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백연은 에스퍼이자 가이드였다. 센터의 유일무이한. 그녀의 이능은 마인드 리딩. 타인의 무의식까지 엿볼 수 있는 ESP였다.
“읽으려면 읽을 수는 있겠는데 정신 붕괴는 감안해야 된다.”
진행할까? 하고 묻는 백연의 말에 백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같이 움직였다. 쌍둥이 동생의 사근사근한 미소를 바라보던 백연은 가만히 손을 거뒀다.
굳이 저 조그만 머리통을 이능으로 헤집어서까지 알아낼 것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악의 하급 에스퍼 하나를 붙잡고 탈탈 털어 이 가이드가 그저 허드렛일이나 담당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약한 가이딩 양 때문에 가이드로서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는 저급 가이드.
막 주워 왔어도 입에 대려면 자격 요건이란 것이 갖춰져야 한다. 저쪽의 프락치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이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도 미약한 가이딩 양이었다.
기분은 씨발, 째지게 좋았지만. 죽여줬었는데. 다른 가이드들의 것과는 전혀 달랐었다.
그 조금만으로도 백한은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원래 전투를 나가면 굳이 성적인 흥분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고는 하지만, 방사 가이딩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완전히 힘을 받았다.
작정하고 접촉 가이딩을 하면 어떨까 궁금해지는 것은 에스퍼로서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백한은 눈을 위로 치켜뜨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희번덕한 백한의 사백안을 본 백연은 또 저질스러운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 짜증이 났다.
그새 생각을 끝냈는지, 백한이 씨익 웃으며 백연에게 말했다.
“부대찌개나 먹으러 갈까?”
“이 가이드는 어쩌고.”
“얘는 지금 포도당 먹고 있잖아.”
백한이 링거 폴대를 가리키며 말하자, 가이드의 무의식을 읽기 위해 풀어 두었던 이능 파장을 모두 거둬들인 백연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가이드 관리부에는 보고를 안 올릴 작정이군.”
“글쎄. 동죽대에는 가이드 남는 자리 없나?”
“쓸데없는 소리.”
제 중대는 건들지 말라는 듯이 백연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하자, 백한이 피식 웃었다.
링거에서는 여전히 약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닐관으로 연결된 노란색 링거액이 가이드의 손등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던 백한에게 백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위에는 뭐라고 말할 건데.”
“글쎄.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되지 않나.”
잘도 되겠군. 하며 한심하게 쳐다보는 백연을 바라보며 백한은 다시금 씨익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을 바라보다 백연은 금세 포기했다.
갑자기 부대찌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 쌍둥이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사.”
“연아, 지난번에도 내가 샀다.”
“지갑 안 가져왔다.”
“장하다, 우리 누나.”
백한이 낄낄거리며 백연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백연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는 가이드는 오래도록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뭇한 눈 밑에 번진 기미는 그 나이에 생길 만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근깨처럼 포진해 있었다.
아마 저 가이드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또라이에게 걸렸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애도를 표하며, 백연은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치영은 너무 배가 고파서 깨어난 상태였다.
“배가 너무 고파, 샹.”
욕을 읊조리며 깨어난 치영은 제 손등 위에 온갖 줄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뭐야, 이게…….”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범한 병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이딩 측정기가 치영의 링거 폴대 옆에 놓여 있는 것. 치영은 그것만으로도 이곳이 일반 병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여기 와 있는지, 생각을 더듬어 보다가 얇은 반창고로 고정된 손등 위 링거 바늘을 떼어 냈다.
링거액이 섞여 약간은 투명해진 묽은 핏방울이 침대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일단 제가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치영이 움직일 때마다 입고 있던 환자복이 사각거렸다. 소독을 위해 햇볕에 말린 것이 틀림없었다.
복지가 이렇게 좋은 병원이 이악의 산하 병원일 리 없다. 가뜩이나 돈 못 벌어 온 가장처럼 치영을 핍박하던 놈들이 치영에게 이렇게 좋은 병실을 내주었을 리도 만무하고.
죽었다고 혀를 차며 시체를 야산에 가져다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소리를 죽이려 노력하며 병실을 조심히 빠져나왔다. 슬리퍼도 없어 맨발이었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흰색의 가운을 입고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몇몇 마주쳤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고됨 외에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치영이 맨발인 것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치영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이런 곳일수록 수상하게 걷는 놈을 의심하기 마련이다.
일단 이 눈에 띄는 환자복부터 갈아입어야 할 텐데. 병원 직원들이 쓰는 탈의실이 따로 있을까? 옷을 훔쳐 입을 생각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정부군에게 끌려온 것이라면 가이드 전용 병원일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치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배가 너무 고파.”
그 와중에도 배가 고팠다. 어쩐지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는 동안 부대찌개 꿈을 꾸었던 것도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치영이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장기인 치영은 일하는 양에 비해 만족스러울 만큼의 밥을 얻어먹지 못했다.
다행히 물려받은 키가 나쁜 편은 아닌지 170cm 중반은 넘으나, 타고나길 몸이 마르고 선이 얇았다.
그런 데다 하루에 한 끼나 먹으면 다행일까. 정신을 잃기 전에도 밥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조심조심 한 걸음씩 옮기는데 코너가 나왔다.
치영은 혹시 몰라 벽 뒤편에 숨어 동향을 살폈다. 딱히 거슬릴 만한 것은 없었다. 다시 움직이려던 때였다.
“어디 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영은 멍하니 대답했다.
“부대찌개 먹고 싶어서…….”
“그래? 나 먹고 왔는데. 요 앞 기사식당이 잘해.”
“알려 주셔서 감사합… 으악—!”
뒤편에서 물어보는 목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답하다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치영은 두 눈을 깜빡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숨바꼭질? 자신 있어?”
치영은 숨을 삼켰다. 그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보다 먼저, 그의 에스퍼 파장이 치영에게 닿아 흐무러졌다.
다른 에스퍼들과는 확연히 다른 파장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따뜻한 물에 닿은 듯 처음에는 피부가 살짝 찌릿하다 서서히 풀어지는 것 같은 기분.
상성이 잘 맞는 에스퍼에게서 느낄 수 있는 파장이었다.
“누, 누구세요……?”
내뱉고 보니 정말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사근사근 웃는 눈매가 예뻤다. 눈매가 길고 끝이 쪽 빠져 사람을 홀리는 눈이었다. 왼쪽 눈 끄트머리에는 점까지 있었다.
저기 있는 점이 눈물점이던가? 치영은 멍하니 그 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야살스럽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남성미가 흐르는 것은 산맥같이 우뚝 선 콧대와 짙은 눈썹 때문인 듯했다. 그러다가도 또 그 밑의 도톰한 입술이 그 인상을 또 누그러트려 주는.
마냥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위험해 보이지만, 또 막상 경계하기에는 너무도 야하게 생긴 남자였다.
사근사근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갑옷을 입은 듯 다부진 어깨와 치영의 얼굴만 한 손에서는 또 에스퍼 특유의 야성성이 느껴졌다.
치영은 멍하게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직 도망가고 싶어?”
“…….”
“잘못했지?”
“…네.”
“네 발로 다시 병실로 돌아가야겠지?”
“…….”
“대답.”
“네…….”
남자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웃는 게 능숙한 데다가 웃음 자체가 헤픈 타입 같았다.
치영은 눈앞의 남자가 누구였는지를 떠올리다가 이악의 소부대 중 하나를 급습한 에스퍼라는 걸 기억해 냈다.
입술을 말아 물자, 남자가 비식 웃으며 치영의 어깨를 잡고 몸을 휙 돌려 주었다. 병실이 있던 방향이었다.
“누가 너 잡아먹는다니.”
“…….”
“너 사흘을 잤다. 쥐콩만 한 게 뭐가 그렇게 피곤했을까.”
“사, 사흘이나요……?”
치영은 놀라 말을 더듬었다.
정부군의 군 병원인 걸까? 치영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치영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주 다정한 사이처럼 병실 복도를 걸었다.
“자, 우리 가이드 씨 이름 말해 보자.”
“…안치영…….”
“나이도 말해 보자.”
“열여덟…….”
“그것밖에 안 먹었어?”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저를 향해 살짝 숙인 고개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진 상태였다.
남자의 눈이 집요하게 치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이 일렁거리는 것이 꼭 밤바다의 아주 검은 부분을 내리 응시하는 것처럼 멀미가 일었다.
치영은 그것이 남자가 저를 내려다보느라 얼굴에 끼친 그림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자의 눈동자가 저 스스로 요기를 띄고 있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금방 맛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워서 어쩌냐.”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는 남자는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치영은 멍하게 그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뭘 맛본다는 거지? 밥은 먹고 왔다고 하지 않았나. 멍한 정신 속에서도 그런 의문이 들 때쯤이었다.
남자가 다시금 싱긋 웃으며 치영의 등을 밀었다. 눈동자에 끼쳐 있던 요기나 그림자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양 사라진 뒤였다.
“뭐, 됐어. 우리 가이드님, 이 오빠가 딱 지켜 준다. 무럭무럭 잘 크면.”
“…….”
“그때 보자고.”
남자가 다시금 치영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는 등 그다지 건전하지 못한 미소였지만, 치영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였다. 안치영이 자신을 그 지옥 속에서 빼내 준 에스퍼 기백한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그게 저를 다른 지옥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바보 같은 안치영.
남이 떠민 것도 아니고, 저 스스로 묫자리에 들어가 누워 버린 어느 저등급 가이드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