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자고 가신다고요?”
“표정이 왜 그래. 싫어?”
백한은 치영을 비식, 비웃었다.
감히 저를 거절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1인분만 포장해 온 해장국을 안 먹겠다는 치영에게 덜어 먹이더니, 제집인 양 화장실 찬장을 뒤져 댔다.
반쯤 질린 얼굴로 아무 소리 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기어코 새 칫솔을 찾아내 양치까지 하고 나온다.
뻔뻔한 새끼. 치영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백한에게 치영의 숙소가 그만큼 익숙하기는 했다.
“야, 너는 월급도 받는 애가 왜 이렇게 궁상을 떠냐. 침대 이거 낡은 거 봐라. 형이 하나 사 줘?”
“…….”
“말을 씹네, 우리 자기가.”
“중령님 숙소 가면 새 침대 있으실 거 아닙니까. 왜 굳이 쓰레기 침대에서 자겠다고 야단입니까.”
“쓰레기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야박하게 굴지 말자. 간만에 봤으니까 회포도 풀어야지, 우리 자기랑.”
자기는 무슨. 입을 열 때마다 기만이다. 치영은 속이 허했다. 안 먹겠다는 해장국을 백한이 억지로 먹인 탓에 더부룩할 정도로 배가 부른데도 말이다.
“야, 자기야. 내가 내 속옷 좀 버리지 말라고 했지.”
“저기 있잖아요.”
“어디.”
“침대 옆 콘솔박스요.”
“그걸 왜 침대 옆에 둬. 형 팬티로 무슨 짓 하려고? 수상하다, 너.”
“진짜 미친 새끼 아냐…….”
“욕하는 거 다 들려요.”
백한은 낄낄 웃으며 익숙하게 침실 콘솔의 서랍에서 제 드로즈를 찾아 꺼낸 뒤 욕실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가이드 전용 숙소. 가이드들이 팀을 배정받기 전에 하루 이틀 정도 겨우 묵는 숙소동.
그나마도 팀에서 조금이나마 배려를 받는 가이드들은 팀원들끼리 돈을 모아 센터 밖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했다. 가이드 전용 숙소동의 보안이 취약하다는 이유였다.
그 외딴곳에서 혼자 사는 치영의 집은 백한만이 알고 있다.
그 집에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열어야 무엇을 꺼낼 수 있는지. 치영을 제외하면 기백한만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한은 아직도 치영과 자신 사이의 각인을 저주하고 있다. 그런데도 파견이 끝나 귀국하면 이렇게 치영을 찾아온다.
…꼭 권태기가 심한데도 그를 못 본 척하고 출장이 끝나면 억지로 같은 현관에 들어서는 부부 같기도 했다.
치영 역시 비소가 튀어나왔다. 백한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런 거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부자리부터 신경 쓰고 있는 저 자신을 향해.
정말 자고 갈 건지 샤워를 하더니 수건까지 달란다. 치영은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제일 보송하게 잘 마른 수건을 건넸다.
젖은 머리를 털고 나온 하마 새끼가 또 한 번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침에 쏟은 우유를 대충 닦은 걸레라도 던져 주는 건데.
“접촉은 실패했잖아. 자면서 방사 가이딩이라도 해 줘.”
모자라는 네가 내 가이드라서, 그게 참을 수 없어 토악질이 나왔으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냐는 듯한 말투였다.
치영은 수건이 아까워졌다. 가슴이 상처로 선득해지는 것보다 말종에게 사용된 수건이 아깝다는 감정이 먼저였다.
자신도 슬슬 이 관계 자체에 질려 가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잘못은 늘 저 개새끼가 먼저 했다. 자면서 내내 방사 가이딩을 해 달라니. 입이 잘생기면 개소리를 함부로 지껄여도 괜찮은 줄 아는 새끼…….
치영은 속으로 신랄하게 욕을 퍼부었다.
그가 한 말은 에스퍼에게 수여할 수 있는 가이딩의 양이 현저하게 적은 제 가이드에게 하기에는 너무 무례한 요구였다.
밤새 가이딩을 방사하다 보면 치영은 동이 트기도 전에 너무 많이 빠져나간 가이딩에 의해 체내 가이딩 체계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두통을 동반하다가 종내에는 심장이 멎을 수도 있다.
그걸 에스퍼 가이드 특수군의 중령 자리까지 오른 저 인간이 모를 리도 없고.
말종 하마 새끼.
치영은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백한에게 새로 빤 베갯잇을 씌운 베개를 던졌다.
잘 말린 수건을 쓰게 한 걸 아까워하던 것도 까먹고 새 베갯잇을 꺼내 주다니.
던지자마자 후회했지만, 그나마도 베개를 받아 든 백한이 “오, 땡큐.” 하며 윙크를 한 뒤의 일이었다.
백한은 흥얼거리며 민소매도 벗어 던진 채로 치영의 침대로 올라갔다. 치영은 침대 아래 얇은 요를 깔고 등을 돌려 누웠다가,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수상하여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옷 입고 못 자는데. 알잖아.”
백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바지를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다행히 속옷을 벗을 생각까지는 없는지 드로즈는 입은 채였다.
옛 문명의 군신 같은 몸이 드러났다. 금세 반라가 된 기백한이 깍지 낀 손으로 팔베개를 하며 휘파람을 분다.
가지가지 한다…….
치영이 짜증을 내며 불을 끄려는데 백한이 뒤에서 시비를 걸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해라.”
“…하려고 하잖아요, 지금.”
불을 끄고 아직 눕기도 전인데 방사 가이딩을 빨리 시작하라며 재촉이다. 치영은 한숨과 함께 가이딩을 시작했다.
밤새 가이딩을 하고 나면 내일 아침에 죽도록 피곤하겠지만, 오전 반차를 쓰고 공용 가이딩실에서 링거를 맞으면 될 일이다.
…물론 그 전에 기절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른 가이드들은 방사 가이딩을 해도 느낌 따위는 없다던데, 치영은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손끝부터 저릿해지기 때문이다.
접촉 가이딩으로 넘어가면 그 느낌은 더 강해진다. 맞닿은 면적에서부터 정전기가 오르는 느낌.
씻고 나와 따끈해진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는데,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기분 때문에 예민해진 몸의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백한이 가이딩에 나른해진 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듯 움직였다.
작게 찌꺽거리는 침대의 소음이 들렸다. 치영이 올라가 잘 때는 단 한 번도 소음이 들리지 않았었는데, 원체 뼈대가 두꺼운 데다가 신장이 커 무게가 나가는 만큼 침대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내 침대…….’
멀쩡한 치영의 침대를 두고 쓰레기 같다고 했던 것도 아마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어 그랬나 보다.
‘또라인가. 그럼 본인 숙소 가서 자면 되잖아.’
한숨이 흘러나왔다. 딱딱한 바닥에 몸이 배겼다. 멀쩡한 침대를 빼앗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자신은 기백한에게 네가 바닥에서 자라 말할 용기가 없을까.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닥에서 재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적지근한 제 사랑이 역겨웠다. 기백한도 그걸 알고 제게 저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치영의 사랑은 그 상대와 치영 본인 둘 모두에게 혐오받고 있었다.
“야, 집중 안 하지.”
침대에서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가이딩에 녹진하게 풀어져 꺼끌해진 목소리였다.
양가감정이 들었다. 다른 가이드들이 제 에스퍼에게 받는 취급에 비교하면 너무도 형편없이 침대 밑에 엎드려 가이딩을 하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그가 제 가이딩을 받고 있다는 그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
전자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모멸감이지만 후자는 대체 뭘까. 저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치영은 두 눈을 감고 다시금 가이딩에 집중했다.
기백한이 치영의 그런 속마음은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아, 왜 다른 애들한테는 이 맛이 안 날까.”
“…….”
“다 염병할 각인에 묶여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다른 것들은 이렇게 맛있지 않단 말이지.”
치영이 무슨 마음으로 방사 가이딩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기백한은 제멋대로 지껄였다.
치영의 두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꼭 그런 말까지 하셔야 합니까.”
“어, 어? 입 다물자. 네 목소리 들으면 또 헛구역질 나온다니까.”
그 모욕적인 말을, 꼭 뜨거운 걸 만지면 위험하다는 듯 당연하게 내뱉고 있다. 모멸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제 가이딩을 받고 그런 행동이나 하는 주제에 저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다니.
처음 만났을 때는 성대를 다쳐 목소리가 남자치고 얇은 편이었다. 그가 없는 2년 동안 센터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치영의 목소리는 치료를 거듭하여 서서히 제 소리를 찾게 되었다.
제가 소리를 내면 남자인 것이 여실히 티가 나니 흥을 깨지 말라는 뜻이겠지.
치영이 모멸감을 견디고 있는 사이, 방 안에는 기백한의 숨소리가 가득 찼다.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죽고 싶어졌다.
어둠 속에서, 저에게 한 톨도 닿지 않은 채로 가이딩을 방사하게 하고, 백한은 지금…….
수치심이 밀려왔다. 제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것도 예전이다.
이제는 그저 모든 파도들이 저를 훑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는데. 너는 또 한 번…….
치영은 그대로 털썩 누워 버렸다. 귀를 막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뜨고 쉼 없이 눈물을 흘려 댔다.
방 밖을 나가면 될 일 아니냐고? 치영도 생각 같아서는 욕실에서 물이라도 받아 저 개새끼의 얼굴 위로 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에 그저 조용히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울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치영을 넘어간 백한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욕실 빛에 반사된 백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치영은 계속해서 울었다.
“사람 넘어 다니는 거 아니랬는데……. 끝까지 나쁜 새끼…….”
치영은 중얼거리며 표정 없이 제 뺨을 닦았다. 꽤 많이 운 터라 손이 눈물로 질척했다.
제 가이딩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치영은 모든 것에 ‘양’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지난 몇 년간, 안치영은 기백한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길바닥에 뿌리고 다녔다.
상대가 받아 주지 않으니 쓸모없이 낭비했다.
하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뿌리고, 하루는 출근하는 길에 뿌렸다.
그를 만나러 다녀오는 길에 뿌리고, 그가 저를 발견한 길 위에 뿌렸다.
뿌리고, 버리고, 쏟고, 태우고, 말리고.
제가 아무리 기백한을 사랑해도 마르지 않은 샘처럼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기다려야 한다.
뿌리고 버리고 쏟고 태우고 말리고 종내에는 바닥을 보인 사랑이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
치영은 어둠에 휩싸인 벽을 보고 마저 울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지만,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곧이어, 바닥을 보일 것이다. 이 눈물도, 사랑도.
이 세상에 총량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없고, 자신이 기백한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그러할 테니까.
치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