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쯤 되니, 에스퍼의 파장이 도리어 가이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숨어 있는 가이딩을 찾아내 터럭만큼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기백한의 파장은 약탈에 익숙한 것처럼 치영의 몸속에 숨어 있던 모든 것들을 앗아 갔다.
어쩌면 숨까지도.
“헉……!”
“…….”
치영은 호흡근이 마비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신 채로 내뱉지 못했다.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은 딱 기백한만큼 무례했다. 약탈이 버릇인 듯 치영의 피부 표면에 천천히 흐르고 있던 가이딩 파장을 빨아 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감각이 혼곤해졌다. 치영은 유독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잘 느끼는 편이었다. 원체 예민한 신경이 침범한 에스퍼 파장에 기겁을 하는 느낌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제 몸속에 들어와 날뛰는 약탈의 파장과 비슷한 일렁임. 달도 뜨지 않은 날 밤, 바다 한가운데서 볼 수 있는 파도의 윤슬과 같은 검은색.
꼭 어떤 커다란 짐승의 비늘처럼 검게 반짝이는 그것은, 반짝인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겠다는 듯 난폭해 보였다.
치영은 처음에 그것이 식욕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깨달아 보니 새빨간 나머지 도리어 까맣게 보이는 정욕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치영은 그것을 몰랐다.
그저 멍하게 백한의 콧날과 짙은 눈썹, 호선을 그린다면 아주 매혹적일 입술 위로 시선을 산발적으로 흐릴 뿐이었다.
공기가, 묘했다.
백한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무언가를 인내하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아드득 이를 가는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짐승의 그르렁거림보다 처참했다.
“너, 이 씹…….”
“주, 중령님, 그게 아니라……!”
치영은 어쩔 줄을 몰라 변명부터 내뱉었다. 반질반질한 돌멩이 같던 두 눈동자에 절박함이 떠올랐다.
제 다리가 백한의 다리 사이에 얽힌 것도 모르고, 맞붙은 앞가슴이 작은 틈조차 없이 그대로 비벼지는 것도 모른 채 빌기부터 했다.
백한에게 더 밉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도 죽을 만큼 무서웠다. 그가 없는 반년 동안, 치영은 올바르지 못한 자리에 심어진 묘목처럼 말라비틀어져만 갔다.
저를 구출해 준 것은 백한이었다. 2년 동안 꿈속에서 살게 해 준 것도 백한이었다. 그런 백한이 지난 반년간 저를 궁지에 밀어 넣었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좀먹힌 용기 때문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뭐라 해야 할지도 모른 채로, 치영은 백한의 밑에서 그저 떨고만 있었다.
맞붙은 상체로 백한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꼭 거대한 짐승의 품에 끌어안겨 호시탐탐 목덜미가 노려지는 기분이었다.
“…….”
“중령님… 저는…….”
“…입 좀 닥쳐.”
맞붙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백한에게로 가이딩이 스며들고 있었다.
끌어안긴 채라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게 고스란히 다시 진동처럼 전해졌다.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후각이 예민한 에스퍼들을 위해 나온 향수였다. 그게 백한의 체온에 의해 알코올의 기화 속도가 빨라진 탓에 마치 체향처럼 바뀌어 있었다.
옅은 목련향과 자작나무, 머스크 향이 섞여들어 치영의 비강으로 전해졌다. 치영은 점점 제 몸의 온도 역시 올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척추를 타고 뜨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배꼽 부근에 묵직하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치영은 그것이 토카레프와 같은 권총이라고 생각했다.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중에 조금 몸을 뒤척이자, 백한이 치영을 더 꽉 끌어안으며 으르렁거렸다.
“가만히 좀 있자. 기분도 더러운데 회까닥 돌아서 네 목덜미라도 물어뜯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
목덜미에 와 닿는 숨이 뜨거웠다.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던 에스퍼 파장이 취할 것을 다 취했다는 듯이 천천히 얌전해져 갔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터라 치영은 숨도 내뱉지 못한 채 눈만 도르륵 굴려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황색 점등이 어느새인가 초록이 섞인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완전한 초록색이 되면 에스퍼가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백한의 머리카락 일부분을 조금 흔들리게 만들었다.
꽉 끌어안긴 터라 여실히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품이 치영을 괴롭게 했다. 묵직하게 짓누르는 감각이 어디가 제일 거슬린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 불편했다. 얌전히 있으라니 말을 거역하기도 힘든 터라 숨만 밭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도리어 몇 초 이내였던 것 같기도 했다. 백한이 치영을 처음 잡아당길 때처럼 다소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삐— 삐—.
수치가 정상을 찾았는지 비상사태를 나타내는 적색 점등들이 모두 꺼지고, 그래프도 완연한 녹색을 띠었다.
백한은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치영을 내려다보며 가슴팍에 붙은 노드와 연결된 전선들을 잡아 뜯었다.
그제야 치영은 백한이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까지 백한의 맨살 위에 끌어 당겨진 채로…….
치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백한이 다소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지가지 한다. 좋냐? 너 내가 소박 줬던 건 다 잊었구나. 호구네, 이거.”
백한이 인상을 쓰며 전선을 내팽개쳤다. 어느새 침대 아래로 내려선 백한은 맨발로 병실을 나서려 했다.
그가 누워 있던 침대에서 간신히 몸만 일으킨 치영은 백한을 따라나서려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백한은 벌써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주, 중령님.”
“야이, 개새끼들아. 사람 가두니까 좋냐. F 등급 하나만 들여보내고 문을 잠가?”
폭주 전조 증상을 보이는 에스퍼들은 격리실에 격리된다.
문고리를 몇 번 움직여 보다가 밖에서부터 잠긴 것을 깨달았는지 기어코 문설주를 아예 뜯어 버렸다.
치영은 헉 소리를 삼켰다. 아무리 수치 안정화로 격리실 안쪽 이능 파장 억제 시스템이 종료되어 에스퍼로서의 신체 능력이 회복된 상태라 할지라도,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문과 문틀 사이를 손끝으로 벌려 뜯어내다니.
치영이 놀라든 말든, 백한은 손으로 두부를 뭉개듯 그걸 다 잡아 우그러트려 버리고는 너덜너덜해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구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기 중령님! 격리실 문을 이렇게 두시면……!”
“말이 많네, 씨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내가 좀 더 씨불여도 될까?”
“요, 욕설은 자제 부탁…….”
“까고 있네. 아가리 여미라고 아까부터 말했다.”
백한은 놀라 다가온 연구원의 품 안에서 태블릿 PC를 가져가 두 동강을 내더니 품 안에 돌려주었다.
얇은 과자라도 쪼개듯 막힘 없는 움직임에 넋을 놓고 있던 연구원은 제게 돌아온 두 동강의 태블릿 PC를 보고 떡, 입을 벌렸다.
“기 중령님, 이게 무슨……!”
“아까워? 비품 아까운 거 알면 저 가이드를 보호구도 없이 혼자 덜렁 들여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가이드도 국가 재산 아니야? 이따위 것보다 가이드 하나 키우려면 돈 어마어마하게 들어가지 않나?”
“…….”
“국민 혈세로 키운 가이드를 같이 뒈지라고 가둬 둔 모양인데, 너 이름이 뭐야. …박한식이? 다음 폭주 때면 내가 너 찾아내서 꼭 껴안고 같이 뒈질 테니까 기대해. 현충원 비석에 나란히 이름 올려 보자고.”
연구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덜덜 떠는 얼굴 위로 잘못 걸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이 치영에게 행한 비인도적 처사는 별개의 문제고, 오직 이 자리가 문제라는 듯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연구원을 두고 백한은 유려한 입술을 끌어올려 비웃음을 지었다.
“야, 한식아. 처신 좀 제대로 하자. 내가 곧 죽을 것 같던? 한 번 개겨 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저 등신 같은 가이드 죽으면 너네도 다 죽는 거야.”
“주, 중령님 그게 아니라…….”
“근데 씨발, 별 병신 같은 것들이 왜 사람 약을 올리지. 밟으면 그대로 밟히는 것들이.”
연구원을 향해 짓씹듯이 말하는 음색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귀찮게 구는 벌레에 짜증이 난 말투에서는 조금의 자비심도 찾아볼 수가 없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기백한은 한동안 연구원을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야.”
다 부서진 문설주 옆에 멀거니 서 있기만 하던 치영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가 연구원에게 화를 내는 것이 어쩐지 저를 위한 행동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백한이 서늘한 눈으로 그런 치영을 보고 있었다.
치영은 윤슬이 일렁이는 밤바다처럼 요기에 섞여 검게 물들었던 백한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알 수 없는 열기가 잔뜩 고여 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백한은 삭풍처럼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너도 깝치지 말고 살자. 예뻐서 살려 둔 거 아닌 거 보이지.”
“…….”
“이름이 뭐더라, 너? 아무튼 눈에 띄지 마, 친구야. 다 씹어 먹고 단물만 빨아서 뱉어 버리기 전에.”
그것은 어느 짐승의 경고였다. 치영은 그때 고개를 끄덕였는지 아니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멀어지는 넓은 등을 보며 끌어안겼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침대 위만 요란하게 생각날 뿐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너?”
그렇게 묻는 백한의 목소리에는 온기가 한 톨도 없었다.
그제야 치영은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다시는 기백한의 가이드가 될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