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8화 (8/29)

[8]

차장은 내 얼굴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그냥 단순히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 반항하다 얻어맞은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차장은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일을 겪게 되셔서 유감입니다. 간단한 응급치료는 여기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려서는 역 안에 있는 경찰서로 가셔서 신고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그 사람을 봤다면 좋겠지만…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혹시 진술을 할 때 필요하다면 제가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지혈제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 개자식은 도망쳤다. 아니, 어차피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지는 못할 테니 어딘가에 숨어있겠지만. 승객을 실은 달리는 기차는 양쪽 모두에게 자유롭지 못하다. 차장은 문제가 커질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간단한 치료-라고 해봤자 피를 닦아내고 찢어진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것뿐이었다. 코뼈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를 끝내고, 도착시각까지 나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아힘 슈미츠는 미친놈-나-을 차장에게 데려다주고-아니, 끌어다 던져놓고- 어디론가-아마도 자신의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차창 밖으로 서서히 해가 떠서 어렴풋하게 밝아오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피곤함과 노곤함과 졸음과 갑자기 탁 풀려버린 긴장과, 그러나 또 다른 긴장과 함께 오기가 내 안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머릿속을 얼음 칼로 가른 듯 선명한 어떠한 형태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기차는 싼타루치아 역에 도착했다. 찻간에서 내린 나는 플랫폼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나 찾아서 죽이고 싶은 남자와 찾아서… 그냥 보고 싶기만 한 남자, 둘 중 누구도 찾아낼 수 없었다.

멀리서 엘씨오가 웃으며 다가오다 내 얼굴을 보곤 굳어진 얼굴로 뛰어왔다.

<이게 어떻게… 무슨 일이에요? 아니, 누가… 대체 누가.>

<난 괜찮아요, 엘씨오. 목이 조금 졸리고 코를 맞았지만 크게 다친 건 아니에요.>

<이게 크게 다친 게 아니라구요?! 제기랄! 가요, 저기 경찰서가 있어요.>

엘씨오는 내 어깨에서 배낭을 벗긴 뒤 대신 들고는 내 팔을 끌어 앞장을 섰다. 붉으락푸르락한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누군가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그것만으로도 치료가 되는구나, 생각했다.

<엘씨오. 못 잡을 거예요. 서양인이 동양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흑인 백인 스페니시 정도만 구분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잊고 싶어요. 우린 오늘 저녁에 베네치아를 떠날 거예요. 그냥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봐요, 우린 지금 지상낙원 베네치아에 와 있는 거예요.>

물의 도시답게 역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선착장과 수상버스가 현실감 없어 보였다. 그동안 다녔던 도시가 그럭저럭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생각될 정도였다면 베네치아는 마치 꿈속의 풍경 같았다. 완벽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광경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미리 지도를 사놓기는 했지만, 지도가 오히려 더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도 없이 다니는 것 또한 위험한 모험이기는 했다. 몇 개나 되는 다리를 건너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요리조리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나는 마치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선가 커다란 토끼가 튀어나오거나 체스를 두는 여왕을 만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대충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쪽으로 골라 다니다보니 길을 잃지 않고 산마르코 광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다고 사전에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엘씨오는, 그러나 전혀 입맛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이제 선은 명확하게 그어졌는데, 그것을 나 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 자상한 남자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먼저였다.

<배고파요, 엘씨오. 밥 먹고 난 다음엔 종루에 올라가 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번에 올라가는데 6유로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했지만 또 엄마 같다는 소릴 들을까봐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눈앞에 펼쳐진 베네치아의 전경에 나는 6유로가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기 봐요, 저긴 두칼레 궁전, 또 저어기가 쥬데카 섬인가 봐요.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데 엘씨오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엘씨오, 표정 좀 풀어요. 지상낙원에서 그런 얼굴이라니, 아깝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엘씨오. 난 지금 좋은 것만 생각하고 싶어요. 난, 그래야 해요.>

<……. 미나, 당신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엘씨오, 지금은 웃어요. 네?>

그의 입술 양가를 손으로 잡고 억지로 위로 올리자 그제야 엘씨오도 웃음을 터뜨렸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그는 잠시 또 뚱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빙긋 웃어보였다.

<미나, 내가 계속 걱정하는 게 싫다면, 내가 당신 기분을 풀어주게 해 줘요.>

<전달이 잘 안 돼요. 당신이 내 기분을 풀어줄 것이라는 뜻인가요?>

<네, 내가 당신 기분을 풀어준다. 그걸 허락해 달라는 말이에요.>

의미만 통하면 된다지만, 가끔은 문법 위주의 한국식 영어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도 있구나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정리된 문장을 완성하고 난 후에야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하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냥 기분을 풀어주면 풀어주는 거지 그걸 뭘 또 허락까지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씨오…….>

그러나 그걸 왜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일인지는 곧 알게 되었다.

곤돌라. 베네치아하면 떠오르는 것. 베네치아 시내의 운하를 운항하는 중요한 교통수단.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것은 꽤 큰돈을 지불하고야 탈 수 있는 관광코스가 되어 버렸다. 멀쩡한 두 다리 놔두고 한가하게 그게 무슨 짓이람, 거기다 100유로라니. 베네치아로 오기 전 나는 엘씨오에게 곤돌라의 사기성에 대해 분개하며 말했었다. 그때 엘씨오는 아주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엄마야.’

<걱정 말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관광객한테나 그렇게 비싸게 받거든요. 난 이탈리아 사람이라구요.>

그리고 엘씨오는 곤돌리에와 흥정에 들어갔다. 듣기에 익숙지 않은 발음의 언어를 엘씨오는 아주 익숙하게, 그리고 약간은 흥분하며 쏟아내었다. 그것이 흥정이 쉽지 않아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입 밖으로 꺼내는 모국어에 대한 반가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심각한 표정이었다가 또 금방 화난 표정이었다가, 다혈질적인 이탈리아 남자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해결이 났는지 둘은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었다.

<됐어요. 50유로에요. 이정도면 선물 받는 당신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죠?>

생활인 엘씨오에게 나는 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곤돌라. 베네치아하면 떠오르는 것.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운하를 운항하는 중요한 교통수단. 나는 그것이 관광객을 노린 꼼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천만에. 100유로를 모두 냈어도 그리 아깝지 않을 돈이었다. 걸어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려한 춤을 추듯 우아한 움직임으로 곤돌라를 운행하는 곤돌리에는 50유로의 손해와는 상관없이 상냥하게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었다.

좁은 물길에서 간간히 다른 곤돌라와 스쳐 지나갈 때면 그쪽의 손님들과 우리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의자를 꽉 붙잡곤 했다. 하지만 기가 막하기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곤돌라는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향해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엘씨오와 내가 곤돌리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지어보이자 그는 근사한 몸짓으로 모자를 벗었다 다시 쓰며 인사를 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른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엘씨오가 웃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그것을 깨뜨려야할 때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눈을 뜬 채 엘씨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 잠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한국말에 나도 엘씨오도 그리고 곤돌리에도 멈칫했다. 어감에서 무언가 다급한 말인 것을 알아챘을 것이었다. 그러나 곤돌라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곤돌리에는 다시 안정적으로 곤돌라를 몰았다.

<뭐에요? 미나, 무슨 일이에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방금 스쳤던 곤돌라는 우리가 탄 것과 마찬가지로 곤돌리에의 유려한 동작으로 인해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곤돌리에에게 가려 조금만 보이는 금발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다. 아힘 슈미츠. 틀림없는 그였다. 아아, 왜 눈을 감았을까. 왜 좀 더 빨리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을까. 떠난 버스는 오지 않지만 최소한 브레이크는 있건만.

<미나. 뭘 찾아요?>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엘씨오는 나보다 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당신이 뭘 찾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나,  손에 잡히지 않는 걸 애써 잡으려고는 하지 말아요. 그건 아주 위험하고 힘든 일에요.>

엘씨오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건조한 입술의 각질을 뜯어냈다. 혀로 시큼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때 눈치 없는 곤돌리에가 근사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기가 바로 ‘탄식의 다리’입니다. 감옥의 통로인데,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너무 아름답지만 감옥을 나갈 수 없는 죄수들이 여기를 지날 때면 탄식을 하게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곤돌리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머리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안 돼.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 나는 혀로 입술의 피를 빨았다.

<내가 누구게요?>

<엘씨오.>

장난을 받아주지 않고 짧게 대답하자 엘씨오는 금빛 가면을 벗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영화 ‘아이즈와이드샷’에 나오는 가면무도회 씬에서 쓰이는 모든 가면을 주문했다고 알려진 가면 전문 판매점에 들어서면서부터 엘씨오와 나는 각자 정신없이 가면을 썼다 벗었다 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관광객들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우리는 허름한 옷차림과는 상관없이 마치 우리가 카니발을 즐기고 있는 귀족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그 어떤 것도 아닌 것처럼, 또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가면들을 쓰면 ‘나’는 사라지게 된다. 가면 뒤에 숨은 나는 귀족도 아니고 서민도 아니다. 멍청하게 20년을 짝사랑에 가슴앓이 해 온 미련한 멍청이도 아니고, 가지지 못할 게 뻔한 것은 아예 포기하고 보는 소심한 인간이 아니다.

엘씨오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는 마음껏 상점 안을 휘두르고 다녔다. 만나는 사람마다 손등에 키스를 하거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를 하면 그 사람들도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과장되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몸짓을 해보여도 아무렇지 않았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누군지 알 게 뭐람. 무슨 짓을 해도, 모든 것이 용납되는 카니발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얼마나 미친 짓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 대상을 찾았다, 드디어. 항상 스치기만 하는 남자, 뒷모습만 보여주는 남자. 내 발걸음은 전혀 서둘지 않았다.

<내가 누구게요?>

<…….>

금발 머리의 남자는 가면을 얼굴에 대보고만 있다가 갑작스런 내 등장과 뜬금없는 질문에 조금 놀란 듯 가면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내 눈을 응시했다. 나는 가면의 뚫린 부분을 아예 막아버릴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물론 눈 부위의 구멍이 없다면 아예 걸을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눈을 보인다면 가면 축제가 다 무슨 소용인가. 눈빛을 들킨다면 모든 것을 다 들켜버리고 만다.

<…내가 누구게요?>

<……미나모토.>

가면을 벗으면 끝장이다. 나는 내 얼굴이 토마토보다도 더 빨갛게 익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면 안에서 활활 익어가는 얼굴의 열감이 확 느껴졌다. 기세 좋게 말을 건넨 것까지는 좋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채 눈을 요리조리 돌리고만 있자 아힘은 한숨을 내쉬더니 걸음을 옮겼다. 나와는 상관없이 혼자 즐기고 싶다는 표시였다. 가면 속에서 나는 딱지가 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저기, 이곳에서 하루 묵을 건가요? 다음엔 어디로 갈 거죠?>

자리를 옮겨 다니며 유심히 가면들을 둘러보는 아힘의 주위를 계속 맴돌며 나는 귀찮게 굴었다. 가끔 엘씨오가 어디쯤 있나 둘러보기는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아힘은 졸래졸래 따라붙는 나를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그의 뇌리 속에 이미 나는 미친놈 혹은 어딘가 모자라는 바보였다. 하지만 그의 무관심에 상관없이 계속 이것저것 조곤조곤 질문을 해대니 그도 드디어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봐요. 난 그런 취미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당신이 아직까지 이성애자인 건 나도 확실히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 계속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봤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거기에 홀린 거예요.>

떼쓰는 아이처럼 나는 빠르게 말을 했다. 그리고 가면 안에서 혀끝을 깨물었다. 가면이 가지는 힘에도 한계가 있었다. 어린아이들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봤다고 그러는 거죠? 실례되게도 당신을 좀 빤히 쳐다본 적은 있어요. 하지만 그건,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 조금 여자 같아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라서 그랬던 것 뿐이었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맙소사. 나는 그저 술에 취한 기분으로, 또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으로 아무렇게나, 정말 말 그대로 떼를 썼을 뿐이었다. 억지를 부린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증거를 던진 것이었다.

<그게 내 착각이었다고?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아힘 슈미츠씨. 나는 한 번도, 동양인에게도 서양인에게도 여자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어요. 물론 동양인 남자가 서양인보다 체격이 작고 가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 정도의 남자를 여자와 혼동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당신 주위에는 성정체성이 모호한 여자들뿐인가 보죠? 그리고 당신은 그런 여자들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말이죠?>

<빈정거리지 말아요. 그래요, 내 눈빛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어요. 남자 같은 여자에게든 여자 같은 남자에게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곤 해요. 됐습니까?>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어요.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은 아무에게나 그렇게 꿰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홀리고 다닌다는 말이군요.>

<말조심해요! 당신은 왜 자꾸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죠? 당신 정말 날 조…좋아한다는 게 맞습니까? 그리고 아무에게나 홀린다는 말은 당신에게 더 적합하지 않나요? 당신은 지금 애인이 있잖아요. 이상한 트라우마를 가진 그- >

<엘씨오는! 엘씨오는… 그냥 잠시 여행 중에 같이 다니는 친구…에요. 아니, 실은 친구보다는 좀 더 가깝기는 하지만, 곧 그에게도 말할 거예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조…좋아한다는 건 사실이에요. 나도 인정하긴 싫지만, 어느새 그렇게 돼 버렸어요.>

고개가 숙여졌다. 벽에 걸린 거울 속에서 나는 내 목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귀가 간질간질했다. 아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어떤 말이라도, 차라리 서로 빈정거리며 시비라도 걸었으면 했다. 주위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익스큐즈미를 연발하며 어깨를 치며 걸어갔다. 나와 아힘 사이의 좁은 공간은 사람들의 행렬로 갈리게 되었다. 그 사이 아힘이 도망갈까 걱정되어 슬쩍 건너다보니, 그는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 그런 눈빛.

사람들의 행렬이 끝나고 나와 아힘은 다시 마주보고 서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화가 난 걸까. 내가 더럽다고 생각할까? 변태라고-.

<당신, 얼굴은 이렇게 달아오른 주제에.>

아힘의 손에 가면이 벗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원래 열감이 느껴지던 얼굴이었는데, 가면이 벗겨지자 마치 나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더욱 얼굴이 달아올랐다. 귀가 뜨거운 심장처럼 발딱발딱 뛰는 것 같았다. 나는 뜨거운 것을 만진 것처럼 두 손으로 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아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서 벗긴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금발머리카락에 숨겨진 귀가 조금 빨갛게 변한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뭘 하고 있어요?>

<엘씨오->

그리고 아힘은 가면을 다시 내렸다. 여전히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이었다.

<아니, 당신! 아힘- 아힘- >

<아힘 슈미츠입니다.>

<그래요, 아힘 슈미츠! 반가워요. 이렇게 또 보는군요. 그때 프라하에서는 정말 고마웠어요. 늦잠을 자느라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서 계속 안타까웠는데, 정말 반가워요.>

엘씨오는 아힘의 손을 잡고 강하게 흔들었다. 열정적인 악수에 아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게도 살짝 웃어보였다. 거봐라, 하는 비웃음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엘씨오, 나 아힘 슈미츠씨와 같이 가고 싶어요.>

엘씨오와 아힘의 악수가 그쳤다. 박력 있게 아래위로 움직이던 두 손이 중간에서 어설프게 우뚝 멈추었다. 나는 여전히 맞잡은 채인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                                               *                                               *                                              *

-아아, 이제 살았다.

-지옥 같은 취업난에서 벗어났으니, 그래, 생존을 축하한다.

-그럼. 그동안 집에서 은근히 눈치 보여서 밥도 제대로 안 들어갔거든. 오늘부터는 당당하게 고기반찬 해 달래야지.

-좋냐? 아직 빌빌대고 있는 친구 앞에서 자랑하니까?

-넌 아직 한 학기 남았잖아. 그리고 강민하야, 너는 취업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정 안되면 나한테 시집 와. 고생 안 시킬게.

_ …….

-쫄기는. 농담이다, 농담.

D, 말해봐. 정말 내 꿈이 너한테는 기껏 농담 따먹기 소재였니? 너처럼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예쁘고 능력 좋은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도 바라지 않았어. 내 꿈은 오로지 너였다. 말해봐, D.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니?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