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일이 있었던 날, 백연 역시 파견을 나가 있던 상태였다.
간호 부대인 만큼 주변을 정리하고 춘란대보다 하루 늦게 귀국했다.
그리고 그 하루 사이에, 센터에는 폭풍이 불어닥쳤다.
당시의 치영은 기대에 찬 얼굴로 테스트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어, 기 중령님은 어디…….”
백한에게 구출된 지 2년. 치영은 꽤 행복한 얼굴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고아원에서 지내다 세상을 조금 알기 시작한 나이에 바로 이악에게 납치당했다.
성장기 내내 치영은 저를 향한 애정이 경미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만 지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치영은 백한의 가이드가 될 거라는 희망 속에서 지냈다.
센터 내 상위 세 부대인 춘란, 추국, 동죽의 대대장이자 전투 중대인 춘란대의 팀장인 기백한이 제 첫 가이드로 치영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치영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센터 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를 반겨 주었다. 그런 환영과 사랑은 치영의 일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고이 2년 동안 백한이 귀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구출해 준 그때 얼굴을 봤을 뿐, 그 이후로는 누군가가 전해 준 메시지로만 백한과 소통해 왔다.
그럼에도 백한은 나름 다정한 에스퍼였다. 치영의 생일마다 선물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역만리 먼 그곳에서 전쟁 중인 에스퍼가 보내는 선물은 남달랐다. 고급 상자에 담긴 초콜릿일 때도 있었고, 그가 전쟁 중인 동부 유럽의 유명한 만년필 브랜드에서 한정판으로 제작된 만년필일 때도 있었다.
가끔 여자 속옷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건 그냥 짓궂은 백한의 장난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바라 마지않던 그날, 치영은 저를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제 에스퍼를 마주해야만 했다.
“남자인 걸 속여?”
“…네?”
“같은 거 달린 새끼한테 2년 세월을 꼬라박은 걸 생각하니 억울해 돌아가시겠군. 너는 남자 새끼가 여자 속옷을 선물 받을 때도 뭐가 좋다고 입 닥치고 있었던 거냐. 너 변태야?”
“그게 무슨…….”
“어이, 연구원. 오늘 각인은 취소다. 돌아가. 저 새끼도, 자네도.”
테스트 후 바로 각인을 해야겠다며 끌고 나온 각인 부서의 연구원 하나가 백한의 에스퍼 파장에 기가 질린 듯 얼굴이 하얗게 뜬 상태로 돌아갔다.
치영의 얼굴색도 다를 것은 없었다. 백한의 파장은 제 가이드를 대하는 에스퍼의 것이 아니었다. 적대적이고 날카롭기만 했다.
치영은 영문을 모르고 그저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게 거슬린다는 듯 백한이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성큼 다가오자, 치영은 제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꼈다. 백한이 비웃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에스퍼가 저와의 각인을 앞둔 가이드에게 지을 법한 종류의 웃음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 널 욕해서 뭐 하겠냐. 네가 다리 사이에 뭘 달고 태어난 건 네 잘못이 아닐 텐데. 애초에 너를 여자애로 알고 있던 내 잘못이지. 씨발, 헷갈리게 생겨 가지고는…….”
“…중, 중령님…….”
“각인은 취소야. 그간의 정을 봐서 센터를 나가든 잔류하든 네 뒷배는 돼 주지. 그 이상은 바라지 마. 난 남자 가이드에게 구역질밖에 나올 게 없는 인간이니까.”
성별을 착각했다고 했다. 황당했지만 백한으로서는 그것이 무리도 아니었다.
백연의 키가 188cm인 탓에 그보다 작은 치영의 키가 여자치고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영은 조용한 편이었고, 그나마도 변성기 때 이악의 에스퍼들에게 학대를 당해 성대가 찢어지는 바람에 구조당할 당시, 남자치고는 얇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마르고 얄팍하던 뼈대가 센터에 와서 잘 먹고 잘 잔 탓에 제법 남자다워지긴 했다.
그러나 그전에는 목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성장이 더뎠다. 키만 컸지, 남자다운 구석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한들 치영을 여자로 여길 만한 요소는 없었다.
오로지 백한만이 치영을 여자로 착각했다.
말 몇 마디 나눠 보지 않은 상태에서 너는 내 가이드다 찜부터 해 놓고 전장으로 떠난 백한은 치영을 당연히 성장이 덜 끝난 여자아이일 거라 생각했다.
나오지 않은 가슴조차 마른 몰골 때문에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치영을 완전히 여자로 여긴 이유는 생김새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장 문제였다.
백한은 치영의 생김새가 오종종하니 예쁘다고 여겼다. 그것이야말로 뭇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백한에 비하면 치영의 생김새는 예쁘다 말할 것도 아니었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백연만이 백한의 말에 동의하기는 했다. 간혹 오종종하니 예쁘게 생긴 생김새라고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생각을 어떻게 안 것인지 백한은 꽤 험악한 파장을 풀고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남매인 것을 떠나, 에스퍼로서 가이드에게 갖는 독점욕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조차 치영을 여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백한과는 아예 다른 나라로 파병을 갔던 백연은 백한이 치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사이가 좋기는 해도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까지 말을 섞을 정도로 성격이 다정한 남매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남 당시 치영의 머리가 꽤 길었던 것도 문제였다.
이악의 은신처는 산골에 있었고, 머리를 자르러 읍내로 내려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자르자니 귀찮아 치영은 항상 너저분하게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다녔다.
의외로 꼰대에 마초 기질이 있는 데다가,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자란 탓에 평생을 짧은 머리의 사내새끼들밖에 보지 못한 백한이 오해할 법했다는 뜻이다. 정작 제 머리는 목을 덮을 정도로 긴 주제에 말이다.
그런 걸 다 따지고, 백한이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다 한들 그 덩치 때문에 여자로 오인받는 일이 없기는 했다.
치영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백한은 제 억지에 대해서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치영의 모든 것이 오해할 만했고, 그 빌어먹을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는 치영을 제 가이드 자리에서 치우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치영은 그 말에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백한이 제 어깨를 잡고 하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그때, 치영에게서 가이드 파장이 세어 나갔다. 어깨를 잡고 있던 백한이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강한 파장.
“이게 무슨! 정신 안 차려?!”
기백한은 치영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분노로 인해 튀어나왔던 에스퍼 파장이 치영의 파장과 깊게 엉켜들었다.
떼어 내는 즉시 스파크가 생겨 거기서부터 자잘하게 폭발할 것이다. 혈관이 폭발하여 죽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수많이 본 백한은 욕을 짓씹었다.
파장은 더욱 지독해졌다. 치영은 아직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애에게서 새어 나온 가이딩은 백한이 에스퍼로 발현한 뒤 처음 맞아 보는 정수였다.
깨끗하고 맑은 물에 몸을 담근 채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가이딩이 골을 울려 댔다. 척추를 타고 올라 척수 신경을 하나하나 짜릿하게 만들었다.
서 있는 그 자세 그대로 단단해질 정도였다. 성적으로 흥분해서가 아니었다. 만족한 교감신경이 몸을 자극했다.
“너, 씹……! 이거 멈춰,”
“흐앗…….”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파장이 또 무섭도록 엉켜들었다. 손바닥 아래로 짜릿한 기분이 꿀렁거리며 건너왔다.
그것은 성애에 찬 스킨십에서 느낄 수 있는 고양감보다 수십 배는 더한 감각이었다.
치영은 이제 아예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려고 했다. 백한은 그 애를 품에 당겨 껴안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손을 떼면 둘 모두에게 여파가 클 것이다. 백한은 두 팔을 잃게 되고, 치영은 뇌가 터져 뇌사 상태에 이를지도 모른다.
백한은 다시금 욕을 짓씹었다. 처음 겪어 보는 것인데도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각인(刻印).
각인을 위한 약물도, 각인을 위한 성관계도 없이 치영은 제 에스퍼로 백한을 각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5년.
기백한은 제 가이드인 안치영을 끝도 없이 혐오해 왔다.
* * *
지난 5년간, 치영은 별별 일을 다 당해 보았다.
“네가 그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껍질이구나?”
치영이 딱히 깝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등급이 F, 사탕 껍질인 이상 그런 소리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골 아팠다.
치영도 각인 후에야 안 사실이 하나 있다.
기백한은 아주 어릴 적, 누이인 기백연을 노린 남자 가이드에게 대신 납치된 이후로 남자 가이드를 혐오해 왔다는 것.
양친 모두 에스퍼 출신의 장군이니 납치하고도 후환이 두려워 굶겨 죽일 수는 없었기에, 납치범은 싫다는 백한을 붙잡고 강제로 가이딩을 했다고 한다.
그 이후 남자 가이드를 특별히 혐오한다기보다는, 가이드가 ‘남성’인데 제게 가이딩하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쌍둥이인 백연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백한의 자존심상 자신의 약점이 될 만한 것에 대한 노출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남자 가이드와 얽힌 몇몇의 폭행 사건들이 있었지만, 백연으로서는 그것이 그저 백한의 기행인 줄로만 알았다.
하기야 기백한이라는 인물이 원체 종잡을 수 없는 또라이긴 했다.
때문에 치영의 성별이 2년간 수면 위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주위에서는 치영이 당연히 남자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백한이 오해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치영의 존재를 이례적이라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아들일 만큼 그들의 매칭률이 높기도 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닫기도 전에 백한이 너무도 긴 시간 동안 해외 파견을 나가 있기도 했고.
에스퍼 기백한이 질색하는 남자 가이드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페어 이상, 각인까지 약속받은 전무후무한 가이드 안치영.
그렇게 치영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공 상승한 이름값은 백한이 치영을 두고 토악질을 한 그때부터 곤두박질쳤다.
치영은 그제야 제가 달고 있던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졌음을 깨달았다.
“어? 너, 그 뭐더라. 껍질이네? 맞지?”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가 태양신의 분노를 산 그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겠지. 그러나 똑같은 처절인데도 안치영만 죽지 못해 살고 있다.
“혈압 잴게요.”
“아니, 가만히 있어 봐. 너 걔 맞네, 그 껍질.”
“가이딩 안 받으실 거예요?”
“아, 까칠하다. 여기 서비스가 다 이따위야?”
미친놈인가. 여기가 룸살롱인 줄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