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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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 분기점을 지나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내비게이션 친절한 누나의 음성을 따라 우측방향의 에버로를 타고 올라갔다. 에버랜드 정문 주차장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 한 번의 막힘없이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여전히 BMW의 장점에 대해서 휘황찬란하게 늘어놓는 중이었다. 묵야는 입을 멈추지 않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기만 했다. 

묵야는 에버랜드 매표소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멀미가 심하다며, 놀이기구는 잘 타?”

“가 본 기억이 하도 오래 전이라 모르겠어요. 그 때는 잘 탔던 것 같은데.”

차에서 내리니 오랜만에 시골의 공기와 비슷한 청량함을 느꼈다. 기지개를 핀 뒤 묵야와 함께 매표소로 걸어갔다. 단체로 온 유치원생들과 우리 같이 나들이 온 몇몇의 사람들이 전부여서 출입구가 붐비진 않았다. 역시 어디를 가도 평일이 제일이다. 매표소에서 성인 자유이용권 두 장을 끊고 화단 근처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묵야에게로 다가갔다. 담배를 피던 묵야는 그 앞으로 유치원생들이 우르르 지나가자 서둘러 재떨이 통에 담배를 비벼 껐다. 자연과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조폭. 진짜 특이하고 신기한 남자다. 

“들어가요.”

“그러지.”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해서 훈훈하기만 했다. 많이 걷다보면 땀이 날 지경이었다. 출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기는 직원들이 있었다. 어린애도 아니지만 마냥 즐거워졌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과 나들이 나온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묵야의 손목에 자유 이용권 벨트를 달아주는 직원이 조금 당혹스런 얼굴로 묵야를 흘끔거렸다. 정장 입고 에버랜드 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 상관없지 않나.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동화나라 나무에 꽃들이 활짝 펴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들과 단체 사진을 찍는 유치원생들이 저마다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그걸 구경하며 걷자 묵야가 큰 키를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너도 찍어줘?”

“아니 됐어요.”

DSLR 카메라를 뒷좌석에 챙겼던 묵야에게 절대 꺼내지 말라고 당부한 게 영동고속도로 진입할 때였다. 분명 그 카메라도 강아정이라는 남자가 챙겨준 것 같았다. 지루한 차 안에서 가지고 노는데 기능에 대해 묻자 묵야는 전원 켜는 방법도 몰랐다.

“뭐부터 탈까요?”

“아무거나.”

묵야가 놀이공원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로 봐선 그렇지만도 않은 듯 했다. 흥미로워 보이는 놀이기구들이 몇 개 있었다. 저기 밑으로는 나무로 만들어진 롤러코스터가 보였다. 가운데엔 커다란 간판처럼 T가 적혀져있었다. T익스프레스인가 하는 이삿짐센터 이름을 가진 놀이기구였다. 텔레비전에서 몇 번 선전하는 건 봤었다. 세계인이 선정한 가장 스릴 있는 우든 코스터 1위라며 광고를 때렸었다. 

“우리 저거 타러 가죠.”

T의 간판을 가리켰다. 호기심도 들었고 얼마나 무섭길래 하는 마음도 생겼다. 묵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서 놀이기구 앞까지 내려가는 데만 장장 20분을 넘게 소비해야했다. 가면서 여러 문자들을 봤는데 대부분 놀이공원에 맞게 화려하고 기운찬 문자들뿐이었다. 눈요기도 되니 기분도 점점 상승했다. 

평소엔 줄이 길게 늘어지는지 놀이기구 대기선 제일 끝부터 푯말이 적혀있었다. 여기서부터 90분이 소요됩니다라고. 다행이 앞의 줄은 뻥 뚫려있었다. 유치원생들은 탈 수 없는 놀이기구이기에 단체로 온 아이들로 붐빌 일도 없었다. 구불구불한 대기선 밧줄을 타고 올라가자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롤러코스터를 마주할 수 있었다. 탑승을 마친 사람들이 롤러코스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개중엔 재미있다면서 다시 타러오자고 호들갑을 떠는 녀석들도 있었다. 다리가 풀려 K3를 먹은 사람처럼 해롱거리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입을 틀어막고 욱욱 거렸다. 내리는 사람들에게서 하나 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이 백지장 같다는 것.   

“이거 되게 무섭대요.”

“그래?”

묵야가 흥미 없이 내뱉었다. 조금 긴장되는 마음을 뒤로 하고 롤러코스터의 맨 앞줄에 탔다. 안전바를 확인하는 직원들이 정신없게 오갔다. 안전바는 어깨에 메는 식이 아닌 다리 밑에서 바가 올라와 허벅다리를 내리눌러 고정되는 형식이었다. 덕분에 허리 위의 상체는 위험할 정도로 자유스러웠다. 손님들의 안전을 확인한 롤러코스터가 덜컹덜컹하며 천천히 출발했다. 고개를 틀어서 묵야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처음 와보는 놀이공원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묵야를 구경하다가 갑작스레 몸이 90도로 눕혀져 상승하는 롤러코스터에 경악을 하며 안전바를 잡았다. 

털털털 거리며 올라간 롤러코스터가 꼭대기 정점에 도달했을 때 잠시 멈춰 섰다. 밑을 내려 보니 아래가 까마득했다. 아파트 20층 높이란 게 거짓말이 아니었다. 놀이공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었지만 미처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서 있던 롤러코스터가 갑자기 제 기능을 발휘하며 밑으로 훅 떨어졌다. 

“으아아아아!!!!!!”

77도의 경사를 미친 듯이 내려갈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를 지르는 것 밖에 없었다. 보통 롤러코스터는 두세 번 낙하하고 끝나는데 세계에서 인정받았다던 이 롤러코스터는 일곱 번도 넘게 곡선을 따라 울렁대며 낙하했다. 중력을 거부하고 엉덩이가 붕 뜨는 느낌에 그대로 몸이 홀랑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묵야의 반응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으아아악! 하고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데 삼키지 못한 침이 튀어나갔다. 추하지만 그걸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이제 끝났다 싶었는데 또다시 낙하, 또 낙하. 잠시도 안심할 새가 없었다. 

롤러코스터가 정차하는 레일로 들어갔을 땐 그야말로 정신과 몸이 넝마가 되어있었다. 다리에서 안전바가 내려가고 바닥에 발을 대었을 땐, 롤러코스터에서 내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휘청거렸다. 뒤를 돌아 나를 따라 내리는 묵야를 봤다. 평소와 같은 멀쩡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엔 지친 기색도 경악도 없었다. 나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재미있었어요?”

“아니.”

“무서웠어요?”

“아니.”

“그럼 느낌이 어떤데요?”

“더러웠어.”

묵야의 군더더기 없는 확실한 반응에 소리 내어 웃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좌측에는 순간포착 카메라 사진 판매대가 있었다. 롤러코스터의 묘미는 바로 이거였다. 앞자리에 탔던 우리 사진이 맨 첫 번째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 화면에 우리 뒤로 세 팀의 사진이 더 찍혀있었지만 제일 웃긴 내 얼굴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하하! 하하하! 저거 봐요! 저거!”

내 얼굴은 이주율의 휴대폰에 있는 사진보다 더 엉망이었다. 마치 입을 쩍 벌리고 귀신을 보고 놀란 형상이었다. 자칫하면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이 지나치게 웃겨서 묵야의 얼굴이 어떤지는 그 후에 봐야 했다. 묵야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상상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인가, 인터넷 유머란에서 이슈가 됐던 롤러코스터 순간포착 사진을 보고 미친 듯이 웃었던 때가 있었다. 하수, 중수, 고수로 나눠서 유형별로 순간 포착된 사람들의 사진을 정리한 글이었는데 하수, 중수, 고수들은 대게 웃고 있거나 무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사진들이었다. 그 중 최고를 꼽으라면 지존형 이었는데 지존형은 신의 경지, 즉 롤러코스터에선 전설로 여겨지는 뒤돌아 타기가 가능한 상태이거나 책을 보거나 잠을 잘 수 있고, 자신이 놀이기구를 탔다는 것 자체를 잊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묵야의 사진은 딱 그 지존형에 해당됐다. 전설로 여겨지는 지존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멍하니 사진을 구경했다. 묵야는 이미 판매대 앞에서 지갑을 꺼내는 중이었다. 묵야는 스티커 사진만한 크기의 순간포착사진을 구매했다.

“사지 마요.”

서둘러 뛰어 들어갔지만 기계는 이미 사진을 뽑아내고 있었다. 묵야는 한 화면에 찍힌 우리외의 다른 사람들은 잘라달라는 요구까지 마쳤다. 내 웃긴 얼굴과 지존형의 덤덤한 묵야 얼굴이 담긴 열쇠고리 2개가 순식간에 완성됐다. 묵야가 그 하나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남은 것을 내게 내밀었다. 

“이건 너무 치사하잖아요.”

“왜?”

묵야에게 구시렁대며 순간포착사진관을 나왔다. 손바닥에 놓인 열쇠고리 안의 내 얼굴은 보면 볼수록 비호감이었다. 

“묵야씨는 잘 나왔는데, 저만 혐오스럽잖아요.”

묵야가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고리를 빼서 내 얼굴을 꼼꼼히 확인했다.

“잘 생겼어.”

“네?”

“잘 생겼는데 뭐가 문제야.”

“묵야씨 얼굴을 말한 게 아니잖아요.”

“나는 네 얼굴을 말한 건데?”

“심미안이 고장났나보네요.”

내가 이주율에게 해주듯 묵야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번 더 탈까요?”

“타고 싶으면.”

“농담이었어요. 지금도 멀미 일어요.”

담배 한 대가 시급히 당겼다. T익스프레스 옆 휴식 터에 다행이도 흡연 구역이 있었다. 묵야와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머금었다. 놀이기계와 더불어 지존형의 얼굴에 놀랐던 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재미있네요.”

“다행이군.”

“묵야씨는요?”

“너랑 있으면 어디든지.”

“혹시 연인에게 해줘야 하는 말 100선, 막 이런 책들도 읽는 거 아니에요?”

묵야가 입에서 담배를 때던 손을 잠시 움찔했다. 여간해선 동요하지 않는 남자 덕에 내 말에 확신을 기했다.

“사놓긴 했는데, 읽지는 않았어.”

“하하, 뭐에요. 그게.”

살랑살랑 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가슴 속 깊이 웃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를 몰랐으면 이런 즐거움도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또 뭐 타고 싶어?”

“음… 그냥 돌아다니는 게 좋겠어요. 더 타다간 집에 가다 멀미할 것 같네요.”

늘 비위가 약해서 문제였다. 재미는 있는데 골이 아프니 아쉬운 마음만 가득했다. 놀이기구들을 올려보고 소리를 내지르는 탑승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다봤다.  

평소엔 전화도 종종 오는 묵야인데 오늘만큼은 휴대폰이 잠잠했다. 설탕이 잔뜩 묻힌 츄러스를 먹으며 한가로이 놀이공원을 걸었다. 묵야에게 한 입 먹어보라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T익스프레스 하나 타자고 자유 이용권을 구매한 것이 내심 아까웠다. 놀이공원에서만 먹을 수 있는 츄러스나 원 없이 먹어야겠다. 

묵야는 그 열쇠고리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꺼내서 보기를 반복했다. 바닥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 근처에 앉았다. 걷느라 조금 더웠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묵야가 손을 뻗어 내 입술로 가져왔다.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지만 저들마다의 즐거움에 빠져있어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없었다. 엄지손으로 내 입술을 훑더니 묵야가 자신의 혀로 가져가 쓱 핥았다. 

“그거, 너무 달지 않아?”

세 개째 츄러스를 먹는 내게 묵야가 물었다.

“이렇게 설탕 많이 묻힌 츄러스는 놀이공원에서만 먹을 수 있잖아요. 어렸을 때 이게 정말 먹고 싶었는데, 소풍 빼고는 놀이공원 올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원 없이 먹어보려구요.”

“그래, 많이 먹어.”

한가로웠다. 이렇게 평화로운 날들만 계속됐으면 하고 바랐다. 폭풍전의 고요 같은 잠시의 즐거움이 아니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우리가 앉아있는 벤치 뒤로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간간히 물이 튀었지만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유치원생 하나가 그 분수대 안에 들어갔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나고 나왔다. 잔뜩 옷이 젖은 녀석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발발 떨었다. 

“귀엽네요.”

“네가 더 귀엽다.”

“츄러스 넘어오겠어요.”

“입 다물지.”

쫄깃한 츄러스를 다 먹고 나서 다시 놀이공원을 돌았다. 냄새나는 오리 우리에도 들어가 봤고, 북극곰으로 보이는 털이 하얀 곰이 우리 안에서 수영하는 것도 구경했다. 여태껏 몰랐는데 놀이공원 안에는 수십 가지의 볼거리들로 가득했다. 마음과 시간의 여유를 지니고 돌아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발바닥이 저렸다. 묵야의 구두를 보자 너무 오래 걸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발 안 아파요?”

“안 아파. 너는?”

“조금요.”

“그럼 돌아가자.”

하늘을 올려봤다. 놀이기구를 타지 않고도 한나절을 보냈기에 해가 기울어져 있었다. 주차장까지 가는데도 발품을 꽤나 팔아야 했다. 주차장은 태양열을 차단하는 시설이 없어서 세단 안이 한여름 무더위처럼 후끈후끈했다. 조수석 문을 열어놓고 밖으로 발을 빼고 앉았다. 다리를 두드리는 내게로 묵야가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는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조선시대에나 나올법한 하인처럼 내 종아리를 주물렀다. 

“됐어요.”

발을 빼내려 하자 묵야가 다리를 붙들었다.

“기초체력이 부족한 이주인. 이렇게 풀어줘야 다음날 편해.”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남자가 제 무릎까지 더럽히면서 내 다리를 마사지했다. 주물거리는 묵야의 손에 스포츠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시원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지만 내가 다리를 다친 걸로만 생각하는 듯 했다. 오른쪽 다리의 알을 풀어준 묵야가 이번엔 왼쪽 다리를 잡았다. 이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정말로 꿈뻑꿈뻑 거렸는지 묵야가 종아리의 말랑한 살을 꽉 쥐었다.  

“기분 좋은가 보군.”

“네, 좋아요. 저도 해드릴까요?”

“아니, 난 됐어.”

마사지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묵야의 무릎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보답으로 손을 뻗어 무릎에 묻어 있는 먼지들을 털어주었다. 원단 재질이 좋아서 그런가? 몇 번 털지 않았는데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피곤하면 자.”

운전석으로 돌아와 출발 준비를 하던 묵야가 내 이마를 매만졌다. 

“괜찮아요.”

“또 가고 싶은 곳은 없어?”

“네, 유원지면 충분해요.”

몸이 나른하게 쳐지긴 했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조수석 등받이 시트를 뒤로 내려 편한 자세로 누웠다. 묵야는 한 손은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내 허벅다리 위에 올려두었다. 겨우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라 역시 올라오는 길도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40분 정도 걸려 도착한 도심에서 묵야가 휴대폰을 꺼냈다. 버튼의 길게 눌러 전원을 켰다.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땐 전화를 꺼놓으라는 광고를 보고 따라한 건 아니겠지? 휴대폰의 로딩이 끝나자마자 진동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연달아 울리는 진동은 장장 몇 분이나 지속됐다. 

“오늘 바쁘셨나봐요.”

“쉬는 날이야.”

거짓말. 내 눈을 피하고 딴청을 부리는 묵야의 행동 때문에 딱 알아차렸다. 잠잠해졌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묵야는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

전화를 받는 묵야는 여보세요 라든지, 묵야입니다 라든지의 인사말이 없었다. 

“그래, 전부는 아니야. 도둑 쥐가 많아서 처지 곤란이지… 말했던 대로만 처리해. 아니, 그 건은 넘어가. 나머진 회사에서 이야기하지.”

듣기 좋은 중저음이 끝나고 묵야가 내 허벅지를 만졌다.

“늦기 전에 들어가 보세요.”

“아니, 괜찮아. 한 시간 정도 여유 있어.”

“저 집에 내려다 주시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딱 한 시간 채우겠네요.”

묵야는 시간을 가늠하더니 내 허벅지를 꽉 쥐었다. 

“다음 주에는 이런 일 없도록 시간 비워두지.”

“괜찮아요. 평일인데요.”

너무 내 생각만 했다. 묵야가 쉬는 주말을 휴일로 정할 걸 후회막급이었다. 집근처 도로를 지나가는데 그루터기 상가 부근이 번잡스러웠다. 소방차 두 대에서 물호수가 거센 물줄기를 쏟아냈다. 그 물줄기가 향하는 곳은 그루터기 간판이었다. 

“잠시 만요!”

묵야의 팔뚝을 쥐었다. 묵야도 고개를 틀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에 집중했다.

“이런…. 너희 가게다.”

언제부터 불이 났는지 몰라도 가게 안의 불길은 이미 진화됐지만 내부는 전부 다 타버린 상태였다. 다행히 건물의 위층이나 옆 상가까지 번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불길이 진화된 가게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번잡스러웠던 이유가 충분했다.

“묵야씨, 저 먼저 내릴게요. 집까진 걸어가면 되니까.”

“그래, 전화해.”

“네.”

다급히 차에서 내려서 가게 앞까지 달려갔다. 빈티지함을 자랑하던 내부는 그야말로 잿더미였다. 사장이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사장님!”

내 목소리에 사장이 반색을 했다.

“주인군!”

사장은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처럼 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대화를 하려는 도중 소방복을 입은 대원이 사장에게 핀잔을 던졌다.  

“이거 이거, 조심 좀 하시지 그랬어요. 옆까지 번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장이 오뚝이처럼 허리를 연방 굽혔다 폈다 반복했다. ‘실수, 주전자, 가스레인지.’ 그야말로 뿅뿅 올라오는 문자들을 보니 사장의 실수로 벌어진 화재인 듯 했다. 

“혹시 가스레인지 켜놓고 나가신 거에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불이 날 게 거기뿐이니까요.”

“그게…….”

‘새우튀김, 기름’ 말을 주저주저 하는 사장의 어깨에 기가 죽은 문자가 내려앉았다. 

“혹시 냉장고에 있던 새우튀김 드시려고 했던 거세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사장은 되감기한 테이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조리할 게 그거뿐이잖아요.”

“기름을 올려두고 도면을 그리는데, 급한 전화가 와서 그냥 문을 잠그고 나간 바람에.”

카페는 내부수리를 싹 해야 할 정도로 기존의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다치신 데는 없구요?”

“없어요. 나도 전화 받고 뛰어온 거라….”

소방대원이 사장에게 3~4장의 책자를 내밀었다.

“이거 잘 읽어보세요. 주택화재의 35프로 이상이 가스레인지 부주의 사고입니다. 인명피해가 없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앞으론 제발! 조심하세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방관님들.”

불씨의 작은 유무까지 전부 확인한 소방관들이 할 일을 마치고 소방차에 올라탔다. 진압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구경하던 시민들이 박수를 쳐댔다. 사장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주인군.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제게 미안해하실 건 없죠. 그래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사장이 생각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착해, 주인, 월급’ 내 월급부터 챙겨주려는 마음이었다.

“월급은 천천히 주세요. 화재 보험은 들어놓으셨죠?”

“응, 들었지. 이참에… 그냥 가게 접을까봐. 미련이 남아서 남겨 둔건데 이런 일이 생기니…….”

본업이 따로 있으니 차라리 본업에 집중하는 게 더 좋을 것도 같았다. 알바는 다른 자리 찾으면 그만이다. 다만 불타 사라졌다는 게 애석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장이 말하는 미련이라는 게 뭔지도 잘 알았다. 내게도 미련이 있으니 시골에 카페를 그대로 남겨두고 온 것이다. 

“이렇게 된 거 본업에 집중하세요. 그게 마음도 더 편하실 거예요.”

“주인군을 보면 꼭 나보다 형 같아. 어째 그리 어른스러워?”

제가 살고 있는 삶을 5년만 살아보세요. 그럼 저절로 이렇게 될 테니. 그저 기운을 잃은 사장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월급은 문자로 계좌 찍어줘, 붙일게.”

“편하실 때 넣어주세요. 전 괜찮으니까.”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사장님.”

곧이어 화재보험직원이 도착하고 사장의 실수로 이루어진 화재니 별다른 조사는 없을 듯해보였다. 사장이 내게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보험사 직원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만일 사장의 실수로 난 화재가 아니라 이유 없이 일어난 불이었다면, 난 십중팔구 묵야나 이주율을 의심했을 것이다. 나를 백수로 만들기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민 게 아닌가 하는. 묵야는 이미 내 타이어를 엉망으로 만든 전적이 있으니 의심을 받아도 별 수 없을 것이다. 

향현문자 37

하루 종일 걸었더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멀어보였다. 폭풍 전의 고요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했다. 에버랜드에서 한껏 즐기다 왔더니 일자리가 사라져버렸다. 결국 태형 형 일이나 도우라는 하늘의 뜻인가……. 묵야가 걱정할 것 같아 전화를 넣었다. 

“괜찮아?”

휴대폰 건너편의 묵야는 다짜고짜 내 안부부터 물었다. 

“네, 저는 괜찮죠. 사장님 실수로 생긴 화재였대요.”

“조심성이 없는 자군.”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옆 상가까지 번져나갔으면 인명피해가 속출했을 것이다. 특히 옆 상가의 위층은 소규모 회사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카페는 문 닫으신대요.”

“그래, 한동안은 쉬는 게 좋겠다.”

“네, 그럴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요.”

“왜?”

“태형 형이 제 도움이 필요한가 봐요.”

“그게 누군데?”

묵야의 목소리에 날이 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들어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소와 비슷했지만, 묵야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면 목소리의 톤이 한 단계 더 낮아졌다.

“경찰 쪽 일이에요.”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힘들어도 해야 되는 일이 있더라구요.”

“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그럴게요. 회사엔 도착했어요?”

“이제 거의. 오늘은 늦을 거 같으니 전화 기다리지 말고 쉬어.”

묵야와의 전화를 끊으니 어느새 대문 앞이었다. 시간은 7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거실에는 이주율과 유진이 아침부터 여태까지 싸운 듯 투덕거리고 있었다.

“야이 시발아, 베지밀 네가 처먹었지.”

“안 먹었어.”

“내가 아침에 내가 한 개 먹고, 나머지 한 개 남아있는 거 분명 확인했거든?”

“그럼 먹었어.”

그까짓 베지밀 사주면 되지 않냐며 유진이 언성을 높였다. 

“이주인이 사온 거랑 네가 사온 거랑 같아?”

“그만 좀 싸워라.”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두 녀석이 쫑알쫑알 대니 다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이주율이 내게 바싹 붙어서 의형증을 쏟아냈다. 

“둘이서 뭐했어? 놀이 공원 간 거 맞아? 호텔 갔지? 시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주율 버릇 여든까지 가겠다. 그나마 소파로 발로 치지 않는 게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주율이 여러 번 걷어찼던 소파의 등짝 부분은 늘 안쓰러울 정도로 움푹 파여 있었다.  

“놀이공원 다녀온 거 맞아.”

“그 새끼가 룰루랄라 놀이공원 갈 리가 없잖아. 너 거짓말이 자꾸 는다?”

의심만 쏟아내는 이주율에게 주머니를 뒤져 순간포착사진 열쇠고리를 보여줬다. 이주율이 그걸 보더니 인상을 팍 구겼다.

“시발! 지금 나한테 자랑질 해?”

결국 소파의 움푹 파인 면을 또 걷어찼다. 

“증거잖아. 놀이공원 갔다는.”

“얼굴도 좆같이 생기게 나와 갖고는 뭘 자랑할 게 있다고 보여줘!”

유진이 쫄래쫄래 와서 열쇠고리를 뺏어들었다. 내 얼굴을 보더니 켈켈대고 웃어댔다. 그래, 너라도 실컷 웃어라. 

“이거 진짜 주인 형?”

“가짜 이주인이 탈을 쓰고 찍었다. 됐냐?”

“사람 얼굴이 이렇게도 변하는 구나. 못생겼어.”

“뭐? 이 시발새끼야! 어따 대고 못생겼대. 이주인이 대가리만 노란 너보단 억 배는 낫거든?!”

실제 형제가 나와 이주율, 단 둘 이어서 다행이었다. 형제가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지금 같은 상황을 매 년 겪어야 했을 테니까. 

“이주율 너 출근 안 해?”

“할 거야.”

이주율이 씨근덕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 너는?”

“난 태형 형 보고 왔지. 연락 받았어?”

“응, 어제 받았었어.”

“잘됐네.”

유진이 열쇠고리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dissatisfaction’ 불만? 튀어나온 영어를 속으로만 읽었다. 유진이 내게 열쇠고리를 건네주었다. 내 시선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 같았다. 유진은 누구에게나 호감 받게 행동했으나 가끔 보면 그 호감이 다른 부분을 감추기 위함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놀이공원을 배회하는 커다란 곰 인형 속에 어떤 사람이 숨어 있는지 탈을 벗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유진의 밝은 겉웃음 뒤로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워낙 낙천적인 유진의 모습에 익숙해진 탓인지 녀석이 귀여워 보이는 게 태반이었지만, 간혹 심중을 알 수 없는 문자를 내뱉을 때마다 흠칫흠칫 가슴이 철렁했다. 

“뭐가 불만인데?”

“아, 또 읽었어? 치사해.”

“태형 형이 내게 전화한 게 불만이야?”

“조금. 태형 형보단 나랑 더 친하게 지내줘.”

유진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애정을 갈구했다. 유진에게서 나온 말이 빈말임을 느꼈다. 

“유진, 난 바보가 아니야.”

“맞아, 이주율보단 형이 더 어렵거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이주율이 나보다 더 편하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정에 굶주린 사람은 쉽게 파고들 수 있는데, 지금 형은 안 그렇거든. 난 그런 사람에게는 질투심만 들어.”

“마음이 비틀린 무적의 솔로부대냐?”

“응? 그게 뭐야?”

“모르면 됐다.”

출근 준비를 마친 이주율이 방에서 나왔다. 네이비 색상의 투버튼 수트를 쫙 빼입은 주율이 나이보다 어른스러워보였다. 평소에 핏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녀석답게, 허리부터 밑단까지 스트레이트로 뻗은 라인이 다리를 더 길어보이게 만들었다. 포켓에 꽂힌 행거칩이 짧은 혀를 날름거렸다. 

“와, 만날 되는대로 입고 가더니 오늘은 왜 정장을 입었어?”

딱 보니 시비는 유진이 먼저 걸고 있었다. 이주율이 유진의 금발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저리 비켜.”

유진이 머리를 감싸 쥐며 아픈 시늉을 했다.

“유진 말대로 오늘 무슨 일 있나보네?”

“별 일은 아니야. 전무급 이상은 다 모이라고 해서 긴자로 가야해.”

‘둘째이사, 셋째이사, 형제싸움, 삼파전.’ 이주율이 진녹색의 골치 아픈 생각들을 떠올렸다. 둘째형님, 셋째형님도 아니고 둘째이사, 셋째이사라니…. 사파에 속한 이사들끼리 형제싸움을 하나본데 그 여파가 밑의 사람인 이주율에게까지 미치는 듯 했다. 유진이 아픈 연기를 멈추고 눈을 반짝였다.

“긴자? 일본, 일본 가는 거야?”

“저 무식한 양키 새끼 좀 어디다 치우면 안 될까?”

이주율이 웬일로 내게 양해를 구했다. 

“가서 회 많이 먹고 와라.”

이주율도 회 킬러였다. 우리는 회나 고기면 사족을 못 쓴다. 외식이란 걸 제대로 해본 역사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싸다줄까?”

“아니, 괜찮아. 조심히 다녀와.”

묵야의 전화도 불통이 났던 게 이해가 갔다. 이주율이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라면 묵야도 빠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폭이라고 무시했지만, 실상 사파는 중국 삼합회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집단이긴 했다. 우리나라의 유통되는 마약은 거의 사파를 통해서 들여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경찰당국에서도 건드리기 꺼려하는 게 사파였다. 우리나라도 해가 갈수록 마약 공급이 활발해지고 있는 추세였다. 몇 년 만 더 지나면 서울의 고등학교 뒤뜰에서 마약에 취해 헤롱대는 녀석들이 증가할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현실화될 수도 있었다. 이미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분이 마약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로 마약 포대를 선물했지 않는가. 마약은 유통하는 사람만큼이나 그것을 실제 흡입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다. 

시장은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마약도 마찬가지였다. 사파가 마약의 거대루트라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지만, 사파를 겨냥한 함정수사도, 잠입수사도 어느 것 하나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그러니 사파는 대기업체 수준의 부를 구축했겠지. 

사씨 성을 가진 사파의 회장이 조선족 출신으로 젊을 적 홍콩에서 넘어왔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인 형, 주율도 갔으니 본격적으로 얘기해볼까?”

“뭐를?”

“오늘 태형 형 만나고 왔다고 했잖아.”

“아, 그거.”

사실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소파에 앉아서 유진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노력했다. 유진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연두색 캡슐이 들은 비닐팩이었다. 익숙했다. K3.

“그거 어디서 났어?”

“샀지.”

“어디서?”

“이주율이 전담하고 있는 카지노에서.”

유진이 비닐팩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판매책은 누군데?”

“카지노 손님 중에 하나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태형 형이 알아낸 루트니까. 내가 미국인이니 그 판매책이 쉽게 팔 거라고 하더라구. 귀찮아서 혼났어.”

“사파에서도 K3는 판매 금지 시킨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거 정말이야? 태형 형은 여전히 안 믿더라.”

묵야와의 친분이 있는 것을 유진도 알고 있으니 발뺌할 생각은 없었다. 

“맞을 거야.”

“음, 그럼 K3는 경찰한테도 쫓기고 사파한테도 쫓기는 셈인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당당히 드러냈잖아. 카지노 자체가 사파 소유인데.”

“등잔 밑이 어두울 수도 있잖아.”

“응? 그게 뭐야?”

“가까운 사람일수록 도리어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뜻인데. 지금 같은 상황에선 가까운 곳에서 생긴 일을 잘 모른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돼.”

“아~ 이해됐어.”

유진이 그럼 이건가 하면서 속사포 영어랩을 구사했다. 

“the husband is always the last to know?”

“나랑 얘기할 땐 영어로 쏟아내지 말아줄래? 나 잘 못 알아들으니까.”

“방금 주인 형이 말했던 것 같은 뜻이야. 우리나라도 속담정도는 있다구.”

유진이 말하는 우리나라는 미국이었다. 한국으로 귀화한 미국인보다도 한국말을 유창히 구사하는 유진이 나 미국사람이야 하니까 뭔가 이상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안 났지만 K3로 사망하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대. 그 정도로 이게 황홀한가?”

유진이 짓궂은 손놀림으로 연두색 캡슐을 꾹 눌렀다. 약한 캡슐 막이 터지며 흰 가루가 비닐팩 바닥에 내려앉았다. 저 소량의 가루가 사람의 생명을 뒤흔들다니. 한두 알을 복용했을 땐 생명의 지장이 없지만 세 개 이상 동시에 흡수하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 했었다. 판매책이던 시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확실한 정보일 것이다. 유진의 말대로 K3 복용자들은 얼마나 황홀함을 맛보기에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건지 궁금해졌다. 모든 마약 복용자들이 나와 같은 현상을 겪는다면 그들도 그 날 부로 마약과는 이별의 종지부를 찍을 텐데. 유진에게 과다 복용의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한 두 개씩은 괜찮다며, 왜 많이 복용하는 거지?”

“K3는 다른 약에 비해 환각의 지속시간이 짧아. 보통의 LSD는 약효가 반나절이상 가거든. 근데 K3는 먹으면 먹을수록 면역력이 생겨. 그러니 약효를 지속하려면 연달아 먹는 수밖에 없지.”

“환각을 보려다가 아예 천국으로 가는 셈이네?”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겠지만.”

유진이 비닐팩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태형 형은 내가 뭘 해주길 원하는데?”

“이주율이 K3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던데?”

“뭐?”

“아무래도 마약이 판매되고 있는 카지노의 전무니까 엮어있을 거라 생각하나보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봐도 그래.”

유진도 이주율의 편을 들고 있었다. 만날 싸우는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보다.  

“일단은 그 판매책을 체포하진 않을 거래.”

“왜?”

“밑의 놈 보단 위의 놈을 잡고 싶은가 보지.”

“위의 놈이 누구라고 보는데?”

“말은 안 해도 사파의 간부급이겠지?”

벌써부터 일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예감은 빗겨나가는 일이 드물다. 

“묵야를 의심하는 구나.”

“Maybe. ah, sorry. 아마도, 아마도.”

유진은 한국말과 영어가 잠시 헷갈리는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영어로 말하지 말랐더니 곧이곧대로 듣는 녀석이었다. 이러니 본성이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가끔씩 비추는 그 차가움이 뭔지를 모르겠어서 문제였지만.

“그 많은 간부들 중에 묵야를 의심하는 이유는?”

“음. 주인 형 몰랐어? 사파의 마약 루트는 전부 그 남자가 관리해. 늘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확실하지.”

마약 피라미드의 최종 꼭대기에 위치한 제3소비자가 묵야라니. 그보다 더 문제인 건 그럼에도 그가 전혀 위협적이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공급자인 묵야가 밉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게 원래부터 뛰어난 정의감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태형 형을 도와 경찰 일을 했다 뿐이지 누구나 분개하는 억울한 사건들 외에는 별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은 큰 건을 올리고 싶은가봐.”

유진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태형 형. 사파의 간부를 잡아넣은 전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묵야를 잡아넣으면 확실히 큰 건이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거짓 목격자를 만들어서 뒤집어씌우는 일은 이제 이쪽에서 사양이다. 태형 형이 다시 전화를 해준 것은 더없이 기뻤지만 내 능력이나 묵야와의 친분을 이용하기 위해서만 내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면 나는 아마 형과의 인연을 스스로 끊어낼 것이다. 언제나 내게 믿음을 심어주었던 태형 형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모습을 잊지 못해 형을 돕기로 한 것뿐이었다. 그 점을 제외하곤 전에도 지금도 다른 뜻은 없었다. 

“유진아, 태형 형 어디가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사람은 늘 변하지.”

“그렇지만.”

“지금 태형 형이 좀 정상이 아닌 건 맞는 것 같기도 해. 사건에 너무 심취해 있잖아. 그런 형사들을 잘 알고 있는데, 결국엔 자신의 심증을 확고히 믿어서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억울한 사건들을 만들어 내지. 식스센스는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라 단지 감이잖아.”

초자연적인 사이코메트러가 과학적인 판단을 운운했다. 다소 모순적이었다.

“너도 과학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잖아.”

“나는 불확실하고 주관적인 마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장면을 보는 것이니까, 사물이 비추는 과거 현상들에 대해 사적인 감정을 실진 않아.”

“느끼는 거지만 너 진짜 한국말 잘한다. 오늘따라 유달리 더빙한 영화보고 있는 거 같아.”

“어려운 속담 같은 것만 모르는 거야. 과학적인 용어는 오히려 더 외우기 쉽잖아. 그리고 미국에서 산 날 만큼 한국에서 산 날도 많아.”

“맞다, 그랬지.”

완벽한 미국인의 얼굴이라 그 사실을 자주 잊었다. 

“그 사람은 아니 태형 형은, 형이 묵야에게서 사파에 관련된 걸 알아내주길 바라.”

“거절한다면?”

“그건 형 마음이지.”

문틈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유진아 너는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 남자 좋아하는데?”

“태형 형도 알아?”

“알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야. 그게 왜?”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유진의 성벽을 알아차린 다면 태형 형은 유진마저도 내칠까? 내가 이주율을 감싸는 것처럼 형도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태형 형이 뭐라고 했었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

“원래 그 사람 호모 포비아야. 형수랑 형, 둘 다 딱 봐도 알잖아. 교회 신자니까.”

“그랬구나.”

“나도 하나님 믿어, 성당도 다녀봤어. 하나님이 게이라고 차별할 것 같진 않거든. 전 세계의 우는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니 마음이 얼마나 넓겠어.”

유진식 사고법이란 책을 내면 불티나게 팔릴 것 같았다. 저 녀석처럼 낙천적이게만 살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겠다.

“솔직한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주인 형. 남이 상처받는 건 신경 쓰지 않거든. 솔직하다고 해서 좋은 것만도 아니고. 자기 의견이 너무 확고한 사람은 고집쟁이일 가능성이 크니까.”

“내 전화 받으면 형이 화낼 것 같으니 유진아 네가 대신 말해 줘. 묵야의 스파이 노릇은 하고 싶지 않다고.”

“질투 나네. 주인 형의 사랑을 받는 묵야가.”

“넌 늘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니까 말에 힘이 실려 있지 못하는 거야.”

정말 질투가 나는 사람은 저렇게 가볍게 이야기 못한다. 질투가 얼마나 무거운 마음인지는 내 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아, 맞다. 그거 말고도 또 다른 부탁 있었어. 검찰이 고소한 남잔데. 시체가 없어서 수사를 진행 하지 못한대.”

또 시체냐? 2년 전에 비해 살인사건이 체감상 수십 배는 늘었다. 

“한 약사에게서 자신의 부인이 실종됐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그 약사가 좀 수상하대. 여자가 사라진 뒤, 집 안의 물건은 싹 치우고 새로운 가구들을 들였대. 게다가 기존에 타던 차까지 폐차시켰다네? 그 남자 아파트 옆 호수 주민 말로는 둘이 거의 만날 싸우더래. 그 날은 평소보다 더 시끄러워서 밖을 내다봤더니 남자랑 여자랑 싸우다말고 밖으로 나가는 걸 봤대. 그리고 나서 여자는 실종.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니 살인이 성립되지도 않았지. 단순히 실종사고로만 접수가 들어왔는데 검사가 보기엔 그게 굉장히 의심스러웠나봐. 하긴 내가 봐도 이상하긴 해.”

“그런 거라면 네가 해도 되잖아.”

유진이 손을 휘저었다. 미국인 특유의 과한 제스처였다.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가구고 뭐고 싹 바꿨다니까? 심지어 차던 시계까지도.”

“하나하나 찾아내면 관련된 게 나오지 않겠어?”

“주인 형은 내가 무슨 탁하면 탁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인 줄 알아?”

도깨비 방망이는 묵야고. 아니 그건 일단 접어두자.

“나도 나름대로 예민하다구.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한꺼번에 읽으면 사념이 섞여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 차라리 형이 한 번에 나서서 야, 너 마누라 죽이고 어디다 숨겼어! 할 때 그 남자가 생각하는 단어를 잡아내는 게 빠르지.”

그거야 그렇다. 일단 묵야의 스파이 노릇은 접어두더라도 저 정도는 도와줄 수 있었다. 알바비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현실적으로 돈이 궁하기도 했다. 유진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이빨이 보이며 옆으로 입을 쭉 찢는 대형견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짝거리는 금발은 오늘따라 더 윤기가 흘렀다. 금실의 강이 흐르는 느낌이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형, 나 오늘 머리 안 감았는데…….”

어쩐지, 윤기가 흐르더라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행동을 멈췄다. 유진이 상처 받았어, 징징 거리면서 욕실 세면대에 머리를 박았다. 

“하수구 막히면 네가 뚫어.”

“하수구 더럽잖아.”

“그럼 세면대에서 감지 마.”

“알았어. 오늘만.”

비듬 전용 샴푸로 머리를 박박 긁는 녀석을 뒤로 하고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자 혹사당한 발의 감각이 둔했다. 종아리는 묵야가 열심히 주물러준 덕에 알이 배길 일은 없었다. 츄러스의 단 맛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해서 하나만 더 먹고 올 걸이라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누운 상태로 꼼지락 거리며 바람막이 점퍼를 벗었다. 달그락 하며 침대 위로 작은 열쇠고리가 굴러 떨어졌다.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고민을 했지만 결국 집 열쇠고리를 그것으로 바꾸고 말았다. 거의 십 년은 사용해왔던 짱구가 그려진 예전 집 열쇠고리는 책상 위에 던졌다. 오랫동안 수고가 많았다 짱구야. 달랑거리는 열쇠를 손에 가두고 누운 채로 사진을 올려다봤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도 무뚝뚝하기만 묵야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나도 중증이다. 그 스티커 사진에 입술을 쪽 대었다. 

묵야의 따뜻함이 전해지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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