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10화 (10/29)

[10]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에는 완전한 밤이었다. 안개가 낮게 깔린 도시는 그러나 유럽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치 마법에 빠진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 거리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걸었다. 오후에 비가 왔었는지 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우리는 활동성을 고려해 역 주변의 유스호스텔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다. 방을 잡는 데에 조금 의견이 갈렸는데, 엘씨오는 추억을 되살리는 겸 트리플 룸으로 잡아 셋이 함께 쓰자고 했고 나는 각자 따로 방을 쓰거나 아니면 도미토리 룸을 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힘은 오늘만은 자신은 무조건 조용히 있고 싶으니 더블 룸이든 트리플 룸이든 혼자 편하게 자고 싶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더블 룸을 두 개씩 잡고 아힘이 혼자 하나의 방을 쓰고, 나와 엘씨오가 다른 하나의 더블 룸을 함께 쓰기로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엘씨오가 약속한 근사한 저녁 식사를 위해 곧장 다시 나와야 했다. 침대를 보자 나는 근사한 저녁 식사고 뭐고 그냥 곯아떨어지고 싶었다. 그것은 아힘도 마찬가지였는지 밖으로 미적미적 걸어 나오는 그의 얼굴은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엘씨오만이 생생한 얼굴이었다.

엘씨오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하필 그곳이 미켈란젤로 언덕 가운데에 있다는 말에 아힘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약속은 없던 걸로 하자고 말했지만, 엘씨오의 강압에 못 이겨 우리는 반쯤은 눈을 감은 채 다리를 움직였다. 간간히 내가 하품을 하자 엘씨오는 힘내요!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이게 바로 피렌체군요.>

하지만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의 비싼 식사가 아니라, 미켈란젤로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야경이었다. 아르노 강가를 따라 밝혀진 가로등이 길게 늘어진 진주 목걸이처럼 보였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성처럼 우뚝 솟아 있는 두오모 성당의 지붕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춥고 피곤해도 이렇게 나온 보람이 있죠?>

엘씨오가 뿌듯한 듯이 말했다. 아힘도 그 말에 동감하는 듯 멀리 베키오 다리를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누군가 옆에서 통기타를 쳐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닥이 젖어있는 탓인지, 거리의 악사를 볼 수는 없었다.

호스텔로 돌아올 때쯤에는 아힘의 표정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엘씨오에게는 근사한 저녁 식사와 더불어 멋진 야경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마주한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뒤로 돌아보았지만, 그는 내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미나, 내가 아름다운 야경을 선물했으니, 당신도 나한테 아름다운 걸 줘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엘씨오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내가 잡힌 손을 후다닥 빼 버리자 엘씨오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별로였어요? 그날 기분 안 좋았어요?>

<아니에요, 엘씨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복잡한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하루만, 단 하루만 더 시간이 있다면 이 남자에게도 그리고 내게도 준비가 될 것 같았다. 24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마법이 벌어질 리가 없다면 대단한 것이 변할 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그 단 하루가 간절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여긴 벽도 너무 얇고…….>

<하긴, 오늘 좀 피곤하긴 하죠? 알았어요. 자요. 오늘은 내 잠버릇도 위험할지 모르니까 수면제를 조금 먹고 잘게요. 대신 내일 늦게 일어나도 너무 뭐라고 하진 말아요, 알았죠?>

먼저 씻어도 돼요? 묻는 엘씨오의 뺨을 나는 조금 측은한 듯 어루만졌다. 얼마 전에는 이 남자를 그저 수컷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남자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 같은 표정을 지을 때면, 차라리 아무 것도 깨닫지 않았으면- 싶을 분이었다.

<미나. 저기… 우리, 로마는 가지 않는 게 어때요?>

꽤 오랜 시간동안 뜨거운 물로 몸을 씻은 후 나왔을 때, 엘씨오는 벌써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눈을 감고 있기에 발걸음을 조심조심해서 내 침대로 들어가는데,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엘씨오가 대뜸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생각을 아주 많이 해봤는데- 하는 말투로,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웃으며 가볍게 여겼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트레비분수, 그리고 바티칸은 꼭 한번 가고 싶었다구요, 난.>

<그거 다 광고만 거창하기만하지, 실제로 보면 별거 없어요! 내가 나중에 사진으로 보여줄게요.>

<엘씨오, 사진은 나도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어요. 난 그냥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싶고 냄새를 맡고 싶고 귀로 듣고 싶고, 그렇게 느끼고 싶어요. 그리고 어차피 당신은 로마로 가야 하잖아요? 집에 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나는 순간 그가 진심으로 나 때문에 집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어쩌나 두려웠다. 우리의 원래 계획으로는 그의 고향인 로마까지만 같이 다니고, 그가 마지막 학기를 위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올 때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운명의 신에게 맡길 것.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설마, 집이고 뭐고 없이 주욱 나를 따라오기로 결심했다면, 그가 그처럼 내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또 그에게 그 결정적인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까 고민하며 아득해졌다. 안 돼. 나는 다른 방향으로 그의 생각을 옮기려 애써야 했다.

<엘씨오. 혹시 집에 가기 싫어서 그래요? 당신 어머니가->

<아, 그거 아니에요. 어머니가 내 트라우마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우리 모자 사이는 아주 좋아요. 그저… 당신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요!>

손이 절로 머리로 올라갔다.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이건 정말 안 되는 일인데. 나는 이마를 짚은 채 이를 악물었다.

<엘씨오… 나랑 약속했잖아요.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기로. 진지하지만 너무 무겁지는 않게. 일방적으로 한 명이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면 두말없이 물러서기로 했죠? 지금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어떻게 할 거에요?>

<아니에요, 미나!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로마에 가지 않겠다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아니, 그렇다고 당신과 좀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구요. 다만, 난 그냥- 하루라도 다른 곳을 둘러보고 싶어요. 단 하루만이라도, 그 시간동안 어떻게든… 노력할 테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문법에 안 맞는 영어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탓도 있었지만, 의미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조금 섭섭하기도 한 마음으로-아아, 나는 정말 빌어먹을 자식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씨오. 고개 들어봐요. 어쨌든- 집에 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니에요. 가긴 가야죠.>

<알았어요. 그럼, 하루만이에요. 단 하루만, 당신도 그리고 나도 유예기간을 가져요. 됐죠?>

엘씨오는 안심한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가 등을 돌려 침대를 정리하자 뒤에서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미안해요.>

기가 죽은 모습에 측은해져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하고 달래어주었다. 엘씨오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수면제의 영향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엘씨오는 대화를 끝내고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코까지 골았다. 나는 문득 그런 그가 귀엽다고 느꼈다. 생각해보니, 내가 엘씨오를 받아들인 것이 그의 저돌적인 남성성 때문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모성애-아니, 부성애-를 자극하는 점 때문인 것 같았다.

내 어릴 적 꿈은 동물보호운동가, 좀 더 현실적으로는 수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무엇도 되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동물들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동물애호가와 엘씨오의 연관성이라-. 나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자고 있는 엘씨오의 뺨을 한번 쓸어주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맞은 편 방의 문을 두드렸다.

<아직 잠들지 않았으면 문 좀 열어줘요. 할 말이 있어요.>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문도 열리지 않았다. 잠들었거나, 얼굴을 보기 싫거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섰다. 엘씨오가 잠들어 있는 방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있을 때, 뒤에서 문고리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무슨 말로 내 속을 뒤집을 계획이죠?>

그가 팔을 꼰 채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가 문을 닫아 버릴까봐 얼른 문을 밀고 들어가 버렸다. 뒤에서 아힘이 황당한 듯 코웃음을 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일본 사람들은 부담스러울 만큼 예의가 바르다고 하던데, 모두 그런 건 아닌가 보군.>

한국이야 말로 동방예의지국이다! 라고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꽤 여러 가지 일을 펼쳐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암담해졌다. 그러니까… 이건 서서히, 우선 한 고비를 넘긴 다음에 해결할 일이라고 여겼다.

<빨리 말하고 나갈게요. 나도 피곤해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아요. 남자고 여자고 간에, 어쨌든 당신한테 고백한 사람한테 그렇게 무작정 비난하고 경계하는 건, 그것도 별로 예의는 아니잖아요. 난 당신하고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요. 어쩌다보니 계속 부딪히는 것뿐이지, 그럴 때마다 나도 정말 혀를 깨물고 싶다구요.>

내가 우물쭈물 거리며 하고팠던 말을 쏟아내자 그는 그래도 내가 조금은 불쌍해 보였는지 한숨을 푹 내쉬곤 침대 옆 의자에 앉으라고 권해주었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담배 한 개비와 지포라이터를 가지고 창가 옆으로 가 기대어 섰다. 창문을 열고, 그는 볼을 쏙 빨아들이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지포라이터를 열 때 경첩에서 나는 경쾌한 소리와 불꽃이 점화될 때의 펑- 하는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말해요.>

나는 내가 뭘 하러 이 방에 쳐들어왔는지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앉아 담배를 문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신도 내일 저녁 즈음엔 여길 떠날 거죠? 그리고 어디로 갈 거죠?>

<내가 그걸 왜 당신한테 말해줘야 하죠? 왜, 또 당신네들도 마침 그곳에 갈 계획이었다면서 따라나설 생각이신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구요. 알았어요, 내가 먼저 말할게요. 우린 내일 밀라노로 가요.>

<아쉽게 됐군요. 난 내일 떠나는 건 맞지만, 밀라노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 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로마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다. 언젠가 그에게 말했듯이, 여행자들의 생각은 다 그게 그거 아니던가.

<그래요? 아쉽네요. 그리고 저기…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요. 당신 이야기가 우스웠던 건 아니에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어요. 난 정말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얘긴 더 이상 하지 맙시다. 이랬든 저랬든, 지난 일이고 다시 꺼내봤자 기분만 더 나빠지니까. 사과는 받아줄게요.>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전혀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어보였다. 그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새하얀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자존심 따위는 여행 중에 쓸데없는 짐처럼 조금씩 버린 것인지 그가 내게 어떤 모진 말을 해도 모두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강민하, 참 처량하고 궁상맞다. 나는 담배 없이도 입안이 씁쓸했다.

<정말 당신을 비웃은 게 아니에요. 난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에요. 나도 까를교 위에서 당신과 같은 소원을 빌었다구요.>

아힘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담배는 조금씩 더 줄어들었다. 나는 그것이 카운트다운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초조해져 왔다.

<동병상련이란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뭔가를 잊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건 당신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언젠가 잊게 되고, 당신은 내게 그걸 좀더 앞당겨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그렇게 날 경계하지는 말아줬음 좋겠어요.>

<당신은, 사랑이 그렇게 쉬운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또 빨리 그걸 잊고 치유하고.>

<……. 20년이 걸렸어요. 그동안 계속 혼자 사랑했고 혼자 이별했고 또 혼자 다시 재회했죠. 그걸 20년 동안 몇 번이나 반복했어요. 그러면서 계속 내 자신을 속였고 저주했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까지 왔을 때, 난 최악으로 떨어져 있었어요. 그리고 난 도망쳤어요. 그런데 여기서 당신을 만난 거예요. 당신 말대로 난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인간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내 맘대로 되었다면 나라고 왜 예전이나 지금이나 좀 더 쉬운 상대를 고르지 않았겠어요? 당신이 날 미친놈 취급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아힘, 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벼랑 끝이라구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잡고 싶은 게 당신인 거예요.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날 도와준 것처럼 나도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나자 숨이 찼다. 나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마른 침을 삼키자 목이 칼칼해져왔다. 그리고 그가 피우고 있던 담배가 그의 손가락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아힘은 그것을 창틀에 놓아두었던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곳에서 그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당신이 날 도와줄 수 있을지 없을지 말입니다.>

<당신은 확신이 서야만 행동하나요? 나는 기대를 가지고 행동해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고요하게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가 발을 끌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담배냄새가 점점 더 진하게 맡아질수록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아예 숨 쉬는 것을 멈추어버렸다.

<눈 떠요.>

가까이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뜨는 대신 엉뚱하게도 막혔던 숨을 터뜨렸다. 하아하아-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크게 울렸다. 덕분에 심장은 더 빨리 뛰었다. 하임은 다시 한 번 ‘눈 떠 봐요’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나는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곤 곧바로 탁자의 끄트머리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계속 생각해 봤어요. 내 어떤 눈빛이 당신을 오해하게 만들었는지. 어쩌면 당신 말이 옳은 지도 몰라. 당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궁금해서든 어쨌든, 난 그냥 당신이 궁금했던 것 같아요. 어떤 의미로든 난 당신을 응시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당신을 받아줄 이유가 되진 않아요. 거기다 난 어설픈 삼각관계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어요.>

<그에게는 곧 모든 걸 말할 거예요. 나도 그런 건 싫어요. 이렇게 해요. 여행이 주는 흥분과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당신 의견, 받아들일게요. 곰곰이 생각해볼 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다시 한 번 생각해줘요. 그리고 로마에서 만나요.>

더 이상 말해봤자 긍정적인 대답을 얻기는 힘들 것 같아 말을 마치자마자 일어서 방문을 향해 걸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정말 끝일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붙잡은 것은 내가 방문의 손잡이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로마에서 만나자고 해 놓곤 정확한 약속도 없이 그냥 도망가면 어떡합니까?>

그는 여유만만한 듯 웃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우선 이 방을 좀 나가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조금 열었지만 그가 한 손으로 곧바로 닫아버렸다. 머리꼭지 위에서 가늘게 그의 숨이 느껴졌다.

<그, 그냥- 그냥 어떻게든 만나겠죠.>

<동양철학적인 생활습관이군요. 우연에 맞기겠다? 그렇다면 나한테 더 유리한 건 알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이 유리한 입지를 선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한번 노려보곤 그가 잡고 있는 문을 억지로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문이 닫히기 전 잠시 돌아봤을 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이 절로 닫힐 때까지 나는 엘씨오가 잠들어 있는 방의 문을 열 수 없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시선에 나는 ‘반하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하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햇빛 속에 있는 피렌체는 밤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피렌체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엘씨오의 관광 가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르네상스의 꽃이라는 시티네임답게 고풍스러운 야외미술관 같은 시뇨리아 광장과 우피치 미술관은 아무리 문외한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예술품 그 자체였다. 우피치 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몇 시간동안 기다리고 서 있는 동안, 길게 이어진 회랑 줄기둥의 조각상에서 나는 얼핏 어떤 음률을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테의 집을 지나치면서 아힘은 무어라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베아트리체’ 어쩌고 하는 것 같았다. 전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두오모에도 가 보았다. 우아하고 섬세한 여왕처럼 치장한 건물은 압도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한국에서 한참 유행이었던 일본 영화 한편을 기억해 냈다. 피렌체를 배경으로 해서 과거에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나는 내용이었던가. 나는 종탑으로 올라가 볼 것을 주장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시내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건물 자체는 새하얀 색이 많았는데, 바로 위에서 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려 그것인 토스카나 지방의 여과되지 않은 햇빛에 바랜 듯한 색감의 지붕이 덮여있었다. 그것이 순결해 보이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굉장히 외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점심은 역시 엘씨오의 소개로 굉장히 외진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먹게 되었다. 메뉴는 우리들로 치자면 떡볶이나 김밥처럼 검소하고 친근한, 그들의 피자와 파스타가 전부였다. 미국식 피자와 파스타에 익숙해져있는 터라 처음에는 이태리식 전통 피자와 파스타가 조금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먹을수록 미국식의 것보다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파스타가 담긴 접시의 바닥을 삭삭 긁자 엘씨오는 턱을 치켜든 채 웃었다. 아힘 또한 묵묵하게 그릇을 비웠다.

나는 디저트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엘씨오는 우리를 골목 구석구석으로 끌고 갔다. 웬만한 여행자는 잘 모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굉장히 유명한 100년 전통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골목은 성당이나 다른 예술과 종교를 위한 건축물과는 달리 굉장히 좁고 어둡고 또 길었다. 복잡한 골목을 요리조리 앞장서 걸어가는 엘씨오와 아힘을 한 걸음 뒤처진 채 바라보자니, 지금 이 길이 마치 어지러운 미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 빨리 와요.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버리고 가 버릴 거예요.>

엘씨오가 돌아보며 농을 걸었다. 그러자 아힘도 고개를 돌려 느릿느릿 걷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금으로 발랐나. 순간 불끈, 하고 치솟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 말 없이, 빨리 오라는 투로 그저 손가락만을 까딱였을 때, 나는 군말 없이 달려갔다. 그 옆에 서고 나니 이 남자가 몇 살인지 궁금해졌다.

<아힘. 실례지만, 몇 살이죠?>

<유레일 유스패스를 쓸 수 없게 되는, 딱 그 나이에 걸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스물여섯 살?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린 채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죠?>

<예의범절이 바른 우리나라에서는 어른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면 꿀밤을 맞죠. 차마 당신한테 그럴 순 없으니까 대신 노려보는 겁니다.>

<그러는 어른께서는 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시기에?>

앞서 걸어가던 엘씨오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내 나이의 숫자를 표시해 보였다. 아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예의범절이 바른 당신 나라에서는 너무 겸손해서 자신의 몸에게까지 겸손을 강요하는가 보군요.>

진지한 말투에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꿀밤을 한 대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자면 손을 위로 높이 뻗어야 할 텐데, 상상해보니 그 모양이 그리 멋있지는 않을 것 같아 그냥 상상으로만 말았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100년 전통은 과연 사실인 것 같았다. 물론 맛도 훌륭했지만 가게의 외관은 정말이지…….

<건물이 굉장히… 운치 있네요.>

내가 중얼거리자 엘씨오는 그것을 주인에게 통역해주었다.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내던 주인은 멈칫하며 내 얼굴을 보곤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훨씬 더 단단하고 크게 굴렸다. 굉장히 순진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엘씨오는 주인에게서 콘을 받아 내게 먼저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아힘에게 주었다.

<난 아이스크림 안 먹어요.>

<먹어요, 내가 사는 거니까.>

콘을 쥔 채 팔을 흔들자 아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받아들었다. 엘씨오는 두 번째 아이스크림도 내게 먼저 건넸다. 나는 그것을 엘씨오에게 양보했다. 둘이서 당신 먼저, 당신 먼저를 외치며 투덕거리니 주인은 재빨리 세 번째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골목을 다시 나와 요리조리 다시 빠져나가면서 나는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그러나 아힘은 찡그린 얼굴로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는다는 얼굴로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먹어 해치웠다.

<맛없어요? 난 맛있는데.>

<단 걸 잘 못 먹어요. 그리고 애도 아니고 걸으면서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다니…>

아힘이 투덜거렸다. 참자, 참자, 참을 인자를 속으로 몇 번이나 그리고 있는데 엘씨오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운 점이 그의 매력이에요.>

길을 잃건 말건, 나는 발걸음을 빨리해 그 둘을 앞질러 걸었다.

*                                               *                                               *                                              *

-인사해, 여기는 내 친구 강민하. 그리고 이쪽은 서지희.

-반가워요. 처음 뵙는 거지만, 전 민하씨 얘기 워낙 많이 들어서 왠지 낯익은 것 같네요. 민하씨한테 잘 보여야 된다고 신신당부 했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그 후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지껄였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꽤 잘 웃고 잘 떠들어댄 것 같은데, 어때 D, 그날 내 모습이 어색하진 않았니? 행여 너한테서 전해 들었던 내 모습과 달라서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난 잘 모르겠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고 또 그녀에게 전했던 내 모습이, 진짜 내가 맞는지도 확신이 서질 않아. 난 내 어떤 모습을 너한테 보여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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