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4화 (4/29)

[4]

겨울축제 기간과 겹친 주말의 프라하에는 웬만한-만만한- 호텔은 이미 모두 예약이 차 있었다. 번번이 퇴짜를 맞은 엘씨오는 국빈 전용의 초호화급으로 해외에서도 유명한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만한 호텔이라면 가장 작은 룸이라도 어마어마한 가격이 뻔했다. 나는 사탕을 뺏듯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안돼요, 엘씨오.>

<미나, 지금 꼭 우리 엄마 같네요? 걱정 말아요. 저런 곳은 예산초과니까. 어쩔 수 없네요, 미나가 좋아하는 유스호스텔로 가보죠.>

그러나 우리는 오류를 저질렀다. 유스호스텔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호텔보다 더 경쟁률이 높았을 것이다. 갑부가 아닌 이상 여행지에서 숙소에 그리 큰 돈을 투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씨오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카운터의 문을 두드렸다.

<1인실은 없나요?>

<엘씨오, 유스호스텔에 1인실이 어딨어요? 도미토리가 싫으면 더블룸으로 잡죠.>

<저기… 그럼 더블룸 두 개 잡을까요?>

<엘씨오. 나한테 아줌마라고 해도 좋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돼요. 더블룸이란 말 그대로 두 명이 묵을 수 있는 방이라구요. 우리가 네 명인가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미나……>

<후- 엘씨오, 안 잡아먹어요, 걱정 말아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걸 원한다면 오히려 나야말로 언제든 대환영이에요! 하지만 미나, 당신 잠은 푹 자야 하잖아요.>

<자꾸 고집 부릴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제멋대로 1인실이니 더블룸이니 하며 제멋대로 착각에 빠져 떠들고 있는 것을 카운터의 직원은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잔뜩 의기소침해진 엘씨오를 뒤로 물리치고 당당하게‘더블룸으로 주세요’를 외치자마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프라하 축제 기간인 것 아시나요?>

직원의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엘씨오와 나는 졸지에 찬물을 껴맞은 듯 바짝 몸을 움츠렸다.

<설마, 여기도 다 찼나요? 안 돼…… 다인실이라도 괜찮아요. 그냥 남는 침대만 있으면 되는데, 설마 그것도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애원하듯 외치는 내 어깨를 엘씨오는 다급하게 흔들었다.

<그건 안 돼요! 절대!>

<엘씨오!>

<하지만…….>

연상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겸 큰 목소리를 내자 엘씨오는 진짜 내가 자기 엄마처럼 보이는지 울 것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급한 불부터 끄자. 나는 카운터의 직원이 없는 방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원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좀 전에 남자 손님 한 명이 마지막 남은 트리플 룸에 들어가셨거든요. 그 분이 괜찮다고 하면 같은 방의 남는 침대 두 개를 쓰는 방법이 있어요.>

<좋아요! 부탁해요!>

이겼다. 한국인의 근성을 보여줬다. 나는 질긴 것이 오래 간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 남자 손님에게 부탁을 하러 가는 직원의 뒤를 쫄래쫄래 쫒아 따라 올라갔다. 꽉꽉 들어찬 여행객들로 분주한 복도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선 곳은 707호 앞이었다.

707호. 좋아, 럭키세븐이 두 개나 있다.

직원이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락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금 열린 문 틈새로 직원과 안의 손님이 속삭이는 것을 예의상 서너 걸음 뒤에 떨어져, 그러나 귀를 바짝 새운 채 엿들었다.

<좋아요. 어차피 방값이 좀 부담됐는데 잘 됐네요.>

됐다! 나는 '예스!'를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엘씨오는 머리를 벽에 콩, 박았다. 그리고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그러운 707호의 원래 손님에게 포옹이라도, 아니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다.

<정말 고맙습…….>

그러나 얼굴을 마주한 ‘너그러운 707호 안의 남자’와 나는 동시에 낭패감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숙여 불쾌한 얼굴로 그런 내 손가락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왜 자꾸 이 남자 앞에서 얼굴 붉힐 행동만 하는가. 내 실수에 대해 스스로 불쾌해졌다. 아니, 굳이 매번 그렇게 지적을 해야만 속이 풀리는 저 남자에 대해서도 짜증이 났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싸늘하게 대답하며 등을 돌렸다. 아직 복도의 벽에 기대어 있던 엘씨오는 ‘왜?’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이봐요, 지금 여길 나가면 다른 곳에 숙소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엘씨오가 그랬던 것처럼 벽에 내 이마를 박고 싶었다. 어깨가 들썩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심호흡을 깊게 한 후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도저히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나는 혼잣말 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겠어요?>

<나는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밤에 시끄럽게만 굴지 않는다면.>

<고맙습니다…….>

방으로 들어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엘씨오는 의외로, 그리고 왠지, 안심한 표정이었다. 여행을 와서 고작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남자를 등 뒤에 두고 엘씨오는 내 옆구리를 찔렀다.

<미나. 저 남자, 그 사람 맞죠? 당신이랑 같은 칸을 썼다는.>

<네.>

<코를 엄청 심하게 골았다고요?>

엘씨오는 개구쟁이처럼 킥킥거리며 신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쉿,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그랬…죠. 그런데 그건 왜요?>

<그럼 내 건 좀 줄어들겠다구요.>

흥얼거리던 엘씨오는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꿍꿍이속이 있을 것 같아 나는 이 방이 707호가 아니라 404호인 것처럼 느껴졌다. 작게 몸을 떠는 나를 놔둔 채 엘씨오는 남자를 향해 뒤돌아서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엘씨오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아힘 슈미츠, 독일인입니다.>

짧게 자신의 소개를 끝낸 남자는 긴 팔을 내밀어 엘씨오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린 지금 나가서 돌아볼 건데, 괜찮다면 같이 안 갈래요?>

나는 진심으로 엘씨오의 뒷통수를 세게, 한 대 쳐주고 싶었다. 불안할 때의 버릇대로 손톱을 물어뜯으려 손을 입술로 가져가는 순간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맙지만 난 조금 쉬었다가 해가 지면 나갈 겁니다. 어제 잠을 설치기도 했고->

여기까지 말한 그는 문득 또다시 나를 슬쩍 흘겨보았고, 엘씨오는 혼자 바닥을 보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까를교의 야경이 아주 멋지다더군요.>

<좋아요. 그럼 우린 먼저 나가죠. 푹 쉬어요.>

엘씨오는 노래라도 부르는 듯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주춤거리며 걸어 나가려는데, 다시 베개로 등을 기댄 채 책에 시선을 떨어뜨린 그, 아힘이라는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을 걸어왔다.

<아힘 슈미츠입니다.>

문고리를 잡은 채 멈칫 서서 뒤돌아보자, 그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선을 부딪혀왔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쪽은요?>

<저는…… 미나… 모토예요.>

<미나모토.>

그는 그것을 마치 혀 속에 단단하게 박아 넣을 듯이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럼, 쉬세요.>

나는 거짓말로 또다시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황급히 방을 나왔다.

고즈넉했던 내 상상속의 프라하와는 달리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여 굉장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어깨를 치여 가며 몇 걸음 걷다보면 어느새 앞서 걸어가던 엘씨오에게 재촉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 구시가 광장 한 복판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자가 되어 있었다. 엘씨오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프라하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내가 상상했던 프라하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엘씨오에게 다시 붙잡힌 곳은 화약탑 아래서였다.

<미나, 걱정했잖아요.>

<나는 당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아요.>

우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신시가지로 나가기로 했다. 엘씨오가 미리 알아보았다던 맛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타야 했는데, 프라하의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는 너무나 깊고 가팔라서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놀이동산의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듯 바짝 얼어있는 나와 다르게 엘씨오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그 긴 에스컬레이터를 위 아래로 두리번거렸다.

<그걸 영어로 뭐라고 하죠?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자라는 곳.>

<네, 맞아요. 그것 같아요. 지금 이것 말이에요.>

지하에 완전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엘씨오의 굳게 다문 입매를 바라보았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단단한 바닥에 발을 내딛자, 그의 말처럼 내가 아주 작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까지도 우리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갓난아이들처럼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다시 구시가로 돌아와 우리는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프라하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까를교를 건너야 했는데, 밝은 빛 속에서의 까를교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아 보였다. 역시 야경이 근사한 걸까, 생각하며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걸었다.

프라하 성 안의 황금소로 구간, 그 안에서 나는 카프카의 작업실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카프카를 좋아한다고 하자 엘씨오는 그의 작업실 안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했지만, 나는 여행에서 아무 것도 남기기 싫다고 고집했다. 프라하성에 물건을 납품하던 사람들 중 특히 연금술사들이 많이 살았다는 황금소로의 특징을 잘 살린 듯 선물 가게 안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독특하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잘못 건드려 하나라도 깨뜨릴까 긴장한 채 그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엘씨오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너무나 정직한 열쇠모양의 열쇠고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물해주고 싶어요.>

<나한테? 그런데 엘씨오, 이렇게 많은 신기한 물건 중에……. 식상해.>

<당신한테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남자가 되고 싶거든요. 열쇠, 로맨틱하잖아요. 마음의 문을 열고 싶다구요.>

<아- 식상한데다 느끼하기까지.>

나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나 고맙게 그의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문득, 여행 기념으로 나도 뭔가 사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식구들과 D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복잡한 가게를 빠져나왔다. 성에서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있었다.

<미나. 피곤하니까 오늘은 이만 숙소로 들어갈까요?>

<…저기, 저녁 먹고 들어가지 않을래요? 선물도 받았는데 밥은 내가 쏠게요.>

타 유럽지역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물가에 감사하며 나는 더없이 당당한 표정으로 코루나(:체코화폐)를 내밀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오자 밖은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까를교를 건너게 되었을 때, 나는 그제야 완전히 ‘여행’이라는 감성에 젖을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요. 야경이 정말 멋지네요.>

<안 추워요? 미나, 보기랑 다르게 체력이 좋네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엘씨오를 향해 나는 고개를 까딱하며 ‘체력’을 과시했다. 엘씨오의 웃음소리가 악사들의 연주소리에 묻혔다.

<음악도 좋구요.>

악사들 주위로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씨오는 언제 재촉했냐는 듯 그들 무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신이 난 듯 춤을 추었다.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연주에 박자를 맞추었고 그것은 점점 더 빨라졌다.

한참 돌고 있던 엘씨오가 문득 사람들 뒤로 묻혀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붙잡았다. 강하게 당기는 힘에 깜짝 놀라 나는 그의 손을 밀쳤다. 그러나 한 바퀴가 돌고 다시 내 앞에 다가왔을 때 그의 손힘은 더 강해져 있었다. 결국 그 원 안으로 끌려들어간 나는 역시 원의 한 점이 되어 어지러울 정도로 돌고 또 돌아야 했다.

돌고 있는 것은 나지만 내 시선으로는 빙글빙글 돌고 있는 까를교의 야경이 왠지 가슴 한 구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나는 술에 취한 것처럼 웃음이 났다. 까를교 아래로 흐르는 강에 비치는 주홍색 가등이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도는 와중에도 엘씨오는 끊임없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무슨 말을 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밤의 까를교 위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금발머리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들의 춤도 끝이 났을 때, 나는 조금 어질해져 비틀거렸다. 엘씨오는 그런 나를 황급히 부축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나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밤이 깊은 것에 감사했다.

그날 밤은 전날 밤의 피로와 겹쳐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러니까, 웬만해서는 아침 해가 머리꼭지 위로 뜰 때까지는 시체처럼 누워 잘 수 있었다. 웬만하면 말이다.

처음엔 너무 피곤해서 가위에 눌린 줄 알았다. 온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기존의 가위와는 달리 이번에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몸은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고 있었다.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귀 뒤로는 뜨거운 입김이 연신 와 닿았다. 등허리에 닿아있는 익숙한 감각의 것은 점차 흔들림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단단해져 왔다. 온몸을 휘감는 것이 마치아담과 이브를 노리는 뱀처럼 집요했다. 그것은 두 마리의 뱀처럼 내 몸의 아래와 위를 동시에 휘어 감고…… 그러니까, 마치 사람의 다리처럼……다리… 다리?

<윽…>

<아->

<뭐…뭐야. 풀어줘. 아…안 돼…>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귀 뒤에서 들려왔다. 악센트가 강하고, 어딘가 일본어 비슷하게 들리는 이건 아마도… 이탈리아어?

<에, 엘씨오! 엘씨오, 왜 이래요, 그만. 흣… 그만, 그만해요. 제발…….>

목 뒤로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는 흐느낌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엘씨오의 움직임이 점차 격해지면서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엘씨오!>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자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기도 하고, 캄캄한 어둠속에서 -그것이 비록 엘씨오인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얼굴을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온 몸이 결박당한 채 등허리에 와 닿는 것을 저릿할 정도로 느끼고 있자니 문득 무섬증까지 일었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까 팔을 뻗어보았지만 팔 또한 몸에 바짝 붙여져 조여져 있었다. 도리질을 치며 기어코 눈물을 흘렸는데, 그때

<멈춰, 이 멍청아!>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엘씨오가 떨어져 나갔다. 아니, 그 남자, 아힘 슈미츠의 발길질에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                                               *                                               *                                             *

-민하야, 듣고 있어?

-아, 응. 그래서 걔랑 사귈 거야?

-당연하지. 그리고 조만간 걔 친구랑 소개팅 시켜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됐어, 난.

-그런 게 어딨냐? 넌 귀여운 타입 좋아했던가? 기대해.

-저기, 나는 말이야. 나는…… 사귀고 있는 애 있어.

-에엑! 거짓말! 나한테 말도 안 하고?!

D, 널 좋아하는 만큼 미웠던 순간도 많았다. 그리고 그건 내 사랑이 그러했듯 역시 너와는 전혀 무관한 채 혼자 떠도는 감정이었다.

언젠가 네가 불량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흘려 말했던 배구부 주장과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구관의 체육 도구실에서 뒹굴었다. 네가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그 애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괜한 시비를 걸어오곤 했었다.

처음엔 악다구니를 써가며 입에 잘 붙지 않는 욕설을 퍼부었고 그 다음에는 그저 오기로만 그 애의 가슴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상대도 되지 않는 내가 우스웠던지 그 애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간단히 제압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숨이 차고 몸이 뒤엉키는 와중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교복과 속옷이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D, 그건 폭력도 아니었고 강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몇 번 몸을 섞다보니, 실은 나도 어느새 그 애가 좋아지기도 했다. 그 애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뒹굴다보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그제야, 드디어, 내 안에 있던 네가 보이지 않곤 했다.

아아, D. 너는 책임이 없는 너를 향한 죄책감과 단지 완전한 나, 네가 없는 태초의 내 자신을 향한 그 무서운 쾌감에 나는 허리를 뒤틀면서도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울었다.

너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D, 20년 동안 너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