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엘씨오의 말대로 아힘 슈미츠는 정말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울음을 터트려 버리자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씩씩거리며 혼자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물론 우산도 혼자 쓰고서. 내가 계속 울면서도 졸래졸래 따라가자 걸음을 더 빨리했다. 울먹이며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것도 분명히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한산한 골목에 접어들어서야 내게도 우산을 씌워주었다.
<도대체 몇 살입니까?>
<전에 엘씨오가 가르쳐 줬잖아요.>
<아니. 진짜 나이 말입니다.>
<진짜 나이 맞아요.>
코를 훌쩍이며 말하자 아힘은 또 인상을 찌푸렸다. 나이도 어린놈이 벌써 미간 사이에 주름이 희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그것조차도 멋있어 보인다면, 나란 놈도 참 대단한 놈이다. 내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아힘은 못견뎌했다. 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는 벽을 보며 얘기했다.
<숙소가 어디죠? 그 꼴로 더 이상 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들어가도록 해요.>
<겨우 만났는데, 좀 더 당신이랑 같이 걷고 싶어요.>
<남자 둘이 한 우산을 쓰고 걸어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걷다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한 걸음 앞장서 걷던 아힘은 우산 한쪽에서 내가 사라지자 자신도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슬프다 못해 화가 났다. 겨우 이건가. 그렇게 찾아 다녔는데. 또다시 눈가가 시큰거려왔다.
<떼르미니역 근처 호텔입니다! 우산도 없는데 거기까지만 부탁하죠. 아니, 그냥 우산 하나를 사면 되겠네요. 좋아요, 그럼 여기서 헤어집시다. 어디서 사람들이 튀어나올 지도 모르잖아요. 안녕히 가세요.>
말을 내뱉고 발을 돌려 뒤돌아서는 순간, 후회했다. 멍청이. 이제 와서 무슨 자존심을 챙긴다고. 그러나 마음과는 반대로 발걸음은 성큼성큼 앞으로 향해 나아갔다. 씩씩거리며 걷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혀 뒤돌려 세워졌다.
<그 남자, 엘씨오의 집이 로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묵지 않나요?>
<엘씨오는 이제 상관없어요! 정리 됐으니까!>
꽥 소리를 지르자 아힘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며 쉿, 하는 손짓을 했다. 하여튼, 공공질서가 지나치게 각이 잡혀있는 독일인이었다. 쳇, 하는 소리를 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잡았던 내 손목을 놓아주고는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 씌워주었다.
<떼르미니역은 너무 멀잖아요. 당신 지금 몸을 심하게 떨고 있는 것 압니까? ……. 난 이 근처 호텔에 묵고 있어요. 거기가 훨씬 가까울 겁니다.>
아힘은 자연스레 내 몸의 방향을 틀었다. 씌워주고 있는 우산을 움직이는 대로 나는 따라 움직였다. 그의 우산과 내 몸에 줄이 연결된 듯 그는 자유자재로 나를 움직였다. 그것을 보며 아힘은 피식 웃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걸으면서 내가 그의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호텔은 그의 말대로 정말 ‘이 근처’였다. 가던 길을 주욱 가다가 몇 개의 골목만 지나자 바로 아담한 호텔이 나왔다.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엉망으로 젖은 내 옷을 보며 세탁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그저 얼떨떨하게 ‘OK’ 해버리고 말았다. 잠시 직원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얼떨결에 한 대답이지만 잘했다고 생각했다. 옷을 천천히 말려야 조금이라도 더 늦게 갈 수 있을 테니까.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해요. 옷은… 다 마를 때까지 내 옷을 빌려줄게요. 당신한텐 조금 크겠지만.>
샤워실 문을 열어주며 아힘이 말했다. 그의 커다란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콧노래가 나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조용히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 후 문 앞에 그가 놓아둔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것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렸지만 세제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아쉬워하며 팔과 다리를 끼워 넣었다. 옷을 입으면서 문득 내가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입다말고 낄낄거렸다. 변태에다 정신이상자까지 더해진 것 같았다. 강민하,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보는데,
“이게 뭐야.”
언젠가 친구 녀석들로부터 이성애자 남자의 로망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샤워 후에 촉촉하게 젖은 채로 자신의 커다란 와이셔츠 한 장을 입고 나오는 장면. 바로 그것이 평범한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집어드는 순간, 그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 사실이다. 조금 기대도 했다. 물론 내가 그의 ‘사랑하는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그 장면을 연출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건 마치-
“허수아비 같잖아…….”
실망했다. 아니, 당연한 일일까. 친구들이 말한 장면은 이런 게 아닐 것이다. 하긴, 여자와 남자의 체형은 다르니까. 아무리 그의 체형이 크더라도 내 어깨를 여자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둥글고 자연스레 아래로 쳐진 어깨라면 커다란 셔츠의 목 부분이 내려와서 섹시한 느낌일 테지. 그러나 내 경우에는, 어설펐다. 좁은 주제에 저도 남자 어깨라고 각은 져 있으니 섹시는커녕 우스꽝스러워보였다.
바지는 또 어떠한가. 신장 차이가 조금 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바지 밑단으로 바닥을 쓰는 정도라면 이성애자 남자의 로망이고 뭐고 간에, 나의, 동성애자 남자의 굴욕이다. 한 번도 내 신장과 체형에 불만을 품어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아주 처절하게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옷은 벗었다. 볼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니. 차라리 벌거벗었음 벗었지 이런 꼴은 그에게 절대 보일 수는 없었다. 결국 벽에 걸린 나이트가운만 입고 허리를 단단히 묶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그도 어딘가 나갔다 돌아온 건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내 옷은 왜…>
눈이 마주친 아힘은 제자리에 서서 멀뚱히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나는 터덜터덜 그의 앞으로 걸어가 옷을 다시 건네주었다.
<당신 옷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 그냥 가운만 입고 있을게요. 그런데 어디 갔다 와요?>
<…아무래도 빨리 마를 것 같지 않아서 세탁을 맡기고 오는 길입니다. 시간이 절약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참, 그리고 이것도 구해왔습니다.>
그가 내미는 것은, 새 속옷이었다. 어쩐지, 아까 바지를 입어보는데 느낌이 좀 이상하더라. 헛기침을 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잠깐, 이거 이상하잖아.
<이봐요. 나한테 당신 속옷을 주면 혼자 이상한 짓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그저 당신이 다른 사람 속옷을 입는 데에 찜찜해 할까봐 새 것을 사온 거예요. 왜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겁니까? 샤워하는데 따뜻한 물이라도 나오지 않던가요?>
<됐어요.>
나는 욕실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아깝다. 속옷이라면 세제냄새 속에서도 그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배어있을 텐데. 새 속옷의 포장을 뜯으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딱 맞는 속옷을 입고 다시 나왔을 때에는 그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독일남자 아니랄까봐 소시지까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마실래요?>
<맥주는 더울 때 마셔야 제격이고 몸을 좀 녹이는 데에는 보드카가 제격이죠. 싫어요.>
몸을 떨며 말하자 아힘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 고요한 눈빛에 아차- 싶었다. 가끔 너무 톡 쏘아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었다.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눈치를 보자 아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나모토. 당신을 모르겠어요. 아까 전까지는 분명 날 보며 길 잃은 아이처럼 매달리며 울었잖아요. 그런데 이젠 또 나를 물어뜯을 듯 쏘아보며 짜증을 내는군요.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죠?>
<……마실게요, 맥주.>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자 아힘은 성큼성큼 걸어가 구석에 놓아둔 자신의 배낭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여러 겹으로 포장된 와인을 꺼내었다.
<와인하면 흔히 프랑스를 떠올리지만,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생산국은 바로 이탈리아죠. 보드카는 없지만, 이걸로 괜찮겠어요?>
<그걸… 가지고 다녀요?>
<삼일 전에 샀어요. 이곳 직원의 추천을 받아서 와인이 생산되는 지방까지 직접 가서 말이죠. 들고 다니기도 힘들 테니 그냥 여기서 마셔버리죠. 물론 난 맥주도 포기할 순 없어요.>
그리고 와인오프너를 찾아 한 손에 쥐고 또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침대 옆 테이블에는 램프가 치워지고 와인 한 병과 맥주 다섯 캔, 그리고 소시지와 프링글스가 차려졌다. 아힘은 우선 와인 한 잔을 따라 내게 글라스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끌고 와 테이블 옆에 놓았다. 그 하나의 의자에 먼저 앉고는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향해 올려다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추우면 침대에 올라가서 이불을 덮고 있어도 괜찮아요.>
나는 냉큼, 와인 잔을 들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금방 취했다. 나야 어차피 술을 그리 잘 하는 편은 아니어서 와인 몇 잔에 벌써 어질어질해지는 것이 익숙했다. 아힘은 호프브로이의 직원답게 술을 굉장히 잘 마셨다. 그냥 잘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술 자체의 맛을 음미하는 듯했다. 다섯 캔의 맥주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서는 와인에 손을 댔다. 와인은 맥주보다는 천천히 마셨지만 나와는 속도가 전혀 맞지 않았다. 잘 마시네요, 술이 굉장히 세네요, 하고 감탄조로 말하자 자랑이라도 하듯 와인 또한 연거푸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리 술이 세도 그렇지, 맥주와 와인을 연이어 마셔댄다면 취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리고 아힘 역시, 취했다.
서로 벌게진 얼굴을 보며 각자 여행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고 낄낄거리고 놀라워하다보니 어느새 굉장히 친근감이 들었다. 긴장이 풀어져선지 그가 갑자기 엘씨오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 이야기를 하니 어떤 반응이었냐, 싸우지는 않았냐는 둥 궁금해 하기에 나도 생각 없이 주절주절 떠들었다.
조금 화를 냈다, 내가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조금 뜯겼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의 두 번째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어찌어찌해서 그의 성질 나쁜 사촌까지 만나게 되었다는 것까지 털어놓았다. 물론 혀가 꼬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문장도 꼬이고 이야기의 앞뒤도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아힘은 고개를 끄덕여주며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그 또한 취한 상태여서 어쩌면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 얘길 듣는데 솔직히 순간 기분이 좀 상하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엘씨오가 곁에 있는 걸 허락한 건 내 이기심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잠깐. 그럼 그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얘깁니까? 엉덩이가 가벼운 놈이군. 그런데, 그 사촌은 당신한테 왜 그렇게 시비를 걸었던 거죠?>
한참 이야기를 듣던 아힘은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힌 채 의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내가 엉망으로 이야기했거나, 그가 엉터리로 이야기를 들었거나, 또는 둘 다거나. 어쨌든 아힘은 안드레아가 엘씨오의 사촌인 것까지는 알아들었는데 그의 애인이기도 한 것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질문을 받고 나는 이불을 뒤척이며 잠시 고민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난리 나는 일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촌끼리 사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아닌가? 그렇다면 말해도 되려나? 하지만 유럽이라고 뭐 다를 게 있으려고. 사촌과 사귀는 데다 둘 다 남자라니, 이 고지식한 독일 남자에게는 기겁할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안드레아 외에 엘씨오의 애인으로 투명인간 하나를 더 만들기로 했다.
<그 사촌은 그저…… 단순히 성격이 나빠요. 그래서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았어요.>
<타고난 싸움소라는 거군. 당신과 투우 경기를 하면 재밌겠어, 당신도 가끔 제멋대로 짜증을 내곤 하니까. 그 사촌에 대해서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 사람은 그저 자신과 같은 동류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에 한판 붙고 싶은 생각이었을 테니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것에 바락 화를 내려다가 진짜 싸움소 취급을 받을까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성질을 억눌렀다. 그는 화를 돋구어놓고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나 가만히 지켜보는 변태적인 취미라도 있는지, 여전히 고개를 젖힌 채 잘근잘근 씹히고 있는 내 입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건 왜 그렇죠? 당신 목에 퍼렇게 멍든 것 말이야. ……그가 남긴 건가? 최근 것 같은데.>
뜬금없이 내뱉는 말에 나는 목을 움켜잡았다. 엘씨오가 남긴 흔적이었다. 처음에는 차라리 흉측한 상처처럼 보이더니 많이 나아진 이제는 오히려 키스마크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최근 것은 아니고, 당신 이야기를 꺼냈던 날 밤에 작은 다툼이 있었을 때 생겼던 것이라고 말한다면… 믿어줄까? 이번에는 입술 대신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불안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한테 손등을 찰싹찰싹 맞으며 겨우 고쳤던 버릇인데.
<어디 가요?>
그가 갑자기 일어났다. 침대헤드에 기대어 거의 반쯤 누워있던 나도 따라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손은 그를 향해 뻗으며. 그런 내 꼴이 참 우스웠다. 이래서, 먼저 반하는 사람이 죄인인 거다. 그런 나를 보며 아힘 또한 피식 비웃었다.
<화장실 가는 것도 보고해야 성질을 내지 않을 겁니까?>
욕실 문이 탕, 하고 닫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다시 침대헤드에 베개를 세워놓고 그 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테이블 위의 프링글스를 한 조각 집어 들고 이불 위에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야금야금 씹어 먹는데 벨이 울렸다. 욕실 문을 힐끔거리며 수화기를 들고 ‘네’ 작게 답했다.
-맡기신 세탁물 처리에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다시 손을 입으로 가져왔다. 닫혀져 있는 욕실 문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은밀한 내용이라도 전달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그냥 내일 찾도록 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아힘이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털썩 의자에 앉으며 긴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쉬고 싶죠? 내가 거기 앉을 테니 당신이 침대에 누워요.>
침대에서 밍기적 거리며 일어나자 아힘은 됐다며 손을 들었다. ‘그래도 당신이 룸 주인인데’하며 기어이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끌자 이번엔 아예 눈을 딱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혀버렸다. 다리도 다시 겹쳐 꼬아버렸다. 고집은. 맘대로 해요, 톡 쏘며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내가 지금 뭘 보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무엇’을 내려다보았다.
<아힘…….>
<난 괜찮다니까요. 머리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말고 그냥 얌전히 침대에 올라가 있어요.>
<그게 아니라…….>
당신 지퍼 열렸어. 뒷말은 잇지 못했다. 실례인 걸까? 매너가 아닐까? 그냥 모른 척 해줘야 하는 건가? 창피해 할까?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는데, 순간 웃음이 터졌다. 함부로 웃으면 또 혼날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아 킥킥거리자 그의 감은 눈이 찡그려졌다. 그래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취했다. 알코올에 힘을 쏟아주는 것은 니코틴뿐만이 아니다. 눈물과 웃음도 알코올의 친구다. 술에 취한 채 울면 더 슬프고 더 취하게 된다. 술에 취한 채 웃으면 더 웃기고 더 취하게 된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그 기운을 이어가, 제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의 사타구니에 손을 뻗어버린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열린 지퍼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그가 눈을 떴다.
<뭐 하는 겁니까?>
<흐흥. 이거, 올려주려구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자 그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대었다. 그 틈을 타 나는 그의 지퍼를 안전하게 올려주었다. 침대로 기어 올라가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취했군요.>
<네. 아이가 된 것 같아. 재밌어요, 즐거워. 멍청한 짓을 하면서 놀았으면 좋겠어요.>
<취했어, 나도.>
<그렇게 보여요. 화를 내지 않잖아.>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다리를 뻗었다. 좀 쉬어요, 하는 말에 나는 얌전히 이불을 덮었다. 물론 시선은 그에게서 여전히 떼지 않은 채. 잠시 후 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목 아프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불을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왕이면 업어서 침대 위에 눕히고 싶지만, 내가 그를 업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저 이불을 덮어줄 생각이었다.
<으음->
기울어진 머리 쪽을 밀어서 고개를 똑바로 세워주려는데 그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시 반대쪽으로 자리를 옮겨 또 머리를 미는데 인상을 찌푸렸다. 괘씸하다. 미간 사이의 주름을 펴주려고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나름 부드럽게 펴주려고 했는데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아힘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녀석이 너무 자주 한숨을 쉰다. 괘씸한 입 같으니. 살짝 열린 그의 입술 사이에서 맥주와 와인 냄새가 뒤섞여서 났다. 손가락을 그의 입술로 가져다 대보았다.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나에 대해 생각해 보긴 한 걸까. 그런 뉘앙스의 말을 꺼내면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아예 부정적이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쉽진 않겠지. 애초부터 이성애자인 그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저 그를 보는 게 좋았고 함께 있으면 가슴이 떨려서…… 그 느낌이 좋았다. 그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 일은 난생 처음이라, 어떻게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나는 할 만큼 했고, 그런데도 ‘NO'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이만큼 내가 변했다는 것에만 희망을 가지고 돌아설 수밖에 없다. 미련은 남겠지만 후회는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을 뿐이다. 돌아가기 전까지, 한번이라도 더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래도 딱 한번만 입을 맞춰봤으면 좋겠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러면 정말, 좋겠다.
<단 한번만…….>
웅얼거리며, 나는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와인 냄새가 새어나오는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쳐 눌렀다. 눈을 감고 입술을 슬쩍 벌렸더니 그의 숨이 그대로 내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혀를 한번 넣어볼까, 짓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됐다. 이만하면 됐다. 이걸로 충분했다. 아쉬움을 느끼며 입술을 뗐다. 그리고 눈을 뜨고 고개를 드는데,
<이번엔 또 뭘 하는 겁니까?>
그가 눈을 빤히 뜬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