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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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가 되자 이주율이 당당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밤샘 작업을 마치고 들어오는 녀석에게서는 가장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돈 벌어오는 기계가 들어왔는데 어서 베지밀이나 내놓으라는 타박에 결국 녀석 앞까지 그것을 대령했다. 이런 걸로 말다툼하느니 내가 참고 말지.

“밥은 먹었어?”

“밥 먹으면 잠 안 와. 잘 거야.”

“일어나서 바로 밥 먹어.” 

“반찬 뭐 있는데?”

이주율이 베지밀의 빨대를 빼고 손으로 팩을 눌러 쭉쭉 빨아먹었다.

“아무 거나 처먹으면 되지, 이젠 반찬 타령까지 하냐?”

말은 그렇게 해도 녀석이 일어나서 먹을 돼지고기 고추장 볶음을 만들어 놨다. 이주율이 씻지도 않고 방으로 쑥 들어갔다. 유진은 어제도 안 들어왔으니 오늘은 들어올 것 같은데. 이주율의 방문 앞에서 서성였다. 문고리가 빠진 구멍은 여전히 투명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이주율.”

“왜!”

“유진오면 문 열어줘야 해.”

“아 시발! 그 양키 새끼 좀 어디다 치워버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이주율이 발로 방문을 열며 나왔다. 바글바글한 녀석의 문자가 내게 달려들려 했지만 이주율이 먼저 문을 닫았다. 눈이 매웠다. 그래도 전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그 문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주율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이주율의 방에 있는 문자들은 독이 아니었지만, 내 스스로가 독하다고 느낀 것뿐일지도. 

“너 오늘 카페 쉬는 날 아냐?”

“맞아.”

“근데 어디가?”

나를 벽에 밀어놓고 크릉크릉 거렸다. 이주율의 이마를 딱 쳐서 비키게 만들었다. 아무리 이주율이 나보다 키가 컸다 하지만 고작 몇 센티 차이였다. 고작보다는 조금 더 크려나? 손을 펴서 녀석과 나의 키를 가늠하다 곧 손을 접었다. 

“나도 쉬는 날인데 좀 놀자.”

이주율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내가 생성할 문자를 읽으려 준비했다. 그렇게 봐도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 솔직히 말할 거니까.

“놀이공원.”

“뭐? 누구랑?”

“니네 이사님이랑.”

“뭐?!”

이주율이 거친 숨을 씩씩 쉬었다. 가만 보면 무서운 얼굴은 아닌데 저렇게 인상을 쓰니 이십대 후반만 되도 이마에 주름이 팰 것 같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둘이 무슨 사이야!?”

“친해.”

“장난해?”

“아니, 진심이야.”

이주율 난 피하지 않을 거다. 널 방치하지도 않을 거고. 불어 선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지도 않는다. 

“내가 가만 둘 거 같아?”

이주율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문뜩 내 손목을 내려다보던 녀석의 표정이 야차같이 변했다. 어제 묵야와 관계를 하면서 그가 잡았던 내 양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미세하게나마 남아있었다.

“이건 또 뭐야?”

이주율이 내 손목을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이주율 잘 들어. 난 너 끝까지 안 놔. 그래도 너와는 형제일 뿐이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그렇게 됐을 것 같아? 생각해봐.”

“듣기 싫어.”

“아니, 들어. 둘이 서로 사랑했다고 생각해? 자신들의 씨앗인 우리를 학대한 게 둘이 정말 사랑해서라고 생각 하냐고!”

이주율이 나를 껴안았다. 늘 거칠기 짝이 없던 녀석이 떨리는 손으로 내 등을 어루만졌다. 

“주인아, 둘만 있으면 안 돼? 우리 둘이면 충분하잖아.”

녀석의 쳐진 목소리에 정말 그래버릴까 하다가도 마음을 고쳐 잡았다.  

“주율아, 내 동생 이주율아. 넌 나 혼자 두고 영영 떠날 수 있어?”

사랑을 가슴에 묻고 떠난 이성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의 사랑이 단순한 집착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는 그렇기에 떠날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래. 절대 못 그래.”

“나도 그래. 집착이 사랑이라 했지? 아니야, 이주율 집착은 네 만족이야.”

“잔인하다. 이주인. 왜 항상 나한테만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

녀석이 나를 끌어안은 채로 휴대폰을 꺼내 웃긴 내 얼굴을 보며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래도 기특했다.

“주율아 네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은 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야.”

이주율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늘 안심을 했지만, 정작 내 가슴 속에 숨겨져 있던 불같은 화를 진화해준 사람은 묵야였다. 

“이주율. 우린 사랑이 아니잖아.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상처만 깊어져. 결국엔 곪아 터진다구.”

“더 말하지 마.”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어린애. 성인이 된지 불과 이년밖에 지나지 않은 소년. 그게 이주율이었다. 형인 내가 녀석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때는 내가 너를 어찌해야 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기만 했었다. 방법을 몰라 너를 마냥 거부했더니, 너는 시나브로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차라리 다독여주고 이해시켜 줄 것을, 나는 그저 밀어내기에만 바빴다. 내가 조금 더 어른이었다면 좋았을 걸. 두 살 터울이 아닌 그 배가 되는 나이의 형이었으면 너를 더 빨리 이해해주었을 걸. 이주율의 등을 토닥여주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동하려하자 이주율이 나를 안고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와중에 유진은 빨리 열어달라며 모니터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유진이 왔네, 이제 푹 자도 되겠다.”

유진이 들어오며 형제애를 과시하고 있는 우리를 쳐다봤다. 검지를 입에 넣고 헤, 하는 표정을 했다. 

“어? 주인 형 오늘 쉬는 날 아니야?”

내가 쉬는 날은 나만 빼고 동네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집에선 보통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기에 나갈 채비를 마친 내 모습이 유진은 퍽 궁금했나보다. 

“쉬는 날이니 나가서 놀아야지.”

이주율이 나가지 말라며 어리광을 부렸다. 이주율의 등을 탁탁 쳤다. 

“유진아, 주율이랑 좀 놀아줘라.”

“양키 고홈.”

이주율이 나를 안은 채로 목 뒤로 손가락을 올렸다. 안 보여도 가운데 손가락인 걸 알겠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디를 가래.”

유진이 넉살좋게 안방 문을 열었다. 

“어? 이상하네, 방이 뭔가 가벼워졌는데?”

여전히 감이 좋은 녀석이다. 이주율의 시선도 안방으로 향했다. 이주율이 놀라며 나를 안은 손을 놨다.

“…이주인, 네가 했어?”

수없이 떠다니던 ‘이성일’ 이라는 글자가 사라진 것에 대해 이주율이 당황해하고 있었다.

“착한 일만 하고 살았더니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갔지 뭐야.”

어차피 유진이 사이코메트리를 하면 들킬 거짓말이었다. 때마침 거실 테이블 위의 놓여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11시가 다되었나 보다. 전화는 받지 않고 휴대폰만 쥐고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이주율이 따라 나와 침통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오늘만, 오늘만이야.”

“그래.”

이주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유진이 옆에 와서 자신의 머리도 내밀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꽂고 동시에 두 녀석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었다.

“다녀올게. 밥 챙겨먹어.”

나가는 길에 이주율과 유진이 투닥거렸지만 정말로 싸우는 것 같지는 않아 안심했다. 

대체 뭐지, 이건? 대문 앞에 세워진 차를 보고 묵야가 그 안에 있는 게 맞는지 두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스포츠카라니…. 검은색이어서 그리 튀진 않지만 양아치들 전용 BMW시리즈 스포츠카이기에 당황스러웠다. 조수석에 앉아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를 유심히 봤다. 스포츠카와 정장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지만 모든 물건들은 걸치는 사람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차는 뭐에요?”

“나들이 갈 때는 이런 차가 좋다던데.”

“누가 그래요?”

“밑의 녀석이.”

이제는 혹시 묵야 밑의 부하들이 순진한 묵야를 놀리는 게 아닐까란 의심증이 생겨버렸다. 

“전 차라리 일반 자가용이 더 좋아요. 스포츠카는 승차감이 떨어져서 멀미가 더 심하게 나잖아요.”

“그런가?”

묵야가 핸들을 꽉 쥐었다. 에버랜드가 있는 용인으로 빠질 줄 알았는데 어느새 묵야의 트러스티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에버랜드는 때려치우고 하루 종일 침대에 있자는 의도는 아니겠지? 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묵야가 내리라며 손짓했다. 세워진 스포츠카 옆에는 평소에 묵야가 타고 다니던 검은색 벤츠가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누군가가 급히 뛰어나왔다. 

“이사님, 아직 안 가셨습니까?”

얼굴이 익숙했다. 전에 봤던 경찰복을 입은 덩치 중 한 명이었다. 더불어 에비스에서 이주율에게 쫓기던 나를 구해준 남자이기도 했다. 묵야가 스포츠카의 열쇠를 덩치에게 던졌다. 

“강아정. 다녀와서 보자.”

덤덤하게 말했지만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 강아정이라 불린 남자가 새파랗게 굳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괜히 나 때문에 저 남자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 같아 미안해졌다. 묵야의 세단으로 옮겨 타고 나서 에버랜드로 가는 내내 난 스포츠카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열심히 찬양하기 시작했다. 스포츠카가 진짜 좋기는 해요, 가격도 비싸고 해서 못타는 거지 원래 제 나이쯤 되는 녀석들의 로망이 비엠 스포츠카예요. 실제로 보니까 박력 있긴 하대요. 다음엔 꼭 타보고 싶어요. 라면서 BMW 예찬을 늘어놨다. 줄줄이 소시지 같은 내 말에 묵야는 그저 딱 한 마디만 했다. 

“평소보다 말이 많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스포츠카의 장점에 대해 늘어놓는 나를 보며 묵야가 픽 웃었다. 다행히 돌아가서 사단이 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경부와 영동 고속도로는 평일 오후인지라 한산했다. 평소엔 밀리는 도로로 유명한데 덕분에 멀미 없이 도착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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