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엉덩이가 예쁘네요.>
엉덩이의 살집을 그러모아 이빨로 긁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엎드려 있던 터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음성에는 분명 웃음이 섞여있었다. 나는 그가 섹스 도중 상대방의 붉어진 얼굴을 봐야만 흥분하는 변태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난 엉덩이에도 화장품을 바르고 마사지나 팩도 하거든요.>
다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계속 놀려대며 짓궂게 구는 것이 얄미워 일부러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엘씨오는 그런 농담을 그렇게 딱딱한 말투로 말하니 그것을 진심으로 여긴 모양인지 ‘역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또 그 반응이 진심인지 역공작인 지 알 수 없어 잠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모은 두 손 위에 턱을 얹고 이 오해를 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 편안한 자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읏- 엘씨오, 그렇게 갑자기!>
엉덩이를 주물대던 두 손이 양 쪽으로 가르는 것 같더니 예고도 없이 손가락 두 개가 불쑥 들어왔다. 어느새 젤은 묻힌 것인지 질척이고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오래간만인 탓에, 어쩔 수 없이, 아팠다. 한마디 말도 없이 넣었던 손가락을 살살 돌리기 시작하는 행동에 베개를 입을 물어야 했다.
<부드럽게 해줄게요. 무릎 좀…….>
전혀 부드럽지 않잖아! 하고 반박하려다 억지로 무릎이 접혀져 엉덩이만 불쑥 들린 자세가 된 것에 아예 얼굴 전체를 베개에 묻어버렸다. 나머지 한 손이 앞으로 들어와 빳빳하게 긴장한 페니스를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아픈 신음을 지르자 뒤에서 또 웃음소리가 들렸다. 앞과 뒤로 동시에 느껴지는 쾌감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엘씨오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는지, 아니면 그 소리로 내 반응을 끌어내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벌써 삽입이 시작된 것처럼 가쁜 숨소리와 함께 간간히 목 아래에서 울리는 신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리고 내 허벅지 뒤쪽으로는 이미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페니스가 비벼지고 있었다. 간단한 패팅으로 서로 한 번씩 뺀 상태였는데도 그의 것이나 나의 것이나 아플 정도로 팽창되어 있었다.
<으, 응- 엘씨오……>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엘씨오의 손가락의 숫자가 늘었다. 등으로 따뜻한 체온이 닿았는데 곧 귀를 덮은 머리카락을 젖히더니 축축한 혀가 귓가를 핥았다. 엉덩이가 절로 흔들렸다. 순간 그의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을 건드렸다. 온몸이 경직되었다. 움츠린 어깨를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춘 엘씨오가 다시 귓가에 혀를 갖다 대며 이탈리아어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가 상체를 떼고는 내 엉덩이를 벌렸다.
<아, 아, 에…엘씨오, 잠시만 읏……>
<하아- 좋아, 따뜻해요. 미나, 굉장히 좋아요.>
길고 단단한 그의 페니스가 천천히 들어왔다가 틈을 주지 않고 약하게 흔들렸다. 그의 아랫배의 음모가 엉덩이에 닿았다. 두세 번 허리를 약하게 허리를 흔들고는 다시 천천히 빼내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귀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팔꿈치를 세운 채 두 손으로 귀를 붙잡았다. 그러나 세운 팔꿈치는 곧 무너졌다. 몇 번 천천히 넣었다 뺀 후부터는 엘씨오가 거칠 것 없다는 듯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간간히 알아듣지 못할 이탈리아어가 들렸다. 나도 한국말로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서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하… 응, 읏, 흔들려, 흔들려요. 아, 아, 무너… 무너질 것 같아.>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움켜잡았는데 흰색 시트였다. 주먹 안에 꽉 잡힌 시트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흔들렸다. 아랫배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나는 서서히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꽉 잡힌 채, 그리고 꽉 물면서 나는 묵직한 압박감을 느꼈다. 처걱처걱거리는 소리가 낯 뜨겁게 울렸다. 어느새 엘씨오는 춤을 추듯 리듬을 맞추고 있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곧 상체가 덮쳐왔다. 덕분에 그의 것이 조금 빠져나갔다. 나는 힘을 줘 단단히 다시 물었다. 서로의 혀가 부끄러움 없이 얽혀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부지런히 허리를 움직였다. 혀와 아래에서 물고 빠는 행위가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물기 젖은 소리가 이제는 어디에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을 내려 페니스로 가져갔다.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하고 허리의 움직임과 함께 손도 빨리 움직였다. 그러나
<미나, 너무 빠르잖아요.>
그의 질책과 함께 강제로 손이 떼어졌다. 그리고 그는 느릿하게 자세를 돌려 잡았다. 나는 기대와 흥분으로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엘씨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네 시였다. 물수건으로 대충 닦은 뒤 둘 다 쓰러지듯 잠들었기 때문에 찝찝한 느낌은 없었다. 엘씨오는 바로 옆 자신의 침대에서 두 팔과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누워 자고 있었다. 꼭 껴안고 자야겠다는 것을 기어코 일인용 침대인 것을 강조하며 떼어놓은 것이었다. 조용하고 캄캄한 방 안에서 새하얀 시트 위에 발가벗은 채 누워있자니, 어쩐지 조금 외로웠다. 엘씨오의 침대로 기어들어갈까 생각했지만 침대의 빈 구석이 얼만큼 남았나를 확인하고 곧 포기했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로에는 지나가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가 누웠다. 똑바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조금 외로웠다. 고개를 돌려 엘씨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이상한 감정은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문득 D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얼굴을 흐릿한 천장에 그려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피곤했고 어둠은 너무 깊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마법에 걸린 듯 순식간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엘씨오도 조금 전에 일어났는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젖은 몸으로 허리에 큰 타월을 두른 채 샤워실에서 나온 엘씨오는 아직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원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고정시키고는 이마와 눈가와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잘 잤어요?>
<네. 그런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좀 피곤하긴 했지만… 여행 다니면서 이렇게 늦잠 잔 건 처음이라, 좀 아까워요.>
<어제 나랑 보낸 시간이 아까워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나가요. 그렇게 체력 소모를 했으니, 오늘 점심은 잔뜩 먹어야겠어요.>
들떠있는 엘씨오의 손에 나는 대충 물을 퍼붓기만 하고 밖으로 끌려 나가야 했다. 멍청한 표정으로 끌려 나와보니, 막상 무척 배가 고프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느끼기만 했으면 좋았을 것을, 위장은 어찌나 정직한지 배고프다는 신호를 절절하게 알려와서, 그 소리를 들은 엘씨오에게 또 한 번 놀림을 당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음식점에서 들어가야 했다. 배가 그렇게 고프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형편없는 요리를 내놓는 곳은 당장 나와 버릴 것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우리는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해치웠다.
이왕 늦은 것, 우리는 오늘의 하루 일정을 저녁의 오페라 관람을 제외하고 모두 지우자고 합의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몇 벌 안 가져온 옷 때문에 간단한 쇼핑을 했다. 그리고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배가 부르지 않을 만큼만 저녁 식사를 한 후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이틀 전, 미리 표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엘씨오와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다툼이라 할 것 까지도 없지만, 서로의 약점-엘씨오는 나의 부실한 다리를, 나는 엘씨오의 잠버릇 때문에 빠져나가는 막대한 호텔비에 대해서-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어떤 자리를 예약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는데, 나는 곧 죽어도 편안하게 앉아서 관람해야겠다고 했고, 엘씨오는 가격이 저렴한 스탠딩 석에서도 충분히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어설픈 좌석보다 앞자리의 입석이 더 좋다고 우겼던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타협점으로 앉기는 하되, 그리 좋지 않은 B급 좌석을 택했다.
하지만 스탠딩 석에서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바라보며 엘씨오 또한 그런 선택을 다행으로 여겼다.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가방이나 스카프 등을 각자의 앞에 있는 난간에 메어두는 것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눈을 굴리는데, 스탠딩 석에 서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 불쑥 올라와 있는 하나의 금발머리가 눈에 띠었다.
아힘 슈미츠.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탄산수병을 떨어뜨릴 뻔 했다.
<미끄러워요? 이리 줘요.>
<아니, 됐어요. 그냥 내가 들고 있을게요. 목이… 많이 마를 것 같아.>
엘씨오는 이탈리아 남자답게 오페라에 꽤 심취해 있는 듯 보였다. 그 외에도 가끔 엘씨오가 건물이나 박물관 안에서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진지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역시’하고 중얼거렸다. 그에 반해 나는, 주입식 교육의 폐단을 그대로 밟고 자라난 데다 생활에 허덕여 제대로 된 음악회 한번 여유롭게 가지 못했던 탓에 ‘역시’ 그것을 숨기지 못했다. 주위 눈치가 보여 차마 맘 놓고 하품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좌석에 등을 기댄 채 내내 멍하니 딴생각을 했다. 아니, 주연을 맡은 두 오페라가수가 얼마나 음량이 높고 풍부한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1부가 끝나고, 가수들에게나 관람객들에게나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나오며 엘씨오는 내내 오페라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했다. 말하는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고작 몇 푼의 돈 때문에-고작 몇 푼 정도가 아니지만- 스탠딩 석을 고집했었던 것을 꼬집고 싶었지만 괜히 들추어냈다간 내 부실한 다리까지 들춰질까 그냥 말았다.
<화장실 안 가요?>
<아- 난 좀 답답해서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같이 나가줘요?>
<아니, 추운데 그냥 여기 있어요. 잠깐, 숨만 몇 번 쉬고 들어올게요.>
화장실로 들어가는 엘씨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어대는 복도를 요리조리 피하며 걸었다. 계단 아래에서 금발머리가 스쳐지나갔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왠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반대쪽 계단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생각하니 웃음도 나고 처량해지기도 했다. 고상한 취미는 없는 모양이었다. 취미가 없으면 흉내라도 냈어야 하는 건데, 그동안 밥벌이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던 것이 좀 억울하게 여겨졌다. 얼마나 더 잘 산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남들 다 하는 거, 반만이라도 하면서 몸에 좀 익혀두는 건데.
<또 만났네요.>
<컥-!>
숨을 들이켜다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켜버렸다.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외려 자신이 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놀라게 했습니까?>
<흠, 흠. 아니에요. 괜찮아요.>
얼굴을 가까이 하자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눈을 도르르 굴려 시선을 피하자 그도 다시 허리를 폈다. 놀란 것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소리가 상대에게 들릴까봐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조마조마해 하는 것이, 그에게 들킬까봐 염려하는 것이 진정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지웠다.
<여긴 언제 오셨어요?>
<어제 도착했어요.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꽤 질긴 인연이군요.>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죠.>
<그런가요? 하긴, 빈에서 오페라를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예술의 ‘예’자도 모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오페라 어쩌고 하니 좀 우스웠다. 독일은 철학의 나라 아니던가. 물론 그 두 가지가 서로 조우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 포커페이스의 남자만은 예술과 철학을 철저하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두 가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예술과 농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비식 웃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죠? 왜요, 호프브로이의 웨이터가 오페라를 논하니까 우스운가요?>
<아니, 난 그냥 나와 동류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예상이 깨져서 실망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힘 슈미츠씨, 그렇게 오페라를 좋아한다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돈을 좀 더 들이더라도 좋은 자리를 구하지 그러셨어요?>
<날 보고 있었나요?>
<…….>
<당신도 알겠지만, 여긴 미리 예약하지 않는 이상 입석표를 구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요. 일찍 예약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지만 말이에요. 뭐, 당신 예상대로 난 오페라에 대해 그리 정통하진 않은 건 맞아요. 하지만 정통하지 않다고 느끼지도 못하는 건 아니죠.>
그의 차분한 말에 나는 내가 굉장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가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화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아요’하고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자리에 그와 마주보고 있다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사과할 겸 내가 사줄게요. 저기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던데.>
빠르게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아차-하고 혀를 깨물었다. 미친 짓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람. 이 추운 날, 웬 아이스크림? 그것도 다 큰 성인남자 둘이서. 나는, 보지 않아도 뻔히,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멍청이, 덜떨어진 놈.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리다 실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아무런 표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말인가요?>
<아, 내가 사올게요. 당신은 여기 있어요. 빨리 뛰어가서 사 올 게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듣지도 않고 줄행랑치듯 건널목을 향해 뛰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를 광광 울렸다.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엄마가 보고 싶어 달린다던 하니의 심정을 이해하며, 그렇게 냅다 뛰었다. 몇 걸음만 옮기면 쥐구멍이 있었으면 했다. 아니, 그 망할, 뜬금없는 아이스크림을 사갖고 돌아오면 그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길 바랐다.
빠앙-
내 심장이 뛰는 소리에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감은 눈 속으로 어렴풋이 불빛이 비쳐들었을 때, 그제야 나는 내가 위험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강한 헤드라이트 빛에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내 앞으로 닥친 현실을 바라보았다.
드라마를 보면, 항상 이런 장면에선 모든 것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의 컷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바로 앞으로 돌진해오는 차를 빤히 보면서도 피할 생각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장면을 보면서 ‘거짓말’하고 단정한다. 나도 그랬다. 거짓말, 저런 게 어딨어? 그런데, 그런 게 여기 있었다.
아아, 어머니 아버지, 이 불효자식은 같은 거 달린 사내놈을 잊기 위해 직장까지 버리고 떠난 여행지에서, 또 다른 사내놈에게 먹일 아이스크림을 사러가다 죽습니다. 덜떨어진 아들이 눈을 질끈 감고 사지로 뛰어든 것이니 운전자에게 괜한 고소는 하지 마십시오.
끼익-
<악-!>
<으으…….>
드라마를 보면, 항상 이런 장면에선 모든 것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의 컷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다. 연출자가 새드앤딩을 좋아하는 변태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변태가 되지 않으려는 연출자는 하나같이 모두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바로, 이런 식상한 상황 말이다.
아아, 하느님 아버지 부처님 알라신 기타 등등의 모든 신들은 다행히도 변태가 아니었다. 대신, 생각하는 게 하나 같이 똑같아서 문제지.
그리고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하느님 아버지 알라신 기타 등등의 모든 신들의 역할은 그리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서울에는 한산한 도로에서 서행하는 운전자가 없으므로 구해줄 신도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운전자들은 지나치게 느긋했다.
<이봐요, 당신은 일 년 중에 정신을 똑바로 차라고 사는 날이 대체 며칠이나 됩니까? 설마 항상 이렇게 얼이 빠진 채 사는 겁니까?>
나를 붙잡고 뒤로 자빠졌던 남자는 내 밑에 깔려 화난 듯 큰 목소리를 냈다. 그가 숨을 몰아쉬는 것이 귀 뒤로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말처럼 얼이 빠진 채 멍하니 누워 있다가 ‘비켜요!’하는 말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를 치일 뻔 했던 차의 운전자가 거친 말을 내뱉으며 차문을 열고 나왔다. 쾅, 하고 닫히는 것과 동시에 아힘이 옷을 털고 일어나 그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가 오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도로 한 가운데에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냐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전자가 내게 다가오려는 것을 아힘이 막아서서 또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리고 운전자는 씩씩거리며 다시 차로 돌아갔다.
<일어나요. 이봐요, 정신 차려요. 당신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일어나라고요.>
아힘이 내 팔을 붙잡고 힘 있게 끌어올렸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나는 그 당기는 힘에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다시 주저앉으려는 것을 그가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고정시켰다.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그의 화난 얼굴을 마주보았다. 문득, 새벽에 깨어나 빈 천장에 D의 얼굴을 그려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의 얼굴이 D의 얼굴을 자꾸만 가렸던 것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얼굴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 * * *
-건강하게 잘 있어라, 민하야.
-뭔가 바뀐 것 같지 않아? 입대하는 건 너야.
-걱정돼서 그래. 넌 꼭 내 새끼 같단 말이다, 인마.
-……. 나이도 같은데 왜 네가 먼저 가는 거지?
-어이쿠, 네가 신의 자식이라도 될까봐? 걱정 마, 너도 곧 군대영장 나올 거다. 나중에 너 내 밑으로 오면 좋겠다. 쫄병 강민하 맘껏 부려먹게.
-응.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 널 정리했어야 하는데. 그렇게도 바라던 네 ‘쫄병’이 되지 않았을 때, 네가 없었던 그 시간동안 내게는 충분히 기회가 주어졌다.
내 키를 훌쩍 넘도록 쌓인 눈을 삽 하나 달랑 들고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치워야 했을 때, 내가 치운 눈만큼 내 머리도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잠깐 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10시간이 넘는 행군 중에 산악고개를 연속으로 세 개정도 더 넘어야 끝이 난다는 분대장의 말을 듣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는 네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D, 그렇게 여러 번, 아니 매일 기회가 찾아왔건만 나는 네가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놓지 않았다. 제대 후 가장 먼저 네 얼굴을 보러가는 내 두 다리를 얼마나 잘라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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