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내가 납치당한 장소를 찾아낸 사람은 분명 유진이었다. 사이코메트리로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해 태형 형까지 샅샅이 파헤쳤을 유진을 떠올렸다. 나름 예민하다던 녀석이 꽤나 애를 썼을 것만 같았다.
미로의 입구에는 여전히 폴리스 라인이 걸쳐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테이프 아래로 파고들었다. 미로의 유리문을 열고 폭이 좁은 통로를 걸었다. 사람이 찾지 않는 미로는 축축하고 음산했다. 벽면을 손끝으로 훑으며 통로의 끝까지 걸었다. 그러자 광장처럼 넓게 펼쳐진 내부가 드러났다. 시가가 앉아 있었던 양탄자 위에는 금발머리가 서있었다. 주변을 서성이는 행동이 꼭 누구를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
“유진.”
내가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유진이 고개를 틀었다. 어두운 조명아래 유진의 푸른 눈은 짙게 가려졌다. 꼬리를 흔들던 대형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사했네.”
다친 이마에 잠시 눈에 머물렀던 유진이 안도하듯 내뱉었다.
“왜 그랬어? 처음부터 우리 집에서 산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였어?”
녀석을 보면 분기탱천해서 화를 쏟아내려 했는데 힘없는 물음만이 나왔을 뿐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저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지.”
“태형 형이 전성그룹 후계자를 죽인 게 사실이야?”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지만, 나는 확인해야 했다. 유진은 내게 정답을 건네 줄 단 한 사람이었다.
“K3 과다복용으로 죽은 남자를 말하는 거면, 아마 나도 연관되어 있겠지.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게 가장 좋거든. 왜, 연예인들도 과한 가쉽을 많이 배출하잖아, 장사도 마찬가지야. 특히 마약은 위험할수록 더 매력적인 법이지.”
유진이 양탄자 위에 앉았다. 그 밑으론 꾸둑꾸둑하게 마른 핏물이 굳어있었다.
“K3는 마피아들 사이에서 제조된 마약이야. 수백억 원을 투자했지만 과한 부작용 때문에 판매를 할 수가 없었지. 그걸 싼값에 들여온 건 나였고. 난 꽤나 이치에 밝은 장사꾼이거든.”
“그럼 토막살인 사건은? 그것도 너와 태형 형이 꾸민 짓이야?”
“아니, 그건 사파의 사이남이라는 남자가 한 짓이야. 사망자가 속출하고 사파에서 K3의 유통을 금지 시킨 것은 맞아. 그 토막살인 난 시체는 금지시킨 K3가 유통되는 과정을 뒤쫓다 살해당한 거였고. 아마 묵야 쪽에서 뒤를 캐라 지시했겠지…. K3를 내게서 매입한 사람은 묵야가 아니야. 그의 형이지.”
유진과 K3의 거래를 한 남자는 사이남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수면 아래 가려진 빙산이 더 크다는 건 상식이었지만 정작 나는 모르고 있었다.
“왜 그랬어? 태형 형까지 왜 그렇게 엮이게 했어?”
유진이 곤란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왜 애달파 보이는 지는 또 모를 일이었다.
“주인 형 아니야. 내가 태형 형을 물들인 게 아니야. 난 방관했을 뿐이지. 하지만 태형 형이, 형을 죽이려고 한 것까지는 몰랐어. 만일 알았다면 미리 대비했겠지.”
녀석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유진이 내 앞에서 보인 대형견의 모습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지금 저 모습이 또 하나의 유진이듯 대형견 같이 귀여운 모습 또한 유진인 것이다.
“형도, 이주율도 좋았어. 형이 이주율을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생각하기를 바라기도 했고, 이주율이 형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에게 사랑받고 싶기도 했지.”
나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늘 생각은 해왔지만 그러지 못했던 일을 행하려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목을 덮고 있던 터틀넥 상의와 점퍼들, 나는 유진의 목을 덮은 스웨터를 끌어내렸다. 일자로 그러진 상처가 유진의 목울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밑으로도 수십 개의 자상이 남아있었다.
“누가 이랬어?”
“사념들에 미쳐버린 내 마마. 나마저도 환영이라고 생각했지. 괴롭거나 외롭진 않았어. 형과 이주율을 보면서 외로워졌을 뿐이지. 잠시 나도……느껴보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무엇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유진에게 태형 형이 아닌 다른 형제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나온 과거들을 돌이켜봤다. 나는 이주율이 있었기에 고통의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다. 유진처럼 홀로 버텨내야 했다면 나는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진이 고개를 숙였다.
“떠날 때가 됐어. 이주율에게는 형이 대신 안부 전해줘.”
“공항으론 도망 못 갈 거야.”
외사경찰인 이성일, 내 삼촌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유진이 내려간 터틀넥을 걷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폴랑폴랑 내가 수집한 녀석들 마냥 아름다운 문자가 생겨났다.
‘sorry’
유진을 처음 만났던 날, 녀석이 생성했던 문자와 같았다. 연약하게 나폴거렸던 문자가 다시금 내게 다가왔다. 유진은 처음부터 내게 진실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문자를 완벽하게 읽을 수 없음에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일 뿐. 미안하다는 저 단어는 그 날의 여린 날갯짓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주인 형도, 이주율도 보고 싶을 거야.”
아마 나 역시 그럴 테지. 뒷문으로 향하는 유진이 다리를 절뚝거렸다.
“다리는 왜 그래?”
“어느 정도의 죗값을 치렀다고 해야 하나? 주인 형, 사람은 순수할수록 악에 가장 가까워. 순수악이라고들 하지. 형도 조심해, 형 마음이 변하면 그 남자는 아마도 악귀로 돌변할 테니까.”
유진이 지칭한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묵야. 그가 이주율을 통해 나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그런데 묵야가 유진은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거지? 그 물음은 이제 묵야에게 묻기로 했다.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을 정도면 다행히 유진의 다리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다.
유진이 사라지자마자 점점이 남아있는 핏자국들을 타고 한기가 돌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더 머물 생각은 없었다. 서둘러 미로를 빠져나왔다. 건물 옆에 세워둔 바이크에 취객이 앉아있었다. 내가 바이크 앞에 서자마자 취객은 미안하다면서 자리를 비켜섰다. 취객은 미로가 사라진지도 모르고 찾아온 K3 중독자였다. 취객의 머리 위에 떠있는 K3를 소멸시켰다.
“저 안에 아무 것도 없어요. 살인사건 때문에 문 닫은 가게에요.”
취객은 뉴스도 보지 않는지 술이 달아난다는 얼굴을 했다. 취객이 내게 더 많은 사실을 묻고 싶어 하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백미러로 보자 취객이 비틀거리며 미로의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멸했던 K3가 다시 생겨나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크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주기적으로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왔지만 참을 수 있을 만큼의 아픔이었다.
커튼이 젖혀있는 집안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돌아온 이주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바이크를 대문 앞에 세우고 마당을 가로 질렀다. 현관에 선 이주율이 나를 반겼다.
“어디 다녀와?”
“유진에게.”
“뭐!! 그 양키 새끼 어디 있는데?!”
“왜 그새 정들었어? 근데 양키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대.”
사실 어디로 가는 지는 듣지 못했다.
“씹새끼 팔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줘야 하는데.”
이미 묵야가 유진의 다리에 징벌을 가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감쪽같이 속았어. 개새끼 같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 형이랑 나를 속였다고! 열 받지도 않아!?”
덤덤한 내 태도에 이주율이 오히려 더 성을 냈다.
“주율아, 유진이 밉니?”
“밉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그냥 패줘야 하는 거지….”
이주율이 짜증난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이내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 그 새끼도 뭔가 불쌍하잖아. 눈만 보면 알아, 정에 굶주려 있는 걸.”
이주율이 자조하듯 뇌까렸다. 그래서 겉으론 그토록 티격태격 대면서도 속으론 서로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이주율과 유진은 많이 닮아있었다.
“마약 팔이 새끼인 줄 알았으면 조져놓는 건데.”
이주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한 상태였던 녀석이 제법 얌전해졌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올랐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것은 이주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겠지만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주율의 방으로 향했다. 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뒤따라온 이주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옆에 서있었다.
“주율아.”
“왜.”
“우리 삼촌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어.”
“뭐?”
“아버지 동생이래. 어머니의 대학 동기이기도 했고. 삼촌은 우리 어머니의 옛 애인이었대. 그 사람 이름이 이성일이야.”
이주율이 흥분한 상태로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주율이 가슴 아래에서부터 들끓는 소리를 냈다.
“언제야. 언제 알았어?”
“나도 얼마 안 돼. 네겐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근데 그게 아니더라. 너도 알아야 하겠더라…. 우리 어머니는 삼촌을 사랑했고, 삼촌은 우리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걸. 아마도 아버지는 삼촌의 마음을 그대로 방치한 채 어머니를 사랑했겠지. 그렇게 둘이 결혼을 해서 우리가 태어난 거야. 방치된 삼촌은 상처를 안고 떠났고 이십년이 넘어서야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지. 그리고 그는 여전히 혼자야.”
이주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부모세대의 과거가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를 위한 말을 이주율에게 건네야 했다.
“이주율, 내 소중한 동생 주율아. 우리 어른이 되자. 과거에 얽매여있는 어리석은 소년들이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어른이 되자. 주율아.”
신음을 삼키는 내 말에 이주율이 눈이 붉게 타올랐다. 내가 무슨 말을 전할지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뚝뚝, 녀석에게서 피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우리에게 인정해야 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언제까지고 우리 둘이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안 돼. 내가, 내가 널 그냥 보낼 것 같아? 절대 안 돼. 그렇겐 못해.”
이주율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울고 있는 녀석을 안아주었다. 이주율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고 끝은 찾아온다는 것을. 먼지가 되어 사라질까 내 몸을 부둥켜안은 이주율을 밀어냈다. 이주율의 방으로 한 발짝 내딛자 이주율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주율이 보이지 않게 뒤로 돌아서서 울었다. 그리고 방문을 닫았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내 심장을 찢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오랜만에 들어오는 녀석의 방풍경이 펼쳐졌다. 침대와 책상, 컴퓨터로만 이루어진 쓸쓸한 방. 대신 그 방을 가득 채운 것은 나를 향한 이주율의 집착들. 침체되어 있던 문자들이 내 출현에 제 몸들을 일으켰다. 녀석의 방을 빼곡히 메웠던 문자들을 견뎌낼 준비를 했다. 내가 독이라고만 생각했던 이주율의 문자들. 그것들이 삽시간에 내게로 덤벼들었다. 몸이 찢기지는 않았다. 내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일도 없었다. 그저 그것들은 내 발밑에 모여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났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끔찍한 독기로만 생각해왔었다.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문자들을 없애고자 한 것이 아닌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발밑을 밝히던 녀석들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오열하는 이주율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같이 목 놓아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녀석이 내게 향했던 그 모든 결정체들의 끝을 지켜봤다. 내게 향하는 자신의 집착을 접을 때가 왔다는 걸 녀석도 알았다. 이주율이 인정함과 동시에 집착으로 빚어진 문자들은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서 녀석은 저렇게 하늘이 무너지듯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투명하게 넘실대는 문자들의 향연을 지켜봤다. 화려한 빛을 머금고 금실처럼 너울대는 강도 아니었다. 그저 담근 발을 투명하게 비추는 낙원의 호수처럼 변해갔다.
“아아아아!!!!”
문 뒤에 주저앉은 이주율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물처럼 투명해졌던 문자들은 진정한 낙원으로 향하듯 종적을 감췄다. 텅 비어버린 방처럼 상실감으로 비워진 이주율을 채워줄 사람은 이제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녀석의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의 몫이었다. 이주율은, 내 동생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단지 내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었다.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의 등은 맞닿을 수 없었다. 차가운 문에 몸을 기대고 그렇게 이주율도 나도 울었다. 우리가 형제가 되어가는 과정은 이토록 아픈 것이었다.
너무 울어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오열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고 헐떡대는 숨이 가슴을 짓눌렀다. 뜨거운 눈을 내리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열어 텅 빈 거실을 바라봤다. 이주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4년 전의 그 날처럼 내게서 떠나갔다. 형제로서 내 곁에 남아달라는 것이 욕심이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라진 이주율을 찾지 않는다. 곪아있던 녀석의 환부를 찢은 것이 나였다. 그 상처가 아물어 갈 때에 이주율은 분명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게 얼마가 걸리든 난 녀석을 기다려야 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보이는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지만 내가 세워뒀던 바이크는 보이지 않았다. 날렵한 짐승처럼 잘빠진 바이크는 오히려 이주율과 더 어울렸다. 멍한 시야 사이로 대문을 넘어오는 검은 정장이 보였다. 흐릿한 눈을 비비자 눈물에 짓무른 눈이 쓰라렸다. 들어오는 남자를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남자는 단정히 구두를 벗고 거실에 들어섰다.
“참을 수가 없어서,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래서 왔다.”
묵야가 내가 앉은 소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내 몸을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가뒀다. 엎드린 채로 다 흘렸다고 생각한 눈물을 또 쏟아냈다.
“오는 도중에 건방진 녀석이 너를 부탁하더군. 정말 건방졌지만, 네 동생이니 참았다.”
묵야는 내가 우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늘 그렇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뿐이었다.
“울지 마. 네 우는 모습이 나를 제일 괴롭게 만드니까.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해, 하지만 너를 통해 고통을 알았지. 그러니 내 심장을 찢으며 울지 마라.”
떨리는 입술에 묵야의 입술이 내려왔다. 뜨거운 숨 속에 쓰기만 했던 눈물이 녹아들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묵야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내게 울음을 멈추라 말하지도 않았다. 묵야는 그저 내가 모든 슬픔을 다 털어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당신이 내게 주었던 고통은 죄인의 낙인처럼 깊어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 위에 새살을 덧칠하니 낙인의 상처가 촘촘히 메워졌다. 이후로 또 다른 상처들이 생겨나겠지만 그 때마다 새로운 살들이 돋아날 것은 분명했다. 이 남자와 있으면 내 상처는 온전하게 아물 수 있었다.
한 때는 어른이 되면 모든 고통이 희석되는 줄로만 알았다. 어른인척하면 그 누구도 이주율과 내게 상처를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 어려서,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지름길을 찾았더니 그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발바닥에 살점이 전부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감수하며 가시밭길을 걸었지만 출구로 향하는 지름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있었다. 잘못된 길로 향했다 돌아 나오는 일을 반복하니 우회로보다 더 긴 여정을 겪게 됐다. 어느 날 한줄기 빛과 함께 내려온 구원의 손길은 내 몸을 길의 시작점으로 되돌려주었다. 그제야 나는 지름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멀고도 굽은 길에는 상처 난 발을 치유할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먼 길을 선택했다.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 날인가 출구를 발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서두르지도 급하게 뛰어나가지도 않을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그 길엔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나를 원점으로 되돌린 구원의 빛은 다름 아닌 묵야였다. 내밀어진 묵야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려했다.
고통을 몰랐던 남자, 고통만을 알았던 내가 서로를 감싸며 상처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