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11화 (11/29)

[11]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피렌체의 중앙역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로마행 기차 시간이 더 빨랐기 때문에 엘씨오와 나는 아힘이 기차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힘은 엘씨오와 악수를 하며 간단한 인사를 마쳤고, 내게는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후 찻간에 올라섰다. 나는 그와 로마에서 만날 약속을 정확하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주사위를 던졌다.

<잠시만요.>

찻간에서 멈칫 선 아힘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다시 내려왔다. 그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엘씨오만 아니었다면 멋대로 그의 입술에 거친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여 왔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더 스스로에게, 그리고 그에게 다짐했다.

<두고 봐요, 찾을 거예요. 반드시 찾을 거예요.>

<알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찾아서, 당신한테 엄청나게 단 초콜릿 케이크를 먹이고 말 거예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아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단걸음에 찻간으로 올라섰다.

<기대할게요.>

등을 돌린 채 아힘은 그렇게 말하고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30분 후에 엘씨오와 나는 밀라노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밀라노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실은 아힘이 탄 기차가 떠나가자마자 나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엘씨오는 이유도 모른 채 가라앉아있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손장난을 치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엘씨오를 볼수록 나는 우울해졌다.

짤막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나는 캄캄해진 차창 밖만 응시했다. 기차 안에서 내가 엘씨오에게 보인 반응은, 그가 뭘 보고 있냐고 물었을 때 여전히 차창 밖을 바라본 채 고개를 몇 번 가로저은 게 전부였다. 나는 오로지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에서 아힘이 캄캄한 차창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던 것만을 생각했다.

갑자기 나는 몹시 외로워졌다. 그도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오로지 캄캄한 곳을 응시하며 이런 외로움을 느꼈으리라 생각하니, 비참하고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없어졌다. 그는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단호한 거부를 준비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왔을 때처럼 텅 빈 가슴으로 한국으로 돌아가 D의 결혼식을 봐야 하는 걸까. 그가 없다면, 아힘 슈미츠가 없다면 차츰 D가 정리된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아니, 이제 그는 더 이상 D의 그림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전에 나는 내 가슴을 찢는 것만큼 다른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했다. 엘씨오. 차창에서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엘씨오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짓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할까. 할 수만 있다면 그냥 모른 척 그를 방패막이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엘씨오를 그렇게, D의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받아들였던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우욱-!>

역 근처의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구역질을 해댔다. 속이 까뒤집히는 것 같았다. 화장실 문밖에서는 엘씨오가 문을 열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우리 사이에 문이 몇 개씩이나 잠겨 있는 것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아요. 실은 아까부터 속이 안 좋았어요. 그 피자랑 파스타를 너무 허겁지겁 먹은 탓인가 봐요.>

<정말 괜찮아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나를 부축하는 엘씨오의 얼굴을, 그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며 눈알이 시큰거렸다. 이 자리에서 그냥, 울며불며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엘씨오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한국에서 가지고 온 비상약을 먹고 얼굴을 씻었다. 찬물을 가득 채운 세면대에 얼굴을 담갔다. 그 속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머리를 들었다.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다.

<엘씨오, 나가요. 밀라노의 야경을 보러 가야죠.>

나는 메르칸티 광장 주변의 화려해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엘씨오를 끌었다. 그 전에 먼저 두오모 광장을 지나쳐야 했는데, 밀라노의 두오모는 피렌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피렌체의 것이 우아하고 오만한 여왕과 같았다면, 고딕양식의 건축물인 밀라노의 두오모는 마치 위협적인 마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건물의 끝까지 손이 닿을 일은 결코 없겠지만, 만약 그 뾰족한 첨탑의 끝에 손가락을 잘못 찔렸다간 몇 천 년을 잠들어 있어야 하는 마법에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멀리 그리고 작게 보이는 첨탑의 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마법은 없었다.

<미나, 정말 괜찮겠어요? 속도 안 좋은데 오늘 저녁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게 어때요?>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등을 돌리자마자 엘씨오는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당신은 배고프지 않아요? 속은 괜찮아요. 오늘은 엘씨오한테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싶을 뿐이에요. 이번엔 채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먹을게요. 같이 먹어요, 네?>

걱정스레 내 안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던 엘씨오는 그가 주문했던 연어 스테이크가 나오자 두 눈을 반짝이면서까지 칼질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그는 노란색의 소스가 입가에 묻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냠냠 소리가 날 만큼 맛있게 먹던 그도 순간 멈칫 하더니, 곧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메인 요리인 버섯 리조또를 몇 번 깨작거리다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 아예 샐러드 접시를 앞으로 가져와 훈제 고기는 빼고 야채만 골라 먹었다. 아무 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힘을 내야 했다. 엘씨오에게 말한 대로 나는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그리고 엘씨오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여러 번 물을 마셨다.

익숙지 않은 탄산수가 목에서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듯 했다. 그리고 목으로 넘어간 뒤에 남는 쓴맛이 미묘한 느낌이었다. 그게 뭐더라……. 순식간에 끓어올랐다가 뒤에는 쓴 맛을 남기는 것.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이별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빌어먹을 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아니 어쩌면 조만간 쓴 맛을 보게 될 지라도, 포화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엘씨오. 한국에서는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참 중요한 일이에요. 입을 크게 벌리고 쌈을 싸먹기도 하고, 마늘 냄새가 입안에 오래 남기도 하고, 고춧가루가 이 사이에 낄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정말 친한 사람들과 밥을 먹어요. 또는 정말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밥을 먹죠. 우리나라에서 밥 먹자는 제의를 받으면, 관심이 있다는 표시거나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예요.>

<그래서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나랑 밥 먹고 싶어 했구나->

엘씨오는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는 ‘그런 거죠’하고 동조해 주었다.

<엘씨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아주 가끔씩이라도 이렇게 당신과 밥을 먹고 싶어요.>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하지만 난 아주 가끔은 싫은데요?>

장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엘씨오는 수줍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금방 빙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덮었다. 그리고 힘없이 자신의 손을 토닥거리자 엘씨오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당신은 그만큼 나한테 좋은 사람이에요. 뻔뻔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당신을 잃는 건 나한테도 정말 안타까운->

<잠깐만요. 그만 나가요. 호텔로 돌아가요. 여긴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엘씨오는 내 양 손바닥 사이에서 손을 빼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엘씨오를 잡아끌고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이름이 익숙한 브랜드숍에 들어가 그의 얼굴색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앤드류스타이를 하나 골랐다. 숍의 입구에서 엘씨오는 계속 밖을 향해 서 있었다. 나는 점원에게 선물 포장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이지 않도록 쇼핑백 깊숙이 넣으며 숍을 나왔다.

<이제 말해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엘씨오는 불안한 듯 방안을 휘둘러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마신 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침대 위에 어설프게 엉덩이를 걸치고 구부정하게 앉았다. 맞은 편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자 엘씨오는 또 한 번 방안을 걸어 다니다가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기며 의자에 앉았다.

<엘씨오, 먼저 말하지만, 나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가족이나 친구, 연인, 누구한테도 당신만큼 살뜰한 관심을 받은 적 없어요.>

<그냥 말해요. 그런데 이제 내가 싫어졌어요?>

<아니, 그건 절대 아니에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인데, 애인 사이는 싫어요?>

엘씨오는 떼쓰는 아이처럼 조급함을 드러냈다. 그의 눈이 반질거리는 것을 본 순간 시선이 절로 비켜갔다. 나는 그의 발끝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벽걸이 시계의 시침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미나, 그냥 말해줘도 돼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요? 내가 너무… 서툴렀어요? 그러니까, 연인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에요.>

<당신한테 잘못은 없어요.>

<아니면, 혹시… 나랑 같이 자는 게 무서워요? 갑자기 내가 미친놈처럼 당신을 덮칠까봐?>

<아- 엘씨오…….>

나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잔뜩 겁먹은 것이었다. 나를 대하면서 그는,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게다가 그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나에게 들켜버린 것이었다. 나는 단순한 잠버릇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수치였을 것이다.

<정말 당신 잘못은 조금도 없어요. 단지 내가… 내 마음이 따라주질 않아요.>

<그건 결국 내 잘못인 거잖아요. 내가 당신을 만족시켜주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의 무릎 앞에 주저앉은 채 그의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가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꼭 누군가의 잘못을 따지자면 그건 내 쪽에 있었다. 결국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되겠지만, 그가 혹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D로부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내 손으로 휘두른 칼의 상처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언젠가는 말끔하게 낫는다. 하지만 스스로 입힌 상처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간다. 특히 긴 시간동안 몇 번이나 상처를 내고 상처를 다스리는 것을 반복했던 내 경우에는 중요한 건 20년이 아니라 자해의 상흔이었다. 그 상흔이 안타까워서 20년을 끌어왔다.

엘씨오, 이 착한 남자에게 나는 아주 날카롭고 긴 칼을 휘둘러야 했다. 단 한 번에 잘리고, 그리고 쉽게 아물고, 흔적이 잘 남지 않도록. 그리고 그 칼은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축 늘어진 그의 두 손을 아프도록 꽉 붙잡았다. 그리고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엘씨오, 잘 들어요. 내 마음은 당신을 향하지 않아요. 아힘 슈미츠, 그 사람이 날 흔드는 사람이에요. 당신과 더 이상 이런 관계를 이어갈 수 없어요.>

천천히 고개를 드는 엘씨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찌푸린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달싹이던 그가 내 손에 감싸인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리고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나는 그때서야 그의 손이 아주 섬세한 것을 알았다. 아마도 아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학생인 그의 전공과목조차 물어보지 않았었다.

<언제부터에요?>

<모르겠어요.>

<어제, 나하고 섹스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네.>

원래 진한 다갈색을 띠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좀 더 짙어보였다. 이마 아래로 그늘진 그의 얼굴의 음영이 다소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그 사람하고 잤어요?>

<…….>

<잠결에 얼핏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릴 들었어요. 그 사람 방에… 갔나요?>

<…갔어요.>

<내가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는 동안, 몰래?>

<네, 그랬어요.>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엘씨오는 그런 나를 또한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천천히 그의 섬세한 손을, 깍지 꼈던 손을 풀었다.

<미나, 여러 남자들과 동시에 즐기는 게 취미에요?>

싸늘한 그의 말투에 깜짝 놀라 나는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는 고함으로 질러야했다. 그가 순식간에 내 머리카락을 잡아챈 것이었다.

<아악! 에…엘씨오, 이거 놔, 놔요! 이게 무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 따라 나도 그의 힘에 의해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야 했다. 뒤로 잡아당겨진 머리카락 때문에 고개가 뒤로 꺾였다. 손을 휘둘렀지만 단단한 그의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지만 머리채를 자꾸만 흔드는 탓에 나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천장밖에 볼 수 없었다.

<으- 이거, 놔요! 엘씨오, 그만! 하지 말아요! 엘씨오, 제발!>

호소하듯 그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힘의 주인에게 겁을 먹었다. 그가 보였으면 했다. 그가 어떤 소리를 들려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그가 엘씨오인 것을 내가 알 수 있게 해줬으면 했다. 나는 문득 베네치아행 야간열차의 쿠셋에서 스페니쉬 남자에게 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나는 다급하게 엘씨오를 불렀다.

<아악! 엘씨오! 보여줘요, 말해요! 아- 아! 엘씨오, 엘씨오!>

그러나 그는 욕설도 하지 않고 고함을 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머리를 휘어잡고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는데, 그의 손에 밀리기도 하고 끌리기도 하며 나는 침대의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쳐 그 위로 넘어뜨려졌다.

푹신한 매트리스 덕분에 실제로 몸은 아프지 않았지만, 3층 높이에서 콘크리트 바닥 위로 떨어진 것처럼 나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내 몸 위로 올라서는 것이 느껴졌다. 귓속이 왕왕거렸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옆으로 꺾인 고개 때문에 반대쪽의 팽팽하게 당겨진 목 쪽에서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왜… 왜 난 안 되죠? 왜 또 이렇게…….>

엘씨오는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었다. 눈을 뜨자 자연스레 눈물이 귀 뒤쪽으로 흘러내렸다. 가슴이 심하게 들썩이는데 그가 그 위에 엎드리고 있어 숨쉬는 것이 불편했다. 팔을 빼내어 그의 어깨를 잡으려 했는데, 손이 떨렸다. 대신 나는 두 손으로 내 두 눈을 가렸다.

<엘씨오… 비켜줘요.>

쉰 목소리가 나왔다. 엘씨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는 어미개의 젖을 빠는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내 목을 빨았다. 그의 까끌까끌한 혀가 목의 여린 살을 빨아 당기는 것이 따갑게 느껴질 때 즈음, 엘씨오는 내 몸 위에서 비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 반대쪽에서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움츠린 채 누웠다. 곧 그는 밀라노 두오모의 첨탑 끝에 손가락을 찔린 것처럼,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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