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7/10)

7장.

선우의 요양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선우는 배가 점점 불러 올 때까지 서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범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시골집으로 퇴근했기 때문이다.

범은 첫날조차 참지 않았다. 유난스런 이별을 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밤이 늦자 다시 할머니 댁으로 쳐들어왔다. 야심한 시각에 말도 없이 와서는 뻔뻔스럽게 저녁밥도 얻어먹었다.

선우는 여보- 하며 들어오는 범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손만 잡고 잔다는 그를 하루 받아 준 뒤로, 범은 처갓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물론 만류도 해 보았다. 통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말도 안 되게 기니 피곤할까 염려가 되었다. 기름 값도 아깝고.

선우는 기름 값을 시간으로 고쳐 좋게 타일렀다. 시간이 아깝다고.

범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네게 오는 시간은 아깝지 않아.’라고 답했다. 약간 제 멘트에 제가 취한 느낌이었다. 그의 기름진 눈빛에 토하는 시늉도 해 보았고, ‘아니, 제가 아깝다니까요?’ 하며 반박도 해 보았다. 하지만 ‘여보, 날 아끼지 말아 줘.’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좆대로 하시라고 했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었고 일주일은 한 달이 되었다. 그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리가 나올 때까지 그냥 지내기로 했다.

할머니 댁에서의 삶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잔했다.

선우의 인생은 부딪히고 깨지기만 반복하는 파도 같았는데, 이제 선우의 인생에 파도라곤 할머니 몰래 나누는 섹스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철썩철썩은 아니었다. 범은 살랑살랑 흔들흔들 얕은 파도를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잔잔한데 지루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렀고,

선우는 어느덧 임신 9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

자두를 먹던 계절이 군고구마의 계절로 바뀌었다. 한겨울.

바닥이 뜨끈뜨끈한 방에 누워 만화책을 보던 선우에게 여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끙, 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을 나가 보았다. 나가는 중이고만, 범은 고새를 못 참고 오리 엄마- 하며 더 큰 소리를 냈다.

“쉿! 조용히 해요. 할머니 주무세요. 오늘 늦었네요?”

범은 대답도 않고 달려와 입부터 맞췄다. 선우의 입술에 쪽쪽 뽀뽀하고 남산만 한 배에도 쪽쪽 입맞춤을 내렸다. 그는 요즘 새로 시작한 일이 있다며 종종 늦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더 늦었다. 선우가 ‘바빴어요?’ 하고 다시 물었다.

“어. 이거 때문에.”

범이 검정색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선우가 좋아하는 왕만두가 들어 있었다. 고기랑 김치, 둘 다. 선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선우가 ‘형은 이럴 때 제일 지적인 것 같아요.’ 하고 평소 잘 해 주지 않는 입발림 소리를 해 주었다.

범이 우쭐해서는 ‘내가 얘 식지 말라고 엉따도 켜 줬다.’ 하고 생색을 내며 또 칭찬을 바랐다. 쭉 엉덩이를 내밀기에 팡팡 때려 주었다.

범이 변태같이 웃으며 어흐, 했다.

“빨리 씻고 오세요. 빨리 먹게.”

“뭐를? 나를?”

“아닌 거 알면서 왜 물어봐요?”

“너는 네네 잘만 하면서 이런 건 또 안 속더라? 우리 마누라 역시 현명해. 그래서 섹시해.”

선우는 대꾸 없이 범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얼른 욕실로 가라는 뜻이었다. 범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나도 빵댕이 때리고 싶다, 라고 중얼거리는 듯하여 못 들은 척 방으로 피신했다.

***

선우는 할머니와 지내며 볼살이 포동하게 올랐다. 범이 만두 같은 게 만두를 먹는다고 놀렸다. 안 먹는다 하고 내던질까 했지만 만두는 죄가 없으니 그냥 먹었다. 대신 범을 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입 다물게. 마저 먹어. 근데 여보는 만삭인데도 몸매가 죽인다. 비너스 같아.”

“입 다문다면서요?”

배는 엄청 커졌는데 길쭉한 팔다리엔 살이 안 쪘다. 선우가 보기엔 외계인 같았는데 범은 비너스 같다 했다.

“임신한 학 같기도 해. 짝짓기 하고 싶다.”

곧 아빠가 될 유부남이 화려했던 총각 시절을 보여 주듯 주둥이 한번 현란하게 털었다.

선우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제대로 된 총각 시절도 못 보내 봤는데, 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요즘 부쩍 제 이십 대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되게 간사한 사람이었다. 삶이 너무 행복해지니 별게 다 아까웠다. 어려서 잘 팔린단 소리를 들을 때면 안 팔리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범에게 괜한 짜증을 부렸다. 헌팅 연습이라도 하시냐 비꼬았다. 그러자 범이 ‘응. 너를 사냥하고 싶어.’ 했다. 선우가 픽 웃었다.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 주는 범이 고마워서 금세 제 행동을 반성했다. 미안해서 쪽 하고 입술에 뽀뽀해 주었다.

“너 그렇게 싸가지 부리고 애교로 넘어가면 다냐?”

범이 인상을 팍 쓰고 무섭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는 제 물음에 제가 답했다. ‘다지.’ 했다. 그의 싱거운 농담에 선우가 또 픽 웃었다. 선우가 웃어 주자 범은 신이 났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해했다.

“역시 나같이 유머러스한 알파가 아름다운 오메가를 쟁취하는 법 아니겠냐.”

“형 안 유머러스해요.”

“뭐? 내가? 내가 어디가!”

“어디든 안 유머러스해요.”

“그럼 나 잘생겨서 살아 주는 거야? 너도 참, 말을 하지. 형이 오해할 뻔했잖냐.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형은.”

선우는 좋은 말이라도 해 줄 것처럼 따스히 범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껏 뜸을 들였다.

범은 침까지 꼴깍 삼키며 선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험하게 생겼어요.”

선우가 퍽 얄미운 표정으로 메롱까지 완벽히 해냈다. 그러다 아차 했다. 메롱을 했으면 튀어야 하는데 몸이 무거워져 튀지 못했다. 선우는 종종 제가 만삭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이리 실수를 했다.

동공이 흔들리는 선우를 보며 범이 푸하하 웃었다.

“우리 마누라 원통해서 어쩌냐? 도망도 못 가고.”

“도망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선우는 제가 생각해도 좀 찌질해 보이는 센 척을 했다.

“그래, 가지 마. 오빠가 잘할게.”

그 센 척에 범이 져 주었다. 승리한 선우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도망가다 잡혀 오면 더 더러운 꼴 당하는 거다. 궁금하면 해 봐라.

왕년에 종종 듣던 소리가 떠올랐다. 깡패라면 응당 협박이 먼저인데, 범은 되게 착한 깡패였다. 선우는 안 착한 저를 품어 주는 착한 범과 오늘 하루도 평화로이 마무리했다.

***

범이 출장을 떠났다. 이틀 정도 집에 오지 못한다 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선우를 데리고 서울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출산이 코앞이라고 유 회장이 유난을 떤 탓이었다. 차라리 속 편히 입원해 있으라며 선우를 위해 특급 호텔 같은 병실을 잡아 두었다. ‘그 촌에서 갑자기 배라도 아프면! 어? 119는 어느 세월에 온다냐.’ 하셨다. 조직폭력배의 두목인 사람이 안전 불감증을 운운했다. 허나 맞는 말이긴 했기에 선우도 따르기로 했다.

선우는 할머니가 차려 준 점심밥을 먹고 옷가지들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요양차 왔다 아주 눌러사는 바람에 여름옷, 가을 옷, 겨울옷이 다 있었다. 그리고 제일 많은 건 팬티였다. 범과 있으면 금방 갈아입은 것도 금방 버리는 바람에 자주 갈아입어야 했다.

선우는 요리도, 설거지도 다 못하지만 옷 정리는 잘했다. 팬티들을 돌돌 말아 차곡차곡 넣었다. 범이 제 팬티는 한두 번 입으면 늘어나 못 쓴다고 거들먹거렸던 게 생각났다. 픽 웃음이 터졌다. 거시기가 커서 좋으시겠다고 했다가 ‘내가 좋냐? 네가 좋지.’ 하는 소리도 들었었다. 그도, 그의 자지도, 생각하니까 좀 보고 싶었다.

‘오리야, 아빠 빨리 오라고 네가 텔레파시 좀 보내.’

오리가 배 속에서 쿵, 찼다. 선우가 헛! 하고 놀랐다. 말귀가 밝은 것 같은 제 새끼가 참 예뻤다.

그렇게 오리를 벗 삼아 한창 짐 정리를 하는데 밖에서 ‘계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웬 인기척인지, 선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나가 보았다. 이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할머니보다도 오래 걸리지만 할머니는 마을 회관으로 떠나고 없었다.

이장님이 오셨나? 했는데 범의 큰형님, 랑이었다.

“제수씨 오랜만이에요. 배 많이 불렀네?”

“아, 네. 안녕하세요.”

썩 감정이 좋진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제 한 가족이었다. 선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머리를 굴려 랑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랑이 너무 여유로워 보여 걱정은 접었다. 제 동생에게 큰일이 났다면 좀 더 다급하게 굴었겠지 싶었다.

하여 손님 대접부터 했다. 마당에 서 있는 랑에게 일단 들어오시라 일렀다.

랑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 할머니 댁 안을 슥 둘러보았다. 쥐꼬리만 하네, 했다.

선우는 순간 기분 나쁜 기색을 띠었지만 냉큼 표정을 숨겼다. 다행히 랑이 보진 못한 듯했다.

“여기 따듯한 데로 앉으세요. 차 드릴까요?”

“이야- 술이 많네? 직접 담근 건가? 술이나 한 잔 줘요.”

선우는 난감했다. 대부분이 범의 것이어서 그랬다. 할머니가 범을 위해 새로 담가 준 술들은 얼마 전에야 숙성이 끝나 비로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 챙겨 가겠다고 예쁜 유리병에 소분해 옮겨 담았는데, 랑이 그 병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우는 잠시 생각하다 새로 담근 것 말고 옛날부터 있던 커다란 병을 집었다. 이게 얼마나 오래됐더라? 먹을 수는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맛이 이상하면 알아서 뱉을 거라 생각했다.

“거기 작은 거 많은데 뭐 하러 무거운 걸 꺼내요?”

선우는 만삭의 몸으로 무거운 술병을 꺼내느라 낑낑거렸고 랑은 떡하니 앉아 훈수를 두었다.

‘와, 내가 임신만 안 했어도 이런 거 번쩍번쩍 드는데.’

선우는 그 앞에서 술병 하나에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짜증 났다. 몰래 입술을 삐죽이고 차분히 답했다.

“이게 더 좋은 거라서요.”

거짓말을 하고 썩었을지도 모르는 술을 따라 주었다. 먹을 수 있는 거니 안 버리셨겠지, 그냥 할머니를 믿었다.

랑은 선우가 내어 준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작게 크으- 했다. 그 행동에 선우가 랑의 눈치를 살폈다. 저렇게 원샷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가 무어라 평할지 궁금했다.

“맛은 별로네. 좋은 거라 입에 쓴가?”

“아, 네. 그런가 봅니다.”

선우는 대충 대꾸해 주었다. 랑이 무슨 말을 하기까지 먼저는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그저 이 독대의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며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의 바람과 달리 랑은 제 용건을 쉬이 밝히지 않았다. 부담스레 선우를 빤히 관찰했다.

‘나 솔직히 너네 큰아빠 별로다. 그래도 너한텐 좋은 큰아빠였음 좋겠어.’

선우는 숨 막히는 어색함을 피해 오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부터 꿀렁꿀렁 잘도 놀던 오리는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날 닮아서 낯을 가리나, 생각하는 중에 랑이 말을 걸어왔다.

“한 잔 더 줘 봐요.”

선우가 옆에 꺼내 둔 술병의 뚜껑을 다시 열려고 하자 랑이 제지했다. 작은 병에 나눠 담긴 범의 아이들을 콕 찍으며 이번엔 저거로 줘 봐, 했다.

‘주는 대로 먹지 좀.’

선우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한 잔을 따라 내고 다른 병에서 조금씩 덜어 높이를 맞출까? 나름 치밀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냥 저 자신이 우스웠다. 정작 술의 주인인 범은 상관도 안 할 것 같은데, 저 혼자 범의 것을 지켜 주고 싶어 유난을 떠는 게 웃겼다. 그것도 병째로 준 것도 아니고 한 잔 가지고.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쪼잔하게 군 게 머쓱했다.

“웃겨?”

“네?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랑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선우는 대번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망설임 없이 사과했다.

선우의 얼굴에 표정이라 할 수 없는 표정이 걸렸다. 저는 한낱 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냥 지나쳐 주세요, 하는 표정. 과거에 자주 걸던 눈빛을 하고 로봇같이 굴었다. 기계엔 화를 안 내니까. 선우는 깍듯한 자세로 달라는 술이나 한 잔 더 따라 드렸다.

랑은 술잔을 채워 주는 선우를 아래위로 훑으며 씩 미소 지었다. 선우는 싸한 기분에 배를 감쌌다.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는 그인데 속이 울렁울렁 역했다.

“영광이네? 노블레스에서 제일 에이스였다며. 우리 제수씨가 따라 주는 술은 돈 내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거?”

선우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고 자세도 그 자리에 굳은 듯 그대로였다. 랑은 제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지만 저번부터 자꾸 비슷한 소리로 사람을 흔들고 싶어 했다. 그런 걸로 흔들렸으면 이미 죽고 없을 텐데.

선우가 딱딱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흔들림 없는 선우에 랑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랑은 좌우로 고개를 우두둑 꺾더니, 후- 하고 한숨을 뱉었다. 무언가를 삭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무뚝뚝하네? 접대부 할 때도 이랬어? 그때도 내가 사장이었으면 우리 제수씨는 좀 맞았겠다.”

랑은 농담을 하듯 가벼이 말했다. 하하, 작게 웃음도 흘렸다.

‘어쩌라고.’

선우가 심드렁히 생각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죄송하다고 했다. 먹고 떨어져라 하듯 말투가 퉁명스레 나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다시 한번 깍듯하게 죄송합니다, 했다.

그때 바닥에 내려 둔 선우의 핸드폰에 문자가 떠올랐다. 보낸 이는 범이었고, 내용은 한 단어였다.

「녹음.」

선우는 핸드폰에 슬쩍 눈길을 주었다가 티 나지 않게 녹음 기능을 켰다. 무슨 은밀한 미션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답장은 보내지 못하고 핸드폰에 별 관심 없는 척,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런데 이어서 또 한 번의 진동이 울렸다.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랑과 함께 있다는 걸 알고 녹음을 시키나 했는데 그저 싱거운 요청이었나 보다. 선우는 김이 새 속으로 픽 웃었지만 이미 켠 녹음을 굳이 끄지는 않았다.

“범이 연락이에요?”

“네? 아,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술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 운전을 해야 해서.”

“아, 네.”

선우는 두 잔은 마셔도 되나? 하고 딴생각을 하며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었다. 랑의 시선이 선우의 부른 배로 향했다. 그가 애새끼는 오메가인 게 좋을 텐데,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퍽 더러웠다.

“내가 제수씨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네. 말씀하세요.”

“요 몇 달 우리 막내가 형님 사업 잘되는 꼴이 심히 보기 불편했나 봐. 뭐에 꽂혔는진 모르겠는데 혼자 빡이 돌아서 노블레스 단골들을 잡고 다니거든? 몇몇은 감방으로 보내 버리고 또 몇몇은 어디 묻어 버렸는지 실종 신고가 됐더라고.”

“…….”

“내가 볼 땐 유범이가 이리 날뛰는 건 걔가 미쳐 있는 제수씨 덕이 크거든. 그럼 다시 돌려놓는 것도 제수씨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네? 제가 뭘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 모르니까 내가 여기까지 부탁하러 오지 않았겠어요? 그 새끼가 요즘 가게에서 제일 잘나가는 애들도 다 빼돌리고 있어. 연예인 시켜 준다고 빼 가질 않나, 웬 짱깨네 세컨드로 보내 버리질 않나. 씨발, 이러다 조만간 동네 단란 주점만도 못하게 되겠어.”

선우는 멍하니 들었다. 지금 나한테 푸념하시는 건가? 조금 지루했다. 범과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일 것 같다고 주제넘지만 조언해 주고 싶었다.

“제수씨가 어떻게든 해 봐. 잠자리를 화끈하게 가져 주든지. 그쪽은 전문일 거 아니야. 그럼 유범이 새끼가 이 형님 사업 말아먹는 데 괜한 힘이나 빼고 다니겠어? 집구석에 처박혀서 떡이나 치겠지. 아니면 유학 가고 싶다고 졸라 보는 것도 방법일 것 같은데, 어때? 제수씨 아직 어리잖아. 세 식구 단란하게 외국 나가 살아.”

그는 저도 방법을 모르겠다더니 여러 예시를 들어 주었다. 결론적으로 랑이 선우에게 원하는 바는 범을 잘 구슬려 노블레스에서 이만 관심을 떼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야살스럽게 굴어 보라나 뭐라나. 그 와중에 제가 시켰다는 내색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찌질이.

선우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저 정도 수위의 모욕은 코웃음이 날 정도인데 만삭인 제 몸이 썩은 소릴 거부하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얌전히 있던 오리까지 쿵쿵 선우의 배를 밀었다. 덕분에 배도 아팠지만 그래도 저 대신 화를 내 주는 것 같아 귀여웠다.

“죄송합니다. 부탁 못 들어드릴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몸이 이래서 잠자리를 못 해요.”

랑이 피식 웃었다. 이야- 제수씨도 보통 또라이 아니네, 하고 읊조렸다. 그러곤 선우를 직시하며 뜬금없이 나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범이 주워 온 고양이, 나비.

“그거 알아요? 걔 내가 죽였다.”

랑은 퍽 위협적인 투로 장황한 서사를 깔았다. 어릴 적 자신은 어땠고, 어릴 적 범은 어땠고, 범에게 나비는 어떤 존재였고.

선우는 듣는 내내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핵심만 말하셨음 좋겠다, 고.

대충 랑의 이야기를 다 들은 선우가 속으로 내용을 정리했다. 범이 그에게 거슬리는 짓을 해 나비에게 대신 해코지를 했다는 거, 그게 다였다.

“완전 대성공이었지. 그 새끼 한 한 달을 아무것도 안 했어.”

너도 나비처럼 죽을 수 있다는 협박이 하고 싶은 거겠지? 무슨 대단한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했다. 선우가 빚쟁이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죽고 싶냐, 였다. 그래서 이제 죽여 버린다는 말은 화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꽤나 오래 키웠지, 아마. 유범인 걔가 늙어서 자다 죽은 줄 알잖아. 병신 새끼가 그렇게 아끼더니 여태 호상인 줄 안다. 내가 목 졸랐는데.”

랑이 눈을 번뜩였다. 고압적인 눈빛이 저를 무서워하길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선우는 들을수록 찌질하단 생각뿐이었다. 한참 어린 동생에겐 찍소리도 못하고, 그에 화병이 나 작고 약한 동물을 건드렸다는 비겁한 이야기. 결국 ‘너도 죽여 버린다.’ 한 마디면 애초에 끝났을 대화였다.

선우는 너무 피곤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부탁 안 들어드리면 저도 죽이신다고요?”

“어. 그럼 부탁 못 들어준다는데 어떡해. 협박이라도 해야지 않겠어요? 근데 하나 틀렸다. 제수씨 말고. 제수씨는 죽이면 안 되지. 갑자기 죽으면 티가 나잖아.”

“…….”

“나비 걔도 어차피 늙어서 이빨도 다 빠지고 오늘내일하던 애였거든. 근데 그런 사람이 이 집에도 하나 있더라? 잘 생각해 봐. 그게 누군지.”

심드렁했던 선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선우가 동요하자, 랑이 질 나쁜 웃음을 흘렸다.

“……할머니요?”

“어. 정답. 어때? 이제 내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 잘 해내야겠단 생각이 좀 드나?”

선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씨발새끼.”

실실 쪼개던 랑이 순간 헛것을 들은 듯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뭐, 뭐라고?’ 말을 더듬으며 제가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다시 확인했다.

벌게진 선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선우가 술병을 꼭 쥐었다. 그러곤 랑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엔 한 번에 알아들으라고 또박또박 크게 말해 주었다.

“좆만 한 새끼. 네 좆보다 내 좆이 더 크겠다, 이 개새끼야.”

랑은 잠시 얼이 빠져 있다 상황을 파악하곤 손을 올렸다. 이게 미쳤나, 하는 소리와 함께 올린 손을 선우의 뺨으로 날렸다.

다행히 선우가 그보다 한발 빨랐다. 쥐고 있던 술병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쳐 버렸다. 온 힘을 다했다. 곧이어 깨어지는 파열음이 고요한 시골집 안을 울렸다. 병에 담겨 있던 술이 흘러 마루를 더럽혔고 바스러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임을 만들었다.

“너도 데리고 죽을 거야.”

선우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말했다.

후련한 속으로 정신을 잃어 갔다. 마지막으로 들은 건 저를 부르는 범의 목소리였다. 선우야! 하는 그의 음성에 더욱이 안심하고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

오리 챙기세요, 하고 속으로 전했다.

***

랑은 범에게 게딱지를 맞은 그날, 범을 경찰에 신고한 이후로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냈다.

범이 죽이겠다 쫓아오기 전에 제가 먼저 찾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비굴해야 할 땐 한없이 비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보는 앞이라 제가 잠깐 미쳤었다 하며 무릎을 꿇었다. 잘 보이고 싶었어, 아버지는 지는 새끼들을 제일 싫어하잖아, 제가 듣기에도 쪽팔린 제 속내를 가감 없이 밝혔다.

“동생아, 이 형님 한 번만 살려 줘라. 한 번만 살려 주면 찌그러져 살게.”

범은 의외로 랑을 고분고분 보내 주었다. 찌그러져 살겠다는 말만 지키라면서. 그렇게 얌전히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가 웬일로 덕담까지 해 가며 봐주는 건지, 랑은 의심스러웠지만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돌아갔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범의 눈에 띄지 않았다.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사실 범이 랑을 살려 준 건 일종의 효도였다. 형이 제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비는 모습만 끝까지 보고 생니를 다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집에 두고 온 선우의 얼굴이 맴돌았다.

선우는 길거리 양복쟁이도, 식당 종업원도, 카페 아르바이트생도 다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 밖으로 나와 멀쩡한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시선은 잠깐이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초롱초롱 반짝여서. 그런 선우가 경찰서에 불려 가는 저를 볼 땐, 탁하고 건조한 눈을 했다.

선우의 눈동자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저로 인해 속을 태우는 모습이 퍽 예뻤지만 한 번 본 걸로 족했다. 이제 그만 깡패 짓은 때려치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랑을 살려 주었다. 일생 효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앞으로도 그다지 할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 덕분에 선우를 만났으니 한 번쯤은 해야지 싶었다.

‘그래, 아들 하나 정돈 남겨 주자.’

둘째도 그랬는데 첫째까지 반병신을 만들어 놓고 후계자로 쓰라고 던져 줄 순 없었다. 효도랍시고 드리는 게 유랑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지독한 불효였지만 적어도 몸뚱어리는 성하게 두었으니 알아서 쓰시겠지 했다.

***

범에게는 깡패의 신분으로 마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바닥에서 손을 털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

접대부 이선우를 샀던 사람들을 찾았다. 한 번씩 스쳐 지나간 어중이떠중이 손님들은 몰라도, 노블레스는 기본이 회원제라 대부분이 여전히 노블레스의 단골이었다. 공사를 쳐서 돈을 빼앗든, 비리를 파서 명예를 빼앗든 그들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던져 주었다. 정도가 심한 짓을 한 새끼들은 목숨을 빼앗았다. 고객들이 전국 팔도에 뻗어 있어 시간은 좀 걸렸지만 더 이상 노블레스에 발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까지 찾아내 빠짐없이 족쳤다.

카지노는 매각을 추진했다. 이 건만 끝내면 가업에선 미련 없이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계절이 바뀌었다. 선우의 출산이 가까워 왔고, 범은 마지막 출장이 될 것 같은 길을 떠났다.

3년 전, 선우에게 약을 먹이고 각인을 시도했던 남자. 그자를 잡아 가둬 놓은 창고로 향했다. 원정 도박이라도 다니는지 해외를 하도 싸돌아다녀 이제야 잡았다.

아직까지 선우의 목덜미엔 그자에게 물어뜯긴 상처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각인은 되지 않았다. 치사량이 얼만지도 모르는 새끼가 약을 무식하게 먹이는 바람에 선우는 게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가야 했다.

범은 가는 내내 선우에게 벌어진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자꾸 곱씹다 보면 섹스를 할 때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도착했습니다, 형님.”

준석의 말에 범이 씩 웃었다. 차에서 내려 숨을 깊게 뱉었다. 후- 하자 입김이 나왔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범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수하들에게 잡혀 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누군지 아냐 떽떽거리던 그자는 범의 얼굴을 보자 살려 달라 애원했다.

“하, 존나게 보고 싶었네 진짜. 네가 피날레다, 이 새끼야.”

그자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곧 고막이 터졌다. 얼굴이 돌아가지 않게 고정하고 뺨을 수없이 내리쳤다. 그는 극강의 공포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얼이 빠져 끙끙 앓기만 했다.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꼬박 데리고 놀았다. 범은 그의 숨통을 쉬이 끊어 주지 않았다. 투견을 풀어 물어뜯게 했다 적당히 물리면 거두었다. 고환이 터지도록 밟았다가 혼절하면 멈추었다. 고통스럽게 살려 주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선우가 아침을 다 먹었을 쯤 잠시 창고에서 나와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를 챙기면 선우가 좋아했다. 좋아하면서도 ‘할머니 내 건데.’ 하며 꿍얼거렸다. 하여간 선우에게 할머니는 무조건 1순위였다.

그래도 내가 2등은 되겠지, 생각하던 범이 순간 멈칫했다. 왠지 오리 그 쪼끄만 새끼가 2등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범은 할머니께 재롱을 떨다 말고 잠시 선우를 바꿔 달라 했다.

“나 너한테 2등이야?”

전화를 받아 든 선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요. 4등이요.]

“뭐?”

[할머니랑 엄마랑 공동 1등인데. 그럼 오리가 3등, 형이 4등. 근데 형, 유치해요.]

범이 픽 웃었다. 별세하신 장모님까지 경쟁 상대였다. 이제 그만 고인은 놓아드리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않았다. 그냥 형이 분발할게, 했다.

선우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네, 했지만 그래도 뽀뽀는 해 주고 끊었다. 선우가 내는 쪽- 소리에 범은 4등을 하고도 등신같이 마음이 녹아내렸다.

통화를 마친 범의 곁으로 준석이 다가왔다.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범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담배 냄새를 제 안에 담았다.

“하아……. 4등 씨발. 담배 말린다.”

범의 혼잣말에 준석은 즉각 반응했다.

“드릴까요, 형님?”

“됐어, 이 새끼야. 우리 선우 개코야.”

“아, 형수님이 싫어하십니까?”

“몰라. 안 싫어해도 새끼야, 임산부 있는데 담배를 처피냐?”

준석은 맹한 표정으로 아, 하더니 죄송합니다! 했다. 범은 준석과 잠시 노가리를 까며 쉬었다. 패는 사람도 맞는 사람만큼 힘들어서 쉬어 줘야 했다.

다시 창고로 들어갈까 할 때, 다른 수하 하나가 다급히 다가와 말을 전했다.

랑을 마크하라고 붙인 수하들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랑을 따라갔는데 랑이 아니었다는 소식.

랑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기에 따라붙은 수하들은 한참을 따라가고 나서야 그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랑이 그의 따까리들을 달고 차에 올랐다. 문제는, 스리피스 슈트에 차르르 떨어지는 검정 코트를 입은 랑이, 랑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범이 포효했다. 그러다 미친놈처럼 웃었다. 대역까지 세우고 아주 정성이다 정성, 혼잣말로 비아냥거렸다.

범은 준석을 데리고 즉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랑이 이렇게까지 생쇼를 해 가며 갈 곳은 그곳뿐이었다. 네 명의 수하들이 뒤차로 따라붙었고 창고 안에 남은 수하들은 이미 초주검이 된 남자를 처리했다.

선우의 집 주변에 세워 놓은 새끼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돈으로 매수했는지, 사람을 써서 납치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못해도 스무 명은 뒀어야 하는데, 둘만 둔 게 화근이었다.

사실 둘도 겨우 두었다. 그 좁은 시골 마을에 시커먼 조직원들을 우글우글 배치해 둘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복을 입혀도 깡패 티가 나는지 수상한 사람들이 할머니 댁을 기웃거린다 몇 번 신고도 당했다. 민간인 같아 보이는 애들로 고르고 골랐는데, 마을 이장님이 쓸데없이 정의로우셨다.

선우가 허락하지 않은 일이라 걸릴세라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선우는 생각보다 잔인해서 제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면 섹스를 굶겼다. 스킨십도 안 해 주고. 악독한 게 귀여워서 아래가 끓어올랐는데 그래서 더 고역이었다.

랑이 지금 당장 선우를 어떻게 하진 못할 것이다. 세상에 누리고 싶은 게 많은 형님이라 누구보다도 죽는 걸 무서워했다. 선우를 해하면 제 인생도 끝일 텐데, 그 새끼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범은 그렇게 확신했지만 당장에 선우의 안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낮게 한숨을 흘리며 빨리빨리 좀 가라 준석을 채근했다.

범이 애꿎은 제 머리를 퍽퍽 때렸다. 나중에 호 해 달라고 해야지, 생각하면서 세게도 쳤다.

***

“선우야!”

시골집에 도착한 범과 수하들이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를 찌르는 술 냄새였다. 범은 제 형이 술을 퍼먹고 뻗은 건가 했다. 헌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머리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선우는 꼿꼿이 앉아 있는 듯했는데 살펴보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곤 풀린 눈으로 범을 잠시 쳐다보다 정신을 잃었다.

식겁한 범이 선우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고 심장 소리도 들어 보았다. 이런다고 제가 아는 건 아니기에 답답하여 상욕을 내질렀다.

“씨-발!”

범은 정신없이 선우를 차에 태웠다.

“준석이 넌 마을 회관 앞에서 기다리다 할머니 모시고 바로 병원으로 와. 집에 못 들르게 해.”

“네, 알겠습니다 형님!”

“나머진 저 새끼 잡아 놓고 정신 차리면 연락해라. 여기 깨끗이 싹 치우고, 김장 봉투 깔아 놔.”

“네, 알겠습니다 형님!”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범은 신호도 무시하고 제한 속도도 무시하며 달렸다. 그러다 중간에 경찰에 잡혔다. ‘xxxx 번 차 세우세요.’ 하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씨이-발! 다시 한번 욕을 내지르고 차를 세웠다.

범은 경찰이 다가오기도 전에 창문을 열었다. 언제 욕을 했냐는 듯 다급하고 간절하게 임산부임을 알렸다.

경찰들이 뛰어와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선우와 선우의 부른 배를 확인하곤 저들이 더 당황해서는 일단 얼른 가 보십시오 선생님! 하며 범을 보내 주었다.

“선우야, 방금 봤어? 그냥 보내 주는 거?”

범은 초조함을 달래고자 선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다음번에도 걸리면 써먹자, 하면서.

***

일시적인 기절이었고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한시름 던 범은 잠든 선우의 곁을 지키다 수하들의 연락을 받고 잠시 자리를 떴다. 할머니께 선우를 맡기고 준석은 병실을 지키게 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간 시골집엔 어둠이 내려 있었다.

“얼씨구, 치료도 받으셨네?”

범이 랑의 이마에 둘러진 붕대를 보고 픽 조소했다. 랑은 퍽 당당한 표정으로 범의 수하들에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하긴, 제 딴에 뭐 하나 쥐고 있는 게 있으니 이런 사고도 쳤을 것이다.

“형님아, 내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이게 무슨 푸닥거리야 한겨울에.”

“지랄. 기다리니까 어쨌는데 네가? 어? 어쨌냐고. 뭐,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겨?”

“……너, 혹시 노블레스 좀 망해 간다고 이랬냐? 진짜 그거 하나 때문에?”

범이 진심으로 황당해하기에 랑도 조금 당황했다. 허나 당황하지 않은 척 ‘그래, 이 새끼야.’ 했다.

“이 또라이 새끼 이거, 떡장사 외길 인생이야 뭐야. 유흥업소 하나에 황천길을 택하네?”

“네가 카지노도 팔아 버리겠다고 지랄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내가 다 먹은 건데 그걸 건드려?”

“언제 네가 다 먹었는데. 금시초문인데? 너 내가 그걸 얼마에 팔 줄은 아냐? 그거 이제 뽑아 먹을 만큼 뽑아 먹어서 파는 게 이득이야, 이 빠가사리 새끼야. 아니, 우리 집이 가진 게 그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자본 줄은 따로 있는데, 어? 이! 이! 아오…….”

범은 울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이다 그냥 말을 말았다. 살며 처음으로 아버지께 죄송했다. 그릇이 이리 작은 새끼를 후계자 삼으라고 살려 줬다니. 진작 죽일 걸.

“동생아, 너 나 건드리면 안 돼. 내가 어디 가서 뒤지거나 사라지면 우리 제수씨한테 꼭 좀 보내 달라고 손써 놓은 게 있거든? 일 처리 확실한 데 맡겼다. 안 갈 리도 없어.”

“그래, 네가 아무리 화가 나도 믿는 구석 없이 덤볐겠냐. 됐고, 야야 이 새끼 아가리 벌려서 술 부어.”

범의 지시에 수하들이 척척 움직임을 보였다. 랑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말을 마구 더듬으며 다급히 말했다.

“너, 너, 너! 후, 후회 안 해? 어? 씨발 알고 보니 제수씨 인생 네가 말아먹었더만. 카지노 그거, 네가 아버지한테 짓자고 한 거, 어?”

범은 그만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끊었다.

“어. 후회 안 해.”

범의 수하들이 달라붙어 랑을 결박했다. 덩치 네 명이 달려드니 아무리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범은 재미난 구경이라도 났다는 듯 실실 웃었다.

“형님아, 꼴랑 4대 1인데, 안 돼? 17대 1은 고사하고 쪽팔린다, 쪽팔려. 대가리도 안 돌아가는 게 무술이라도 연마를 하지 그랬냐.”

범의 수하들이 위아래로 랑의 아가리를 잡아 벌렸다.

랑은 얘기 좀 하자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가각……! 가각……! 하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범이 이번엔 ‘가글하니?’ 하며 놀렸다. 줄곧 농담하는 투라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랑은 저를 죽이려는 게 맞나 헷갈렸다. 사실 저를 죽이려는 것까진 아닌 게 아닐까? 제가 겁먹는 모습을 좀 비웃어 주다 풀어 줄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중에 목구멍으로 술이 넘어왔다. 누가 깡패 새끼들 아니랄까 봐, 무식하게 들이부었다. 삼키는 속도가 부어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컥! 컥! 역류했다. 콧구멍으로도 나왔다.

“아 드러. 콧물 봐.”

범은 고통스러워하는 랑을 보며 짧은 감상을 뱉었다. 수하들이 알아서 잘하기에 그만 관심을 끄고 제 술들을 챙겼다. 랑의 목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 오래 묵어 버려야 하는 술이었다.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술.

이전에 할머니께 슬쩍 관심을 표했다가 저건 먹지 말란 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다. 범이 아깝다 하자 할머니는 배탈 난다 했다. 새로 담근 걸로 먹으라고 범을 달래셨다. 언제 하루 날을 잡아 대청소 겸 싹 내다 버릴 거라고 하셨는데, 저런 건 무거우니 유 서방이 버려 드리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우리 선우 시킬 수도 없고.

범은 아무도 안 보는데 혼자 거들먹거리며 웃었다.

술을 챙기랴, 버리랴, 여차저차 바쁜 와중에 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 보니 선우였다. 선우가 형, 하고 부르자마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캑캑대는 랑과 수하들을 조용히 시켰다. 수하들은 알아서 조용히 했고, 랑은 알아서 조용히 하지 않을 테니 수하들 중 하나가 양말을 벗어 랑의 입에 쑤셔 넣었다. 랑은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그에 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발 냄새 나? 아님, 자존심이 상해? 그런 걸로 자존심 상해하지 마라. 너 이따 대가리 박고 빠따도 맞아야 된다. 바지 직접 벗으면 한 대 까 주고. 아흔아홉 대만 맞자.”

랑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깔자 범은 찌푸렸던 인상을 피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새 핸드폰은 준석에게 돌아가 있었다.

“왜 네가 받아, 이 새끼야.”

준석은 제 전화를 제가 받고 죄송하다 사죄했다. 냉큼 선우에게 전화를 넘겼다.

[형, 저 선운데요.]

“네, 아는데요.”

범이 선우의 뚱한 목소리를 따라 하며 장난을 걸었다.

[끊을게요.]

“아, 왜! 선우야, 선우야……! 끊지 마. 귀여워서 그랬어, 귀여워서! 남의 핸드폰 쓴다고 자기소개 하는 게 귀엽잖아.”

[…….]

“오빤 네 숨소리만 들어도 넌 줄 안다. 우리 사이에 관등 성명 대지 마라.”

[아, 네.]

범은 퍽 설렌다는 투로 선우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전화했어? 눈 뜨자마자 나부터 찾은 거야?”

[눈 아까 떴는데요.]

“아까 떴는데 이제야 전화했냐? 준석이 새끼 잠깐 바꿔 봐. 새끼 이거 빠져 가지고.”

선우는 잠시 말이 없다 제가 한 말을 번복했다. 눈을 뜨자마자 찾은 게 맞다고 했다. 범이 픽 웃었다.

“구라.”

[…….]

“너 준석이 새끼 혼날까 봐 구라 친 거지? 지금 그 새끼 편든 거야?”

[아닌데요. 형 서운할까 봐 친 거예요.]

“어흐, 그래? 요거요거, 아주 요망한 게 그냥, 막 형아 마음을 가지고 놀아, 엉?”

선우가 들릴 듯 말 듯 ‘아 뭐래.’ 했다. 범은 다 들렸지만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었다.

“형을 사육해 줘, 선우야.”

이에 선우도 지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선우는 제 핸드폰이 집에 있으니 올 때 가지고 오라는 잔심부름을 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아, 그거 때문에 전화했구나.’

범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다 뚝 끊긴 전화기에 쪽 뽀뽀했다. 온화한 낯으로 수하들에 명했다.

“마저 조져라.”

랑의 수모가 이어졌다.

유 회장의 장남, 신참 따까리 시절이 무언지 모르는 낙하산. 그가 목구멍엔 양말을 처박은 채로 대가리를 박고 빠따를 맞았다. 백 대나 아흔아홉 대나 그게 그거일 것 같아 제 손으로 바지를 내리진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범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새끼 이거 아직 좆 달렸다고 독기 안 빠진 거 봐라?”

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하들은 척척 움직였다. 그렇게 빠따는 앞으로도 떨어졌다.

피떡이 되어 뼈가 바스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겨울밤은 길었다.

***

다음 날 아침.

선우는 제 옆에 들러붙은 범을 조금 귀찮아하며 병실에서 TV를 보았다. 준석은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드린다고 떠난 참이었다.

TV에서는 지역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교통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만취 상태의 운전자가 밤길에 운전을 하다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소식. 할머니 댁 인근이었다.

범은 쥐뿔 관심이 없었고 선우는 퍽 심각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래, 여기 산길 험해, 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다 범을 찰싹찰싹 때렸다.

“형, 형.”

“왜, 오빠 바빠. 오리랑 놀아야 돼.”

오리랑 논다는 범은 아까부터 선우의 배에 입술을 묻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오리야, 난 널 사랑할 수 없어.’였다. 범이 오리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선우에게 온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그의 레퍼토리를 줄줄 외고 있었다. 하도 들어 이젠 낯부끄럽지도 않았다. 익숙했다.

“아이, 장난치지 말고요.”

“진짜야.”

“됐고요, 형 술 먹고 운전하지 마세요. 웬만하면 밤에도 하지 말고요.”

“또.”

“네?”

“잔소리 또. 또 해 줘. 그거 말고 더 할 거 없어? 아침부터 오빠 고막이 아주 호강을 하네?”

“오빠 소리 하지 말라는 잔소리는 왜 안 들어요? 삼천 번도 넘게 말했는데.”

“네 목소리에 고막이 녹아서 안 들리나 봐.”

“다 들으니까 대답하잖아요, 지금.”

“빡빡하게 굴지 마라. 넌 구멍도 빡빡해서 마음도 빡빡하면 안 된다니까? 형이 인생은 중도를 지키는 거랬지.”

앞말은 이상해도 뒷말은 맞는 소리. 범의 인생 조언은 늘 이런 식이었는데 선우는 그의 조언이 좋았다. 아버지가 해 줬어야 할 소리를 대신 해 주어서 그런가? 꼰대 같다 욕하면서도 은근히 새겨들었다. 겉으론 귀를 후비적거리고 속으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게 있어 아, 했다.

“저…… 큰형님 어떻게 되셨어요?”

선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전 날 범이 제 형을 욕하라 했던 적이 있었다. 참고 살면 병이 나니 씨발새끼, 좆만 한 새끼 해 보라고. 그땐 됐다고 착한 척을 해 놓고 이제 와 범의 말을 들었다. 심지어 개새끼까지 했던 거 같은데? 할머니 얘기에 이성을 잃어 그만.

정신을 차린 후 오리에겐 못 들은 걸로 해 달라 빌었다. 아마 랑을 찾아가서도 빌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 머리통에 술병을 깼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경찰서에 끌려가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이 와중에 오리는 낳아 놓고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괜히 저 때문에 오리까지 유치장 바닥 신세를 지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이야- 너 아주 제대로 했더라? 이 형아가 내 새끼 다 키웠단 생각에 막 벅차올랐다니까.”

“아 좀……. 장난치지 말고요.”

선우는 심각했다. 유치장 바닥에 보일러는 틀어 주냐 물어보고 싶었는데 놀릴까 봐 묻지 않았다. 이따 혼자 검색해 볼 요량이었다.

“유랑이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걔네 식구들은 이제 외국 나가 살 거야.”

“아…… 저도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직접 전화라도 드리는 게 낫겠죠?”

“너랑 통화하기 싫을걸? 무서워서. 아주 바짝 쫄았더라. 제수씨 무서운 사람이라고 벌벌 떨던데.”

선우가 픽 웃었다. 이제 저를 물로 보지 않는다는 범의 설명이 참 유치한데, 좀 좋았다.

“아, 너 녹음했어? 그 새끼가 뭐랬어.”

선우는 범에게 핸드폰을 받자마자 몰래 녹음을 지워 버렸다. 혹시나 그가 오는 길에 들어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범은 듣지 않은 듯했다. 평소와 같이 능글능글한 미소를 띠고 마누라- 하며 씩씩하게 등장했다.

그곳엔 나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었다. 그가 슬플 게 싫었다. 범이 사랑을 쏟은 존재라면, 그 사랑을 얼마나, 어떻게 주었을지 눈에 훤해서 차마 들려줄 수 없었다.

“아니요. 안 했어요, 녹음. 필요한 거였어요?”

“아니, 말했잖아.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지금 듣고 있잖아요.”

범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선우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어. 그래서 존나 행복해.’라고 답했다.

선우는 그 다정한 음성을 들으며 더욱이 비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너네 아빠가 생긴 건 저래도 마음이 따듯해, 하며 오리에게만 제 비밀을 공유했다.

“그 새끼가 뭐랬길래 오리한테만 말해 주냐.”

“그냥 별말 안 했어요. 아, 형한테 섹스를 화끈하게 해 주래요.”

“뭐? 그렇게 좋은 소릴 했다고? 그 새끼가 웬일로 내 인생에 도움 되는 소릴 했지?”

선우가 피식 웃으며 그러게요, 하고 말았다.

“근데 대가리는 왜 깨.”

“……할머니요.”

가라앉은 선우의 표정에 범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선우의 이마에 가만 입을 맞췄다.

“잘했어. 다음에 누가 내 욕 해도 대가리 깨 줘라. 형 질투 난다.”

선우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범이 내민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도 했다. 마주 건 두 손에 아침 햇볕이 내리쬐었다.

경찰에 잡혀갈 일도 없겠다, 선우는 왠지 모르게 모든 시련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다만 범에게 숨기는 일이 생겼다는 거, 그게 조금 찔렸다.

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어서 비밀을 만든 거라고, 그러니 서운해하지 말라고 속으로 전했다.

***

범은 수하들을 시켜 랑의 집무실과 자택, 핸드폰과 PC를 전부 뒤지게 했다.

-씨발 대포폰 그런 거 어디 분명히 숨겨 놨을 거라고, 어? 찾는 사람 오백만 원.

범이 상금을 거니 보물찾기라도 하듯 다들 신나게 뒤졌다.

그렇게 수하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범은 선우의 옆에 내내 들러붙어 있었다. 한시도 혼자 두지 않았다. 징그럽단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여보 나 좀 예뻐해 줘, 나 여보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며 애교를 피웠다.

랑에게 ‘후회 안 해.’ 하던 제 모습은, 크으- 제가 봐도 멋졌는데. 범은 선우에게 어깨를 흔들다 한 번씩 제 현실을 자각할 때면, 고개를 내려 앞섶을 확인했다. 안 떨어졌나, 하고.

“선우야.”

“네?”

“너는 나를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어?”

불안하게 선우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형 바람피웠어요?”

“뭐 바람? 미쳤냐! 나 같은 일편단심이 또 어디 있다고!”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 왜 화를 내요!”

“어이구 이런, 네 자기가 그랬어? 자기가 미안.”

범이 씩 웃으며 눈썹을 씰룩이자 선우는 눈으로 욕을 했다.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미안. 그래서, 바람만 아니면 용서한다는 거야?”

“아니요. 도박 외 각종 중독하고, 바람, 가정 폭력, 연대 보증 뭐 그런 거만 아니면 될 것 같아요.”

“어허! 네 서방을 뭘로 보고. 그런 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어? 잠깐.”

“왜요?”

“엉덩이 때리는 거 가정 폭력이냐?”

“…….”

“알았어, 알았어. 너도 때려.”

“…….”

“그러니까 어쨌든 그것들만 아니면 된다, 이 말이지?”

선우가 네, 하자 범이 약속해, 했다.

“아 무슨 툭하면 약속이에요.”

“너 어차피 네 마음에 안 들면 안 지키잖아. 맨날 말 바꾸고. 이거이거 순 양아치.”

“저 약속 지키거든요?”

“그럼 빨리 약속해.”

대충 약속을 해 준 선우는 범에게서 도망쳤다. 배가 많이 불러 뒤뚱거리며 걸었다. 따먹지도 못하는 엉덩이가 씰룩, 하자 범은 씨발, 했다.

선우는 어기적어기적 자리를 피하며 귀찮아 죽겠다고 구시렁거렸다. 다 들렸다. 선우도 제 혼잣말이 조금 컸다는 걸 느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범의 눈치를 보았다. 범이 픽 웃으며 ‘오빠 고막이 녹아서 안 들렸어.’라고 말해 주었다.

선우는 안심하고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조용한 곳으로 숨어 버렸다.

범은 3분만 기다렸다 찾아가야지 하며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쟀다. 그때 지잉- 하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찾았습니다, 형님.」

범도 비밀을 만들게 되었다. 이 빚은 평생 갚을게, 속으로 전했다.

***

임신 막달, 선우는 디데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루하지도 않았다. 범이 매일같이 정신 사나웠다. 성가시고 귀여웠다.

수술 날짜는 유 회장이 받아 온 날로 정했다. 그날 태어나면 거부(巨富)가 된다나 뭐라나.

이미 거부의 자식인데 아무 날에나 태어나도 거부 아닌가? 선우는 유 회장이 철학관에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했지만 토는 달지 않았다. 네, 하고 날짜를 잡고 하루하루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늦은 새벽, 선우가 몸을 뒤척였다. 야한 꿈을 꾸다 깼는데 성기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후기엔 조심해야 한다 하도 신신당부를 하기에 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 이거 조금 참는 게 뭐 어렵냐 코웃음을 쳤는데, 생각보다 참기 힘들었다. 범의 탓도 컸다. 범은 종종 선우의 눈앞에서 팬티를 내리고 자위를 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애잔한 마음에 ‘해 줘요?’ 하면 ‘아니, 바라봐 줘.’ 했다.

펄떡이는 그의 근육들을 보고 있노라면, 선우의 몸도 동했다. 동하는 몸을 외면하고 잠에 들면 꼭 이렇게 꿈에 나왔다.

후, 선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자 보려 눈을 감았다.

“왜, 물 줘?”

잠이 묻은 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주냐는 다정한 챙김도 새벽녘엔 음험하게 들렸다. 선우는 얼마 있지도 않던 입속의 침을 모아 꼴깍 삼켰다. 그러곤 범에게 네, 했다. 목이 마르진 않았는데 그의 음성을 들으니 갑자기 마르는 것도 같았다.

범은 군말 없이 물을 가져다주었다. 자다 깨서 저도 귀찮을 텐데, 고마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커다란 몸이 벌떡 일어나서는 가운데를 덜렁이며 나갔다가 다시 덜렁이며 돌아왔다.

가뿐하고 빠른 몸놀림이 어찌나 부럽던지.

선우는 왕년엔 나도 저랬다 생각하다가 제 나이로 벌써 왕년을 운운하는 게 웃겨 피식했다.

“입으로 줄까?”

범이 어흐, 하고 웃으며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수작을 걸었다. 선우는 피곤한 눈을 끔벅이며 네, 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범이 선우의 몸 상태를 살폈다. ‘왜 이래?’ 하며 선우가 못할 말이라도 했다는 듯 굴었다. 제가 먼저 물어봐 놓고.

“아 싫음 말고요.”

선우가 됐다며 물컵을 뺏어 가려 하자 범이 냉큼 제 입으로 물을 털어 넣었다. 입 안 가득 머금은 물을 선우의 입 안으로 흘려 주었다. 조금씩 줘야지 무식하게 줘서 제대로 넘어오는 게 반, 흘리는 게 반이었다. 그래도 흘린 건 삭삭 핥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범의 뜨거운 혀가 선우의 턱과 목덜미와 쇄골에 닿았다.

하아, 선우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범은 선우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침대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모로 누운 선우는 등 뒤로 저를 감싸 오는 범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자야지, 자야지.

십 분은 지났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베고 있는 범의 팔뚝에 살며시 뽀뽀했다. 할 일이 없어서.

범도 안 자고 있었나 보았다. 반응이 대번에 왔다. 범은 허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뻑뻑하고 싶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뻑뻑 살을 쳐 대고 싶다는 건지, 자지를 뻑뻑하게 끼우고 싶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것엔 선우도 동의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오냐, 너도 내 꿈 꿔라.”

“싫어요.”

“응. 난 여보 좋아.”

휴, 안 그래도 힘든데 끼를 너무 부린다. 선우는 더 이상 말을 말아야지 싶어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눈도 감았다.

뒤통수에 쪽쪽 뽀뽀를 해 주던 범의 움직임이 머지않아 멈추었다. 범은 선우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고 그대로 고요해졌다. 다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반면 선우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저도 모르게 선정적인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냥 눈을 떠 버렸다. 멀뚱멀뚱 있었다. 괜히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구나, 뭐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어둠에 익숙해진 선우의 눈은 제 다리를 감싼 범의 장딴지를 훑었고 적막 속 뚜렷해진 청각은 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선우는 잠이 올 때까지 그렇게 심심함을 달랬다. 제 배 위에 올려진 범의 손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뜨거운 손, 여름에 들러붙으면 짜증 나는데 겨울엔 핫팩이 따로 없는 손. 덕분에 배가 뜨끈했다.

선우는 그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엔 참을성이 다했다. 범의 손을 끌어다 제 앞섶에 올렸다. 몸을 바르작거리자 그의 손에 앞섶이 살짝 비벼졌다.

하아, 더운 숨을 뱉는 동시에 감질이 났다.

허리를 좀 더 비틀어 볼까 하는데 이거 조금 움직였다고 힘이 들었다. 퍼뜩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선우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날리고 조용히 제 욕정을 단념했다.

“어우씨! 깜짝아!”

범이 선우의 앞섶을 꾸욱 눌렀다. 씻을 때 말곤 잘 건들지도 않던 성기에 진득한 압박을 주니 아, 탄성이 절로 터졌다.

“뭐예요, 안 잤어요?”

“자다가도 깨지. 형은 기회를 놓치는 남자가 아니다.”

재수가 없었지만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속옷 안으로 침범한 범의 손길에 선우는 이미 무아지경이었다.

범은 선우의 기둥을 쥐고 위아래로 뭉근히 쓸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젖었네? 형이 쬐끔만 만져 줄까?”

“……네. 조금만 해 줘 봐요.”

예, 사모님! 하고 씩씩하게 대답한 범은 침을 묻힌 엄지손가락으로 선우의 귀두를 비벼 주었다. 살살 만지되 끈질기게 만졌다. 하으, 아으, 낑낑거리는 소리가 안방을 메웠다.

선우는 좋아서 몸을 가만두지 못했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더 해 달라 꼬셨다.

흐응, 으응, 콧소리가 나오고 난리였다. 범이 간지럽게 하니 신음도 간지럽게 터졌다.

아앙……! 선우는 저도 모르게 너무 큰 소리를 지르곤 냉큼 입을 다물었다.

범이 더 울어 보라고 으르렁거렸다. 앙앙거려 봐, 하기에 싫다고 했다. 그러니 기둥을 탁탁 흔들기 시작했다. 싫어? 어?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선우의 몸이 잘게 떨렸다. 범은 이미 무섭게 해 놓고 ‘에이, 여보. 무서워하지 말고.’ 하며 달랬다.

“하아, 형……. 좀만 더 세게…….”

“싫은데요.”

범이 선우의 말투를 따라 하며 새침한 척했다. 그러고는 끝까지 세게 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우는 간만에 느끼는 쾌감에 자지러졌다. 범의 소원대로 앙앙거리는 소리를 마구 질렀다. 혀-엉, 혀-엉, 하고 말꼬리가 늘어졌다.

범은 저를 부르는 선우의 입술을 막고 진득이 타액을 교환했다. 혀를 조금 섞어 주다 손으로 갈래, 입으로 갈래? 하고 물었다. 어차피 선우는 선택할 시간이 없었다. 곧 갈 것 같았다.

“아! 아! 읏……!”

손바닥으로 귀두를 둥글리는 범에 선우는 그의 손목을 꽉 쥐며 사정했다. 팟 터지는 사정감에 허리를 경직시켰다가 물 밖으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작게 파닥거렸다.

그런데 순간, 갑자기 배가 싸했다. 안이 뭉치는 느낌이었다.

“아아……!”

이번 신음은 쾌감 때문이 아니었다. 선우는 배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아, 아아……. 혀……. 혀으…….”

사색이 된 범이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선우야! 선우야! 왜 그래? 배 아파? 애 나와?”

범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선우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러는지 내가 알겠냐, 배 아픈 건 보면 모르냐, 애가 지금 나오면 큰일이지 않냐, 다 대답하고 싶었는데 그저 끙끙 앓기만 했다.

그길로 구급차에 올랐다. 울고 싶은 건 전데 범이 울었다. 제 손을 꼭 붙잡고 괜찮냐 눈시울을 붉혔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은 맞았는데 중얼거리는 말은 ‘도대체 얼마나 환장하게 좋았으면…….’이었다.

화도 안 났다. 반박이든 말대꾸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선우는 시름시름 앓으며 ‘엄마’라는 단어만 내뱉었다.

“엄마……. 엄마야…….”

이에 범이 더욱 오열했다.

엄마 없는 애가 엄마를 찾아 불쌍했나? 그 엄마가 아닌데.

선우는 해명할 수 없어 그가 그냥 울게 두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빨리 병원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마취에서 깨어난 선우는 제 배가 사라진 것을 마주했다. 아른아른하게 보이던 범이 점점 선명해지자 벌겋게 부어 있는 그의 눈가가 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운 거야, 저 덩치로 질질 짜니 누구의 달램도 받지 못했을 거다. 가엾은데 우스웠다.

선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작은 피식 한 번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아아……!”

범이 선우야! 하며 달려왔다.

선우는 아직 말할 힘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범이 선우 몫까지 두 배로 떠들었다. ‘아파? 오리 다 꺼냈는데 왜 아프지?’ 하더니 ‘배때기를 갈랐으니 아프지.’ 했다. 제 물음에 제가 답했다.

“이선우, 아프지 마라. 오빠 마음 찢어진다.”

쪽팔린 건 아는지 범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흐읍……! 하고 눈물을 참는 소리가 다 들렸다. 피식 한 번에도 아파 죽겠는데 그는 자꾸 웃겼다. 앞섶은 왜 저 모양인지 불룩 세우고선 오빠 운 거 아니다, 하며 똥폼을 잡는데 안 웃기고 배기나.

선우는 웃다 아파하고, 또 웃다 아파하기를 반복했다. 범이 웃기는, 하며 볼록 올라선 선우의 광대에 쪽쪽 입을 맞췄다.

간신히 입을 뗀 선우가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잠겨 쇳소리가 났다.

“형, 마음 아픈 거 맞아요? 섰어요. 엄청.”

“어? 아 이거? 너 냄새 나. 풀풀.”

범이 씩 웃었다. 진지하고 멋들어진 목소리로 선우야, 부르고는 너 냄새 죽여, 벌써 맛있어, 했다. 이에 선우가 치, 하고 조소했다.

“됐고, 형은 냄새 좀 거둬요.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질질 흘리고 다닐 거예요?”

병실 안이 온통 시큼했다. 라임 향과 레몬 향이 비슷한 듯 다르게 어우러졌다.

선우의 구박에 범은 음흉한 눈빛을 띠었다.

“그치? 형이 좀 혼나야겠지? 나를 단속해 줘, 여보.”

“성인을 왜 단속해요. 이제 오리나 단속해야지. 아, 오리!”

선우는 내 정신 좀 봐, 하며 제 머리를 콩콩 때렸다. 눈을 뜨자마자 범과 시시덕거리느라 제 배 속에서 나온 오리를 이제야 챙겼다.

‘허무하게 태어난 우리 오리. 범에게 대딸을 받다 태어나 버린 내 새끼.’

이 와중에 선우는 유 회장이 철학관에 갖다 바친 돈이 조금 아깝단 생각도 했다.

“오리 뭐. 건강하게 낳아 줬음 됐지. 이제 오리 말고 우리 하자, 우리.”

선우는 저 철딱서니 없는 말에 그러자고도 못 하고 싫다고도 못 했다.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선우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제 부모가 되었는데 어떻게 대번에 그러자 하나. 그래서 답을 못했다.

범은 아무 대답 않는 선우를 꼭 안아 주었다. 왜 대답을 안 하냐 생떼를 쓰고 드러누워야 정상인 양반인데, 멋졌다. 설레게.

그렇게 범의 품에 한참을 안겨 있던 선우가 말했다.

“저도 오리 보고 싶어요.”

“응, 나나 더 봐. 근데 너 그거 알아? 오리 나 닮았다. 딸인데.”

“……에이, 신생아를 어떻게 알아요. 솔직히 빨갛고 다 똑같이 생겼던데.”

근데 그게 아닌지 범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범은 주책맞게 또 눈시울을 붉히려 했다. 아이고 내 새끼, 하며 그거 누가 데려가는 사람이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

“요즘 세상에 결혼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꼭 해야 되고 그런 법은 없어요.”

선우는 엄마가 제게 해 주었던 말을 오리에게 해 주었다. 그리고, 왜 남의 딸한테 그렇게 말하냐 범에게 화도 냈다. 당당하게 뭐가 어때서요! 괜찮아요! 하긴 했는데,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메가예요?”

그저 범을 닮은 오메가가 상상이 안 되어 물은 것이다. 결코 다른 뜻은 없었다.

“아니 알파. 우성.”

“오- 되게 멋지겠네요.”

“그거 내가 멋지다는 거지?”

“네.”

범이 씩 웃으며 선우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얘 기분 좋네, 하며 선우의 기분을 제가 평했다. 근데 맞는 평이었다. 선우는 볼록 광대를 올리고 살살 웃었다.

범은 갑자기 제 페로몬을 더 진득하게 풀어냈다. 눈빛이 날카로이 변했다. 아까는 애 아빠 눈빛, 지금은 총각 눈빛. 구애 중인 총각, 짝을 찾는 총각.

그 눈빛에 선우의 심장이 뛰었다.

“이선우.”

“네?”

“선우야.”

“네?”

“선우 씨.”

“…….”

이건 답하지 않았다. 느끼해서.

“선우 씨, 나랑 연애할래요?”

“……으.”

결국 느끼함을 참지 못한 선우에게서 외마디 탄성이 터졌다. 그럼에도 범은 고백의 기세를 꺾지 않았다.

“여보, 마누라, 오리 엄마 말고. 형이랑 연애하자, 선우야.”

선우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아랫배가 간지러웠고, 뇌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머리가 멈춰 아무 말이나 뱉어 버렸다.

“그럼 도장 찍은 건요? 물러요? 오리는요? 오리는 누가 키워요?”

“넌 일한다고 연애 안 하냐? 그건 일 같은 거지, 일. 일 끝나면 뭐 해? 애인 만나 데이트도 하고 떡도 치고 하겠지? 우리 그렇게 살자.”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만 애를 보자는 황당한 소리에 선우는 배를 부여잡고 해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우가 웃는데도 범은 여전히 진지하게 황당한 소리를 이어 갔다. 도장도 이미 찍긴 했지만 자긴 사실 안 찍은 셈 쳐도 자신이 있단다.

“오빠 따-악 1년만 만나 봐. 너 꽃다발 사 들고 와서 네가 먼저 프러포즈 할걸? 참고로 오빠는 백합 좋아한다. 백합으로 사 와라.”

선우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미친…….’ 하고 작게 읊조렸다.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응. 나 너한테 미친놈이야. 나랑 사귀어 줘.”

범이 결혼해 줘, 하던 날이 떠올랐다.

애가 있으니 결혼부터 했지만 연애가 먼저긴 했다. 선우는 시작부터 거꾸로였던 이 관계에서도 구색은 다 갖추려는 범이 예뻤다. 젊음인지, 청춘인지, 형체 모를 것에 미련이 생겨 버린 저를 헤아려 주는 것 같았다.

남들 하는 건 다 해 보고 살아야지, 하는 범에 선우도 장단을 맞췄다.

“진하게요?”

“말이라고.”

“……좋아요.”

범이 환히 웃었다. 선우의 손을 잡고 보란 듯이 흔들었다. ‘이거이거 내일은 뽀뽀까지 진도 빼나?’ 하며 능글거렸다.

선우가 픽 웃곤 이리 와 보라 손짓했다. 제게 얼굴을 가까이 붙여 오는 범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 요즘은 사귄 첫날에도 키스 다 하고 그래요.”

선우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범의 목덜미를 잡고 입술을 붙였다. 그에 범이 뜨겁게 응해 왔다. 우악스레 달려들었다. 키스가 퍽 농염한 게 정말이지 진한 연애를 해 줄 모양이었다.

선우는 순간을 만끽하며 나 진짜 오래 살아야지, 나 진짜 행복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오롯이 저만 생각한 조금은 이기적인 다짐이었다.

그래도 된다고 해 주는 범이, 제 곁에 있었다.

앞으로도 있기를 바랐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 믿었다.

선우의 머릿속에 그려진 제 미래가, 처음으로 희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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