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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9화 (9/114)
  • 9화

    주인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아 객은 그대로 온몸에 부슬비처럼 내리는 가이딩을 맞으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금을 갠 물이 저분자 상태로 몸 위에 내리는 기분이었다. 백한은 이를 아득 물었다.

    아직도, 아직도 이 가이딩만 받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딱히 끌리지도 않은 것에 욕구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백한의 몸은 백한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욕구에 불을 지폈다.

    그런 느낌이 심해지다 보면 나중에 가서는 그게 혐오감으로 변한다.

    기백한은 훈련생도 시절에도 남자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 줄 때면 그대로 실신해 버리고는 했다.

    생도 때 멋대로 손을 잡은 가이드의 관자놀이에 주먹을 날렸다가 상대의 두개골이 함몰되는 바람에 영창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가 그렇게 유난인데도 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 현 군부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다.

    모난 것은 망치로 때려 평평하게, 푹 들어가 있는 것은 잡아당겨 기준 위로.

    군부가 원하는 것은 뛰어난 한 명이 아닌 몰개성한 수만 명의 군사들이다. 그 평균치를 거부한 존재. 기백한은 그 자체만으로도 스탤스 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 다섯 기와 다름이 없었다.

    대당 3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전투기 다섯 대의 값어치를 하는 에스퍼인 만큼, 센터도 그의 편식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가 남성 가이드에게는 가이딩을 받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 것이다.

    안치영과의 사고 같은 각인 이후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것’은 조금 나은 편이다. 살갗이 닿는다고 해서 상대를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의 혐오감은 들지 않으니까. 대신…….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치영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맨발로 현관에 서 있던 치영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불시에 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마른 몸이었다. …쯧, 또 이렇게 삐쩍 곯아서는.

    백한의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다. 찰칵 하고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에 치영은 숨을 집어삼켰다.

    “윽……!”

    치영은 그대로 벽으로 밀쳐졌다. 뺨이 벽에 짓눌렸다. 뒤에서 그를 포박하듯이 치영의 팔을 잡아챈 백한이 반항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등 뒤에서 짐승이 목을 긁는 소리가 났다. 치영은 커다란 짐승이 뒤에서부터 저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까지 짐승의 것과 같이 낮게 잠겨 있었다.

    “예뻐 죽겠어. 내가 안 소위 얼굴 보면 착륙장에서 바로 토라도 갈길까 봐 얼굴도 안 비쳤던 거잖아, 그치?”

    “…아픕니다.”

    “자기야, 자꾸 그렇게 짜릿한 말만 할래?”

    치영의 목덜미에 더운 숨이 닿았다. 옅은 술 냄새가 났다. 많이 마셨을까? 많이 마셨겠지.

    또 괴물답게 궤짝으로 마시고도, 고작 이 정도의 취기만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 독주를 마시고도 취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문제는 그가 갖고 있는 열기였다.

    안 그래도 체온이 높은 인간이 술을 마셔 더욱 뜨거워졌다. 와 닿는 체온이 선연하다. 치영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취한 상태라고 해도 이 정도 체온 변화 외에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그 체온 자체가 문제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인간은 취하지 않았을 때가 더 말종이라는 것을 치영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기, 현관이에요.”

    지금도 보아라. 현관 옆 벽에 가이드를 밀쳐 놓고 등 뒤에서 묵직하게 밀어붙이고 있지 않는가.

    어떤 에스퍼가 각인까지 치른 제 가이드를 이렇게 다룰까.

    차라리 때렸으면. 뺨을 올려붙이고 복부에 주먹을 갈겨 내가 너를 완전히 경멸하고 증오하게 해 주었으면.

    그러나 백한은 명치에 꽂아 넣는 주먹보다 더 얼얼한 소리만 내뱉었다.

    “그럼? 설마 안아서 침실까지 모셔다 주길 바라는 거야? 답지 않게 앙큼하네.”

    “…좀 닥쳐요.”

    “그럴까? 우리 닥치고 할 것만 하고 떨어질까? 형도 네 냄새 맡으니까 흥분되긴 한다.”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기백한은 안치영의 체향 따위로 흥분하지 않는다. 맞닿은 곳부터 스며드는 가이딩에 욕정하는 것이면 몰라도.

    그러나 체향이라는 어이가 없는 핑계를 대는 것은, 기백한이 안치영의 가이딩에 흥분하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저 각인 때문이라고 우겨 가며 치영의 가이딩 파장에 닿아 반응하는 신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당착에 피해를 입는 것은 오히려 치영 쪽이었다. 그가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는 바람에, 이쪽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중이었으니까.

    결국 이렇게 어디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현관에 처박힌 채로 백한이 저에게 치대는 것을 견뎌야 했다. 치영은 현관의 센서 등이 꺼졌다 켜지는 것을 보며 환멸에 눈을 감았다.

    백한은 치영과의 접촉에 역겨움을 느꼈다. 때문에 이런 행위조차 옷을 입고 함이 마땅하다는 듯 굴었다.

    치영이 아직 꿈이 있던 시절엔 언제 백한과 제대로 된 접촉 가이딩을 하게 될까 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조금 우습게 되었다.

    “…읏.”

    “씹…….”

    백한이 제 목덜미를 물고 옷 하나 벗지 않은 채로 저를 밀어붙이는 이런 일들 말이다.

    치영은 체내의 가이딩을 더 원활하게 만들었다. 접촉 가이딩은 가이드의 의지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닿지 않은 것보다 닿는 것의 효과가 좋고, 살갗보다는 점막에 닿은 것이 가이딩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그 일련의 과정에 가이드의 의사는 들어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치영은 가이딩을 잠글 수 있다. 원하지 않으면 방사와 접촉 모두 가이딩 파장 억제가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한 번에 많은 양의 가이딩을 작은 접촉만으로도 에스퍼에게 밀어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양이 현저하게 작은 것이 문제지.

    물론 치영이 이런 식의 가이딩 운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숨긴 것도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워낙 양이 적어 가이딩을 잠그든 말든 상관없었을 뿐.

    애초에 어떤 연구원이 F등급 가이드 따위의 능력치를 궁금해할까.

    그러나 치영과 각인한 에스퍼에게는 달랐다.

    “…설탕물만 빨아 처먹고 살았나. 왜 이렇게 달아, 제기랄.”

    백한이 치영의 어깨 위로 제 이마를 문대며 헉헉거렸다.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요란했다.

    치영은 백한과 벽 사이에 끼인 채로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백한은 쉽게 치영을 놔주지 않았다.

    치대는 움직임에 벽에 자꾸 머리를 박게 되자 치영은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그저 견딜 뿐이었다.

    왜냐하면 곧 끝날 일이니까.

    “…우욱,”

    한동안 치영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가이딩을 빨아 가는 것에 열중하던 백한은 그대로 치영을 내버려 둔 채 군홧발로 집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러더니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변기통을 부여잡은 채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치영의 신장도 작은 편이 아닌데, 그보다 훨씬 거대한 사람이 이곳저곳을 쳐 대며 들어간 탓에 화장실 문짝까지 헐거워진 것 같았다.

    치영은 그 꼴을 보며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럴 줄 알았지.

    백한은 치영과의 가이딩이 있으면 늘 저렇게 구역질을 한다. 그러니 치영이 버텨야 하는 시간도 그다지 길지 않다는 소리다.

    “아, 죽겠네.”

    갑자기 치받은 위에 횡격막을 얻어맞았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쉴 새 없이 웩웩거린다. 저 혼자 버둥거리다가 욕실의 벽을 친 터라 사기로 만든 타일이 깨져 내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고통에 제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가 편해진 것은 위에 들어있던 것들을 모조리 게워 낸 뒤였다. 속 안을 게워 내야만 편할 정도로 불량식품을 먹었다는 듯 모든 걸 쏟아냈다.

    치영은 흘끗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위쪽 경첩이 달랑거렸다. 백한이 어지간히도 세게 문을 연 탓이다.

    …저 힘만 센 하마 새끼가.

    치영은 속으로 백한의 욕을 하며 걸레를 가져와 그가 집 안 곳곳에 새겨 둔 군홧발 자국을 닦아 냈다.

    물을 내리는 소리와 세면대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멎었다. 세수까지 했는지 앞머리가 좀 젖은 채로 나온 백한은 후련한 얼굴이었다.

    “후, 비웠더니 배고프네. 해장국 시켜 주라.”

    “…하.”

    “한숨 쉬니, 자기야? 넌 형이 변기통 붙잡고 웩웩거리는데 걱정도 안 돼?”

    “…네, 여기 가이드 숙소동 1015호인데요. 해장국 하나 해 주세요. 아…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더 말하기도 싫었던 치영은 해장국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끊자, 입고 있던 셔츠는 언제 벗은 것인지 군용으로 지급되는 검은색 민소매 하나만 입은 백한이 배를 긁적이는 게 보였다.

    “뭐라는데.”

    “상업 지구랑 여기랑 거리가 멀어서 가지러 와야 한대요. 중령님이 숙소 가시는 길에 들러서 가져가시면…….”

    “와, 맛있겠다!”

    백한이 해맑은 얼굴로 손바닥을 짝 쳤다.

    …저 개새끼.

    치영은 짜증을 내며 지갑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불 꺼져 카트도 돌아다니지 않는 센터의 거리를 거닐며, 치영은 욕을 짓씹었다. 이 인생이 너무도 싫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제게 이런 고통을 심어 주는 백한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치영은 그와 같은 지옥에 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치영은 상업 지구 쪽에 켜진 희미한 불빛을 보며 마냥 걸었다. 저의 단란한 숙소에는 지금 침입자가 와 있다. 그것도 하마 새끼처럼 뻔뻔한.

    얼른 내보내려면 해장국이든 뭐든 처먹여야 할 텐데.

    그러나 치영의 걸음은 마냥 느려졌다.

    이 거리를 마냥 떠돌다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치영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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