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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1화 (11/114)

11화

밤새 가이딩을 하느라 지쳤는지 안치영은 안 그래도 허연 얼굴이 더 허옇게 질린 채 출근했다.

오늘 하루 쉬라는 백한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집을 나서 버렸다.

치영은 백한의 성질만 더러운 줄 알지만, 본인도 제법 성격이 개 같았다. 잘못 건들면 물릴 때도 있었다.

백한은 사나운 개를 달래는 마음으로 아무 말 않고 치영을 보내 주었다.

그러고는 치영의 집에 있던 후드 집업 중 가장 큰 것을 뒤집어쓴 채 숙소로 돌아왔다.

춘란의 숙소는 숙소 지구인 난슬동의 후미에 있다.

그해의 건축상을 받은 건축가가 지은 대지 300평, 건평 110평의 현대식 주택은 금속성과 필리핀산 현무암으로 외장을 시공한 3층짜리의 건물로, 총 2대 주차가 가능한 차고가 따로 있었다.

팀의 전력에 따라 숙소로 지급되는 주택에는 크기가 차이 나는데, 춘란의 숙소인 3층짜리 주택은 다섯 명의 에스퍼가 생활하기에 충분히 넉넉했다.

꽤 육중한 철제 현관문을 밀고 들어간 백한을 향해, 집에 있던 허인나가 씩 웃으며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은 밤 보내셨나 봅니다? 얼굴이 반질반질하시지 말입니다.”

“인나야, 성희롱하는 거야? 부사수한테 성희롱은 처음 당해 봐서 흥분되는데.”

“웩.”

인나는 기어코 토하는 시늉을 했다. 1층 거실에 내려와 있던 대대원들이 또 시작이다, 하는 얼굴로 백한을 바라보았다.

백한은 무표정으로 “어떠케용. 하니 떨려용.” 하며 어깨를 살살 흔들거렸다.

널따란 어깨가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흔들리는 것을 본 대대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썩어 들어갔다.

“하니……? 지금 대대장님이 본인한테 하니라고 한 거 맞어?”

“애칭이라십니다. 지금도 본가 가면 하니라고 불리시는 것 같던데요.”

“씹, 우웩.”

속이 안 좋다는 듯, 대대원 하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백한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방금 욕한 새끼 연병장 백 바퀴.”

“달콤하게 생긴 대대장님의 미모에 대한 감탄이었습니다. 하니라니, 정말 어울리십니다.”

살기 위한 아부를 끝마친 대대원들은 속으로 ‘저 지독한 새끼에게 애칭까지 있다니.’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욕 한마디에 타이어 여덟 개를 짊어지고 연병장을 백 바퀴씩 도는 짓거리는 굳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 기백한이라는 인간 말종은 가정의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란 주제에 왜 이다지도 비뚤어진 인간인가에 대해서.

이라크 파병 당시, 기백한의 별명은 사르잔이었다.

그쪽 말로 사형 집행인이라는 뜻인데, 검은 터번으로 얼굴을 가리고 공중에서 낙하산도 없이 뚝 떨어져 진지 두세 개를 단번에 괴멸시키는 에스퍼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하도 서걱서걱 테러범들의 머리를 자르고 다니니, 테러범들이 이제 막 발현한 어린 에스퍼를 방패 삼아 앞세운 적이 있다.

라이플을 쥔 손을 덜덜 떨어 대는 어린 에스퍼를 앞에 두고 기백한은 이런 말을 했다.

“개호로잡놈들 다 잡아 족치라고 니네 신이 나 보낸 거잖아.”

어린 에스퍼는 기백한의 등 뒤에서부터 부는 모래 파도에 압도되어 실금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노도가 향한 곳은 소년병의 뒤편이었다.

테러범들은 그렇게 기백한의 이능이 일으킨 모래 파도에 깔려 폐에 모래가 꽉 찬 채로 질식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한 어린 에스퍼가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기백한은 두 번의 자비 없이 그 에스퍼의 목을 꺾어 버렸다.

그가 정말로 좋은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인간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자비가 없는 것일까.

‘신의 뜻대로.’라 외치며 죽어 간 소년병의 시체를 툭 던지고는 묻어 주지도 않았다. 결국에는 대원들이 직접 구덩이를 파 소년병의 시체를 묻고 간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

백한은 그들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영 쓸모없는 짓거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그늘에 누워 버렸다. 그 후에는 터번을 얼굴 위에 올린 채 그 간단하고도 입맛 쓴 장례가 끝날 동안 낮잠을 잤다.

그런 인간을 사령관으로 모시는 탓에 춘란의 모토 역시 ‘알아서 살자.’가 되어 버렸다.

군부의 가장 강한 전차보다 더 강한 에스퍼. 최전선에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한 동시에, 저 인간이 내 목숨까지 구원해 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

그것이 춘란대의 대장 기백한에 대한 대원들의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기백한은 오늘도 멀끔한 얼굴로 또라이 같은 말을 지껄였다.

“간밤에 이 대대장을 두고 가이드에게 토낀 새끼들 때문에 이 대대장의 마음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대대장은 귀관들의 충성심이 습자지보다 얇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각심을 갖기 위해 대원들은 오늘부터 개인적으로 가이딩 받는 것을 일시 중단하도록 하겠다.”

“왜 저래. 자기 가이딩 못 받는다고 남까지…….”

“다 들린다.”

대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기백한은 냉엄한 얼굴로 또라이 같은 소리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제는 하다 하다 개인으로 페어를 맺은 가이드에게 가이딩도 못 받게 하다니.

“아, 장난하십니까? 그러면 팀 가이드를 임명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우리도 동죽대처럼 상시 가이딩 받고 싶습니다.”

“맞습니다. 동죽대는 기백연 소령님이 직접 가이딩 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도 사령관을 바꾸고 싶습니다. 기백연 소령님으로 바꿔 주시지 말입니다!”

“옳습니다!”

대대원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기실 춘란대보다 임무 배정 등급이 현저히 낮은 팀들도 팀 가이드가 배정되어 있었다. 동죽대와 추국대 역시 팀 가이드가 따로 있었다.

기백연 소령이 동죽대의 소대장이자 가이드를 맡고 있고, 추국대에는 김이석 소령의 페어 가이드인 이승균 대위가 팀 가이드를 맡고 있다.

춘란은 나머지 중대들 중에서 최상위 전투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팀 가이드가 없었다.

그럴 만한 전투 가이드가 없다는 게 걸리기는 하지만, 대충 가이드 등급 높고 짬바가 있는 가이드를 데려다가 팀 가이드로 삼으면 될 일이기도 했다.

춘란에 팀 가이드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가이드는 넘쳐 나니 말이다.

보통 사령관의 페어나 각인 상대인 가이드가 팀 가이드 자리를 맡는데, 문제는 그 가이드가 다른 팀들보다 대원들의 이능 등급이 월등히 높은 춘란을 상대할 여력이 없는 사탕 껍질, 즉 F등급이라는 것에 있다.

“뭐 그다지 아끼시는 편도 아니지만, 어쨌든 센터에는 …안 소위를 아껴서 차마 전투에 끌고 갈 수 없다고 둘러대시면 될 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다른 가이드 지원받는다고 한마디만 하셔도, 지원 서류가 대대장님 키까지 쌓이지 말입니다.”

대대원들은 하나같이 백한이 이번에야말로 각인을 풀고 안치영을 내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파병에서 다른 나라 용병들에게 각인을 해제하는 법을 묻고 다니지 않았나.

그들은 답을 알고 있는 듯했고, 몇 마디 주고받던 백한의 얼굴은 냉엄해 보이기만 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지었을 때, 살아온 햇수가 스무 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병의 목이 꺾였다.

그렇게 싫어하고 혐오하는 가이드에게 다를 것이 있겠는가.

솔직히 치영이 남자임을 안 뒤, 5년 동안 봐준 것만 해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 소위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까 언감생심 되지도 않는 마음을 먹은 다른 가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양이던데.”

소총을 분해해 안쪽에 철 가루를 닦아 내던 박형인 대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백한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더 해 보라는 투였다. 저렇게 기회 줄 때 다물어야 뒤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대원들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막내를 제외하고 말이다.

“대대장님도 본인이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라고 딱히 생각은 안 하시는 것 같은…….”

허인나가 막내 이인교의 입을 슬쩍 막았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고로, 그 한마디에 춘란의 팀 숙소에는 정적이 몰아쳤다. 기백한이 에스퍼 파장을 아낌없이 풀었기 때문이다.

에스퍼들은 저절로 척추를 기립했다. 살갗에 와닿는 파장이 더없이 날카로웠다. 자기방어를 위해 저절로 올라가려는 살기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대원들은 오늘부터 막내를 고문관에 임명하기로 조용히 합의했다.

“좋아, 귀관들이 그렇게 숙소에 엄마를 모시고 싶다니 이 파파가 힘내 보도록 하겠다.”

촘촘히 짜인 에스퍼 파장이 살갗을 찢을 듯 난폭하게 구는 와중에도, 백한은 농담을 하며 유려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웃음이 참 아름답기는 해서 대대원들은 떨떠름해졌다. 파장으로 온몸을 옥죄듯 압박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입에서 나오는 말만 들으면 대원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대장이 아닌가.

백한은 일이 해결됐다는 듯 상쾌하게 웃으며 제 방이 있는 3층으로 뛰어 올라갔고, 1층에 남은 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러 댔다.

“또 개짓거리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에요, 우리 대대장님?”

“뭐 그거 안다고 우리가 말릴 수나 있나. 무슨 생각이신지 지켜봐야지.”

“우리 대대장님이 생각이란 것도 하십니까?”

저 멀리 층계참에서 “다 들린다고 했다.” 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서야, 에스퍼들은 험담을 중지한 채 각자의 할 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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