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시 루체른에 도착했을 때는 둘 다 완전히 지쳐있었다. 비록 날씨는 좋았지만 발등까지 폭폭 빠지는 설원을 걸어서 내려왔더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내려오기 전에 산 정상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치킨너겟은 완전히 소화되고, 벌써 허기가 졌다. 더구나 나는 감기기운까지 있었던 터라 슬그머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마가 무겁고 눈앞이 어질했지만 아힘에게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내가 고생시킨 것 같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맛있는 것 먹여줄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힘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뭐, 뭘요, 하며 말을 더듬었지만 아힘은 말없이 어딘가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쇼핑몰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파스타와 샐러드 재료를 고르는 그의 옆에서 또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호스텔로 들어가면서 정원 앞에 공중전화부스가 있는 것을 확인해 두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엘씨오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생각했다. 방은 어차피 트윈룸으로 예약했던 터라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공동으로 쓰는 주방은 다행히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텅 비어있었다.
널찍한 테이블 위에 장 봐온 것들을 늘어뜨리며 아힘은 소매를 걷었다. 뭘 해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아힘이 어깨를 돌려세웠다. 앞머리를 들어 올려 드러난 이마에 차가운 손등을 얹는 그의 행동에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서자, 아힘은 다시 어깨를 꽉 맞잡았다. 찌푸린 눈가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듯 했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씻어요.>
<예? 손은 아까 씻었는데요.>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라구요.>
그리고 그는 내 몸을 돌려 억지로 주방에서 나가도록 떠밀었다. 주춤주춤 밀려나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구시렁거리자 뒤에서 순식간에 무언가 내려와 촉촉하고 차가운 것이 뺨을 핥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이게 꿈인가 생신가 스스로 다른 쪽 뺨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아힘은 내 두 손을 각각 자시의 손에 꼭 쥐고 얼굴을 내려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내 말대로 해요. 우선 뭘 좀 먹이고 싶어요. 그래야 그 다음에 내가 할 것에 대해서 덜 미안할 테니까.>
나는 귀를 벅벅 긁으며 후다닥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포커페이스의 그를 한번 노려본 뒤 룸으로 올라가버렸다. 적응 안 돼, 얼음 왕자가 다정다감하니까 유치해, 생각하면서도 입가가 나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그의 말대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두꺼운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기본적인 토마토 퓨레에 장 봐온 햄과 양송이, 다진 양파를 넣어 간단한 소스를 만들어 얹은 스파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히려 두 눈 휘둥그렇게 뜨고 경탄한 것은 카프레제 샐러드였다. 분명 샐러리 등의 야채와 모짜렐라 치즈를 사는 것은 보았지만, 이렇게 직접 샐러드를 만들 줄은 몰랐다. 샐러드의 기본은 토마토도 모짜렐라 치즈도 아닌, 발사믹 소스 아니던가. 그런데 아힘은 데코레이션까지도 아주 멋지게 한 것이다.
<이걸, 정말 직접 만들었어요?>
<나쁜 건 넣지 않았으니까 어서 앉아 먹어요.>
나는 의자에 앉아서도 이걸 어떻게 먹나, 황송해 하며 감히 요리에 포크를 갖다 대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자 아힘은 직접 내 손과 포크를 한꺼번에 움켜쥐고 접시 위를 휘저었다. 나름 신경 써서 장식한 것들이 무너지자 나는 ‘아아’ 아쉬운 탄성과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아힘은 심술궂게 웃었다.
<아힘, 요리 잘 해요?>
<기본적인 건 해요. 일본 남자들은 요리 잘 못하죠? 그런 말 들은 적 있어. 일본에선 여자들이 요리나 청소나 모두 맡아서 한다고.>
<그…렇죠, 보통. 그래도 요즘은 남자들도 많이 해요.>
한국에서도 그렇죠. 뒷말은 삼켰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돌돌 만 스파게티를 넣었다.
<맛있어!>
<삼키고 말해요.>
<정말 맛있어요!>
아마, 입주위에 토마토소스가 잔뜩 묻었을 테였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입 안 가득 마구 쑤셔 넣었다. 접시에 고개를 콕 박고 열심히 먹기만 하자 아힘은 손가락으로 내 턱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맛있어요?>
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힘은 피식 웃으며 우아하게 포크를 돌렸다. 그까짓 스파게티 먹는데 저렇게 우아한 분위기를 내다니, 대단하다.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씐 모양이라고 또, 생각했다. 이 나이에 주책이다, 너무 홀리진 말자, 각오하며 귀 옆 머리를 쭉 잡아당겼다. 아파, 하고 움찔거리자 아힘이 따라 움찔거렸다. 그리고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는 멍청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이 먹어둬요. 지금 올라가면 밤 늦게야 다시 뭔가 먹으러 내려올 수 있을 테니까.>
역시 우물거리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샐러리를 고르고 있었다. 입안에 있던, 아직 덜 씹힌 스파게티 면을 꿀꺽- 소리를 내며 삼켜버렸다. 그리고 기어이 켁켁거리다 물을 마시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힘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우아하게, 스파게티를 말고 입안에 넣고 샐러리를 고르고 씹고, 그리고 물을 마셨다.
<감기약 가지고 왔어요?>
물을 마시다말고 그가 눈을 치켜뜬 채 물었다. 이번에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방에 있다고 표시했다.
<그럼 물통 가지고 먼저 올라가요. 약 먹고 기다려요. 내가 설거지까지 할테니까.>
보통 때였으면, 당연히 ‘아니에요, 내가 할게요.’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겠지만, 이번에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 끼이익-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고갯짓 한 번에 군말 없이 주방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으며 문득, 먼저 잠깐 나가 엘씨오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했지만, 몸 안을 떠도는 묘한 흥분과 이마를 두드리는 감기기운에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그저, 얼른 방으로 돌아가 약을 먹고 조금 누워있고 싶었다.
<아, 아아……아!>
아힘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심스러운 스피드가 오히려 감질나게 했다. 엉덩이를 들썩이자 아힘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참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두른 내 허벅지의 연한 살을 조금은 거칠게 쓸어내렸다. 감기기운도 있는데다, 바로 이틀 전 술기운에 여러 번, 그것도 조금은 거칠게 해댄 것도 있고 해서 그가 들어오는 것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처음 하는 것처럼 아팠다. 생살을 찢는 느낌에 이를 악물고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손으로 그런 내 입술을 벌렸다.
<옆방에 사람들이 없을 때 해야죠. 빨리 끝낼게, 한번만 할게요. 조금만 참아요.>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는 구나.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런데 아힘은 그 틈에 허리를 찰박 움직였다. 눈이 크게 뜨였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헛바람이 목으로 넘어갔는지 쿨럭쿨럭, 기침이 나왔다. 배에 힘을 주면서 자연스레 조였는지 아힘은 갑자기 허리를 세게 밀어붙였다. 허벅지가 꽉 잡힌 채, 갑작스런 동작에 몸이 위로 죽죽 밀려올라갔다. 아프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의 가슴을 손톱으로 할퀴며 까무러치자 서너 번 더 여유 있게 허리를 놀리더니, 다시 깊숙이 아래를 묻고는 잠시 멈추었다.
<아프잖아요!>
<미안…….>
하지만 조금도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완전히 열에 들떠 이성이 날아간 얼굴이었다. 이틀 전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단순히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평소의 포커페이스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밤의 얼굴이라니.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 짚었다는 생각에 이마가 더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아……당신, 저번보다 더 뜨거워….>
그가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내 안이 뜨거운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뜨겁고 그래서 더 예민한 부위에 그의 것이 비벼지는 느낌이 눈에 그린 듯 생생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은 물론 속에 갇혀진 페니스의 방향까지 읽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팔을 할퀴다 말고 베개를 쥐고 틀었다.
<아…으으, 아까 당신도, 으응… 나 열나는 것 확인, 아, 아… 했잖아요.>
말을 하다가 신음을 내뱉고, 신음을 내뱉다 말을 마저 이었다. 그리고 그가 어느 한 곳을 찌르자 고개가 뒤로 꺾였다. 드러난 목 위로 그가 혀를 대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그의 것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 대신 허리가 꺾여 지끈거렸다. 부드럽게 허리짓을 하면서도 열심히 목을 물고 빠는 그를 내버려두고 좀 더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무시무시한 동굴의 끝처럼 깊고 짙어진 그의 눈빛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들었던 허리를 다시 내리고,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슬그머니 그의 것에서 벗어나려 꿈틀거렸다. 그러나 아힘은 광폭하게 내 입술을 물어뜯고는 상체를 세워 내 허벅지를 단단하게 고쳐 잡았다. 그리고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난폭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끝낼게요.>
<아아! 아힘, 으읏… 아흣…아힘…아힘.>
그가 빠르고 강하게 밀고 들어올 때마다 신음을 내지르며 까무러쳤다가 역시 같은 속도로 내빼는 사이 그의 이름을 짧게 불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마저 부르기도 전에 또 신음을 내지르며 숨을 할딱여야 했다. 그의 얼굴과 그 뒤로 보이는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고개를 휘저으며 가득 느끼는 것을 보며 문득 목이 물어뜯길 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목을 감쌌다. 그가 달밤에 벼랑 끝에 서 울고 있는 늑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아…읏! 미나모토…미나모토!>
작은 방 안 가득 그와 나의 신음소리와 침대의 삐걱이는 소리, 그리고 서로 맞닿은 살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한참 정신없이 움직이던 아힘은 잠시 쉬는 듯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블루스를 추는 듯 부드러운 움직임에 나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힘은 다시 내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리더니 이번에는 더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전보다 더 강하게 빠르게 움직였다. 침대에서 붕 뜬 허리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내 페니스는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팽팽하게 일어섰다가 벌써 질끔질끔 흘리고 있었다.
<으, 으응! 흣…아아, 아…>
벌린 입가로 침이 흐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으로 얼굴을 닦을 겨를이 없었다. 이불이나 그의 팔이나, 아무튼 손에 잡히는 것을 꽉 잡고 할퀴고 때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아힘은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는 듯 잔뜩 인상을 쓴 채 철썩철썩 소리가 날 만큼 아슬아슬하게 뺐다가 깊숙이 넣는 것을 빠르게 반복할 뿐이었다. 그 힘에 밀려 나는 어느새 침대 헤드에 머리를 콩, 콩, 박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서너 번, 강하고 더 깊게 허리를 밀어붙였다.
<하아……미나모토….>
아힘은 쓰러지듯 내 위로 확 덮쳐 누웠다. 가슴 가득 그를 안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가 문득 상체를 들어 얌전해진 내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끝을 봐버린 것이다. 괘씸한 녀석.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을 찰싹 때렸다.
<먼저 몸 녹이게 하고, 맛있는 것 만들어 먹이고, 설거지까지 한 거, 다 이거 때문이죠?>
<…힘들어요?>
<마지막엔 여기에 머리를 여러 번 부딪히기도 했다구요. 그거 알았어요? 머리에 혹 났어요. 만져 봐요.>
그러자 아힘은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그리고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려주었다. 어쩐지 그가 애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에, ‘몸은 힘들어도 이 맛에 하는 거지’하는 단순하고 무식한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정말 백치처럼 여겨졌다. 마음에 안 들어. 또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아힘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 껴 멈추게 했다. 그리고
<아파요? 저… 한 번 더… 못하겠죠?>
귀 옆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읏!>
그의 어깨를 물어주었다. 그래도, 역시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는 법칙대로, 아래는 무리지만 입으로는 해줄 수 있다는 망발을 내뱉고 말았다. 결국 이번에도 뒤통수가 붙잡힌 채 그의 아래에서 고생을 해야 했다.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그의 것이 목구멍 깊은 곳을 찌를 때 헛구역질을 한번 한 것 빼고는 그래도 무난히, 그가 어느 정도 개운한 표정이 될 때까지는 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잠결에 아직 이른 저녁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약도 먹었으니 빨리 자도 되겠다싶었다.
그러나 역시, 밤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저절로 눈이 뜨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푹 잤던지 눈을 뜨자마자 말똥말똥해졌다. 옆 침대에는 아힘이 곧게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부드러운 금발을 비비적거렸다. 으음, 하고 눈을 감은 채 잠투정하는 것을 보니 좀 전에 그렇게 온몸을 혹사시켰던 것이 모두 용서될 것 같았다. 입을 막고 킥킥 웃으며 좀 더 괴롭히다가,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아무래도 좀 더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무지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정원 앞에 있던 공중전화부스가 떠올랐다.
복도와 주방 쪽에서는 아직 사람들이 둘, 셋 모여 이야기를 하거나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호스텔을 나오자 이제 막 돌아오는 길인지 자전거를 반납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역시 스위스는 유럽에서는 가장 안전한 나라구나, 중얼거리며 가로등이 비추는 공중전화부스로 향했다.
두툼한 점퍼 주머니에서 엘씨오가 주었던 쪽지를 꺼내었다. 호텔에 혼자 남겨두고 나가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며 전화 하라고 알려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입김이 호호 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국제전화카드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나라별 번호와 언어선택을 마치고, 드디어 엘씨오의 집 전화번호를 누르자 뚜르르- 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함께 지내며 봐 왔던 엘씨오의 생활패턴을 생각하면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다. 검지로 전화기를 톡톡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엘씨오.>
-미나? 미나 맞아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숨이 확 트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형제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얼굴을 보고 와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진 연인에게서 이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뭘까. 욕심도 아니고 미련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뭘까.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안드레아한테만 말하고 불쑥 사라져버리다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나는 아힘과 만난 이야기를 꺼내었다. 물론 그와의 뜨거웠던 밤은 제외하고. 그리고 급히 떠나야 했던 사정에 대해, 경계심을 푼 아힘에 대해, 리기산의 정상에서 바라보았던 호수와 평야와 산맥에 대해 이야기했다. 엘씨오는 간간히 맞장구를 치며 그러나 조용히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잘 됐네요, 미나.
<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보고 오는 건데…….>
-사정이 있었는데요, 뭘. 그런데 미나, 코를 훌쩍이네요? 감기 걸렸어요?
<아… 그냥 감기기운만 있는 정도에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구요.>
-그래도 약은 꼭 챙겨먹어요. 참, 그런데 어디가 마지막 여행지죠? 돌아가는 날짜라도 알아두고 싶어요.
<파리가 마지막이에요. 앞으로 5일 남았네요. 5일 후면 50일 간의 탈출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의 섬세함이 좋았다. ‘이탈리아 남자’의 편견을 깨뜨린 그의 조심스러움과 유약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자꾸만 시간을 끌었다. 그게 결국 서로에게 좀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기적일지 몰라도, 그런 그와 보낸 시간이 아힘을 만나고 그에게 반하고 그를 얻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 것만큼, 아니 혹은 그 이상으로 소중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엘씨오. 한국에 돌아가면 당신한테 밥을 사주고 싶다는 약속, 기억해요?>
-그럼요. 한 학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동안 엄청 불러내서 얻어먹을 테니까 각오해요.
<그럼 엘씨오. 안드레아를 데리고 와요.>
-…… 그 녀석은 왜요? 가봤자 사고만 칠 거예요.
엘씨오는 갑자기 퉁명스런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역시,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모두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일에 참견해도 되는 것일까.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헤어진 연인의 연인사라. 입안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를 마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런 걸 독일 사람들은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하겠지만, 한때 내 좋은 추억의 주인공이 행복해지는 모습까지는 아닐지라도 맺힌 것을 훌훌 털어버리게 하고 싶었다. 나는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폈다를 하며 수화기를 힘주어 꽉 잡았다.
<엘씨오. 난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안드레아에게 그렇게 민감한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은 당신들 두 사람뿐이구요.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건 알아요. 로마에 갈 때, 당신이 조금 편해진 모습을 보고 떠나고 싶다고 했는데, 결국 그 약속도 지키지 못했어요. 어쩌면 나 때문에 더 꼬였는지도 몰라요. 엘씨오, 난 정말… 당신이 좀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오랫동안 당신과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하지만 안드레아와 계속 그대로는 안 되잖아요.……내가 이런 얘기하니까 기분 나쁘죠?>
입술을 물어뜯었다. 수화기 너머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긴 선을 타고 그 한숨이 내 귀를 훅, 하고 덥히는 느낌이었다. 너무 주제넘었던 걸까. 일초, 이초, 삼초……. 초를 세며 나는 톡, 톡, 톡, 소리 내어 전화기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리고 7초를 세고 있는데 문득 수화기 너머 그가 ‘미나’하고 불렀다.
-안드레아를 데리고 가면, 밥 사 줄 거예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그가 곁에 있었다면 그의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옹졸하고 이기적인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따라주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문득, 엘씨오가 아직 나를 연인의 감정으로 좋아한다던 안드레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더욱더 그에게 무릎을 꿇고 발등에 키스라도 해야 한다. 얼마나 잔인한가. 날 떠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은. 그리고 안드레아에게 약속했던 대로, 그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하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럼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엘씨오.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당신들을 데려갈 맛집을 알아보러 다닐게요.>
-미나. 파리에서 또 한 번 전화해 줄래요?
-알았어요. 파리에서도, 그리고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전화할게요. 그만 끊어요. 잘 자요, 엘씨오.
수화기 너머 엘씨오가 부드럽게 굳나잇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그가 먼저 전화를 끊지 않아, 결국 내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숨과 함께 추운 입김이 훅 끼쳤다.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살점 하나를 떼어낸 듯 가슴이 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이제야 그와 진짜로 헤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콧물을 훌쩍였는데, 어느새 눈물도 따라 내렸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뒤를 돌아서는데, 바로 뒤에 바짝 붙어서 있던 그림자에 헉- 하고 놀라 주저앉을 뻔 했다.
<언제부터…>
아힘이었다. 그의 바로 등 뒤에서 내려 비추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의 얼굴은 오히려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러나 굳은 표정인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인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아니, 어디부터 어디까지 통화 내용을 들은 걸까. 빵 한 조각을 훔치다 들킨 장발장처럼 불안했다.
<방금.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끄트머리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알아냈어. 당신이 엘씨오와 통화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돌아갈 곳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것. 결정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서 엘씨오를 다시 만난다는 것.>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횅, 하고 바람소리가 지나갔다.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어디선가 덜 닫힌 문이 삐거덕거리며 교합 안 된 부정음을 냈다. 단순히 놀라서, 딸꾹질이 났다. 그리고 맺혀있던 눈물이 톡, 하고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겨우 진정되었던 이마의 지끈거림이 다시 활활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애틋한가? 억지로 떨어뜨려놔서 정말 미안하군, 그래.>
그리고 거친 독일어와 함께 아힘이 등을 돌렸다.
* * *
-지난 주말에, 지희 부모님한테 인사드리러 갔었어.
-…또 멍청하게 계속 웃고 있었던 건 아니지?
-배신자. 계속 웃고 있었더니 인상 좋다고 점수만 더 후하게 받았다, 뭐.
-……날짜는, 잡았어?
-아니. 아직 거기까진 아니고. ……왜 그래, 졸려?
-응. 하품이 계속 나.
그때 하마터면 들킬 뻔 했어.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기어이 밀려 떨어지는 기분이었지. 네 옷깃을 붙잡고,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면서도,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손목으로 벅벅 문지르면서도, 목 안에서 뭔가가 득시글거렸어. 아마 그건, 원망이었을 거다.
하지만 D. 이젠 사실대로 말할게. 너처럼 웃는 모습이 멋진 녀석은 이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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