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속으로는 갖은 욕을 퍼부으면서도, 치영은 무표정했다. 이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백한에게서 거부당한 뒤로, 치영은 무수히 많은 희롱과 비웃음에 시달렸다. 이제는 일일이 대꾸하는 것조차 지겨워질 정도로.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기백연이 센터의 가이드들 중 가장 높은 등급을 자랑하는 가이드라 그 등급이 유일무이하다면, 치영 역시 그 등급이 너무도 낮아 수도 센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F였다.
보통 그 정도 등급들은 주무관이나 행정관으로 빠지기도 하기에 치영과 같은 등급은 센터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오명을 달고도 치영은 끝까지 군에 남아야 했다. 허울뿐이지만 에스퍼 기백한의 각인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한테 가이딩 받으면 기 중령, 그 대단한 새끼랑 같은 걸 먹어 볼 수 있다는 거잖아.”
저열한 놈은 입을 열 때마다 좆같은 말만 지껄였다. 기백한을 붙잡고 제 달리는 능력을 티 낼 수는 없는지라, 만만한 치영을 붙잡고 딸딸이 치듯 자기 위로를 일삼는 것이겠지.
이런 놈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치영은 이런 상황이라면 신물 날 정도로 많이 겪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은 문득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할까, 싶은 날.
“가만히 안 계실 거면 나가세요. 가이딩 받으실 거 아니면.”
“어, 튕기기까지 해? 야, 기백한이 가이드 버릇을 완전 잘못 들였네.”
무례하기 그지없는 에스퍼의 가슴팍에 달린 계급은 끽해야 대위였다.
대위 주제에 중령인 기백한에게 말까지 까다니. 너는 내가 감찰부에 꼭 꼰지른다. 치영은 무표정하게 이를 갈았다.
“그러지 말고 손 좀 잡자. 우리 친하게 지내 보자니까? 너도 기백한이 없을 때는 뒷구멍 외로울 거 아니야.”
“…가이드 인권위에 성희롱 및 모욕죄로 고발 조치하겠습니다.”
치영이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고발 소리에 열이 받은 것인지 에스퍼는 대뜸 손을 올렸다.
올라간 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가,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영은 그 찰나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때.
이악의 에스퍼가 제 뺨을 때리려던 바로 그때.
치영은 백한이 천장을 찢고 나타나 자신을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 주었던 바로 그때를 떠올렸다.
그러나.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치영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뺨이 얼얼한 것보다 눈에서 불이 튀기는 것이 먼저였다. 치영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래. 이제 저를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다. 그때처럼.
백한이 저를 도와주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 * *
“망나니다, 너.”
“응, 나도 보고 싶었네. 우리 연이.”
백한은 미간을 잔뜩 구긴 백연을 마주하며 두 팔을 벌렸다. 와서 안기라는 뜻이었는데, 백연은 근본 없는 것을 다 본다는 듯 경멸하는 표정으로 멀어졌다.
군용기를 타고 내려 씻지도 않고, 군장도 풀지 않은 차림으로 껴안으려 하다니. 몇 개월 내내 사막을 헤맨 덕에 짧게 자르고 갔던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의 장발이 된 상태였다.
그걸 그대로 넘겨 고정했는데, 얼굴이 예쁜 탓에 꼭 포마드로 앞머리를 공들여 넘긴 것 같이 보일 뿐, 백연은 사실 저것이 떡 진 머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간만에 보는 쌍둥이 형제라도 그 더러운 몰골을 보니 명치에 주먹부터 꽂고 싶어졌다.
백한은 백연의 그런 천대에 익숙하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아, 너무 굶었는데. 연아, 네가 대신 뒷정리 좀 해주라. 나 좀 급하다, 지금.”
느른하게 뜬 눈으로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는 동복형제를 바라보는 기백연의 눈빛에 경멸이 차올랐다.
“역겨운 소리. 가서 씻고 센터장실로 바로 올라가. 기다리신다.”
“뭐 빠지게 일하고 와서 처음으로 봐야 하는 게 영감들 대머리라 이거지.”
백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짐을 내리고 있던 대대원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센터로 복귀하자마자 보고도 올리지 않는 사령관을 상사로 둔 대대원들 역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이기고 온 것, 그 이외에는 관심도 없어 뵈는 백한을 대신하여 백연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대대원들을 정리했다.
숙소로 돌아가 군장을 풀고 샤워하게끔 하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저녁에는 오랜 전투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춘란대를 위한 환영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숙소로 가겠다는 백한을 붙잡아 둘 필요도 있었다. 대놓고 막 나가는 놈이니 숙소에 한 번 들어갔다가는 센터장이고 뭐고 상관없이 안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이 지껄인 수준 낮은 화제에 따라 자유 연애를 즐기러 갈지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백연은 백한의 등 뒤를 군용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으로 쿡쿡 찔러, 센터 내 공용 샤워실로 향하게 만들었다.
간만에 귀국한 것이 기분 좋은지 백한은 더 반항하지 않고 물었다.
“환영식이니 뭐니 또 한대? 나는 다른 게 더 고픈데.”
“저질처럼 굴지 말고 얼른 가서 보고나 마친다. 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라.”
백연이 손에 잡고 있던 컵을 우그러트렸다. 악력이 상당하여 어릴 때부터 백연의 손에 귀라도 잡히면 그대로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컵과 같은 꼴을 당하기 전에 이크, 하고 피한 백한은 하하 웃으며 옷을 하나하나 훌러덩 벗고는 공용 샤워실로 들어갔다.
신체 그 자체로 무기와 다름없는 몸이었다. 나무의 굵다란 가지 위로 올라간 표범처럼 근육의 짜임새가 매끄러워 보였다.
거지꼴과 다름없이 하고 온 터라 넝마처럼 변한 전투복을 발로 퍽 찬 백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각인을 깨트리려고 들 텐데.
백한의 등쌀에 떠밀려 안 그래도 비쩍 곯은 치영이 더 말라 갈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작히나 못돼야지. 백연은 백한을 생각하면 골이 다 아파 왔다.
“미친놈인가? 저 얼굴이 어딜 봐서 여자냐! 착각은 네가 해 놓고 왜 애를 잡아!”
“근데 씨발,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변명까지 할까? 그 새끼가 사람 홀리게 생긴 게 내 탓이냐고. 야들야들하니 한입에 쏙 빨아먹게 생겨서 여잔 줄 알았어. 흘리고 다닌 걸레 탓이지, 왜 내 탓이야.”
“욕하지 마. 뒈지게 팰 거다.”
“그 새끼가 먼저 나 홀린 거라고. 지 자지 새끼인 거 감쪽같이 속이고! 각인까지 했다고!”
전에 없이 안정된 파장으로 백한은 불안정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분노에 휩싸인 두 눈이 벌겠다.
아니면 각인의 만족감에 의한 충혈일지도 모르겠다.
파병 나가 있던 일을 마무리하던 백연은 백한이 가이딩 연구소 벽을 부숴 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빠르게 귀국했다.
각인을 하고 싶은 가이드가 있다길래 그러려니 했다.
원체 그런 쪽으로는 서로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데다가, 백연도 그때는 제 에스퍼 때문에 속을 썩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도 일이 잘 풀리고 백한도 각인을 마치면, 귀국 후 센터 내 상업지구 펍에라도 들러 서로의 파트너를 소개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백한도 백연도 한참 바쁠 때였으니까.
각인한다는 그 가이드가 2년 전 백한이 이악에서 주워 온 그 가이드라는 것도 귀국 전 보고서를 통해 알았다.
백연은 제일 먼저 백한의 성질머리에 휘말린 그 가이드를 걱정했다.
사고와 같은 각인이었다. 학계에서도 유례없는 일이라는 평이었다.
각인용 주사와 에스퍼와 가이드의 파장이 가장 밀접하게 닿을 수 있는 점막과 점막의 접촉 즉, 성관계 없이도 각인이 가능하다니.
“그 씹어먹을 특수한 경우가 왜 지금 일어난 건데.”
각인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백한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치영을 찢어 죽이러 갈 것이라며 이를 아드득 갈아 댔다. 묶이기 전에 이미 벽 하나를 부숴 놓았다고 했다.
두 눈에 번뜩이는 살기가 징그럽게 흘렀다.
고대에 태어났다면 그 얼굴은 예술가의 눈에 띄어 수천 년을 내려오는 조각상이 되었을 것이다. 신화에나 나오는 전쟁 신의 얼굴을 하고 말이다.
온갖 찬미를 받을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트린 채 욕을 짓씹는 눈빛이 형형했다.
진짜로 각인한 제 가이드를 죽이는 전 세계적 첫 사례가 될까 봐, 그녀는 백한에게 이능제어구를 채워 침대에 묶어 두었다.
그것이 무색하게 이능이 주는 어마어마한 완력을 제외하고도 본연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괴물 같은 백한의 힘에 의해 침대의 파이프가 너덜너덜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 새끼 데려와. 눈알이라도 뽑아 놔야 수지타산이 맞지.”
백한은 결국 진정제를 맞을 때까지 으르렁거렸다.
웬만한 독은 바로 해독하는 에스퍼의 신체적 특성상 코끼리 다섯 마리는 즉각적으로 재울 수 있을 만한 양이 주사되었지만, 백한은 풀린 동공을 하고도 기어코 침대의 프레임을 뜯어냈다.
결국 백연이 그의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쌍둥이라도 제 몸에 손대는 것은 봐주지 않는 터라 깨어난 뒤에 붙잡혀 상완이 탈구되어야 했지만, 안치영의 안전이 먼저였다.
사실 딱히 안치영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각인을 한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가 어떻게 폭주하는지, 백연은 전투 중에 목격한 적이 있었다.
백연은 꽤 높은 등급의 에스퍼이자 가이드다. 센터의 유일무이한 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폭주에 휘말려 대퇴골이 뒤로 꺾였었다.
작은 별의 폭발처럼 블랙홀 현상이 생겨 주위에 모든 것들이 빨려 들어갈 동안, 백연은 손톱이 다 부러지도록 거리의 경계석을 붙잡고 버텼다.
회복이 빠른 에스퍼임에도 비만 오면 아직도 고관절이 쑤시는 이유다.
백한을 그 꼴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가 폭주하게 되면 서울시와 경기도 전역, 충청북도의 절반 정도가 날아갈 것이다.
백한을 위해서도,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위해서도 그런 일만은 막아야 했다.
결국 백한은 그날 이후로 이능제어석을 갈아 섞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영창에 갇혀 한 달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감시일이 끝나고 그가 영창에서 나온 날, 백한은 바로 파견 임무를 맡았다. 반년간의 임무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복귀했을 때, 기백한의 첫 번째 폭주 전조 증상이 시작되었다. 서류상에 남아 있는 기백한의 가이드는 안치영이었다.
치영은 그날 정신을 잃은 기백한의 집중치료실에 투입되었다.
에스퍼 파장이 사방으로 날뛰어 사람을 찢어 놓으려 악을 쓰고 있는 그 안으로, 치영 홀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야! 연아! 여기 찬물만 나온다!”
샤워실 안쪽에서 백한이 크게 소리쳤다.
백연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탈의실을 떠났다. 치영에게 마음의 준비라도 시켜야겠다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