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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날 묵야를 만나고 나서부터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 겨울이 끝남을 알리는 계절의 신호였다. 비가 그치면 꽃샘추위가 한 번 찾아올 테고, 그 이후로는 목련이 피는 따뜻한 날씨가 지속될 것이었다.
집에서부터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커피숍에서 연락이 온 것은 어제였다. 오늘부터 출근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장의 목소리는 칙칙하게 내리는 비와 다르게 경쾌했다. 면접을 볼 때도 느꼈지만 주인의 성격은 생긴 것에 비해 더 밝은 편이었다. 이로서 묵야와의 첫 여행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 건가. 그가 그리 아쉬워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출근을 하기 전에 문자를 보냈다.
[오늘부터 첫 출근해요. 쉬는 날이 정해지지 않아서 여행은 무리일 듯 합니다.]
아직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유진과 이주율을 깨우지 않으려 신발장을 조심히 열었다. 장우산을 꺼낸 다음 다시 조용히 닫았다. 비오는 날 컨버스를 신으면 천부분이 다 젖기 때문에 오늘은 마틴 워커를 신었다. 고등학교 때 구입해놓고 몇 번 신지 않아 상태는 양호했다.
우산을 펴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었다. 내리는 비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밤새 내렸던 탓인지 인도는 잔뜩 물을 머금고 있었다. 묵야에게서 문자가 도착했겠다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ㅜㅜ]
묵야가 보낸 게 맞나 싶어 다시 확인을 해야 했다. 그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그저 내 착각이었다. 묵야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화를 할 걸.
“이주인.”
“네.”
“제가 처음에 이모티콘 보내지 말라고 했었죠.”
“그랬지.”
“그런데 왜 자꾸 보내요?”
웃음을 참으며 짐짓 화를 냈다.
“이모티콘은 안 보냈는데?”
“무슨 소리에요. 우는 표시 방금도 보냈잖아요.”
“우는 표시? 그게 이모티콘인가?”
“네.”
우는 표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보낸 것 같았다.
“그건 단지 속상할 때 쓰는 거라고 하던데. 아닌가?”
묵야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저러다 누구하나 크게 잡지 싶을 정도였다. 이미 전적이 있으니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속상할 때 쓰는 게 맞기는 해요....혹시 여행 못가서 속상해요?”
“조금.”
생각해보니 데이트 코스와 여행 백서를 구매했던 남자였다. 새까만 정장을 입고 어떤 표정으로 그 책들을 골랐을지 상상이 안 갔다. 밑의 누군가에게 시켰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아르바이트는 어디서 하지?”
“집 근처에요. 걸어서 다니기에 충분해서 바이크는 안 타도 될 것 같아요. 지각할 때만 빼고요.”
“주인이 건방지게 굴면 얘기 해.”
내가 건방지게 구는 게 아니라, 카페의 주인을 말하는 거겠지. 이럴 때보면 영락없는 조폭이었다.
“건방지게 굴면 어떻게 하게요?”
“괴롭혀 줄 거다.”
“하하.”
순화해서 사용한 말이 저거라니. 정말 웃겼다.
“든든하네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
묵야가 난 든든한 남자야 라고 돌려 말했다. 전화로 하릴없는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카페 근처에 도착했다. 일하는 곳이 어디냐고 끈덕지게 묻는 탓에 술술 내뱉고 말았다. 곧 묵야에게 일하러 들어가 봐야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루터기. 지금 보니 카페의 이름 수준이 내 네이밍 센스와 비슷했다. 시골에 있는 내 카페의 상호명은 한그루였다. 사장이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황급히 반겼다. 면접 볼 때는 몰랐는데 사장의 눈 위쪽에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흉터는 희미해서 오래전에 다친 것 같았다. 그가 웃을 때마다 상처 부위의 살이 일그러지며 조금 험악한 인상을 풍겼다.
“어서 오세요, 헤매진 않았어요?”
“네, 집이 근처에요.”
여전히 얼굴과 다르게 부드럽고 경쾌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어제 사장의 전화를 받고나서 동사무소에 들려 떼어낸 등본을 내밀었다. 사장은 형식상 대충 훑어보더니 등본을 반으로 접었다. 금고의 돈 통을 들어 그 밑에 등본을 깔았다.
“카페 알바 경험이 있다고 했었죠?”
“네. 이 년 정도요.”
알바가 아니라 실질적인 가게 주인이었었지만 그런 소소한 사정들은 생략했다.
“잘됐어요, 난 사실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취미, 시간, 알바, 무단결근.’ 입을 다문 사장이 생각하는 것이 순서대로 쏟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전까지도 알바가 다 해줬는데 이유도 없이 그만둬서 곤란해 하던 참이었어요. 그 덕에 문도 며칠 동안 못 열었구요.”
“네.”
“취미로 하는 거라 크게 부담은 안 가져도 돼요.”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거니 내 가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사장은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라 말했다. 가게의 크기는 15평 남짓했다.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며놓은 것을 보니 사장의 취향은 아니고, 그 전 알바의 솜씨인 듯 했다. 티슈 상자나 메뉴판은 손수 리폼한 것이었다.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문 옆의 커플석을 포함해 테이블은 총 여섯 개였다. 창문에 달린 우드브라인드가 조명을 반사시켜 내부의 분위기를 더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시멘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페인트칠과 머리 위쪽에 붙어있는 나무 수납장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수십 가지의 책들이 꽂혀있었지만 인테리어를 위한 인위적인 느낌만 자아냈다. 나무 수납장의 밑으로는 1미터 정도의 늘어진 밧줄이 매달려 있었다. 빨랫줄처럼 늘어진 밧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집게에 매달려있었다. 가게를 찾았던 손님들의 모습과 사장이 직접 찍은 풍경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건 봐뒀다가 나중에 내 가게에도 써먹어야겠다.
커피를 볶는 장소는 손님들이 보이는 카운터 옆이었다. 평수가 크지 않은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 벽 뒤를 판 곳에는 나무 수납작이 박혀있었다. 그 위에 갖가지 차 종류들이 올라있었다. 작고 세세한 소품들 덕인지 지나가다 얼핏 보면 디자인 작업실 같기도 했다.
“가게가 멋지네요.”
“고마워요. 손님은 대게 단골들이 대부분이니 힘든일은 없을 거예요.”
“네.”
“커피 볶는 법을 안다고 하셨죠?”
“네. 기계도 있네요.”
로스팅 기계가 내 가게에 있던 것과 흡사했다. 어려워보이지는 않았다. 손글씨로 Tm인 메뉴판을 보니 파르페나 요거트 같이 손이 많이 가는 종류는 없었다. 메뉴의 종류도 한정 되 있었다. 그 점은 내 가게와도 비슷했다.
“그럼 잘 부탁할게요. 난 일이 있어서 좀 나갔다 와야 해요.”
“네?”
뜬금없는 주인의 말에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 오늘 일하기로 시작한 알바생을 어떻게 믿고 가게를 덥석 맡기려는지. ‘설계도, 미비, 불완전.’ 사장에게서 생겨난 문자를 천천히 읽었다. 아마도 주인은 건축 쪽의 인테리어 설계가 본업인 듯 했다. 창의력이 부족해서 설계도를 구상하는 사람이라면 건축 일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만 있는 건가요?”
“알바생을 두 명이나 둘 여력은 안 돼요.”
사장이 나를 보며 생성하는 문자는 나를 철썩같이 믿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저 나이까지 살면서 사기는 여러번 당했을 것 같았다.
“아 맞다. 난 서른아홉이고, 이름은 장준철이에요.”
보이는 외모에 비해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요즘 마흔은 옛날 마흔이 아니란 것을 실감했다.
“주인씨, 이름 그대로 내 대신 가게 주인처럼 열심히 해줘요.”
“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요. 메뉴판에 있는 거 어찌 만드는 지 물어보는 전화는 곤란해요, 나도 모르니까. 하하하.”
사장으로서 심각한 수준의 무책임함을 웃음으로 무마하고 있었다. 취미로 운영하는 것치고 지나치게 무심했다.
“네, 다녀오세요.”
“가게 끝날 때까지 못 올 수도 있으니까 금고 안에 열쇠 있어요, 8시 되면 그걸로 잠그고 퇴근하세요.”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대답을 건넸다. 주인은 한시가 급한지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에 홀로 남자 잠시 사장 때문에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일단 로스팅 기계의 전원을 켰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 전 알바생이 갈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원두가루는 봉지가 벌어진 채 향이 다 빠져나가 있었다. 아깝지만 저건 버려야 했다. 라떼를 만들 수 있는 스팀기계는 인터넷에서 봤던 최신형이었다. 에스프레소머신 상단에는 포스트잇이 죽 붙여져 있었다. 여러 종류의 커피 레시피였다. 그 전 알바생이 허당은 아니었나보다. 가게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독한 문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남겨둔 문자들이 나무 수납장에 꽂힌 책에 달라붙어있었다. 내게 소멸될까 두려워 책 속으로 들어가려 와글와글 대는 녀석들이 꽤나 귀여웠다.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면 훌륭한 인테리어가 될 텐데 그 점은 조금 아쉬웠다.
로스팅을 마친 원두를 분쇄기에 넣고 갈았다. 3초 간격으로 흔들어주고 일정한 굵기로 분쇄된 것을 확인하곤 전원을 껐다. 뚜껑을 열자 원두에서부터 진한 향기가 풍겼다. 이 향기를 느끼려고 전에도 매번 커피 가는 걸 즐기곤 했었다. 원두 가루를 모아서 밀봉하는데 가게의 문이 열렸다. 원색의 삼각형 패턴이 빼곡하게 박힌 백팩을 맨 남자가 시원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남자는 내 머리 위의 달린 우드 메뉴판을 살폈다.
“어서 오세요.”
“어? 알바 바뀌었어요?”
“네.”
사실 내가 서비스업에 아주 잘 맞는 건 아니었다. 손님 응대로 따지면 마이너스 점수를 줘야 될 알바생일 테니까. ‘젊네.’ 남자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그 쪽도 내 또래의 대학생 같은데….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남자가 의문을 띄웠다.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주세요. 테이크아웃으로.”
나도 머리를 번쩍 들어 아메리카노의 가격을 확인했다. 3천8백 원. 현실적인 가격이었다. 천 원짜리와 동전을 적절히 섞어서 낸 남자가 아이보리 색의 등받이가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새로 갈은 원두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서 내주었다. 나도 한 잔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향이 깊었다. 남자는 지체하는 일 없이 테이크아웃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가게를 나갔다. 실질적으로 가게 안에서 커피를 마시는 손님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을 타 청소를 하고 가게에 익숙해지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쯤이면 사장에게서 전화가 와야 하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한가하게 앉아 있는데 사장의 나이쯤 될 법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평범한 테이크아웃점 치고 유독 남자손님들이 많은 가게였다.
“알바가 바뀌었습니까?”
손님들의 관심사가 알바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전 알바가 얼마나 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노력파였다는 건 내심 인정했다. 저기 무수하게 붙어있는 포스트잇이 그걸 증명하고도 남았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메리카노로 한 잔. 마시고 갈 겁니다.”
게다가 손님들이 주문하는 음료 역시 당연하다는 듯 아메리카노로 한정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해서 머리 위의 메뉴판을 올려봤다. 아메리카노를 제외하고 라떼나 에스프레소의 가격이 9천 원대였다. 당황스러웠다. 이건 완전히 아메리카노를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주문하지 말라는 소리 아닌가.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사장과 상의하기로 하고 자리에 앉은 손님이 마실 커피를 만들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받으러 온 손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익숙하네요.”
“네?”
“아니, 친숙한 느낌이라…….”
혹시 전에 시골의 카페를 찾았던 손님? 일 리가 없었다. 타지 사람은 워낙 드물기에 전부 기억한다. 남자의 머리위로 ‘정연재’ 가 떠올랐다. 그걸 빤히 쳐다봤다. 일렁이는 문자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문자를 피해 발을 뒤로 하자 쾅하고 벽에 부딪혔다. 남자가 고개를 틀어서 나를 봤다. 나는 문자를 보던 것을 멈추고 남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왜 그러시죠?”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싱겁군요.”
커피를 홀짝이는 남자가 서류가방에서 종이들을 꺼냈다. 나는 주방을 정리하며 남자가 의식하지 못하도록 힐끔힐끔 쳐다봤다. 서류를 보는 남자에게서 그와 관련한 문자들이 나왔다. ‘짜증, Rj, 성가심.’ 무언가 남자가 하는 일이 굉장히 권태로워보였다. 문자가 전부 힘없이 쳐져서 의욕조차 없어보였다. 내부의 손님이 훤히 보이도록 마련된 다리가 긴 원형 의자에 앉아 할 일도 없이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따금씩 남자에게서 나오는 문자만 살펴볼 뿐이었다. 두께가 손 한마디쯤 되는 서류를 훑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전보다 맛이 더 좋네요.”
“감사합니다.”
머그컵을 내게 내민 남자가 가게를 나섰다. 횡단보도에 서서 사람들 틈사이로 사라지는 남자를 끝까지 응시했지만 그에게서 생성되는 문자는 더 이상 없었다. 다시 손님이 뜸하다 여섯시쯤 되자 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루에 손님이 서른 명도 채 안됐다. 이래서야 시골의 내 카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달 월세나 나올지 모르겠다.
여덟시가 되자 내부에 협소하게 자리하고 있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매장의 바닥을 쓸고 닦았다. 마지막으로 금고를 정리하며 돈을 셌다. 십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동전을 넣어두는 통 바로 옆에 열쇠가 놓여있었다. 문을 닫기 전 사장에게 전화를 했는데, 소리샘으로 연결될 때까지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열쇠를 들고 나와 가게 문단속을 했다. 열쇠구멍이 문 꼭대기에 달려있어서 까치발을 서야했다. 셔터문은 없었고 도난방지 업체의 보안시스템 기계만 깜박거렸다. 유리문에 얼굴을 바싹 대고 가게 내부를 확인했다. 불이 전부 꺼져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꺼림칙한 마음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적은 시급이었지만, 받는 게 왠지 미안해질 정도였다.
집 앞을 비추는 가로등 밑에 두 남자가 서있었다. 금발 머리의 남자는 대형견처럼 발발 떨고 있었고, 또 하나는 담배를 물고 나른한 자세로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이주율?, 유진?”
이름을 부르자 두 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진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왔다. 이주율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불에 타고 있던 머리 부분이 반으로 쪼개지며 날아갔다.
“왜 이렇게 늦어! 어디 갔다 오는데?”
“오늘부터 일 한다고 말했잖아. 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이주율이 내 뒤에 바싹 붙어서 궁시렁 댔다. 이주율이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각은 보통 아침 10시 즈음이기에 녀석은 그새 열쇠를 안 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들었다. 당당하게 초인종을 눌러 내가 열어주기를 바랐다. 오늘처럼 예외적으로 일찍 오는 날은 나를 안달복달 괴롭히기 마련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주자 이주율과 유진이 나보다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덕에 보일러를 돌려놓고 나가서인지 집안이 훈훈했다. 손도 씻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은 이주율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 일하는데?”
“저 도로변의 그루터기라는 커피숍.”
“왜 남 밑에서 일해. 커피숍 하나 차려줘?”
이주율이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버릇처럼 틀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었다.
“돈이 남아돌아?”
“너 줄 돈은 남아돌아.”
“됐어. 나중에 다시 카페로 내려갈 거야.”
“그 촌구석?”
“서울보다 한적하고 좋지 뭐.”
이주율이 쾅하고 테이블을 발로 찼다. ‘못가, 시발.’ 툭툭 튀어나온 이주율의 문자들을 없애버렸다. 저 성격 얼마나 죽이고 사는 지 궁금했다. 고작 한 달도 못 가다니. 테이블을 삐뚤어지게 만든 이주율에게 지시를 내렸다.
“원위치 시켜놔.”
이주율이 발을 뻗어 밀려나간 테이블을 제 자리로 가져다놓았다. 발로 휙휙 거리는 게 참 건방졌다. 유진은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아 낄낄댔다. 이주율이 노려보자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간 이주율 성격을 파악한 유진다웠다.
“카지노 또 운영정지야?”
“여태 운영정지 걸린 적 없거든.”
“그게 그거지.”
테이블 위치가 전 같지 않아서 결국 내 손으로 직접 열을 맞춰야 했다.
“노친네들 모임 있다고 카지노 일반인들 출입시키지 말라네? 그럼 있을 필요 없으니 왔지.”
“노친네들?”
“있어, 윗대가리들.”
유진이 이주율에게서 리모컨을 뺏었다. 유진은 콩알 굴리듯 정신없게 채널을 돌렸다.
“상사들 있으면 더 늦게 퇴근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왜? 카지노 오는 새끼들 중에 사기 치는 놈들 잡는 일만 하면 되는데?”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의외로 문자들을 읽기 쉽게 휙휙 내뱉으니 이주율이나 내게 걸리기 십상이었다. 거짓말을 할수록 진실을 담은 문자가 더 잘 생성되는 이유랑 비슷했다. 사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게 속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그러니 입으로 나오진 않아도 진실이 문자로 형상화 되는 것이었다. 반대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누는 대화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문자가 생성되지 않는다. 대화는 순간순간 찰나의 판단으로 이어나가는 단편적이고 스피드한 인간의 행위다. 지극히 평범한 대화들을 속으로 곱씹어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 눈에 보이는 문자는, 대게 사람들이 실제로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진심이라고 보면 정확했다.
“사기 치는 놈들이 많아?”
콩알 돌리듯 채널을 바꾸던 유진이 미국 방송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물었다. 유진처럼 금색 머리의 아나운서가 쌀라쌀라 대는 미군 방송은 0.1할도 못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많으니까 내가 먹고 살겠지?”
이주율이 유진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나처럼 못 읽어내는 사람도 있다며.”
“그럼 할 수 없는 거고. 사기 치는 새끼들은 대게 자아가 강한 경우가 없어. 그 새끼들은 일반인보다 자의식이 더 약해. 하긴 그러니 거짓인생을 꾸며 사기 치고 살겠지만.”
말을 끝낸 이주율이 냉장고에 다녀오며 빨대 꽂은 베지밀을 마셨다.
“존나 고소하네.”
녀석이 먹던 베지밀을 내게도 내밀었다. 고개를 저었다. 유진이 기대하는 눈으로 이주율을 쳐다봤다. 이주율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이거나 처먹어 라며 화답했다. 유진이 꼬리를 말고 리모컨을 갉작거렸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동안 유진을 지켜봐온 결과, 우리 형제를 대하는 녀석의 행동에는 차등이 없었다. 유진은 이주율에게도 내게도 가볍고 장난기가 많은 모습 그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이주율이 유진의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아슬아슬한 관계도 이룩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애널섹스를 남발하는 첫인상을 심어 줬을 테니.
“태형 형은 아무 일 없지?”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미군 방송에 집중하던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어. 나도 그 날 이후론 안 만났으니까.”
“그럼 넌 평소에 뭐하고 돌아다니기에 그렇게 바빠?”
유진이 집에 있는 시간은 이주율과 비슷했다. 이주율이 베지밀에 힘을 주자 빨대 밖으로 내용물이 역류했다. 사래가 들려 콜록콜록 거리는 녀석에게 티슈 한 장을 내밀었다.
“안 뺏어먹으니까 천천히 좀 먹어라.”
“아, 시발. 컥. 저 양키 새끼 뭐하고 다니는 지. 콜록, 뭐가 궁금해!”
이주율이 잔뜩 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기침을 하던지, 말을 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해.”
녀석을 등을 탁탁 두드렸다. 남에게 관심 좀 비출라치면 이 사단이 나니 저걸 어떻게 고쳐줘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부모가 막내에게만 관심을 쏟자 토라진 첫째의 전형적인 행동 같았다. 당연히 유진보다는 이주율이 더 소중한 상대인데도 녀석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주율이 다시 베지밀을 마시며 웃었다. 아마도 내게서 생겨난 문자를 보고 저렇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목을 꺾어 문자를 올려봤다. ‘이주율, 관심, 아이’ 저 조합을 어떻게 결론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손바닥으로 짝짝 쳐서 글자를 없앴다.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던 대형견이 경기를 일으켰다.
“깜짝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데 놀래?”
유심히 봐도 유진에게서 나오는 문자는 없었다.
“지금 심각하잖아. 리비아 내전 뉴스 보는데.”
뉴스 진행이 영어로 쏟아지니 리비아 내전인지 알 턱이 없었다.
“꼴에 국제사회에 관심이 있나보지?”
이주율이 틱틱거렸다.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따라 내가 바빠지거든.”
이주율이 빨대를 씹으며 유진을 내리깔았다.
“씨발, 무슨 지가 마하트마 간디야? 세계평화를 외치게.”
“세계평화 외친 적은 없거든. 전쟁이 나던 지진이 나던 나와 뭔 상관이야.”
“근데 뭐가 바빠져?”
“그런 게 있어.”
‘chaos, gain’ 혼돈에서 얻을 게 있다? 유진에게서 생겨난 문자를 보는데 녀석의 파란 눈과 딱 마주쳤다. 풍랑을 만나 난파된 뱃사람처럼 차가운 바다에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유진이 검지를 올려 입술 위에 댔다.
“치사해. 형은 못 만지게 하면서, 내 생각을 읽으면 나만 손해잖아.”
유진은 허공을 맴돌았던 내 시선 때문에 녀석의 생각을 읽었다고 확신을 얻은 듯 했다.
“보이는 걸 어째. 눈을 감고 다닐 수도 없고.”
“그건 그래.”
유진이 다시 뉴스에 집중했다. 이주율은 뒤늦게 씻으러 들어갔고,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익숙해진 하루 일과처럼 묵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십초 정도 전화벨이 울리고 끊어졌다. 이럴 때면 바로 묵야에게 전화가 오곤 했다. 이렇게.
“여보세요.”
“문자해, 그럼 내가 전화할 테니.”
“전화비 걱정 때문이라면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묵야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화제를 전환했다.
“일은 잘 다녀왔어?”
“네, 사장님 본업이 따로 있나 봐요. 가게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더라구요.”
“일하기는 편하겠군.”
“그럴 것 같아요. 묵야씨는 일 끝났어요?”
“아니, 오늘은 늦을 것 같다. 집회 날이라.”
야쿠자 집회는 들어봤어도 조폭 집회는 난생 처음이었다. 묵야가 말한 집회와 이주율이 말한 노친네들의 모임은 동일한 것 같았다.
“에비스예요?”
“미친 동생이 알려주었나 보지?”
“혹시 주율이가 일하는 데서도 성질 부려요?”
“주율이라…. 나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면 안되나?”
“묵야야. 이렇게요?”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기분이 묘했다. 실수한 느낌도 들었고.
“묵야 형은 좀 아니잖아요.”
“그래, 원래 부르던 게 낫겠다.”
“네. 제가 물어본 것 아직 답 안 해주셨는데.”
“잘 몰라. 네 동생과 엮인 건 에비스 살인사건 때뿐이었으니까.”
“네.”
동생을 잘 부탁드려요. 이런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럼 우린 언제쯤이나 볼 수 있지?”
“가게 쉬는 날이 언제인지 물어보지 못했어요. 내일 확답 받고 알려드릴게요. 보통 8시에 끝나니까 그 이후로 봐도 되구요.”
“그래, 들어가 봐야 하니 이만 끊을게.”
“네, 수고하세요.”
묵야는 여유가 없는 것 같은데도 내가 먼저 전화를 끊는 것을 기다렸다. 배려하는 마음에 재빨리 끊었다. 내 대화를 엿듣고 싶어 하던 문자들이 휴대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휴대폰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따뜻해서 모인 것일 수도 있다. 휴대폰 근처를 손으로 휘휘 젓자 한 녀석만을 제외하고 다 흩어졌다. ‘기다림’ 누구의 기다림인지는 모르겠다. 휴대폰에 붙어있는 기다림을 보자니 저 글자를 생성해냈던 사람에게 기다림을 준 사람이 찾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녀석의 머리를 손으로 쿡쿡 찌르며 위로했다. 문자에게 생각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기다림은 휴대폰 위에서 자는 것처럼 얌전해졌다. 녀석의 몸이 발라당 옆으로 누웠을 때 나도 눈을 감았다. 엎드린 채로 빛을 차단했기에 형광등을 끌 필요는 없었다. 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 오랜만의 노동은 단잠을 가져왔다.
비가 그친 뒤 일주일 만에 꽃샘추위가 끝났지만 일교차는 10도 이상 났다. 낮에는 바람막이 점퍼를 손에 걸치고 갔다가 밤이 되면 입고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가게의 사장은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을 내비칠 뿐 사업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보였다. 가끔 오는 날도 손님처럼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도면을 그리다 가는 일이 전부였다. 사장 나이될 법한 일에 의욕이 없던 남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가게를 찾아왔다. 그 때마다 호감을 비추며 커피가 맛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 손님만 주를 이뤘던 커피숍에 언제부터인지 여자 손님들로 가득 차갔다. 저기 앉아 있는 남자의 효과라고 해도 좋았다. 앙드레김 선생처럼 늘 똑같은 검은 정장만 입는 남자. 호텔 객실 옷장에도 비슷한 종류의 정장이 족히 삼십 벌은 넘게 걸려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얼굴로 노트북에 열중하고 있는 묵야의 모습을 여자 손님들이 훔쳐보기 바빴다. 빈티지한 커피숍에 앉아있는 검은 정장의 남자는 어색할 법도 했지만 늘 그렇듯 외모 덕을 보니 이상한 풍경도 아니었다. 나는 묵야가 긴자에서 가져온 회를 우걱우걱 게걸스럽게 씹었다. 회가 질릴 것 같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먹어도 먹어도 더 좋아질 뿐이었다. 정말 전생에 고양이였거나 방 천장에 조기를 달아놓고 하염없이 쳐다보던 자린고비였는지도 모르겠다. 찢어진 눈에 기모노를 입고 일본 우산을 들고 있는 여자가 그려진 일회용 팩의 뚜껑을 닫았다. 회는 오늘도 한 점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생수로 입을 헹구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묵야와 눈이 마주쳤다.
“잘 먹었어요.”
“가봐야겠다.”
노트북의 시각을 확인한 묵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 쪽에 앉아있던 여자 손님들에게서 아이, 하는 탄성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며칠간은 바쁠 것 같아서 낮에 찾아오지.”
“바쁜 날은 넘어가도 되요. 만날 올 필요 없어요.”
“섭섭한 걸.”
다 자기 생각해서 배려해줬더니 섭섭하단다.
“그럼 바빠도 꼭 출근도장 찍으세요.”
“그러지.”
묵야가 이마를 덮은 내 머리카락을 휙휙 만져댔다. 언제까지고 얼굴만 보고 있을 수는 없기에 아쉬움을 달랬다. 묵야는 세단이 주차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가게에 있는 여자 손님들도 묵야가 떠나는 길을 유심히 지켜봤다. 여자 손님 중 하나가 카운터로 다가와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사장에게 말해 메뉴의 가격을 전부 4~5천 원대로 통일 시켰다. 우유를 데우고 있는데 여자 손님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앞에서 서성댔다. ‘미남자.’ 여자는 내게 묵야에 대해 묻고 싶어 했지만 결국 라떼를 다 만들 때까지 어떤 물음도 던지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가 친구와 수다를 떠는 여자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통통한 볼이 아기처럼 귀여웠다. 때마침 손님이 안으로 들어오자 문에 매달아놨던 헬리콥터 모형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오셨네요.”
익숙한 남자가 손을 들어 내 인사를 받았다. 남자는 오늘도 일이 귀찮다는 표정이었고,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자리에 앉아 서류만 뒤적였다. 남자에게서 생성되는 문자들을 오늘까지 종합해본 결과 그는 경찰 일에 종사하는 듯 했다. 수사라든지, 탐색, 수배자가 남자의 주변에 오늘도 어김없이 떠다녔다. 멍하니 그 문자들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묵야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태형 형의 번호였다. 목구멍이 꽉 막히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형에게 전화가 올 날을 학수고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주인이니?”
태형 형의 목소리에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몇 년 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네. 형, 저 주인이에요.”
다른 손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전화를, 할까 말까 정말 많이 망설였다. 형이… 그 날 너무 흥분한 상태라…….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네 마음이 어떨지 몰라서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했어. 주인아.”
“아니에요 형, 이렇게 다시 전화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용기를 내준 형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전했다. 담배를 피는 듯 한숨 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 한숨에 안도하고 죄스러웠다.
“우리 서로 마음이 좀 풀리면 그 때 얼굴 볼까?”
“네. 저는 언제든지 괜찮아요. 형.”
“형이 아직 마음이 그래서 그래. 너도 알잖아.”
충분히 이해했다. 나와 만나면 낱낱이 자신의 마음이 읽혀질 테니 형도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도 아무리 각오를 하고 형을 만난다 하더라도 나를 보는 형에게서 저번처럼 혐오감이 섞인 문자들이 나온다면 회복되기 힘든 상처를 받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아. 일은 계속 하는 걸로 하자.”
“형을 만날 수가 없으면 불가능해요. 다른 형사 분들은 저 꺼림칙해 하시잖아요.”
솔직히 이제는 경찰 일을 돕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살다가 묵야가 은퇴하면 같이 시골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형이 나를 다시 찾아준 기쁨에 거절의 말을 내뱉기란 쉽지 않았다.
“유진한테 말해둘게. 그러면 될 거야.”
“……네.”
이번에도 거절하면 형과의 인연이 영원히 끊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형, 저 정말 형한테 거짓말 안했어요. 그 사람은 못 읽어요.”
“그래, 형도 믿어.”
“네.”
“또 전화할게. 장희 곧 출산할 때 됐어. 그 때 꼭 보러와.”
“형, 좀 이르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형수님한테도 전해주세요.”
새로운 생명의 탄생만큼 축복받을 일도 드물다. 형수님이 무사히 예쁜 아이를 낳기를 바랐다. 비록 형수님이 나를 꺼려한들 그녀에게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님을 안다.
“또 연락할게.”
“네, 형. 고마워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손에 꽉 쥐었다. 서류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어설프게 웃어주자 남자가 다시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여자 손님들이 나가고 나서 남자와 나만이 가게에 남았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냉장고의 모터 소리만 카페를 울렸다.
“형사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보죠?”
서류를 손바닥으로 내리 누른 남자가 내게 물었다.
“아, 네. 조금요.”
“신기하네요, 나도 형사인데.”
“그러세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는 시늉을 취했다. ‘의외성’ 남자에게서 튀어나온 글자였다.
“외사경찰이죠.”
남자는 외국인 범죄를 담당하는 경찰이었다. 인터폴에 소속되어있음에도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외사경찰의 수가 현저히 적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외사경찰 분은 처음 뵙네요. 이주인이라고 합니다.”
분위기상 통성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자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표정을 밝게 폈다. 문자화 되어 나오는 생각은 없었다.
“토마스라고 합니다.”
“네… 네?”
“제 이름이죠. 하하.”
“네, 토마스씨.”
어린이들 보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토마스 기차아저씨가 생각났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토마스 아저씨예요. 하면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유아 프로그램. 오히려 토마스라는 이름은 유진이 가져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 유진이라는 이름은 미국에서도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외국인 이름이라기보다는 좀 더 한국적이었다.
“자주 허공을 보고 있던데 뭐라도 보입니까?”
순간 남자의 예리한 지적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남자에게서 ‘귀신?’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먼지에 민감해서요. 먼지가 날아다니는 걸 보면 자꾸 따라가게 되네요.”
묵야가 할 법한 대답을 내뱉었다. 먼지에 민감한 건 내가 아니라 묵야였다.
“그렇군요. 요새 큰 일이 많죠? 마약 사건이 곳곳에서 터져서. 토막도 나고 지하에서 몰살당하기도 하구요. 하하.”
“네, 그러게요.”
자세히는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지금이 마약류 투약자 특별자수기간인 거 아십니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약류 투약자에는 나도 해당됐다. K3를 먹은 지 한 달이 조금 안됐으니 모발검사를 하면 양성반응이 나올 확률 100프로였다. 토마스가 나를 지목해 던진 말은 아닐 텐데도 왠지 모르게 뜨끔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수를 해서 놀랐습니다. 장난삼아 한두 번 한 건 뭐 상관없겠지만.”
“그, 그렇겠죠.”
내게서 피어오른 ‘k3, 복용’ 이 두 단어를 머리를 넘기는 척 손 안에 움켜쥐었다. 짝 소리가 들리지 않게 녀석들을 없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글자가 소멸됨과 동시에 남자가 진하게 웃었다. 유진에게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뜻 모를 웃음이었다.
‘보이지?’
덜컹하며 의자를 쳐냈다. 떨어진 간을 다시 올려야했다. 앉은 채로 내게 대화를 건네던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내게로 다가왔다. ‘보이지?’ 음산하게 일렁거리는 문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문자가 위협적으로 느껴진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것을 손으로 쳐내고 토마스를 노려봤다. 카운터 바로 앞까지 다가온 토마스가 그 단어를 움켜쥐어 으스러뜨렸다.
방금 남자의 손에서 없어진 문자는 시간이 흘러서 자체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저 남자의 의지로 없어진 것이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 형제들과 같은 사람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산산조각 났다. 이주율은 문자를 소멸시킬 수 없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나처럼 문자를 소멸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인사해야겠는 걸. 이주인.”
“누구십니까?”
딱딱한 목소리로 남자를 경계했다.
“동생이 이주율? 그런 이름이었지?”
남자가 나를 처음 만난 날 생성했던 문자를 떠올렸다. 정연재.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반갑다. 한국 이름은 이성일이다. 네 삼촌 되는 사람이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이성일, 우리 가족을 나락으로 빠뜨렸던 세 글자. 어머니가 한없이 그리워하던 그 이름. 나는 남자의 진실을 가늠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떤 단어를 만들어줄까? 어떤 문자를 생성해줘야 네가 믿을까?”
남자는 느릿한 말투를 던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남자에게서 어떤 문자도 생겨나지 않았다. 문자가 전부 차단된 것만 같은 현상이었다.
“주인아, 혹시 마약해?”
언제부터 알았다고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을 삼촌이라 소개한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내 머리 위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제희, 아니 네 아버지 동생이야. 친동생. 하긴, 너를 세살 때보고 못 봤으니 기억하진 못하겠지.”
“아버지에게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렇겠지.”
남자는 커피를 마시며 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식은 커피는 맛이 없네. 그리고 마약은 하지 마. 특히 K3는.”
“안 합니다.”
“에이, 왜 거짓말을 해. 형은 어떻게 지내? 아직도 고지식한 채일 테지?”
“돌아가셨습니다.”
남자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조금의 동요가 비쳤다. 진실을 확인하려 내 문자들을 바라보려 했지만, 나 역시 아무런 문자도 생성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저 남자처럼 문자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었다. 문자의 방출을 막기 위해 생각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신경 써야 한다는 게 까다로울 뿐이었다.
“너, 진짜 나랑 닮았는데? 얼굴은 연재랑 닮았고. 혹시 네 동생도 너와 같은가?”
답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는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그렇겠지. 형은 어떻게 죽었어?”
“부모님과 동생이 함께 차 사고를 당해서, 두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동생은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구요. 아니 사실 사고인지 고의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왜 그렇게 나한테 적대적이야?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남자는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남자에게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이성일씨 형도, 아니 내 아버지도 같은 능력자였습니까?”
“음……. 그렇지. 능력은 있었는데 그렇게 훌륭하진 않았어. 10할의 문자가 있다면 6할 정도 읽는 수준이었지.”
몸이 휘청하지 않기 위해 뒤의 싱크대를 단단히 잡았다. 그동안 추측해왔던, 인정하기 싫었던 부분이 전부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우리들의 문자를 읽으면서도 우리를 그렇게 학대할 수 있었던 건가? 사람이 사람으로서 아니 천륜을 타고난 부모로서 어찌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지?
“너… 제희에게 학대 받았었어?”
나만큼이나 놀란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틈을 타 내게서 문자가 흘러내렸다. 내가 학대당했던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미안, 그런 줄은 몰랐다.”
반성하는 남자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제희 그 새끼, 끝까지 쓰레기 짓을 했구만.”
이주율처럼 자신의 형을 이름으로만 부르는 남자가 이를 갈았다.
“아버지가…… 정말 읽으셨다구요. 그거 거짓 아니죠?”
“그럼 넌 여태까지 제희가 문자를 읽을 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끝끝내 용서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은 이미 어머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성일이라는 이름이 이주율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을 뱉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우리 형제들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인지…. 이주율이 저렇게 된 건 전부 아버지, 아니 인간도 못되는 이제희 탓이었다.
“일찍 알았다면 먼저 찾았을 텐데 정말 미안하다. 난 내가 떠나있는 게 최선일 줄로만 알았지.”
“뭡니까. 당신들, 뭔데…….”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을 것이다. 분노에 뒤섞인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야했다.
“일 몇 시에 끝나? 끝날 때까지 기다리마.”
주먹을 쥐고 입을 틀어막았다. 숨을 참으며 마음을 삭혔다. 쉽게 조절되지 않는 감정임에도 그래야했다. 나는 가게에 고용된 사람이었고, 이 가게에 어떠한 해를 끼쳐서도 안됐다. 냉정한 판단이 언성을 높이고 싶은 내 욕구를 잠재웠다. 결국 시간은 내가 잡아도 흘러간다. 3시간만 더 있으면 퇴근시간이었다. 그 때까지만 참자. 그 몇 십 년도 매서운 학대 속에서 참아왔는데 이까짓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향현문자 35
남자는 가게를 나가는 일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오후 5시가 되자 출근을 하는 이주율이 지나가는 길이라면서 가게를 들렀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들어서는 녀석이 내 얼굴을 보더니 왈칵 인상을 썼다.
“이주인, 얼굴이 왜 그 따위야.”
“내 얼굴 원래 이래.”
녀석이 휴대폰 메인이 있는 내 사진을 휙 들이밀었다.
“이 얼굴하고 다를 바가 없잖아. 존나 못생겼어 지금.”
“원래 이렇다니까!”
짜증을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실없는 소리만 해대는 이주율에게 성이 났다.
“왜 화를 내?”
“커피 만들어줘?”
“응.”
이주율이 이성일의 옆 테이블에 앉아 나를 구경했다. 이성일의 시선이 느껴지는지 뭘 봐 라며 협박조의 말을 내뱉었다. 이성일은 이거 참…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져가.”
이주율이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꺼냈다. 녀석이 거스름돈을 주는 내 손을 꽉 쥐었다.
“손이 차갑다. 이주인, 너 어디 안 좋으면 꼭 이렇잖아.”
“괜찮아.”
“힘들면 조퇴해.”
“괜찮다니까, 너나 잘 다녀와.”
미련이 남는 이주율이 걸음을 멈췄다 다시 걸었다 하며 나를 돌아봤다. 여자 손님들이 있었으면 또 시선을 끌었을 테지만 가게 안은 남자 손님뿐이었다.
“간다, 늦지 말고 바로 집에 들어가.”
“알았어.”
나가는 이주율과 들어오는 남자손님이 어깨를 툭 부딪쳤다. 이주율이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성질을 부렸다. 어깨를 부딪친 남자도 질 생각이 없는지 이주율을 빤히 노려봤다. 제법 생긴 얼굴 가진 두 남자의 공간에 팽팽한 신경전이 흘렀다. 곧 싸움이라도 날 모양새에 서둘러 들어온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주율 너 지각이야, 빨리 나가.”
이주율과 손님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주율?’ 손님에게서 오렌지색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이주율과 아는 사이인가? 남자 손님이 꽤나 놀란 눈치였다. 이주율도 내가 일하는 곳에서 싸울 생각은 없는지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며 밖으로 나갔다. 이주율은 견인지역에 함부로 세워뒀던 차로 향했다. 한참이나 출발하지 않던 차가 기어코 바퀴를 움직였다. 이주율과 기싸움을 벌였던 손님이 카운터 테이블을 툭툭 쳤다. 화들짝 정신이 돌아와 남자를 향해 애써 웃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은 적당히 넣어주시죠.”
남자는 아무리 많이 봐줘야 대학 초년생 정도로만 보였다. 정확한 나이를 가늠한다면 고등학교 2~3학년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변성기 때 목을 많이 혹사했는지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만들어진 아이스커피를 받아든 남자가 얼음을 오독오독 씹었다.
‘20장.’
불현 듯 나타난 문자가 내 몸을 한 바퀴 훑고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20장? 내 커피에 대한 값어치인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모아두었던 머그컵들을 세척했다. 그 사이 남자는 가게 유리문에 달린 헬리콥터를 손으로 툭 친 후 홀연히 사라졌다.
수많은 손님들이 지나가며 하루가 흘러갔지만, 이성일이 있는 공간만 시간이 멈춘 듯해 보였다. 나는 가게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말을 건네려 노력하는 일은 없었다. 8시가 되자마자 가게 문을 닫고 나왔다. 들끓었던 감정은 차가운 수면 저 아래 감춰져있었다.
“어디로 갈까?”
“집으로 가죠.”
밖에서 나눌만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내 뒤를 그가 따라왔다. 편의점에 들러 이주율이 먹을 베지밀과 유진이 좋아하는 소주를 구입했다. 이성일은 담배 한 갑을 구입하고 나를 바로 뒤따랐다. 집을 올려다보는 이성일이 착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이 집에 살아?”
“이사한 적이 없으니 그렇겠죠.”
“어? 저거 네 거야?”
이성일은 마당 안의 바이크를 보더니 관심을 가졌다.
“네.”
“취미가 좋네.”
“그런가요.”
남자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냉장고에 사온 것들을 넣고 소파에 앉았다. 이성일이 담배를 물었다.
“집 안은 금연이에요.”
“아, 그래 미안.”
나는 유진이 사용하고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다짜고짜 문을 활짝 열어 남자에게 내부를 보여주었다. 지긋지긋하게 방 안을 장식한 수많고 똑같은 단어들. ‘이성일.’ 침대며 바닥이며 할 것 없이 안방을 점령한 부모의 흔적. 내 뒤에 붙어선 이성일이 손을 올려 벌린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에 비해 심하게 주름진 손이 남자의 나이를 가늠케 했다.
“없애지 않았어요. 내가 힘들여 없앨 필요가 없겠더라구요. 안 보면 그만이니까요.”
안방 가득 쌓여있던 ‘이성일’이라는 문자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가야 하는 곳으로 이동한다. 지금 저 문자들이 원하는 상대는 진짜 이성일이었다. 삽시간에 남자를 향해 덮칠 듯 달려드는 문자들은 입을 쩍 벌린 악귀와도 같았다. 소름이 끼쳤다. 수백, 아니 수천의 같은 문자들이 남자에게 덤벼들기 전에 안방 문을 닫았다. 남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이, 이게 다 뭐냐?”
“뭐긴요. 어머니가 만들어낸 문자죠. 아버지 저 속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는 걸 반복했고요.”
가죽 소파는 오늘따라 차가웠다. 등이 시렸다. 어찌나 싸늘한지 골프채에 등뼈를 맞은 다음날처럼 시큰거렸다.
“정연재… 미쳤구나.”
이성일은 이미 없는 사람을 불렀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무는 남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당까지 나갔던 남자가 다시 들어온 시간은 담배 한 대를 피울 수 있는 것보다 길었다. 남자는 내 옆에 앉았다. 쿠션이 내려가며 남자 쪽으로 기우는 몸을 고쳐 세웠다.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분노도 노여움도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내 부모는 이미 죽었다.
“어디부터… 어디부터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인아.”
이성일은 두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이성일씨. 우리 어머니와는 무슨 관계였어요?”
대체 당신이 뭔데 저런 지긋지긋한 문자들을 어머니에게로 하여금 만들어 내게 했어요? 이성일은 잿더미에 숨겨진 살아남은 불씨였다. 우리 가족의 행복함을 깨뜨렸던 숨겨진 불씨. 내 옆에 앉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과 장작을 준 건 내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그 불을 끌 수 있음에도 방치했다.
“연재는… 한 때 내 연인이었어.”
쿵, 심장이 떨어졌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라고 부정했던 사실들을 직접 듣자 예상보다 타격이 컸다.
“제희는 내 형이었고.”
이성일은 잘못된 인연을 더듬고 있었다. 틀어진 만남을 떠올리고자 하는 남자는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후회’를 내비쳤다.
“대학 동기였어. 연재도 나도. 제희는 우리들의 선배이기도 했고. 제희와… 아니 형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능력을 타고 났었지. 형보단 내가 더 뛰어났지만…. 형이 내 연인이었던 연재에게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어. 살아오면서 그만큼 순수한 문자를 내뱉는 사람은 없었거든. 그녀는 늘 솔직했고, 당당했지. 나도 연재를 좋아하긴 했지만 형만큼은 아니었어. 연재와 헤어지고 나서도 연재는 언제나 나를 사랑했고… 나는… 언제나 형을 사랑했지.”
나는 문득 남자에게서 이주율을 봤다. 우리는 서로를 알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실낱같은 믿음만 깨진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를 혐오하지 않았다. 남자를 혐오하게 되면 이주율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제희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어. 내 마음을 알면서도 내버려뒀거든. 받아주지도 밀어내지도 않았지. 연재는 나와 헤어지고 나서 제희의 마음을 이용했어. 결국 연재는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해 제희와 결혼했고….”
“저와 이주율은 아버지 자식이 맞는 건가요?”
“맞아. 연재와 관계를 가진 건 처음 사귈 무렵뿐이었어. 둘이 결혼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였고”
“저는… 까맣게 몰랐네요. 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할 때 나는 그 사람 자식이 아닌 줄로만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떠나는 게 아니었어.”
이성일은 형을 사랑했다. 그는 단순한 집착이 아니었다. 사랑해서 홀로 그 마음을 안고 형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강인한 마음을 지닌 자였다. 나는 이제희의 아들이 맞았다. 그는 자신의 친아들들을 부인 앞에서 보란 듯이 괴롭혔다. 그 이유는 여전히 이해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주율이도 나에 대해서 모르겠구나.”
“말하지 마세요. 녀석에게 어떤 것도.”
나는 이주율의 잘못된 집착을 바로 잡아줘야 했다. 이주율은 마음속에 슬픔을 숨기고 있는 이 남자처럼 강인하진 못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 당신이 동생의 마음을 방치했던 것처럼은 하지 않는다. 키만 유전인 줄 알았더니 마음까지도 대물림 됐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강하구나. 다행이다.”
“그렇지 않아요.”
“제희에게서 난 녀석 같지 않아.”
“닮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죠.”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웃었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네.”
필요한 일이 있을 턱이 없다. 남자는 현관으로 나가지 않고 닫힌 안방으로 향했다.
“잠시만.”
안방으로 문을 닫고 들어간 남자는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목이라도 매다는 게 아닌가 걱정됐지만, 안방에는 사람의 몸을 달만한 기둥이 없었다. 이주율이 거실 커튼을 활짝 열어놓고 나가 창문 밖이 훤히 보였다. 가로등의 불이 깜빡거리며 들어왔다. 묵야가 보고 싶었다. 내 시린 몸을 달래줄 사람은 그 뿐이었다.
“다 됐다. 이만 나가볼게.”
안방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곧 쓰러질 사람처럼 창백해보였다. 열린 안방 안은 묵야의 객실처럼 문자하나 남지 않았다. 그 많은 수의, 그리고 남자를 향했던 독기의 문자를 전부 소멸시킨 남자가 쓰러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남자가 얼마나 큰 손상을 입었을지 짐작됐다.
“그러지 않으셔도 됐어요.”
“아니, 내가 해야지. 주인아, 문자를 너무 맹신하지 마. 우린 단편적인 마음의 한 가닥만 읽을 수 있을 뿐이야. 그건 개개인에게서 선별적으로 나오는 생각이지. 문자를 토대로 읽는다고 한들 얼마든지 각색될 수 있다는 소리야.”
지친 듯 소파에 앉은 남자가 얼굴을 가죽에 댔다. 삼십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던 얼굴이 일순간에 쉰 살은 넘은 것처럼 세월이 느껴졌다.
“향현사…. 그게 우리를 부르는 용어지.”
“네?”
“향현사들은 사이코메트러보다 훨씬 드물거든. 우린 snare로 불리기도 해.”
새로운 지식은 늘 그렇듯 놀라움을 불러온다.
“snare. 한국말로 향현이란 뜻을 가졌어. 죽은 지 수십 년은 됐지만 아직도 유능한 영국 수사관으로 알려진 한 남자가 있어. 그 남자도 우리와 같이 문자를 읽을 수 있었지. 그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snare라 불렀어. snare는 향현이라는 뜻과 더불어 덫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덫은 올가미라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지. 우리 눈에 보이는 문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울리는 향현줄이 아닌 덫이라는 소리야. 문자가 우리에게 덫을 까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건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나요?”
“아니, 많지 않아. 한국엔 내가 알기론 우리들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수사관이 우리를 부르는 명칭을 괜히 덫이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수사관은 결국 미쳐서 죽었거든.”
미칠 것이었으면 진즉에 정신병원을 향했다. 이성일이 테이블 위의 명함을 내려 봤다.
“연락 줬으면 좋겠다. 주인아.”
“생각해볼게요.”
지금 와서 새로운 친척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사이좋게 친지의 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돌고 돌아서 결국엔 원점으로 오는 게 사람 같다. 다시는 발도 붙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참 무섭지.”
이성일은 내 부모가 죽은지도 모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내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 마냥 그도 귀로를 했지만, 여기에 그가 사랑한 형은 없었다. 아마 내 아버지가 살아있다 한들 이성일이 기억하는 남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죽었으니 영원히 못 잊겠군. 죽은 사람을 어찌 이길까….”
이성일이 울고 있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대문 앞에선 그의 어깨가 더럽혀진 창문을 통해 보였다. 그의 슬픔이 전염될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참을 수 없어 묵야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금 당장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주인, 무슨 일 있어?”
내 이름을 부르는 묵야의 목소리에 울컥한 감정이 솟았다. 그가 바쁘다고 미리 이야기한 날에는 전화 한 번 한 적 없었다. 묵야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나만큼이나 내 상황을 잘 헤아렸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지금 어디야?”
“집이죠.”
“기다려.”
처음으로 묵야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인가? 묵야가 많이 바쁜가 싶어 소파에 덜렁 누웠다. 열어둔 안방에서는 이제 아무런 문자도 보이지 않았다. 익숙했던 글자가 사라지니 속 시원한 마음보다 허전함이 몰려들었다. 이제 부모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혼자 있기 싫은 날은 유독 혼자인 상황이 생긴다. 고독을 즐기라며 부채질이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