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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6화 (6/114)

6화

치영과의 원치 않는 각인 후, 반년간의 파견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기백한은 폭주 전조 상태에 빠졌다.

각인을 한 상태라 가이딩 보조제가 몸에 맞지 않은 탓이었다. 억지로 복용하면 기백한 본인도 고통스러운 데다가, 그때부터 에스퍼 파장이 비정상적으로 범람하여 그 영역권에 들어온 다른 에스퍼들로 하여금 두통과 이명에 시달리게 했다.

그렇다고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먹자니 묘하게 맛이 없었다.

다른 에스퍼라면 편식으로 치부되고 말 일이었지만, 문제는 기백한이 고등급 에스퍼라는 데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가이딩 파장이 에스퍼의 파장 체계를 천천히 무너트렸다.

가이딩 고갈 상태인 것도 아닌데 예고 없이 폭주 전조 현상이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고등급의 에스퍼일수록 진폭주로 가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된다.

폭주 전조, 가폭주, 진폭주 순으로 진행되는 고등급 에스퍼의 폭주 현상은 첫 단계부터 파급이 어마어마하다.

파장 억제 집중치료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에스퍼가 있는 건물 자체가 규모 5.0의 지진 여파에 흔들리는 것과 같아 건물 내벽에 금이 가게 될 것이다.

당시 기백한의 상황이 그러했다. 센터에는 비상경계령인 해치 3호가 내려진 상태였다.

의식을 잃은 고등급의 에스퍼 하나가 서울시 전역과 경기 일대, 나아가 충청의 일부를 그대로 손으로 퍼내듯 세상에서 없어지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치영은 그런 상황에서 어떤 보호구도 착용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집중치료실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굳이 보호구 할 것 있습니까? 안 소위가 들어가면 기 중령님도 바로 벌떡 일어서실 텐데. 아니, 뭐 내 말은 딴 게 일어선다는 게 아니라 의식을 회복할 거다, 이 말이지.”

연구원이 보호구를 요청하는 치영을 두고 픽픽 비웃었다. 코드블루가 코드블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연구관은 성희롱에 재주를 보였다. 들어가서 너도 죽어 봐라, 하는 악의였다.

그러나 치영으로서는 그의 태도를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제 에스퍼가 긴급 상황이라는데 두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백한이 떠난 그 반년 사이, 치영은 전에 없던 따돌림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 어떤 가이드와도 상성이 맞지 않았던 기백한이 굴러들어 온 반정부군 출신의 사탕 껍질 가이드에게 강제로 각인을 당했다.

일정 부분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은 또 거짓인 그 말이 센터에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리고 그것은 백한을 그저 하늘 위 무언가로 대하던 가이드들의 마음속에 질투를 지폈다.

그전까지 백한은 에스퍼와의 관계만을 즐겼다. 에스퍼와 에스퍼의 관계는 스포츠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센터의 풍조상, 결국 그 어떤 가이드도 백한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이다.

가이드들은 지난 2년간 치영의 존재를 부정하려 노력했으나, 철마다 보내 오는 치영의 선물과 치영을 잘 돌보라며 백한이 센터에 보내는 공문들이 그 노력을 헛되게 만들었다.

부정하고 부정한 끝에 복이 온 것 같은 착각. 가이드들은 백한이 치영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그 누구보다 반겼다.

그리고, 그들의 괴롭힘은 당연하게도 치영에게로 향했다.

에스퍼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 대단한 기백한이 각인을 맺은 상대가 겨우 ‘껍질’이라니.

C 등급의 가이드와 페어를 맺은 에스퍼도, D 등급의 가이드와 각인을 한 에스퍼도 좋다고 낄낄거렸다.

능력이 모자란 에스퍼들은 상위 에스퍼들이 가이드들에게 페어 신청을 한 이후에나 프러포즈가 가능하다.

그나마도 제게는 감지덕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에스퍼들이 저등급의 가이드와 페어를 맺은 것에 불만을 품는 일이 다반사였다.

저 새끼는 죽여 주는 가이딩을 받겠지. 저 새끼는 나보다 더 잘나가니까 가이드들이 줄줄 따르겠지.

그렇게 열등감 속에 빠져 살며 자기 개발이라고는 하지 않으면서, 자기 위로만 끝장나게 잘하는 것들이 모두 기백한의 가이드를 두고 수군거렸다.

기백한의 가이드가 내 가이드보다 등급이 낫다. 그렇다면 기백한도 나와 다를 것이 없다! 라고.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원래 능력이 모자라는 놈일수록 착각과 망상이 심한 법이다.

그 망상 속에서, 치영은 몇 번이고 까발려졌다. 치영이 아는 곳에서, 모르는 곳에서, 더러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치영은 거대한 악의와 마주해야 했다.

저 사탕 껍질이 그 대단한 기백한을 만족시켰다는 거지. 그 방면으로는 대단하다는 얘기인가?

수군거리던 에스퍼들은 치영에게 치덕거리기 시작했다.

여러 일로 수세에 몰려 있던 치영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각인을 맺고도 홀랑 떠나 버린 제 에스퍼, 질투에 화를 삼키고 손톱을 세우는 가이드들, 한 번만 대 달라며 낄낄 희롱을 해 대는 개자식들 사이에서 치영은 20대 초반이 가져야 할 싱그러움을 모두 잃어버렸다.

딱 그 반년 만에 말이다.

“시간이 없어요. 기 중령이 폭주하면 안치영 씨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뭘 꾸물거리는 겁니까.”

종내에는 직위에 대한 호칭도 적절치 않았다. 소위까지 단 치영에게 안치영 씨라니.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연구원의 말에도 치영은 덜덜 떠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가이딩은 처음이었다. 그 처음을 폭주 전조 상태인 에스퍼, 그것도 S+급에게 수여해야 한다니.

베테랑도 겁을 집어먹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연구원은 저만 보호복을 입은 채로 치영을 떠밀었다.

그리하여 보호구도 없이 내몰린 가이드 안치영은 에스퍼의 파장이 섬광처럼 폭발하는 그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아윽…….”

격리실 안은 쨍한 파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늘로 만든 담요를 덮는 기분이었다. 움직일수록 죄어오는 파장 사이에서 치영은 천천히 방사 가이딩부터 시작했다.

백한과의 각인을 고대하며, 치영은 그동안 열심히 가이딩에 대해 배우고 수학했다.

고된 훈련에 지치고, 이미 가이드 양성 학원에서 중급 이상의 가이딩 기술들을 다 배워 온 다른 가이드들과 차이가 나도, 치영에게는 백한이 있었다.

노력하는 것만이 치영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보답받을 날이 확실하다고 여겼다.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전혀 다른 형태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치영의 에스퍼였다.

치영은 제 에스퍼에게 아낌없이 가이딩 파장을 풀었다.

천천히 풀어 둔 방사 가이딩이 끝도 없이 백한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접촉과는 다르게 의식을 하면 멈출 수 있는 방사 가이딩이 잠기지가 않았다.

“아……!”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횡격막 밑에서 무언가가 울뚝불뚝 맥동했다. 치영의 두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침대에 누운 백한의 몸에 붙여진 노드들과 연결된 기계의 계기판에서는 여전히 위험을 뜻하는 적색 그래프가 삑삑거리고 있긴 했으나, 위험 수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이딩은 가이드의 등급도 중요하지만 상성이 최우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터에서는 가이드의 등급을 제일로 고려합니다. 그것은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의 낮은 상성을 가이드의 등급이 메워 주기 때문입니다. B급 가이드와의 매치율이 80% 이상이라면 굳이 A급 가이드가 필요 없겠지만, 매치율이 낮은 상황에서는 굳이 B급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교관에게서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치영은 천천히 백한의 손을 잡았다. 하얀 피부 때문에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뜨거워 놀랄 정도였다.

유려하고 긴 손가락은 막상 잡아 보니 굳은살이 가득했다. 치영은 읏,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자신과 백한의 매치율은 95%. 이례 없는 숫자다.

비단 백한과 다른 가이드들 사이의 매치율뿐만 아니라, 센터에 있는 어떤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서도 그런 매치율은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치영은 백한이 그를 여자로 생각했던 2년 동안에 충분히 특별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높은 매치율은 처음이었으니까.

센터, 나아가 군부의 모두가 그 매치율을 귀하게 여겼다. 백한이 치영을 거부하기 전까진 말이다.

가이드는 제 스스로 권력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그들이 가이드를 귀하게 여긴다고 해도, 그런 권력들을 가이드 스스로 이루기는 힘들다.

치영이 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한 번도 치영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흐악—!”

잡은 손에서부터 미친 듯이 가이딩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치영은 백한의 손을 잡고 뒤집어지는 속에 저도 모르게 꺽꺽거렸다.

이마와 목덜미에 혈관이 돋을 정도로 심한 감각이었다. 방사에서 접촉으로 바뀐 가이딩이 꽤 효과가 있는지, 백한의 수치가 적색 그래프에서 황색 그래프로 색이 변했다. 위험 단계는 지나쳤다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너…….”

들끓는 목소리. 치영의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는 양 날이 선 그 목소리.

열이 뚝뚝 떨어지는 것같이 일렁이는 눈동자에 치영은 숨을 집어삼킨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울컥, 빠져나가는 가이딩의 느낌이 여실했다.

‘이것이 가이딩이구나…….’

치영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힌 손부터 끌어 당겨졌다. 치영은 제 에스퍼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삽시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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