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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6화 (16/114)
  • 16화

    딴생각하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백한이 한쪽 눈썹을 스윽 올리며 돌아보았다.

    식당까지 타고 왔던 백한의 험비가 주차장 한편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선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넘은 채 당당한 꼬락서니가 제 주인과 다를 바가 없어, 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머지 차들이 애를 써서 한 칸에 주차하는 동안, 백한의 험비는 당당하게 두 칸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얼른 안 타고 뭐 하니?”

    “…….”

    백한이 꾸물거리지 말라는 듯 재촉하는 탓에, 치영은 어쩔 수 없이 험비에 올라탔다.

    차 안은 의외로 깔끔했다. 깔끔하다기보다는 주인이 쓰는 물건이 현저하게 적다는 게 맞은 설명일 것이다.

    운전석 선바이저에 클립으로 끼워 둔 선글라스만이 유일한 개인 물품인 듯싶었다. 그 외에는 그 흔한 차량용 티슈조차 없었다. 황량한 생김새였다.

    아무리 센터에서 지급되는 차라고 해도 번호판을 달고 출고된 이후부터는 장교 개인의 차량이 된다.

    치영이 많은 이들의 차에 타 본 것은 아니지만, 가이딩실 치프의 험비에는 가운데에 스마일이 그려진 꽃 모양의 방향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방’처럼 누군가의 소유인 차 내부에는 그 사람의 흔적이 묻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한의 험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게 의외다 싶기는 했다. 저 정신머리 없는 성격에 군용 험비에 스티커라도 안 붙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벨트도 매 줘야 하는 거야? 의외로 상전 타입이네.”

    “읏,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차를 둘러보다가 벨트 매는 것을 잊었더니, 백한이 치영 쪽으로 몸을 숙이며 팔을 뻗어 벨트를 잡았다.

    치영이 당황하며 벨트를 잡으려 했지만, 백한은 대답 없이 벨트 끝의 버클을 잠갔다.

    그가 저를 위해 그런 친절을 몸소 선보일 줄 몰랐던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훅 가까워진 거리를 통해 치영은 그의 에스퍼용 향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비강에 달라붙어 자기주장을 하는 향이 재수 없었다.

    저 잘난 걸 알고 멋대로 행동하는 게 딱 그 향의 주인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차도 향수도, 딱 기백한다워 거슬렸다.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다는 듯이, 험비는 꽤 부드럽게 주행을 시작했다.

    주차선 따위는 무시한 채 개떡으로 주차했던 것과 달리, 운전을 부드럽게 하는 게 의외이긴 했다.

    “오, 방지턱.”

    “…아, 진짜 왜 이래요.”

    식당의 주차장을 나와 누림동을 빠져나가는 출구 쪽 방지턱 앞에서는 조수석에 앉은 이를 배려하듯이 팔을 뻗어 치영을 잡아 주기도 했다.

    문제는 험비가 달리던 속도가 30km도 안 됐다는 것과 백한이 잡아 준 곳이 치영의 가슴 언저리가 아닌 정수리라는 것이었다.

    농구공을 잡듯 치영의 머리 위를 꽉 누르는 커다란 손에는 장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작게 웃음소리도 들렸다.

    질색을 하며 머리 위에 올려진 그의 팔을 치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왜 저래 진짜……. 안 하던 친한 척을 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언제부터 저와 내 사이가 그렇게 좋았다고.

    백한은 주로 치영을 잡아먹을 듯 굴다가도 무관심하게 대했고, 치영은 그런 백한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그를 겨우겨우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 역사가 있는 만큼, 두 사람 사이가 이 정도로 친숙한 것은 어떻게 보아도 이상한 일이었다.

    치영이 잔뜩 미간을 좁힌 채로 밀어내도, 백한은 실실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백한의 험비는 숙소 지구인 난슬동에 도착했다.

    초입에서부터 한참을 더 들어가야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진 뒤뜰과 산 밑 시냇물이 흐르는 춘란의 숙소가 나온다.

    자매 중대인 동죽과 추국의 숙소 역시 근접해 있다.

    운전은 꽤 잘해 놓고 차는 또 아무렇게나 주차한 백한이 차에서 먼저 내렸다. 치영은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짐만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곳에 있어 봤자 환영받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애초에 F급 가이드가 어떻게 팀 하나의 가이딩을 통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차 문을 닫았는데, 기백연이 물 호스를 들고 잔디밭에 서 있었다. 아마 그곳이 동죽의 숙소인 것 같았다.

    “안치영이. 자네가 여긴 웬일이야.”

    백연은 담배를 물고 있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치영의 뜬금없는 등장에 의문을 표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통이 넓어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편안해 보였다. 치영은 경례를 할까 하다가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그래. 밥은 먹었나?”

    “예, 먹었…….”

    “인사는 그쯤으로 끝내.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아.”

    백한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춘란의 숙소 앞에 세워진 낮은 대문을 밀어 열었다.

    백연은 검지와 중지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고는 물 호스를 바닥에 대충 툭 던져 두었다.

    “네가 안 소위 데려온 모양이지? 애 좀 그만 괴롭히라고—.”

    “얘가 애로 보여? 이제부터 나랑 각인 나눈 사이에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건데, 애로 보이면 큰일이네. 내가 다 건드려도 애들은 안 건드리거든.”

    기백한이 백연의 말허리를 툭 자르며 피식 웃었다. 치영은 멀거니 서 있다가 백한의 그런 미소를 보고 당황했다.

    정도를 모르는 또라이 같이 굴기는 해도 제 쌍둥이인 백연에게는 나름으로 사람답게 굴지 않았었나? 게다가 백연은 치영의 상관이다. 상사 앞에서 그런 원색적인 말을 들은 터라 황당했다.

    그러나 뭐라 따지기에는 백한에게서 옅은 살기까지 느껴지고 있어 치영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일 뿐이었다.

    백연은 그런 백한을 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표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현저히 적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백한과 마주한 채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치영을 향해 물었다.

    “안 소위는 자네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이유라도 알고?”

    “저는…….”

    “씨팔, 누군 부사수 없어 봤나. 더럽게 챙기네. 연아, 그쯤 해라. 슬슬 짜증 나려고 하거든?”

    공용 가이딩실의 실장인 기백연 밑에서 일을 하니 치영은 백연의 부사수가 맞기는 하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백한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백연이 고개를 모로 꼰 채 대답했다.

    “뭐, 좋아. 네 말대로 안치영이는 내 부사수다. 곱게 대해. 예쁘다고 장난감 다리 부러트릴 나이는 지났다, 동생아.”

    백연은 그렇게 말한 뒤 물 호스의 밸브를 닫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동죽의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데, 누군가 강한 힘으로 턱을 잡아 고개를 휙 돌리게 만들었다.

    “기백연이랑 뭐 있어?”

    “…뭐가 있냐는 말씀이십니까?”

    잡힌 턱이 아파서 황당했다.

    ‘왜 또 저래.’

    저 좋을 때만 실실거리다가 한순간에 분위기가 변해 버리는 남자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 대단한 심기가 비틀린 것인지 이번에도 짐작 가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백한은 치영의 턱을 잡은 채 눈을 마주치고 한참을 쳐다보더니 흠, 하고 목울음을 냈다.

    “됐어. 꾸물거리지 말고 따라와. 여기 사는 새끼들이 다 한 번씩 너보고 군침 흘리기 전에.”

    누가 군침을 흘린다고……. 치영은 어느새 뒤돌아 앞장서 가 버리는 백한을 흘겨보았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에스퍼는 없다. 군침까지 흘릴 정도로 제 등급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관심보다는 호기심에 가깝겠지. 심드렁한 생각을 하는 동안, 백한은 벌써 성큼성큼 멀어지고 있었다.

    저택의 낮은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연면적 300평을 알차게 쓴 탓에 앞마당이 넓었다.

    뒤뜰도 마찬가지일까. 이런 곳에서 살면 텃밭 기르기도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내 텃밭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치영은 백한의 등에 제 이마를 살짝 부딪혔다. 그렇게 앞에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가지가지 해라. 너 은근히 덜렁거리더라?”

    “…왔으니까 제 짐 주시지 말입니다.”

    “짐을 왜 줘.”

    “저도 얼른 가서 집 알아보고—.”

    “못 가고 못 줘. 애 셋 정도 낳아 봐. 그다음에 보내 주든지 할 테니까.”

    치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난다는 듯이 인상을 확 구긴 치영의 표정을 바라보며 백한이 피식 웃었다.

    “우리 집 애새끼들 볼 준비 됐어?”

    “…….”

    “뭐 넌 얼굴도 예쁘니까 괜찮겠지.”

    백한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치영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곧이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예쁘다니? 지금 저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가?

    누가 공들여 빚어도 그렇게는 못 빚을 것처럼 생긴 주제에, 피부가 하얗고 깨끗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제 외모를 보고 예쁘다니. 모욕을 주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제 얼굴은 남자답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백한처럼 선이 유려하게 잘 빠진 편도 아니었다.

    그것은 치영이 2년 동안 착각에 빠져 살 동안에도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들어가.”

    그러나 백한은 그런 치영의 당황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의 등을 밀어 안쪽으로 향하게 했다.

    불이 들어온 저택의 현관은 주백색 등 덕에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치영은 이것이 이 집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따뜻함일 것이라는 생각했다.

    F등급의 가이드를 숙소로 데려오다니. 춘란의 팀원들이 이것을 도리어 모욕적이라고 느끼지만 않아도 다행이리라.

    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뒤편에서 저를 밀어 대는 힘 때문에 물러날 수가 없었다.

    결국 한숨 섞인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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