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음식들은 꽤 빨리 나왔다. 테이블을 꽉 채운 요리들을 바라보며 치영은 살짝 아연해졌다.
그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기백한이 말을 걸었다.
“비벼 줘야 먹니? 손이 많이 가네.”
의외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백한은 치영의 앞에 놓여 있던 그릇을 가져가 소스를 붓고 섞은 뒤 다시금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들이 식사를 하러 온 곳은 상업 지구인 누림동에 있는 중식당이었다.
부사관들이나 하급 병사들이 자주 가는 중식당은 누림동 초입에 있었고, 이곳은 누림동 안에 있긴 해도 의무 병동인 도담동과 더 가까운 고급 중식당이었다.
가게 초입에는 커다란 어항이 있었다. 몸이 둥글고 등지느러미가 없는 난금붕어가 어항의 유리 벽 끝을 향해 헤엄쳤다가 다시 몸을 돌려 돌아오고는 했다.
어항 안을 하염없이 보고 걸어도 난금붕어들은 단 한 마리도 치영과 눈을 마주해 주지 않았다. 하염없이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계속 걸었다.
서버들은 모두 검은색과 적색으로 된 개량 치파오를 입은 채 들어오는 치영을 향해 친절히 인사했다. 마주 인사를 하는 치영을 보고 백한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이런 데까지 와서 밥을 먹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치영은 백한이 안내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나오고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치영의 기다란 중국식 젓가락은 끝이 깨끗하기만 했다.
“얼른 먹어. 오이도 빼 줬잖아.”
편식하는 어린애 취급을 하길래 진심인가 싶어서 흘끗 쳐다보니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치영의 그릇에서 덜어 간 오이를 제 입에 넣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저는 먹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 간짜장을 비롯해, 기백한 몫의 짬뽕 곱빼기 두 그릇과 깐풍기 중자, 탕수육 대자 하나, 볶음밥 두 그릇이 차례대로 나와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치영은 그 방대한 양에 이미 기선을 제압당해 버렸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는다는 거야…….’
먹지도 않고 질린 치영을 두고 백한은 벌써 짬뽕 두 그릇과 볶음밥 한 그릇을 싹 비운 참이었다. 소리도 없이 해치운 탓에 이제 막 젓가락을 쥐고 달그락거리던 치영은 예의가 아닌 것도 잊은 채 빈 그릇을 멀거니 볼 수밖에 없었다.
에스퍼들은 원래 많이 먹는다. 눈앞의 남자는 고등급 이능력자니, 에너지 효율을 따져 보면 저만큼 먹는 게 결코 많이 먹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해도 스위스산 생수가 아니면 물비린내 난다고 마시지도 않을 것 같은 섬세한 이목구비와 짬뽕 한 그릇을 두 젓가락 만에 클리어 하는 실제 사이의 괴리감이 크지만 말이다.
“…제 몫까지 드십쇼. 전 안 먹습니다.”
“너 살 좀 더 쪄야 돼. 난 주무르는 맛이 있는 편을 더 좋아하거든.”
…누가 네 빌어먹을 취향 물어봤냐.
짜증이 나는데도 티가 안 나는 얼굴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이 많은 치영은 그냥 얼굴만 굳히고 멍하니 붉은색 중국집 식탁보만 바라보았다.
“깐쇼새우 안 시켜 줘서 삐졌니?”
“중령님이나 쳐드십쇼.”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흰색 자기 잔에 담긴 쟈스민 차가 그 식탁 위에 올려진 유일한 먹거리라는 듯이 치영은 차만 홀짝였다.
그런 치영에게 백한이 씩 웃어 보였다.
모란이 활짝 피어나기라도 하듯 어여쁜 미소였지만, 치영은 그것이 딱히 좋을 것이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남자가 예쁘게 웃으면 웃을수록 상황이 개 같아지는 것을 오래도록 겪어 왔기 때문이다.
기백한은 치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웅장한 고택의 처마 끝처럼 유려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냅킨으로 닦아 낸 백한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먹어.”
“…….”
“성질 돋우지 말고 먹어. 여기서 박히기 싫으면.”
…박히다니? 치영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살짝 의아한 기색을 품은 순간, 둥그런 테이블을 넘어 백한의 에스퍼 파장이 느껴졌다.
치영은 그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야말로 치영과 하는 스킨십을 싫어하면서 꼭 저렇게 말한다. 봐주고 있다는 투로…….
꼭 나이 어린 가이드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는 에스퍼처럼.
사실은 자신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손이 닿을 때마다 토악질을 하는 주제에.
그 기만과 모욕 사이에서 빨갛게 물들었던 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백한이 다시금 말했다.
“중국집에서 신방 차리기는 싫을 거 아니야. 나야 장소 가리는 새끼가 아니지만, 우리 자기는 고상해서 이런 데서 일 치는 거 싫어하잖아. 아냐? 형이 또 눈치가 존나 없어서 우리 자기 서운하게 만들었나?”
“…….”
모멸감에 입술을 말아 문 채로 대답하지 않고 있자 백한이 치영의 그릇을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릇부터 비우라고.”
백한은 하루 종일 이상하기만 했다.
모욕하는 건가 싶으면 또 챙겨 주고, 챙겨 주는 건가 헷갈릴 때면 진창으로 어깨를 밀어버릴 것처럼 굴었다.
…그래. 갖고 놀고 싶으시다는데 맞춰드려야지.
날 때부터 왕도를 걷는 이들이 있다. 태생이 귀하고 자람이 월등한 인간들. 밑을 내려다볼 줄 모르고, 비참이 존재하는 줄은 알아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사람을 말리는지 모르는.
그것이 기백한이 갖고 있는 성질이었다.
‘아이 이름은 안치영입니다.’라는 열한 글자와 함께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치영과는 억 광년의 차이를 지닌.
억 광년 위에 있는 이가 놀고 싶으시다는데, 바닥을 기는 비천한 제가 어떻게 거절을 일삼겠는가. 치영은 대충 뻗대다 타협하자는 생각을 했다.
객기를 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백한이 저를 예뻐서 봐주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 짐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을 때, 숙소 마당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줄 알았던 제 짐들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못 가진 것보다 가진 것이 많은 백한이 치영의 알량한 이삿짐 따위를 훔쳤을 리는 없고, 그 짧은 사이에 누가 가져다 버렸을 리도 없는데 홀랑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그게 궁금해?”
끊기지 않게 내오라고 이른 터라 홀 안으로 들어온 서버에게서 백짬뽕을 받아 든 백한이 피식 웃었다.
너도 참 너다, 하는 식의 웃음이었다.
치영은 그 웃음에 짜증이 불쑥 솟았다. 자기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치영은 요 며칠 사이에 백한이 자신에게 너무도 친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춘란대 숙소로 옮겨 놨어. 오늘부터 거기서 지낼 거니까.”
“중령님이요? 춘란 숙소에서 지내신단 소립니까?”
그럼 지금까지 거기 말고 어디서 지냈는데? 하고 묻기라도 하듯 멍한 표정을 짓는 치영을 보며 백한은 빈 잔에 쟈스민 차를 따라 주었다.
“넌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좋겠다. 얼른 먹으라고 세 번째 말했다. 네 번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면 어디 한번 해 보든지.”
그게 마지막 경고라는 걸 안 것은, 치영의 팔뚝 위로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가 방 안에 도포한 에스퍼 파장이 치영의 몸에 달라붙어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이는 듯해도, 기백한의 무섭고 짜증 나는 점은 제가 내뱉은 모든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실행에 옮긴다는 것에 있다.
치영은 사달이 나기 전에 정말로 입에 뭐라도 집어넣는 것이 낫겠다 싶어졌다.
말없이 깨작깨작 먹기 시작하는 치영의 앞접시 위로 탕수육이 올라왔다.
“…다 못 먹어요.”
“먹다 남겨. 내가 먹을 테니까.”
또 무람없이 말하는 것이 싫었다.
왜 친한 척이야……. 지가 언제부터 나랑 친했다고.
치영은 시선을 흐리며 그릇 위를 뒤적거렸다. 복 달아난다고 한바탕 핀잔을 들은 후에야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혼자 끼니를 때우는 것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위가 묵직해짐을 느꼈을 때였다.
다 먹지 못한 음식을 그대로 백한이 처리했는데도 불구하고 꽤 배가 불렀다.
…춘란대 숙소에서 지내라는 말이 진짜일까.
가이드가 팀의 숙소에서 지낸다는 것은 그 팀의 메인 가이드라는 말과 같다.
춘란의 메인 가이드라니. 서울‧경기 센터에 소속된 가이드들에게는 하나의 목표이자 꿈과 같은 말이다.
치영이 센터에 처음 왔던 때에는 모두 춘란의 메인 가이드로 치영이 임명될 줄 알았다. 치영 자신조차도 말이다.
지금에 와서는 감히 바라지 않는 일이 되어 버렸다. 소속 팀을 갖는 것도, 제가 가이드로서 누군가에게 제대로된 가이딩을 수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말이다.
숙소에서 지내라는 말이 자기방어에 가까웠던 포기를 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치영은 무감한 얼굴로 제 마음 위에 누름돌을 얹었다.
항상 최악을 대비해 왔지만 그런 준비조차도 모자랄 때가 많았다. 종업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서면서도 치영은 부러 묻지 않았다.
짐을 찾아서 당장 내일부터 잘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집에 가자.”
그래서 그 말이,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버거웠다. 자신은 한 번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집’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치영은 말없이 백한을 따라 걸었다. 지금 가는 집이 백한의 집은 될 수 있어도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음을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