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3화 (3/29)

[03]

좁디좁은 공간 안에 먼지를 폴폴 날리며 각자의 침대를 펴고 침구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부터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칸에서는 아직 침대도 펴지 못하고 제일 아래층의 것을 의자로 사용해서 여섯 명이 어색하게 앉아만 있기도 했고, 또 다른 칸에서는 벌써 불을 끄고 자는 곳도 있었다.

나는 안 그래도 좁은 공간으로 차마 한 걸음 들어가지 못해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본 노부부가 잠깐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불어로 무어라고 말을 했다. 한 마디 말도 통하지 않고도 나는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쪽도 다시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 상황이 우습기도 해서 나는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차피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가방을 벗고 복도에 내려놓았다.

공기가 탁한 것 같아 닫혀있던 복도의 차창을 힘주어 열어보려 했으나 어디가 잘못된 건지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차창에 매달려 몇 번 끙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손이 하나 다가왔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이태리계의 남자였다. 그는 내가 열지 못했던 창을 대신 열어주었다.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창을 여는 방식이 한국의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나는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하고 창 쪽으로 바짝 붙어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그는 복도를 지나던 길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여행 중인가요? 어디서 왔어요?>

유럽에서는 아시아계 여자가 인기가 많다. 아시아에서 큰 눈과 바비인형 같은 이목구비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서구에서는 오히려 외꺼풀의 찢어진 눈과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슬쩍 검은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는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인기가 별로 없었다. 다만 가끔 취향이 이상한 놈들이 좀 집착에 가깝도록 붙은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내게 야하게 생겨먹었다고 내 외모를 평가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바르르 떨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는데, 그걸 또 하나같이 다들 손뼉까지 치며 좋아들 했었다. 변태자식들.

하여튼, 유럽에서는 아시아계 여자가 인기가 많다. 그리고 또 유럽에서는 아시아계 게이 또한 인기가 많은가 보다. 특히 이태리계의 게이는 한국 게이에 대한 특별 레이더가 발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엘씨오가 잡았던 어깨가 묵직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못 알아듣겠다는 듯 손바닥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영어 못해요?>

<노, 노.>

나는 게이에게 겁먹은 ‘노 스피크 잉글리쉬’ 이성애자인 척 했다. 포기가 빠른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긴 복도를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묵직한 어깨를 주물렀다. 그제야 엘씨오의 고백이 가슴에 정확하게 와 닿은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서 있자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프랑스인 노부인이었다. 코와 혀 아래의 울림이 좋은 불어로 또 길게 무언가를 설멍했는데, 정리를 다 했으니 당신도 들어와서 당신 자리를 정리해라, 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또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이든 어디든, 여행을 하며 진짜 ‘노 스피크 잉글리쉬’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프랑스인 노부부, 그리고 신혼여행 중인 듯 보이는 중국인 젊은 부부, 이렇게 네 명이 벌써 누워있었다. 나는 실례한다고 말한 후 제일 윗 층의 침대를 내렸다. 그러고보니 맞은편 3층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내가 이 방의 마지막 예약자였으니 나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있어야 했다. 침구 정리를 모두 정리한 후 이제 정말 꽉 들어찬 방 안을 둘러보며 나머지 한 명이라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평소에 폐쇄공포증은 전혀 없었는데,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헬로우.>

치약과 칫솔을 챙기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문을 열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영어권이든 비영어권이든 기본적으로 모두 통하는 인사를 했다. 프랑스인 노부부와 중국인 부부가 맞받아 ‘헬로우’하고 인사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조금 쓴맛을 느꼈다. 치약을 바른 칫솔을 한 손에 든 채 이번에도 역시 아래층 침대에 누워있는 중국인 남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후 그의 침대를 밟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문을 향해 돌아서는데,

<실례합니다. 잠시만요, 나갈게요.>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가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들은 그가 한쪽으로 비켜서며 돌아섰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헬로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황당하거나 당황스럽거나 미안하거나 고맙거나 화나거나, 뭔가 갑작스럽게 마음을 움직이는 상황이 발생하면 입술만 비틀어 올리며 어색하게 웃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대게 상대는 따라 웃게 된다. 아무리 근사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라도, 혹은 아무리 싸늘한 무표정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내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의 남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지나쳐 황급히 복도로 나와 화장실로 재게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은 악취가 가득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몇 초 동안 벌겋게 익은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놀라서? 당황스러워서? 미안해서? 나는 최대한 정성스레, 오랫동안 이를 닦고 찬물로 볼을 적신 후 문을 열었다.

<헬로우. 아까 못 받아줬던 인사.>

문을 열자마자 나는 다시 문을 닫을 뻔 했다. 바로 앞에 그가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 그러니까……게르만족 특유의 강한 턱을 가진,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위에 달린 남자. 내 토사물을 뒤집어쓴 그 독일인 웨이터 말이다.

<고... 곤니치와.>

<갑자기 영어를 못하게 됐나? 아니면 술에 잔뜩 취했을 때만 영어가 나오는 건가?>

한국의 여행자들이 해외에서 뭔가 실수를 저질렀거나 창피한 일을 겪었을 때, 그러한 긴급 상황 시에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일본인 행세다. 그러니까 어떤 실수, 어떤 창피한 일, 어떤 긴급 상황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일명 ‘꼬장’ 부린 일을 잊고 싶을 때 말이다. 내가 저 남자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불행하게도 나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며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저 남자가 여기는 무슨 일일까. 혹시 내게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복수를 위해 여태껏 내 뒤를 조사하고 내가 어디로 이동할 것인지 미리 알아낸 뒤, 기차역에서 어떠어떠한 계략을 써서 나와 같은 칸으로 예약한 것인가. 계속 엘씨오와 함께 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인가. 어떻게 복수할까. 때릴까? 아니면 나랑 똑같이 술 마시고 내 옷에 토하려는 것일까? 그 정도면 그냥 받아줄 용의가 있는데. 잠깐, 일본에는 야쿠자가, 이탈리아에는 마피아가 있다. 독일에는 뭐가 있지? 뭔가 더 무시무시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얼음! 이 된 자세로 작은 머리통을 굴리고 있던 나는 문득 그가 휴가 어쩌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다시 비시시 웃어보였다. 그 모양새를 본 남자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틈에 나는 겨우 악취 고약한 화장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댄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단지 ‘쫄면 안돼’하는 일념으로.

<오랜만이네요. 아니, 삼일 만이니까 오랜만은 좀 그런가요? 하여튼 이런 곳에서 다시 보니까 그래도 반갑네요.>

<내가 기억이 난단 얘기군.>

<그런데 어떻게 이런 우연도 있군요. 아, 휴가라고 했던가요? 그럼 휴가동안 여행을 갈 계획이군요?>

<내가 기억이 난단 건 곧 그때 그 일도 다 기억한다는 얘기겠지?>

<그건 그렇고 제가 그때는 참…… 아시겠지만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술에 너무 많이 취하기도 했고 몸도 안 좋았고 말이죠. 어떻게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얼굴의 근육은 돌처럼 굳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혀까지 얼어붙었는지 발음도 엉터리로 나왔다. 내가 지금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횡설수설하는 것은 내 성격과 맞지 않다. 아무리 과거의 나를 버리기로 했다기로서니, 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법이다, 암. 나는 조금만 비굴해 지기로 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외국인에게 허리까지 숙인 채 사과한다고 해서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알까 걱정을 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훔쳐보는데, 과연 그 의미가 전혀 와 닿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이 허리를 숙이며 ‘아니요, 괜찮습니다, 일어나세요’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 무시무시한 표정이라도 좀 풀었으면 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

<10유로.>

대신 그는 손바닥을 까딱거리며 뭔가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노려보며 짧게 말했다.

<네? 무슨…….>

<당신 벌금을 누가 대신 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거기다 갑자기 그 구역질나는 걸 뒤집어쓴 탓에 기차도 놓쳐서 이렇게 늦었어. 처음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 티켓 예약 환불비와 세탁비는 특별히 감면해 주겠습니다. 내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당신 벌금까지 내가 대신 내고 싶진 않아.>

<그 벌금이라면 엘씨오가, 그러니까 그때 나랑 같은 테이블에 있던 친구가 내지 않았나요?>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그 녀석도 엄청 취해서 벌금 내라는 말도 무시하고 낄낄거리며 당신을 업고 휑하니 나가버렸어.>

나는 입을 헤 버린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앞으로 남자는 다시 자신의 큰 손바닥을 내밀었다.

까딱까딱, 돈 내놔.

치사한 자식.

두 쌍의 부부가 벌써 자고 있는 어두운 방 안에서, 양가의 세 층짜리 침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여의치 않게 팔이 닿도록 가까이 선 남자와 나는 어둠을 핑계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곧장 가방을 뒤져 맨 밑에 넣어둔 지갑을 꺼내었다. 그리고 곧 따라 들어온 남자를 향해 10유로짜리 지폐를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손에 감정이 실려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남자가 그것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폐는 떨어졌다. 바닥으로, 남자의 신발 앞으로.

나는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리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남자 역시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꼼짝 않고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기 싸움, 자존심 싸움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알고 있고,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하지만 사람이 어느 정도 저자세로 나오면 그쪽도 조금은 풀어줘야 할 것 아닌가. 독일에서 겪었던 친절하고 상냥한 독일인에 대한 인상이 한순간에 바뀌려 했다. 순식간에 나는 ‘고지식한 독일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다시 슬며시 끄집어내게 되었다.

치사한 자식. 독불장군.

나는 화가 났을 때의 버릇대로 몸을 바르르 떨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남자가 잘근잘근 씹히는 내 입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곤 마땅찮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게 생각하는 걸까. 하긴, 내일 모레 서른인 남자가 제 잘못은 뒷전이고 같잖은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는 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결국 나는 그 망할 10유로를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남자도 허리를 숙인 것이었다. 그래서-

<앗!>

<윽!>

머리를 박았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를 내며. 잠귀 밝은 노부부가 흠흠, 거리며 눈치를 줬다. 어찔할 정도로 아팠지만 더 이상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해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대로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절로 맺히는 눈물을 눈꼬리에 달고 씩씩거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 또한 머리를 문지르며 그런 나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대적하는 것도 피곤해서 얼른 지폐를 주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확하게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뒤늦게라도 주니까 고맙군요. 이봐요,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지 말아요. 정확하지 않은 계산은 질색입니다, 나는.>

남자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속삭였다.

<당신 거기 직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거긴 참 인정머리 없는 곳이군요. 직원이 놓친 손님의 벌금까지 대신 내야하다니.>

나도 조용히, 그러나 빈정거리는 어조로 속삭였다.

<독일에서 계산을 정확하게 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닙니다.>

<것참 대단한 국민성이네요.>

<그쪽이야 말로. 난 처음에 당신이 한국인인 줄 알았지 뭡니까. 대게 우리 가게에 와서 그렇게 잔뜩 취해서 결국 토해놓고 벌금을 무는 건 한국 사람들이니까. 한국 사람들만 그렇게 코가 삐뚫어져라 마셔대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일본인도 똑같군 그래.>

거기서 한국사람 얘기가 왜 나오냐!

나는 ‘곤니치와’라고 말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 때문에 국민성이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하긴, 벌써 검증이 끝난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또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노부부가 동시에 흠흠, 거리며 뒤척였다. 결국 남자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홱 돌린 채 각자의 침대로 올라갔다.

불편한 잠자리와 막 깊은 잠에 빠질 즈음 여권 검사를 위해 차장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덕분에 완전히 밤을 샌 것보다 피곤이 더 몸을 눌렀다. 찌뿌드드한 몸은 둘째 치고 불쾌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마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설프게 잠은 깬 상태로 여전히 침대 위에서 뒤적거리고 있다가 서서히 주위가 시끄러워져 완전히 깰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역시 철저한 독일인답게 일찍 일어나 벌써 나갔는지 그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세안도구를 챙겨 복도로 나오자 복도 저 끝에서 그가 배낭을 내려놓은 채 차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눈곱만 떼는 정도로 간단하게 세안을 마치고 다시 복도로 나왔을 때, 남자가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나는 얼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척 하며 시선을 가려버렸다. 세안도구를 다시 가방 안으로 넣으면서 문득 아침 햇살에 비친 그의 금발 머릿결이 참 예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커튼을 젖히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국경을 넘은 것인지 황무지의 풍경만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기차가 완전히 정차하고 나서야 나는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흘러나와 역은 금방 사람떼로 바글거렸지만 키가 훌쩍 큰 데다 선명한 금발 덕분인지 그는 저 멀리서도 눈에 띠었다. 그가 역 안의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난 후에야 나는 서둘러 엘씨오와 약속한 정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씨오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그러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곧 멀리서 엘씨오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뒤로 음료수 캔을 들고 걸어오는 금발의 그 남자가 보였다. 나는 왠지 다급해져 입술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엘씨오를 향해 어린아이처럼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어대자 엘씨오는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의 눈에도 띤 것 같았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엘씨오는 좀 더 걸음을 빨리해서 걸어왔지만, 금발의 남자는 좀 더 긴 다리로 아마 습관인 듯한 빠르고 넓은 보폭으로 걸어와 서로 엇비슷한 거리를 유지했다.

<엘씨오.>

<하루 만에 좀 달라졌네요, 미나. 이렇게 반겨주니까 감동스러운데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옆에 선 엘씨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남자가 엘씨오의 팔을 흘낏거리는 것을 보고 더욱 매달리다시피 했다. 우리 둘 곁을 지나치면서 그는 칫, 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고는 지나갔다.

<누구에요? 아는 사람?>

엘씨오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같은 칸에 있었던 사람인데……>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유혹 당했어요?>

<아니요! 그러니까, 그냥 같은 칸에 있었던 사람인데, 그… 코를 너무 골더라구요. 그래서 좀 다퉜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기…… 확실히, 잠잘 때 누가 건드리면 기분 나쁘죠?>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그래서 예의 그 ‘입술만 비틀어 올리며 어색하게 웃기’ 표정을 지어보였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게. 어쨌든 가요. 가면서 얘기해요.>

나는 역시 나의 ‘입술만 비틀어 올리며 어색하게 웃기’ 표정을 따라하며 뻣뻣하게 서 있는 엘씨오를 잡아끌었다.

<그나저나 엘씨오. 내가 준 10유로, 왜 받은 거예요?>

<예? 당신이 주니까 받았죠. 하룻밤 숙박비로 준 거 아니었어요?>

그는 잠시 깜짝 놀란 듯 표정을 풀고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지만, 곧 근심걱정 어린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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