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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3화 (13/114)
  • 13화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기 중령.”

    놀라 차에서 내린 손진화가 벌겋게 달아오른 안색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기백한은 그쪽에는 대답도 않고, 바닥에 쓰러진 치영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안치영, 꼬라지가 왜 이래.”

    유리창이 부서진 창밖으로 갑작스레 빼내는 바람에 삭신이 다 쑤셨다. 치영은 두통이 더욱 심해져 끙끙 앓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바닥을 구르며 아파하고 있는 치영을 보는 백한의 눈빛은 더없이 서늘하기만 했다. 저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데 작히나 한심한 것을 본다는 얼굴.

    치영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샌가부터 눈물도 잘 나오지 않는 터라, 두 눈은 뜨거워진 채로 그저 욱신거리기만 했다.

    “기 중령!”

    “일어나.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손진화의 에스퍼 파장은 백한의 것에 의해 쉽게 와해되었다.

    낙하산이긴 해도 젊은 나이에 작전처장까지 올라간 만큼 등급이 꽤 높은 에스퍼일 텐데, 백한이 파장을 풀자마자 익은 무 자르듯 손쉽게 갈라지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기백한은 여전히 치영을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치영은 억울했다. 자신은 그저 링거나 맞고 싶었을 뿐인데. 치영이 두통에 파리해진 얼굴로 비틀비틀 일어나는 것을 기백한은 내내 노려보았다.

    치영은 약간의 수치심과 그를 웃도는 억울함이 들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에스퍼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고 못살게 굴고는 했다.

    원망하는 얼굴로 백한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제 말이 무시당한 것에 열이 받은 건지 손진화의 기색이 날카로워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왜, 제 가이드랍시고 챙기겠다 이거야?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보지?”

    치영이 세상에 갓 나온 송아지처럼 비틀거리며 영 한심하게 구는 것을 팔짱 낀 채 지켜보고 있던 기백한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발에 차이는 쓰레기가 거슬렸었지, 하고 그제야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뻗어져 나가는 파장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곧 손진화의 목이라도 조를 듯 말이다.

    왠지 백한이 고개만을 돌린 채로 피식 웃고 있을 것 같은데 치영 쪽에서는 그것이 따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우리 처장님 혓바닥 긴 걸 깜빡하고 있었구나.”

    “자네 지금—!”

    “낮에는 장인 뒷구멍 헐도록 빨아, 밤에는 와이프 다리 사이에 대고 충성 맹세하느라 바쁜 양반이 얘한테는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 C등급 이하 가이드는 상종도 안 하시는 분이잖아, 우리 처장님.”

    “기 중령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야. 잘 생각해.”

    “뭘 또 잘 생각까지 해.”

    기백한이 기어코 몸을 돌려 손 처장을 마주했다. 심드렁한 어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낯이었다.

    “하극상은 씨발, 뭐 제대로 해 본 것도 없는데.”

    “뭐, 뭐……?”

    기백한이 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작은 편이 아닌 손진화 또한 기백한을 바라보려면 시선을 한 뼘 정도 위로 올려야만 했다.

    “어차피 하극상으로 처벌받을 거면 이유가 확실한 게 좋지 않겠냐, 이 말이야.”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가 꼭 그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상대의 목을 물어뜯는 것을 여흥으로 남겨 두는 것 같은 표정에, 손진화는 기백한과 시선을 마주한 상태로 몸을 떨어 댔다.

    기백한은 폭력적으로 부푼 기색을 낮출 생각이 없는 듯 뇌까렸다.

    “왜 집적거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저건 내 거야.”

    뒤에서 듣고 있던 치영은 황당했다.

    누가 네 거야. 계륵이 갖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여태껏 밖으로 빙빙 돌던 주제에.

    치영이 두통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계급이 낮은 기백한에게 휘둘리는 꼴은 들키기 싫은지 손진화가 발악하듯 말했다.

    “어, 언제는 다 죽어 가는 것도 내버려 두더니! 남이 관심 갖는 것도 싫은가 봐?!”

    그 말이 대충 정답이라는 듯이, 기백한이 씩 웃었다.

    “그래서 지금 다 죽어 가는 거 살리려고 왔잖아. 사이 다정한 거 안 보여?”

    그러더니 치영의 허리를 당겨 안아 들다시피 하더니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 있기도 버거웠던 상태에 안기듯 질질 끌려가게 된 치영이 저도 모르게 버둥거리려던 순간이었다.

    “근데 씨발, 그냥 가려니까 열이 좀 받네.”

    백한이 걸음을 멈추고 치영을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목을 두둑 꺾으며 손진화에게로 향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놀란 손진화가 “뭐, 뭐야.” 하며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지척까지 다가오자 기세에 겁을 먹은 것인지 방어 자세를 취하는 손 처장을 슥 지나친 기백한이 그대로 다리를 들어 군화 뒷발로 차의 보닛 부분을 쾅 내려쳤다.

    차가 삐용거리는 소리를 내며 비상등을 깜빡였다. 보닛은 그사이에 계곡이라도 생긴 듯이 아예 우그러져 버렸다.

    엔진이 아예 반파된 탓에 폐차가 불가피해 보였다.

    입을 떡 벌린 손진화를 두고, 기백한은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눈꼬리 부근이 살짝 둥글게 말리며 호선을 그리는 것이 무척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는 그대로 다시금 치영에게 다가와 옆구리에 붙도록 바짝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중령님…….”

    “닥치고 있자.”

    속이 울렁거리니 놓아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언뜻 올려다본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악다물고 있는 턱의 교근이 두드러져 있었다.

    …왜 저러는 거야, 또.

    치영은 한숨이 나왔다. 또 무엇 때문에 저 망할 성질이 뒤틀려 저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그냥 가이딩실 사람들이 권한 것처럼 링거를 맞고 한두 시간 정도 푹 쉬다 오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사치인가. 자신의 처지에는 한두 시간이나마 마음이 편한 것조차 사치인 건가 싶어졌다.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지니 백한이 그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저딴 걸 주워 먹고 싶었을까. 자기야, 나 아직 네 각인 에스퍼거든.”

    거기서는 저도 모르게 픽, 헛웃음이 나왔다.

    저는 다른 가이드들 상대로 온갖 염문은 다 뿌리고 지내 왔던 주제에 제 것일 줄 알았던 계륵이 한눈을 파니 영 마뜩잖은가 보지?

    그 비웃음을 목격한 백한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의료 병동 입구에 치영을 내려 두었다.

    “픽픽 비웃기나 하고. 많이 컸다?”

    “…여기는 왜 오셨던 건데요.”

    일단 그의 주장대로 치영은 백한의 가이드기에 왜 의료 병동에 온 것인지는 확인해야 했다.

    각인을 맺은 에스퍼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니까.

    백한은 그런 치영을 두고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요.”

    “너야말로 왜 이렇게 골골거려.”

    무슨 상관.

    치영은 속으로만 이죽거린 뒤 어깨를 으쓱였다. 말해 주기 싫다는 태도에 백한의 한쪽 눈썹이 한 번 더 치솟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백한과 닿자마자 뇌에 심장이 옮겨 붙은 듯 욱신거리며 아파 오던 두통이 가라앉았다.

    두통이 멎어 들며 멍한 느낌이 가시지 않자, 치영은 가만히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는 할 얘기가 더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의 표정을 덧씌운 채로.

    그걸 내려다보던 백한이 치영의 뺨을 툭 건드렸다. 버릇없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이다.

    “가서 링거 맞고 가.”

    “알아서 할게요.”

    “진짜 말 좀 그만 예쁘게 해라. 콱 깨물어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짜증이 났는지 수려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백한이 말했다. 치영으로서는 우스운 일이었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 몇 달 사이에 또 무슨 변덕이 생긴 건지 걱정해 주는 척하는 게 수상했다.

    기백한은 안치영과의 각인 이후로 한 번도 치영에게 다정해 본 적이 없다.

    타인이라도 할 수 있는 안부 인사마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굴지 않았던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저더러 링거를 맞으라고 참견하는 건지 모르겠다. 치영은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정말 예뻐요?”

    “…뭐?”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요.”

    백한이 치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색소가 옅어 잘 닦아 놓은 갈색의 토르말린 같다는 평을 듣던 눈동자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채도가 낮은 느낌을 주었다.

    그건 다소 기묘한 눈빛이었는데, 치영으로서는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해 뭔가 더 알기를 포기한 터라, 치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뇌까릴 수 있었다.

    “더 예쁘게 보여서 확 죽어 버리고 싶어요.”

    “…이게 진짜.”

    남자가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작작 까불라는 식이었다.

    딱히 무섭지도 않았다. 치영에게 있어서 기백한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고는 했으니까.

    넓게는 일신상의 안위가, 좁게는 소소한 행복들이 늘 저 남자에 의해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치영이 정말로 기백한을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저 저를 대신 죽여 달라는 소리만 내뱉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러면 중령님도 저를 주워 온 후회는 덜 하시겠죠.”

    네가 나의 유일한 구원자였으니까.

    정작 제 모든 것이 그로 인해 망해 버렸다고 한들,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치영은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려 병동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기백한이 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고 말이다.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가 저를 아직까지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권태와 고통 속에 매몰된 치영은 쉽게 피로해졌고, 오늘은 그저 링거나 맞은 뒤 잠들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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