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센터의 영빈관에서는 꽤 오랜만에 귀국한 춘란대 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환영식이 열렸다.
지난 5년 동안 용병처럼 밖으로 굴려지던 춘란대가 이제는 센터 상비군이 될 거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거창한 수준은 아니고 약식이라 윗분 중에는 센터장만이 들렀다 갔을 뿐이다.
수고했다며 일일이 악수를 하는 통에 고기가 식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대원들이 하나같이 투덜거렸다.
막내 대원부터 시작한 인사를 백한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센터장은 사람 좋은 미소로 백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키가 장대하게 큰 백한 때문에 한참 위로 팔을 뻗어야 했지만 말이다. 센터장은 간신히 자애로운 낯을 유지했다.
“자네가 제일 수고했지.”
“영감님은 머리가 더 벗겨졌네요?”
“이 자식이, 말이라고……. 됐어. 난 가 볼 테니까 이 새끼 술 취해서 아무 데서나 노상 방뇨 하지 않게 잘 감시해.”
센터장이 주위에 기립해 있던 대대원들에게 백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얼굴에는 농담의 기색이 없었기에, 모두 그게 다 진심임을 알아챘다.
장군급 에스퍼들을 양친으로 두어 출생조차 국군수도병원에서 했던 로열패밀리에, 최연소 대대장 출신의 S+급 에스퍼에게 하기에는 다소 급 떨어지는 언사일지라도 말이다.
기실 기백한이 술 처먹고 아무 데나 노상 방뇨나 일삼는 근본 없는 자식이라는 것을 대대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미려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백한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뜨악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일들을 자주 벌이고는 했다. 외모에 넋을 놓고 접근하던 이들도 그의 한결같은 개짓거리에 후두둑 떨어져 나가고는 했다.
지금이야 대대장까지 오른 데다가 책임질 것들도 많아진 터라 좀 덜한 편이지만, 막 소위로 임관했을 때는 더 심했었다.
백한의 출신과 외모, 능력까지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지속해서 열등감을 표출하던 그의 상사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곤 했는데, 하루는 내기 권투를 하게 되었다.
기백한은 상대의 도발에 반응이 없다가 링에 오르자마자 상사의 귀를 물어뜯어 퉤 뱉어 버렸다.
상명하복이 제1군법인 군에서 상사의 귀를 뜯어 먹은 백한에 대한 처벌 여론이 들끓었지만, 당시 센터장이 취임한 지 이틀째였던 터라, 이를 유야무야했다.
그러나 기백한의 또라이 같은 점은 그가 상사의 귀를 물어뜯어서도 아니고, 처벌이 당연한 일을 뱀처럼 스륵 빠져나가서도 아니다.
그가 사실은 그 상사가 거는 시비를 즐겼다는 데 있다.
이제나저제나 언제 익을까 하며 설익은 과일을 기대하는 것처럼, 기백한은 조용히 때가 여물 시기를 기다렸다가 상사의 귀를 물어뜯은 것이다. 그것도 센터장 취임 시기에 맞춰서 말이다.
그 짓거리가 그가 벌인 개짓의 끝도 아닌지라, 체내에서 마약이나 프로포폴이 생성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센터장이라고 하면 준장급인데, 거기에 대고 못 본 사이에 머리가 더 까졌느니 마니 하는 또라이에게 약을 한다는 소문쯤이야.
그러나 센터장은 더 화도 내지 않고, 야간 골프 약속이 있다며 황급히 운전병이 모는 세단을 타고 가 버렸다.
승리를 축하하기는 하는데 어째 영 맥이 없는 태도에 춘란대 대원들은 쩝, 입맛을 다셨다.
“무슨 술이 소주밖에 없냐.”
“맥주도 있잖아요.”
“넌 참 소박하더라? 사람 빡치게.”
에스퍼들은 불평하면서도 먹고 마셨다. 구내식당에서 준비해 준 음식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귀국해 처음 마시는 술의 주종이 PX에서 판매되는 소주라는 사실에 김이 샌 듯했다.
“대대장님도 그냥 드시는데 네가 뭐라고 불평을 하냐.”
팀의 고참 중 하나인 박형인 대위가 쯧,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상석에서는 기백한이 벌써 소맥을 말고 있었다. 정확히 1:1의 무식한 비율로 말이다.
“기 대대장님 입맛도 참 싸구려십니다. 곱게 자라셨으면서, 소주가 뭐냐고 불평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나 소주 좋아하는데.”
백한이 참숯에 구워져 나온 안심 스테이크를 썰지도 않고 그대로 나이프로 들어 뜯으며 말했다.
일단 입에 다 욱여넣은 뒤, 막히면 그때마다 소맥으로 목구멍을 뚫어 넘기는 식의 다소 난폭한 식사법이었다.
이번 임무는 모하비 사막에서 테러 단체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 탓에 모래 폭풍이 치는 곳에서 구덩이를 파고 내내 누워 잠복해야 했다.
사막의 도마뱀마저 기백한을 인간이 아닌 사막의 얕은 두둑 중 하나로 여겨 머리 위와 얼굴을 기어 다닐 때까지 말이다.
사람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말리는 이국의 태양 밑에서 4박 5일간의 잠복 끝에 인질을 구하고 테러 단체의 핵심인사들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히려 태양 밑에서 나흘간의 잠복이 차라리 나았다. 그 잠복 전까지의 물밑 작전들이 훨씬 귀찮고 지겨웠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을 이국에서 보내고 막 귀국한 백한은 소주를 궤짝으로 퍼마시고 이틀은 깨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강에 달라붙은 이국의 향신료 냄새도 지겨운 터라, 구내식당 여사님이 바글바글 끓여 준 전골이 달가웠다.
메뉴에 통일성이 없이 주로 육고기들 위주로 차려진 기다란 식탁 앞에서 음식을 욱여넣던 아름다운 얼굴이 떨떠름한 수하들을 보더니 가장 막내에게 지갑을 툭 넘겼다.
“가서 사 오든지.”
“대대장님 최고십니다.”
춘란대의 막내 대원인 인교가 엄지를 척 내밀더니, 지갑을 가슴에 품은 채로 PX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꼬리에 불붙은 듯 뛰쳐나가는 막내를 보며 낄낄거리던 대원들은 한동안 더 먹고 마셨다.
막내가 PX에서 사 온 술들은 군인 매점에서 파는 술 중 가장 비싼 위스키와 브랜디였다. 백한은 그것을 맥주에 타 마셨다.
술이 더 들어간 뒤에는, 앞마당에 불을 지피고는 누가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가마솥 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댔다.
화염 에스퍼의 이능으로, 장작이나 숯이 없어도 가마솥 뚜껑은 지글지글 달아올랐다.
내일이면 영빈관 앞 보도블록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는 민원이 접수되겠지만, 취한 에스퍼들에게 그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음식을 마련해 주고 퇴근한 여사님들을 대신하여 주방 쪽에서 묵은지를 꺼내 온 대원 하나가 기백한으로부터 용돈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회식 자리에도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쩍쩍 하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인간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전 그만 우리 가이드 보러 갈랍니다.”
“뭐?”
“저도요. 가이딩이 당기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대원들이 핸드폰을 보며 히죽히죽 웃어 댔다. 각자의 가이드들과 연락하는 모양이었다.
양갈빗살을 뜯고 있던 백한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김이 제대로 샜다는 표정이다.
“벌써 몇 달째 페어 가이드 얼굴도 못 봤어요. 지금 바로 보러 가도 늦었다고 소박맞는다고요. 양해 좀 해 주세요, 대대장.”
“잡혀 살면 좋냐? 물건 떼라.”
“저는 어떻게 할까요?”
“됐어, 다 꺼져.”
여 대원인 허인나 중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자신은 달린 게 없는데 어쩌냐는 물음에 그들의 사령관은 손을 휘휘 저었다.
니들 좋을 대로 하라는 백한의 태도에 다들 짐을 챙겼다.
고된 전투 후 고국에 남겨 둔 가이드 생각에 핸드폰에 저장된 제 가이드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막의 밤도 끝났으니, 어서 얼굴이나 보고 입술이나 빨러 가고 싶었다.
백한의 수려한 얼굴이 아낌없이 구겨졌다. 그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고깃기름이 묻은 손을 냅킨으로 닦은 백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주 두어 병을 품에 챙긴 채로.
“나 먼저 갈 테니까 니들은 여기 정리하고 가자.”
“뭐요?! 같이 먹었는데 왜 우리만?! 대대장님은요!”
“꼬우면 진급해.”
백한이 표정 없이 식당을 나섰다.
고등급의 에스퍼들은 취하는 일이 드물었다. 궤짝으로 퍼마셔도 취기라기보다는 몸이 조금 뜨끈해지는 정도였다.
손에 든 소주병이 서로 부딪혀 찰캉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한은 센터의 적막한 길을 걸었다.
물론 백한에게도 돌아갈 가이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까지 제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 문제지.
그는 초록 병의 뚜껑을 따 아무 데나 버려 버렸다.
센터의 CCTV는 화질이 좋은 편이라 쓰레기를 무단 투기한 백한의 집무실로 내일쯤 벌금 고지서를 보낼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주병 주둥이에 입술을 대고 담겨 있던 알코올들을 모두 마셔 버린 백한이 당도한 곳은 가이드 전용 숙소였다.
* * *
쾅쾅.
문이 흔들릴 정도로 두들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치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도어록으로 다가가 잠금을 열자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 황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각인까지 맺은 가이드를 바라보는 에스퍼의 얼굴이 아니었다. 작정하고 빚어도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은 얼굴을 굳힌 채, 그는 건조하게 말을 걸었다.
“잘 지냈어, 자기야?”
“…오셨습니까.”
자기야, 라니. 각인을 맺은 가이드에게 나눠 줄 온기 따위는 없다는 듯 메마르고 차가운 눈으로 저를 바라볼 때는 언제고, 언사는 또 저따위다.
기백한이라는 인간을 몇 년간 봐 온 터라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치영으로서는 웃음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른 가이드들은 비행장에 나와서 귀국 환영 인사 한답시고 꺅꺅거리던데. 우리 자기는 바빴나 봐?”
치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역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투가 퍽 달큼하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치영에 대한 모욕이었다.
예전에는 그게 다 상처였다. 지금은 어떻냐고? 글쎄.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네. 봄이라 모종도 좀 심고…….”
치영은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베란다를 가리켰다.
베란다에는 방울토마토 모종이 예쁘게 심겨 있었다. 옆에 지지대 삼아 꽂아 둔 나무젓가락도 보였다.
백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험악해지는 기세에 치영은 제 뺨을 검지로 긁다가 말했다. 아직도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이딩 받으러 오셨습니까.”
치영은 바로 방사 가이딩을 풀었다. 무감한 얼굴로 현관문에 그대로 선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