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엘씨오가 나간 후 나도 대충 지갑 등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모호함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허우적거리기에는 당장 가지고 있는 단호함이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여유를 부리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판테온 광장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로부터 로마 최고의 커피숍이라고 소개받은 곳으로 가서 밖이 보이는 곳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도 내 눈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집요하게 훑었다.
한 시간 정도 그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트레비분수로 향했다. 내가 던진 동전이 과연 효력을 잘 발휘할까. 나는 분수 안에 수없이 던져진 각국의 동전들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모두 정기적으로 수거되어 자선사업에 쓰일 것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한낮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껌 값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돈이지만 좋은 일에 쓰인다고 생각하면 그리 아깝지는 않은 일이다. 그래도- 그래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트레비분수 주변을 서성이면서도 두 시간 가량을 보냈다. 슬슬 배가 고파져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역시 밖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창밖의 사람들을 훑느라 요리의 맛을 음미하기는커녕 파스타의 면발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계산을 치르는데 직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없이 물티슈를 내밀었다. 거울을 보니 입 주변이 온통 토마토토스 범벅이었다.
소화를 시킬 여유도 없이 곧장 걸어 바르베르니 광장으로 향했다. 로마의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기점이기도 하니, 그곳에서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거리를 헤매기에는 바람이 꽤 차서 할 수 없이 광장이 한 눈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또 한 커피를 주문했다.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계속 정신이 몽롱했었는데 단 두 잔의 커피로 말짱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앉아있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바르베르니 광장은 사람들에게 그리 인기가 없는 명소임이 분명해 보였다. 분수가 하나 있긴 했지만 이미 화려하고 유명한 분수들을 미리 본 탓인지 아주 작고 조촐해 보이기까지 했다.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이 ‘광장’이지 그저 차들이 마구 지나다니는 교차로라고 불리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각각의 명소를 표시해 놓은 로마의 지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잔을 기울여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하는 나무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지갑과 지도를 챙겨드는데, 창밖으로 무언가 작은 빛이 비쳤다. 금발이었다.
“아힘.”
금발의 남자가 그 조촐한 분수를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쿠당탕, 하고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지폐 한 장을 던져놓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힘! 아힘 슈미츠!>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차가, 차가 너무 많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기가 막히게 비슷하다. 다혈질에다 성격도 급하다. 앞차가 꾸물거리면 거침없이 경적을 울린다. 그를 향해 달려가며 계속 이름을 불렀지만 내 목소리는 계속 경적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급한 마음에 한국말로 ‘조용히 좀 해!’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차의 경적소리에 묻혔다. 건너편의 금발 머리만을 눈으로 좇으며 뛰다시피 따라가는데, 그가 꺾인 골목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횡단보도, 횡단보도는 저 멀리 100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금발 머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정신없이 도로로 뛰어들었다.
끼익-
오스트리아 빈에서,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다주기 위해 무작정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달콤한 것을 주고 싶었다. 그래, 그때도 이랬다. 경적이 울리고 자동차 바퀴가 거칠게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섰다. 그리고 그때는 아힘이 다가와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혈질에다 성격도 급한 이탈리아 운전자가 거칠게 차문을 열고 나와선 내 멱살을 움켜잡아 일으켰다. 거칠게 쏘아붙이는 이탈리아어에 멍하니 고개를 흔들리고만 있었다.
퀴리날레 언덕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오후 4시였다. 로마의 언덕 중 가장 높다는 퀴리날레 언덕이니, 이번에야 말로 진짜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아직 겨우 오후 4시. 그리고 언덕 주변을 한 시간여 정도 서성였다. 언덕 위에서 로마시 전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좀 더 넓은 곳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에 광장으로 터덜터덜 내려왔다. 그리고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퀴리날레 궁전 앞에서 또 한 시간가량을 맴돌았다.
혼자, 쌀쌀한 날씨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충분히 수상해보일 법 했다. 관저를 경호하는 경찰이 한 명 다가왔다.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였다.
<안녕하세요. 관광객이신가요?>
<네……. 저기,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여기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게 아니라->
<예, 압니다. 다만 날씨도 안 좋은데 여기서 한 시간 넘게 서 있으니 걱정되어서 말이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어딘가 따뜻한 실내에 들어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경찰은 배려가 묻어나는 신중한 단어를 사용하며 말을 했다. 어쩌면 관광객들을 자주 대하는 특성상 몸에 밴 다정다감함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 걱정하는 말투에 어깨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누굴 기다리는 게 아니라… 누굴 찾고 있어요.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아서 이렇게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기다리고 또 돌아다니다가 기다리는 겁니다.>
<저런, 로마를 너무 작게 보셨군요. 흐음- 누군가를 찾는다……. 그렇다면 스페인 광장은 가 보셨습니까?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지요. 그리고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스페인 광장이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로맨틱한 장소에 아힘 슈미츠 그가 찾을 리는 없었다. 아힘 슈미츠와 ‘로마의 휴일’, 아힘 슈미츠와 오드리 헵번, 아힘 슈미츠와 그레고리 펙.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경찰은 내가 그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눈치 챈 듯 짓궂은 표정으로 ‘못 믿나요?’하고 손으로 턱수염을 쓸었다.
<날 믿어봐요. 이래봬도 대통령 관저를 23년 동안 지키고 있어요.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났지. 나는 내 직업과 이 곳이 굉장히 자랑스럽지만, 이곳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기에는 그리 로맨틱한 장소는 못 돼요. 스페인 광장으로 가요. 날씨가 좀 춥긴 하지만 젤라또를 잊지는 말구요.>
그가 나를 수상하게 여겨 얼른 그 주위에서 쫓아내기 위한 의도였든, 아니면 진짜로 추위에 떠는 내가 걱정이 되어 도움을 주려던 의도였든 간에, 나는 그 푸근한 미소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아힘 슈미츠와 로맨틱이라. 스페인 광장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내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을 앞에 두고 나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웬만한 관광명소는 모두 둘러보았지만 이렇게 인사인해를 이루는 곳은 처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줄을 이었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할아버지 경찰의 말이 사실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계단에 빼곡하게 들어차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아이스크림콘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추운데, 해도 지고 있는데,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런 짓을 하다니. 그렇게나 따라하고 싶을까.
“이게 다 오드리 헵번 때문이야.”
그러나 군중심리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주위에 젤라또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역시 콘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웬만하면 가게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밖을 내다보고만 있고 싶었지만, 이왕 온 것, 저 끔찍한 스페인 광장의 계단에 나도 한번 앉아는 봐야 할 것 아닌가 싶어 씩씩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그런데 내가 계단에 미처 오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더니 모두 일어나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달디 단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내려오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이렇게 모두들 일어나지 않으셔도 되는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계단에 올라가 앉았다.
뚝. 뚝. 뚝.
무언가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우왕좌왕하며 바쁘게 일어나 내려오는 사람들뿐, 찾는 사람은 없었다. 뭐야,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번에는 그 무언가가 이마를 두드렸다.
뚝. 뚝. 뚜두둑
아니, 이마에 내렸다. 그리고 이마를 적셨다. 나는 그것이 커다란 빗방울인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계단에서 내려가고 없었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은 내리는 빗방울에 푹푹 꺼지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가게 안으로 대피하거나 가방 안에서 우산을 꺼내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산해진 스페인 광장의 계단 위에서 나는 혼자 앉아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계속 날씨가 좋아서 우산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너무나 외롭고 분하고 서러워졌다. 이게 도대체 뭘 하는 짓이란 말인가. 어렸을 때에는 서른이 되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거칠 것도 그리고 안절부절 하지 못할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뭔가. 오늘이 로마에 온 지 며칠 째지? 그는 나보다 이틀이나 먼저 도착했을 텐데, 아직도 로마에 있을까? 벌써 떠났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무서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한다고는 했지만 과연 그가 내 진심을 알아듣기는 했을까. 어쩌면 여전히 나를 미친놈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의 약속은, 아니 나의 경고 따위는 벌써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제기랄, 나는 자기 때문에 죽을 뻔하기까지 하고 멱살도 잡히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느낌상 욕도 엄청 먹었는데. 울고 싶었다. 아니, 벌써 뺨 위로 빗방울과는 다른 물방울 하나가 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빗방울과 섞여 분간도 되지 않을 테니, 나는 그것을 애써 닦아내려고도 멈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처럼 입술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그건 너무 추하다. 눈물은 보이지 않겠지만 표정은 숨길 수가 없다. 나는 애써 입술을 앙다문 채 코를 훌쩍였다. 비에 젖은 어깨가 오들오들 떨렸다. 엄마를 잃고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일어나서 비를 피해야 할 텐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때, 내 발 앞으로 누군가의 커다란 발이 와 섰다.
<우산 없습니까? 이탈리아는 겨울이 우기인 걸 몰라요?>
<그레고리 펙…….>
<뭐라구요?>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들고 있는 우선 덕분에 더 이상 빗방울에 어깨를 적시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들고 있는 우선 덕분에, 남자의 무시무시한 얼굴에 음영이 져 더욱 사나워보였다.
<안 일어나요? 여기서 얼어 죽을 겁니까?>
<…못 일어나겠어요. 몸이 꽁꽁 얼어서.>
<것참 대단한 이유 때문이군요. ……. 정말 못 일어나겠어요?>
<좀 일으켜 줄래요?>
두 팔을 벌려 그를 향해 내밀자,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차라리 업어달라고 하시죠.>
<…그럼 업어줄래요?>
<…….>
남자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덕분에 남자의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볼 수 있었다. 화났구나. 나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와 나란히 서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 * *
-그러고 보니, 너하고 같이 여행간 적이… 수학여행이나 단체 여행 제외하면, 한 번도 없구나?
-그러네.
-음. 올해 여름휴가 땐 가까운 데라도 같이 갔다 올까? 일본이나 동남아 쪽으로.
-올해 여름엔 지희씨랑 같이 피지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피지. 이것 참… 고민이네. 사랑이냐, 우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미친놈.
사랑이냐, 우정이냐. 그건 내 고민이었어, D. 다만 내 경우는 사랑도 우정도 모두 너란 게 문제였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랑과 우정을 한 사람에게 쏟아 부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상대를 잘만 고르면, 최고의 커플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그 좋은 걸, 난 어떻게든 숨기려 애썼으니- 나도 참…….
D, 네가 후회할 것 첫 번째. 넌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 될 가능성을 놓쳤어. 미안하지만, 지희씨는 참한 여자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좋은 친구가 될지는 미지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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