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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를 참으려 깜빡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시야가 답답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뜨거운 숨결이 뺨을 간질였다. 무슨 상황인지 인지가 안돼서 멍한 눈만 연신 깜빡였다. 묵야의 입술이 내 입술에 떡하니 닿아있었다. 조심스러운 행동이라 밀치기도 뭐했다. 어울리지 않게 묵야에게선 혹시 내가 잠에서 깰까하는 긴장감이 돌았다. 이 남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입꼬리를 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잠에서 깬 것을 알아차린 묵야가 다시 운전석 쪽으로 몸을 옮겼다.
“일어났어?”
묵야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도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왕이면 제 허락이나 받고 했으면 하는 데요.”
“그러고 싶은데 몸이 먼저 움직여서.”
묵야가 쓰게 웃었다. 새벽 3시였다. 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일 년반 전 내가 살았던 집이었다. 작은 마당이 달려있는 주택은 주인이 없었음에도 상태가 양호해보였다. 묵야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아마 깨어난 이유가 묵야의 키스 때문이 아니라 저 휴대폰 소리였던 것 같다.
“전화 계속 오는 것 같은데 받으세요.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아. 짐 내려줄게.”
묵야가 트렁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나도 같이 따라 내린 다음 패딩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냈다. 대문을 열자 묵야가 짐들을 안으로 이동시켰다.
“현관 열어. 안까지 옮겨주고 갈게.”
“아니에요. 어차피 커피는 밖에 놔둬야 해요. 나머지 짐들은 제가 할 테니 쉬세요.”
하루 종일 잠을 자지 못한 묵야에겐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정작 졸린 사람은 묵야일텐데 차안에서 무신경하게 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안에서 차라도 먹고 갈래요? 집은 꽤 더러울 테지만요.”
“너한테 있어서만은 굉장히 충동적이라 말했지? 참을 수 있을 자신이 없어.”
묵야의 말뜻을 모르는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 묵야의 말처럼 그가 충동을 제어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지만 계속적으로 울려대는 묵야의 휴대폰이 신경 쓰였다. 분명 해야 할 일을 있음에도 나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푹 쉬시구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네.”
나는 발걸음을 쉽사리 물리지 않는 묵야의 등을 떠밀었다. 차에 다시 올라타는 묵야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묵야는 차에 올라타서 전화를 받더니 내게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여행용 가방을 끌어 현관으로 향했다. 열쇠를 꽂아 넣어 현관문을 여는데 이상하게도 이미 문이 열려있었다. 전에 문단속을 하지 않고 떠났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확실히 각 방의 창문부터 시작해 전부 꽁꽁 잠그고 떠났었다. 현관을 열자 뼈가 시리게 추울 거라 생각한 집안의 온도가 아니었다. 정말 이상했다. 여행용 가방을 거실에 들어 올리고 신발을 벗었다. 불을 켜고 거실을 둘러보는데 지나치게 깨끗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뿌옇게 쌓이고 폐가같이 변하기 마련이건만, 거실만 둘러봐도 마치 어제까지 내가 살았던 것처럼 생활감이 넘쳐났다. 긴장감으로 몸을 굳혔다. 필시 이 집에 나 아닌 누군가가 살고 있다. 내가 사용했던 작은 방의 문이 빠꼼히 열려있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밀어보았다. 침대와 책상, 피아노의 위치까지 변한 것은 없었다.
주방으로 이동해 냉장고를 열자 먹다 남은 샌드위치와 우유, 갖가지 반찬들이 놓여있었다. 예상이 맞는다고 확신했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 문 뒤에 세워두었던 야구 배트를 들었다. 초등학교 때 산거라 나무가 전부 갈라져있었지만 무기로는 사용할만했다. 빠르게 안방으로 이동해 벌컥 문을 열었다. 불을 켜자 침대 위에 누군가가 잠든 채 누워있었다. 코까지 가볍게 고는 꼴에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쭈욱하고 빠져나갔다. 자고 있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환해진 덕에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침대 가까이 가서 사람이 들어온 지도 모르고 자고 있는 남자를 내려 봤다. 턱밑까지 올라온 터틀넥이 남자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늘어나기 쉬운 옷임에도 목 주위가 타이트 한 것을 보니 행색이 노숙자 같지는 않았다. 깨끗한 피부에 잘 정돈된 머리가 남자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다만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 동양인 것이 아니란 특이점이 있었다. 금발보다는 조금 색이 짙은 머리카락이 부모님이 쓰시던 베개를 제멋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이봐요.”
자고 있는 남자의 몸을 흔들었다. 남자는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며 내 손을 내쳤다.
“이거 봐요.”
조금 더 세게 남자를 흔들자, 잠기운이 역력한 눈빛의 남자가 눈을 떴다. 남자의 머리가 염색한 것이 아니란 걸 확신했다. 남자는 푸른빛과 녹색이 적당히 섞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이 우리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자고 있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차라리 노숙자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는다. 외국인이 나를 보더니 씨익 웃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풉하고 외국인의 가슴팍으로 얼굴이 떨어졌다. 눈물이 핑하고 돌만큼의 아픔에 외국인을 밀어내고 몸을 번쩍 일으켰다. 외국인도 갑작스런 충격에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돌아왔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듯 외국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그러더니 곧 문자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fuck’ 튀어나온 욕설을 손바닥으로 짝 쳐서 터뜨렸다. 박수소리에 남자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남자가 침대에서 내려와 제대로 서자 키가 나보다 두 뼘은 더 컸다. 나는 쏟아질 외국인의 영어에 대비하고 있었다. 너 왜 우리 집에 있냐? 라고 따지고 싶은데 영어를 잘 구사할 수가 없기에 그냥 노려보기만 했다.
“이 집 주인?”
또 한 번 긴장감이 푸시시 녹았다. 외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말은 토종 서울사람보다 발음이 더 정확했다. 꼭 더빙한 외국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죠, 그 쪽은 무단침입자구요.”
“무단치밉?”
외국인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내 말을 반복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무단침입이 영어로 뭔가 떠올렸다. 생각나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하하, 농담이야. 무단침입. 뭔지 알아. 한참이나 비어있기에 내가 좀 사용했어.”
외국인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나를 하나하나 뜯어봤다. 그리고 외국인의 어깨위로 문자가 팔랑거리며 올라왔다. ‘cute’ 연분홍색을 띈 귀여운 단어였지만 내게로 향해오는 바람에 그 예쁜 녀석을 손을 우겨서 없애야했다. 외국인이 눈을 크게 뜬 뒤 사람 좋게 웃었다.
“난 유진이야. 넌?”
통성명을 하자는 외국인의 태도가 지나치게 뻔뻔했다.
“나가주시죠, 집주인인 제가 오늘부로 돌아왔으니까요.”
“너무하네. 내가 빈집을 깨끗이 관리하고 돌봐줬잖아.”
“현관은 아시다시피 이 방을 나가서 직진하시면 됩니다.”
외국인이 커피 포대에 담긴 글자처럼 반짝거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분명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과시하려는 성적인 움직임이었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외국인이 콧잔등을 긁었다.
“갈 데가 없어. 집구할 동안만 재워줘.”
한적한 시골에서나 있을 걸 괜히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시죠.”
야구 배트의 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남자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래도 말이 아주 통하지 않는 안하무인은 아니기에 다행이다.
“저기.”
남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눈썹이 잔뜩 쳐져서 꼬리말린 대형견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월세 낼 테니 집구할 동안만 여기서 지내면 안 될까? 방도 많잖아.”
“안 그래도 경찰청에 갈 생각이었는데 같이 가실래요?”
남자가 경찰청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깨를 축 내리고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느릿하게 안방을 나갔다.
“한국은 너무 추워. 아마 난 얼어 죽을 거야.”
남자가 손을 교차시켜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렇다고 커다란 덩치가 작아보이진 않았다. 나는 답답한 남자보다 빠르게 걸어나갔다. 내려놓은 여행용 가방에서 용의자의 흉기가 담긴 비닐을 꺼냈다. 남자가 그 흉기를 보자마자 나를 살인마 대하듯 걸음을 빨리했다.
“오케이, 알았어. 나갈게. 그러니까 그 칼은 내려놓지?”
“이걸로 그쪽 찌를 생각은 없으니 빨리 나가기나 하시죠?”
“정말? 내가 등을 보이면 찌를 생각이 아니야?”
기가 막혔다.
“믿을 수 없어. 등을 보이지 않을 거니 못나가.”
“그럼 내 쪽을 보면서 뒷걸음질 치면서 나가던가요.”
“장애물이 있으면 넘어질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남자쪽에서 괜히 시간을 질질 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전한 말과는 달리 저 남자에게서는 좁쌀 만한 공포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먼저 나갈 테니 따라 나와요.”
흉기를 보이도록 돌아다닐 순 없고, 신발장에 모아두었던 쇼핑백 하나를 꺼내서 흉기를 담았다. 신발을 신고 현관 밖으로 나오자 남자도 운동화를 신었다.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서 나오는데 남자가 투덜거렸다.
“내가 물도 주고, 나무에 영양제도 주고, 해충도 없앴어.”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와 살면서 주인행세를 했음에도 마치 칭찬을 해달라는 자세였다.
“어디로 갈 거야?”
“그 쪽이 알건 없구요.”
대문을 열어 남자보고 나가라고 손짓했다. 남자가 먼저 나가고 나서야 대문을 꽉 잠갔다. 이렇게 보니 우리 집 담이 저 외국인의 키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아마 담을 넘은 다음 창문을 깨거나, 오랫동안 주인이 없는 것을 이용해 열쇠수리공을 불러 현관을 땄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거 들고 경찰서 가게? 죄 지은 건 아니지?”
남자는 자신이 갈 길을 가지 않고 내 뒤만 졸졸 따라왔다.
“내 사정이니 그만 신경끄시고 그 쪽도 갈길 가시죠?”
“나도 가는 길이 같으니 신경 쓰지 마.”
한적한 도로변을 달리는 택시를 세워 뒷좌석에 탔다. 혹시나 따라서 올라타면 어쩌나 했는데 남자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도로위에 서 있었다. 추운 날씨에 스웨터만 걸친 남자가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설마 얼어죽기야 하겠어? 서둘러 택시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경찰청으로 향했다.
밤의 도로는 번잡한 서울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한가했다. 심야할증 요금이 붙었지만 신호가 걸리는 일도 거의 없었기에 세종대왕님 한 장이면 충분했다. 택시기사에게 세종대왕님을 내밀며 감회에 사로잡혔다. 세종대왕님께서 한글을 창제 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글자들은 한문의 형태를 띠고 돌아다녔겠지. 한글 외의 언어에는 약한 나이기에 세종대왕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덜렁거리는 쇼핑백을 들고 경찰청을 올려봤다. 야밤임에도 건물의 절반이상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형사과로 향하며 태형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전화를 받지 않아 다시 걸려는 찰나에 복도 저 끝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아. 여기 여기.”
형이 복도 끝에 서서 자판기 커피를 먹고 있었다. 종이컵이 세 개로 겹쳐진 걸로 봐선 한자리에서 세잔을 연속으로 비운 듯 했다.
“형, 이거요.”
빠른 걸음으로 형에게 다가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쇼핑백을 벌려 내부를 확인한 형이 종이컵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과수에 다녀올 테니 넌 취조실로 가있어.”
과학수사반에 흉기를 넘기고 온다는 형이 당연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위로 해 취조실 쪽을 가리켰다.
“싫어요.”
“왜?”
“오자마자 문자들 먹어치우라구요. 형은 내가 피토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내가 사디즘 적인 성향이 있긴 하지만 네가 피토하는 게 좋진 않아.”
“그럼 그냥 갈게요.”
형이 갑자기 나를 보더니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돈 표시를 만들었다.
“요거, 살인 사건이라 좀 셀 텐데.”
구미가 안 당기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로 온 이상 내가 할 일이라곤 이것 밖에 없기도 하고.
“고딩 녀석 취조하는 거 도우면 되요?”
“아니, 그 녀석은 취조할 것도 없이 확신범이야. 그거 말고 사파와 관련된 일.”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묵야처럼 나 역시 일과 연애는 별개로 하고 싶다. 물론 내가 경찰일은 돕고 묵야가 조폭 일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부딪힐 테지만. 형의 눈초리가 의심스럽게 번들거렸다. 거절했다간 묵야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냐며 추궁할 분위기가 농후했다. 하여간 내 주변 사람들은 무당 저리가라 할 정도로 감이 좋아서 문제다.
“할게요. 취조실에서 뵈요.”
“응, 나도 서류만 작성하면 되니 금방 가.”
쇼핑백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가는 모습이 제법 신이 나 보였다. 저러다가 흉기나 떨어뜨리지 않으려나 몰라. 멀미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잘 못타는 터라 계단을 이용해 취조실로 향했다. 바닥과 공중에 떠다니는 문자들의 양이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빼곡했다. 형형색색의 빛들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다. 유독 독한 기운을 내뿜는 것들만 터뜨리고 밟아서 소멸시켰다. 내가 경찰청에 자주 출두할 때만 해도 문자의 양은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일 년반이란 시간이 길긴 긴가보다. 휙휙 손을 쳐가며 문자를 밀어내는데 익숙한 형사과 형사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주인이 오랜만이네.”
“우철형 잘 지내셨어요?”
“그렇지 뭐, 복귀한 거야?”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답했다. 우철형은 내가 문자를 읽는지는 모르고, 단순히 사이코메트러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형사과에서 내가 사이코메트러인 것으로 아는 사람은 다섯 명이 채 안 된다. 그 다섯 명은 내가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어차피 손에 닿지 않아도 생성해내는 글자를 읽으면 그만이다. ‘괴물’ 우철형의 주변으로 칙칙한 색의 글자가 솟았다. 겉은 나를 향해 웃고 있지만 속은 나를 괴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문자를 없애고 싶었지만 우철 형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기에 그만두었다. 일일이 상처받다보면 제정신으로 세상 살아나가기 힘들다.
취조실 앞에서 벽에 등을 대고 태형 형을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는데도 태형 형은 숨을 헐떡였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여기 맞아요?”
“응.”
태형 형이 매직미러가 설치되 있는 방을 가리켰다. 형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떡대 좋은 녀석 하나가 거울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떡대의 옆에는 변호사가 서 있었고, 처음 보는 형사가 떡대를 취조 중이었다. 취조실 내부 마이크의 볼륨을 올려놨는지 취조실의 대화 소리가 무리 없이 잘 들렸다. 동시에 모니터 두 대가 녹화되고 있었지만, 생성되는 문자를 보려면 매직미러를 통해 그들을 직접 지켜봐야했다.
“마약 관련 사건인데 살인까지 섞여있어서 우리 강력계가 맡기로 했어. 저 놈이 강남권에 신종 마약을 유통시켰고, 부작용이 심해서 죽은 놈도 숫자가 어마어마해. 그 중 전성그룹 첫째 아들이 제일 거물 피해자였지. 부검을 해보니 마약을 한계 이상 흡입한 것으로 나왔어. 그러니 직접 먹은 건 아니고 누가 처먹인 거겠지?”
‘전성그룹, K3, 살해.’ 태형 형에게서 글자들이 솟았다. 형은 떡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럼 형은 저 남자가 피해자에게 억지로 먹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그 피해자가 직접 먹었을 가능성은요?”
“제로에 가까워. 상습적으로 마약을 한 놈이니 양을 조절 할 줄은 알고 있었을 거야.”
태형 형이 떡대를 자세히 보라며 녀석을 주시하게끔 만들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문자는 보이니까 설렁설렁 훑어봤다.
“음.... 저 사람 절대 얘기 안할 걸요.”
떡대 주변의 문자는 온통 ‘침묵’ 뿐이었다. 침묵이라는 단어 외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 이렇다 할 단서가 담긴 글귀가 없었다.
“보이는 걸 다 말해봐.”
“침묵 밖에 없어요.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와 관련해 글자가 남아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는데요?”
정말 저 떡대가 살인범이라면 죄책감이란 게 아예 없는 놈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글자가 숨어있을 지도 몰랐다.
“여기서 보이는 건 상체뿐이니까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매직미러 안의 방에선 형사가 떡대에게 마약을 판매한 사실이 맞는지 연신 캐묻고 있었다. 떡대는 묵비권을 열심히 행사 중이셨고.....
어라? 그 순간 떡대의 머리 위로 ‘K3’라는 글자가 생성됐다.
“형, 혹시 그 신종 마약이 이름이 K3예요?”
태형 형이 역시 하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만족을 다 채워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 미안해서 어쩌지.
“저 남자 k3와 침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제대로 패거리에 충성 하나 본데요.”
사파에 몸담은 하급 조직원이 조직에 지나친 충성을 바치는 이유는 당연했다. 사파는 일반 조직 폭력배들과는 다르게 직급이 낮은 밑의 놈들을 버리는 법이 없었다. 말단 조직원이 높은 자를 대신해 감방에 들어가면 대게는 그 조직원을 버리기에 급급한데, 사파의 경우는 후의 뒷일까지 완벽히 책임져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수천의 보석금을 내면서 빼가는 경우도 수다했고. 저 떡대도 그것을 잘 알기에 배신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취조실의 문이 열렸다. 불현 듯 돌아봤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만지면 손가락 사이로 녹아버릴 것 같은 금실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의 등장 때문이었다. 꽈배기 짜임 검은 터틀넥 스웨터와 금발 머리가 환상적인 조합을 만들어냈다. 외국인은 취조실 문 높이가 너무 낮은지 어깨를 굽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
실례되는 행동이지만 검지 손을 들어 외국인을 가리켰다. 태형 형은 왔어? 라는 소리나 하면서 여유작작한 태도로 일관했다. 나는 태형 형과 외국인을 번갈아가며 검지를 이동시켰다.
“왜 그렇게 놀라? 애초에 나도 같은 방향이라구 했잖아. 같이 왔으면 택시비도 절약되고 얼마나 좋아.”
외국인이 나를 나무라며 취조실 의자에 앉았다.
“형! 이 사람 누구에요?”
태형 형이 뭘 그리 정색 하냐며 웃었다.
“둘이 인사 안했어? 유진한테는 네 얘기 이미 해놨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단 침입자랑 형이 어떻게 아는데?”
“무단 침입?”
태형 형이 뺨을 긁적였다.
“아아, 네가 촌구석가면서 여기 집은 나한테 맡기고 갔었잖아. 계속 비워두니까 점점 폐가같이 변하더라구. 그래서 유진보고 들어가서 살고 있으라고 했지.”
안하무인은 유진이 아니라 태형 형이었다.
“형, 어떻게 나한테 상의도 없이 그래요!”
“무슨 소리야? 난 분명 너한테 얘기했었어.”
“전 금시초문인데요?”
“이번 여름 생각해봐. 아는 친척이 한국 들어온다고 해서 너희 집에서 좀 머물러도 되냐고 했었잖아. 기억 안나?”
반년 전에 태형 형이 자기 친척이 우리 집에 머물러도 되냐고 물었던 기억은 났다. 나는 그 친척이 단순히 여행 온 걸로만 알았지 우리 집에 터를 잡을 줄은 전혀 몰랐다.
“생각은 나는데요…. 생각해봐요, 저 사람은 완벽한 외국인인데 형 친척인지 어떻게 연상하겠어요.”
태형 형이 찢어진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아버지가 미국인인 거 말 안했나?”
“전 처음 듣는데요.”
토종 한국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생겼는데 혼혈아 2세라니! 전혀 매치가 안됐다.
“형, 그럼 혼혈아였어요?”
“하하하, 아니. 의붓아버지야. 내 친아버지는 나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어. 새아버지는 한국 와서 만난 우리 어머니와 재혼하신 거거든. 미국에 있는 새아버지의 전 부인하곤, 이래저래 사연이 있어서 왕래는 하고 지냈었어. 이 녀석은 새아버지와 그 분의 아들이고, 완벽한 미국인으로 피는 안 섞였지만 내 형제지 뭐.”
그러니까 유진이라는 남자는 미국남자와 미국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완벽한 미국인이라는 소리. 동양인의 면모가 전혀 없긴 했다.
“잘 부탁해. 매정한 집주인.”
유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유진이 의자에 앉은 상태로 내 손을 꽉 잡아서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유진이 힘차게 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악수한번 거칠다.
“이름이 뭐야?”
“이주인이요. 그런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주인이 얘기도 못하게 쫓아냈잖아.”
유진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우리 집에서 내쫓았으니 그건 그렇다치고, 아무리 태형 형 친척이라고 해도 취조실에 들어온 것은 도가 지나쳤다. 태형 형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으로 유명한데 유진을 밖으로 내치지 않았다. 유진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매직미러 안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장난기가 다분했던 표정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직접 보고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미리 얘기는 안했어. 유진이 너와 좀 비슷하거든.”
“네?”
동양인인 나와 서양인인 유진이 비슷하다는 소리는 외모가 아닌 능력면에서 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유진은 사이코메트러야. 그 쪽 방면으론 꽤 유명해.”
사이코메트리는 범죄소탕에 있어 긴밀하게 경찰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공식화되는 일또한 없었다. 게다가 우리 나라보다는 미국에서 더 인정받을 텐데, 유진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지 않았다. 여름부터 내 집에 거주중이었으니 단순히 여행왔다고 하기엔 시기가 길었다.
“주인 능력은 형에게 들어서 알아. 사람이 생각하는 게 글자로 나타난다지? 지금 나한테는 어떤 글자가 보여?”
유진이 턱을 괴고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내 몸을 아래위로 훑는데 그 순간 툭하고 당황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anal sex’ 이런 미친!!! 속으로 읽었다가 욕설도 속으로 뱉고 말았다.
“미안. 장난으로 생각한 건데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유진은 야차 저리가라 할 정도로 인상을 쓴 내 표정을 보고 금세 꼬리를 말았다. 옆에선 태형 형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게로 스물스물 다가오는 그 썩을 글자를 주먹으로 날려서 없애버렸다.
“형, 저 놈이 가지고 있던 물건 아무거나 하나 줘봐.”
유진은 노려보는 내 시선을 회피하며 태형 형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은 소지품을 회수한 게 없어. 취조만 하는 거지 체포한 게 아니니까.”
“그럼 저 덩치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지루한 취조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거네?”
“곧 끝나. 저 쪽 변호사가 분명 여기까지. 라고 말할 걸?”
유진이 의자의 앞발을 들고 손을 깍지 껴 뒤통수를 감쌌다. 삐걱삐걱 의자를 흔들었다. 이 취조실이 자신 것이라도 된 마냥 오만해 보였다.
“태형 형, 그럼 전 가볼게요. 아마 저보단 형 친척분이 더 나을 것 같네요.”
사실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덩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큼 지루한 시간도 없다.
“일단 취조 끝날 때까진 있어봐, 곧 끝날 때 됐어.”
형의 예상과는 다르게 형사 쪽에서 취조를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형사도 제 풀에 지친 것이다. 취조실을 나오는 형사가 나와 유진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김경위님, 저 자식 입 열 생각을 안 합니다. 침이 다 마르겠어요.”
“어쩔 수 없지, 일단 귀가조치 시켜.”
“네, 증거 확보할 때까지는 그래야겠네요.”
지친 얼굴로 다시 매직미러 안으로 향한 형사가 취조를 파장시켰다. 변호사와 함께 떡대가 매직미러의 뒷문으로 사라졌다. 떡대의 뒷모습을 훑어봐도 다른 문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매직미러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리고 형사는 조금 쉬겠다며 취조실을 아예 벗어났다. 유진과 태형 형이 매직미러 안으로 향했다. 형이 너도 오라며 손짓했다. 그냥 집에 갈까 했는데 사이코메트리는 처음 보는 것이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유진은 떡대가 앉았던 의자에 자신이 털썩 앉았다. 사이코메트러가 나왔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유진은 눈을 감지도 인상을 쓰고 정신을 집중하지도 않았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더니 유진이 코미디극을 보는 것처럼 즐겁게 웃었다.
“뭐야, 이 자식. 차단하는 걸 배웠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태형 형이 대신 전했다.
“이거 메트러들에게 읽히지 않게 교육받았다고. 사념이 흐르지 않으면 나도 읽을 수 없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재빨리 유진에게 물었다.
“비슷하긴 한데 나는 물건에 깃들어있는 사념을 읽는 거라서 방금 저 뚱땡이가 앉았던 이 자리, 그러니까 그 녀석이 입고 있는 옷에서 흘러넘친 사념만 읽을 수가 있어. 실제로 지니고 있던 물건이 아니면 잘 보이지 않지만 사념이 묻어있는 자리는 어느 정도 읽히긴 해.”
그렇다면 사이코메트러는 내가 글자는 읽는 것과도 어느 정도는 상통했다.
“근데 이정도로 사념이 남지 않는 경우는 드물어. 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세뇌를 당했거나. 한국에도 그럴 만한 능력자가 있다는 게 신기한데?”
한국이 뭐가 어때서! 순간 애국심에 발끈함이 들었지만 워낙 미국이 땅덩어리가 크고 사람 수도 방대하니 굳이 숫자가 적은 한국인을 비하하려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주인은 어때? 읽힌 글자라도 있어?”
내게 단서를 묻는 유진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에도 자존심이 상해하거나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갑자기 태형 형이 유진의 머리통을 타악하고 소리 나게 때렸다.
“형! 아프잖아.”
“이 자식이 어디서 주인이라고 함부로 불러? 너보다 두 살 형이야. 한국에선 손윗사람한테 깍듯이 대해야지!”
“말도 안 돼……. 저게 어떻게 스물세 살?”
나도 놀랐다. 유진의 나이가 묵야 정도는 돼보였는데, 역시 서양인은 노안이 대부분인가 보다. ‘so cute’ 이번엔 짙은 분홍색을 띤 단어가 내게로 하늘거리며 다가왔다. 그래도 귀엽다니! 큐트라는 말이 단순히 귀엽다는 뜻 외에도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눈앞을 폴랑거리는 녀석을 손으로 쓱쓱 비벼 없앴다.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방금 그 남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침묵이라는 것만 생성했어요.”
“그렇지! 분명 교육을 받은 거라니까?”
유진이 거보라면서 태형 형을 올려봤다. 유진의 말대로 사람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녀석이 무뇌가 되도록 교육시킨단 말인가?
“요새 잡혀온 사파 애들 대부분이 저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형.”
유진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형이 별 거 아닌 취조에 나를 참여시킨 이유를 알았다. 유진이 읽어낼 수 없으니 내가 미약한 단서라도 잡길 바란 것이다.
“네가 보기엔 어때?”
태형 형이 내 심중을 물었다.
“아직 저 사람 하나 밖에 모르니까. 교육을 받은지 어떤지는 몰라요.”
적어도 침묵이라는 문자를 생성해내긴 했으니 묵야처럼 아예 읽을 수 없는 자는 아니었다.
“주인형.”
외국인 입에서 나온 형이라는 애칭이 지나치게 어색했다. 정통 미국인이라면서 한국말을 잘하는 것도 신기하고.
“나 주인 형한테 신세 좀 져도 되요?”
뜬금없이 화제를 전화하는 유진의 태도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태형 형, 형네 집도 있잖아요. 친척인데 형이 돌봐야죠.”
“너무해. 한쿡사람 자뉜해.”
유진이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처럼 발음을 질질 흘렸다.
“우리 마누라 8개월이잖아. 괜히 스트레스 주긴 싫어.”
누가 애처가 아니랄까봐. 그럼 내 스트레스는 어쩌고!!
“유진씨 부리는 건 경찰청이잖아요. 호텔이나 전세라도 하나 얻어주라고 해요.”
내가 알기론 현 경찰청장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높이 쳐주는 사람이라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선 넉넉하게 챙겨주는 편이었다. 여태껏 내가 받은 돈만 세어 봐도 그랬다.
“월세 낼게, 주인형.”
금발 머리의 미국 동생은 둔 적이 없다.
“난 기본적으로 타인하고 같이 못살아.”
존댓말로 해서는 알아들을 것 같지 않기에 반말로 종지부를 찍었다. 태형 형도 웬만해선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내 성격을 아는 탓인지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나 호텔 외로운데.”
그런 녀석이 우리 집에서 혼자 살았다는 말이야? 거짓말도 적당히 해라.
“태형 형, 저 집에 가요.”
“그래. 저건 내가 알아서 타이를게.”
“아 맞다! 형 열쇠 주세요.”
내 말을 알아들은 태형 형이 뒷주머니를 뒤적여 바이크 열쇠를 건네주었다. 저 미국놈 때문에 시골로 가면서 형에게 돌봐달라고 바이크를 맡기고 간 것을 잊을 뻔했다. 멀미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느니 춥지만 바이크를 타고 가는 것이 나았다.
“주차장에 있어. 덮개 씌워놨으니 금세 눈에 띌 거야.”
“응, 고마워요.”
열쇠를 짤랑이면서 유진에게 유종의 인사를 건넸다. 그 때 유진이 나가려는 내 등에 대고 언성을 높였다.
“주인형! 내가 그 집에서 반년은 산거 알고 있지?”
무시하고 발이 앞으로 향해야 했는데 움찔한 게 전부였다.
“형이 자위할 때!”
“아아아악!!!!!!!”
후다다닥 유진이 앉아있는 곳으로 달려가 녀석의 고얀 입을 틀어막았다. 앉아있는 녀석의 주리를 틀고 싶었다. 태형 형은 자위라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는지 눈만 껌뻑였다. 유진이 내 손을 끌어내리더니 내 검지와 중지를 혀로 쓱 핥았다.
“섹시하게 이걸로 뒤도 자위하는 거 알고 있는데.”
유진이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이 빌어먹을 사이코메트러 자식. 내가 엔간해선 욕을 안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은 자의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반년이나 내 집에 있으면서 과거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읽어낸 것이다. 심지어 내가 알기론 사이코메트러는 나처럼 문자로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남아있는 사념을 통해 과거의 장면이 영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했다. 결국에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간에 유진의 앞에서 야동쇼를 펼친 것이었다.
“그거 말고도 많아. 형, 나 이래도 호텔가서 잘까?”
돌려 말했지만 알아들었다. 딱 한 번이지만, 집에 남자를 데려와서 잔적도 있었다. 당시에 자고 나서도 후회했고, 지금은 더더욱 후회한다. 태형 형은 내 성적인 성향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 동성애에 관대한 편이 아니라 내 입으로 떠벌릴 생각도 없었다.
“..... 따라와. 집구할 때까지만 이야.”
이를 바득바득갈며 유진을 노려봤다. 태형 형은 갑작스런 내 태도에 말은 하지 못하고 ‘뭐지?, 약점?’ 이라는 문자들을 쏟아냈다. 태형 형에게 다가가 그 글씨들을 손바닥으로 짝짝 쳐서 없앴다.
“뭐냐? 주인이가 생각 바꾸는 거 흔치 않은데 무슨 짓을 한거야?”
유진이 태형을 향해 브이 자를 펼쳐보았다.
“능력자의 승리라고나 할까? 하하.”
유진이 내 어깨에 달라붙어서 몸무게를 실었다. 내 몸무게의 절반이나 더 나가는 것 같은 놈이 무게로 내리누르자 나름 대한민국 표준 사이즈의 키가 더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무거우니까 저리 치워.”
“쟈뉜한 한쿡싸람.”
금발머리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녀석을 억지로 떼어내고 성큼성큼 걸었다. 태형 형까지 미워지는 바람에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하고 취조실을 나왔다. 금발머리의 외국인이 경찰철 복도를 걸어나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번씩 다들 뒤를 돌아봤다. 유진은 쌀쌀한 내 태도에 다시 어깨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보폭의 차이가 커서, 금세 따라잡혔다. 유진은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근데 묵야는 누구지?”
걸음을 멈추고 불쾌한 시선으로 유진을 노려봤다. 내 몸 어디에서 읽어냈는지 모르지만 기분을 바닥치게 만드는데는 충분했다.
“나도 사람 생각을 읽지만 너처럼 입밖으로 내진 않아, 그거 굉장히 불쾌한 일인 거 알고나 있어?”
“왜 화를 내? 혹시 형은 못 읽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유진을 보고 있자니 묵야의 흔적을 내게서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딱 내 짝인가보다.
“형도 이제 알게되겠지만 사파에 관련된 녀석들은 대개가 읽히지가 않아, 딱 하나 반복적으로 읽히는 게 있다면 묵야라는 남자 하나 뿐이야.”
“너. 딱 이틀 줄테니 집 구해서 나가.”
유진이 왜 화가 났냐며 달라붙었다. 경찰청 건물을 나와서 바이크로 향하는 와중에도 유진이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내 집을 내주고 다시 시골 카페로 기어들어갈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형의 말대로 주차장 제일 구석에 검은 덮개로 몸체를 감싼 바이크가 보였다. 꼭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기도 했다. 내가 유진의 말 한마디도 상대를 해주지 않자, 연약하게 나폴거리는 문자 하나가 내 뺨에 와서 닿았다.
′sorry′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문자를 보고 바이크의 덮개를 휙 벗겼다. 유진은 두발짝 뒤로 물러선 채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저런 연약하고 불안해보이는 문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망할 미국인! 양키고홈을 외치고 싶었지만 이미 마음은 한풀 꺾어진 뒤였다.
구입한지 반년 만에 생이별을 해야 했던 야마하 R6의 시동을 켰다. 핸들에 걸린 헬멧을 뒤집어쓰고 매끈한 몸체위에 올라탔다. 으르렁거림을 참고 있는 짐승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유진이 꼬리가 올라간 바이크의 뒤에 올라타려 하기에 헬멧의 시야를 열어서 유진을 밀어냈다.
“일인용이야.”
“자리도 남잖아. 나도 태워줘.”
“택시 타고 와.”
“나 돈 없어. 진짜야. 어차피 주인형네 집으로 가는 거잖아.”
바이크 헤드라이트를 통해 반사되는 유진의 눈빛이 지나치게 맑았다. 억지로 우겨 타는 것을 말리는 것도 귀찮아졌다. 내 뒤에 올라탄 유진이 헤헤 웃으면서 허리를 꽉 조였다.
“떨어져도 모른다.”
“응, 걱정 마. 꽉 잡았어.”
어찌나 힘이 센지, 과하게 말하자면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을 다 터질 것만 같았다. 경찰청사를 나와서 바이크의 몸체만큼이나 검은 도로를 질러나갔다. 태형 형이 그동안 잘 다뤄줬는지 달리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계기판의 바늘이 점점 위로 치솟았다. 자동차와 다르게 체감으로 느껴지는 속력이 더 강하고 짜릿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이크다. 이 맛에 골로 간 사람도 수다했지만. 속도를 올릴수록 허리를 감싼 유진의 팔에 힘이 더해졌다. 헬멧 안이 축축한 숨으로 가득 찼다. 속도를 더 올렸다가는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뒤에 탄 녀석을 빨리 때어내고 싶어서 속도를 줄이는 짓을 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갔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문 앞에 바이크를 주차시키고 허리를 감싼 유진의 손을 떼어냈다. 돌아보자 원래도 백지장 같은 서양인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려있었다. 헬멧을 벗어서 그 안에 주먹을 넣어 걸쳤다.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인해 지나치게 시렸던 손에 전기가 일었다. 유진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바이크에서 내렸다. 커다란 짐승이 꼭 겁에 질려있는 것만 같았다.
“형, 이제 이거 타지 마.”
유진이 울상을 하고 내 허리에 달라붙었다.
“목숨이 위험하겠어.”
“저리 안 떨어져?”
과거에 마당에서 키웠던 말라뮤트도 이 정도로 귀찮게 굴진 않았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향해 가는데 옆에서 비추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손을 올리고 말았다. 빛을 피해 시선을 내렸는데 왁스로 몇날며칠은 닦은 것 같은 세단이 보였다.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손에 낡은 포대자루를 들고 있었다. 고급 세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서울 올라오기 몇 시간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커피 포대자루를 든 묵야를 보자 허리에 감싸고 질질 달라붙던 유진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 나 저 사람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유진이 손가락을 올려 묵야를 가리켰다. 묵야가 커피 포대를 들고 내 앞으로 걸었다. 딱 봐도 알겠다. 저건 묵야가 납작하게 밟은 문자가 들어있는 포대였다.
“확인해보니 미처 내리지 않은 게 있어서 다시 돌아왔어.”
그러면서도 내 눈을 피하는 게 꼭 거짓말 하는 사람 같았다. 설마,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겠지.
“거짓말이야.”
“네?”
묵야가 가벼운 포대자루를 내게 건넸다.
“널 찾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남겨두었거든.”
묵야의 말에 나는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앞으로 뻗고 입을 벌렸다.
“이유 없이도 찾아와도 되요.”
“그래도 되나?”
“네.”
조폭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심한 배려심이 이런데서 발휘되다니.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진이 슬그머니 다가와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내가 밀어내는 것보다 빠르게 묵야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서 차가운 공기만 들이마셨다.
“저건 누구지?”
묵야는 유진이 몹쓸 물건이라도 되듯이 싸늘하게 말했다.
“카페에서 봤던 그 경찰 형, 동생이에요. 잠깐만 우리 집에서 신세지기로 했어요.”
잡힌 팔뚝이 아렸다. 내가 움찔하자 묵야가 재빨리 손에서 힘을 뺐다.
“아까 그 말 아직 유효해?”
“어떤 거요?”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는 말.”
“네. 당연하죠.”
오랜만에 장시간 차를 타서 피곤하긴 했지만 커피 마시는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열쇠구멍에 키를 맞춰 넣는데 등 뒤에서 한기가 가득했다. 유진은 묵야가 누군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고, 묵야는 유진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너도 들어와.”
번갈아가며 초대를 한 다음, 포대 자루를 내 방으로 가져다놨다. 혹시나 싶어 포대를 묶은 끈을 풀었다. 귀여운 문자 녀석들이 얌전히 담겨있었다. 묵야가 납작하게 밟아 놓은 터라 뭉친 녀석들은 형형색색의 예쁜 빛을 띤 만화경처럼 뭉쳐서 와글와글 댔다. 녀석들이 내 방을 메울 수 있도록 포대의 입구를 활짝 열었다. 거실로는 나오지 못하게 방문을 꽉 닫았다. 유진은 묵야를 보고, 묵야는 나를 본체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일반 커피포트라도 괜찮겠어요?”
“어떤 거든.”
묵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도 나름 깔끔한 편인지 내가 살 때보다 주방의 상태가 청결한 편이었다. 커피포트에 전원을 켜고 원두가루를 여과지에 넣었다. 금세 끓기 시작한 물에서부터 원두향이 진하게 났다. 커피 세 잔을 타서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들에게 가져갔다.
묵야는 테이블 위에 내가 준 잔을 올려놓고 커피가 식기를 기다렸다.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져서 픽 웃고 말았다.
“아!!! 생각났다!”
묵야의 얼굴을 무례하게 쳐다보던 유진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딱하고 쳤다. 묵야가 누군지 생각났다며 호들갑이었다.
“당신 사파지?”
묵야는 불쾌한 눈으로 유진을 봤다. 유진이 기괴하게 비틀린 웃음으로 묵야를 대했다.
“동양인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한참 생각했지 뭐야, 그 꼬맹이 마약하고 연관되있는 남자잖아.”
꼬맹이와 마약이라면 부모를 살해한 고등학생 녀석을 말하는 것 같았다.
“junkie monkey.”
“유진, 입 다물어.”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묵야를 봤다고 하더라도 경찰서 취조실이 아닌 이상 유진이 묵야를 추궁할 이유는 없었다.
“형이 이 남자랑 무슨 관곈데?”
유진이 이번엔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유진 때문에 미국인은 참견이 심하다는 편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묵야가 조금 식은 커피 잔을 쥐었다. 유진이 눈을 빛내며 계속적으로 내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랑 사귈지도 모르는 남자.”
출렁하면서 묵야의 손에 들려있던 커피가 묵야의 손등을 적셨다. 묵야는 뜨겁지도 않은지 내심 동요를 감추며 테이블 위의 티슈로 손등을 닦아냈다. 문자가 읽히지 않더라도 행동만 보면 뻔히 알겠다.
“뭐? 형! 이 남자!”
유진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알아. 그 일 때문이라도 알 게 됐구. 근데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
“너무해. 잔인해.”
잔인하단 말이 입에 붙었는지 기가 죽어서 입을 삐죽였다. 나는 잔뜩 쳐진 녀석의 금발머리카락을 툭툭 털어주었다.
“그 부모 살해범이 나에 대해 언급했나보지?”
묵야는 별 거 아닌 일을 내뱉듯이 조용히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아니, 그 녀석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는 수가 있어.”
유진이 잔뜩 쳐졌던 꼬리를 빳빳이 세우곤 묵야를 노려봤다.
“당신, 형이 경찰에서 일한다고 이용하려 접근한 거면 빨리 마음 접는 게 좋아.”
묵야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팽팽한 줄다리기 싸움 같아 보는 내가 다 골이 지끈지끈했다.
“너는 네 일을 위해서 연인을 이용하는가보지? 한심하군.”
묵야의 싸늘한 대답에 발끈한 유진이 벌떡 일어섰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쾅-하고 테이블에 무릎을 박았다. 우씨, 하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유진은 무릎을 움켜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딱 애다. 저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열한 살 같았다. 묵야는 미지근해져가는 커피를 천천히 비어가고 있었다.
“경찰일 돕게 될 것 같아요.”
“그래.”
묵야의 여유로운 태도에 조금은 안심한 마음이 됐다. 단 이틀 사이에 이 남자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커진 것을 보니 앞으로의 만남이 두렵기도 했다. 물론 부딪히지 않고 물러서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다.
“혹시 K3 복용해요?”
내 뜬금없는 물음에 묵야가 하, 하고 웃었다. 눈가가 접히는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난 약은 안 해.”
“네. 그럼 됐어요.”
갑자기 묵야가 어깨를 들썩였다.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웃는 모습이 난폭하거나 비웃음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비춰졌다.
“네가 좋다.”
“설마 한 눈에 반했다는 상투적인 말은 하지 마세요.”
정말 그 말을 하려했는지 묵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점점 더 좋아질 것 같아.”
“그럼 K3가 어디로 유통되고 있는지, 오늘 잡혀온 당신 부하가 전성그룹 피해자를 정말 죽였는지도 알려줄 수 있어요?”
“네가 원한다면. K3는.”
묵야가 정말 진실을 말해주려는 것처럼 입을 열어서 깜빡 놀라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 묵야의 발언을 말렸다.
“아니! 됐어요! 그 건 앞으로 내 일이 될 테니까 내가 알아서 해요. 그리고 그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그런 일 하겠어요?”
“네 손에 잡혀가는 건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
“그 말, 꽤 무서운데요.”
“무서우라고 한 말은 아닌데.”
묵야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휴대폰에서 계속 진동이 오고 있었다. 새벽6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저렇게 바쁘면 잠은 대체 언제 자나 싶었다. 묵야가 정장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길게 화면을 터치해 아예 휴대폰을 꺼버렸다.
“바쁜 거 아니에요?”
“아마도.”
꺼진 휴대폰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묵야 당신도 여기서 자고 가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저 외국인 나갈 때까지 나도 네 집에서 지낼 생각인데.”
“네?!”
“하반신이 가벼워 보여서 말이지.”
나를 말하는 건지, 유진을 말하는 건지 애매했다. 묵야의 시선은 닫힌 안방 쪽으로 향해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궁금증은 풀렸다.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참고로 저 꽤 센 편이거든요.”
“몸 약하잖아. 기침도 심한 것 같던데.”
“가끔 그럴 때가 있는데, 일단 제가 고등학생 용의자 제압한 거 잊었어요? 그리고 착각할까봐 알려드리는데, 저도 꽤 놀아봤어요.”
묵야의 앞에서 주먹을 흔들었다. 꼭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웃고 있는 묵야의 얼굴이 내 얼굴로 휙 다가왔다. 내 입술을 먹어치우듯 묵야의 입술이 덮히고 다시 뒤고 물러났다.
“미안. 자제할게.”
“뭐, 아주 나쁘지는 않았어요.”
“난 착한 사람이 아니야.”
“그것도 이미 알고 있구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대하면 자제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플라토닉 러브는 안 해봤어요?”
“글쎄. 러브란 것 자체를 안 해봐서.”
콰당! 안방 문이 열리며 유진이 소리 쳤다. 들어간 순간부터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what? love?! fuck! you took my man!!”
유진에게서 속사포처럼 그의 모국어가 쏟아져 나왔다. 짐승의 고함소리와 같음에 귀가 얼얼했다.
“주인이 네 것이었던 적은 없으니까 그 말엔 어폐가 있지.”
묵야가 처음 보는 얼굴로 유진을 비웃고 있었다.
“조폭 주제에….”
유진은 궁지에 몰려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했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묵야에게 있어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묵야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나 잘 거야.”
유진이 잡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자세로 웅얼거렸다.
“그래, 늦었으니 얼른 자라.”
“같이 자자.”
“미친 외국인 하나를 들였군.”
묵야가 나를 보며 커피를 머금었다. 미친 외국인이라…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침대로 쾅쾅 걸었다. 방문을 닫지 않는 걸 보면 유진의 귀는 이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을 것 같았다. 유진은 내가 없는 이 집안에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이 집 구석구석에 내 손이 닿지 않은 물건은 없다. 사이코메트리로 과거의 잔상들을 읽어내려고만 한다면 반년의 시간 가지고는 택도 없을뿐더러,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유진이 읽어냈을 수도 있다.
“동트기 전에 자야겠네요.”
“그래.”
묵야도 소파에서 일어섰다. 내 방으로 걸어가면서 따라오는 묵야에게 일침을 가했다.
“제 방 침대는 일인용이니, 안방 침대 유진이랑 같이 사용하세요.”
“뭐?”
묵야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 남자 생각보다 단순하고, 순진한 것 같다. 유진도 내 말을 엿들었는지 안방 문을 쾅하고 닫았다. 집주인이 여기 떡하니 있는데 저 뻔뻔함 하고는. 묵야가 뒤로 닫힌 안방 문을 엄지를 세워 가리켰다.
“외국인이 싫다는데?”
“그럼 제가 소파에서 자고, 묵야씨가 제 방에서 주무세요.”
“아니, 내가 소파에서 잘게.”
묵야가 소파로 이동했다. 난방이 잘된다고 하더라도 겨울 거실은 춥기 마련이다. 닫힌 안방 문을 열고 장롱에서 이불을 꺼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감싸 안은 유진이 얼굴만 빼꼼히 내놓고 있었다.
“형 방에서 같이 자도 돼?”
“그냥 거기서 자. 각자 다 따로 잘 거야.”
이 기묘하고도 이상한 삼인의 동거가 단 이틀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찡얼거리는 유진을 무시하고 안방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은 묵야에게 이불을 내밀었다.
“빈 방이 하나 더 있긴 한데, 문을 잠가놔서 열지를 못해요.”
열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빈 방을 잠근 것은 나였다. 이주율의 흔적은 그 방 안에 전부 가둬져있었다. 밖으로 나와선 안됐다.
“다른 가족은?”
묵야가 당연한 의문에 대해서 물었다. 외국인이 안방을 점령하고 있으며, 문이 잠긴 빈방까지. 이 집안에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없다는 것은 조금만 같이 있어도 쉽사리 눈치 챌 법 했다.
“없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하나 있던 동생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렇군.”
방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커피 포대 자루에서 나온 문자들이 오랜만에 돌아온 내 방을 구석구석 훑고 다녔다. 동이 트기 전에 잠에 들려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내 피곤함을 아는지 방해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이주율, 어디 있냐? 나타나서 뭐라도 해야 내가 너를 용서하든 말 것 할 거 아냐? 가족이라는 지긋지긋한 연에 사로잡혀서 너를 완벽하게 버리지도 못한다. 너도 그것을 알기에 이용한 것이겠지. 녀석이 나와 닮은 구석이라곤 목소리 밖에 없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가 그렇게 닮지 않는 것도 드물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네 잘난 외모 때문에 얼마나 피곤했던지. 발렌타인데이 때 녀석을 상대로 질투심을 발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는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모른 척, 못 본척 했을 때 이주율, 너 역시도 숨겨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랜만에 사람들로 집 안이 사람들로 가득차서 다행이었다. 온통 이주율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뱉어지는 뜨거운 숨결이 이불 안을 달궜다. 숨이 조금 부족했지만 잠이 오기에는 딱 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