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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보고 찾아오라고는 허락했지만 새벽같이 오라고는 안했다. 남자에겐 잠도 없는지 셔터를 두드려 댄 것이 아침7시였다. 덕분에 팅팅 부은 눈으로 남자를 맞이해야했다.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남자의 표정이 얼마나 싸늘한지 들고있던 커피 포대를 내 면상에 던지는 줄 알았다.
“자는 줄 몰랐다. 미안.”
“아니에요. 일찍 일어나야죠.”
하품을 찍찍 해대며 남자를 안으로 이끌었다. 포대 자루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금고에서 오만원권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자 남자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 안 좋아졌다. 혹시 더 비싼가?
“주지 않아도 돼.”
“계산은 똑바로 해야죠.”
글자가 생성이 안되니 남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도 못채겠다. 글자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면 난 정말 곰보다 더 둔했을거다. 잠결에 눈이 침침해서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 남자의 어깨와 허리에 이상한 형체가 달라붙어있었다.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었다. 진흙처럼 질척거리고 진드기처럼 끈끈해보이는 것이었다. 저런 모양은 처음보는데....
나는 하품하던 손을 거둬 남자의 어깨와 허리에 붙은 것들을 털어주었다. 남자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먼지가 많이 붙었나보지?”
“네?”
“어제부터 자꾸 내 양복을 털어주니까.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매우 청결한 편이야.”
오해는 남자 쪽에서 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에게 슬쩍 웃어주었다.
“먼지가 붙은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냥 그런 거?”
남자는 애매한 내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재차 물었다. 곰곰이 생각해도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주문이랄까?”
손가락 하나를 올려 반짝 떠오른 것을 말해주었다. 남자의 표정이 더 미묘해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라는 표정에 가깝긴 했지만.
“모닝커피 드실래요?”
커피를 대신 배달해줌으로서 택배 기사의 짜증을 받지 않도록 도와준 남자에게 약소하나마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아니지, 생두를 주문한 건 내가 맞지만 흰 가루를 주문한 건 아니다. 누군가 중간에 내 생두와 흰 가루를 바꾼 확률이 높았다. 깊은 시골로 들어오는 포대자루를 의심할 일은 없을 테지. 앞으로 이런 식으로 내 카페가 이용되면 굉장히 곤란한데. 지금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의자에 앉은 남자에게로 내밀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터라 남자가 바로 마실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카페 오픈 시간은 앞으로 3시간이나 남았고, 잠은 이미 깼으니 남자와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특히 이 남자는 글자를 생성해내지 않으니 혼자 있는 것만큼이나 편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의자에 얌전히 앉아 커피가 식을 때를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은 꼭 먹이를 눈앞에 두고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는 육식동물 같았다.
“왜 그렇게 웃지?”
“아, 제가 웃었어요?”
입가로 손을 가져가는데 정말 입 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있었다.
“고양이신가 봐요.”
“고양이?”
“뜨거운 걸 잘 못 드시니까요.”
남자가 커피 잔을 잡아서 보란 듯이 마셨다. 꽤 뜨거웠는지 밖으로 슬쩍 나온 혀가 남자의 아랫입술을 쓸고 사라졌다.
“그렇군. 난 뜨거운 걸 잘 못 마시는 편이야.”
남자는 자신의 특성을 이제 알아차린 사람처럼 중얼댔다. 남자의 손목을 감싼 시계는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워보였다. 나 같은 박봉은 평생 손도 대보지 못할 명품. 고양이혀를 가져가 줄테니 저 시계와 맞바꾸자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반길텐데. 주인아,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현실적인 걸 생각해야지.
“맛있군.”
조금 식은 커피를 음미하는 남자가 사심 없이 웃었다. 어찌나 엷은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웃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른 커피는 못 마시게 될 것 같다.”
“과찬이죠.”
아직도 부운 눈을 깜빡거렸다. 시야가 좁아져서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는 것도 힘들었다. 원체 얼굴이 잘 부어서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지 않는 편인데. 붓기가 빠지려면 해가 저 꼭대기에 떠야한다. 남자는 가게 문 옆으로 죽 늘어놓은 작은 화분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죄를 졌나?”
뜬금없었다.
“이유가 있어 숨어 사는 것 같군.”
설마. 난 선량한 준법시민이다. 지금 눈이 부어서 잘 안 보이지만, 내 눈이 얼마나 맑은데! 깨끗하게 씻어 말린 도자기 컵 안에 붙은 먼지를 후 불어 털어냈다.
“복잡한 거 질색이고, 사람 많은 거 싫어한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도시에서 살다 온 건가?”
“네. 그렇죠.”
“몇 살이지?”
소개팅 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가 종횡무진 오갔다. 남자는 의도치 않게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기에 사실대로 이야기 해주었다.
“스물셋이요.”
남자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가 호수에 돌을 던진 것 마냥 출렁였다.
“어리군.”
“그러는 그쪽은요?”
“이름으로 불러.”
“묵야씨는요?”
발음하기에 편한 이름은 아니다.
“스물일곱.”
그 정도 돼 보이긴 했다. 뒷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리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본능적으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나 할까. 나도 부릅뜨면 꽤 박력 있는데…. 흡! 하고 눈알에 힘을 주자 눈두덩이가 더 붓는 느낌이었다. 그만두자.
“식사는 아직 이지?”
“네.”
“먹으러 나갈까?”
여기서 식당을 운영하는 곳까지 나가려면 차를 타고도 30분은 걸린다. 차멀미도 심한 타입이라 산길을 오르면서 다 게워낼 수도 있다. 남자의 양복에 게워내면 아마 나는 그 날 부로 흙바닥에 묻혀 이 산을 푸르게 만드는 양분이 되겠지.
“아뇨. 멀미도 심하고 해서 사양할게요.”
“이런데서 살면 심심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도 자주 찾는데요 뭘. 안 심심해요.”
“노인들 밖에 없는 것 같던데?”
“노인들이 원래 더 말이 많아요. 그리고 여기 사람들 순박하기도 하구.”
“취향이 늙은이인 줄은 몰랐군.”
극단적이어라. 내 취향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그러니 저 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에스프레소를 비운 남자가 내게 머그잔은 건넸다. 맞닿는 손이 따뜻했다. 온풍기도 훈훈하게 돌아가니 잔뜩 움츠리고 있던 자세도 점점 펴졌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 하는 남자의 행동을 만류했다.
“됐어요. 서비스에요.”
“받아. 얼마지?”
남자의 태도는 강경했지만 내게 맛있다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비스라니까요. 됐어요.”
“... 그럼 또 보지.”
다시 찾아오겠다는 남자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무슨 볼일이 있다고 또 와. 아, 어제 사귀자고 했었지.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진담이 그 안에 섞여 들어가 있었나보다. 남자가 생성해내는 글자가 없으니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묵야씨는 어디 사는데요?”
내 부름에 기쁘다는 듯이 멈춰선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겠지.
“서울.”
“방금도 서울에서 온 거예요?”
“그렇지.”
적어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4시간은 밟아야 도착한다. 남자는 잠을 자지도 않고 이곳으로 향한 것이었다. 나는 부운 눈을 비비면서 예의상의 말을 건넸다.
“주무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오픈 시간까지 좀 자다 가실래요? 피곤한데 운전하면 위험하잖아요.”
남자가 가던 길을 돌아 주방 안쪽으로 들어오더니 내 허리를 감쌌다. 어제처럼 순식간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안 당하지. 남자가 입술 박치기를 하기 전에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의 입술이 손등에 마찰됐다. 뜨겁게 뱉어지는 숨이 남자에게서 나오는 웃음인 것을 알았다.
“대범하게 꼬시기에 나를 받아들인 줄 알았지.”
내 말에 어디가 대범했다는 겁니까? 되묻고 싶었다. 혹시 자고 가라고 한 말이 이상하게 들린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남자는 새벽에도 문자로 헛소리를 해댄 전적이 있으니까. 힘을 주어 허리를 감은 남자의 손을 풀고 구겨진 옷을 폈다.
“오로지 잠만 주무시다 가라는 말이었어요.”
“너 어제 내 말 잊은 건 아니겠지?”
“뭘요?”
“사귀자는 말.”
“앞으로 이쪽으로 그런 물건 보내지 말아요. 다음번엔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동문서답하는 내 반응에 묵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나는 곁눈질로 도마에 올려두었던 칼의 위치를 확인했다. 으, 저렇게 쳐다보니 살 떨려라.
“그깟 물건을 받는 루트로 너를 이용하기위해 사귀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나?”
“그런 건 아닌데요.”
“난 일에 연애를 개입하지 않아.”
남자가 나보다 칼에서 더 가까웠다. 내가 슬금슬금 칼과 가까운 자리로 이동하자 남자가 손을 뻗어 칼을 싱크대 안으로 집어던졌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를 무뢰한으로 취급하는 군.”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당신의 생각이 전혀 읽히지 않으니 대비는 해야죠. 고개만 힘차게 저었다.
“또 오지.”
남자는 내 머리카락을 휘젓고 다시 가게 문으로 향했다. 무뢰한으로 취급한 기억은 없으나 조금 미안함은 들었다. 폭력을 휘두를 생각도 없는 상대에게 미리 겁을 먹고 만반의 준비를 하려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사귀자는 말은 보류에요.”
남자가 나빴던 기분을 단 번에 푸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더는 내게 건네는 말없이 가게를 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뺨을 짝 때려서 남자가 가져온 원두를 주방 안쪽으로 질질 끌었다. 로스팅은 낮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빗자루를 들어 가게를 청소했다. 어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눈에만 보이는 문자먼지와 다른이들 눈에도 보이는 실제 먼지를 쓸어 담아 종량제 봉투에 가뒀다. 글자가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지 종량제 봉투 안에서 연신 꼼지락댔다. 나쁜 기운을 가진 녀석은 아니니 터뜨려 죽이지는 않기로 했다.
남자가 가게에 있던 시간이 꽤 되는지 벽에 걸어놓은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였다. 한 숨도 자지 않았을 텐데 고속도로는 잘 달리고 있으려나. 어쩌면 운전은 남자가 아닌 그의 부하가 할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앞치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웨이브를 쳤다.
[조하하는 음식이 뭐니?]
얼씨구. 이번엔 오타까지 난 문자가 도착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묵야의 문자에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테이블을 행주로 훔치던 중이었기에 답변은 조금 후에 보내기로 했다. 긴 나무 테이블을 여기부터 저 끝까지 달려서 닦는데 휴대폰이 또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러번 울리는 것을 보니 전화였다. 휴대폰 액정엔 묵야라는 글자가 위협적이게 반짝였다.
“네, 여보세요.”
“바빠?”
“아뇨, 청소중이라.”
“문자는?”
“청소 끝난 후에 보내려고 했죠.”
“그래, 기다릴게.”
묵야는 여전히 내가 종료버튼을 누를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내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런 자세로 종료를 시켰다. 복잡한 일들이 싫어서 도시를 떠나왔는데 한가함이 이년도 채 가지 못했다. 심지어 이제는 마약이란다. 묵야가 얘기하진 않았지만 직업은 분명 조폭비스무리한 것이겠지. 천장을 올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딸랑딸랑- 장주 할배가 오늘은 웬일로 일찍 오나? 싶어서 앞을 봤더니 도시에서나 볼법한 교복은 입은 남자 녀석이 하나 서있었다.
항현문자 04
피골이 상접한 모양이라 교복만 아니었다면 탈북자로 오인받기 딱 좋을 모양새였다. 녀석의 주변으로 현기증이 날 정도의 짙은 글자들이 떠다녔다. 붓기가 가라앉은 눈으로 녀석의 몸에 엉겨 붙은 글자들은 천천히 눈여겨 보았다. 대게 분노와 관련된 단어들이 많았다.
“어서 오세요.”
녀석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가 녀석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불쾌감과 함께 불안함이 들었나보다. 녀석이 뒷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상상은 간다. 저 뒷주머니가 뭐가 있을지는. 싱크대 안에 묵야가 떨어뜨려놓은 칼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귀곡카페도 아니고. 먼 일들이 이리 생긴다야. 그새 장주 할배의 사투리가 전염됐나보다.
“여기로 잘못 배달 온 게 있지 않았나요? 그게 원래 제가 보낸 건데 잘못 보낸 거라서요 회수하러 왔습니다.”
이런, 청소 싹 해놨는데. 녀석의 신발에서부터 마른 진흙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만 떨어뜨리면 좋겠는데 사악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글자들까지 버려대니 난감한 찰나였다.
“물건이요?……. 음, 잘못 온 물건이라면 어제 다른 분이 찾아가셨는데요.”
녀석이 테이블을 돌아 주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뒷주머니에 넣어져있었던 칼을 꺼내 내게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어떤 새끼가 가져갔어?!”
녀석이 태도를 싹 바꿔서 덤벼들었다.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반말을 지껄여. 물론 한가롭게 충고할 시간 따윈 없었다.
“경찰이 가져갔는데요.”
녀석에게서부터 스물스물 내 곁으로 검은 문자 하나가 다가왔다. ‘살해’ 긴 글자의 궤적를 남기며 내게 다가오는 그 문자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글자를 읽을 수 없는 묵야는 무서워도 이 녀석의 경우는 아니었다. 손 안에서 그 문자를 뭉개자 팍하고 흔적이 없이 흩어졌다. 순간적으로 생겨난 감정의 글자를 없애면 아주 잠시지만 상대방 쪽에서 그 생각과 관련된 마음이 수그러든다. 하지만 아주 찰나이기 때문에 다시 그 강렬한 감정이 튀어나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칼을 들이밀고 있는 녀석에게서 재빨리 다가가 손목을 틀어잡았다. 다시 녀석의 위로 문자들이 생성됐다. ‘죽인다. 죽여.’ 악력으론 아직 영글지 않은 고등학생보단 내가 세다. 녀석의 손목을 꺾자 쩔그렁하고 바닥으로 칼이 떨어졌다. 발을 뻗어 떨어진 칼을 저 멀리로 차버렸다. 칼을 찾으려 가는 녀석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바닥에 엎어뜨려 표본실의 개구리처럼 팔딱거리는 녀석의 두 손을 엑스자로 포갰다. 앞치마를 머리위로 벗어서 단단히 녀석의 팔뚝을 동여맸다. 오랜만의 활동적인 동작에 숨이 씨근덕거렸다. 밑에 깔린 녀석은 분한 씨근덕거림이 다분했다.
“어린 놈이 어디서 칼을 들이대. 못된 것만 배워선!”
녀석을 질질 끌어서 내 방으로 데려갔다. 갓잡은 뱀처럼 연신 꿈틀거리는 터라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겨줬다. 어디보자 신발장에 남은 노끈을 모아뒀던 곳이 있는데. 옳지. 저기 있다. 여러겹의 포대자루를 엮는 분홍 노끈을 찾아내서 녀석의 손목을 다시 한 번 감았다. 꼼짝도 못하게 다리까지 묶어버렸다. 녀석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녀석의 몸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비오는 날 미친놈처럼 발작을 일으켰다.
“얌전히 있어. 봉사 좀 해주려는 거니까.”
녀석에게 붙어있는 검은 글씨들을 터뜨려 없앴다. 부모, 슬픔, 당혹, 살해, 자괴감, 마약, 배달 등등. 뭐가 이리 많은지 십 분이나 걸려서야 절반을 해치울 수 있었다. 녀석의 표정도 한결 좋아졌다. 대신 내 속은 답답해졌다. 녀석은 뭔가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너 은평구 살인 사건인가 그거지?”
녀석에게 달라붙어있던 글자들로 대충 유추해낼 수 있었다. 어제 나를 찾았던 묵야 쪽 덩치들이 은평구 살인사건을 들먹였던 이유도 있어서 쉽게 알아차렸다. 글자를 통해 대강은 알아낼 수 있어도 완벽한 사연은 캐치하지 못한다.
“마약 때문에 부모님을 죽였어?”
방바닥에 굴러져 다니는 담배를 들어서 입에 물었다. 달칵하고 붙이자 녀석이 내게서 시선을 회피했다. 저런 썩은 종자들은 복날 개 패듯이 패고 싶지만 일단 사연이라도 들어야 하기에 꾹 참았다.
“이거 한 대 펴고 경찰에 넘겨야겠다. 웃긴 놈이네. 우리 가게는 어떻게 알고 그런 마약 포대를 보내?”
‘방문, 배달. 종용’ 세 글자가 녀석의 귓가에서 어른거렸다.
“뭐야, 너 우리가게 와 본적 있어?”
녀석이 화들짝 놀라서 나를 봤다. 생각이라도 읽힌 듯한 표정이다. 뭐 대강은 맞지.
“쪼그만 놈이 마약을 왜 해?”
녀석의 눈가가 시퍼런 것을 보니 그냥 내 생각만은 아닌 듯했다. 하얗게 튼 입술에서부터 단내가 흘러나왔다. 진짜 별 게 다 굴러들어온다. 내가 뭣 때문에 이런 시골로 들어왔는데. 녀석을 구석에다 짱박아놓고 어제 남은 된장찌개를 끓였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보글보글했다. 행주로 뚝배기를 잡고 쟁반에 담아 밥과 함께 녀석에게로 가져갔다. 녀석은 배가 무척이나 고팠는지 침까지 질질 흘릴 기세다. 나는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수저로 쓱쓱 비벼준 다음 녀석의 입가로 가져갔다. 여전히 나를 경계하면서도 밥을 꾸역꾸역 잘 받아먹었다. 갑자기 밥을 거의 다 비운 녀석이 눈물을 질질 짰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보는 나도 슬퍼질 지경이었다.
“부모님을 왜 죽여?”
“정신 차려보니까…….”
“후회는 별로 하지 않는가보네.”
‘모른다’라는 단어가 생성됐다. 짙은 청색이라 악의는 없어보였다. 그 단어가 일렁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녀석이 내게 전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문득 궁금함이 들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주인을 죽이지.
“내가 뭘 모르는데?”
녀석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뒤로 젖혀 벽에다 머리를 찧었다. 반복적인 행동에 녀석의 뒤통수 뒤를 손으로 감쌌다.
“우리 집 벽 약해. 이거 콘크리트가 아니라 스티로폼이거든, 아무리 힘차게 찧어 봐도 아프지도 않아.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정신없게 만들어내지 말고.”
“내가 안 죽였어.”
“그럼?”
“돌아오니 죽어있었어.”
“가출했었구나.”
녀석이 지치지도 않는지 또 깜짝 놀랐다. 더 놀라지 말고 그냥 감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해라.
“돈이 필요해서 돌아왔는데 죽어있었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때의 특성이 드러났다. 짙은 회색에 가까운 글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거짓말의 색이 바로 저 짙은 회색이다. ‘조금 더, 믿는다, 속여.’ 내가 손을 가져가자 녀석이 움찔했다. 그 글자들을 양 손으로 짝 쳐서 없애 뜨렸다.
“난 거짓말이 질색이거든.”
녀석을 묶은 앞치마를 뒤적여서 휴대폰을 찾아냈다. 묵야에게서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지금 뭐행?~]
헉! 제발 이러지마!! 최고조로 놀라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하다가 다시 고쳐 쥐었다. 일단 문자를 보고 놀란 마음은 진정시키고, 저장 목록에 있는 태형 형의 전화번호를 찾아 연결을 시도했다.
아싸~ 새가 날아든다, 짭새가 날아든다. 문제야 문제 우리나라 경제…까지 컬러링이 흐르고 형이 전화를 받았다. 노래 한번 참.
“웬일이냐? 산 구석에 처박혀서 드디어 해탈이라도 했냐? 해골물은 마실만 하디?”
비꼼이 가득한 말투 때문에 그냥 112에 신고하지 않은 걸 잠시 후회했다.
“형, 오랜만이에요. 근데 컬러링이 그게 뭐에요? 자기가 경찰이면서 짭새가 뭡니까 정말.”
“몰랐냐? 문제야 문제 우리나라 경제 좆같은 짭새와 이주인이 문제야~ 어딜 함부로 자기라 불러대.”
“내가 왜 문제에요!”
노래를 읊어대는 태형 형에게로 버럭 승질을 냈다. 주인아, 이러려고 전화한 건 아니니 지금은 참자.
“형, 은평구 살인사건 용의자 고등학생 맞죠?”
어린 용의자 녀석이 나를 씹어 삼킬 듯 이를 갈면서 봤다. 그래도 하나도 안 무섭걸랑. 녀석의 머리 위로 솟아난 ′개새끼′ 라는 단어를 뭉개버렸다. 주먹을 쥐고 씁, 어딜 욕을 해! 라는 표정을 하자 용의자 녀석의 표정이 질린 듯 변했다.
“그런데?”
어느새 태형 형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전부 사라져있었다.
“지금 내가 잡고 있는데 올래요?”
“뭐?!”
휴대폰을 잠깐 옆으로 뗐다. 흥분하는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그거 진짜면 조심해라. 그 새끼 마약에 쩌들어서 맛이 간 놈이야.”
“진짜죠,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 하는 거 봤어요?”
“아니지, 알아. 아니까 금방 갈게. 조심히 있어!”
“네. 꽁꽁 묶어놨으니 걱정 마시고 오세요.”
지금부터 밟아도 두 시간은 걸리겠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노끈을 더 가져와 녀석의 팔과 다리를 한데 묶었다. 바닥에 덜렁 눕힌 다음에 방문을 닫고 주방으로 나왔다. 방 안쪽에서 녀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사뿐히 무시하고 묵야가 배달해 준 포대자루를 찢었다. 아 맞다, 답변 보내야지. 터치감이 좋은 휴대폰을 눌러서 [지금 운동하고 로스팅 중임.] 이라고 간단히 보냈다. 꽤나 좋은 등급의 커피인지 윤기가 아주 좔좔 흘렀다. 장주 할배 입맛 더 높아지면 큰일인데. 로스팅 기계에 생두를 넣고 볶기 시작하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운동도 하니? 나도 운동 좋아해. 언제 같이 만나서 운동하는 게 어떠니?]
도저히 닭살이 돋아서 참지를 못하겠다. 티딕티딕 거리며 크랙이 시작되는 소리와 함께 묵야에게 전화를 넣었다. 컬러링도 없는 투박한 벨소리가 두 번도 가지 않아 묵야의 깊은 음색이 흘렀다.
“네, 여보세요.”
“저기, 이봐요. 아니 묵야씨, 지금 바빠요?”
“바쁘진 않아. 문자하지 왜?”
“문자 정말 그 쪽이 보내는 거 맞습니까?”
“…….”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왜? 내 문자가 이상해?”
“이상한 건 둘째 치고 저 남자거든요. 그렇게 닭살 돋게 안 보내주셨으면 하는데요.”
“닭살이 돋아?”
“네.”
“그랬다면 미안하군. 일단 끊자.”
“네네.”
휴대폰을 귀에서 떼는데 갑자기 커다란 타격 소리가 들렸다. 묵야는 버릇처럼 내가 먼저 끊었을 줄 알고 휴대폰이 종료됐는지를 확인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나는 두근두근 거리는 상태로 휴대폰에 귀를 바짝 붙였다. 통화음성을 크기를 최대로 높이자 복날 개 잡는 소리가 여실하게 들렸다.
"형님, 그게 아니고. 들어보세요! 으아아악! 원래 작업하는 상대한테는 다정하게 말을! 아악! 죄송합니다!"
안 봐도 뻔했다. 어제부터 오던 문자는 묵야가 보낸 문자가 아닌 것이다. 아마 묵야 밑의 녀석들이 문자를 잘 보내지 못하는 묵야를 대신해서 보내준 것 같았다. 다만 묵야는 내가 남자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인 것 같고. 나는 조심히 휴대폰을 끊었다. 진짜 특이한 남자다. 킥킥대는 웃음이 저절로 흘렀다. 로스팅이 다 된 커피를 식히고 있을 때쯤 묵야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네, 여보세요.”
“앞으론 전화해도 되나?”
“지금도 전화하셨잖아요.”
“아니, 문자는… 이제 안 보낸다. 전화로 얘기하자.”
“네, 그러세요. 아, 맞다. 은평구 용의자요. 제가 지금 경찰에 넘기거든요.”
처음으로 묵야가 동요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묵야가 말을 꺼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래. 너 혹시 어디 다친건 아니지?”
“네. 그래봐야 고딩인데요. 손쉽게 제압했죠. 아차, 혹시 그쪽으로 불똥 튈지도 모르겠어요. 마약 사건이니까요.”
“하하, 나 생각해주는 건가?”
정말 기분 좋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쥐가 고양이 생각해준다는 셈 치면 되겠네요.”
“적절한 예군. 잡아먹히지 않게 부지런히 도망 다녀라.”
그래, 내가 쥐새끼고 네가 고양이 해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답을 아직 안줬는데?”
“흠, 글쎄요. 지금 딱 떠오르는 건.... 회네요.”
“그래. 지금 일 중이니 조금 있다가.”
“네네. 굿잡.”
얼른 종료를 시켰다. 산속에 살다보니 고기는 자주 먹어도 회 구경하기가 힘들다. 이참에 태형이 형 오면 회라도 사달라고 조를까? 용의자 녀석과 사투를 벌였던 흔적들을 싹 치우고 카운터 의자에 앉았다. 잠을 얼마 못잤더니 따끈한 온풍기 바람에 잠이 꾸벅꾸벅 왔다. 이 시간이면 장주 할배가 오는데 오늘은 다른 곳으로 마실갔는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감자 참을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이러면 안되는데. 가게 봐야하는데. 안 돼. 안 돼. 돼. 돼. 돼. 마음속의 메아리가 점점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