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21화 (21/29)

[21]

얘들은 뭘 먹고 모두 이렇게 큰 걸까. 아힘은 처음 봤을 때부터 ‘크다!’는 게 가장 먼저 와 닿았고, 엘씨오도 아힘보다는 약간 작은 편이지만 확실히 큰 편에 속하고, 그나마 만만하게 봤던 안드레아마저 나보다 크다. 나도 한국에선 평균키에 속하는데, 여기선 대체 평균이 어느 정도인 걸까. 그러니 아힘이 나보고 어디도 작다, 어디도 작다고 놀리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머리끝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안드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다시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응?’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놀리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내 어깨를 확 밀치는 것이 아닌가. 뒤로 엉거주춤하게 물러나면서 확 째려보니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시 만나겠단 얘기야?>

<그럴 일은 없어. 다만, 난 엘씨오에게 한국에 오면 맛있는 밥을 사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약속이 먼저야.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진 못해요. 대신, 당신도 같이 와.>

<뭐?>

어깨를 털어내며 올려다보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목을 쭉 내밀어 보였다. 넘어졌으면 정말 한 대 쳐줄 생각이었는데, 참는다. 돌아서서 다시 배낭의 나머지 정리를 하자 쪼로록 따라와 어깨를 잡아챈다.

<같이 오라니, 그게 뭐야?>

<말 그대로야.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에요. 단 둘이 만나진 않을게요. 그렇다고 아예 몰랐던 사람처럼 무시할 순 없으니까, 그와의 약속을 지키는 자리에 당신도 따라 와. 왜, 그때까지 나하고 비교되면서 멸시받을까봐 걱정 되나요? 그건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야. 둘이 알아서 해.>

<정말… 따로 둘이 안 만날 거야?>

<안 만나. 그건 우리 둘한테도 불편한 자리가 될 거니까.>

<하지만, 엘씨오는 날 데리고 가지 않을 거야. 구박하고 싫어하고, 그럼 또 싸울 건데…….>

잡혔던 어깨를 팔을 휘둘러 빼내자 안드레아는 얼른 어깨를 털어주었다.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양말짝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졸졸 따라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또 한숨을 폭폭 쉬며 울먹울먹 거렸다. 돌돌 말린 양말은 따로 지퍼백에 정리했다. 미처 세탁하지 않은 양말과 속옷들을 보니 한숨이 폭폭 나왔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자신을 보고 한숨 쉬는 줄 알았는지 엉거주춤하게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난 오늘 저녁 야간열차로 스위스 루체른으로 가요. 원래는 어떻게든 시간을 빼내어서 엘씨오를 만나고 헤어지고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전화로 인사를 대신할게요. 그 전에 당신이 미리 말 좀 해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인사도 없이 가게 되었다고. 그럼 내가 전화로 말할게요. 한국에서 나한테 밥 얻어먹고 싶으면 당신과 동석하라고.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 이상, 그래도 기어이 데려가기 싫어한다거나, 데리고 와서 계속 구박하고 싫어하고, 그래서 또 싸우는 건…… 말했잖아, 둘이 해결하라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속 뒤에 바짝 붙어 따라다니는 안드레아를 손으로 훠이훠이 물러내며 냉정하게 말하자, 오히려 두 손을 꼭 맞잡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번에는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해 줄 거야?>

<좀 비켜줘요. 마저 짐을 정리해야 돼. 지금 나가지 않으면 오늘 로마를 떠나지 못할 지도 몰라. 그럼 내일 엘씨오가 여기에 찾아올 텐데, 그래도 좋아요?>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하자 그제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순진하기는. 피식 웃으며 배낭의 무게이동을 아래로 내리기 위해 바닥에 탁, 탁, 내리쳤다. 배낭 안에서 차곡차곡 쌓이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있던 짐들이 납작하게 줄어들어 정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배낭을 메고 룸을 나서서 복도를 걸을 때까지,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까지 안드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순한 양이 된 듯한 그의 모습에 신앙을 전파한 전도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내 부탁 왜 들어줘? 내가 못됐게 굴었잖아.>

마침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읏샤-하며 배낭을 들고 올라타는데, 뒤에서 뜬금없이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못됐게 군 걸 알긴 아는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배낭을 내려놓았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올라타지 않고 서 있었다.

<불쌍해서.>

<엘씨오가?>

<아니, 둘 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 급하게 팔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누르자 안드레아가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안 타?’하고 고갯짓을 하자 그제야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배낭 들어줄까?>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다, 라는 말이 있어요. 혹시 이탈리아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

<바티칸 가이드 투어 티켓, 고마웠어요. 정말 가이드 투어가 아니면 의미가 없을 뻔 했어.>

서서히 내려가는 숫자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안드레아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대고 잘근 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내가…….>

<알아요, 일부러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거.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드레아는 냉큼 내 배낭을 들고 먼저 내려버렸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슬쩍 돌리며 빠르게 말했다.

<배낭이 무거우니까 택시로 이동할 거지? 내가 먼저 나가서 택시 잡아줄게.>

<아니, 괜찮은데->

팔을 뻗으며 붙잡으려 했지만, 안드레아의 발이 더 빨랐다. 뭐, 도와준다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체크아웃을 끝내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몸을 돌렸다. 현관 밖에서 안드레아가 등을 돌린 채 도로를 향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생각보다 단순한 성격 같은데, 그렇다면 바뀌어야 할 사람은 엘시오인가……. 저 성질머리도 잘 구슬리면 순한 양이 될 텐데.

둘 사이에 참견할 순 없겠지만 넌지시 말은 한번 꺼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담한 로비를 지나는데, 소파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걸어가는 내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걸어가던 속도와 손목을 잡아채는 힘에 순간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러나 급하게 일어난 그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감싸 균형을 잡아주었다. 눈에 힘을 주고 그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아힘->

<늦기에 데리러 왔어요.>

곧바로 눈을 풀어버렸다. 금방 헤헤거리는 표정이 참 멍청하게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호텔에 다른 남자를 숨겨두었다는 게 농담이 아니었어요? 아까 저 남자가 당신 배낭을 들고 내리던데, 누구죠?>

아힘은 내 팔을 꼭 붙잡고 걸으면서 밖의 안드레아를 고갯짓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섭다. 이 남자의 이런 표정은 좀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눈도 삐었는지, 차라리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난 표정은 섹시하다는 느낌인데, 이렇게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늘게 뜨면 가슴 한 구석이 꾸욱 찔리는 느낌이다. 지은 죄도 없으면서 괜히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저 사람은…….>

이라고 말하는 도중에 이미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마침 택시에 배낭을 넣어두고 뒤를 돌아보는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힘도 안드레아도 서로를 의뭉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먼저 안드레아를 쳐다보며 아힘을 소개했다.

<동행이 있어요.>

<뭐야, 바람피운 거였어?>

<헛소리 하지 말고 그만 들어가요. 고마웠어.>

안드레아는 아힘의 일을 몰랐다. 엘씨오가 거기까지는 설명하지 않은 듯 했다. 생각 없이 막말하는 그의 말버릇을 고려해 나는 아힘에게 안드레아를 소개하지도 않고 바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안드레아는 툴툴거리며 주춤 물러섰다. 아힘이 이상한 눈초리로 그런 안드레아를 쳐다보며 먼저 택시에 탑승했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안드레아에게 다가갔다.

<안드레아. 엘씨오한테 잘해줘요. 어릴 때는 친했다며. 다시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우선, 당신은 빈정거리는 것부터 좀 고치도록 해요.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나도 엘씨오에게 당신한테 좀 다정하게 대하라고 일러둘 테니까.>

<정말?>

안드레아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두 팔 가득 내 어깨를 안았다. 비록 아직 서로에 대한 앙금이 모조리 사라지지는 않아서 금방 떨어지긴 했지만, 짧은 포옹에서 서로 ‘Good bye'를 속삭였다. 다시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자, 안드레아가 손을 작게 흔들었다. 나는 조금 웃어주었다. 서로 웬수처럼 대했지만, 이별은 항상 슬프다. 뭉클해지는 것 같아 기사에게 얼른 출발하자고 말했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엘씨오와는 더 이상 서로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입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속도를 내는 택시의 차창 밖 풍경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손을 붙잡는 아힘에 의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시선을 마주한 채 ‘왜요?’하고 묻자 오히려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이에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요? 아니, 그 전에, 아까 그 남자는 누구였어요?>

<아… 그가 바로 안드레아예요. 기억해요? 술김에 취해서 떠들어댔던, 그 성격 나쁜 엘씨오의 사촌.>

<어렴풋하게 기억나요. 그런데, 당신과 사이가 그렇게 좋았다고 했나요? 배웅을 해 줄 만큼?>

역시 예리하다. 뜨끔해진 나는 아하하하,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안드레아를 기억하고 있으면 이미 투명 인간화 시킨 엘씨오의 애인 이야기도 역시 기억한다는 얘긴데, 번복할 수도 없거니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 사촌과 미묘한 관계라는 것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 사촌 겸 애인인 남자가 나를 찾아와 했던 신파적인 이야기며 내가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일에 개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그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엘씨오 대신 온 거래요.>

<그 남자와 완전히 끝낸 게 아니었습니까?>

눈에 띄게는 아니지만, 그러나 알아차릴 수는 있을 만큼 아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 말이다. 정확하지 않은 것이 질색인 이 남자에게 ‘무 자르듯 잘라낼 수는 없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간, 바로 말싸움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그… 끝냈죠. 끝냈으니까 안드레아가 대신 온 거잖아요. 미운 정이 들어서인가 봐요.>

<…이상한 감정도 다 있군요. 어쨌든 당신은, 좀 이상해.>

<뭐, 뭐가요?>

아힘은 긴 다리를 꼬아 차창에 팔을 기댄 채 지루한 표정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로마 시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내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들고 흔들자 아힘은 비식 웃으며 여전히 차창에 기댄 팔에 머리를 얹고는 고개를 이쪽으로 틀었다.

<일본 사람들은 독일 사람과 성향이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오히려 이탈리아 사람들과 비슷한 성향이에요. 금방 화냈다가 또 금방 웃었다가, 이상한 데에서 정리를 확실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것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아힘->

<뭐, 됐어요. 그게 오히려 재밌어요. 자, 다 왔어요. 내려요.>

택시가 섰다. 아힘은 다리를 푸르며 옆자리의 내 배낭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 머뭇거리는 내게 어서 내리라며 턱짓을 했다.

겨울의 알프스 산맥을 겨냥한 스키어들 때문인지 루체른 행 쿠셋은 꽉꽉 차 있었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예약에 성공한 아힘은 개선장군처럼 특유의 어딘가 건방져 보이는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띄었다.

<참 잘했어요.>

팔을 높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힘은 곧 그 건방진 미소를 지우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당신, 누군가를 떠올리는데…….>

<누구?>

<그게 잘 기억이 안 나요. 생각나면 말해줄게요. 어쨌든 굉장히 익숙한 느낌인데…….>

그리고 그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차의 복도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동안 같은 칸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짐과 침대 정리를 하느라 북적였다. 나는 아힘의 배낭에서 수건과 치약과 칫솔을 꺼내어 복도로 나와 그에게 내밀었다. 바닥의 어딘가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아힘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을 보곤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고개를 들었다.

<좀 있다 사람들 북적거리기 전에 먼저 씻고 와요.>

<네? 우선 저 안의 사람들이 끝나면 우리도 침대 정리를 해야죠.>

<그러니까 그 전에 당신 먼저 씻으라구요.>

어서, 어서, 하며 등을 떠밀자 아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복도 끝에 달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둘의 침대를 내리고 침구도 정리하고 배낭도 안전한 선반에 매어두었다. 베개에 각까지 잡아준 뒤 끙끙거리며 허리를 펴자 아힘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역시 예상대로 방안의 사람들은 물론 다른 칸의 사람들도 세면도구를 챙겨 우르르 몰려 나왔다.

<생각났어요. 당신이 누굴 떠올리게 하는지.>

<누군데요?>

<내 첫사랑.>

둘밖에 남지 않아서 다행이다, 고 생각했다. 좋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폈던 시트를 계속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뒤에서 아힘이 자신의 배낭에 세면도구를 집어넣으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도 없이, 그저 콧바람을 내며 슬며시 웃는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점이 닮았어요?>

<음- 독일 여성들은 스스로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독립적인 면을 요구하는 편이에요. 모두 그걸 당연하게 여기죠. 그런데, 내 첫사랑은 유난히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걸 좋아했어요. 간혹 그걸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난 그런 면이 좋았어요. 고전적인 다정함이라고 느꼈거든요.>

<그 사람이랑 사귀었어요? 아님 그냥 짝사랑?>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데다 유부녀였거든요.>

아니, 여기에 또 한 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신파극 등장인가? 하고 나는 뜨악한 채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힘은 신파극의 주인공답지 않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는 얼굴인데, 흔치않게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데, 왠지 보기에 좋지 않았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자 아힘은 여전히 싱글벙글거리며 자신의 침대로 올라갔다. 그가 자리에 눕자 내가 선 위치에서 자연스레 얼굴이 맞닿았다.

<첫사랑이 누구였는데요? 선배? 이웃집 누나?>

<고모할머니요.>

<…….>

나는 얼른 내 침대-그의 바로 아래층-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워버렸다. 위에서 쿡쿡거리며 웃는 것이 옅은 진동으로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발을 뻗어 그의 침대를 걷어차 버렸다. 흠흠, 하고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자라는 키스 안 해 줍니까?>

<당신 고모할머니는 굳나잇 키스를 잊지 않았나 보군요?>

<네.>

다시 한 번 발을 뻗었지만, 마침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불을 뒤척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위에서 소리 없는 웃음의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아침, 루체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역에서 가장 가까운 유스호스텔에 방을 예약하고 가방을 맡긴 후 곧바로 아르트 골다우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리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등산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하얀 눈밭을 헤치며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밖의 경관을 정신없이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리기산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산의 완전한 꼭대기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했는데, 그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끊임없이 멍청한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런 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리기의 최정상에 오르자 피어발트슈테터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대한 호수를 잇는 스위스 북부, 독일 남부, 그리고 프랑스 동부에 이르는 거대한 평원이 내려다보였다. 입을 떡 벌리고 숨을 몰아쉬자 청정한 공기가 몸속을 가득 채웠다. 설원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햇빛 때문인지 그리 추운 줄은 몰랐다. 아힘은 눈이 부신 듯 조금 찡그린 듯한 눈으로 북쪽의 호수와 평원, 그리고 남쪽의 험준한 산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고요한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역시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미나모토. 그리 높지도 않은 리기산이 왜 산의 여왕, 모든 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지 알아요? 저길 봐요. 유럽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알프스 산맥을 이끄는 듯한 낮지만 당당한 자세가 그걸 말해줘요.>

생각에 골똘히 빠져있는 줄 알았던 아힘이 문득 리기산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보는 것을 보려고 했다.

<지금 문득, 도라 레만, 그녀 생각이 났어요. ……지금 말이에요, 문득, 그녀를 용서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참 힘든 시간을 보냈을 그녀가 가엽다는 생각까지. 이상하죠? 난 그저 산 정상에서 호수와 평야와 산맥을 보고 있을 뿐인데 말이죠.>

그리고 아힘은 고개만 돌려 시선을 맞추곤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후련해 보이기도 했고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겠지.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상대를 용서할 때의 마음이란, 얼마나 복잡미묘한 건가. 그건, 그와 있었던 시간과 감정을 비로소 완전히 지우는 일이었다. 시원섭섭하겠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 아힘의 등을 힘줘 껴안고 싶은 것을 주위 사람들 때문에 겨우 참았다. 그리고 둘만 있게 되는 즉시, 그가 무어라 하건 상관없이 잔뜩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힘, 난 내일 융프라우요흐에 오르고 싶어요. 같이 가 줄래요?>

그리고 문득, 융프라우요흐에서 D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며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행의 계기가 된 첫사랑에 대해서, 그 지긋지긋한 20년에 대해서, 그러나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 그 사랑이 당신이라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본인이라고 속인 웃기지도 않은 이유까지, 모두 다.

<그럼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고, 내일 아침 인터라켄으로 이동해야겠네요.>

아힘은 역시 고개만 돌려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가 말한 ‘모든 산의 어머니’가 가지는 낮지만 당당한 포용의 자세를 둘러보았다.

문득, 피어발트슈테터 호수에 리기산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뾰족한 부분이니까 분명 정상, 우리가 서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저 호수에 비치고 있는 걸까. 나는 두 손을 위로 뻗은 채 마구 흔들었다. 거대한 그림자의 한 부분이 흔들리길 바라면서. 그러나 내 미약한 팔은 정말 새발의 피정도인지 호수에 비친 그림자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깡충깡충 뛰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걸 들었는지 아힘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뭐 하는 겁니까?>

<……즐거워서요.>

<엉뚱하긴. 갑시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날씨도 좋으니 다음 역까진 걸어서 내려가요. 괜찮죠?>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산 정상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짜디짠 치킨너겟과 맥주로 점심을 대신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사람들이 없는 틈에 잔뜩 키스해주고 꽉 껴안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엉덩이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그가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한번밖에 두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금방 또 그 건방진 미소를 머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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