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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2화 (12/114)

12화

“얘 왜 이렇게 매가리가 없냐?”

공용 가이딩실 치프 임상현이 눈 밑이 푹 꺼지고 안색은 허옇게 질린 치영을 보고 한마디 했다.

치영은 대답할 기운이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인사에 화답하려 노력하는 치영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치프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안색이 안 좋은 것은 저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밤새 가이딩을 하고 오후 반차를 낸 뒤 가이딩실에서 링거를 맞으려고 했던 계획은 치영의 출근과 동시에 터진 폭발 사고 때문에 물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에스퍼들이 속속들이 실려 와 응급 가이딩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링거 맞으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새벽 내내 퍼질러 자는 하마 새끼에게 방사 가이딩을 쏟아부은 탓에 골골거리는 몸을 하고도 실려 온 에스퍼들을 가이딩 해야 했던 치영은 체내 가이딩 수치가 현저하게 떨어져 가벼운 오한을 앓고 있었다.

“안 소위님 아까부터 저렇던데, 쉬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간호사로 일하던 중 가이드로 발현되어 센터에 귀속된 김희정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센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치영을 싫어해도 공용 가이딩실 사람들은 그게 조금 덜했다.

희정처럼 등급은 되는데 너무 늦게 발현하여 뒷배가 없는 가이드들이나 사고를 치고 가이딩실 치프로 좌천된 임상현, 치영처럼 가이드 등급이 낮은 석진혁은 각자의 처지가 좋지 못한 만큼 치영을 내몰거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돈도 써 본 놈이 쓸 줄 안다고, 치영에게는 누군가의 염려를 받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라 이런 상황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습니다. 점심에 링거 맞으려고 합니다.”

희멀건 안색으로 치영이 대답했다.

오늘은 9시 정각부터 주무관들과 의료 인력들, 각 의무 가이드의 치프들이 주간 회의를 하는 날이라 치프인 임상현의 참석은 당연하고, 희정마저 서기관으로 동행해야 했다.

석진혁조차 오늘 연차였기에 아침부터 열린 전쟁통을 치영 혼자 견뎌야 했다.

“미련퉁아. 힘들면 의료 병동으로 보냈어야지, 그걸 다 네가 가이딩 하고 앉아 있냐?”

“몇 안 돼서…….”

치영은 딱히 표정이랄 것도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답인지 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인지 모를 태도에 상현이 쯧쯧, 혀를 찼다.

“희정아, 얘 카트에 태워서 의무 병동 보내.”

“그냥 점심에 링거 정도만 맞으면…….”

“아, 링거를 여기서 어떻게 놔 줘! 처방받아 와야지! 가서 링거를 맞든 말든 하라니까?”

치영의 중얼거림에 상현이 얼굴을 구겼다. 치프가 저런 얼굴을 할 때는 치영으로서도 더 반항할 수가 없다.

작정하고 저를 걱정하는 사람에 대한 면역이 없는 터라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것조차 모깃소리인 양 작기만 했다.

결국 치영은 희정에 의해 끌려 나가 카트에 태워졌다.

“안 소위님 가서 푹 쉬다가 오세요. 오후 업무는 저랑 치프님으로도 충분해요.”

“…행운목에 물도 줘야 하는데.”

“어휴, 제가 줄게요. 하루 물 안 준다고 행운목이 죽나. 근데 소위님은 지금 당장 죽을 것 같다니까요?”

희정이 답답한 얼굴로 치영을 카트에 떠밀었다. 저보다 가느다란 사람인데 미는 힘이 대단했다.

결국 더 반항하지 못하고 얌전히 올라타 희정이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드는 것에 화답하듯 마주 흔들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이 학원 차에 태워져 엄마의 배웅이라도 받는 듯한 모양새였다.

희정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천천히 손을 흔들던 치영은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앞 좌석에 이마를 쾅 박았다.

박으려고 박은 것은 아니고 진이 다 빠져 그렇게 됐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는지 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심하던 두통이 더 심해져 버렸다.

“아으…….”

치영은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앓았다. 간혹 이렇게 아프기는 했다. 두통이 일어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고 땅이 덮치듯 올라오면, 그대로 기절했다가 일어나는 일이 제법 있었다.

이악 부대에서 밥을 나를 때부터 시작된 두통이다.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것을, 아직 저를 거부하지 않은 백한의 가이드로 살았던 2년 동안 치료 이능을 갖고 있던 에스퍼가 진료를 봐 주었으나, 그도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MRI를 찍어 보겠냐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예약 날짜를 잡아 둔 날 백한이 귀국했다.

그 이후로는 뭐, 알다시피 잡아 둔 예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치영의 수난 시대가 시작되었으니까.

오늘은 딱히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새벽 내내 가이딩을 한 데다가 아침에 몰려온 에스퍼들까지 책임지느라 체내 가이딩 양이 현저히 떨어져서 그럴 것이다.

—이번 정거장은 의무 병동입니다.

안내 방송에 겨우 벨을 누른 치영이 천천히 카트에서 내렸다.

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출발한 카트 때문에 경계석에 끼었던 발을 빼내느라, 치영은 그 와중에 땅바닥을 구르기까지 했다.

주위를 지나가던 가이드와 에스퍼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래, 떠들어라. 내가 전두환도 아닌데 넘어지면 좀 걱정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치영은 두통 속에서 멍한 원망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 발 한 발마다 골이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 짓눌렀다.

눈 뒤쪽까지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의무 병동 주제에 왜 언덕에 있고 지랄이야. 아픈 사람은 오르다 콱 뒈져 버리라는 건가.

치영은 저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펴지도 못한 채 그저 걸었다.

그러나 정작 의무 병동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누군가 제 앞을 막고 비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누구야.”

“…아, 안녕하십니까. 작전처장님…….”

치영은 저를 향해 씩 웃는 남자를 향해 겨우 경례를 올렸다.

식은땀에 젖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치영의 상태를 보고도 남자는 쉬어, 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않았다.

덕분에 치영은 두통으로 좁아 든 시야에도 경례를 내리지 못한 채 빳빳이 서 있어야 했다.

“우리 안 소위 아니야. 어디 가는 길이었어?”

“의무 병동에 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그럼 급한 일은 없네?”

남자는 그대로 치영의 손목을 끌어 제 차에 태웠다.

센터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군용 험비가 아닌 독일제 세단이었다. 남자의 개인 차량인 듯했다.

두통이 심해 끌려가듯 태워진 터라 차 안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향수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다.

분명 에스퍼 향수일 텐데 기백한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두통이 너무 심해 오는 헛구역질인지, 아니면 향수 냄새에 속이 안 좋은 것인지 메슥거려 참기가 힘들었다.

치영이 구토감을 참는 동안, 남자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또 씩 웃었다. 기분이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안 소위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거 생각해 봤어?”

“…네.”

남자의 이름은 손진화. 작전처장으로 센터장의 사위라고 했던 것 같다.

치영은 매끄러운 외제차의 대시보드에 이질적으로 놓여 있는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정복을 입은 남자가 싱긋 웃고 있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래? 그럼 대답은?”

“네, 근데 그 임무 성공하면 제 제대는…….”

“그거야 내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거니까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말고.”

남자가 다시 웃었다. 그에게서 에스퍼 파장이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를 공격하거나 제 가이딩에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왜 파장을 내보낸단 말인가. 치영은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가 한 제안은 간단했다. 임무를 줄 테니 완수하면 섭섭지 않게 대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치영은 진급도, 특별수당도 필요 없다며 제대를 요구했다.

어떤 임무인지 아직 듣지 못했지만 작전국에서 일개 가이드인 저에게 직접 내리는 임무이니만큼 보안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파장이 점점 더 질척거리고 농밀해진 것이 느껴졌다. 치영은 절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아, 근데 우리 안 소위.”

남자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치영은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 복강에 손을 넣어 내장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네. 난 안 소위가 소문이랑은 조금 다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치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소름이 끼쳐 손을 쳐 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파장이 사납게 치영을 휘저었다. 어디 얻어먹을 것 없나 싶어 땅을 파는 들개와 닮아 있었다.

“근데 안 소위 향수도 쓰나?”

“헉, 흐으—!”

이제는 아예 눈이 까뒤집힐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덜덜 떠는 치영의 등줄기를 쓸어 주며 남자가 물었다.

치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선팅지로 코팅되어 있던 차 유리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파삭, 하고 부서진 유리를 그대로 잡아 뜯어낸 손이 자비 없이 치영의 멱살을 잡아 뚫린 차창 밖으로 쑥 빼냈다.

치영의 등이 부서진 유리에 마구 스쳤다. 오한이 들어 덜덜 떨고 있는 치영에게 희정이 두꺼운 옷을 입혀 준 덕분에 등을 긁힌 것은 아니었지만, 유리가 그르륵 소리를 내며 갈리는 것이 소름 끼쳤다.

“이게 무슨—!”

“간만입니다, 작전처장님. 반가워서 창문 좀 두들긴다는 게 유리를 부쉈네. 청구하시든지.”

싱긋 웃고 있는 것은, 기백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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