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리 박봉이라도 생계과 연관이 된 일까지 관두고서 벼락 맞은 듯 짐을 싸고 여유도 없이 비싼 가격의 비행기 표를 덜컥 예약해 버린 것은, 현실 자본주의 시대를 일반적인 머리로 계산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는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미친놈이겠지만.
그러니까 내 경우에는, 이런 상황을 오래전부터 예상-계획이 아니라 예상-하고 있었고, 마침 D로부터 청첩장을 받은 순간 불현 듯 ‘바로 지금’이라고 머리 위에서 빨간 불이 켜졌다고 변명한다면…… 역시 미친놈 소리 듣겠지.
어쨌든 나는 그렇게 했다. 내게 주어진, 예지라면 예지랄 수도 있는 능력으로 주어진 상황이 왔을 때 신의 계시를 수행하듯 자연스레 행동했다는 것이다. 울지도 않았고 손을 떨지도 않았다. 내일모레면 나이 서른인데 생애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는, 걱정했던 멀미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뒤집어지지 않았고 테러도 없었다. 자리가 좁고 불편한 것은 전의 내 박봉의 직장을 탓해야 할 것이었다.
앞 칸의 외국인 노부부가 12시간 내내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댔던 것을 빼고는 나를 심란하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대각선 앞 쪽의 이태리계 남자가 계속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나를 향해 힐끔거린 것은 오랜만에 내 가슴을 설레게까지 했다. -그 남자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는데, 나는 왠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갑작스레 환전한 탓에 조금이라도 이익을 볼 수 있는 환전방법을 뒤늦게 생각해 내고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내 생애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그깟 돈 몇 푼에 신경을 쓰지 않는 호쾌함’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져보기로 했다. 그래, 까짓.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소심하고 덜떨어지고 쪼잔하고 덜렁대고 잔걱정 많은 평소의 나를 모두 버린 것이다. 아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의 청첩장을 받자마자 말이다.
그리고 습한 날씨로 인해 눈에 뭔가 낀 것처럼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나라에, 나는 마치 오래 전에 와본 것만 같은 기시감을 느끼며 첫 발을 내딛었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심사관이 내게 질문을 했을 때는 마침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죠? 어디 아픈가요?>
<왜요?>
<당신, 울고 있잖아요.>
<아- 좋아서요. 정말 와보고 싶었던 도시라서. 기쁨의 눈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빙긋빙긋 웃고 있는 나를 두고 심사관은 꽤나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멍청해 보이는 것이 테러리스트라고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미친놈을 자기 나라에 들여보내고 싶은 입국 심사관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매 끝으로 얼굴을 닦으며 약혼녀와 파혼하고 함께 오기로 했던 신혼여행을 혼자 왔다는, 웬만한 사람은 절대 믿지 않을 거짓말을 구구절절하게 쏟아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심사관은 애국자는 분명했지만 심각한 로맨티스트였던 덕분에 나는 무사히 입국장을 나와 런던의 작지만 아담한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그 습한 도시에서 나를 감동시킨 것은 빨간색 이층 버스도, 맑고 청량하지만 아쉽도록 짧은 빅벤의 종소리도, 일본 관광객들이 환장을 한다는 런던아이도, 정교한 예술품처럼 고귀하게 서있는 웨스턴민스터 사원도 아니었다. 이가 갈릴 만큼 추운 해질녘마다, 나는 불 밝힌 국회의사당이 찬란하게 비치는 템즈강 주변을 걸어 다녔다.
그곳에서는 어설픈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나보다 조금 더 혹은 조금 덜 외로운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린 채 그들 주위를 둘러서 있기도 했다. 그리고 간간히,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 아름다운 연인들이 스쳐지나갈 때는 나는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것이 내 아랫배를 간질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감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와 또 한 명의 남자가 자연스레 손을 잡고 혹은 어깨를 부여잡고 시선을 마주한 채 걸어가는 모습.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기하게 쳐다보지도 않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오히려 내가 매너도 없이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람에 도리어 이상한 시선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용기라고, 희망이라고, 자유라고,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외로운 사람들이 에워싼 거리의 음악가 앞에 펼쳐져 있는 기타 케이스 속으로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을 모두 던져 넣으며, ‘감동’하고 작게 속삭였다.
언젠가, 아마도 입대하기 전에 잠시 사귀었던 남자였을 것이다, 유난히 눈이 깊어서 약간 찡그린 듯한 표정으로 사람을 바라보던 남자가 내게 함께 외국으로 가자고 했었다.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 그리고 이 도시도 포함이 되었던가? 하여튼 그가 말했던 곳은 모두 어떤 하나의 의미로 통하는 곳이었다. 우리들의 파라다이스라고 그는 불렀던가. 그는 나를 사랑했다. 심장에도 솜털이 나 있을 것만 같았던 시절, 나 또한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그를 많이 좋아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북돋아주었다.
하지만 그때도 내게는 D가 있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D에게는 죄스러웠다. 웃긴 것은, 그 모든 상황을 그 남자는 알고 있었지만 D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남자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고, 또 한 남자는 이유도 모르면서 유난히 살뜰한 내 모든 호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내가 그 남자와 떠났다면, 젊은 호기로 떠났다면, 그때 D를 싹뚝 잘라내고 떠났다면, 나는 저들처럼 행복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었을까.
자존심과 오만과 도덕과 예의가 뒤섞인 거대한 섬나라에서 유럽대륙으로 가기 위해 나는 바다 한 가운데를 달리는 기차를 탔다. 그 기묘한 경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해저터널을 통과하면서 나는 태아 적 꾸었던 꿈을 꾸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어릴 적부터 심약했던 나는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다른 사내아이들처럼 비행사나 대통령,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나는 그저 사랑, 사랑이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 방 안에 가득 채워져 있던 인형들 중에서 전쟁놀이에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온순한 표정의 인형들을 아버지가 모두 가져다 버렸을 때에 나는 앞으로 내 사랑은 항상 결핍되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오밀조밀한 레이스가 잔뜩 펼쳐져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상점마다 관광객을 유혹하기 위해 걸어놓은 화려한 레이스가 수놓아진 손수건들과는 대비되는, 골목 너머 골목에서 느껴지는 황량함이 아이러니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이중적인 아이러니를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버리고 온 것이 바로 그 얼굴 뒤의 표정 아니었던가. 내가 도망쳐 온 것이 바로 그 농담 뒤의 진담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는 점심을 맛없는 샌드위치로 해결한 뒤 황급하게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충동적이면서도 예지에 의한 예감으로 인해 결합된 필요악적인 경험이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도 없었고, 영원히 떠날 수도 없었으므로 모든 것을 버리는 척 갑작스레 떠나왔지만, 이것은 단지 ‘여행’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여행에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기대하듯,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서 내 모국으로 돌아가서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적당히 미친 짓을 하고-직장을 관두고 쫓기듯 갑자기 떠나온 것부터가 이미 반은 완성되었다, 그러니 이제 반만 남은 것이다- 또 적당히 자제해서 정신은 가볍고 산뜻하되 몸은 건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은 안 된다. 이건, 예상에 없던 것이다.
<괜찮아요? 그런데 저기, 여기서 토하면 벌금이 10유로인 거 알아요?>
억지로 마시게 했던 주제에!
그렇다, 나는 그 어머니의 포근함과 아버지의 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도시, 브뤼셀을 떠나서 독일 뮌헨에 도착했다. 전날 야간이동을 한 탓에 몸이 찌뿌드드했지만 칼처럼 정확한 독일인들답게 유스호스텔조차도 여행자의 피로함 따위는 봐주지도 않고 체크인 시간을 철저하게 지켰다. 눈에 선 핏발을 보여주며 간신히 짐만은 맡겨놓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뮌헨 시내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돌아다닌 곳이래야 봤자 마리엔 광장 안에서 돌고 돈 것이 전부였지만 천근만근인 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코앞에 닥쳐온 서른 몸뚱어리 티내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과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까페에서 몇 시간동안이나 엉덩이를 붙이고 게으름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다시 숙소에 들어갔다 나올 생각을 하니 어찔해져 그냥 계속 더 돌아다니다 저녁에야 들어가는 게 낫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 겸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랠 겸 들어간 곳이 바로 이 곳, 호프브로이 하우스.
뻔뻔하게 술 마시러 오면서 혼자 입장하는 것은 한국이나 독일이나 어색한 일인지 일제히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타인에게는 무심한 문화인데다가 여행객이 넘쳐나는 곳에서는 웬만한 사고가 아니면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주지 않는 유럽에서 며칠을 지내다보니 나는 그것이 비록 좀 유별난 시선일지라도 왠지 감격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소심하고 덜떨어지고 쪼잔하고 …… 하여튼 뭐 그런 나를 모두 버리기로 했으므로 나는 그 모든 시선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들어서서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웨이터를 기다렸다. 역시 내가 먼저 당당한 태도를 취하자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 떠들고 마시고 또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누군가 내 앞에 서서 그늘을 만든 것은 내가 벌써 한 잔의 맥주를 비우고 있었을 때였다. 몸이 피곤한데다 입맛에 맞지 않아 안주를 거의 먹지 않은 결과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취기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앉아도 되나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나를 향해 고개를 틀어 힐끗거리던 이태리계 남자였다. 한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아니라 또 새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럽 여행의 패턴이야 전문가가 아닌 이상 다 거기서 거기니까 며칠 전에 본 사람을 또 다른 곳에서 보는 경우야 허다했다.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몸은 피곤하고, 그게 마치 서른 살 신고식인 것 같아 서럽기도 하고, 서른 해를 보낸 고향이 떠올라 갑자기 외롭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술에 적당히 취한 탓에 더욱더 고양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어주기까지 했다.
<비행기 안에서 나 봤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못 볼 리가 없죠. 여행 중이신가 봐요? 여행 루트가 좀 특이하네요. 전 세계를 다 돌 작정인가 보죠?>
<그럴 리가. 아니, 그럴 수야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가난한 고학생이라서 말이죠. 한국에선 유학중이에요, 1년 교환학생. 방학동안 귀국한 겸 여행하는 중이죠.>
남자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쪽도 이미 적당히 취한 듯 보였다. 혼자 다니기는 하지만 때때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루트가 같은 것을 전제로 함께 다니기도 한다고 했다. 뒤로 그의 새로운 일행으로 보이는 무리가 신나게 떠들고 있었지만, 그는 다시 그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뭐, 언제나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사이니까요. 난 이쪽 새로운 친구가 더 마음에 드네요. 어때요, 나랑 한 잔 더 할래요?>
나는 웨이터를 향해 빈 잔을 흔들었다.
<나는 엘씨오라고 부르면 돼요. 그쪽은 뭐라고 부르면 되죠?>
나는 조금 고민했다. 타인에게 목적 없이 이름을 밝히기란 어쩐지 쉽지가 않다. 거기다 엘씨오, 그의 이름은 진짜일까. 하지만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에게 무엇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아무 상관없지 않냐는 생각에 경계심 많은 나의 마음은 허물어졌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취기도 한몫했다.
<민하. 발음하기 어렵죠? 우리나라 사람들도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건 어려워해요. 그냥 mina라고 발음해도 돼요. 실은 그건 여자이름처럼 들려서 좀 싫긴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외국인이니까 특별히 봐줄게요.>
엘씨오는 유쾌한 남자였다. 둘 다 그리 완벽하지 않은 영어 실력으로-그가 한국어를 조금 하긴 했지만, 그 조금이 열 문장도 채 되지 않아서 차라리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서로 더 편했다- 겨우겨우 대화를 이어갔지만, 그는 잠시도 입과 손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그는 온 몸을 이용해 뜻을 전하려 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나는 오랜만에 배를 부여잡고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글라스를 드는 것이 힘이 들었다. 물리적인 힘은 그렇다치고, 입에 가져다대는 순간 알코올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음식으로 치자면 ‘김치’ 정도로 여겨지는 독일의 전통 양배추 절임 안주를 조금 집어다 혀에 갖다 대는 순간, 올라왔다.
<욱-!>
<괜찮아요? 그런데 저기, 여기서 토하면 벌금이 10유로인 거 알아요?>
다행히 헛구역질로 그쳤지만 정말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엘씨오는 장난을 치듯 킥킥 웃으며 벌금 운운하며 내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입을 틀어막은 채 화장실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변기통 속으로 머리를 박았지만 헛구역질만 계속 올라올 뿐 진짜 뭔가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화장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와 뒤에 서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토하면 벌금이 10유로에요.>
<알아요! 아까 말했잖아요!>
짜증이 치밀어 급하게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엘씨오가 아니었다. 유창한 영어를 사용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게르만 민족 특유의 단단한 턱을 가진 독일인이었다.
<누구세요?>
<여기 직원입니다.>
그러나 이 독일인은 웨이터 복장을 갖추어 입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 혹은 어디선가 여행을 온 사람처럼 최대한 활동성이 편한 차림에 화장실 입구에는 커다란 배낭까지 놓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위협적인 눈빛으로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위에 있는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위협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남자는 그저 무덤덤하게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오늘, 아니, 휴가가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임무거든요.>
나는 위협은 때려치우고 비웃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럼 다른 임무를 보세요, 웨이터씨. 나는 10유로가 아까운 가난뱅이 여행객이니까 토하더라도 여기, 이 변기통에다 쏟아낼 테니까.>
<미안하지만, 우리 가게에선 밖에서든 화장실 안에서든 토하면 무조건 10유로 벌금입니다.>
기가 막혔다. 나는 아무에게나 싸움을 걸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머리를 드는 것을 느꼈다. 아아, 나도 이제 정말 아저씨가 되려나 보다.
<그러니까, 당신 지금 여기서 내가 토하나 안 토하나 감시하겠단 말이죠? 알았어요. 그럼 빨리 끝내죠.>
나는 그의 옷에다 토해버릴 작정으로 손가락을 목 안으로 쑤셔 넣었다.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당장이라도 내장까지도 쏟아낼 것처럼 속이 쑤셨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웨이터라고 말하는 남자는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 끝나죠?>
지루한 음색에 나는 억울함이 치솟았다. 이유 없이, 술에 취한 사람이 벽을 보고 욕을 하고 전봇대를 들이박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둔 것도, 비싼 값에 비행기 표를 산 것도, 조금의 할인도 없이 환전을 한 것도,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내내 노부부가 떠들어서 잠을 자지 못한 것도, 창피하게 고작 두 잔-비록 한국의 술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글라스지만-으로 이렇게 엉망으로 취해버린 것도, 속이 뒤집힐 것처럼 아프면서도 정작 아무 것도 토해내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D가 …… 나의 첫사랑이자 20년 동안 내 인생을 뒤흔들었던 도둑이었고 희망이었고 빛이었고 어둠이었으며 절망이었고, 또 나의 영웅, 나의 호걸, 나의 전부였던 D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모두 이 무뚝뚝하고 건방진 표정의 웨이터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옷에 토사물을 뿜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렸다.
<이... 이봐요.>
웨이터는 팔짱은 풀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내 등을 쓸어주지도 어깨를 감싸안아주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는 그것 또한 서러웠다. 나의 토사물 대신 눈물이며 콧물과 침이 그의 옷을 적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또 킥킥 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남자는 얼음장 같던 표정을 풀고 입을 쩍 벌린 채 황당하다는 듯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신, 속이 아니라 머리가 아픈 것 아닙니까?>
그리고는 이렇게 건방진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의 얼굴 앞으로 중지를 들어보였다. 명백한 욕설이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을 홱 돌려 나가려했다. 나는 취객 특유의 ‘막무가내 힘’으로 그런 그를 다시 끌어 당겼다. 덩치가 큰 남자를 끌기에는 그냥 ‘막무가내 힘’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머리 속에 한 줄로 남아있는 이성으로 내가 미쳤나, 이러다 귀국도 못하고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고작 ‘한 줄’뿐이었다. 줄은 곧 끊어졌다. 나는 다리를 고정한 채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런 나를 남자가 귀찮다는 듯 팔을 휘두르는 순간,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아야야야->
나는 취객 특유의 엄살을 떨었다. 전혀 아프지 않은데도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팔을 휘둘러 나를 떼어낸 주제에 넘어지는 나를 순식간에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팔 안에 감싸인 나는 머리꼭지 위에서 남자의 화 난 듯한 뜨거운 입김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완전히 돌았군. 미쳤어.>
<나쁜 놈!>
<잡아줬잖아!>
순간, 갑작스럽게 몸이 긴장을 해서 그런지 이제야 말로 ‘그때’가 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내가 한 걸음 더 빨랐다.
<우웩->
<제길!!!>
그리고 나는 한결 편안해진 속을 느끼며 휘몰아치는 졸음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쓰러진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필름이 끊겼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나는 그가 내 토사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점퍼를 내려다보며 거칠고 위협적인 느낌의 독일어로 차창을 깨뜨리는 폭우처럼 퍼붓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틀림없는 욕이라고 생각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