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틀간의 쌓인 피로를 풀고 일어나니 해가 저물려는 중이었다. 거실에 걸린 시계가 내가 족히 10시간은 잤음 알렸다. 묵야도, 유진도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고이 접힌 이불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 이불을 들고 안방 장롱으로 향하는데, 안방 침대의 이불은 두더지 굴처럼 봉긋하게 솟아있었다. 유진이 잠만 자고 쏙 나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차 묵야를 더 예뻐할 수밖에 없다. 어제 먹었던 커피 잔도 깨끗하게 설거지가 돼 있었는데, 유진이 아니라 묵야가 했지 싶다. 휴대폰을 어디다 뒀더라. 어제 입었던 옷의 주머니를 전부 뒤져보았다.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이 푹 하고 떨어졌다. 오전 중에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푹 자는 것 같아서 깨우지 않고 나왔어. 일어나면 연락 해^0^]
저 이모티콘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이번엔 잊지 말고 꼭 전해줘야지. 문자를 쓸까하다 게을러져서 전화를 걸고 말았다.
“이제 일어났어?”
묵야의 목소리에 그의 덤덤한 표정까지 상상이 됐다.
“네, 깨우고 나가지 그랬어요.”
“곤히 자기에.”
“자는데 뽀뽀하고 나간 건 아니구요?”
“깨어있었나?”
한 번 찔러 본 건데, 정말 자는 내 입술에 박치기를 하고 나가셨다보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 미친 외국인하고 단 둘이만 있지 말았으면 좋겠군.”
“유진도 없던데요. 정말 오늘 우리 집 올 거예요?”
“그럴 생각인데.”
오늘 당장이라도 유진을 내쫒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건 그렇고, 문자 보낼 때 이모티콘은 쓰지 말아요.”
“그냥 보내면 너무 딱딱하니 좋지 않다고 하던데.”
“혹시, 전에 문자 대신 보내줬던 부하가 그랬어요?”
“아니, 다른 녀석이.”
“전 차라리 딱딱한 게 나으니까. 이모티콘은 자제해주세요.”
“그러지.”
“그럼 오늘도 열심히 일 하시구요.”
“그래, 밤에 보자.”
이 무슨 끈끈한 동거인의 대화란 말인가. 단 삼일 사이에 묵야와 깊은 관계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전부 유진 때문이었다. 유진만 아니었으면 묵야가 우리 집에서 잘 일도, 사이코메트리로 내 성생활을 알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며 비닐봉지를 든 모든 흉의 근원인 유진이 활짝 웃었다.
“일어났어?”
유진이 비닐봉지 안에 담긴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를 테이블 위에 우르르 쏟았다. 두 명이 먹을 것 치고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유진이 비빔밥 맛의 삼각 김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거 좋아하지?”
편의점 음식 중에 전주비빔밥 맛의 삼각 김밥을 제일 좋아하긴 한다. 이것도 필시 우리 집에 살면서 사이코메트리로 알아낸 것이겠지. 제 딴에는 배려한다고 하는 행동이 내게는 불쾌하기만 했다.
“하루 남았어.”
“뭐가?”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거리는 유진이 순진한 얼굴을 들었다.
“우리 집에서 나가는 거.”
“알았어, 안 그래도 호텔 알아봤거든.”
예상외로 쉽게 물러서는 유진이었다.
“내가 안 나가면 그 남자도 안 나갈 거 아냐. 셋이서 동거할 순 없지.”
동감이다. 유진은 4겹 샌드위치를 단 세입에 먹어치우더니 삼각 김밥 2개째를 흡입하는 중이었다. 한참 자랄 때는 지난 것 같은데 식성이 자라나는 청소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난 삼각 김밥 하나면 충분하기에 물 대신 오렌지 맛 환타를 마셨다. 매콤한 고추장에 달콤한 환타가 섞이니 입안이 화끈화끈했다.
“정말 그 남자와 사귈 거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형, 경찰에서 일하면서 조폭들하고 친하게 지내면 안 돼.”
“내가 돈하고 개인적인 사연 때문에 경찰 일을 돕긴 하지만 독실한 준법자는 아니야. 나한테 남달리 정의감이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란 소리야.”
예전부터 얌전하게 생긴 얼굴 탓인지 내 성격을 물 같이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물이 얼마나 차가운 물인지는 당해본 사람만이 알았지만.
“형이 걱정돼서 그러지.”
“너, 내 과거의 몇 장면을 봤다고 꼭 나와 친한 것처럼 구는데. 나한테 있어선 너는 만난 지 이틀 밖에 안 된 아는 형 동생이야. 그것도 꽤 무례한.”
“잔인해.”
“잔인해도 할 수 없어.”
유진은 원망 섞인 눈으로 두 뺨 가득 밥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 댔다.
“이 집에 살던 그 키 큰 남자는 어디 갔어?”
묵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부터 이 집에 살던 키 큰 남자라면 이주율이었다.
“넌 원래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일단 말부터 던지고 봐?”
“연인은 아닌 것 같았단 말이야.”
“연인이 될 수가 없지, 내 친동생인데.”
유진이 입을 쩍 벌렸다. 씹던 음식물의 잔해가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입 닫아.”
합, 하고 다시 오물오물 거리는 게 덩치만 작으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나도 안 닮았던데!”
“응, 안 닮았어. 그래도 한 핏줄 내 친동생이 맞아.”
“그렇구나.”
내 차가운 대답에 유진이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근데 형…….”
“왜 또.”
“어제 그 남자 이상해. 전혀 안 읽혀. 그 남자가 먹은 컵, 설거지하면서 확인했는데 아무 것도 없어. 그냥 컵은 컵일 뿐이었어.”
유진이 이런 일은 처음이라면서 푸른 눈을 빛냈다. ‘doubt’ 보라색의 띤 의심이라는 단어가 유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솔직히 이쯤 되면 나도 묵야의 정체가 궁금해지긴 한다. 단순히 조폭 오른팔일 수도 있겠지만..... 혹은 우리 같은 자들에게 읽히지 않는 능력을 타고 났다거나 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묵야 본인은 그런 능력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이상한 건 이런 능력을 가진 우리지.”
“그건 그렇지만, 혹시 그 남자 타고난 걸까? 사이코메트리한테 읽히지 않는 능력자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봐. 혹시 형은 보여?”
유진은 묵야에게서 내가 문자를 읽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유진도 사실을 말했는데 나라도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나도 안 보여.”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삼각 김밥의 포장지를 뜯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띵동띵동- 오랜만에 듣는 초인종 벨소리가 낯설었다. 모니터에는 태형 형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대문을 열어주고 현관까지 마중 나갔다. 들어오는 형의 옆구리에 딸기 한 박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형, 전화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집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무슨 전화.”
태형 형이 빨갛고 살이 탱탱하게 오른 딸기가 담긴 박스를 내밀었다. 벌써부터 딸기향이 진동했다.
“어울리지 않게 이건 무슨 선물이에요.”
웃으면서 형을 안으로 들이자 형이 멋쩍은 표정을 했다.
“우리 마누라가 먹고 싶대서 사가지고 갔더니 갑자기 꼴도 보기 싫다고 치우라지 뭐야, 버리긴 아까워서 가져왔지.”
그럼 그렇지, 태형 형이 나 먹으라고 이렇게 좋은 딸기를 사다줄 리가 없다.
“유진이, 넌 나가 살 방 구했냐?”
형이 신발을 휙휙 벗고 유진이 앉은 소파로 다가갔다.
“응, 근처 호텔에서 묵으려고.”
“내가 그렇게 주인이네 집에서 나가라고 할 때는 고자세로 버티더니 무슨 바람이 들었어?”
“이제 실물이 있으니까.”
유진이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예전부터 여자보다 남자한테 인기가 많긴 했지만 서양인까지 섭렵할 줄은 몰랐다. 태형 형이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씻지 않은 딸기를 집어 먹었다.
“씻어다 줄게요 형,”
“아니 됐어. 농약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리 앉아봐.”
형이 자리를 피해달라는 식으로 유진에게 나가라며 손짓했다. 유진은 그것을 못 본체 편의점 음식만 축내고 있었다. 태형 형은 그런 유진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주인아, 주율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짓고 있던 내 웃음이 어색할 거란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겠다.
“그 녀석하고 연락 안 된지 2년은 넘었어요.”
“그래, 나도 들은 얘긴데 그 녀석 지금 사파 쪽에 있는 것 같더라. 정확하진 않지만.”
“네?”
“사파 뒤를 캐고 다니는 기자 놈이 찍은 사진 중에 주율이랑 닮은 놈이 있어서...”
태형 형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사진을 꺼냈다. 정장을 쫙 빼입은 고개 숙인 자들 사이로 익숙한 녀석이 지나가는 장면이 포착되어 있었다. 정확하지 않은 사진이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같이 산 녀석이었는데 몰라보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맞아요. 주율이네요.”
못 본 사이 한층 남자다워진 녀석이 이 사진 안에 있었다.
“이거 어디서 찍은 거래요?”
“사파가 운영하는 호텔 정문.”
태형 형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봤다. ‘찾지 마’ 라는 강렬한 색의 붉은 단어가 내게로 날아들었다.
“만나야 돼요.”
“그 미친놈을 만나서 뭐해. 그냥 없는 사람 셈치고 살아라. 너만 아니었으면 알려주지도 않았어.”
태형 형은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형의 말대로 정말 미친놈은 유진이 아니라, 이주율이 맞았다. 분명 이주율에 대한 공포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녀석이 미쳐버려서 나를 두드려 팰 때, 그리고 나를 강간하려 했을 때의 무기력함이 다시금 생각났다. 나를 구타했던 녀석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녀석을 때릴 수 있었지만 동생이라서, 불쌍한 녀석이라서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나는 녀석을 만나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다 해결된 일 아니었어?”
“서류상으로는 그래도 개인적인 감정은 아직이에요.”
유진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형과 나를 따라 같이 진지해졌다. 유진은 삼각 김밥 4개를 먹고 나서야 배가 부른지 남은 음료수를 입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태형 형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듯 점점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타인의 걱정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는 있은들, 지독한 과거는 본인 스스로가 떨쳐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이주율을 만나서 그 과거를 떨쳐내야만 했다. 방문을 잠가둔 이주율의 방에서부터 스물스물 질척한 문자들이 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내게로 달라붙기 위해 나오는 문자들을 없애지도 못하고 봉인만 하다시피 가둬뒀다. 소멸되지 않는 이상 봉인이란 건 언제든 풀리기 마련이다. 그 전에…….
“형, 사파가 운영하는 호텔 위치가 어떻게 되요?”
“그리 멀진 않아. 역삼동에 있는 에비스야.”
에비스라면 지하에 불법 카지노 도박장이 설비된 호텔이었다. 어둠의 계통 소유라고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사파 것이었을 줄이야. 이주율, 생각보다 가까운데 있었구나. 아니 멀리 떨어져있던 것은 나였겠지. 카페를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원래의 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언제고 도망갈 곳이 필요해서였다.
“형, 저 일 좀 보고 올게요.”
“이렇게 바로?”
“천천히 간다고 달라지진 않아요.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유진이 서둘러 벗어놓은 반코트를 챙겨 입었다. 나를 따라올 기세가 역력했다.
“넌. 먹은 거나 치워. 따라올 생각이면 고이 접는 게 좋아.”
끼잉, 하는 풀죽은 강아지 소리가 들린 것만 같다. 유진은 내 엄포에 현관까지만 나를 배웅했다. 신발을 신으려하는 녀석을 한껏 노려봐주자 녀석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돌아왔을 때 저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없게 해.”
“알았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그렇지! 내 전화번호.”
유진이 색소가 옅은 손을 내밀었다. 얼핏 보면 수척해보이기까지 하는 피부색이었다. 무시하고 나갈까하다 녀석이 말을 잘 들었기에 휴대폰 번호 정도는 줄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주지 않으면 끝까지 따라나올 것 같아서인 이유가 컸지만.
“번호 불러.”
“내가 찍어줄게.”
유진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뺐었다. 정성을 들여 꾹꾹 번호를 터치하고는 제 스스로 저장까지 마쳤다. 저장 이름이 [유진♥]라니 기가 막혔다. 나가면서 하트는 지워야겠다. 커다란 키 뒤로 보이는 태형 형은 싱싱한 딸기를 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다녀올게요. 너도 문단속 잘 하고 나가.”
“형 올 때까지 얌전히 집에 있을 거야.”
“호텔방 얻었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부터 계약했어.”
“마음대로 해.”
일단 집에서 내쫓는 목표는 달성했으니 그만하면 됐지 싶었다. 유진이 불안한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내가 또 화를 낼까봐 제대로 말도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살면서 이주율에 대한 과거는 유진도 읽어냈을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내게 말을 꺼내지 못 할 이유는 충분하다.
봄은 대체 언제쯤이나 오려는지 바람은 한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현관 앞에 세워두었던 바이크에 올라탔다. 신음을 참는 바이크의 웅얼거림은 언제나 기분을 한결 나아지도록 만들었다. 이주율을 따라 타기 시작했던 바이크가 대중교통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지하철과 버스는 그야말로 온갖 문자들의 향연이다. 개중에는 속이 뒤집힐 정도로 악한 문자도 즐비했다. 문자는 귀신과도 같아서 자신을 알아보는 나를 줄기차게 쫓아온다. 특히 그 집념이 강한 문자일수록 더더욱.
바이크의 엔진이 달궈지기도 전에 속도를 올렸다. 헬멧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낯설었다. 2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 생겨났다. 모든 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나는, 단지 이곳을 떠날 때보다 두 살을 더 먹었다는 것뿐이었다. 떠나기 전에도 충분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와 돌이키면 제어하지 못하는 충동에 사로잡혀있던 어린애였다. 이후로 몇 년이 더 지나서 지금을 떠올리다면 똑같이 어리다고 생각할 테지만, 늘 행동은 생각보다 저만큼 앞서있었다. 지금 이주율을 만나러 가는 것이 미래의 후회가 될지라도 말이다.
방향 감각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에 에비스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호텔이 즐비한 역삼거리, 투명한 누드 톤에 가깝게 칠해진 호텔의 전면은 조폭이 운영하는 건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호텔 앞의 도어맨이 바이크를 끌고 온 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바이크를 주차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나도 난감해지는 바람에 호텔 좌측 벽면으로 이동해 바이크를 주차시켰다. 헬멧을 벗자 얼굴을 제외하고 한겨울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됐던 온몸이 아렸다. 호텔 로비는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나 지나다닐 법하게 청결했다. 뒤가 구린 놈들일수록 앞은 번지르르한 법이다. 다짜고짜 이주율의 소식을 듣고 찾아오긴 했는데, 호텔에 들어서고 나니 들끓었던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냉정해졌다. 머리 위에서 번쩍거리는 샹들리에가 대리석 바닥의 내 모습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일단 데스크 중앙에 컨시어지라 직함이 써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밝게 웃는 여자는 만들어진 어색한 웃음이 아닌, 오랜 기간 숙련된 진짜 웃음으로 나를 응대했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까이서 보니 보조개가 패인 귀여운 얼굴이기도 했다.
“이주율이라는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요.”
컨시어지의 웃는 얼굴이 순간 경련했다.
“이주율 전무님을 말씀하시나요?”
전무라…. 나는 시골에서 커피를 볶고 있을 동안 넌 서울에서 카지노를 지지고 볶고 있었나보다.
“네.”
“사전 약속은 하셨나요?”
흔한 청바지에 패딩점퍼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의 나를 보고 여자가 되물었다.
“약속은 안했는데.”
‘불가, 형사.’ 여자에게서 두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여자는 호텔의 뒷면에서 실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한 이주율을 찾는 나를 형사로 착각했다.
“제가 형사는 아니구요. 이주율 여기 있어요? 없어요?”
이번엔 여자가 입가에 이는 경련을 감추지 못했다. ‘지하 1층’ 여자는 호텔내 이주율의 동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호텔의 컨시어지라면 호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손바닥 보듯 빤히 알고 있을거란 예상이 맞았다.
“죄송하지만, 약속이 없으시면 만나보실 수가 없으십니다.”
“됐습니다. 이제 충분해요.”
손을 흔들며 나를 불러 세우려는 여자를 무시했다. 여자는 무전기를 들어 뭐라고 속삭였다. 들리지 않았지만 불청객에 대비하라는 대화 정도쯤 되겠지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긴 싫어서 비상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음침함 문자들이 바닥을 스물스물 기어 다녔다. ‘자살, 도박, 빛, 가족, 절망.’ 저 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문자들을 탁탁 밟으며 내려갔다. 문자가 터지면서 이는 먼지로 인해 숨이 막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안에서 절망하고 즐거워했는지 빼곡한 문자들로도 충분한 표현이 됐다. 문자가 나오는 시작점을 찾아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내부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검은 정장들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입니다.”
“글쎄요. 일반인은 아닌데요.”
여기서 묵야와 나는 사귀는 사이니 어서 길을 비키시오! 라고 말할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묵야의 이름을 댔으면 쉽게 통과할 수도 있을 거란 유혹은 분명 있었지만 말이다.
“이주율 전무님을 찾으러 왔는데요.”
선글라스를 쓴 검은 정장이 눈동자를 감춘 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떤 문자가 튀어나올지 대비하고 있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남색.’ 설마 내가 이주율의 남색 상대라도 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검은 정장이 가슴 포켓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이전무님이 부른 호스티스 안쪽 방으로 전달한다.”
검은 정장이 귀에 꽂힌 이어폰을 손으로 바짝 붙이더니 다시 무전기로 답을 전했다.
“알았다.”
검은 정장이 내 팔뚝을 잡았다. 게이에 대한 혐오감이라도 있는지 손에 힘이 실려 있었다.
“T룸으로 이동시켜. 매 저렇게 생긴 녀석들이 뭐가 좋으시다는 지.”
남자는 복도에 서 있던 다른 정장에게 나를 휙 밀었다. 지나친 오해가 섞였으나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내가 어떻게 생겼기에 내 얼굴을 비하하시나? 하는 발끈함에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렇다고 다 된 밥에 재를 빠뜨릴 일은 하기 싫었다. 형이 찾아왔으니 당장 이주율에게 얼굴을 내비치라고 하는 것이 묵야의 이름을 대는 것만큼이나 빠르겠지만, 이주율이 나를 박복하게 내칠 가능성이 지대했다. 그럼 녀석을 만날 일은 더더욱 요원해지는 것이다. 나를 바통 터치한 정장이 레드카펫 저리가라 할 복도를 끌고 갔다. 안쪽에 있을 것이 분명한 카지노 도박장은 보이지 않았다. T룸이라 불린 방 앞에서 정장이 문을 두드렸다.
“데려왔습니다.”
안의 방에선 아무런 답이 들리지 않았음에도 정장이 문을 열어 나를 휙 밀어 넣었다. 멋대로 나가지도 못하게 밖에서 문을 쾅 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 눈에 봐도 일 이푼이 아닌 것 같은 고급 가죽 소파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설은 어른이 된 녀석이 담배를 펴고있었다. 내 쪽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장초를 연신 태우기만 했다. 이주율 이 새끼야! 라는 말은 목구멍에서 걸린 채로 쉽사리 나오지가 않았다. 결국 이주율이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도 문 앞에 멍청이 채 서있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이주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등학교 때는 나만했던 키가 이젠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자라있었다. 스물이 넘어서 자라는 경우는 드문데 이주율은 그 드문 케이스 중 하나였다.
“너 뭐야, 왜 이렇게 완벽해?”
나를 쳐다보는 이주율의 시선이 이상했다. 주먹질을 하거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녀석은 기가차단 얼굴로 나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정작 기가 차는 것은 나였다.
“드디어 내 취향을 알아차린 건가? 만날 씹창들만 보내서 기분도 좆같았는데 오늘은 보너스라도 줘야겠어?”
이주율이 신기하단 얼굴을 하고 입을 슬쩍 벌린 채 내게 다가왔다.
“이주율.”
내 목소리를 들은 이주율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설마 했는데, 내가 이주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나보지? 그냥 지나치게 닮은 사람이가 생각했던 거냐? 황당함의 극치였다.
“형 얼굴도 잊었냐?”
“…이주인.”
“형이라고 불러.”
“이주인.”
“하긴, 나를 형이라고 부른 것도 까마득한데.”
“진짜 이주인이야?”
이주율이 양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그 손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은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얼굴을 틀어 뒤로 몸을 빼자 이주율이 웃었다.
“진짜네.”
이주율이 뒤를 돌아 다시 소파로 향했다. 담배를 새로 꺼내 무는 모습에 난 다가가지도 못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냥 들여보내 주던데.”
휙, 하는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얼굴 옆으로 재떨이가 날아갔다.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재떨이가 문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그 소란에 밖에 있던 정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장의 몸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 ‘악귀.’ 라는 단어가 정장에게서 뚝 튀어나왔다. 이주율을 향한 단어였다. 선글라스 안의 눈빛은 완벽하게 겁에 질려있을 것이다.
“이주인, 누가 들여보냈어?”
“네?”
“누가 들여보냈냐고!”
담배 필터를 이로 잘근잘근 깨무는 이주율이 난폭함을 드러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 녀석이 정말 미치지 않는 이상에야 나를 두들겨 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제일 형님이 이쪽으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제일이 그 새끼 목 닦고 기다리라 해.”
“네?”
“두 번 묻지 마. 주둥이 인두로 지져줄까?”
“죄송합니다.”
정장이 살며시 문을 닫았다. 개 같은 성격은 여전하구나. 숨을 크게 들이켜고 바닥에 재를 떨구는 이주율에게 다가갔다. 이주율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건지, 안아달라는 건지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밖에 새끼들한테 창부 취급당하니까 어때?”
“그럼 네가 그렇게 만든 거겠지.”
“내 기분은 딱 좆같아.”
이주율이 불현 듯 몸을 일으키더니 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나를 소파에 억지로 앉혀 허리를 꽉 껴안았다. 벗어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는 내 동생이고, 우리는 형제니까. 그리고 가족이니까. 지금도 예전에도 나를 너를 아주 내치지도 못한다.
“촌구석에 처박혀있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다시 올라왔어?”
이주율은 껴안은 자세에서 미동도 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내가 시골에 있던 건 어떻게 알았어?”
“주인아, 이주인.”
녀석이 대답을 회피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처럼 부름이 간절했다.
“이주율, 네가 깡패 짓을 하던 남색 질을 하던 아무래도 좋아. 딱 하나만 물어보려고 찾아온 거니까.”
형제간의 재회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주율의 가슴을 밀어내자 녀석이 털썩 하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녀석의 이마를 위태롭게 가렸다.
“이주율, 네가 그랬어?”
“뭘?”
이주율이 카펫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동그랗게 카펫에 구멍이 뚫리며 담뱃불이 진화됐다.
“부모님. 네가 그랬냐고 묻고 있잖아.”
“왜 네가 하지 않았지? 라고는 안 물어보는데?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이미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래,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해.”
넥타이가 가슴께 언저리로 풀어진 이주율이 내게 달려들었다. 목과 머리를 잡아 움직임을 봉쇄한 다음 내 입술을 먹어치웠다. 꽉 닫힌 입술을 억지로 열게 하듯 연한 입술 살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었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화끈거리며 부어올랐다. 발버둥 치며 녀석을 밀어내려하는데, 예전보다 더 힘에 부쳤다. 전에는 막으려면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현저하게 완력이 달라져 있었다. 이주율은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는 틈을 타 내 입술에 함부로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으득하며 두터운 살점이 뜯어지는 느낌이 났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녀석의 복부를 주먹으로 질렀다. 거친 숨이 뱉어지며 이주율이 뒤로 물러났다.
“짐승 같은 짓 좀 하지 마!”
“내가 남색 질을 하든 말든 상관 안한다며. 널 상대로 하겠다는데 불만이야?”
내 입술에서 베어 나온 것이 분명한 핏물이 이주율의 아랫입술에 머물러있었다. 이주율이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그 피를 핥아먹었다.
“말 돌리지 마. 그 날 사고 네가 한 짓인가만 말 해.”
“아, 그게 그렇게 궁금하셨어? 내가 네 부모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가 그렇게 궁금했어?”
“내 부모라니? 우리 부모님이잖아.”
“참 짜증나는 일이지. 낳아주기만 했다고 부모가 되는 법칙이. 두 아들 전부 정신병원에 집어 처넣을 궁리만 하던 인간들인데 말이야.”
이주율이 피곤한 듯이 턱을 괬다. 나른하게 풀린 눈이 나를 비웃었다.
“그래, 내가 죽였어.”
“너!!!”
“근데 증거 있어?”
이주율의 손에 의해 흐트러진 옷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 이주율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웃었다. ‘상처, 결백, 아버지, 자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색을 띤 글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맴도는 그 글자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도 모르겠어서 그저 멍하니 있었다.
“속에서 나온 생각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해? 속마음도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게 사람이야.”
이주율이 글자를 응시하는 나를 비웃었다.
“주인아, 이리 와.”
소파에서 일어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주율이 떠다니는 문자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장난감을 만지듯 천천히 뭉갰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과 함께 문자가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소멸되진 못했다.
“이주인, 이제 우릴 방해 할 건 아무 것도 없잖아.”
타이르듯 말하는 녀석이 소름끼쳤다.
“너만 나를 좋아하면 돼. 그게 그렇게 힘들어?”
“동생으로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어.”
“형하고 섹스하는 동생이라도?”
“너도 나도 머리를 식힐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나 보다.”
이제 서로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자. 라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네가 인정하면 나는 절대 다신 보지 않을 생각으로 찾아왔어. 이주율 너만 아니었으면 오래전에 관계를 끊어버렸어. 네가 내 동생만 아니었으면…. 하지만 너는 항상 그걸 악용하지.
“가지 마.”
뒤돌아서 문을 여는 내게 소리쳤다.
“이주인! 가지 말라고.”
나는 이주율의 외침을 무시하고 복도로 나왔다. 녀석이 나를 불렀지만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방음이 잘 되는 건물인지 이주율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듬성듬성 서 있던 정장들이 저마다 이어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주인.’ 이라는 글자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여러 곳에서 생성됐다. 불안한 기분을 지우며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선글라스를 쓴 검은 정장들의 시선이 전부 내 쪽을 향해있는 것만 같았다.
제길!
복도를 질러나갔다. 나를 잡으라는 정장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내 앞을 막은 정장을 미안하지만 발로 밀쳐내고 뛰었다. 가속도가 붙어 덩치가 좋은 정장들이 나자빠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달리면 비상구다. 비상구에도 두 명의 정장이 버티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보다는 비상구로 향하는 게 더 현명했다. 비상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묵야?!”
한물가다 못해 진물이 났을 저기 UFO가 있다!를 사용했다. 진부하긴 해도 사람들은 늘 같은 수법에 넘어갔다. 두 남자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당황하며 뒤를 돌았다. 상체를 잔뜩 숙여 어깨로 그 둘을 밀쳐내고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묵야씨, 미안합니다. 그래도 일단 내가 살고 봐야하니까. 정장이 내 패딩에 달려있는 모자를 잡았지만, 패딩마저 벗어던지고 미친 듯이 계단을 올랐다. 이대로 잡히면 어떤 사단이 날지 모른다는 예감이 가득했다. 일단 로비까지 달려 나가면 정장들도 나를 억지로 끌고 가지는 못 할 것이다. 천국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1층 로비의 비상구 문을 활짝 열었다. 샹들리에에서부터 천국의 빛이 확 쏟아졌다. 로비 중앙으로 전력 질주하는 나를 사람들이 하나같이 쳐다봤다. 오히려 시선이 몰리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덕에 1층에 대기하던 검은 정장들이 나를 순식간에 발견하곤 손가락질 했다. 정장들은 다른 손님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많은 로비에선 어쩌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것도 오산이었다니. 정장 하나가 뒤에서부터 내 목을 끌어안았다.
“살려주세요! 조폭들이! 컥!”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애처롭게 소리를 질렀다. 남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차가운 도시 사람도 멈춰 설 만한 외침이었다. 사람들은 질질 비상구 쪽으로 끌려가는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만 봤다. 정장은 내가 더는 소리를 못 지르도록 팔뚝에 힘을 줘 목을 졸랐다.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색색거리며 나왔다.
“사, 살려, 켁!”
유진이 한국인 잔인해! 라고 했던 말이 새삼 실감됐다. 다들 힐끔힐끔 구경만 할 뿐 도와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카지노에서 빚을 지고 도망쳐 나온 거라며 쑥덕대는 소리도 들렸다. 난 도박이라면 질색한다고! 이주율에게 고스란히 잡혀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노랬다.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어 내가 미쳐서 호랑이 굴에 들어갔지.
“이주인?”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계속적으로 졸리는 숨에 의해 시야가 흐릿해져 갔다. 바닥에 양 다리를 뻗고 버티는 터라 시야가 한참이나 아래였다. 간신히 눈동자를 들어 나를 부른 남자를 봤다. 목이 졸리며 생리적인 현상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흐릿하게 보이는 건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검은 정장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목을 조르고 있던 힘이 풀려났다.
“컥! 콜록, 켁! 나, 죽네! 컥!”
청결한 호텔 로비에 기침을 하며 삼키지 못하는 침을 뚝뚝 흘렸다. 내 목을 졸랐던 정장은 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며칠 전에 경찰복을 입고 내 카페를 찾았던 덩치가 내 대신 정장에게 복수를 해주고 있었다. 저 덩치가 있다는 건 혹시.... 속눈썹을 적신 눈물까지 털어내자 나를 부른 남자가 누군지 아주 잘 보였다.
“이주인, 여긴 무슨 일이지?”
묵야가 휘청대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오랫동안 숨이 끊어진 탓에 다리에 힘이 축 풀렸다. 묵야가 나를 안은 채로 등을 토닥였다. 커다란 손이 숨통이 트이도록 도왔다. 목안이 퉁퉁 부운 것처럼 메말랐다. 묵야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부축해 로비 안쪽의 바로 향했다. 묵야에게 할 말도 없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묵야가 나를 바테이블 의자에 앉혔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했지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하는 분위기였다. 웨이터가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이 아직도 따끔거려서 물의 절반은 다시 컵으로 뱉어야했다. 흠흠, 하면서 목을 가다듬는데도 새된 목소리만 나왔다.
“설마 나를 보러 온 건가?”
묵야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묵야가 엄지손으로 내 턱에 흥건한 물과 침이 섞인 잔해를 닦아주었다.
“방금, 카지노 측 녀석들이던데. 그럼.... 혹시 나 모르게 도박이라도 한 거였나?”
엄청난 오해였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려는 찰나에 묵야가 씁쓸하게 말했다.
“빚이 얼마나 되지? 도망치지 말고 일단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그랬어.”
진지한 묵야의 말투에 나조차도 빚쟁이가 된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자제력을 잃은 목소리가 삐끗했다. 목구멍 끝에 구슬이 걸려서 쉰 소리만 나왔다. 사정 안 봐주고 목을 졸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묵야는 내 목소리가 가다듬어질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미지근한 물을 입에 품는 묵야의 뒤로 덩치가 나타났다. 나를 보고 씨익 웃는데 비웃는 건지, 자기가 대신 악의 무리를 해치웠다고 의기양양해하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저 덩치와 내 목을 조른 정장은 같은 편이니 악의 무리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형님, 밑에 놈들 올라오는 중입니다.”
덩치가 묵야의 얼굴 옆으로 묵야보다 두 배는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었다. 묵야가 지갑을 꺼내려고 하기에 진정된 목소리를 키웠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도박 안합니다!”
묵야가 픽 웃었다.
“그럴 것 같긴 했어.”
“그럼?”
“점수 좀 따보려고.”
그러니까... 내가 도박을 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없는 빚을 갚아주겠다고 한 이유가 나한테 점수 따기 위해서라고? 묵야의 답에 수 초간 멍했다.
“카지노 녀석들에게 왜 쫓기고 있었지?”
“말하자면 사연이 굉장히 길어서… 일단 일어나죠!”
“그러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패딩을 잃어버려 바이크를 타기엔 엄청난 추위가 엄습할 것을 알지만 지하로 다시 내려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종종 걸음을 걷는 내게 묵야가 걸음을 맞췄다. 정장은 입은 녀석들이 로비에서 이어폰을 끼고 두리번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정장이 다가와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나에게 인사한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카지노 1팀 윤제일입니다.”
“어, 그래. 안녕하긴 한데.”
묵야는 길을 막아선 정장에게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틈을 타 뛰쳐나갈까 하는데 묵야가 내 팔뚝을 그러쥐었다.
“이 사람에게 볼일이라도?”
“이전무님께서 그 분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묵야의 뒤를 따라왔던 덩치가 자신을 윤제일이라 밝힌 정장의 멱살을 잡았다. 묵야가 손을 휘휘 내젓자 덩치가 잡은 멱살을 놨다.
“볼 일은 내가 먼저라서. 실례하지.”
묵야가 내 팔뚝을 잡은 채로 호텔 로비를 질러나갔다. 이사라 불린 묵야가 이주율보다는 높은 위치인지 아무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지하에서 올라온 정장들 몇몇이 이도저도 못하는 기색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도어맨이 있는 곳까지 나온 묵야가 갑자기 자신의 코트를 벗었다. 부드러운 캐시미어 코트가 내 어깨를 감쌌다.
“뭐 타고 왔어?”
“바이크요.”
묵야가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카지노 녀석들이 따라오기 전에 바이크를 세워뒀던 호텔 측면으로 향했다. 묵야는 내 바이크를 보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택시 타고 가는 게 어때?”
“멀미가 심해요.”
“그래, 뭐 딱히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군.”
나는 묵야가 어깨 위에 올려준 코트에 팔을 집어넣었다. 소매가 길어서 바이크의 핸들을 잡은 손등이 코트로 전부 다 덮였다.
“나머지 대화는 집에 가서 듣도록 하지. 조심해서 가.”
“네, 감사해요.”
묵야와 덩치는 내 바이크가 호텔을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염치없긴 하지만 내게 코트를 내준 묵야는 세단을 타고 다닐 테니 추울 걱정은 없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미지근한 커피와 함께 이 고급 캐시미어 코트를 건네줘야지. 그나저나 캐시미어 100프로가 함유된 코트인지 보온이 패딩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바이크에 앉아 내 장신보다 긴 코트를 펄럭이며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은 썩 멋지지 못할 것 같았지만.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현관문을 열었다. 손등은 무사해도 손가락이 얼어붙었는지 달달 떨렸다. 어쩌면 긴장이 풀려서 그럴 수도 있다. 열린 대문을 슬쩍 닫았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쾅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혔다. 마당에서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유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진은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을 연 채로 나를 반겼다.
“형, 금방 왔네. 근데 그 옷은 뭐야?”
유진이 도로의 먼지들이 달라붙은 캐시미어 코트를 손가락질 했다. 묵야는 종아리에서 멋스럽게 기장이 끝나건만 내가 입으니 발목에서 코트가 거치적거렸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급격한 따뜻함에 머리가 핑 돌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코트를 벗었다. 유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헬멧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형, 지금 배고픈 얼굴 같아.”
피골이 상접하단 소리겠지. 현관에서 바람을 맞았던 유진이 금색의 앞머리를 정리했다. 자세히 보니 금발에 머리칼도 자연스럽게 곱실거렸다. 금발에 반곱슬이면 대게 느끼하거나 여성스러울 법도 한데 유진의 얼굴은 외려 더 남자다워보였다.
“그렇게 보면 나 부끄러워.”
유진이 샤이보이 흉내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의 반만 과묵하고 진지해도 좋을 텐데 말이지…….
“태형 형은 언제 갔어?”
“형 나가고 바로 갔어.”
“그래.”
일단 이주율이 바로 우리 집을 습격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그럴 가능성도 높았지만 아니라는 사실에 기대를 더 심고 싶었다. 현관으로 재빨리 뛰어가 아래위로 잠금 장치를 다 걸어 잠갔다. 마당 밖도 흘끔 본 다음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소파로 돌아왔다.
“무슨 일있어?”
유진이 캐시미어 코트로 손을 가져가라는 것을 탁 쳐서 막았다. 사이코메트리를 하려는 심산이 농후했다.
“너, 앞으로 나랑 계속 마주칠 거면 함부로 읽을 생각 하지 마.”
“치사해! 형도 내 생각 읽잖아.”
“난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보이는 거잖아.”
유진이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라 코트에서 미련을 버렸다.
“아! 그렇지. K3 과다 복용사건은 아마 사망자 실수로 일단락 될 것 같다고 하더라.”
유진이 화제를 전환하며 나에 대한 궁금증을 완화시켰다.
“왜?”
“왜긴 왜겠어. 심증도 약하구, 증거도 없으니까 그렇겠지.”
“K3는 계속 유통되고 있대?”
“아니, 피해자 죽은 뒤로는 이미 유통이 끊겼대.”
그 시기가 며칠 전 내 카페로 온 마약 포대와 맞물려졌다. 그 마약을 사파에서 다시 거둬들인 것을 보니 아마도 그 포대에 들은 것이 K3가 아닐까 예측만 했다. 사파측에서도 부작용이 심한 마약을 유통시키진 않을 것이다. 마약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금이 엄청날 텐데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짓은 하지 않겠지.
“태형 형도 호출 받아서 간 걸보면 다른 한 건이 크게 터진 것 같아.”
“그래?”
“응.”
관심을 보이는 내 반응에 유진이 눈을 반짝였다. 뻔뻔하긴 해도 얄미운 녀석은 아니었다. 원래대로 동생이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일 텐데. 유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외국인 동생이 나를 보고 베시시 웃었다. 유진에게서 생겨난 단어가 폴랑폴랑 날아와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간지럽게 붙은 그것을 떼어냈다. ‘like’ 진홍색의 그 단어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수집하게 되는 문자 중에 영어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예쁜 녀석을 없애는 건 문자문명에 대한 모독이다.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내 방으로 향했다. 뒷주머니에 넣었던 녀석을 꺼내서 침대위에 풀어주자 언어는 달라도 상성이 비슷한 글자들과 한데 어울렸다. 유진은 내 행동을 소파에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뭐해?”
“그냥.”
드드득, 하는 진동이 테이블을 울렸다. 유진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응, 형.”
태형 형인가보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유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니, 귀찮음이 더 가미됐다고나할까.
“알았어. 갈게.”
유진이 전화를 끊으면서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유진은 서둘러 털코트를 챙겨 입고 나를 불렀다.
“형, 나 경찰청에 다녀올게.”
확실히 한국말을 잘해도 한국 사람도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경찰청이라는 말에선 외국인의 냄새가 느껴졌다.
“왜 웃어?”
“너, 경찰청 쇠창살 해봐.”
유진이 그까짓 것, 하면서 입을 열었다.
“경장청 채찰상.”
푸핫, 하고 웃자 유진도 이럴 리가 없다면서 혀를 굴렸다. 다시금 말을 반복하는데 갈수록 발음은 꼬여만 갔다.
“하하, 한국 사람들도 잘 못하니. 너무 기죽지마.”
“우씨.”
유진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내 허리를 감싸 안으려 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녀석을 막았다. 빈틈을 찾던 유진이 내 방어막을 무너뜨렸다. 양 손목이 녀석에게 잡혀서 위로 쭉 들린 것이다.
“살인사건이래. 늦을지도 몰라.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무슨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아.”
“그러게나 말이다.”
유진이 문단속 잘 하고 있으라면서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던 유진에게 물었다.
“한국보단 미국이 더 낫지 않아?”
유진이 장난기가 가신 얼굴로 쓰게 웃었다.
“태형 형 베이비 태어나는 거 보고 돌아가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에게 내 자리를 뺏길까봐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단순히 사이코메트러가 활동하기엔 미국이 더 나은 편이라 생각했기에 물었던 것이었다. 유진은 미국에 가지 않느냐는 내 말을, 어서 미국으로 꺼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본의는 아니었는데 미안함이 생겼다. 일단은 유진에게 오해 풀라는 문자를 하나 넣고, 묵야에게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유진에게 답변이 몇 초 만에 도착했다. 미국인 문자 실력이 나보다도 뛰어났다.
[괜찮아, 오해하지 않았어.]
온갖 이모티콘과 귀여운 말투를 쓸 것 같았는데 예상외였다. 오히려 문자는 묵야보다 유진이 더 남자다웠다. 나도 모르게 묵야의 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다시 휴대폰이 진동하길 기다렸다. 휴대폰에 적힌 숫자 시계가 5번이나 모습을 바꿨음에도 문자는 도착하지 않았다. 바쁜가보다. 오랜만에 낮 시간에 텔레비전을 켰다. 60개가 넘는 채널을 돌려가며 볼만한 프로그램을 찾았다. 코미디 프로그램도 별 재미가 없어서 만화 채널로 고정시켰다. 짱구가 나와서 전혀 미인으로 보이지 않는 누님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짧은 에피소드로 연결되는 만화를 멍하니 구경했다. 짱구 스페셜 날인지 어느새 5편째 에피소드에 돌입했다.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기엔 만화프로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래도 혼자가 된 시점부터 생각의 꼬리를 물고 찾아드는 이주율에 대한 기억은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상황이 온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진 이주율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을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나는 능력을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이주율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녀석을 궁지로 몰아갔었다. 나는 이주율을 지켜주고 싶었다. 녀석이 그런 모습들만 보이지 않았다면. 정신병원에서 일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날, 이주율이 나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반항하는 나를 때려눕히고 억지로 강간하려했다.
이주율은 나를 거실 바닥에 내리꽂은 채 사지를 내리눌렀다.
“반항하지 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이주율이 웃으며 울고 있었다. 녀석의 슬픔 때문에 그대로 힘을 뺄까했지만, 우리는 이래선 안됐다.
“이주율, 내 눈 똑바로 봐. 내가 누군지 보라고!”
“형이잖아, 아니 이주인이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이주율의 눈이 굶주린 동물처럼 한계에 몰려있었다.
“무서워하지 마.”
이주율이 내 옆으로 피어오른 두려움을 없애지는 못하고 손안에 감췄다. 녀석이 내 윗도리를 벗기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이주율의 차가운 손이 내 유두를 깔짝였다. 유두가 딱딱해지자 가슴의 살을 잔뜩 끌어 모아 검지로 젖꼭지를 긁어내렸다. 이주율은 부어오른 성기를 내 허벅다리에 비볐다. 순간 내게 욕정하는 이주율이 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반항하자 이주율이 내 머리채를 잡아 거실 바닥에 그대로 짓찧었다. 처음 한 번은 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이 띵하더니 그 다음 두 번째에는 시야가 흐릿해졌다. 쾅, 쾅 하고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당하면서도 힘을 끌어 모아 이주율의 사타구니를 발로 찼다. 흐릿한 시야에서도 이주율이 입술을 비틀고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이주율은 내 가슴팍을 손으로 내리누른 다음 뺨을 거세게 후려 갈겼다. 올라탄 녀석을 밀어낼만한 힘이 없었다. 후려친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자 반대 방향으로 다시 한 번 손이 휘둘러졌다. 대비하지 못한 입 안이 터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코피도 흐르고 있는지 얼굴이 전부 축축했다. 나를 흠씬 패던 이주율이 내 정신이 혼미할 때쯤이 돼서야 행동을 멈췄다. 뺨이 부풀어 오르고 목안이 깔깔했다. 이주율은 엉망이 됐을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그냥 받아주면 되잖아. 네 말대로 우린 형제고 가족이니까 언제나 함께할 수 있잖아.”
형제 싸움을 해도 단 한 번도 녀석은 내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다른 집안 형제들은 죽기 살기로 싸움을 한다는데, 우리 집 형제들은 우애가 좋다며 자랑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녀석이 나를 흠씬 두드려 팬 것에 대해 단순히 녀석을 증오할 수는 없었다. 이주율은 자신조차도 제어가 불가능한 감정에 폭주하고 있었으니까.
이주율이 손이 얼굴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방어자세를 취했다.
“날 두려워하면 안 돼.”
이주율이 내 목덜미를 물었다. 숨만 색색 거리는 게 고작인 나는 축 널브러진 채 녀석이 내 몸을 지분거리는 것을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바지가 내려가고 녀석의 뱀 같은 손이 내 성기를 잡았을 때 몸이 경련을 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 개 같은 정신병원에 얌전히 갇혀서 있었잖아. 그런데 되돌아오는 답이 이게 뭐야?”
이주율이 이를 갈았다. 이주율은 자신의 어깨에 내 다리를 걸치고 바지를 풀어헤쳤다. 뜨거운 성기의 열이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막을 수 없는 무기력함에 눈만 감았다. 그 때였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주율을 형식상으로나마 축하하기 위해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신 것은. 부은 눈 사이로 경악한 아버지와 엄마의 모습이 꿈만 같았고, 내게 달라붙은 이주율을 떼어낼 때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와 이주율을 괴물 보듯 취급하는 부모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엉망이 된 나를 거실에 그대로 놔두고 아버지는 이주율을 골프채로 두드려 팼다. 긴 막대기라면 이골이 났다. 맞는 것도 이골이 났다. 제발,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만두라 소리치고 싶었다. 어머니는 머리가 깨지는 이주율을 보고도 두 손을 입으로 막고 숨만 죽였다. 안간힘을 써서 바지를 끌어올렸다. 이주율은 막을 수 있는 힘이 충분한데도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고 있었다.
“그만해요! 그만!”
코피가 꿀럭꿀럭 턱을 적시며 내려왔다.
“주율이 때리지 마시라구요! 내가 그런 거니까!”
“형이란 새끼가 동생하나 간수 못해?”
‘방종, 물건, 증오, 자식’ 골프채를 든 아버지에게서 독기가 잔뜩 머금은 글자들이 새어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분노할 때가 아니더라도 한 번도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보이지 않는 척, 밖에선 부모님의 사랑을 다 받은 척 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내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닐 것이란 건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주율도 알았다. 우리가 당신의 친자식이라면 아버지인 당신이 자신의 아들들을 이렇게 구타할 리가 없었다.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글자 역시도 온통 다른 남자의 이름뿐이었다. 내 부모는 늘 비겁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 그리고 서로에게서 마음을 등졌음에도 아닌 척하며 나와 이주율을 옭아맸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이 비겁했고 이주율은 그러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이주율은 정신병자가 됐다.
아버지의 골프채가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죽을 때까지 얌전히 매질을 맞을 것 같던 이주율이 아버지의 골프채를 잡았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주율은 그 골프채를 잡아서 바닥에 내리쳤다. 이주율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는지 눈을 지나쳐 흐르는 피는 꼭 피눈물 같았다.
“엄마, 말해요.”
이주율이 엄마를 보며 이죽거렸다.
“말하라고요, 내가 이 남자 자식 아닌 거 말해요. 그렇죠? 내가 저 사람 자식일 리가 없어. 다들 알고 있잖아? 그래서 그 추운 날 발가벗긴 채로 마당에 하루 종일 방치했을 때도 엄마는 숨죽이기만 했잖아요. 불쌍한 주인이 자식 아버지한테 맞아서 이틀 내내 정신 못 차릴 때도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말하라고! 정신병자는 내가 아니라 너희라고!!”
아버지가 골프채를 들려고 하자 그 손을 이주율이 발로 짓밟았다.
“지금 당신들 머릿속에서 뭐가 나오는지 맞춰볼까? 내가 미친 게 아니라 당신들 속내를 다 알 수 있으니 두려웠던 거겠지, 이주인 너도 잖아.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주율아, 하지 마. 그러지 마. 제발.”
“너희 두 놈 다 정신병원으로 직행할 줄 알아. 붙어먹을 것도 부족해서 형제끼리 붙어먹어!?”
아버지가 이를 갈며 이주율을 밀쳐냈다. 우리는 부모의 뜻대로 얼마든지 정신병원에 갇힐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인들과 다르기에 그곳에 갇힐 이유도 충분했다.
“이주인 너도 예외는 아니야.”
아버지가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나를 비웃었다. 안간힘을 버티고 서 있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그 후에 기억은 어둠 밖에 없다. 보험사 사람에게 듣기론 녀석을 다시 강원도에 위치한 정신병원으로 이송시키려 한 것이 그 다음날 이었고.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탄 자동차가 산길을 굴러 떨어졌다했다. 그 안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주율 뿐. 나는 이주율에게 폭행당한 것 때문에 뇌진탕이라는 병명으로 정신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있던 중이었다. 내가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는 이미 사고보험조사가 끝나있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루기 전에도 이주율은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아버지의 운전 실수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 일이 없었다. 다리 하나가 날아갈 뻔한 교통사고가 있고나서는 대리운전기사 아니면 엄마가 대신 운전을 하곤 했다. 그런 사람이 강원도의 산길을 직접 운전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나는 이주율이 부모님을 죽였다하더라도 녀석을 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녀석이 내게 바라는 것을 만족시켜 줄 수도 없다. 다만 진실이 있다면 이주율이 내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녀석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었었던 거실 바닥을 내려다 봤다. 수십 년간 아버지가 나와 이주율을 괴롭혔던 집이었다. 유진은 이곳에서 보지 말아야할 것들을 전부 읽어냈을 것이다. 유진이 만일 내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나는 폭력에 의해 굴복하지 않았다. 잠시의 방황은 있었지만 성격적인 결함이 있게 자라지도 어두운 성격으로 변모하지도 않았다. 결국 살아있는 것은 나였다. 내 솔직한 심정은 아버지가 끝끝내 살아남아서 늙어죽었으면 했다. 그를 용서해서도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늙는 것만큼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나는 자식들에게 매달리는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습게 무시할 정도의 냉정함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비겁한 어른이 됐으며, 더러운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내게서 피어나는 독한 문자를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띵동띵동-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혔던 나를 초인종이 끌어올렸다. 모니터에 비친 사람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모니터에 보인 사람은 유진뿐이었는데 같이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묵야. 유진은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묵야를 뒤에서 이글이글한 눈으로 노려봤다.
“일찍 오셨네요.”
“걱정이 돼서.”
유진은 묵야를 앞질러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묵야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유진은 일부러 묵야의 캐시미어 코트를 깔고 앉았다. 묵야의 손가락이 까닥까닥 일어나라며 유진을 가리켰다.
“미친 외국인이라 그런가, 예의가 없군.”
묵야는 무시하고 앉아있는 유진을 향해 차갑게 뱉었다. 나는 유진이 깔고 앉은 캐시미어 코트를 끌어냈다. 유진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잘 입었어요. 세탁해서 돌려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아니, 네 냄새가 나.”
묵야가 내게서 코트를 받아들어 눈만 드러낸 채 냄새를 맡았다. 보통 사람이 저러면 변태 같아 보일 텐데 우수에 젖어 연인을 그리워하는 화보집의 한 장면 같았다. 묵야는 외모 덕을 톡톡히 봤다.
“나 내일 나가니까 당신도 나가.”
“미친 외국인이 나가면 나도 나가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키지.”
묵야는 유진을 미친 외국인이라 부르기로 마음먹었는지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넌 일 도와주러 갔다면서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유진에게 시선이 향하자 녀석이 신이나서 꼬리를 살랑댔다.
“밤에 다시 오래. 취조실 비디오 고장 났대.”
“괜히 발품 팔았네.”
“응.”
묵야가 코트를 접어서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유진은 묵야를 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진짜 저 녀석은 어리다. 내 관심이 자신에게 향했으니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묵야는 소파에 앉아 관자놀이에 손을 올리고 잠시 골치가 아픈 표정을 했다. 왜 그러지? 혹시 이주율 때문인가? 섣불리 짐작하는데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태형 형인가 싶어 모니터를 봤다. 눈을 다시 비비고 봐야할 것만 같아서 모니터에 비치는 녀석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서 확인했다. 이주율. 녀석은 잠시도 참지를 못하고 초인종 벨을 계속 눌러댔다. 그동안 날 피해서 잠적했던 녀석이 당당하게 벨을 누를 줄은 몰랐다. 오늘 내가 찾아갔던 것이 크나큰 실수였나 보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이주율은 제 멋대로 대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잠가도 소용없을 거다. 이주율도 이 집 사람이었으니 대문 열쇠 뿐만 아니라 현관 열쇠도 가지고 있다. 신발장 앞에 서서 이주율을 내려 보는데 녀석의 손에 바퀴달린 여행 가방이 들려있었다.
“뭘 그렇게 봐.”
“이주율. 왜 왔어?”
“내 집 내가 다시 들어오겠다는데 불만 있어?”
어어어!!? 유진의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렸다. 이주율은 그런 유진은 무시하고 묵야를 발견하곤 인상을 썼다.
“뭐야, 나 없는 새 하숙생이라도 들였어? 이사님이 요새 돈이 궁하신가봅니다?”
묵야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바짝 붙었다. 내 얼굴을 옆으로 묵야가 얼굴을 내밀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둘이 무슨 사이?”
“제 동생이에요.”
“친동생?”
“네.”
“미친 외국인에 미친 친동생이라. 사이코들만 꼬이는군.”
마치 묵야 자신 역시 사이코라 지칭하는 것만 같았다.
“사이코 수준으로 따지면 이사님이 제일 상급이실 것 같습니다만.”
“글쎄, 나는 충분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군.”
묵야가 내게서 물러나며 긍정을 바라는 눈으로 나를 봤다.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기가 애매해 시선을 피했다. 이주율이 구두를 벗고 거실 위로 올랐다. 유진은 어버버하는 눈치로 손가락질만 해대고 있었다. 집의 명의는 내 앞으로 돼 있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이주율의 집인 것임에도 변함은 없다. 2년이나 넘도록 나를 피해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행동도 이주율의 성격으로 지차면 그리 뻔뻔한 일도 아니었다. 슬쩍 묵야를 올려보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이주율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주율은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덜컥, 덜컥. 이주율은 돌아가지 않는 문고리를 확인했다. 이주율이 나를 돌아봤다.
“이거, 네가 그랬어?”
이주율이 이를 갈았다.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뒤로 물러선 바람에 묵야의 가슴팍에 등이 탁 부딪혔다. 묵야의 손이 허리에 감겼다.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것만 같아 묵야의 손을 떼어냈다. 손끝에 닿는 묵야의 손등이 제법 따뜻했다.
“충동적으로 잠갔는데, 생각해보니 열쇠가 없더라구.”
충동적은 아니었다. 즉흥적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래?”
이주율이 이죽이며 발로 문고리를 걷어찼다. 쾅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반대편으로 쑥 빠졌다. 그 한 방으로 문고리가 빠져나가며 동그란 구멍이 생겼다.
“폭력적이군.”
묵야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형인데, 왜 형이라 안 부르는데?”
유진의 말처럼 이주율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은 아니었다. 단지 나를 형이라 부르기 싫어할 뿐. 동생이니 그나마 이정도지, 이주율이 형으로 태어났으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지독히 권위적이고 얼마나 억압적이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이주율은 여행용 가방을 자신의 방 한구석에 처박아뒀다. 스물스물, 이주율의 방에서부터 습한 문자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을 치려했지만 묵야가 단단히 버티고 있어서 무리가 있었다. 이주율이 나를 찾아오는 검은 문자들 사이에 서서 웃었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집착’을 흔들어 떼어냈다. 거머리처럼 다시 달라붙는 것을 짓밟았다.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며 눈과 목을 매캐하게 만들었다.
“방문 닫아.”
“싫은데?”
“닫으라고!!!”
신경질적인 내 목소리에 이주율이 방문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묵야나 유진은 히스테릭한 내 반응의 이유가 뭔지 알 리가 없었다.
어차피 문고리가 엉망이 됐으니 그 틈으로 얼마든지 새어나올 텐데 소용없잖아. 라고 이주율이 말하고 있었다. 재빨리 걸어가서 방문을 닫았지만 문구멍 사이로 빠져나오는 문자들이 달라붙었다. 발광을 하다시피 손을 털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이 소멸시켰다. ‘이주인, 감옥, 상처, 낙원, 통제’ 뜻을 통일할 수 없는 단어들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별거 아닌 글자임에도 괴로운 이유는 이주율의 방에 있는 모든 문자들은 나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징그러운 벌레를 없애는 사람처럼 치를 떨며 그것들을 떼어냈다. 순간 마른기침이 뱉어져 나왔다. 이 정도의 독기를 머금은 문자는 오랜만이었다. 천식을 앓고 있진 않지만, 이럴 때마다 그 병을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십분 이해했다. 눈까지 충혈 되가며 기침을 하는 내 등을 묵야가 두드려주었다. 따뜻한 손이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저 안쪽에서부터 울컥하고 피가 토해졌다.
“씨발!”
손바닥을 흥건히 적신 내 피를 보며 이주율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주율은 급히 문고리를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유진까지 합세해 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저게 왜 독하다고 생각해?”
이주율이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너를 상처주고, 넌 내게 상처를 준다. 그런 것을 왜 인정하려 하지 않는지 그저 마음이 답답했다.
“저것들은 절대 독하지 않아. 네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독으로 다가오는 것뿐이지.”
이주율이 자신의 방을 가리키며 내게 울분을 토했다. 나는 입가를 적신 핏물을 쓸어내렸다.
“내일은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군. 아는 의사가 있어. 시간 비워놔.”
묵야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해댔다.
“의사도 못 고쳐요. 몹쓸 병이라.”
묵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치병이라도 걸렸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건 나만 고칠 수 있어요. 신경성이라 서요.”
“그럼 카운슬러를 알아보지.”
묵야의 걱정에 이주율이 이죽거리며 웃었다.
“나 같아도 저런 동생 있으면 피 토할 거야.”
내 손을 닦아주던 유진이 이주율에게 핀잔을 던졌다. 유진아, 널 얼마보진 않았지만, 그런 바른 말을 할 때도 있긴 있구나.
세 명의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덕분에 피냄새로 엉망이 된 속이 더 나빠졌다. 바이크를 타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리고만 싶었다. 다시 돌아갈까? 장주 할배도 내게 무슨 일 생겼나 걱정할지도 모르고. 급하게 올라온 터라 일주일 안에는 카페로 돌아가 몇 안되는 단골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은 있었다. 사실 인사를 하지 않고 무턱대고 서울로 올라온 이유 역시도 언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유종의 인사를 했는데, 떡하니 며칠 만에 카페를 재개장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못 돌아가.”
이주율은 내게서 피어난 ‘귀로, 카페’ 의 문자를 노려봤다. 이주율이 내가 카페를 운영했던 것을 알고 있다면 장소도 당연히 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때였다.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아!!! 하는 열창적인 이승기의 목소리가 이주율의 정장 안주머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너~라고 부를게! 하는 가사가 들릴 찰나에 이주율이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이십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오면서 저런 표정은 또 새로웠다.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게! 라는 가사가 나올 때까지도 나를 빤히 쳐다본 채 녀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시에 웅웅대는 진동소리까지 합세해 난리법석이었다. 묵야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먼저 울린 이주율보다 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이주율도 반주부분으로 넘어가자 전화를 받았다. 저거 혹시, 나 들으라고 지금까지 안 받은 건 아니겠지? 나는 일단 누나가 아니고, 형이니까. 적어도 그렇다고는 생각하자.
둘이 전화에 집중한 틈을 타 욕실로 이동했다. 거울을 보니 방금 초식동물이라도 잡아먹은 듯이 입가가 피로 젖어있었다. 차가운 물로는 잘 씻기지 않기에 미지근한 물을 틀어 입을 닦아냈다. 그래도 잘 지워지지 않아서 비누거품을 내 세수까지 마쳤다. 치약을 짜서 양치질을 하자 칫솔에 분홍색의 핏물이 베어났다. 이왕이면 자체 정화 능력이 피토하는 것이 아닌 볼일을 보는 것만으로 해결되도 좋을 텐데, 독을 뱉을 거면 입이 아닌 정말 뱉어야 할 곳으로 빼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니던가? 킁킁, 얼굴을 닦는 수건에서 쉰내가 났다. 세탁해 놓고 잘 말리지 않으면 나는 냄새였다. 그 수건을 들고 나와서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유진까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세 명의 표정이 심각해서 다들 같은 일로 전화를 받은 게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왠지 나까지 휴대폰을 봐야할 것 같은 기분에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을 보는데 내 건 잠잠했다. 묵야와 이주율이 거의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나가봐야겠는데.”
“나갔다온다.”
이번엔 동시였다. 사실 묵야가 조금 더 먼저 말하긴 했지만.
묵야가 이주율을 보고 웃었다.
“카지노 문제 때문에 나까지 엮이게 한 건 좀 짜증나는군.”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 꽤 살벌했다. 묵야는 화가 나면 웃는 쪽인가? 그럼에도 적당히 짜증났다 뿐이지 열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랫사람 책임지는 게 윗사람이 할 일 아니던가요. 이사님.”
“그렇군, 이 일도 그만 둘 때가 됐나…….”
점심밥이나 먹을까, 라는 듯한 성의 없는 말투에 내가다 깜짝 놀라버렸다.
“다녀올게.”
묵야가 물기로 축축한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묵야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손길을 거두고 현관으로 향했다. 이주율도 소파를 지나쳐가며 내 얼굴로 손을 가져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고, 내 과민한 행동을 깨닫고 손을 내렸을 땐 이주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있었다.
“나를 그 새끼 쳐다보듯이 보지 마.”
이주율이 이 집안에서 그 새끼라 말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그런 적 없어.”
“차라리 그렇다고 하지?.... 나한테 희망을 심어주는 건 너야.”
“내 동생이니까.”
전화를 받고 있던 유진은 우리의 대화에 집중이 안 되는지 한쪽 귀를 틀어막고 안방으로 이동했다.
“어디가지 말고 집구석에 처박혀있어.”
말투하곤..... 묵야 다음으로 이주율까지 나가버리자 꽉 찼던 거실이 썰렁해졌다. 평수가 작진 않았지만 남자 네 명이 살기엔 좁았다. 내가 이주율과 단 둘이 사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묵야와 유진을 하숙생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 집에서 모두가 같이 모여 살면 아마 내 살은 하루에 1킬로씩 쭉쭉 빠져 내릴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할 문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따로 나가 사는 것인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니 태형 형의 일을 자주 도와야했다. 멀쩡한 내 집 놔두고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건 영구가 땡칠이네 집 가서 사는 거와 다를 게 없었다. 휴대폰이 뱅글뱅글 테이블 위를 돌았다. 드디어 내게도 전화가! 라는 심정은 아니었지만 태형 형임을 확인하고 받았다.
“네, 형.”
“그래, 주인아. 유진이에게도 전화했는데 녀석이 하도 빼길래 직접 전화했다.”
“무슨 소리에요?”
“이번에 큰 건 터진 거 못 들었어?”
“큰 건이요?”
“사파 행동대장, 그러니까…. 에비스 호텔 카지노 팀장. 약 네 시간 전에 사체 상태로 호텔 주차장에서 발견됐어. 자세한 건 서에 와서 얘기하자. 올 거지?”
“네, 금방 갈게요.”
안방에서 나온 유진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전화하는 나를 봤다. ‘danger’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내 뒤를 쪼르르 따라붙는 유진을 무시하고 거실 서랍장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쭉 늘려서 송곳니로 끊은 다음에 주율 방의 구멍 난 문고리를 막았다. 다섯 번 정도 뜯어서 봉하고 나자 투명한 테이프가 여러겹으로 겹쳐져서 불투명하게 변했다. 단단히 테이프로 막힌 구멍에서 더는 문자들이 새어나오지 못했다.
“주인, 갈 거야?”
유진의 목소리에 자신이 없는 건 나를 주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 확실했다. 이주율이 너라고 부른다고 유진 너마저 하극상을 허락한 것은 아니다.
“형이라고 안 부르면 답 안 해.”
“걔는 주인이라고 부르고 나는 왜 안 돼? 미국식으로 부르면 주인이 맞아.”
“걔는 안하무인이고, 넌 아니잖아?”
타이르듯 말하자 유진이 베시시 웃으며 기분이 풀어졌다.
“그렇지? 난 배려 깊은 사람이야.”
남의 사생활을 캐는 사람의 어디에서 배려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태형 형한테 갈 거지?”
“형, 꼭 갈 거야?”
“꼭 갈 건데, 왜?”
“아니, 위험하니까.”
“위험한 건 항상 똑같지 뭐. 살인 사건이 한두 번도 아니구.”
“I hope so.”
“뭐?”
한국말을 잘 구사하긴 했지만 간간히 영어로 말하는 유진 때문에 고등학교 때 이후로 놨던 잉글리쉬 스터디를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영어는 정말 베리 스터디 투 하드 했는데…….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대충 알아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뭐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유진이 예의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묵야의 코트가 소파에 놓여있었다. 고급 캐시미어가 마음에 들어 품이 크지만 그 옷을 껴입었다. 두터운 겨울 외투는 카지노에서 뺏긴 패딩 하나였기에 달리 입을 것도 없긴 했다. 이왕 세탁해서 줄 거니까 좀 더 입어도 괜찮겠지.
“바이크 타고 갈 건데, 넌 택시 타고 올 거지?”
운동화 뒤꿈치에 구두주걱대신 검지를 걸어 앞발을 꾹꾹 끼웠다.
“천천히 가면 형 뒤에 타고 갈래.”
“미친 듯이 달릴 건데.”
유진이 조금 질린 얼굴로 나를 내려 봤다.
“농담이야. 적당히 밟을 테니 꽉 붙들기나 해.”
“응!”
유진이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신을 신었다. 현관 단속을 하고 바이크를 향해서 나감과 동시였다. 속에서 부글부글한 열과 함께 욕을 랩처럼 쏟아붓고 싶은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렇지만 결국 나온 말은 망연자실한 목소리 뿐이었다.
“대체 어떤 자식이야.....”
바이크의 앞 뒤 타이어가 전부 터져있었다. 바퀴가 꼭 헝겊을 찢어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힘이 좋은 놈이 아니면 저렇게 걸레짝을 만들어놓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당 안에다 넣어두는 건데.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늦었다. 대체 어떤 놈이 저런 사이코 같은 짓을 했는지… 이래서 도시가 점점 싫어지는 거다. 묻지 마 바이크 타이어 살해범까지 기승을 부리니 말이다.
“택시 타고 가야겠네.”
유진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파르르 떠는 내 몸짓에 유진은 기쁨을 내색하지 않았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까지 걸으면서 유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저 중에 타이어 살해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득했다. 불행히도 바이크와 관련된 단어를 생성해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 맞다! 유진.”
“응, 왜?”
“내 타이어 손대면 사이코메트리 할 수 있지?”
“그렇긴 한데.”
“가자, 가서 범인 잡자.”
“이미 여기까지 나왔는데?”
유진이 돌아가는 길이 멀다면서 고개를 휘적휘적 저었다.
“집에 돌아오면 해줄게. 급한 건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하지....”
유진이 지나가던 택시를 손짓해 세웠다. 유진이 외국인이라 달려오던 택시가 잠시 멈출까 말까하는 기색을 엿보였다. 내가 유진보다 앞으로 서서 그 택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춤하던 택시가 우리 앞에 떡하니 섰다.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유진이 올라탔다.
“서울 경찰청 가주세요.”
택시 기사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유진을 봤다. 경찰청의 발음이 정확했다. 내가 놀렸다고 그사이 연습한 것 같았다. 정말 나름대로 귀여운 녀석이긴 했다. 챙겨온 휴대폰이 묵야의 코트 주머니 안에서 진동했다. 태형 형일 것 같았는데, 의외로 묵야의 문자였다.
[일이 끝나면 회사서 돌아갈게.]
일을 끝내고 회사에서 집으로 온다는 건지, 아니면 먹는 회를 사서 온다는 건지 애매했다.
[먹는 회요?]
키득 웃으면서 답변을 보냈다.
[맛있는 회.]
돌아온 답문자에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유진이 고개를 이쪽으로 내려 내 문자에 관심을 표했다.
[기대할게요.]
그 시골까지 배송해온 회가 그리도 싱싱했는데, 서울에서 직접 먹는 회 맛은 어떨까 궁금했다. 유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 쳐다봤다. 장난기 어린 얼굴은 많이 봤지만, 저렇게 있으니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어른스러워보였다.
“왜 그렇게 봐?”
“묵야라는 남자...”
“묵야씨가 왜?”
“이간질 할 생각은 아니야. 이것만 알아줘.”
“그럼 하지 마.”
타인에게서 타인의 험담을 듣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다. 하지만 결국 유진은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있던 사파 관련 사건의 모든 중심엔 그 남자가 있었어. 묵야라는...”
유진은 바로, 묵야라는 남자가 위험하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었다.
묵야의 직업만 봐도 그가 위험한 남자긴 했다. 만일 묵야가 시골에 있는 내 카페를 찾지 않았다면 그가 생각 외로 둔하다든지, 순박하다든지는 알 길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태형 형의 부탁으로 사파관련 사건을 도와주려 서울에 올라온 것이라면, 문자를 생성해내지 않는 묵야에게 호감보다는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테고…. 나는 가슴 한 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바탕에 깔려있는 묵야의 다정함을 알게 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사파에서도 높은 위치라며. 무슨 사건이든 연관될 수밖에 없겠지.”
“관대하네.”
유진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안이함 때문에 위험해 질수도 있어.”
“묵야씨가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그러는 너는? 네가 태형 형의 동생이라는 사실만 알 뿐이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까지는 몰라, 게다가 나는 네게 그런 충고를 받을 만한 사이가 아니야.”
“뭐, 그렇지.”
유진이 차가운 내 답에 징징거리진 않았다. 유진은 내게 묵야에 대한 말을 건네지 않았고 그 사이 택시는 경찰청 정문에 도달했다. 유진이 먼저 내린 뒤 택시 값을 치렀다. 묵야의 캐시미어 코트를 한껏 여며서 종종 걸음으로 건물 안을 들어갔다. 3층까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유진이 뒤에서 투덜댔다.
“엘리베이터 타고 가면 안 돼?”
“넌 타고 오지 왜 따라와?”
“차가워.”
유진이 춥다면서 자신의 양어깨를 쥐어 잡았다. 찬바람이 정문에서부터 타고 들어오는 1층보다는 바람이 들어올 구석이 없는 3층이 훨씬 훈훈했다. 묵야의 코트를 벗어 팔뚝에 걸쳤다. 반으로 접었는데도 기장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가까웠다. 유진과 나는 정확히 따지고 보면 형사가 아닌 일반인이기에 태형 형이 근무하는 형사과로 들어가자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유진도 그것을 아는지 휴대폰으로 태형 형을 불러냈다. 연락을 받고 온 태형 형의 얼굴이 집에서 봤을 때보다 좋지 못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태형 형이 휴게실로 유진과 나를 이끌었다. 유진은 담배를 펴지 않았고, 태형 형은 내가 시골로 올라가기 전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수고는 덜어도 됐다. 태형 형이 곧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사이좋게 유진과 내 손에 올려주었다. 곧 자신도 뜨끈한 커피를 입에 담았다.
“심각해요?”
유진의 말에 태형 형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살인 사건인데 안 심각하겠냐?”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리 살인사건을 많이 접한다고 한들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 사건에 대해 무뎌진 감정을 갖기란 어렵다.
“차가운 녀석.”
유진이 내게 하는 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어를, 이번엔 태형 형이 유진에게 건넸다. 차가움은 유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 이틀간 생글생글 웃는 녀석에게 차가움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형, 두어 시간 전에 저 에비스 다녀왔는데 전혀 그럼 낌새 없던데요.”
태형 형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이주율을 만났는지 어떤지는 묻지 않았다.
“어깨를 두고 하는 호텔이니 잘 통제했겠지. 최초 발견자가 에비스 주차직원이었어. 시체가 발견되자마자 지하 3층을 통제하고 경찰에 바로 신고가 들어왔지. 나도 유진하고 이야기 하던 중에 호출이 와서 급히 들어온 거야.”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지하 주차장이면 CCTV에 찍혔겠네요?”
“그렇지, 근데 그게…….”
태형 형이 커피를 물마시듯 입안에 털어 넣었다. 단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커피는 예외이기에 나는 채 절반도 마시지 못했다. 유진은 마시는 건지, 향을 맡는 건지 애매한 태도로 종이컵을 입에 붙이고 있었다.
“CCTV에 찍힌 모습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아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시체유기 또는 시체훼손 정도나 될법하지.”
“자세히 말해봐.”
유진의 목소리에 흥미가 가득했다. 형사 일을 돕긴 했어도 살인사건에 대해선 여전히 거부감이 있는 터라 나는 입맛이 썼다.
“피해자는 호텔 컨시어지 팀장이야. 겉으로 드러난 직위는 그런데, 정확히는 에비스 카지노 팀장으로 알려져 있어. 목과 양 팔, 다리가 절단 된 채로 지하 주차장에 버려졌지. 아직 비디오를 판독중이긴 한데, 차를 끌고 들어온 남자하나가 트렁크에서 김장용 비닐봉지를 꺼내는 장면은 확인됐어. 그 안엔 토막난 시체가 들어있었고, 아무렇게나 주차장 바닥에 던져놓고 사라졌지.”
태형 형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뽑았다. 너도 마실래? 라는 행동에 고개만 흔들었다.
“평소엔 출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놈인데 오전 11시가 되도 호텔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대. 전 날 새벽 2시에 퇴근한 이후로 종적이 묘연했던 거지.”
“그럼 옷가지나 뭐 이런 건 없었대?”
“그렇지, 발가벗겨진 채로 토막 났으니까.”
“그럼 곤란한데.”
유진이 지저분한 휴게실 테이블 위에 종이컵을 내려놨다. 하나도 마시지 않은 듯 갈색의 커피가 출렁였다.
“시체를 담았던 비닐은?”
“시체를 유기한 남자가 시체만 버리고 다시 자동차에 실어갔지.”
“그럼 현장에는 시체밖에 없던 거네?”
“수사대가 조사한 바로는 그래.”
유진은 시체만 남은 것에 대해서 애석하고 있었다. 나는 둘의 대화를 듣다 궁금한 것이 생겨났다.
“시체만 남으면 안 될 일이라도 있어?”
유진이 색소가 옅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소리? 라는 의미였다.
“사이코메트리를 하려면 잔상을 볼 수 있는 물건들이 필요해.”
“사람의 몸에는 남지 않아?”
내 물음을 유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피부로는 사이코메트리를 할 수 없어. 살아있지 않은 무생물, 즉 물건들을 통해서만 가능해.”
“신기하네.”
“내가보기엔 형이 더 신기한데.”
유진이 눈썹을 찡그린 채로 말을 이었다.
“카지노 팀장이나 되는 녀석이니까 뭔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
“우리도 조직 간의 알력 싸움이 아닐까 추측은 하는데, 그러기엔 수법이 너무 잔인하지.”
태형 형이 유진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그런데 시체를 조각내서 버린 건 마피아 수법이잖아.”
유진의 말대로 마피아들이 조직의 배신자를 처단할 때 시체를 조각내서 거리에 방치하는 보복은 나 역시도 알고 있었다. 만일 마피아의 수법을 따라한 것이라면 피해자는 사파의 배신자일 수도 있었다. 추측만으로는 배를 타고 산을 올라갈 수도 있는 노릇이니 적당한 수준에서 접어 둬야한다.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이 사건에선 손 땔래.”
유진이 양 손을 들었다. 태형 형이 나를 보며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유진하고 별 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하더라도 사람이 워낙 많이 다니는 지역이니, 사건과 관련된 문자를 수집하진 못할 것 같아요. 사체를 보는 건 제 쪽에서 사양하고 싶구요.”
형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미안했지만, 토막 난 시체를 직접 보는 것은 무리였다. 사체 어딘가에 문자가 남아있을지라도 말이다.
“한 번만 훑어봐주는 것도 안 될까?”
간곡하게 부탁하는 형의 말투에 딱 잘라 거절할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형, 저 공포 영화도 못 봐요.”
“그래도 사람이 죽은 일인데. 네 도움 없이는 미해결 사건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커. 시체를 유기한 자도 신원 파악이 불가능해. 주차장으로 끌고 왔던 차가 대포차였거든.”
“대포차?”
유진이 그게 뭐냐며 반문했다.
“중고차를 매매할 때 명의이전을 하지 않은 차를 말해. 자동차의 소유자와 실체 차량 운행자가 다른 차야. 한마디로 대포차는 추적이 불가능해.”
차근차근 말의 뜻을 설명해주는 태형 형은 유진에게 이런 식의 한국 은어를 설명한 전적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저 일반이에요 형. 그런 제가 어떻게 부검실에 들어가요.”
“그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
나는 태형 형이 못 보도록 한숨을 쉬었다. 냉정하게 거절하기엔 형에게 신세진 것도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건, 이번 한번 만이에요.”
“고맙다.”
태형 형이 내 손을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유진이 부리나케 내 손과 태형 형의 손을 떼어냈다. 유진이 태형 형 대신 내 손을 꽉 쥐었다. 손을 비틀어 녀석에게서 벗어나자 유진이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표정으로 뚱해졌다.
“부검이 끝나려면 며칠은 걸리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데. 부검실에 가기까지 며칠이나 걸린다면 더 곤욕스러울 것만 같았다.
“그냥 오늘 보는 걸로 하죠.”
내 말에 형이 반색을 했다.
“일단 국과수에 연락해보고 결정되면 말해줄게.”
“네.”
“사무실에 들어갔다 올 테니 둘이 얘기라도 하고 있어.”
형이 내 답을 듣기도 전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휴게실을 나갔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서있자 유진이 내 옆에 와서 같은 자세로 섰다.
“괜찮겠어?”
“뭐가?”
“시체 말이야.”
“어쩔 수 없어. 나 원래 태형 형 부탁에 약해.”
“그런 것 같아 보여. 주인 형, 만약에 이 살인사건에 묵야가 연관되어 있으면 어쩔 거야?”
“난 보이는 걸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야.”
만일 묵야가 살인범이라고 해도 그를 감싸줄 생각은 없었다. 묵야를 혐오해서나 그런 건 아니었다. 사건 해결에 있어서 그저 객관성을 유지할 뿐이다. 범인을 잡는 건 경찰이고, 나는 약간의 도움을 더해주는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내게 정의감에 불타는 욕구가 있었다면, 진작에 카페 사장이 아닌 형사가 됐을 것이다.
“만일 형 동생이, 관련되어 있으면?”
“너, 자꾸 왜 만일이라는 전제조건을 앞에 다는데? 생기지도 않을 일에 대해서 답하고 싶지 않아. 그만 얘기하자.”
나는 유진과의 대화를 피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시늉을 했다. 피해자가 사파를 배신한 사람이라 치면 마피아의 방식으로 보복을 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수는 있었다. 사파 측에서 피해자를 죽였다면 자신들이 일터인 에비스에 버리진 않았을 거다. 차라리 산에 묻는 것이 더 깨끗하고 빨랐겠지. 피해자를 본보기로서 죽였다 하더라도 에비스 주차장에 시체를 유기한 건 사파측의 짓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파의 자들이 자신들에게 향할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 점을 노린 걸 수도 있겠지만…. 한적하고 여유로웠던 전원의 삶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 생활이 심심하긴 해도 이런 풍파는 없었는데. 이주율까지 나타난 이상 시골로 돌아간다고 해도 편안함 삶이 유지될지는 미지수였다.
“빨리도 오네.”
유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이쪽으로 오는 태형 형이 보였다. 태형 형의 목소리가 들릴 때쯤의 거리에서 형이 전화를 끊었다.
“주인아, 오늘은 무리고 내일 오후 2시경에 시간 되?”
“네, 괜찮아요.”
백수니까 시간은 널널했다. 부검실에서 토할 지도 모르니, 내일 오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말아야겠다.
“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갈게요.”
지금까지 태형 형과 한 대화는 전화로도 충분할 내용이었다. 형이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짐작이 됐다. 형이 얼굴을 직접 맞대고 부탁하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전화였으면 애초에 거절을 끝냈을 것이다.
“그래그래, 오느라 수고 많았다. 시간 있으면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바빠져서.”
“괜찮아요.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났는데요 뭘.”
“조심히 들어가라, 1시쯤 너희 집으로 데리러 갈게.”
“그래주시면 고맙구요. 갈게요.”
“유진아, 너도 주인이 잘 보살피고.”
보살핌을 당할 나이는 지났는데. 게다가 유진이 나를 보살핀다기 보다는 내 쪽에서 녀석을 토닥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갈게, 형.”
유진이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쥐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녀석의 손길을 빠져나왔다. 대신 눈을 흘낏해 녀석을 노려봐주었다. 목적을 잃어버린 녀석의 손이 민망한 듯 제 머리를 긁었다.
“집까지 걸어갈까?”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유진이 경악에 찬 얼굴로 뜨악했다.
“얼어 죽어. 한국 너무 추워!”
엄살을 피는 녀석이 제법 귀여웠다. 택시를 타는 게 고역이긴 하지만 캐시미어 코트 하나만 믿기에는 날씨가 지나치게 추웠다. 바이크의 타이어만 멀쩡했어도 이런 고생 없이 편하게 가는 건데. 집으로 돌아가면 그 즉시 유진의 능력을 이용해 바이크 도독놈을 잡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