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2화 (2/29)

[2]

심한 갈증을 느끼며 ‘무울~’을 외치는데 반갑게도 입술 사이로 조금은 미적지근한 물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양이 갈증을 풀기에는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목구멍에 흘러 들어오기도 전에 입가로 흘러 볼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급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입을 더욱 크게 벌린 채 내 입술과 접촉한 채 물을 흘려보내주고 있는 것을 빨아 당겼다.

그러니까, 부드럽고 말캉하지만 그 주변은 어쩐지 조금 따가운 것이…… 아무래도 수염을 깔끔하게 밀지 않고…… 영화배우 모씨를 따라하며 기르는 중인 것 같은데…… 응? 수염??

<푸핫->

<엑! 열심히 넘겨주고 있는데 갑자기 내뱉으면 어떡해요?>

<엘씨오?>

<굿모닝, 미나.>

낯선 방이었다. 아니, 짐을 맡겨둔 유스호스텔은 방을 구경도 하지 못했으니 내가 예약해둔 방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니다. 이곳은 유스호스텔이 아니다. 도미토리가 아닐뿐더러, 아무리 좋은 유스호스텔의 1인실일 지라도 이 정도일 리는 없었다.

<엘씨오. 여기 어디죠? 나 왜 여깄나요?>

<미나가 쓰러졌잖아요. 그래서 데려왔어요. 여긴 내 숙소.>

<숙소? 여기가?>

가난한 고학생이라면서요? 하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의 손에 들린 컵을 받아들고 대신 물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눈치 챘는지 엘씨오는 두 손을 흔들며 변명을 시작했다.

<저기, 여긴 그렇게 좋은 호텔 아니에요. 물론 여행의 묘미는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문화를 나누는 것이긴 하지만요, 내가 잠버릇이 좀 고약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유스호스텔이라도 1인실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이렇게 허름한 호텔을 선택하는 거예요. 나 그렇게 돈 자랑 하는 꼴불견 아니에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명하는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었더니 엘씨오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예의 그 빙글거리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도 엄청 취했고, 당신은 아예 기절해버렸고, 그래서 그냥 내 숙소에 데려와 버렸어요. 그래도 아무 일 없었어요. 믿어도 돼요.>

<믿을게요. 당신 그렇게 그걸 자랑하는 꼴불견은 아닐 테니까, 그렇죠?>

그의 아래를 슬쩍 쳐다보며 말하자 엘씨오는 허리를 젖히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렇게 야한 농담을 한 것을 후회했다. 아니,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아무래도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모두 거짓이고 인간은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쪽이 옳은 것 같다. 나는 스스로의 변화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엘씨오에게는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가운을 벗고 샤워기를 돌리는 순간 내가 홀딱 벗은 채 가운만 입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바로 밖으로 나가 엘씨오에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게 확실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곧, 또 뭔가 있었으면 어떠냐,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지조 강한 게이였던가 자문해 보고는 다시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머리를 적셨다. 그런데, 머리에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닥까지 닿기도 전에 내 머릿속을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웨이터. 10유로.”

모든 것이, 아니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일이 기억이 난 것이다.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쏟아지는 물을 멍청하게 목구멍으로 넘기며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밖에서 엘씨오가 흠흠, 거리며 인기척 소리를 내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가운만 입고 나와요. 당신 옷은 너무 많이 더러워져서 세탁을 맡겼거든요. 잠시 후에 가져다주기로 했으니까.>

얼굴이 뜨거워져 차가운 물을 틀었다가 얼음장 같은 수온에 깜짝 놀라 다시 뜨거운 물을 틀어야만 했다. 뒤늦게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여깄어요.>

호텔을 나서면서 나는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엘씨오에게 10유로를 내밀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건 왜요?>

당신이 대신 벌금을 내줬잖아요? 묻고 싶었지만 그 이야기는 꺼내기가 민망해서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룻밤 서비스 치고는 좀 적은데요. 나 이래봬도 꽤 인기 많은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좀 불쾌해져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엘씨오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또다시 두 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아니,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데 정말 이렇게 돈까지 주지 않아도 되는데.>

<돈 문제는 확실히 해야죠. 거기다 그건 내 탓이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아무 말 없이 돈을 지갑 안에 넣었다. 그제야 나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어깨를 쭉 펴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엘씨오는 무언가를 흥얼거리며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는 뒤돌아 그를 세웠다.

<고마웠어요. 재밌었구요. 다음 루트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말하자 엘씨오는 짙은 눈썹을 휙 올려 이마에 주름이 지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나는 뭔가 뒤를 당기는 것을 느꼈다.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 건가요?>

<그래야죠. 당신도 어제 말했잖아요. 언제나 만나고 헤어지는 걸 반복한다고. 여행이란 그런 거죠.>

내가 손을 흔들며 재빨리 몸을 돌리려 하자 엘씨오가 어깨를 잡아챘다.

<잠깐. 그 만남과 헤어짐에서 강제는 안 돼요. 아주 자연스러워야 한다구요.>

<우리 어제 자연스럽게 만났고 또 지금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있는 거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미나, 당신 다음 루트가 어떻게 되죠?>

꿈틀거리는 그의 짙은 눈썹이 뭔가 장난꾸러기 꼬마를 연상케 했다. 내가 입을 달싹거리며 대답하기를 꺼려하자 엘씨오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까칠까칠한 수염이 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빤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뒤로 한 걸음 주춤 물러선 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툭하니 대답하고 말았다.

<체코로 갈 거예요.>

<빙고.>

엘씨오는 시원스레 웃으며 자신의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펼쳐보였다. 그것은 그가 미리 작성한 듯한 여행 계획서였다. 그러니까 그의 여행 루트인 것이었다. 나는 [Munich](:뮌헨)다음에 화살표를 그은 후 [Prague](:프라하) 라고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이를 다시 두 번 접은 뒤 건네주자 엘씨오는 승리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난 독일에서 며칠 더 있을 거예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이봐요, 미나.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아요. 난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지루한 이동 시간동안 말벗이 필요할 뿐이라구요. 그리고 이것도 인연인데 운명이 허락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것도 나쁠 것 없잖아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한 소심한 경계심이 머리를 세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빙글거리는 엘씨오를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안의 나쁜 기운이 하루 빨리 모두 소진되어버리길 바라면서. 그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씨오는 그것이 긍정의 뜻인 것을 알아차리고 나보다 한 발 앞서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갔다.

독일은 멋진 곳이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유럽의 여느 도시가 그러하듯 독일 또한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한 곳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절제가 그것을 더욱 세련되게 보여주었고, 약간은 바랜 듯한, 톤이 다운 된 색감의 건물들이 자칫 삭막하게 보일 수 있는 도시를 깨끗하고 단정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도로의 양 가로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가 큰 나무들이 즐비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독일 곳곳에서는 유난히 꽃밭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꽃을 사랑하는 민족이 그 옛날 그토록 잔혹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독일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과도 연결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표정 없이 어두운 색채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지만, 타인이 말을 걸고 길을 물을 때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운 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단지 외국인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 은근하게 느껴지는 것이어서 나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더 이곳을 찾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거기다, 누가 게르만족들이 울퉁불퉁하게 못 생겼다고 했던가. 내가 본 사람들만 그런지 몰라도, 독일인들은 모두 키도 훌쩍 크고 날씬한 데다 여자나 남자 모두 서늘한 느낌의 미남미녀였다. 내 토사물을 뒤집어쓴 호프브로이의 그 웨이터만 해도, 비록 취해서 잘 생각은 안 나지만 굉장히 잘 생겼…… 하여튼 독일 사람들은 모두 모델 출신인 것만 같았다.

이제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나는 어딘가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사적으로 뜻 깊은 자리인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내 속에서도 무언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게 D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엘씨오는 내가 한국어로 무슨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뭐라고 했죠?>하고 물었지만, 나는 차마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엘씨오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엘씨오와는 정말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가끔 유치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짓궂은 장난을 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적정선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처음에 함께 다니는 것을 꺼려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는 당연히, 나는 6인실 도미토리 형식의 유스호스텔에서, 그는 나름 허름하다는 호텔에서 계속 묵었다. 그리고 그 날의 일정을 맞춰보고 같은 곳이 있으면 함께 다니되,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을 선택하면 깔끔하게 각자의 선택을 걸었다.

동화책 전체를 옮겨온 것만 같은 작은 도시에서 유명한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마차에서 내리면서 먼저 풀쩍 뛰어내린 후 마치 공주님 호위하듯 무릎을 꿇고 내게 손을 내밀어 마차에 함께 탔던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휘파람세레를 받은 것만 빼고는, 엘씨오에게 불만인 점은 없었다.

뮌헨의 중앙역에서 프라하로 가는 표를 예약하면서 엘씨오는 처음으로 내게 입이 삐죽 튀어나온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름 아니라, 두 자리가 남는 쿠셋(간이침대열차)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객실의 각자 하나씩 남는 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는 유레일패스가 통용되지 않아, 유스패스(youth pass:26세 미만까지 사용할 수 있는 2등석 할인 승차권)를 가지고 있는 자신과 노멀패스(26세 이상 성인이 사용할 수 있는 1등석 승차권)를 가진 내가 갈라지지 않아도 된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었는데, 사탕을 빼앗긴 표정을 보니 덩달아 나까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아, 긴긴밤을 같이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귀찮은 구석도 있었지만 며칠 동안 나 또한 벌써 엘씨오에게 꽤나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곧 차라리 잘 됐다고 결론 내렸다. 안 그래도 야간 이동으로 힘들 텐데 그나마 누워서 갈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며, 행여나 그와 같은 칸을 타게 됐더라면 그가 넌지시 말한 대로 긴긴밤을 그의 엉터리 영어 수다로 잠을 설쳐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도착하면 역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요.>

아이를 달래듯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준 후 나는 무거운 배낭 때문에 구부정해진 등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나는 며칠 전처럼 또 한 번 엘씨오에게 어깨가 잡혀 돌려졌다. 그 역시 꽤나 무거운 배낭을 멨는데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어보였다.

<미나. 혹시 그 칸에서 엄청 섹시한 남자를 발견하더라도 넘어가면 안 돼요, 알았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처음, 그러니까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그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그가 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술에 취해 같은 방에서 밤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점과 며칠 동안 계속 같이 다니면서 몇 번의 장난스러운 스킨쉽 외에는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아서 내 예상이 틀렸거나 혹은 나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 들었나 생각했었는데, 아니다. 그는 여전히, 처음 느꼈던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코를 찌를 듯한 수컷의 냄새였고, 영역표시에 대한 욕구로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올 정도의 강렬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몰랐다고 하지 마, 강민하. 처음부터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의 시선을 피하고 다음 행선지를 묻는 질문에 대답을 꺼렸던 거잖아. 비겁하게 굴지 마. 병신처럼 움츠려들지 마. 경계를 풀어.

<내가 계속 웃고 있으니까 농담처럼 들리죠? 이번엔 농담 아니에요. 대답해줘요. 우린 내일 아침, 도착하면 역 입구에서 만나는 거예요, 맞죠?>

어깨를 꽉 쥐는 엘씨오의 손힘에 나는 그가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작게 몸을 떨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감은 순간, 그 짧은 순간 어둠 속에서 나는 허물어진 베를린 장벽을 보았다. 그것의 잔재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외면하며 나는 눈을 떴다.

<알았어요. 내일 아침, 도착하면 역 입구에서 재회.>

다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자 엘씨오는 그제야 내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고 호쾌한 표정을 띠었다.

<한 가지 더요. 그 칸에서 다른 남자랑 눈 맞지 말기. 이것도요. 알았죠? 잘난 척 하는 건 아니지만, 나만큼 성격 좋고 섹시한 남자 찾기 힘들어요.>

<엘씨오. 한국에선 이런 말이 떠돌아요. 이탈리아에 가면 장동건이 과일을 팔고 원빈이 생선을 판다. 장동건과 원빈은 한국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쳐주는 영화배우예요. 이만하면 됐어요?>

엘씨오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내 고향이 이탈리아인 걸 행운으로 여겨야겠네요.>

나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신경 쓰며 다시 그에게 잡히기 전에 얼른 발길을 돌려 끙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

-강민하, 넌 축구 안해?

-안 해.

-왜?

-땀나니까. 옷도 더러워지고.

-……. 그러니까 애들이 너더러 놀리는 거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에이, 알았어. 아프다고 해줄게. 심장이 안 좋다고 할까?

D, 나는 네게 뭐였을까. 소심하고 운동도 못하고 남자답지 못한데다, 하물며 공부도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 하필이면 그런 녀석과 짝이 된 전학생, 너는 곧 학교 전체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너를 반짝이게 하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나는 어느 하나 탐내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면 내 사랑은, 바로 그렇게 동경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너에게 나는 뭐였던 걸까.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짝에 대한 단순한 의리뿐이었을 테지만, D, 그 시절 나는 그것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며, 열망하며, 소원하며,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첫 몽정으로 잠에서 깨어난 새벽, 젖은 팬티를 몰래 씻으며 네게 죄책감을 느끼며 훌쩍이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네 그런 배려와 관심의 표현이 그저 착하디착한 네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었다.

D, 그 후로 20년이었다. 세상에, 20년이라니. 20년을 너를 품었고, 아니, 너에게 빠져 허우적거렸다. 너를 볼 때마다 손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입이 바짝 말라왔다. 너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20년……. 그런 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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