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리고 당도한 곳이 센터의 상업 지구인 누림동이었다.

    문제는 “뭐 먹을래?”라는 물음에 대답하던 치영이 너무도 쉽게 몇 가지의 가정식 빼고는 음식 이름을 전혀 모르는 걸 들켜 버렸다는 데 있었다.

    백한은 피식 웃더니 쉬운 것부터 시도해 보자며 치영을 프랜차이즈 버거집에 데려가 주었다.

    1954 버거라길래 1954개의 버전이 있는 줄 알고, 다음에는 1953 버거를 먹어 보고 싶다고 했다가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

    포슬거리는 감자칩과 톡 쏘는 콜라, 패티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고기 향이 치영의 뱃가죽을 울렸다. 정신없이 먹다가 남자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전철 처음 본 김 서방도 아니고. 적당히 먹어. 포장해 가면 되니까.”

    한심하다는 투라 머쓱했지만 곧이어 행복해졌다. 이걸 포장해 갈 수도 있다니.

    어디서나 이런 대단한 걸 먹을 수가 있다고? 치영은 제게 말도 안 되는 행운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의 치영에게는 이악의 밖이 모두 지상낙원처럼 느껴졌었다. 지옥 밖도 지옥인 것을 몰랐던 어리숙하던 때의 얘기다.

    “그거 먹고 팀원들 보러 가자고.”

    “잉웡들이여?”

    “잉웡 말고 팀원.”

    발음이 뭉개진 치영을 보며 백한은 피식 웃기도 했었다. 지금의 치영으로서는 구경하기 힘든 진짜 미소였다. 애정 비슷한 것이 서려 있기도 했다.

    그 웃음을 보니 콜라가 목구멍을 긁고 내려가는 바람에 찔끔 나온 눈물이 사실은 거세게 뛰는 심장 때문은 아닌지 헷갈렸다.

    버거집 흰색 테이블 위에 팔을 얹은 채 손 위에 턱을 괸 백한은 치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창밖에서 스며들어 온 햇빛이 남자의 한쪽 눈동자와 산맥처럼 곧은 콧대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높은 콧대에 의해 반대편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치영은 먹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인간이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광활한 자연경관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헤 벌어진 치영의 턱을 검지로 툭 건드려 다물게 한 백한이 씩 웃었다.

    “형수 보여 달라고 난리니까.”

    그 말에 제 마음이 어땠더라?

    어떤 생각을 했더라?

    그것만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때 소개받았던 팀원들의 눈빛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형수님 오랜만에 뵌 것들이 반응들이 다 왜 이래.”

    백한은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었으나, 그것은 사전적 의미의 웃음이지 즐겁다거나 행복해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려는 의도라면 모를까. 치영은 그런 백한을 흘끗 보았다가 당황해 굳어 있는 팀원들을 외면했다.

    “…어, 안녕하십니까. 소위 이인교입니다!”

    막내만이 대대장의 기색을 못 견디고 파리한 안색으로 치영을 향해 경례했다. 치영도 짧게 경례하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다소 어색한 태도를 숨기지 않은 채였다.

    제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듯하고, 이보다 더 주목받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도 네 쌍의 눈동자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뭡니까?”

    결국 못 참고 입을 연 것은 김민우 중위였다.

    치영은 그를 흘끗 보고는 다시금 눈을 내리깔았다. 기백한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뭐가 뭐야.”

    “팀 가이드 요청했지, 누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오, 더 해 봐.”

    기백한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고 있었다. 대원들은 그 웃음에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성격이 나쁜 기백한이지만 늘 저렇게 웃는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웃을 때마다 사달이 일어나고는 했기 때문이다.

    아바스 왕조 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밥 알 와스타니 성문이 백한의 이능에 의해 그대로 들어 올려져 테러범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을 때도 저런 웃음을 지었었고, 한일 연합 훈련 중 자위대 대령 하나의 십자인대를 맨손으로 뽑아냈을 때도 저런 웃음을 지었었다.

    대개는 영창행으로 종결되고는 했지만, 백한은 그때마다 기죽은 기색도 없이 살아 나와 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또라이였다.

    그 웃음을 장장 1년 반 만에 다시 마주한 대원들은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박형인이 김민우의 등을 퍽 쳤다. 김민우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환영 인사가 나왔다.

    “더 하기는 뭘 더 합니까. 환영합니다, 안 소위.”

    김민우가 손을 척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마땅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은 여전했지만, 태도만은 일급 군인답게 정중했다.

    치영은 지랄들 한다고 생각하며 마주 손을 뻗어 악수했다. 부팀장 박형인과 허인나 중위, 이인교 소위하고도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저 인간이 진짜 나를 여기서 살게 할 모양이네.’

    치영은 왜 저러나 싶은 마음 반, 심드렁한 마음 반으로 백한을 바라보았다. 저러다 말 것이다.

    5년 전에도 평생을 아껴 줄 것처럼 굴어 놓고 하룻밤 만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나.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치영의 인생이고 그다음이 기백한이었다. 그 둘은 치영에게 이미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누가 팀 가이드 한대? 애가 집 잃고 딱하잖아. 에스퍼가 되어서 곤경에 처한 가이드를 버리고 오리?”

    곤경에 처한 가이드는 물론 가이드네 증조할아버지까지 버릴 것 같은 인간이 말은 잘한다.

    팀원들은 표정을 굳힌 채로 환영한다고 앵무새처럼 내뱉었다.

    치영은 마주 인사하지 않았다.

    그들의 환영 인사는 거짓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저의 거짓이니 부러 거짓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

    쌍방이 서로를 반가워하지 않는데도 기백한은 아주 감동적인 것을 보았다는 양, 박수를 짝짝 쳐 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백한이 휙 몸을 돌리더니 그런 치영을 향해 말했다.

    “넌 3층 쓰면 돼. 짐도 다 거기 있어.”

    “…아니 그럼 아까 짐들이 실례합니다, 하고 머쓱하게 저절로 3층으로 올라가던 게 안 소위 짐이었어?”

    “그런가 본데요……. 대대장님 파장이 묻어 있다 싶기는 했는데…….”

    팀원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백한은 그들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직접 안내하겠다며 계단을 올랐다. 치영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3층에는 또 누가 사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집을 구할 때까지만 신세를 지자 싶기도 했다.

    일단 오늘은 너무도 많은 일을 겪어 무언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마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치영은 앞선 남자를 따라 천천히 3층으로 올라갔다.

    층계는 스플릿 플로어 구조였다. 층과 층 사이에 엇나가게 층을 하나 더 만든 구조 때문에 3층에서는 2층이 훤히 보이지만, 2층에서는 3층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방도 3층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설마 옆방인 건 아니겠지. 이 넓은 집에 방이 거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치영의 희망과는 달리 두 사람의 방은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였다.

    “…이 방밖에 없어요?”

    “왜. 내 방 들어와서 살게? 의외로 적극적이네. 난 상관없어.”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저 하마 새끼…….

    백한은 치영의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도 실실 웃기만 했다. 다 알고 웃는 얼굴이라 주먹을 꽂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했으면 정말 미안한데 숙소에선 건들 생각 없으니까 들어가기나 해.”

    “…누가 기대를 했다고.”

    제 방과 치영의 방 사이 벽에 기대어 선 채 백한이 씩 웃었다.

    3층 복도에는 주백색 전등이 켜져 있었다. 환하지 않은 등의 빛깔 때문에 백한의 생김새가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래? 나는 무척 기대되는데.”

    “…….”

    “방음 잘되길 기도나 해. 내가 우리 자기 이름 부르면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백한이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노골적인 제스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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