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7화 (7/29)

[7]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붉어진 얼굴로 화를 내는 그 앞에서. 그래.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냐고. 그리고 언제 출발하는 지도 물어봤었다. 황당한 얼굴을 한 그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었다. 그는 내가 미쳤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미친놈한테는 괜히 거슬리게 굴어서는 안 되지. 더 발광을 해대니까.

그래서였을까. 그는 모든 걸 포기한 듯, 아니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베네치아, 이틀 후’하고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멍한 표정인 나를 내버려 두고 혼자 오페라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공연 시작 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가 자리에 앉은 나는 엘씨오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2부의 공연은 당연히 하나도 눈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은 계속 입석의 어느 한 자리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단 한 번도 내가 있는 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퇴장하는 동안에도 나는 무언가를 좇았지만, 더 이상 금발머리는 눈에 띠지 않았다. 그리고,

<엘씨오, 우리 내일 저녁에 출발하는 게 어때요?.>

당일 저녁의 기차표를 예약하기 위해 우리는 아침을 먹자마자 중앙역으로 나왔다. 갑자기 계획을 바꾸자는 내 말에 엘씨오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어지는데요-. 이 도시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그게… 주변의 다른 도시에 가보고 싶어서요. 어- 아! 짤츠부르크에 가요! 거기 가보고 싶었어요.>

짤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도시지만 독일의 뮌헨에서 이동하는 것이 더 가깝다. 아무리 여행 초보자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흔히 루트를 짤 때 뮌헨에서 당일로 다녀오는 코스로 정하곤 한다. 엘씨오의 표정은 마치 그것을 말하는 듯 했다. 우린 독일에서 만났어요. 뮌헨에서. 그런데 갑자기 짤츠부르크에 가고 싶다니.

나는 초조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하물며 내가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자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뮌헨에서 가는 게 더 쉬운데. 뭐- 그래도, 가죠. 못 가는 것도 아니고, 가면 되죠, 뭐.>

시원스레 대답하는 엘씨오에게 나는 감사의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 가자. 어떤 식으로 풀리든, 그리고 내 안에 무엇이 있든, 그것이 어떤 얼굴로 자라든, 이제는 더 이상 억압하고 숨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짤츠부르크로 향했다. 모차르트의 생가와 미라벨 궁전을 둘러보면서도 나는 곧잘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딴생각이라는 것도 딱히 명확한 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러니까 결국 내내 멍하니 있었다는 얘기다. 먼저 오고 싶다고 얘기를 꺼냈으면서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나를 보며 엘씨오는 간간히 ‘재미없어요?’하고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억지미소를 띄우며 ‘좋네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그러나 호엔짤츠부르크성으로 올라가 탁 트인 짤츠강과 짤츠부르크의 전경을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엘씨오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었다. 나는 계속 엘씨오가 내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씨오, 참 좋은 남자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점만 빼면 더 좋은 남자가 될 수 있을 텐데. 인기 많았겠어요, 그렇죠?>

순간 엘씨오의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매너에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데다 테크닉도 좋으니, 탐나는 남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탐탁찮았다. 꺼내선 안 될 얘기를 꺼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돌려 싸늘한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짤츠강의 긴 줄기를 내려다보았다.

<미나. 웃기게 들리겠지만, 스물네 살이나 먹은 주제에 이렇게 진지하게 연애하는 건 처음이에요.>

바람이 갑자기 사납게 변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은 내버려두며 나는 천천히 엘씨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세상에.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누가 뒤통수를 단단히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아려왔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멋진 사람인데요. 이렇게 착하고 좋은 남잔데요. 나는 말을 삼켰다. 목구멍이 칼칼해져왔다. 스물네 살이나 먹은 주제에 처음 하는 연애라니. 가만 보자. 그래, 나는 어떤가. 스물아홉이나 먹은 주제에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한 적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몇 명의 남자를 만난 적은 있지만 그리 오래 가지도 못했고, 심적으로 의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내 쪽에 있어서였지만 말이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 없는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진지한 연애라고 말한다.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것을 그는 진지한 연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며 나는 또 어떤가. 이번에는 나 또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자문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몇 명의 남자를 만난 것도 모두 그들이 먼저 내게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에다가 쉽게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 몇 번의 연애 비슷한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엘씨오와 같았다. 그러나 그게 전분가. 엘씨오가 단지 내게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하면 그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엘씨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었다면 거짓이었다. D의 그늘을 피하기 위해 새로 숨어든 그늘 속의 그늘. 나는 몸을 떨었다.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아요. 집착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당신이 눈이 너무 높은 건 아닌가요? 물론 난 제외하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얘긴 나중에 해줄게요. 어쨌든 난 트라우마에 덕지덕지 침략당한 인간이에요. 참, 그리고 미나 당신은 완벽한 내 이상형이에요. 난 눈이 아주 높은 편이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기고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짤츠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리도 언젠가, 프라하에서 깊고 깊은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처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엘씨오는 투덜거렸다.

<당신은 왜 그렇게 빨리 태어났죠?>

<이렇게 늙어서 미안하네요.>

베네치아로 가는 야간기차 쿠셋 구간이 내가 가진 일반 유레일패스와 그의 유스패스가 1등석과 2등석으로 갈리자 엘씨오는 마치 이산가족처럼 처량한 얼굴을 했다. 섭섭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실은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나였다. 비록 엘씨오와 같은 의미에서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무엇보다도 아줌마 근성이 뿌리 깊이 자리 잡혀 있는 것이다. 유스패스의 할인율을 따져보면, 난 1등석 따위 전혀 필요 없다며 박차고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씨오의 유스패스를 흘깃 쳐다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여러 가지 경험을 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한 살이라도 어려야 할인율이 크다.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는 엄마의-아니, 아빠의- 심정으로 나는 엘씨오의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며 그를 먼저 정해진 칸으로 올려 보냈다. 엘씨오는 엄마와-아니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들처럼 울상이 되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베네치아로 가는 야간기차는 위험하다고 소문이 나 있어요, 알죠? 조심해요.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소리를 질러요.>

<걱정 말아요. 정 안되면 그쪽으로 뛰어갈게요. 건너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엘씨오가 찻간에 완전히 올라타는 것을 본 후 나는 6번 플랫폼으로 발을 돌렸다. 걸어가면서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찾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될까. 나는 어깨를 아프게 누르는 배낭끈을 단단히 쥐었다. 오늘 떠나는 것이 확실할까. 베네치아로 가는 것이 확실할까. 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벌써, 또는 좀 더 후에 떠날 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정말 미친놈으로 여기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가장 믿음직스러운 가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주사위를 던졌다. 마지막으로 우연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혼자 하는 내기를 걸었다. 우연에 기대어, 그것에 전부를 거는 것이었다. 1번이 나오면 더 이상 우연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발로 그 문을 열고, 2번이 나오면 우연은 그저 우연으로 끝났고 나는 다시 무기력한 의지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다시 만난다면. 나는 일부러 느긋하게 걸었다.

손에 들린 표와 위에 적힌 번호를 확인했다. 출발시각이 임박해 왔으므로 모든 승객들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있거나 분주하게 이불정리를 하고 있었다. 긴 복도를 바라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헬로우.>

베네치아로 가는 야간기차는 위험하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여행객들은 웬만하면 아침에 이동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과연 유럽여행 중 필수코스라고 꼽히는 베네치아로 가는 열차임에도 불구하고 네 개의 침대 중 하나는 비어있었다. 기다려도 마저 차지 않을 것 같아 나와 일본인 여자, 그리고 스페인계 남자, 이렇게 세 명은 좀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다고 서로 위안했다. 일본인 여자가 한쪽 벽의 아래층 침대에, 나와 스페인계 남자는 맞은편 벽에 붙은 두 층의 침대에-늦게 온 내가 윗층으로 올라가야 했다-올라갔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둘 다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스페인계의 남자는 스페인어로 멋대로 혼자 무어라 말을 하다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누웠다. 남자 둘에 여자 한 명이라 불편할까 싶어 일본인 여자에게 웃으며 영어로 간단한 인사를 건넸는데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우스운 발음으로 ‘아이깬뜨스삐끄잉그리시’ 말하며 손까지 내저었다. 수줍음이 많은 여자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혼자 여행을 온 것일까 생각했는데, 다른 방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단체로 여행 온 것 같았다. 예약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각자 흩어져 있던 일본인들이 모여 빈 방을 찾아 몰려가는 것이었다. 그 여자도 그 무리를 따라 복도로 나가더니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 새벽에 돌아올지 모를 여자를 위해 작은 전등을 켜둔 채 잠들었다.

<으음->

야간기차에서 편히 잠들 리가 없다. 덜컹거리는 기차도, 옆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도, 그리고 여권 검사를 위해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차장도 깊은 수면을 방해한다. 특히 위험한 구간의 야간기차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잠들었다. 그런데 야간기차에서 숙면을 취할 수 없는 보통의 이유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그나마 그런 선잠조차 깰 수밖에 없었다.

<뭐, 뭐죠?>

하체에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바로 눈앞에 아래층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댄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팔은 내 하체 쪽으로 뻗쳐있었다. 바지의 버클은 이미 열려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식 웃으며 내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팔꿈치로 몸을 받친 채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왼손이 내 목을 감싸 눌렀다. 상체를 일으키려다 그 반동으로 등을 부딪히며 다시 누워야 했다.

“하…하지마……. 컥-”

엄청난 힘이었다.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을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목을 강하게 조여 와서 차라리 얌전하게 구는 것이 어쩌면 살 길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밑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불쾌감이 구역질날 정도로 싫었다. 목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그리고 아래에서는 전혀 쾌감 따위와는 상관없는 아픔을 느꼈다. 남자는 무자비하게 축 늘어진 내 페니스를 잡고 주물러댔다.

“크…큭…. 돈, 돈 줄게.…머니……머니…”

돈을 외쳤지만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위와 아래에 손의 강도를 더 세게 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아프고 무서웠지만 수치심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남자는 일층의 침대를 밟고 좀 더 높이 올라섰다. 팔꿈치로 갈비뼈 부근을 눌러와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제 남자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 팔 전체로 몸을 눌러와 가슴이 턱 막혔다. 졸린 목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벌린 입으로 침이 흘러내렸다.

그 틈에 남자는 아래를 만지던 손에 더 힘을 줘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벌린 다리 사이로 손이 깊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손가락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죽을힘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죽고 싶어?!>

<윽->

내 주먹은 간신히 남자의 턱을 스쳤다. 스치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남자의 주먹에 코를 정통으로 맞았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뜨끈한 것이 코에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면 정말 혀를 깨물겠다고 결심했다. 시간(屍姦)이라도 할 테면 해보라지. 나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때, 복도에서 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고, 또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 혹은 옆방에서 여권 검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남자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상체를 일으켜 남자의 코를 이마로 박았다. 뒤로 넘어지려는 남자를 완전히 밀어내고 재빨리 1층으로 뛰어내렸다. 내 아래에 깔린 남자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개자식!>

나는 맨발로 복도를 뛰쳐나왔다. 문을 열고 튀어나오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는데, 일본인 여자였다.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지만 잡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복도를 달렸다. 만약 남자가 쫓아온다면 달리는 기차라 할지라도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장이 맞은편 혹은 옆방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낼 겨를이 없었다. 나는 후덜거리는 다리를 끌고 기차 칸의 구석까지 달렸다. 다른 칸으로 이동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발목을 붙잡을 것 같아 눈에 보이는 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화장실이었다. 악취가 심했다. 그리고 축축한 바닥은 맨발을 적셨다. 그러나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가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숨 쉬는 것이 어려웠다. 목 안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 저 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 빌어먹을 자식은 어떻게 됐을까. 모르는 척 태연히 여권 검사를 받고 있을까.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과 함께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끈적한 감촉이 치를 떨게 만들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을 숙였던 무릎 위에 피가 묻혀있었다. 간신히 일어나 거울 앞에 서자, 얼굴이 가관이었다. 여전히 눈물은 나면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왔다. 미친놈. 혼자 중얼거렸다. 겨우 이런 걸, 이런 걸 겪으려고 도망쳐 왔나. D, 그 자식이 다 뭐라고. 그 녀석이 결혼한다는데 내가 왜. 미련한 새끼. 그만큼 미련을 떨었음 됐지……. 제기랄, 귀국하면 이제 뭘 먹고 살아야할까. 내년이면 서른인데.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리고 싶다. 이런 꼴이 다 뭐야. 겨우 이런 걸 겪으려고…….

다시 무릎을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숨죽여 울었다. 무섭고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더럽고 두려웠다. 당장 몸을 씻고 싶었다.

덜컥-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손을 떼는 것 같았다. 그 개자식일까. 개자식, 당장 나가서 죽여 버릴까. 아아, 하지만 무섭다. 끔찍하고, 무섭다.

<죄송합니다.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

그러나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달랐다. 낮고 허스키하지만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잠에서 덜 깬 듯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자물쇠를 풀었다. 그리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뒤돌아서려던 남자가 흠칫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당신…….>

<하아-하->

막혔던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좀 전까지 흘렸던 눈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입술이 비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흉측한 얼굴이 더 흉측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온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가슴이 들썩였다. 흐흥, 거리며 어린아이처럼 울음보가 터졌다.

<당신은 대체… 언제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꼴은 또 뭐죠?>

<흐…흣…당신, 당신 왜…흡…이제야, 이제야 나타난 거야…….>

<뭐라구요?>

<내가 당신…흑…당신 얼마나 찾았는데…왜 이제야…>

나는 눈물과 콧물과 거기다 코피까지 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아줘, 기대게 해줘. 이로써 그의 뇌리에 나는 완벽하게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난 당신이 찾던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 맞아. 당신, 아힘 슈미츠.>

그가 이상한 것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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