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로부터 한 일주일 정도는 감기몸살까지 겹쳐 생고생을 해야 했다. 유진은 왔다갔다 거리며 약을 사다주었고, 이주율은 뛰어나간 이후로 간간히 문자를 할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나러 오겠다는 묵야의 연락도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회피했다. 만두 두 개를 물었던 뺨은 붓기가 가시고 검붉은 멍자국만 남았다. 흉이 오래갈만한 멍은 아니었다. 이주율의 주먹이 맵긴 해도 내 맷집이 더 좋은 것 같다. 이주율에게 부은 얼굴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녀석이 전화로 다음에도 내게 손찌검을 하면 자기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했다. 그 때는 내 몸 가누기도 힘든 찰나에 공격을 당해 변변한 저항을 못했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죽기 살기로 녀석을 패 줄 의향이 가득했다. 형의 위엄을 폭력으로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덕분에 묵야는 우리 집 앞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야 하는 불상사를 하나, 둘, 셋… 족히 다섯 번은 겪었다. 손가락을 접어 횟수를 세자 생각한 것보다 많았다. 집에 있는 일주일 동안 한 것이라곤 대청소와 가게에서 가져왔던 원두를 볶는 일 뿐이었다. 프라이팬을 이용해 원두를 볶으니 거의 삼분의 일은 타버려서 방향제와 재떨이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조금 전 도착한 묵야의 문자를 보고 오늘은 그를 만나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었다. 사귀는 자고 말해놓고선 일주일이나 만남을 피하니 묵야 쪽에선 뭔가 오해를 한 듯 했다.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말해ㅠㅠ]
이모티콘 공격에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또 누군가가 대신 써준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괜히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말을 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태형 형은 팀을 구성하는데 애를 먹는지 연락이 전혀 없었다.
“이주인?”
딱딱한 전화 연결음이 얼마가지 않아 묵야가 전화를 받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가슴아래가 뜨끈해졌다.
“네.”
“보고 싶다.”
절절한 목소리는 아니었음에도 그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몸이 안 좋았어요. 감기가 호되게 걸려서 옮을까봐…….”
그동안 만날 수 없었던 사연을 구구절절이 얘기하려했지만 몸살이라는 것 외에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
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 묵야가 내 말을 잘라주었다.
“다 나았어요.”
“그럼 오늘 저녁에 데이트할까?”
“하하하.”
웃음을 참지 못하고 뿜었다. 무뚝뚝한 남자와 달콤한 데이트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왜 웃지?”
“아하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웃음을 갈무리 하면서 연신 킥킥댔다.
“일은 몇 시에 끝나요?”
“네가 원할 때.”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정확히 끝나는 시간이 언제인지 말해주세요, 시간 맞춰서 준비할 테니.”
“7시쯤이 어때?”
“그러죠. 어디서 뵐까요?”
“집 앞으로 갈게.”
“네. 전화주세요.”
“그래.”
묵야는 여전히 내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종료 버튼을 누른 것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이 다섯 시니 일곱 시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반쪽이었다. 브로콜리라도 섭취해야 하나? 눈 밑의 다크서클이 장난 아니다. 이 얼굴을 보면 묵야도 백년 사랑이 식어 떠날지도 모르겠다. 띵동띵동- 빈둥거리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오전에 나갔던 유진이 벨을 눌렀다. 인터폰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자마자 마당을 한달음에 건너뛰어 왔다. 신발을 벗는 유진에게 짐짓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하숙비 내야지?”
“그게 뭐야?”
물음표가 가득한 유진이 반문했다.
“그러니까 월세. 다달이 내는 방세 말이야.”
“아아, 주인형. 나 정말 여기서 살아도 돼?”
“아니, 안 돼. 도와준 건 고마운데 앞으론 호텔가서 자라.”
유진은 첫 날 애널섹스를 문자화 시켰던 때를 빼고 내게 성적인 감정은 내비친 적이 없었다. 동생이 하나 더 있다면 아마 유진 같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애완견과 더 비슷한가.
“사이코는 왜 집에 안 들어와?”
“그러게나 말이다.”
들어와서 생활하라는 문자에는 답변이 없는 이주율이었다. 반성을 하고 있는 건 좋은데 일주일이면 도가 지나쳤다. 형제싸움 칼로 물 베기라는데. 사실 그건 부부싸움이겠지만….
“나 일곱 시에 약속 있어.”
“누구랑?!”
“남이사.”
“이사를 저녁 일곱 시에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남이사에 재미를 들려서 유진을 놀려먹는 것도 쏠쏠했다.
“그런 게 있어.”
“나도 도와줄까?”
“됐어. 넌 계속 집에 있을 거야?”
“아니, 나도 여섯시 반쯤에 약속 있어.”
그러면서 무슨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속으로만 웃었다. 여섯 반까진 십 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온 건지, 참 녀석도 태평하다.
“너야말로 늦은 거 아냐? 어서 나가봐.”
“그러네. 아 맞다. 이거 주러 온 거야.”
유진이 점퍼 주머니를 뒤져 1.5리터 팩우유를 꺼냈다. 도라에몽도 아니고 저 큰 게 주머니에서 잘도 나온다. 안 그래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유 사올 예정이었는데 잘됐다.
“땡큐. 잘 먹을게.”
유진이 콩글리쉬한 내 발음을 듣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꼴이니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상처 때문에 티는 많이 안 나겠지. 우유를 냉장고 안에 넣고 돌아오는 유진이 소파에 앉았다.
“왜 안가?”
“십분만 더 있다가 나갈래. 밖에 추워.”
“약속 시간이 6시라며.”
“약속한 사람이 원래 잘 늦는 체질이야.”
약속시간 어기는 거라면 이주율을 능가할 자가 없을 텐데. 밖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면 족히 삼십분 이상은 기다려야 나오는 녀석이었다. 아무리 혼을 내고 충고를 해도 고치는 법이 없었다. 학교 다닐 적엔 9시나 돼야 등교를 했으니 말 다했지. 나또한 녀석과 같이 등교하려다 지각한 적도 수없이 많았다.
“부모님이 전부 미국사람이라며.”
“응, 맞아.”
나를 빤히 보는 유진 덕에 더 이상의 과거회상은 할 수 없었다.
“근데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해?”
“음…. 배웠으니까?”
그건 당연한데……. 아무리 배워도 타국어는 원어민처럼 구사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유진에게 익숙해져서 그렇지 처음에는 유진이 말할 때마다 더빙한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진에게선 영어발음이 뒤섞인 말투가 나오긴 하지만 그건 정말 가끔씩만 나타났다.
“미국에서 산 것만큼 한국에서 살았을걸. 어렸을 땐 마마가 나 못 키우겠다고 파파한테 맡겼거든. 열 살쯤?부터 한국에서 사년정도 살았어. 그리고 뉴욕에서 오년 살았구.”
“사이코메트리는 어릴 때부터 한 거야?”
“응. 그래서 마마가 나 못 키우겠다고 한 거거든.”
유진이 베실베실 거렸다. 엄마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소리 같은데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게 신기하다. 내가 다소 측은한 눈으로 봤는지 유진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오해하지 마. 마마랑은 사이 좋아. 철이 없는 여자라 그래, 영원히 자기가 십대 인 줄 안다니까.”
하는 행동만 보면 한없이 어려보이는 유진이지만, 영원히란 말을 저렇듯 싸늘하게 내뱉으며 웃는 걸 보니 세상풍파에 찌든 어른 같기도 했다. 과연 이주율과 동갑인가 싶을 정도로….
“이런, 나가야겠다. 자긴 늦으면서 정작 내가 늦으면 불같이 화내거든. 주인형 오늘 집에 들어올 거야?”
“모르겠는데.”
“그럼 열쇠 주면 안 돼?”
“그건 아직 안 돼.”
“아직 이라는 소리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저리 잘 이해하는 걸 보면 한국말 선생이라도 해야 할 듯싶다. 유진이 바삐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쾅하는 대문소리가 지축을 뒤흔들 정도로 요란했다. 나도 슬슬 준비해볼까. 일곱 시까지는 겨우 이십 여분이 남았다. 때 빼고 광낼 것도 없기에 캐주얼하게 차려입었다.
물세탁을 잘못해 스키니가 된 색 짙은 워싱청바지에 쇄골이 반쯤 보이는 품이 큰 니트를 입었더니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긴 했다. 자주 입어서 늘어난 니트지만 검은색에 가깝기 때문에 태가 나는 일은 없었다. 나가는 길에 세탁소에 들르려 묵야의 코트와 그가 선물한 정장을 쇼핑백에 담았다. 가스 밸브 단속을 하고 쓸데없이 켜져 있는 방의 불들을 끄는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시간은 6시 59분, 묵야였다.
“집 앞이다.”
“네, 금방 나갈게요.”
후다닥 키를 찾아 쇼핑백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남자는 내가 예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 약속이 칼인 사람이었다. 마당 안에 들여놨던 바이크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타이어가 엉망인 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노파심만 잔뜩 생겼다. 대문 바로 앞에 묵야의 검은 세단이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릉그릉거리는 맹수가 생각난 건 단지 착각이겠지. 뒷좌석의 문을 열자 묵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앞에 타.”
“아뇨, 이거 쇼핑백 놓으려구요.”
쇼핑백을 시트에 올려놓고 앞좌석의 문을 열었다. 차 내부의 온도는 적당히 따뜻했다. 안전벨트를 매자 시끄럽게 삐삐거리던 벨트미착용 경고음이 입을 다물었다.
“저기 골목길 쭉 지나가면 세탁소 있거든요. 거기 잠깐 들려주세요.”
“그러지.”
묵야가 핸들을 반쯤 돌려 차를 몰았다. 옆모습을 슬쩍 보니, 진부하지만 표현할 것이 하나인 조각 같은 콧날과 무뚝뚝하게 닫힌 입술이 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놓은 작품 같았다. 원래 도가 지나치게 잘생긴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는데, 묵야만은 예외였다. 그 누가 알았겠나, 이 남자와 내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무슨 생각해?”
“잘 생겼다는 생각이요.”
“누가, 네가?”
“묵야씨요.”
“내 얼굴이 네 취향인가?”
“취향은 아니었는데, 이상하네요.”
“그거 다행이군.”
취향이 아니라는데 다행이라는 소리는 또 뭐지?
“왜 다행인데요?”
“아무리 잘 생긴 얼굴이라도 며칠 보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지. 네 취향의 얼굴이 아니니 앞으로 질릴 일은 없겠지.”
“그게 그렇게 되나요?”
저 앞에 세탁소가 보였다. 묵야가 속도를 줄여 세탁소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쇼핑백을 세탁소 주인에게 맡기며 찾아갈 날짜와 선금을 지불했다. 쇼핑백에서 옷을 꺼내 확인하는 주인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네?”
“확인하셔야 할 듯 한데요.”
뭘 확인하라는 건지 몰라서 멀뚱멀뚱 서있었다.
“자 보세요, 단추 떨어진데 없고 찢긴데 없구요. 특별한 외상도 없습니다.”
주인은 환자를 살피는 의사처럼 코트와 정장의 곳곳을 확인시켰다. 요새는 세탁소에 맡길 때도 이렇데 하나하나 확인하나?
“이런 제품은 나중에라도 말 나오기 마련이라 서요.”
“네?”
자꾸 반문하는 나를 세탁소 주인이 답답해하는 기색이었다.
“명품은 흠집하나라도 냈다간 우리가 뒤집어쓰는 일이 비일비재해요. 그러니 이렇게 확인시켜드려야죠.”
“명품이요…….”
세탁소 앞에 서 있는 묵야의 차를 보고 주인이 나를 다시 봤다.
“이사이아 제품은 저도 오랜만에 보는데, 좋은 일 하시나 봐요.”
좋은 일이라는 세탁소 주인의 뉘앙스에는 연봉이 많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작년 내 연봉이 360만 원 정도 됐었나?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날짜 맞춰서 찾으러 오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묵야의 조수석에 다시 오르자 묵야가 고급스런 차체를 출발시켰다.
“싸구려라면서요.”
묵야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던졌다.
“무슨 말이야?”
“정장이요, 비싼 명품이라잖아요.”
“그랬나?”
묵야가 대답을 회피하며 잠시 창문을 열었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남자가 변명이나 에두르는 말을 잘 못한다는 걸 알았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차가 굼벵이처럼 기어갔다. 차가 정체되어있는 틈을 타 묵야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뺨에 그의 손이 닿았다. 따뜻한 손등이 부드럽게 내 뺨을 쓸었다.
“다쳤나?”
“네.”
“아파?”
턱까지 내려갔던 손을 다시 올려 마사지하듯 움직였다.
“지금은 안 아파요.”
“누구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담배를 깊게 들이마신 묵야가 한숨과 같이 연기를 내뿜었다.
“엎어졌는데 균형을 잃어서 얼굴부터 땅에 박았어요.”
“양쪽 뺨이 다 그런 게 신기하군.”
“그러게요.”
어울리지 않는 자연보호주의자 묵야가 차안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알 수가 없다.”
묵야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그럼에도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알려고 다가가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기분이야.”
“그럴 리가요, 점점 앞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다가오는 묵야의 가슴에 부딪힐 그 날이 얼마 멀지 않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다. 묵야라는 인력이 나를 그에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뭐 먹을까?”
“아무거나 좋아요.”
“회?”
“제가 회만 먹고 사는 줄 아세요?”
내 얼굴만 보면 회, 회 거리는 묵야 때문에 언젠가 회가 보기도 싫어지는 날이 올 것 같았다.
“삼겹살도 좋고, 피자도 좋아요.”
“입맛이 다양한 고양이군.”
“고양이는 그 쪽이라니까요.”
“아무렴 어때.”
“그렇죠.”
교보타워 사거리를 벗어나자 도로에 숨통이 트였다.
“고기 먹을까?”
“네.”
이 남자라면 국내산 에이급 소고기만을 먹을 것 같기에 미리 못을 박았다.
“삼겹살이 좋겠네요.”
“그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고깃집 투성이라 그 중 주차장이 제일 넓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화로구이라는 가게 이름답게 화로를 이용해 삼겹살을 구워먹는 집이었다. 기름기가 쫙 빠진 삼겹살을 생각하자 군침이 돌았다.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는 않지만 한 번 먹을 때 몰아서 먹는 습성이 있어서 먹는 양이 적진 않았다. 기본 반찬들이 테이블에 깔리고 마지막으로 생삼겹 삼인분이 두터운 도자기 그릇에 담겨 나왔다. 요새 돼지 가격이 금값이라는 뉴스를 접하긴 했어도 양이 이렇게 적을 줄은 몰랐다. 도합이 아홉 점. 일일분에 딱 세 점인지 서비스조차 없었다. 석쇠에 삼겹살 네 점을 얹었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자 마주앉은 묵야가 가위와 집게를 가져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시큼한 김치에 약간 타버린 고소한 삼겹살을 얹어 먹자 그 조합이 끝내줬다. 뜨거운 걸 못 먹는 묵야를 위해 불이 닿지 않는 불판의 끝에 익은 삼겹살을 수북히 얹어주었다.
“식으면 먹어요.”
“그러지.”
묵야는 야채와 함께 삼겹살을 시식했다. 확실히 회보단 고기를 좋아하는 묵야였다. 삼인 분을 다 먹어치우고 추가로 이인 분을 더 주문했다. 밥과 냉면까지 주문하자 묵야가 놀란 눈치였다.
“많이 먹네.”
“제 위가 워낙 방대해서요.”
묵야도 나 못지않게 잘 먹는 중이었다. 앞으로 묵야와 있을 때 회는 물 건너갔다고 봤다. 서로 마주보고 맛있게 먹는 게 좋지, 나 혼자만 즐겨먹는 건 사양이다. 만족감에 배를 두드렸을 땐 이미 밥상은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식사를 다 마쳤으면 더 있을 필요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야도 식후의 자리에서 수다 떠는 취미는 없어보였다. 테이블 우측에 붙어있던 계산서를 떼어들었다. 묵야가 손을 내밀기에 고개를 저었다.
“비싼 건 못 사줘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체크카드에 남아있는 현금을 떠올렸다. 아마 십만 원이 조금 안됐지. 묵야보다 먼저 성큼성큼 걸어 카운터로 향했다. 체크카드와 계산서를 동시에 내밀었다. 묵야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카드는 긁히고 있었다. 얻어먹고 사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 묵야처럼 고가의 식사는 제공하지 못해도 내 수준에서 적당한 것들은 내가 낼 생각이다.
“잘 먹었다.”
카드명세서를 문 앞의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뒤에서 묵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묵야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그게 또 왜인지 귀엽게만 느껴졌다. 콩깍지가 서서히 쓰이고 있나보다.
“커피는 묵야씨가 사요.”
“그래.”
조폭과의 데이트라도 별다른 건 없는지라 밥 먹고, 커피. 이 수순을 밟았다. 주변에 테이크아웃점에 들러 묵야가 커피를 사올 때까지 차 안에 있었다. 서울의 커피 전문점은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 아닌 브랜드 점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니 영세계층이 점점 죽어나지. 내 카페를 도심으로 옮겨오면 파리만 날릴 것이 뻔했다. 시골에 있을 때도 만만치 않았지만, 개중엔 내 커피를 좋아해주는 노인들이 계셨다.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세단으로 다가왔다. 테이크아웃점으로 들어가는 여자 두 명이 뒤돌아봤다. 묵야가 차에 탈 때까지도 그 여자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다. 정작 묵야는 그런 시선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면역이 생겼다 이건가. 솔직히 부럽진 않았다. 그 옛날 공자가 과유불급이라 했다.
한 잔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또 다른 한 잔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딱 봐도 내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묵야에게서 따끈따끈한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
데이트 코스에 대해선 문외한이기에 딱히 가고픈 데가 없었다. 내게서 하염없이 답을 기다리는 걸 보니 그건 묵야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딱히 가고픈 데는 없는데요.”
“그래, 나도 데이트는 처음이라 아는 곳이 없다.”
“저도 그래요.”
연애에 미숙한 남자 둘이 차안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한편의 희극이지 싶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서 데이트를 할까요?”
“그걸 알면 여기 있지 않지.”
“그건 그러네요. 공원이라도 갈까요?”
텔레비전에서 보면 연인끼리 손잡고 공원을 걷거나, 배드민턴을 치던데. 손잡고 걷는 건 무리여도 배드민턴은 괜찮겠지.
“공원?”
“네.”
“그럼 한강으로 가지.”
“그러세요.”
한강 고수부지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다. 퇴근시간 러시아워도 끝나는 마당이라 차도 밀리지 않았다. 보름만 더 지나면 벚꽃이 만개할 때가 찾아올 텐데, 창문을 열어놓기엔 지나치게 쌀쌀했다. 오디오도 켜지 않은 채 오랜 침묵이 유지됐지만 어색한 법이 없었다. 침묵은 사람에 따라 불편하거나, 편하거나의 동시다발적인 감정을 갖게 한다. 묵야와의 침묵은 후자에 가까웠다. 한강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직 추운날씨임에도 가족단위 또는 연인단위의 사람들로 붐볐다. 순간 묵야와 나는 서로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여기서 무얼 할까라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순간이었다.
“배드민턴!”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고 크게 외쳤다.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도구가 없는걸.”
“그러네요.”
“일단 내릴까?”
“네.”
묵야와 함께 주차장에서 밑으로 내려가자 농구코트가 나왔다. 한강 공원 자체가 원체 넓어서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코트를 밝히는 조명이 애꾸눈인 채로 빛났다.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간 문자들을 발로 휙휙 밀어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코트는 농구하기엔 별로 좋은 장소가 되지 못했다. 바닥에는 주인이 없는 농구공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농구공을 들어 탁탁 튀기자 묵야가 패스하라는 시늉을 했다. 고등학교 삼년 내내 농구부였던 터라 어느 정도의 기반은 잡혀있었다. 묵야의 자세를 보니 아마추어 같지는 않았다. 묵야의 가슴팍으로 바운드 패스를 하자, 그가 한 번에 받아들고 공을 바닥에 튕겼다. 농구공의 바람이 적당히 빠져있어 위협적으로 튀어 오르진 못했다. 묵야가 드리블을 하는 채로 공을 놀렸다.
오랜만에 농구근성이 불타올라 그의 뒤에 바싹 붙었다. 묵야가 농구골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오른손의 공을 왼쪽으로 향하는 듯하더니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훼이크라 이거지. 이번엔 공이 묵야의 다른 손으로 이동하는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스틸에 성공했다. 잡은 공을 바닥에 드리블 하고 골대를 향해 휙 슛을 던졌다. 3점슛 거리는 충분히 되는 터라 골이 성공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이 작용했는지 탕, 탕, 뎅구르르 하면서 농구공이 골대를 따라 원을 그렸다. 이내 골대 안으로 농구공이 쑥 빠졌다. 나도 놀라고 묵야도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기막힌 우연이었다는 기색을 지우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제가 원래 농구를 좀 하거든요.”
“그런 것 같군.”
묵야에게서 봐주지 않겠다는 오오라가 풍겼다. 골대에 들어갔다가 나온 공으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다리가 긴 덕인지 묵야의 행동이 더 재빨랐다. 정장을 입고 농구공을 들고 있는 뒷모습만 보자면 삶에 찌들어 농구로 스트레스를 달래는 회사원 같기도 했다. 허리를 낮춘 수비자세로 묵야의 뒤에 바싹 붙었다. 탕탕 여유 있게 드리블을 하던 묵야가 내 오른쪽 틈이 빈 공간을 이용해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묵야는 공을 미는 듯한 드리블링으로 농구골대 앞까지 눈 깜짝할 새에 이동했다. 그리고는 내가 막을 틈도 주지 않고 슛동작을 취했다. 묵야가 왼손은 공의 좌측부분을 잡고, 오른손은 공의 가운데에 놓은 자세로 링을 바라보며 슛을 쐈다. 안정적이고 완벽한 자세였다. 45도 각도로 날아가던 공이 백보드에 맞고 골대 안으로 슉 들어갔다. 군더더기 없는 뱅크슛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뱅크슛의 달인인 현주엽 선수가 울고 가라 할 정도로 깔끔했다.
나처럼 전의를 잃고 힘없이 굴러가는 농구공을 잡아들었다. 아까와는 반대로 묵야가 내 뒤에 바싹 붙어 수비를 취했다. 훼이크를 하려하는데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체급에서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지. 농구경기에서는 공격수의 몸에 수비수의 몸이 닿으면 안 되지만, 묵야의 하반신은 지금 내 엉덩이에 턱하니 붙어있었다. 딱딱하게 선 기둥이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드리블을 하며 남은 손으로 그 기둥을 한 번 꽉 쥐어주었다. 묵야가 낮은 신음을 뱉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실제 경기라면 반칙이라고 휘슬을 불만큼 거친 몸놀림으로 묵야를 밀쳐내고 달렸다. 묵야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심판이 없는 경기니 이정도의 편법은 봐줘야지. 링에 다가가서야 속도를 줄이고 몸을 최대한 가볍게 띄웠다. 그보다 더 가벼운 손짓으로 링 위를 향해 공을 올려두었다. 이것이 바로 레이업슛! 바닥에 착지 하면서 공이 제대로 들어갔나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역시 골인. 아직 실력이 죽지는 않았다. 그래도 운동부족으로 그 몇 분 사이에 헥헥대는 숨이 나왔다.
“이주인, 기초 체력이 부족한 것 같군.”
하얀 입김을 내뱉는 내게 묵야가 다가왔다.
“그러는 묵야씨는 나이보다 더 아저씨 같은데요.”
“내가?”
“변태 아저씨요, 경기 중에 거기를 세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
묵야는 어쩔 수 없다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농구를 잘 하는군.”
의외라고 느낀 듯 했다.
“그럼요, 삼점슛에서 레이업까지 못하는 슛이 없어요. 덩크만 빼고요.”
“덩크는 나도 못해.”
“그렇죠, 190이 넘어도 하기 힘든 게 덩크니까.”
바쁘게 흩어지던 하얀 숨의 횟수가 줄어들었다. 묵야는 내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좀 걷기를 종용했다. 농구공을 원래 놓여있던 농구선 밖의 코트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묵야의 뒤에 따라붙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꼬맹이들이 진분홍색의 안전모와 무릎보호대를 차고 우리를 앞질러 갔다. 한강 길을 따라 걸으며 균일한 간격마다 놓인 벤치 중, 빈 곳에 앉았다. 그 바로 밑은 한강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옆에선 청소년들이 막대 끝에 불을 붙이면 타들어가는 스파클러 폭죽을 흔들고 있었다.
“불꽃놀이. 하고 싶어?”
그걸 구경하는 것을 알아챘는지 묵야가 물었다.
“아니요, 구경만 하는 거예요. 어린 녀석들이 재미있게도 노네요.”
“너도 어려. 노인네들만 상대하다보니 애늙은이가 된 줄 아는군.”
“하하. 그럴지도 모르죠.”
묵야가 추위에 주먹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주변은 어두웠고 우리를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얌전히 그의 따뜻한 손길에 손을 맡겼다. 잠시의 다정한 분위기도 참지 못하는지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휴대폰이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만요, 전화가…….”
휴대폰을 빼서 번호를 확인했다. 태형 형. 묵야를 올려다 본 다음 중요한 말이 아니면 상관없겠지,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주인아 너 어디야?”
다급하고도 화가 난 목소리였다.
“한강인데요.”
“한강? 어쨌든 좋은데 네가 말한 미로, 논현동 유료 헤어숍 건물 지하가 확실한 거지?”
“네, 맞는데요.”
“이미 여기 쓸렸다.”
“네?”
태형 형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반문했다.
“팀 구성해서 뒷문 앞문 할 것 없이 다 막고 진입했는데, 안쪽은 이미 초토화가 돼 있었다고.”
나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묵야를 쳐다봤다. 묵야는 덤덤한 얼굴로 불꽃놀이를 즐기는 녀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묵야에게 손바닥을 내비쳐 기다려달라는 표시를 하고 벤치에서 조금 떨어진 매점으로 향했다.
“계속 말해보세요, 형.”
“시체 3구, 중상자 5명 이상, 약에 꼴아 제정신 아닌 새끼들 10명 이상. 조금 전에 뒷문에서 들어온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증언했어.”
“괴한이요?”
“그래,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누군지 감도 안 온다더라.”
“그럼 형은 신고 받고 출동한 거예요?”
“이 자식들이 신고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뒤가 구린 새끼들인데. 우리가 한 발 늦은 거야. 그건 그렇고, 주인아. 너 지금 바쁘지 않으면 여기로 올 수 있어?”
“바쁘지는 않은데 제가 간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요. 번잡한 가게나 사람들이 밀집되어있는 지역은 문자를 읽어내기가 힘들어요.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문자들이 다소 선명한 편이긴 하지만…….”
문자에도 유통기한은 있어서 일정시간이 지나면 소멸된다. 물론 독하고 강렬한 의지를 품은 문자들은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대신 새로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자는 오래된 문자에 비해 빛과 형태가 뚜렷하다.
“그래도 일단 오기나 해봐.”
“네, 그럴게요. 한 삼십분 정도 걸려요.”
“고맙다.”
“뭘요.”
휴대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꽂고 마른 침을 삼켰다. 묵야와의 데이트를 종결지어야 했다. 뭉글뭉글 생겨나는 의구심은 제쳐놓고서라도, 데이트의 끝은 솔직히 아쉬웠다. 벤치에 앉아있는 묵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슨 일 있어?”
“솔직히 말해 봐요.”
“어떤 걸?”
“일단 차로 돌아가면서 얘기하죠.”
“그러지.”
묵야가 바지를 털고 일어섰다. 내 보폭에 맞춰 걸음을 옮기는 묵야에게 다시 물었다.
“K3 판매자 찾아냈어요?”
“음…. 그렇지.”
“어디서요?”
“무슨 대답을 원해?”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가하는 대답이요.”
“아마 맞겠지.”
“괴한들은 묵야씨가 보낸 건가요?”
“그렇긴 한데, 증거물은 없을 거다.”
이거 참…. 내 앞에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남자기에 더 곤란했다.
“제가 경찰일 돕는다고 얘기 안했던가요?”
“했지, 네가 해코지하거나 고자질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아.”
잘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범인을 알고 나서 문자를 수집하는 건 앉아서 떡먹기보다 쉬웠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탄 뒤 행선지를 말했다.
“집으로 가주세요.”
“그래.”
편하게만 느껴졌던 침묵이 갑자기 불편함이 돼서 찾아왔다. 묵야도 그것을 느끼는지 내게 말을 붙였다.
“화가 난 것 같군.”
“글쎄요.”
내가 묵야에게 화가 날 일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이런 식으로 그와 어긋나게 엮이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경고는…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올바른 충고야.”
“그렇죠.”
“예를 들어, 한 회사원이 있다 치자. 그 회사원은 지각을 일삼는 게으름뱅이야. 회사의 사장이 그 직원에게 말했지. 또다시 지각을 하면 본보기 차원에서 그를 해고하겠다고. 그게 바로 경고야. 사장은 회사원에게 일종의 기회를 준 셈이지. 그런데 그 회사원은 사장의 경고를 무시했어. 회사원은 결국 해고를 당했지. 그렇다면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회사원… 이겠죠.”
“경고를 무시하고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선 그 당사자만이 책임질 수 있지, 그 누구에게도 원망을 돌려선 안 돼.”
맞는 말씀. 묵야가 내게 하고자하는 말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나는 경고를 했고, 그자는 듣지 않았지. 그렇다면 나는 그자에게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 그 대가가 어떤 혹독한 것이라도.”
“묵야씨가 K3의 판매를 중단하라 했나보죠?”
“눈치가 빠르군.”
이 정도 이야기를 종합해서 저런 결론을 내린 것이 결코 눈치가 빠른 건 아니었다. 눈치가 정말 빨랐다면 태형 형에게 전화를 받은 순간 알아챘겠지.
“제가 괴한들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불리해질 텐데요.”
“그럴까?”
의미심장한 묵야에 말에 캐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참았다. 지금 이 사실들 외의 것은 내가 알아내야 하는 게 정석이다.
“이주인,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든다고는 말 못하죠.”
“그럼 그만둘까?”
“진심이에요?”
“그래.”
반대로 생각해봤다. 그가 내게 경찰을 돕는 일을 일방적으로 그만두라고 한다면…. 당연히 내 대답은 노다. 아무리 연인이라고 한들 생업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과한 처사였다. 수년을 해온 일을 타인 때문에 그만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묵야의 진심을 읽을 수 없으니 이 말이 완전한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나를 위한 사탕발림 같지는 않았다.
“저는 그만두지 않을 건데요.”
“네게 그만두라는 말을 한 적은 없는데.”
“그러네요. 저도 그만두라고 말한 적 없어요.”
“그래.”
그래도 내가 점점 싫어지는군. 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차가운 공기가 밑으로 자욱하게 깔리는 듯 한 음성이었다. 묵야를 다시 쳐다봤을 때 그는 언제나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집 앞으로 데려다 준 묵야가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보고 싶을 것 같다.”
“저도요.”
묵야가 받침대에 놓아두었던 아이스커피를 툭 쳤다. 동요하고 있었다. 묵야의 몸이 조수석으로 넘어왔다. 따끈한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말랑말랑한 혀가 아랫입술을 핥고 안을 파고들었다. 묵야의 손이 늘어진 니트 안의 쇄골을 타고 침범했다. 유두를 노골적이게 만지는 손놀림에 입이 벌어졌다. 묵야가 더 깊게 입술을 포개어왔다. 쪼옥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에 쪼는 듯한 옅은 키스비를 흩뿌리더니 다시 혀가 깊게 안으로 침범했다.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엉켜서 욕망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더 지나치면 태형 형에게 가는 시간이 늦어진다.
“하아….”
묵야의 가슴팍을 밀었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먹어치우듯 덤벼들었다. 얽히는 혀에 그만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젖꼭지를 간질이던 묵야의 손이 바지로 내려왔다. 나 역시도 서버린지 오래인지라 도망칠 곳이 없었다. 묵야가 지퍼를 열어 딱딱하게 선 성기를 꺼냈다. 묵야는 가슴팍에 있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하반신으로 향하게 했다. 잔뜩 흥분해 딱딱하게 선 그의 기둥을 꺼냈다. 커다란 것이 퉁하고 튀어나왔다. 묵야가 엄지손으로 요도구를 문질러대는 바람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묵야의 귀두 위로 축축한 쿠퍼액이 솟았다. 매끈한 그것을 손으로 감싸고 아래위로 훑었다. 여전히 뜨거운 그의 숨결이 입안을 간질였다. 내 성기를 터뜨릴 듯이 꽉 쥐어 잡고 묵야도 아래위로 흔들어 자극을 주었다. 서로의 것을 맞잡고 수음을 하는 행위가 질펀한 섹스만큼 흥분됐다. 탁탁거리는 소리, 혀와 혀가 얽혀 질척이는 소리가 차안을 가득 채웠다. 구슬이 박혀 튀어나온 기둥을 마찰하며 나도 묵야의 성기를 힘껏 쥐었다. 한 손에 들어오지 않는 기둥이 면적을 더욱 늘렸다. 남은 손마저 내려 두 손으로 그의 것을 쥐고 흔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게 끈끈한 쾌감에 정신이 팔렸다. 급격하게 불알을 치고 사정감이 몰려들었다. 허리를 뒤로 빼자 입술을 뗀 묵야가 속삭였다.
“해도 돼.”
강제적인 언어가 아니었음에도 순순히 정액이 터져 나왔다. 묵야의 것을 꽉 쥐자 그가 내 두 손을 전부 감싸 쥐고 빠르게 기둥을 마찰했다. 손이 다 헐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묵야가 내 뺨을 깨물었다. 아직 멍이 가시지 않은 뺨이 욱씬거리며 고통을 호소해왔다. 이내 묵야의 몸도 사정감에 움직임을 멈추고 왈칵 정액을 쏟아냈다. 그의 옷에 묻히지 않도록 정액이 쏟아져 나오는 요도로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을 때리는 방출의 세기가 거셌다. 진한 정액이 손안에 가득 담기고 넘쳐흐를 정도가 되자 묵야가 사정을 멈췄다.
묵야는 허리를 굽혀 조수석 서랍장을 열어 물티슈를 꺼냈다. 내 손에 담긴 정액을 닦아주고 묵야도 손에 담고 있던 내 정액을 티슈에 쏟았다. 끈적거리는 손을 펼치자 끈끈한 정액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이어졌다. 묵야는 그 마저도 물티슈로 깨끗이 닦아내고, 성기까지 처리를 마쳤다. 내 입술에 쪽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 쇠구슬…. 박을 때 아프지 않았어요?”
사정감의 피로를 달래며 묵야를 쳐다봤다. 눈이 저절로 나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글쎄.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쇠는 아니야. 쇠를 썼다간 살이 썩겠지.”
“그럼요?”
“아마, 은일걸?”
“아…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그렇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묵야가 닦인 손으로 내 눈가를 쓸었다. 다친 뺨을 빗겨 만지는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묵야가 사정직전 깨물었던 뺨은 아직도 아렸지만.
“엎어져서 닿은 곳이 어디지?”
“네?”
“너를 엎어지게 만든 건, 바닥이 아닐 테니까.”
쉽사리 넘어간다 싶었는데,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다.
“그 바닥은 제가 혼쭐을 내줬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
“말하고 싶지 않은가보군.”
그냥 묵야를 향해 미소만 지었다. 묵야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 앞에선 너무 어른스러워질 필요 없어.”
“제가요?”
지극히 평범하게 대하고 있는데…….
“아니면 정말로 시골에서 노인들과 지냈기에 애늙은이 같은 건가?”
“진짜요?!”
두 번째 듣는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에 진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해 깜짝 놀랐다. 그렇게 내 얼굴이 노안인가? 백미러에 다가가서 얼굴을 보려했지만 새까맣게 선팅이 되어 있어서 무리였다.
“얼굴이 아니라. 네 행동.”
“아아….”
“이주인, 내게는 어리광 부려도 좋아.”
그 말은 이모티콘 공격만큼이나 급작스러웠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관 어리광은 그 누구에게도 부려본 기억이 없었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려다. 내가 어른스러워 보여다면, 여태껏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이주율 사이에서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다면 더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졌을 테니까. 속이 상했다. 묵야가 바라는게 애교가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이제는 어리광 부린다는 게 대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입을 다물고, 고통을 참고, 인내해야만 했던 내 절반의 인생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내가 쉴 수 있는 휴식처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 남자를 더 믿고 사랑해도 되는 걸까? 과연 그래도 상처받지 않을까? 신이 내게 쓰디쓴 열매만을 줬다면 이 남자는 하나뿐인 달디단 열매였으면 좋겠다.
“노력해볼께요.”
“그래. 고맙다.”
눈을 가렸던 손을 뗐다. 눈물이 고이진 않았지만 눈두덩을 억늘렀던 힘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내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묵야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오히려 고마워해야할 사람은 나였다. 묵야는 타인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다정함으로 나를 위로했다.
“갈께요.”
“그래. 깨어있는 시간동안은 항상 네 연락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든 전화해.”
“네.”
조수석 문을 닫았다. 그는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차를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 대문을 닫았다. 등을 기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대문은 내게서 열을 앗아갔다. 사랑해도 되는 걸까, 내 마음을 전부 줘도 되는 걸까. 숨겨진 마음속의 외치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다. 그와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었다. 묵야의 세단이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몸을 일으켰다.
강해지자. 더 강해져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자. 유약한 사랑은 결국 자기만족 밖에 하지 못한다. 내 아버지처럼.
바이크가 나갈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었다. 시동을 건 바이크를 끌어 문밖으로 이끌었다. 대문을 잠그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헬멧 위에는 어느새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었다. 그것을 털어내고 머리에 썼다. 헬멧 안으로 얼굴이 들어가는 동안 뺨이 쓸려서 앓는 소리를 내야했다. 논현동의 미로를 향해 도로를 질주했다. 묵야의 세단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