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5화 (5/29)

[5]

머리 위로 직선으로 쏟아지는 전등불빛 아래에서 음영이 짙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힘 슈미츠는 잘못한 아이를 벌주는 사감 선생, 그 모습이었다.

<내가 원래 이 방의 주인이었으니 나가는 건 당연히 당신들이어야겠죠?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나가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룻밤 숙박비는 안 받겠습니다.>

<뭐라구요? 이봐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상황을 좀 봐요. 나도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퍼질러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씨오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엘씨오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기만 했다.

<난 게이 커플과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 호모포비아인가요?>

<아…아니. 난 그저 그런 취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원래의 주제와 어긋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그도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고 싶고 각자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도 인정한다는 말을 장황스레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말 한 마디 없는 엘씨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봐요. 당신이 저지른 일이잖아요. 난 당신들이 동성애자건 뭐건 상관 안 해요. 다만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싫습니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나는 또 한 번 주제와 어긋난 말꼬리 잡기를 하고 싶었다. 동성애자 어쩌고저쩌고 하며 다른 부류로 취급하는 걸로 보아 그 자신은 이성애자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자 하는 말이었다. 왠지 분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 나를 보고 엘씨오는 자신에게 화내는 것인 줄 알았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할 일은 하지 않는 법이에요, 엘씨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싱글룸을 써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저 남자도 코를 엄청 심하게 곤다고 해서 나도 잠을 설치게 될 줄 알았는데…… 이건 미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어요!>

우물쭈물 이상한 말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내 탓으로 돌리는 엘씨오를 향해 나는 물론이고 아힘 슈미츠 또한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엘씨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으으’하는 짜증 섞인 괴성을 지른 후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Medorthophobia, 즉 발기공포증 환자였다. 엘씨오의 어머니가 아직 처녀였을 때,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로부터 강압적인 성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엘씨오가 태어났지만, 동시에 발기한 성기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새아버지가 생겼지만 그와의 관계는 온전히 플라토닉적인 것일 뿐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페니스를 가지고 ‘논다.’ 그것은 어떤 성적인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그저 여자아이들이 인형의 머리를 빗어주며 놀듯이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신체 일부 중 톡하니 튀어나온 것을 만질 뿐이다.

-안 돼! 하지 마!

부모들이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부정의 명령어(No, don't)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그 후로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노는 것을 스스로 봉인시키고, 나이가 들어 자연스레 성적 호기심이 생길 때까지 그것은 은폐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이 되었을 때, 아들을 둔 부모가 하는 가장 현명한 행동은 자식의 방에 깨끗한 티슈와 성교육 관련 서적을 놓아두는 일이다. 아들은 적당히 빼고, 또 적당히 자제한다.

그러나 엘씨오의 어머니는 그가 아이였을 때부터 그가 페니스 쪽으로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no’가 아닌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묶었다. 그리고 훗날, 강제로 봉인된 그의 페니스가 몽정을 통해 다시 깨어나면서, 그가 젖은 팬티를 몰래 빨고 있는 것을 본 그의 어머니는, 졸도했다. 아니, 거품을 물었다. 그 후 엘씨오는 자신의 손을 대지 않고, 잠결에, 그러니까 무의식중에만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발기했다.

문제는 엘씨오가 자신의 오른손 대신 베개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들의 고발에 의해 기숙사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고발의 내용은 밤만 되면 그 성격 좋은 엘씨오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신들의 침대로 와서 긴 다리 사이로 몸을 압박한 채 강제 성추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해요. 연인과의 잠자리에서도 원나잇으로 끝나는 경우가 흔했죠.>

엘씨오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본 적은 있습니까?>

<그럼요. 약까지 먹어본 걸요. 물론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그런 트라우마와 관련된 정신질병은 완치가 어려워요. 특히 이렇게 낯선 곳을 여행하거나 피곤할 때면, 더욱더 장담하기가 어려워요.>

엘씨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또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런 엘씨오를 보며 아힘 슈미츠는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지하철역에서 한없이 길게 그리고 빠르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던 동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엘씨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무언가 다른 한 덩어리의 방해물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그리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아힘 슈미츠가 ‘흠’ 하고 소리를 냈다.

<이렇게 합시다. 여기 머무는 며칠 동안만은, 어쨌든 나도 당신들과 한 배를 탄 셈이니까, 당신의 그… 트라우마가 우리의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협조를 할게요. 우선 침대를 나와 바꾸기로 하죠.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어야 하겠죠. 그리고 당신들 둘, 낮 동안엔 피로가 느끼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돌아다니도록 해요. 마지막으로… 잠잘 때엔 내 mp3 플레이어를 빌려줄게요. 나도 약간의 불면증이 있어서 잠자기 전에 항상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몇 번씩 돌려들어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죠.>

세련된 영어 문법을 구사하는 남자의 말이 끝났을 때, 엘씨오는 그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고, 나는 내 몸을 이불로 덮었다. 그리고 엘씨오와 남자가 자리를 바꾸는 것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나는 게이커플과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게이커플과 같은 방을……. 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자꾸만 귀속에서 맴돌았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나와 아힘 슈미츠는 머리를 맞댄 채-실은 머리를 맞댄 것은 침대였지만-, 그리고 엘씨오는 그런 우리와 몇 걸음 떨어진 곳 구석에 놓여있는 침대 위에서 잠들었다. 편안한 잠자리였다. 프라하에 있는 동안 밤늦도록 돌아다닌 것은 재즈바에 다녀왔을 때 한번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잘만 자는 엘씨오가 아니라 자꾸만 이불을 들썩이는 아힘 슈미츠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혼자 까를교를 다시 찾았다. 다리 양 가로 서른 개 가량의 성인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얀후스 성인의 동상의 부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엘씨오와 함께였을 때는 왠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애들이나 믿는 거라며 무시하고 지나쳤지만, 실은 그런 애들이나 믿는 것에라도 절실하게 매달리고 싶은 것이 진심이었다.

아침의 까를교는 너무나 한산해서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었다. 동상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드디어 얀후스 성인의 동상 앞으로 다가섰을 때, 나는 그 앞에 이미 누군가 손을 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금발의 남자는, 뭐가 그리 절실한지 눈을 꼭 감고 동상의 반질반질하게 닳은 부분에 손을 비비면서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런 그의 옆얼굴을 감상했다. 긴 속눈썹이 조금 떨리다가 느린 화면처럼 남자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침 일찍 어딜 갔나 했더니, 당신도 여기에 있었군요. 뭘 빌었어요?>

아힘은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그의 표정 자체가 포커페이스니까-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잊게 해 달라고.>

나는 가슴에 뭔가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잊게 해 달라고. 그건 내 소원이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살짝 비켜선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간절하게 비비고 또 만졌던 부분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부분에 손을 갖다 대며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잊게 해 달라고.

<오늘, 잠시 후에 엘씨오와 저는 프라하를 떠나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짧은 인사를 하고 뒤돌아 걸었다. 몇 개의 동상을 지나가며 나는 문득 그에게 다음 행선지를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실례가 된다면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말해주고 싶었다. 몇 걸음 더 걷다가 우뚝 서서 잠시 고민한 후 천천히 뒤돌아보았을 때, 그는 이미 반대 방향으로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섭섭함이라고 정의내린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엘씨오를 깨우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프라하에서 숙소 잡기에 너무 고생을 한 터라 우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빈에는 아무런 축제가 없었던지 적당한 가격의 호텔의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호텔비에 부담을 느끼는 것을 알아챈 엘씨오는 더블베드 룸에 묵는 대신 약한 수면제를 먹기로 했다. 혹시 몸에 안 좋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흔히 있는 일이고, 처방전이 있는 안전한 약이니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또다시 ‘우리 엄마 같다’며 놀려댔다.

오스트리아, 빈의 거리는 어디에서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건물은 웅장하고 화려해서 거리 전체가 고고하게 코를 세우고 있는 왕정을 보고 있는 듯했다. 섬세함은 체코보다는 덜했지만 특유의 우아함에 압도되어 나와 엘씨오는 한동안 우왕좌왕하다 같은 거리를 돌고 또 돌았다.

서울의 명동 즈음으로 생각되는 게른트너 거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악의 도시답게 곳곳에서 거리의 음악가들의 라이브가 울려 퍼졌다. 노상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엘씨오에게 이 멋진 도시에서 예정보다 며칠 더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엘씨오는 어느새 서로의 예정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닿는 대로, 그러나 ‘함께’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미나가 그러고 싶다면 나도 좋아요. 자신감 넘치는 이 도시도 마음에 들구요.>

그 후 빈에 왔다면 누구나 들러야 하는 필수코스 즘으로 여기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를 보기로 했지만, 그날 저녁에는 마땅한 작품이 없어 이튿날 저녁 작품으로 미리 표를 사 놓았다. 그리고 엘씨오의 바람대로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무슨 무슨 박물관을 꼬박 둘러보고 싶어 하는 엘씨오를 보며 나는 역시 아직 학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다음 날에도 느긋한 하루를 보냈다. 점심은 역시 게른트너 거리에서 거리의 음악가들이 들려주는 연주와 노래를 들으며 먹었고, 성 슈테판 성당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소원을 가장한 기도를 올렸다. 나의 죄를 사하여주십시오. 그 죄가 내 탓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끝내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은 누가 뭐래도 죄였다.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의도치 않게 죄를 짓기도 한다.

그 후에 우리는 내 뜻에 따라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의 상궁에 클림트와 에곤쉴레의 작품 몇 가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궁의 안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특히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 앞에는 모두들 꼼짝 않고 서 있는 바람에 보고 싶지 않아도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었다.

키스. 부드럽고도 나른한 포즈의 연인이 한 몸이 되어 절절한 포옹과 함께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다. 금빛 후광이 그 둘을 감싸고 있어서 그게 혹 둘 중 누군가의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 사랑은 언제나 꿈과 현실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므로 그 둘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꿈이면 어떻고, 또 현실이면 어떠랴. 손에 든 것이 희망이든 절망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이미 혼자 마음껏 사랑한 적 있다. 벼랑 끝으로 추락해버릴 것 같은 발끝은 외사랑이든 무엇이든 언제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꽉 부여잡은 손과 비스듬히 숙여진 얼굴은 나는 가진 적이 없다. 저런 것은, 절대 가질 수 없었다.

“키스……. 키스 하고 싶어.”

<뭐라고 했어요, 미나?>

나는 엘씨오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한국말로 중얼거린 말을 그가 들은 것이었다. 짙은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키스 할래요?>

엘씨오는 놀란 듯 잠시 입을 헤 버린 채 나를 내려다보았지만 곧 활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엘씨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엘씨오에게 손목이 잡힌 채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결국 상궁을 벗어난 우리는 무작정 하궁으로 가는 길에 있는 복잡한 미로 같은 정원으로 뛰어갔다. 아니, 뛰다시피 하는 엘씨오에게 끌려갔다. 높은 나무들이 이어진 곳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나는 뒤꿈치를 땅에 끌며 말렸다.

<저기, 엘씨오.>

<그런 표정으로 키스 하자고 했잖아요. 난 참을성 많고 매너 있는 남자지만, 근본적으로 정열적이고 다혈질적인 이탈리아 태생이에요.>

결국 나는 키 큰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야 했다. 주위는 조용했고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나무와 풀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잎을 떨며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날씨가 추워 한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곧 엘씨오의 입에 막혀버렸다.

<…응…엘씨오……. >

<하아… 당신이 말할 때마다, 그 조그만 입을 벌릴 때마다 이러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아직까지 꽉 잡힌 손목이 아파와 신음을 내뱉자 엘씨오는 그 틈에 더 깊숙이 들어와 휘저었다. 그의 짧고 거친 수염이 볼을 아프게 했다. 내가 자꾸만 버둥거리자 엘씨오는 손목을 풀어주는 대신 내 목과 허리를 쓰다듬었다. 집요하게 목을 문지르다말고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는 것을 나 역시 집요하게 막아냈다. 그러자 벌을 주는 듯 혀를 살짝 깨물었다.

<아! 엘…>

항의의 말을 하려하자 거칠게 입술을 빨았다. 벌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입김과 함께 듣기에 민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타액이 흘러나오려 할 때마다 엘씨오는 일부러 조금 틈을 주고 입가와 턱 밑으로 흐르게 했다. 그것을 닦으려고 손을 들어 올리려 하면 여지없이 그날 밤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강한 두 팔로 온 몸을 압박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내 머리통을 한 손에 잡고는 단단히 고정한 뒤 긴 혀를 내밀어 타액이 흐르는 내 입가와 턱을 꼼꼼히 핥는 것이었다. 맛있는 것을 먹었다는 듯 혀를 삐죽 내밀어 웃어 보인 뒤 다시 또 거친 키스가 시작되었다.

<…으…제발 엘씨오…….>

허벅지 위쪽으로 그의 부푼 성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몸을 뒤로 떼자 더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간간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나무의 가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때마다 엘씨오는 어린아이처럼 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부딪치며 웃었다. 길고 농염한 키스가 끝났다. 입술과 혀가 얼얼해진 것 같아 손으로 입술을 만져보았다.

<부풀었어요.>

<그런데 난 미나의 다른 곳도 좀 더 부풀게 하고 싶어요.>

엘씨오가 내 귀를 만지며 말했다.

<호텔로 잡길 잘했죠? 유스호스텔의 더블룸보다는 방음이 잘 될 테니까.>

<아, 아, 엘씨오, 그만, 그만.>

키스는 섹스의 축소판이다. 담백한 키스를 하는 사람은 담백한 섹스를 좋아한다. 질펀한 키스를 하는 사람은 질펀한 섹스에서 만족을 느낀다. 엘씨오의 키스는, 집요했다.

발가락 끝부터 핥기 시작한 엘씨오는 발바닥과 발등, 발목, 종아리, 무릎과 무릎이 접히는 뒤까지 어디 하나 빠뜨린 곳 없나 걱정이라도 하듯 샅샅이 핥고 빨아댔다. 반바지를 입는 계절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샤워 중에 혹시 덜 씻은 곳은 없나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허벅지로 올라오던 그가 문득 멈추고선 훌쩍 올라와 이번에는 내 손가락을 가져다 자신의 입에 대었을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 성감대가 손가락이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손이 굉장히 예뻐요. 동양 남자들의 손은 이렇게 가늘고 예쁜가요?>

혀를 세워 손가락 끝, 손톱 아래까지도 핥는 그였다. 손바닥의 손금을 따라 그의 혀가 움직였다. 마치 새로운 운명을 그려주겠다는 듯한 행동에 나는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잘근 깨무는 것에 소리를 질렀다.

<아! 흐읏……. >

<이렇게 무는 걸 좋아해요? 기다려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핥고 물어줄게요.>

그리고 그는 정말 열 손가락 모두 천천히 핥고 잘근잘근 씹는 것이었다. 간간히 이를 너무 세워 물어 아프기까지 했다. 나는 섹스 도중 아픔으로 쾌감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다. 정색을 하며 손을 빼내자 엘씨오는 아이 달래듯 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곤 다시 손을 가져가 입에 물었다.

손등과 팔꿈치를 거쳐 겨드랑이 부근까지 왔을 때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간지러운 것은 둘째 치고, 아무리 샤워를 했다지만 벌써 송글송글 올라오는 땀 냄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씨오는 작은 내 반항을 금방 제압하곤 보란 듯이 겨드랑이 안쪽의 연한 살을 핥고 깨물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굉장한 느낌이어서, 나는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죽여야 했다.

<그만해요, 엘씨오. 거긴 이제 됐어요.>

<아니. 난 몽땅 다 맛보고 싶어요.>

팔을 끝낸 엘씨오는 배로 다시 내려왔다. 근육이 하나도 없는 내 배를 쓰다듬으며 엘씨오는 작게 웃었다. 평소에 운동이라도 좀 해둘걸, 후회하며 나는 고개를 틀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귀여워요. 어떻게 당신이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을 수가 있죠? 열 살 아래라고 해도 믿겠어요.>

<엘씨오. 그거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아요.>

두꺼운 베개를 통과한 내 음성이 어린아이의 웅얼거림처럼 들렸다. 엘씨오는 다시 웃으며 혀를 길게 내밀어 배를 핥기 시작했다. 배꼽의 움푹 파인 부분을 다시 튀어나오게 하려는 듯 그는 집요하게 빨아 당겼다. 쭙, 쭙, 하는 소리가 틀어막은 귀에 쏙쏙 들려왔다. 내가 귀를 틀어막은 것을 본 엘씨오는 비식 웃으며 내 두 손을 양쪽으로 잡고 누른 후 이번에는 가슴을 향했다.

<으응- 아, 아->

유두 근처를 천천히 배회하던 그의 혀가 어느 순간 뾰족하게 끝을 세워 유두의 정 중앙을 건드렸다. 꽉 잡힌 손을 버둥거렸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혀의 까칠한 부분을 전부 사용해 유두를 빨았다. 오므린 입술 사이로 근육이 하나도 없는 밋밋한 가슴살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엘씨오, 그런다고 가슴이 커지거나 하진 않아요.>

엘씨오는 가슴을 핥다말고 방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후 다시 가슴으로 내려가 이번에는 이를 세웠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는 엄살을 피워 그가 빨리 다음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아파요? 아니면… 못 참겠어요?>

<알잖아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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