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8)

#7

모든 결과에 타당한 원인이 따르는 법이란 없다. 그릇된 원인이 올바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바로 된 원인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태형 형에게 내 능력에 대해 진실대로 말했더니 올바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K3를 사이남에게 판매한 유진은 태형 형에게 있어 두 가지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태형 형은 형으로서 유진을 꾸짖을 수도 있었고, K3를 이용해 공적 다툼이 치열한 경찰세계에서 자신의 공명심을 더 쌓을 수도 있었다. 태형 형은 후자, 즉 사이남과 손을 잡는 기회를 선택했다. 사이남은 묵야를 실추시키고 싶어 했고 태형 형은 공명심에 사로잡혀 묵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그 둘을 연결시킨 자는 유진이었다. 만일 내 카페로 K3포대가 배달오지 않았다면 태형 형의 계획은 무리 없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글쎄…. 묵야가 절대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 지금처럼 실패했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것 같긴 했다. 

태형 형의 가장 큰 실수는 K3를 내 카페로 보낸 것이었다. 이미 사이남과 손을 잡고 있었던 형은 K3 배달책인 고등학생을 이용해 나를 도시로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도시로 불러들인 건 묵야였다. 원인과 결과는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 둘이 무조건 일맥상통하는 건 아니었다. 태형 형이 저지른 원인으로 인해 묵야를 만났고 태형 형이 아닌 묵야 때문에 도시로 올라가게 된 상황이 그것을 증빙했다. 

묵야가 그의 형 사이남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사파의 대표이사 한 명이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것만 주워들었다. 태형 형은 살인미수죄에 총기불법사용 죄목이 더해져 재판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전성그룹 과다 마약 복용살인사건이 추가될 형편이었다. 형이 선택한 지름길은 이미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이 막혀 있었다. 

사파의 우두머리였던 사신후는 내가 납치된 날로부터 삼일 뒤에 세상을 하직했다. 묵야를 위로해줄 마음은 충분했지만 묵야에겐 위로가 필요 없어보였다. 오늘 내 아버지가 죽었다. 삼일간은 전화통화만 가능할 거다. 이 말이 전부였다. 사신후의 죽음과 맞물려 에비스 카지노의 전무가 종적을 감췄고 사이남의 직책이었던 사파 건축의 대표이사 자리는 묵야의 누나가 차지했다. 사이남이 벌집을 쑤셔놓았더니 나비처럼 날아든 여왕벌이 독이 가득한 침을 쏘았다. 이토록 삽시간에 벌이지고 일순간에 정리된 사건들은 바로 도시의 특징이었다. 빠르고 급하게 이동하는 도시는 역시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고 묵야의 마음에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카페로 돌아오니 내가 도시에 있는 동안 테이블 위로 뽀얗게 쌓인 먼지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꼬박 걸려 청소를 마치고 카페를 재 오픈했다. 카페가 망한 줄로만 아는 시골의 손님들이 그로부터 장장 일주일은 찾아오지 않았다. 일주일간 내 커피를 맛 본 사람은 묵야뿐이었다. 시골로 다시 내려가고 싶다는 의견은 내가 먼저 내비치지 않았다. 한동안은 묵야의 호텔에서 지내는 내게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주인,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갈 수만 있는 곳이라면 난 괜찮다라고. 묵야는 카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진즉에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고 묵야에게 카페로 돌아가겠다는 답을 건넸다. 묵야는 솔직히 섭섭한 심경을 보였지만 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카페로 돌아온 뒤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묵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카페의 밑, 공터나 다름없던 밭에 어제 포클레인 세 대가 들어섰다. 나와 묵야가 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일구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공사의 예정은 약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어제 묵야가 가져온 모형 설계도를 보니 마당엔 농구장이 있었고 강아지를 수십 마리는 키울 수 있는 정원까지 딸려있었다. 한 층으로 이루어진 집 내부의 모형은 별장보단 전원주택에 가까웠다. 

카페의 골방에서 나와 같이 잠을 청했던 묵야는 오늘 오전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엉덩이 안쪽이 욱신거렸다. 

“오메, 이게 무슨 일이여!”

가게 문에 매달린 방울이 이번에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주 할배의 산책코스는 내 카페를 지나가야했다. 그동안 장주할배는 산책을 게을리 했는지 카페의 문을 연지 일주일이 넘어서야 나를 찾아왔다.

“할배, 오랜만이에요.”

“니 도심가서도 망하고 또 돌아온 겨?”

장주 할배가 굽힌 허리를 두드리며 가게 내부로 들어섰다. 나이테가 빼곡히 그려진 지정석에 장주 할배가 앉았다. 

“늘 마시던 대로 줘.”

“예예.”

밝게 웃으면서 쓸모없이 많이 로스팅을 해두었던 원두를 내렸다. 커피의 향을 음미하는 장주 할배가 음, 테이스터스 초이스. 라면서 텔레비전에서 본 광고를 흉내 냈다. 장주 할배가 얼굴을 머그잔에 내리고 눈동자만 올려 나를 봤다.

“망하고 돌아온 놈인디 얼굴색이 전보다 더 좋아졌네 그려.”

사람을 보는 연륜은 속일 수 없는 법인가보다. 

“그래요? 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모호하게 웃으면서 장주 할배를 쳐다봤다. 할배가 예끼 이놈, 하면서 머그컵을 내려놨다.

“눈매에 독기가 없잖여, 낸 니 처음 여기 카페를 차렸을 때 죄짓고 온 범죄자인줄로만 알았어.”

“너무한데요.”

“이제 편해보여서 좋네그려. 커피 맛도 더 좋고.”

“네, 다행이에요.”

내 머그컵에도 커피를 따라서 홀짝였다. 창을 통해 공사를 진행하는 밑의 공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근디 저기 공사하는 건 뭐여?”

장주 할배도 자못 궁금했나보다.

“제 집이에요.”

“을매나 됐다고 그동안 돈 많이 번겨?”

“아뇨, 같이 살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하고 지낼 집이에요.”

“그려, 잘됐구먼.”

“네.”

클클 거리는 장주 할배가 인간사 모든 뜻을 헤아리고 있는 산신령 같았다. 

- 딸랑딸랑 - 

이번엔 문을 열고 들어온 택배기사를 봤다.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한동안 배달 없어서 망한 줄로만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라는 내 말에 택배기사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망해라.’ 파리처럼 날아든 택배기사의 문자를 손으로 짝 터뜨려서 없애버렸다. 택배기사는 어깨에 메고 온 커피 포대자루를 쿵 내려놨다. 사인을 해주려 다가가는 내게 택배기사가 직사각형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생두 외에는 주문한 것이 없는데? 적힌 주소지를 확인하니 내 가게로 온 것이 맞았다.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았다.

“자, 이거랑 이거. 사인 해주세요.”

“네.”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사인을 마쳤다. 택배기사가 될 수 있으면 몇 달 뒤에 보자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생두 포대를 질질 끌어서 주방 구석에 짱박아놓았다. 주방 의자에 앉아 생두와 같이 배달 온 작은 상자의 테이프를 뜯었다. 혹시 묵야가 회를 보낸 건 아닐 테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달랑 그림엽서 한 장만 놓여있었다. 지금은 완연한 봄이건만 엽서에는 우스꽝스러운 마법사 모자를 쓴 눈사람이 웃고 있었다. 눈사람의 목에는 따뜻해 보이는 감청색의 목도리가 둘러져있었다. 썩 훌륭한 작품은 아니었다. 미술에 일가견이 없는 누군가가 손수 그린 그림이었다. 

엽서를 뒤집어 내용을 확인했다. 하얀 백지에는 어떠한 글씨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다만 빛을 뿌리는 문자들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언어. 이 엽서는 이주율이 내게 보낸 편지였다. 투명한 테이프에 순서대로 붙어있는 문자들을 천천히 읽었다. [아파, 아직은, 아프지, 않게 되면, 찾아갈게] 엽서의 흰 여백지에 살아 숨 쉬는 문자들이 내게 이주율의 전언을 건넸다. 문자를 소멸 시킬 순 없어도 짜깁기는 할 수 있는지 여러 개의 단어들이 잡지에서 오린 것 마냥 크기와 서체도 제멋대로였다. 그 엽서를 얼굴에 가져댔다. 온기를 머금은 문자들이 뺨을 간질였다. 

“연애편지여? 뭔데 그리 좋아하노?”

장주 할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궁금함으로 눈을 빛냈다. 엽서의 내용을 보여주길 바라는 눈빛이 간절해 할배 쪽으로 엽서를 돌려 잡았다. 

“잉?! 뭐여, 암 것도 안 쓰여있잖여!”

할배가 속았다면서 커피잔을 내려놨다.

“그렇지 않아요. 장문의 편지도 아니고, 글자 하나 담겨있지 않지만 그 어떤 편지보다도 소중해요.”

“하여간, 니는 좀 어딘가 이상혀.”

장주 할배가 쯧쯧거리면서 혀를 찼다. 천천히 라도 좋으니 이주율의 상처가 치유되길 바랐다. 녀석이 보낸 상자 안에 고이 엽서를 내려놓았다. 그 때 검지에 무언가 작은 녀석이 달라붙었다. 엽서에 그려진 눈사람이 메고 있는 목도리와 같은 색이었다. ‘healing’ 치료가 진행되는 과정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주율의 근처에 있고 영어를 생성할 녀석이면 내가 알기론 딱 한 명이었다. 유진.

“뭐가 그리 좋아서 웃노? 리필이나 해도.”

손끝에 달라붙었던 문자를 떼어내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장주 할배의 커피 잔에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따라주었다. 

나는 여태껏 상처는 전염이 된다고 생각했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걷잡을 수 없도록 곪아간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상처와 상처가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할 순간을 대면하게 되는 지도 몰랐다. 이주율도, 유진도 상처를 치유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길 바랐다. 지금 내 입을 달구는 커피는 카페에서 먹었던 그 어느 날의 것보다도 맛이 좋았다. 카페에서 묵야를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설레였고 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간엔 비로소 행복해졌다. 이제 나를 설레게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언젠가 저 문을 타고 넘어올 가족을 기다리며 긴 여정을 동반한 내 항해는 계속됐다.

외전-이사님의 비밀

에비스 호텔 최상층 대표이사실. 내부의 문을 지키고 선 강아정이 물끄러미 정면을 바라봤다. 이상하다. 이상해. 도깨비에 홀린것도 아닌데 정말 귀신이 곡할노릇이지.강아정은 시골 까페에서 k3를 회수해온 후부터 이사님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카페의 주인을 처리하지 않고 온일도 그럴뿐더러 휴대폰만 내내 바라보고있는 이사님에게 무슨 심각한 고민거리라도 있나 싶었다.이사님은 새벽2시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퇴근할 생각을 하지않았다.강아정과 송제운도 몇시간째 이사실을 지키는 중이었다.퇴근을 늦게하는것도 상관없으나 휴대폰을 이리저리 누르며 고심하는 이사님의 모습에 도저히 참지못한 강아정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사님.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늘 심각하지만 오늘따라 더 심각해보이는 이사님이었다.송제운이 함부로 나서지 말라며 강아정의 옆구리를 찔렀다. 묵야의 입에서 한숨과도 비슷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강아정과 송제운은 정말 큰일이라도 았나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카페 주인놈을 깨끗이 처리할걸 그랬습니까?"

"입 다물어"

"넵"

언성을 높이던 송제운이 합죽이가 됐다.강아정은 휴대폰에서 손을 놓지 않는 이사님에게 감히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휴대폰 사용법을 모르십니까?"

이사님의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꾼지 어언 세달째였다.전화를 받는것도 거는것도 무리없이 행하는 이사님이었다. 묵야는 강아정에게 더 가까이 오라며 손직했다.

"문자는 어떻게 쓰는거지?"

"무, 문자 말 입니까?"

"그래."

"그건 여기 메시지라 적인 맨 위 상단을 누르시면 문자를 작성할수 있는 창이 뜹니다. 거기에 하고 싶은 말을 적으시면 됩니다."

멀리 선 송제운은 이사님에게 귀신이라도 쓰였나 싶어 눈을 꿈뻑였다. 전화의 수신과 발신 만을 사용했던 이사님이다. 문자를 할 상대가 데채 누군가 싶었다.

"생각보다 어렵군."

묵야는 콩알보다 작은 자음과 모음 자판을 내려다 봤다.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늙은이

처럼 검지를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였다.

"문자를 하실 거면 차라리 전화가 낮지 않겠습니까?"

"전화를하면 참지 못할것 같다."

"예?!"

대체 뭘 참지 못한다는 걸까? 전화 할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강아정은 아사님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갱생원에서부터 6년이나 봐온 이사님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엔 일만의 변화도 없었지만 입매 한 쪽 끝이 슬쩍 올라 가있었다. 이것은!3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한 당혹스러움이 서려있는 표정이었다. 강아정이 뒤로 화들짝물러서며 우리 이사님의 탈을 쓴 괴물아 어서 나오라 하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강아정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가까스로 꾹삼켰다. 송제운은 강아정보다 둔한 탓인지 강아정이 대체 왜 저러나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누, 누구에게 문자를 하실 겁니까?"

"이주인."

"예!? 그게 데체 누구입니까? 우주인도 아니고 이주인이라니....혹시 어디서 이주해온

조선족 놈 입니까?"

"아니, 이름이 이주인이다."

강아정과 송제운이 머리를 굴렸다. 자신들이 아는 이들 중 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이주인이라는 이름 조차도 생소했을 뿐더러 이사님을 당혹스럽게 만든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않았다.

"그, 그게 누구입니까?"

강아정은 혀에 힘이 풀려버려 말을 더듬었다.

"카페의 주인"

"그, 그 한그루인가 두그루인가 하는 깡촌 커피숍주인 말씀입니까?!"

"그래."

송제운도 문을 지키던 임무를 버리고 묵야의 근처로 다가왔다.

"왜 그 분에게 문자를 보내시려는 겁니까?"

"전화를 하면 참지 못하고 만나러 가야 할것 같다."

"무엇 때문입니까?"

"눈이 부시다."

"네?!"

"예!?"

강아정과 송제운이 서로 바라보며 목젖을 내보였다.

"혹시 K3라도 하셨습니까?"

강아정은 감히 무례한 말을 내뱉는 송제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이글이글한 매의 눈으로 송제운을 나무랐다.

"혹시 그, 그분께 반하신 겁니까?!"

"반한다는 건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사람이 사람한테 홀링다는 뜻입니다. 배꼽을 맞대고 싶기도하구요.한마디로 아랫도리가 서는 걸 말합니다."

"야이 무식한 놈아.아랫도리는 지나가는 짧은 치마만 봐도 서는데 그럼 난 수백명한테는 반했겠다."

강아정의 말에 송제운이 반박하고 나섰다.강아정이 쯧쯧거리며 외려 송제운을 무식하다며 면박을 줬다.

"너랑 이사님이랑 같냐?!"

"그런 단순한게 아니다."

묵야의 단 한마디로 시끄러운 둘의 대화를 종료시켰다.강아정은 여전히 우수에 잠겨있는 이사님을 위해 조용히 속삭였다.

"이사님 사람이 빛나보이는건 반했기 때문입니다.심장이 간질간질하고 목소리만 들으면 보고 싶고, 웃으면 껴안고 싶고, 맛있는 걸 사주고 싶고, 더불어 마음이 하나되어 그 빠구리. 아니 성관계를 하고 싶은게 아닙니까?"

묵야는 강아정이 나열했던 말에 지금 자신의 상황이 전부 포함된다는 걸 알고 적잖이 놀랐다.머릿속에서도 정의를 내리지 못한 묵야의 감정을 강아정이 딱 꼬집어 설명해 준것이다. 묵야는 처음 느끼는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했다. 전화를 하자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싫어할 것 같고 문자를 하자니 보내본 적이 없어서 계속 고민중이었다.

"지금 메세지를 보내 보십쇼.이사님을 마다할 인간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머리 좋고 잘생기고 돈 많고 우리 이사님이 그야말로 엄친아 아닙니까!"

강아정과 송제운이 저마다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라고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엔 타인에게 의견을 묻지않는 이사님이 휴대폰의 메세지창을 띄우며 강아정을 힐끔 봤다.강아정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4년내내 같은 방에 있었지만 단 한번도 감정의 파편을 내보이지 않던 이사님이었다. 그런 이사님께 이제야 한 줄기 서광이 비친것이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 강아정은 송제운을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다.

"일단.늦은 시간이니'자니?'라고 부드럽게 물어보는게 좋겠습니다.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됐다. 내가 쓴다."

묵야는 이주인에게 보내는 문자를 타인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묵야는 휴대폰 터치 자판을 죽 내려다 봤다.컴퓨터와 다를게 없다고 판단 내렸다.

[자니?]

이 두글자와 물음표를 쓰는데 2분 30초를 소요했다 자판의 순서는 익숙한데 크기가 너무 작아 쓰고 지우는걸 반복했더니 저렇게 지체된것이었다. 띵디딩- 3중 톤음이 답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자지 않아요]

세 남자가 모여서 도착한 문자를 빤히 내려다 봤다.강아정과 송제운은 역시 이사님의 매력은 시골에서도 통한다며 난리였다.

"보십쇼. 이사님. 이주인님께서도 이사님께 마음이 있는겁니다! 자지 않아요. 안자요도 아닌 자지라는 말을 쓴것은 은근슬쩍 야한말을 보내서 어필하는거죠."

흥분한 강아정이 주인의 뜻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재해석했다.

"모른척 넘어가기엔 묵야님의 정력이 없어 보이니 일단 강하게 나가는게 좋겠습니다.강하지만 부드럽게 말입니다."

묵야는 강하지만 부드럽게의 기준을 알지 못했다.음...하며 한참을 휴대폰을 내려봤다.화면이 새까매질 때마다 중간의 버튼을눌러 액정을 밝혔다. 곧 묵야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꽤 야한 말을 쓸 줄 아는 구나.]

"좋습니다. 강하고도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이건 백프롭니다.녹습니다 상대방은."

이사실에 모여있는 세사람은 전부 연애 초심자들이었다.제대로 된 연애 매뉴얼을 가지고 있을 턱이 만무했다.띵디딩-

[저 잡니다. 빠이.]

묵야가 도착한 문자에 휴대폰을 탁 내려봤다. 강아장과 송제운이 이럴리가 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분명히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겁니다.그 유명한 밀당이죠!"

"맞습니다.도도하게 굴어 애간장을 태우려는 귀여운 애교입니다!일단 쿨한척 잘 자라고 보내놓고 바로 전화하는게 좋겠습니다."

묵야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두놈때문에 정신이 산만했다. 아무리 봐도 저 두놈의 문자 작문과 해석 실력이 뛰어난것 같지가 않았다.

"둘 다 나가."

"예?! 왜요?!"

묵야가 가라앉은 눈을 들어 그 둘을 쳐다봤다.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던 두 덩치의 머리위로 찬물이 획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나가보겠습니다."

90도로 허리를 굽힌  강아정과 송제운이 뒷걸음질로 이사실을 빠져나갔다. 이사실의 문을 닫고 나서도 둘의 귀를 바싹 문틈에 댔다. 두 덩치가 엉덩이를 쭈욱 빼고 문에 붙어있는 꼴을보는 사람이 없기에 참으로 다행이었다.묵야는 휴대폰 액정을 톡톡 치다 결국 이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자요."

차가운 목소리의 이주인이 묵야를 냉대했다.

"자는 것 치곤 목소리가 멀쩡하군...커피 주문했으니 내일 찾아가도록 하지."

사실 주문한 커피는 없었지만 커피 두포대의 마약을 가져왔으니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아~그러실 필요 없는데"

"내가 보기 싫으면 밑의 놈들을 보내면 돼"

"아뇨 그건 아니구요. 일 바쁘시지 않아요?"

아니구요. 라는 말에 묵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일은 트러스티의 결산일이었다. 자신이 바쁠 일은 없겠지만 자리를 비워서는 안됐다. 그럼에도 다른 말이 튀어나온게 더 먼저였다.

"전혀."

묵야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지나치게 충동적이라 생각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오셔도 되구요. 저는 잡니다."

"그래"

묵야는 이주인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귀에 휴대폰을 붙이고 작은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뚝 하고 끊어졌을땐 이미 자리에서 일러서 있었다.

"강아정."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아정이 튀어 들어왔다.이름이 불리지 않은 송제운은 강아정의 뒤에서 질투 가득한 눈을 빛냈다.

"커피. 원두가 들은 커피는 어디서 구할수 있지?"

"포대에 들은 생두 말입니까?"

"그래"

"그거야 인터넷이나...커피 유통업체에서 구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구해와."

"네. 최고급으로 수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강아정은 생두를 구해올만한 곳을 물색하기위해 재빨리 이사실을 나섰다. 수소문 할것도 없었다. 사파의 마약이 유통되는 중간과정의 도매상중 분명 생두를 매매하는 놈이 있었다.강아정은 정장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는 순간도 참지 못하고 그 도매상에 전화를 연결했다.강아정의 모습이 사라지고 묵야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송제운을 불렀다.

"송제운."

"네. 이사님!!"

송제운은 며칠이고 기다리던 택배 물건이 온 것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밑에 차 대기시켜. 생두 구해오는 대로 이주인에게 간다."

"알겠습니다."

묵야의 손목시계는 오전 3시 50분을 향하고 있었다.강아정이 삼십분내로 생두를 구해오면 오전 7시 안으로 도착할듯 했다.달리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지 묻고 싶었지만 잔다고 했으니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묵야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이주인이 보낸 문자를 몇번이고 들여다 봤다.책상위의 가지런히 놓인 담배 케이스를 들어 한 개피를 물었다.심장이 간질간질하진 않아도 가슴이 답답했다.방금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감정이 제어가 안돼 당장이라도 달려가고만 싶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웃어주던 두 눈이 눈부시게 빛났던 것을 떠올렸다.이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주고 싶고 맛있는 것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구해주고 싶었다.

"정말 미친것 같군."

묵야는 아무도 없는 이사실에서 홀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말 외에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싫은 기분이 아니야...."

묵야는 가죽시트 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 묻었다. 휴대폰을 얼굴위로 들어 이주인에게 도착했었던 문자를 올려봤다.몇안되는 단어들 이지만 빛을 머금은듯 눈앞을 밝게 비췄다.어두운 밤에 빛이라, 묵야는 픽 웃으며 곧 이주인을 만나러갈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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