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고대하던 혼인 신고가 처리된 날, 범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웬 종이쪼가리를 들고 퇴근했다. 혼인 관계가 나오는 증명 서류였다.
퇴근만 하고 돌아오면 수고했으니 예뻐해 달라 치대기 바쁜데 오늘은 웬일로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이것 좀 보라며 평소보다 더 시끄럽게 굴었다.
선우야! 선우야! 선우가 어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크게도 찾아 댔다.
선우는 범이 건네는 증명서를 받아 들고 대충 훑었다. 하도 보라고 성화이기에 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별거 없었다. 배우자 이름, 주민등록번호, 혼인 신고일, 등등. 재미도 없는 걸 왜 자꾸 보라는 걸까.
“어때? 짜릿하지? 형은 이거 보자마자 전율이 막.”
범은 제 몸에 전율이 어떻게 일었는지 감탄사로 표현했다. 크아- 하며 술 마실 때 내는 소리를 냈다. 아무튼 자지가 바짝 설 정도로 좋았단다.
선우가 심드렁히 물었다.
“어디 낼 데도 없는데 왜 떼어 오셨어요? 필요하세요?”
‘신혼부부 대출 같은 거 받으시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이런 말들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범이 이런 제게 질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선우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훨 매력 있을 것 같지만 알면서도 쉬이 자신을 바꾸지 못했다.
선우는 홀라당 깨는 말을 던져 놓고 도로록 눈알을 굴려 범의 낯빛을 살폈다. 다행히 질린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씨발, 신혼부부래.’ 하며 좋아했다.
“너는 짱개집 아들이 짜장면 먹는 거 봤냐? 네 서방 대부업 하는데 무슨 대출이야. 이게 다 기념이지. 하여간 낭만을 몰라.”
“…….”
“아니다, 됐다. 형이 안다.”
범이 선우의 볼에 쪽 하고 뽀뽀했다.
선우는 범이 하는 말을 가만 듣다 맹한 표정으로 아, 했다. 맞다, 범은 대출을 받을 일이 없다. 모르던 사실도 아닌데 상기시켜 주니 또 사랑스러웠다. 빚질 일 없는 집. 선우는 히죽 웃으며 범의 볼에 쪽, 뽀뽀를 돌려주었다.
범은 제가 왜 뽀뽀를 받는지도 모르고 좋아했다. ‘여보 네가 생각을 고쳐먹었구나?’ 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너도 너무 짜릿하지?”
선우는 바보냐 놀리고 싶었지만 그냥 네, 했다. 행복해하는 범의 산통을 깨고 싶지 않았다. 긍정적이진 못할지언정 초는 치지 말자, 하고 다짐했다.
액자까지 준비한 범은 한낱 종이쪼가리를 정성스레 장식했다. 이걸 어디 놓을까 고민하다 안방으로 향했다.
선우는 그런 범이 귀여워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덩치는 산만 해도 로맨티스트가 따로 없었다.
“이선우, 넌 노냐?”
“뭐 도와줘요?”
“에이, 알면서 그런다.”
“빨까요?”
“어. 어흐, 너도 바지 내리고. 형도 이것만 하고 빨아 줄게.”
“전 됐어요.”
“어허! 우리 사이에 사양할 거 없다.”
사양이 아니고 거절인데, 말이 안 통했다. 범은 액자에 열중하며 ‘나는 뭐든 다 해 주고 싶어.’라고 중얼거렸다. 해 주고 싶다는 게 펠라여서 그렇지 그대로 듣기에는 너무 예쁜 말이었다. 저런 소릴 해 주는데 ‘됐다고요.’ 할 수는 없었다.
선우가 꽤나 따스한 눈길로 범을 바라보았다. 범은 액자에 찍힌 지문에 허- 입김을 불어 닦아 내고 있었다. 집중한 범의 볼에 뽀뽀했다. 그러자 범이 시원한 입매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선우야.”
“네?”
“오빤 이거 먹고 안 떨어진다.”
와, 귀신. 뽀뽀로 대충 퉁 치려던 거 어떻게 알았지? 선우는 잠시 놀라워하다 주섬주섬 바지를 내렸다. 제 것을 다 벗고 범의 벨트를 풀었다. 바지를 끄르고 속옷을 치워 내니 위용이 남다른 아이가 튀어나왔다.
아- 입을 벌리고 넣으려는데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어 아! 했다.
넣기 직전에 멈추니 범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삥 뜯다 되레 뜯긴 표정이랄까. 선우는 그 표정에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쩍 벌린 다리 사이에 성기를 떡하니 내놓고 불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집중하던 액자까지 내려놓았다. 죽을래? 할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선우가 가만 쳐다보자 사나운 기색을 거두고 씩 웃었다. 뜬금없이 ‘넌 뭐 그렇게 생겼냐?’ 했다.
“아주 내가 마누라 얼굴만 보면 화가 절로 풀려 버린다니까? 가장이 물러 터지면 안 되는데 말이야. 하긴 마누라한텐 좀 무르면 어때. 물자지만 아님 되지. 그치?”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지만 맞는 말이었다. 선우는 범이 물렀으면 했다. 제게는 말이다. 공짜 없는 팍팍한 세상은 이미 넘치도록 경험해 보았다. 맥도날드도 안 가 봤는데 사람이 살다 보면 얼마나 좆같은 일을 다 당하는지 별 희한한 경험은 많이도 해 보았다. 그런 세상은 이제 그만 배우고 싶었다.
남한테도 무르면 그게 문제인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르긴 개뿔, 누굴 팼는지 가만 보니 범의 손엔 핏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페로몬을 진하게 둘러 그런지 냄새에 예민한 오리도 거부하지 않을 만큼 그에게선 좋은 냄새만 났다. 때리기만 한 건지, 맞기도 한 건지 알 길은 없다만 다친 데는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형, 사람 팼어요?”
“어? 아니. 체리 먹었어.”
범은 선우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제 손을 잠시 바라보고 거짓말을 빨리도 지어 했다. 순발력이 참 좋았다.
“…….”
“체리는 여보 가슴에 달려 있는 게 제일 맛있는데. 씨발, 상상하니까 빨고 싶네.”
“팼으면 팼다 그래도 돼요. 근데 맞고 들어오진 마세요.”
범은 잠시 말이 없다 선우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어유 요 귀여운 거, 걱정도 팔자다.”
선우가 뚱하니 ‘걱정은 안 했어요.’ 하자 이번엔 볼따구니를 잡아당겼다. 주물럭주물럭 꼬집고 크으- 촉감 봐라, 하며 아저씨처럼 감탄했다.
그러다 선우의 볼을 잡아 늘린 채로 갑자기 떨던 방정을 멈추었다. 조용히 선우와 눈을 맞췄다. 범의 눈빛은 다정해 보이기도 했고,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뜻 모를 눈빛으로 뜻 모를 소리를 했다.
“형이 청소 싹 해 줄게. 걱정하지 마라.”
청소에 청 자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선우가 쿡 코웃음을 쳤다. 아주머니들이 다 하시는구만 웬 뜬금없는 소리인지 몰랐다. 선우는 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범이 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 그냥 네, 했다. 어차피 무슨 청소냐 물어보아도 헛소리일 게 뻔하니 지금 멈추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지로 네 안을 닦아 주겠다, 뭐 이런 소릴 하려고 했나? 선우는 대충 추측을 해 보다 제가 생각해도 제 추측이 너무 범스러워서 속으로 혼자 신기해했다. 진짜 닮아 가네. 그러다 아차, 하고 오리에게 사과했다. 범이고 저고 쌍으로 남사스러워서 정말이지 면목이 없었다.
“다 하셨으면 빨리 들어가서 샤워나 하세요. 손이 그게 뭐예요.”
“빨아 준다며! 벗기지나 말든가. 남의 고추를 까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범이 풀어 헤쳐 놓은 앞섶 사이로 덜렁거리는 성기를 내놓고 따졌다.
“아, 드러워요! 빨리 씻고 오세요. 나갔다 들어왔으면 씻기부터 해야죠.”
“오기 전에 씻었어. 체리는 물이 다 안 빠진 건데 자지는 깨끗해. 빨아 줘.”
“오기 전에 어디서 씻어요?”
“사무실에서.”
“사무실에서 어떻게 씻어요?”
“내일 어떻게 씻는지 보여 줄게. 같이 출근하자. 지금은 하던 거 마저 하고, 어?”
범이 빨리 다시 빨아 달라 조르자 선우는 제가 왜 하던 일을 멈추었는지 생각해 냈다. 아, 맞다! 했다. 하여간 범과 있으면 매번 삼천포로 새기 일쑤였다.
혼인 신고가 처리되면 범의 본가에 인사를 가기로 했었다. 범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을 때 제 가족들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차이기 싫다나 뭐라나, 선우가 원한다면 제 가족들을 버리겠다는 소리도 했다. ‘난 너랑만 가족 할래.’라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가 서른 넘어 먹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도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오리와 할머니를 포함시켰다. 끝까지 제 가족들은 끼워 주지 않았다.
“형, 이거 다 처리되면 회장님 댁에 인사 가기로 했잖아요.”
“아, 맞다. 언제 갈래?”
“그걸 뭘 저한테 물어요. 맨날 집에만 있는데. 회장님이 어른이니까 회장님이 정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꼰대들은 자꾸 저 편한 대로 맞춰 주면 안 된다. 어른 대접이나 바라지, 고마운 줄 몰라. 그냥 우리 선우 좆대로 해.”
선우는 네 맘대로 하라며 엉덩이를 툭툭 쳐 주는 범의 볼에 쪽 뽀뽀했다. 그러곤 최대한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아서였다. 범도 비슷한 마음일 거라 여겼다. 유 회장이 인사는 언제 오냐 하도 닦달을 하여 귀찮다고 상욕을 하는 걸 얼핏 들었었다.
예상대로 범은 당장 내일 저녁에 가자고 했다. 제 예상이 맞자 선우가 작게 웃었다.
“네. 회장님 괜찮다고 하시면 내일 가요.”
“내가 괜찮으면 괜찮은 거야.”
“……저기, 형.”
“응?”
“되게 재수 없어요.”
선우가 푸스스 웃으며 안방을 뛰쳐나가 다락으로 튀었다. 범이 바지를 발목에 걸고 쫓아왔다. 물건도 여전히 내놓은 채였다. 흉한 모습으로 우당탕탕 계단을 올랐다. 온종일 고요했던 집 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 재밌어. 선우는 요즘 사는 게 좀 재미있었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웃어 젖히다 계단 중간쯤에서 범에게 붙잡혔다.
“선우야, 다시 아- 하자. 형 좋은 말로 한다, 어?”
“좋은 말로 할 때 빨라고요?”
“아니 너는 무슨 그런 서운할 소릴 하냐?”
범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그런 몹쓸 협박을 한 게 아니란다.
“그냥 좋은 말이라고 말해 준 거야. 선우 씨, 형 지금 좋은 말로 하고 있어요.”
말꼬리를 늘리며 친절한 척했다. 그럴수록 더 협박 같았다. 선우가 픽 웃음을 흘리곤 범의 손목을 끌었다. 무뚝뚝한 투로 ‘방에 가서 해요.’ 했다. 커다란 덩치가 질질 잘도 끌려왔다.
“어우 뭐야, 여보 박력. 세게 빨아 주세요. 오빠 자지 튼튼해요.”
선우의 등 뒤로 한 마디, 한 마디 주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선우의 입꼬리는 끝 간 데를 모르고 솟구쳤다. 재밌어 죽겠다 진짜.
***
다음 날,
점심상을 받은 선우가 반 이상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머니께서 어디가 아프냐며 놀라 물어보셨다. 밥 조금 남겼다고 너무 놀라시니 살짝 민망했다.
선우는 그냥 입맛이 없다 답했다. 생각만 해도 어색한 저녁 식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함께 출근하자 들러붙던 범을 매몰차게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선우에겐 조용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무실에서 한바탕 붙어 먹고 인사를 갈 순 없었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게 분명하지만 맛있게 먹는 시늉이라도 하려면 공복인 게 좋을 듯했다.
일단 배가 고프면 불편함이고 뭐고 잘 먹지 않을까.
그렇게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도 범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신경 쓰여 남긴 밥이 아쉽지 않았다. 후식으로 체리나 한 그릇 받아 미련 없이 다락으로 올라갔다.
선우는 방으로 돌아와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선우로서는 범의 가족들을 처음 만나 뵙는 자리이지만, 할머니는 애초부터 결혼한 줄로 알고 있으니 이번이 첫 인사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오늘 저녁은 시댁 식구들과 함께 먹는다 말했다. 그에 할머니는 할머니스러운 잔소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인사 잘 하고, 깨작거리지 말고 복스럽게 먹어. 가서 뭐라도 좀 돕구. 유 서방 하는 거 봤지?]
선우는 할 말이 없었다. 할머니 댁에서의 범은 정말이지 돌쇠가 따로 없었다. 범이 할머니께 잘하지 않았다면 ‘왜 나만 갖고 그래!’ 하며 징징거리기라도 했을 텐데, 범은 싹싹과 듬직을 적절히 섞은 완벽한 손주 사위였다.
선우가 쩝, 입맛을 다셨다. 낯가림이 심한 저는 범처럼 그리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제 편일 테니 소심하게 징징거려 보았다.
“아니 불편한데 어떻게 복스럽게 먹어…….”
[그래. 억지로는 먹지 마. 체하면 큰일이다, 너.]
할머니 반응에 선우가 오늘 중 처음으로 웃었다.
“그래도 착하게 굴게.”
솔직히 그들이 저를 미워하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그들이 저를 미워하면 속상한 얼굴의 엄마가 꿈에 나올 것 같았다. 어디서 다 보고 있을 거다. 엄마는 다 아니까.
또한 범에게도 천대받는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디서 저렇게 못 배워 먹은 애를 데려왔느냐 하면 내색은 안 해도 씁쓸해할 것이다.
솔직히 부담스러워서 예뻐하지도 않았음 하지만 적어도 미워하진 않을 만큼 적당히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굴어야겠다 다짐했다.
다짐은 했는데, 솔직히 모르겠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다짐 좀 했다고 제가 갑자기 살가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다. 안 봐도 비디오지. 로봇처럼 뚝딱거릴 게 뻔했다.
휴, 선우가 작게 한숨지었다.
[왜 한숨이야? 시댁에서 뭐라 그래?]
“아니. 그냥 나온 거야.”
[뭐라 그래도 주눅 들지 말고, 알지?]
“응. 걱정 마.”
[빈손으로 가지 말고.]
“응. 할머니네도 빨리 가고 싶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다음번에 올 땐 빈손으로 와라, 너. 저번에 사 온 것도 아직 한가득이야.]
범네 집엔 빈손으로 가지 말라 그러고, 할머니 집엔 왜 빈손으로 가야 하냐며 선우가 따지고 들었다. 할머니는 ‘알았어, 알았어.’ 하며 선우를 달래었다. ‘할머니가 미안해.’ 했다.
할머니가 너무 대번에 사과를 하니 도리어 조금 미안해진 선우가 작게 사랑해, 했다. 할머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저도 사랑한다 해 주었다.
하여간 화낼 줄을 모르는 우리 할머니. 이 험한 세상을 사시고도 어찌 저리 심성이 고운지.
선우는 저 자신은 싫어도 제 할머니에게만큼은 자부심이 넘쳤다. 뿌듯한 표정으로 광대를 올렸다.
“할머니, 내가 평생 호강시켜 줄게. 나만 믿어.”
[어유, 우리집 복덩이. 선우 너 건강한 게 할머니한텐 호강이다.]
“아, 건강! 할머니 서울 한번 올라와. 건강 검진 받자.”
[무슨, 아픈 데도 없는데.]
“…….”
선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나 화낼 거다.’ 하고 시동을 거는 중이었다. 할머니 연세에 안 아프다고 건강 검진 한 번 안 받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화를 내려는데 눈치 빠른 할머니는 선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또 ‘알았어, 알았어.’ 했다.
[알았어. 갈게.]
선우가 만족스레 웃었다.
할머니는 범과 합의가 된 일이냐며 슬쩍 범의 의중을 물었다. 선우가 피식 웃으며 아이고, 우리 할머니 걱정도 팔자셔, 했다. 범이 먼저 모셔 오자 한 거다 말해 드렸다.
[그래? 이런, 고마워서 어쩌지.]
할머니는 늙은이가 해 줄 것도 없고 어쩌지, 하며 주절거리시다가 범을 위해 술을 새로 담가야겠다 하셨다.
그 말에 선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제가 ‘형’이라고 써 놓은 술을 식사 때마다 한 잔씩 반주로 마시는 범이 생각났다. 아껴 먹을 거라더니 그 덩치로 진짜 아껴 먹어서 얼마나 우스운지 몰랐다.
‘이제 아껴 먹을 필요 없겠네.’
할머니께 고생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러는 선우가 범에게 줄 술을 담근다는 건 말리지 않았다. 그래도 대번에 해 달라고 하기는 또 미안하여 ‘할머니, 술 담그는 거 많이 고생이야?’ 하고 은근슬쩍 떠보았다.
[고생은 무슨 고생, 나이 들수록 자꾸 소일거리도 하고 움직여야지. 너무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돼. 할머니 바보 된다.]
선우가 기다렸단 듯이 ‘그럼 해 줘.’ 했다. 할머니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장에 갈 거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응, 잘 갔다 와.”
선우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범이 좋아할 소식이기에 얼른 범에게 알려 주고 싶어 문자를 보냈다.
「할머니가 형 준다고 술 담그신대요.」
보내자마자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그냥 그렇다고 일러 준 건데 무슨 소릴 하려고 전화까지 하나 했다.
“네, 형.”
[그럼 그건 다 내 거야?]
범의 유치한 질문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네, 형 거죠. 형 주려고 담근 거니까.”
[어유, 할머님도 참. 그런 거 안 마셔도 밤일 끄떡없는데. 유 서방이 증손주 줄줄이 만들어 드린다고 전해라.]
선우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누구 맘대로 줄줄이지? 할머니께 다시 전화를 걸어야겠다 생각했다. 술 같은 거 제발 담가 주지 말라고 어서 말려야 했다.
“끊을게요.”
[야, 야! 선우야!]
“왜요.”
[사랑한다.]
이씨, 웃으면 안 되는데. 피식 웃음이 샜다. 선우가 웃자 범은 다시 위세가 등등해졌다. 방금까지 없어 보이게 붙잡아 놓고, 금세 살아나서는 야구팀을 만드네 어쩌네 했다.
[어흐, 오빠 힘낼게.]
“됐고요, 할머니한테 그냥 담그지 말라고 할래요.”
[아 왜! 내 건데! 할머니가 나 주는 건데!]
“…….”
이번엔 예고 없이 그냥 끊었다. 그래도 할머니께 다시 전화할 생각은 아니었다.
돈도 많은 사람이 사 먹어도 될 걸, 할머니가 만들어 준다는 술에 열렬히 반응하는 게 고마웠다. 아, 그냥 공짜를 좋아하는 건가? 선우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화면에 문자 한 통이 떠올랐다.
「너도 내꺼♡」
선우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열심히 참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차피 볼 사람도, 들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터뜨렸다.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혼자 실없이 웃었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마음대로 씰룩이는 안면 근육을 진정시켰다. 좀 진정이 되자 답장을 보냈다.
「네.」
한 글자이지만 그래도 범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최선을 다한 나름의 애교였다. 적어도 내 거는 얼어 죽을 내 거냐 하며 타박은 안 했다.
다행히 범은 선우의 애교를 알아봐 준 듯했다. 답장으로 제 퇴근을 알렸다. 점심이 이제 막 지났는데 사장은 마음대로인가 보았다.
「네 자지 집 간다. 내 구멍 딱 둬라.」
어우, 선우는 노골적인 문자에 작게 질색했다. 누가 볼까 무서워 삭제하려 했는데 끝끝내 삭제를 누르진 못했다. 이것도 다 추억인데, 어떻게 지우나.
선우는 엄마가 떠나고 엄마와 주고받았던 문자를 일일이 캡처 해 저장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저장해 두었다. 강박처럼 혹시나 사라졌을까 이따금씩 잘 있는지 확인도 했다.
‘문자 하나가 얼마나 소중해질 수 있는데, 함부로 지우면 안 되지 암.’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범의 저질스런 문자를 품었다. 틀린 말도 아니네 뭐, 하고 작게 혼잣말을 했다.
***
범과 선우를 태운 차가 유 회장네 집 앞에 멈춰 섰다. 바로 내리진 않았다. 범은 선우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이선우 떠는 것도 존나 귀엽네? 하여간 양파 같은 매력에 이 오빠가 맥을 못 춘다.”
선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끈덕진 손길을 보냈다. 선우의 사타구니 사이를 살살 매만졌다.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긴장되는데 치대니 성질이 났다.
“안 떨었는데요.”
“난 떨려.”
“형네 집인데 형이 뭐가 떨려요.”
“난 너만 보면 떨려.”
선우는 ‘아 진짜!’ 하며 범을 구박했지만 그래도 가벼운 농을 던져 주는 범에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결연한 표정을 하고는 ‘가요! 앞장서세요!’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씨발, 우리 여보 고추 내가 따먹었는데 아직 사나이네? 존나 섹시하다, 너.”
“그렇게 따지면 형도 고추 없어야 되거든요?”
선우는 긴장을 좀 더 풀어 보고자 범의 농을 맞받아쳤다. 메롱, 한 뒤 차에서 홀랑 내려 버렸다.
범은 허둥지둥 따라와 선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혀를 내밀었으면 뭐라도 빨아 줘야 되는 거 아니냐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선우는 다시 메롱, 혀를 내밀어 범의 입술을 핥아 주고 쪽 뽀뽀해 주었다. 범이 씩 웃기에 저도 따라 웃었다. 옆에 호랑이를 끼고 다닌다 생각하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딩동, 둘은 함께 화려하고 커다란 대문의 벨을 눌렀다.
선우가 대궐 같은 집 안에 발을 들였다. 거실에 모여 있던 식구들이 손님맞이를 위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선우는 제게 다가오는 가족들을 살폈다. 둘째 형 내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새끼 마누라랑 각인도 안 해서 냄새나.’가 범의 설명이었다. 제가 다른 이의 페로몬 냄새에 입덧을 하니 부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난날 제 뺨을 후려갈겼던 이다. 만나면 얼마나 뻘쭘할까 걱정했었는데 안 온다고 하여 솔직히 조금 다행이었다.
첫째 형 내외는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각인이 되어 선우는 그들의 페로몬을 느낄 수 없었다. 유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사별한 아내와 각인을 했는지 페로몬을 뿜어 대지 않았다. 한쪽이 죽으면 각인이 풀린다 하던데, 그러지 않은 걸로 보아 사랑이 아주 깊었나 보았다. 아니라면 그저 나이가 들어 자연히 안 나오게 된 걸 수도 있다.
범이 어머니 이야기를 딱히 꺼낸 적은 없지만 선우는 유 회장이 사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말로 범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고 둘째 형수도 참석하지 않아 집 안이 완전 남탕이었다.
범의 큰형수 되는 분도 남자 오메가였다. ‘안녕하세요, 김지민입니다.’라고 제 소개를 하며 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트머리를 한 여자인가 했다. 작고 마른 요정 같았다.
선우는 제게 악수를 청하는 손을 어색하게 잡았다. 곰살맞지는 않았지만 깍듯하게 안녕하세요, 했다.
지민은 사근사근했다. 선우에게 정말 잘생겼다며 입발림 소리를 해 주었다. 그에 선우가 다시 한번 깍듯하게 감사합니다, 했다.
범은 선우와 인사를 나누는 큰형수를 보며 난쟁이 똥자루 같다고 했다. ‘우리 마누라는 길쭉길쭉 모델이 따로 없는데.’도 덧붙였다.
선우가 범의 발을 밟았다. 여기까지 와서 저럴 줄은 몰랐다. 티 나지 않게, 조용히, 꾸욱, 밟았다.
범은 발을 밟히고 좋아했다. ‘모르는 데 왔다고 서방 찾는 거 봐라.’ 하며 선우의 볼을 꼬집었다. 남은 긴장되어 죽겠고만 낯가리는 걸로 놀렸다. 찾은 게 아니고 닥치라는 신호였는데, 못 알아들었다.
이어서 범의 큰형과도 인사를 나눴다. 유랑이라는 큰형은 둘째 형처럼 양아치 같지 않았다. 선우가 먼저 허리를 굽히니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인사를 받아 주었다. 제가 더 어른이고 윗사람이다 하는 듯한 권위적인 태도가 언뜻 비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젠틀했다. 조폭보다는 번지르르한 사업가 같았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행색과 건들거리지 않는 자세가 그리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도 인물은 범이 제일 나았다.
“저 새끼 또 엘리트 코스프레 한다. 공부도 존나게 못한 새끼가.”
범이 제 큰형에게 시비를 걸었다.
너무 친해서 저러는 건지, 진심으로 싫어서 저러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형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 아마 후자일 것 같았다.
범은 랑을 앞에 두고 선우에게 그의 흑역사를 풀었다. 유년 시절 고액 과외를 붙였는데 수학 과목에 20점을 받아 와 아버지께 처맞았다는 이야기였다. ‘괜히 과외 선생님만 잘렸지, 지 대가리가 문제인 걸.’ 하며 쯧쯧 혀를 찼다. 나불나불 거리는 게 딱 얄미운 막내였다.
선우는 20점 소리에 쿡, 코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래도 범 덕분에 조금은 편안해졌다. 저렇게 똥폼을 잡고 서 있는 사람도 별거 아니구나 생각했다.
선우의 눈에 지민의 표정이 들어왔다. 입꼬리가 슬쩍슬쩍 씰룩거리는 게, 그도 열심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선우였다면 어차피 제 남편이니 푸하하 웃고 놀려 주었을 텐데, 남편의 면을 살려 주기 위함인 듯했다.
되게 착하시구나, 선우는 괜히 혼자 머쓱해했다.
랑은 ‘거 새끼 또 장난이다.’ 하며 쿨하게 웃어넘기는 것 같았다. 범의 놀림에 못나게 발끈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 조금 싸했다.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그 주먹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선우가 제 아랫배를 감쌌다. 설마 유 회장도 있는 자리에서 주먹다짐이 오가겠냐 싶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일단 오리를 가렸다.
약간은 기묘한 공기가 흘렀다. 그래도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한 유 회장 덕분에 분위기는 금세 풀어졌다. 유 회장은 밑에 수하들을 시켜 범과 선우에게 줄 선물들을 내왔다. 선우에게 ‘우리 집 사람이 된 걸 환영한다.’ 하며 껄껄 웃었다.
선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했다. 너무 잘해 줘서 좀 무서웠는데 그래도 감사하긴 했다.
선물은 전부 아기 용품이었다. 옷가지나 장난감 같은 게 한가득이었고 유모차나 보행기같이 큼지막한 것들도 보였다. 선우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기가 쓰는 물건들은 다 손바닥만 해서 그런지 보기만 해도 귀여웠다.
“아버지가 준 거 구려요. 안 써요.”
“뭐 이 새끼야? 야! 너 저거 비싼 거야.”
퍽 억울해 보이는 유 회장의 말투가 우스웠다. 선우는 열심히 웃음을 참았다.
범은 비싸긴, 하며 아버지께 조소를 날렸다. 그러곤 선우를 바라보며 오빠가 더 좋은 거 사 줄게, 했다. 선우의 머리통에 쪽 뽀뽀했다.
선우는 시댁 식구들 보기가 창피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 회장은 보기 좋다며 박수를 쳤다. 범에게 ‘쌔끼, 남자네.’ 했다.
희한한 집구석이긴 한데 그래도 숨 막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선우는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랑의 주먹은 신경 쓰였다. 절로 시선이 갔다. 가만 관찰하다 핏줄이 꿈틀, 할 때마다 경계했다.
배 속에 오리가 있어 체구가 큰 남자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했다. 위협이 된다 느끼는 걸까? 위협적이라기에 랑은 누가 봐도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그게 더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선우는 머리가 아파 그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범이 선우의 한쪽 뺨에 손을 얹고 선우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선우가 작게 ‘왜요?’ 하자, 간지러운 귓속말을 해 왔다.
“내가 이겨. 쟤도 좆밥이야.”
‘어우, 유치해.’
선우는 제 아랫배에서 손을 떼며 슬쩍 광대를 올렸다. 유치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긴다 하니 오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고 다 함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해진미가 가득이었다. 선우는 불편한 와중에도 나름 잘 먹었다. 점심을 굶다시피 한 게 도움이 되었다. 배고픔이 낯가림을 이긴다는 걸 깨달았다. 복스러운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깨작거리지는 않았다.
지민은 밥을 새 모이만큼 먹었고, 랑은 밥이 아예 뒷전이었다. 랑은 회장님만 극진히 챙겼다. ‘아버지 혈압 높으시니 이런 것 좀 많이 드세요.’ 하기도 하고, 일 얘기, 골프 얘기 등 다양한 주제로 살뜰히 말을 걸었다. 문제는 외사랑이었다.
유 회장은 큰아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막내아들 내외를 살피기 바빴다. 놀아 달라 기웃거리는 모양새였다.
범은 아버지가 쏘는 구애의 눈빛을 오는 족족 무시했다. 바빴기 때문이다. 킹크랩의 살을 발라 선우의 앞접시에 부지런히 날랐다.
맛있냐는 범의 질문에 선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먹어 보는 킹크랩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저번에 먹은 랍스터보다 더 취향이었다. 근데 조금 눈치가 보였다. 범은 다 같이 먹게끔 상에 올라 있는 걸 제게 다 퍼 주고 있었다.
식탁에 앉은 입이 몇 갠데, 저 혼자 다 먹는 건 좀 아니었다. 실은 너무 맛있어서 양껏 먹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범을 말렸다.
“저 괜찮아요, 형도 드세요.”
선우가 범의 허벅지를 잡고 소곤거렸다. 그러자 범이 선우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나지막이 답했다.
“여보, 나 섰어.”
선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범을 외면했다. 다시 밥그릇에 고개를 박았다. 범은 그런 선우의 볼에 쪽 뽀뽀하고 아예 입 앞까지 게살을 발라 대령했다.
“여보 입에 들어가면 내 입에 들어간 거지. 부부는 한 몸인데.”
어우, 느끼해 진짜. 진심으로 느끼했지만 주책맞은 선우의 입꼬리는 행복을 숨기지 못하고 씰룩거렸다.
유 회장은 범과 선우, 둘만의 세상에 끼고 싶어 안달이었다. 양쪽 다 우성인 부부가 우성을 낳고, 그 손주가 또 우성과 결혼해 우성을 낳고, 자신이 일군 유씨 집안을 범과 선우가 완벽으로 이끌 것 같아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막내아들 내외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기회를 엿봐 한 마디 걸었다.
“선우가 해산물을 좋아하는구나. 더 있다. 많이 먹어라.”
“아, 네. 감사합니다.”
유 회장이 전복을 집어 선우의 밥 위에 올렸다. 이를 흡족하게 여긴 범은 아버지께 오리의 태몽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선우의 할머니가 꾼 용꿈이었다. 유 회장은 눈을 반짝였다. 반짝보다는 번뜩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크게 흥미를 보였다. 용이 여의주를 물었다는 대목에서 키야-, 크아- 같은 아저씨 추임새를 넣으며 기뻐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저거 하나 닮았네.’
선우는 범과 유 회장의 닮은 점 하나를 발견하곤 속으로 피식했다.
“키야- 우리 손주 이름은 유룡이라고 지으면 되겠다! 아주 딱이다!”
유 회장은 껄껄 웃고 난리였지만 그의 작명 센스에 선우는 순간 정색했다. 아차, 하고 냉큼 표정을 풀었는데 범이 고새 보았는지 크하하 체통 없이 웃었다.
선우가 미친놈처럼 웃는 범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웃지만 말고 말려 달라 눈으로 청했다.
‘와, 진짜 유룡이 웬말이냐.’
겉으로 못다 한 질색은 속으로 마저 했다.
“애새끼 왕따 당하게 할 일 있어요?”
범이 한참을 웃다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선우가 하고 싶은 말 그대로였다. 선우는 잘한다는 의미로 범의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범이 아버지께 보이던 인상을 풀고 선우를 보았다. 한쪽 다리를 꼬고 껄렁하게 앉아 선우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거참, 오빠 힘들게 자꾸 세우면 쓰나.’ 하고 작게 읊조렸다.
선우가 이를 무시하자 포기하지 않고 ‘같이 화장실 갈래?’ 했다. 너무 열렬한 눈빛이었다. 선우는 그가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잡아먹히기 직전이었는데 다행히 유 회장이 살렸다. 유 회장이 범의 말에 대꾸함으로써 범의 시선은 다시 유 회장에게로 돌아갔다.
“왕따는 무슨 왕따! 사람은 이름에 그 뭐야, 그, 그.”
“임팩트요?”
“그래, 그거! 사람은 이름에 임팩트가 있어야 크게 되는 거야! 너만 해도 봐라. 얼마나 크게 됐냐.”
범이 피식 웃으며 껄렁껄렁 답했다.
“와, 유오리 딸이면 할아버지 존나게 미워하겠네.”
“…….”
유 회장은 혹시 손녀일지도 모를 오리에게 미움을 사는 건 또 싫었나 보았다. 흠흠 목을 가다듬고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지어라.’ 했다.
“형이 이겼어.”
범이 귓속말을 해 왔다. 열심히 웃음을 참던 선우는 결국 못 참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했다고 그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식구들 앞에선 쑥스러우니 식탁 밑으로 발장난을 걸었다.
범은 ‘나비야, 간지러운데?’ 하며 어흐, 좋아했다.
그래도 식사 중에 대화가 좀 오가니 확실히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선우는 다시 씩씩하게 밥술을 들었다.
그렇게 셋만 화기애애했다.
랑은 밥맛을 다 잃은 표정으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선우의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주제로 이야기꽃이 핀 식탁에서 말없이 줄곧 기회만 보았다.
그러다 식탁이 잠시 고요해진 틈을 타 아버지께 말을 붙였다.
“아버지, 노블레스가 요즘 아주 잘 돌아갑니다. 작년보다 수익도 잘 나고요. 그나저나 우성이 잘 팔리는데 구하기가 힘들어서 원.”
말은 유 회장에게 하는데 시선은 선우에게 던졌다. ‘너 거기 창놈이었지?’라고 묻는 듯했다.
범은 랑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랑의 머리에 게딱지를 던졌다. 강속구였다. 킹크랩이라 게딱지 크기도 엄청 실했다. 마빡에 정통으로 맞은 게딱지가 딱! 하는 굴욕적인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소리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는데, 게딱지에 들어 있던 썩 아름답지 않은 색깔의 게 내장이 랑의 이마에 세 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사람 꼴이 참, 순식간에 초라해졌다.
선우는 랑의 말보다 범의 행동에 더욱 놀라 토끼 눈이 되었다. 솔직히 랑이 하는 말은 별생각 없이 듣고 있었다. 제가 노블레스 출신인 건 유 회장도 알고, 범도 아는 사실인데 사기 결혼이라도 했으면 또 몰라, 선우는 찔리는 게 없어 동요할 수도 없었다.
랑이 굳이 왜 노블레스 이야기를 저 들으라는 듯 하는지는, 알 만했다. 선우의 인생엔 저런 사람들이 종종 스쳤다.
세상엔 심보가 희한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기어오를 생각 같은 거 가진 적도 없는데 일단 밟아 놓고 보는 사람들. 그들은 선우에게 선우의 저급함과 천박함을 못 박아 주고 싶어 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한번 몸팔이는 영원한 몸팔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네 주제론 안 돼, 라고 하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한 번씩 새겨 주었다.
‘내 주제로 안 되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밟으면 밟는 대로 깨갱 하는 수밖에 없으니 그게 재미있어 더 그러는 것도 같았다. 하긴 선우 생각에도 저는 괴롭히기 간편한 존재였다. 근데 그럴 거면 돈이나 주고 그러든가.
선우는 그때마다 속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겉으로 그러면 건방지다 따귀가 날아올 테니 속으로 콧방귀도 끼고, 귀도 후비고 그랬다.
물론 그들의 말에 일일이 동요하고 겁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선우도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모르는 제 속은 상처받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론 그저 네네, 하는 법을 배웠다. 겉으로 네네, 하다 보면 속으로 받은 상처도 혼자 알아서 아물었다.
겉이 아프게 두드려 맞는 것보다는 나은 거 아닌가? 병원비도 안 들고, 몸도 축나지 않고. 뭐 그런 생각들을 해 왔다.
선우는 이번에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씩씩하게 네, 제가 창놈이었습니다, 할 수 있었다. 제 수준이 그거밖에 안 되어 송구합니다, 복창하라 시켜도 해 주고 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 범이 저를 도와주는 순간 느꼈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이런 순간에 도움을 받으면 눈물 나게 고맙다는 걸.
솔직히 범이 제 큰형에게 게딱지를 던지는 순간, 놀라기도 놀랐지만 통쾌함이 컸다. 던져도 꼭 비린내 날 것 같은 걸 던져서는 하필 명중한 게 코미디였다.
오만 똥폼을 잡고 있는 저 남자에게 멋진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 주지 않아 좋았다. 저런 사람에겐 느와르보단 코미디가 어울린다. 게딱지에 맞아 딱! 소리가 나니 어찌나 돌대가리 같아 보이던지, 되게 없어 보였다. 속이 다 후련했다.
“형한테 장난이 심하다, 새끼야? 나이를 먹었으면 할 짓 못 할 짓은 구분을 해야지.”
지는, 선우가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데, 범이 선우가 하고 싶던 말을 육성으로 뱉었다.
“지는.”
선우는 이 심각한 상황에 진짜로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냉큼 고개를 숙였다.
유 회장은 별말이 없었다. 원래도 아들들이 싸우면 방관했다. 이기는 놈 편이었기 때문이다. 우성이라고 범을 편애하지만 그렇다고 범에게 따로 힘을 실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냥 결과를 지켜보았다. 그러면 범은 힘으로든 머리로든 늘 이겼다. 유 회장의 우성 타령이 날로 심해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랑은 더 이상 범을 상대치 않고 아버지를 보았다. 유 회장은 제 아버지이자 상사이니, 제가 사업 보고도 못 하냐는 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실 간접적인 저격이라는 게 그렇다. 심증만 있는 거지, 당사자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하면 할 말이 없는 거다. 제가 둘째처럼 선우를 때리기를 했나 어쨌나, 랑은 제가 운영하는 노블레스가 장사가 잘된다는 소리를 한 것뿐이니 억울하다 우기면 우길 수도 있었다.
랑은 발끈하는 동생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가증스런 표정을 연기했다. 저렇게 감정적이어서야 잘될 일도 그르치고 말아먹기 십상이지 않냐 하며 은근히 범을 까 내렸다.
허나 유 회장은 그걸 왜 제게 말하냐는 태도였다. 누가 정당하네, 정당하지 않네 가려 준답시고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깡패가 정당함이 어디 있나, 이미 걸린 싸움이면 죽자고 덤벼 무조건 이길 생각을 해야지. 유 회장은 그런 주의였다.
범이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랑이 아버지께 무어라 무어라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선우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려 범을 보았다. 웃음소리가 들려 왜 웃나 해서 보았는데 입만 웃은 거였다.
범은 눈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고 있었다. 선우는 그 모습에 숨을 참았다. 저를 향한 눈빛이 아님에도 숨을 참을 만큼 그가 내뿜는 기운은 강렬했다.
선우의 시선을 느낀 범도 선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눈빛을 바꿔 끼웠다. 여전히 강렬했는데 조금 달랐다. 강렬하게 발정이 난 눈빛이랄까. 그러다 씩 웃어 보였다.
“우리 집구석이 이 모양이긴 한데, 너 나 안 찬다고 했다?”
범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선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미안하니까 이따 집에 가서 찐하게 위로해 줄게.”
이번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범이 ‘그럼 집에서 말고 차에서 위로해 줄까?’ 했다. 집이냐 차냐가 문제가 아닐 텐데, 알면서 또 저런다.
선우가 피식 웃고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그럼, 형이 미안하니까 잘할게.”
선우가 흡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은 선우의 동의를 얻자마자 좀 전까진 붙이지 않았던 말을 덧붙였다. 자지로.
그 날강도 같은 짓에 선우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범은 낙장불입이라며 얄밉게 메롱 했다. 네가 끄덕끄덕했잖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혼자 키득거리다 구겨진 선우의 미간에 쪽 뽀뽀했다.
그에 선우가 표정을 풀었다. 얄미운데 귀여웠다. 그리고 그 귀여운 남자가 제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하나도 안 귀여운 허락을 받았다.
“여보, 나 저 새끼 아가리 찢어도 돼?”
선우가 소곤소곤 미쳤어요? 했다. 솔직히 말 한 마디 한 걸로 저 정도 굴욕을 당했으면 되었다. 뭘 더 한다고, 회장님도 있는 자리에서 더 이상의 추태는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우가 말리자 범은 진심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리를 못 찢게 해서 실망했다 생각하면 무서워 죽겠는데 그는 해맑게 귀여운 척을 했다. 큰 덩치를 구기고 ‘아, 왜.’ 하며 앙탈을 부렸다. 그러다 안 통하니 선우를 화장실로 보내려 했다.
“여보, 화장실 안 가고 싶어? 잠깐 다녀올래?”
사실 아까부터 가고 싶었는데 참고 있었다. 긴장되는 자리라 물이 너무 먹혔는데 화장실 간다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가고 싶긴 한데 범을 여기 두고 가는 건 고양이에 생선을 맡기는 격이 될 것 같았다. 선우는 조용히 ‘같이 가요.’ 했다. 순간 범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네 아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는 알아? 하긴 무슨 생각이겠어, 야한 생각이지.’
선우는 오리에게 물었다가 스스로 답했다. 갈등의 기로에 놓였다. 혼자 갈 것인가, 데리고 갈 것인가.
“저 그냥 혼자 갈래요. 근데 아가리는 찢지 마세요.”
선우가 범에게 귓속말을 했다. 같이 가쟀다가, 혼자 간댔다가, 제가 생각해도 변덕이 심한 게 좀 미안하긴 했다. 나라도 짜증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범의 눈치를 보았다.
범은 선우에게 농락을 당하고 팍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엄청나게 생색을 내며 ‘형이 더 좋아하니까 진다.’ 했다.
선우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들어온 선우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낯선 사람들을 벗어나 혼자가 되니 편안했다. 핸드폰을 들어 아까 범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을 문자로 남겼다.
‘근데 저도 좋아해요.’라고 쳤다가 치고 보니 조금 따지는 투 같아서 ‘근데’를 뺐다. 그러니 저답지 않게 퍽 간지러운 문자가 되었다.
「저도 좋아해요.」
선우는 전송을 누르고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도 안 보니 혼자 발도 굴렀다.
***
범은 다이닝룸을 빠져나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고 10초가량을 기다렸다. 랑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십, 구, 팔, 칠, 카운트를 셌다. 우리 마누라 좀 멀리 갔나?
마누라가 아가리는 찢지 말라 그래서 안 찢을 생각이었다. 오늘 일로는 안 찢을 거지만 유랑이 새끼 입 놀리는 꼬락서니로 보아 조만간 다른 일로 찢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이 아쉽진 않았다. 살았다 하는 순간에 죽는 게 더 좆같은 법이니 한 번 살려 주었다.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게 있었다. 선우에게 발라 주고 남은 게 껍데기였다. 집게다리. 뾰족한 게 찍기 좋을 것 같았다.
범이 거슬리는 식탁을 엎어 버렸다. 아버지가 이태리제 대리석 식탁을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식탁을 빙 둘러 목표물에 다가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랑에게 직진했다. 이리 가니 두 발자국도 안 되었다. 제가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 랑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범은 질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아주 오줌 싸겠다, 이 씨발놈아?”
겁먹은 랑을 비웃어 주곤 단번에 콱, 랑의 이마에 집게발을 꽂았다. 그러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곧장 목울대를 쥐었다. 그대로 꽉 졸랐다. 랑은 숨이 막혀 파닥거렸다. 숨 막히라고 조르는 거기에 범은 그 파닥거림이 만족스러웠다. 평온하기만 한 표정으로 어어, 했다.
“어어, 잘하고 있네. 어 그래 죽자 그냥.”
큰형수인 지민이 범에 매달려 애원했다.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제발 그만하라 했다.
“형수, 남편 따라 강남 가게? 같이 아가리 찢기고 싶지 않으면 닥쳐. 선우 들어.”
이내 지민은 딸꾹질을 하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지민이 잠잠해지자 범도 그만 랑을 놓아주었다. 지민 때문은 아니고 선우가 올까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씨발, 가오 안 사네. 범은 마누라 눈치에 치이는 제 가오를 위로하다 제게 눈치를 주는 마누라라는 존재가 꼴려 어흐, 했다.
범이 제 손바닥 안에서 부서진 킹크랩 껍데기를 탈탈 털었다. 손에서 비린내가 좀 났다. 아까 선우에게 게살을 발라 줄 때부터 난 건데 ‘아오 냄새, 이 씨발아!’ 하며 랑을 욕했다. 기절해 있는 랑은 말이 없었다.
범은 제 큰형수에게 ‘내가 우리 큰형수 과부 안 만들었어요.’ 하며 생색을 내 주고 다이닝룸을 빠져나왔다. 아버지에겐 저 갑니다, 했다.
손을 닦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선우가 있을 화장실.
범이 환히 웃으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다.
“어우씨, 깜짝아!”
화장실 문을 연 선우가 미처 조절하지 못한 큰 소리를 냈다. 범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범은 선우를 다시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씨가 뭐냐 씨가, 하며 선우의 말본새를 지적했다.
선우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와, 내가 지금 누구한테 저런 소릴 들은 거지? 자존심 같은 거 그다지 있는 편도 아니지만 이건 자존심이 상했다.
“사나이가 말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왜 하다 말어.”
선우가 멍청한 표정으로 아, 했다. 욕을 해서 뭐라 그런 게 아니고 욕을 끝까지 안 했다고 뭐라 그러는 거였다. 범은 씨발 해 봐 씨발, 하며 갑자기 욕을 시켰다. 선우가 픽 웃으며 심드렁히 씨발, 이라고 해 주었다.
“그렇지, 잘하네. 유랑이 이 씨발새끼 좆만 한 새끼 해 봐.”
범은 병 중에 제일 무서운 병이 화병이라며 제 형을 욕하게 시켰다. 임산부가 말을 좀 예쁘게 하라 타박을 주진 못할망정 뭐 저런 소릴 입에 담으라 그러는지, 선우는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얼굴엔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욕할 놈을 욕하는 건 언제나 통쾌했다.
“형네 형님 키 크잖아요. 안 좆만 하던데.”
“내가 더 커! 좆도, 키도.”
그에게 나이가 몇 개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범보다도 나이가 많은 큰형님이 유치해도 더 유치한 것 같았다. 내가 싫으면 그냥 싫다 그러지, 선우는 아닌 척 발뺌하던 랑의 음흉함이 더 싫었다.
‘그래, 내 남편이 낫다.’
“아우, 알아요. 조용히 좀 하세요.”
“그치? 알지? 하긴, 내 마누라가 내 좆 큰 건 제일 잘 알지. 어흐, 오빠 좀 부끄럽네?”
범은 사르르 녹아내린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았다. 수줍은 여고생 같은 게 조금 못 볼 꼴이었다.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범이 부끄럽다는 소리를 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제 좆 크단 소리를 저리 당당히 하나 싶었다.
“화장실은 왜 쫓아왔어요?”
“보고 싶어서. 얘가 알아서 여보 있는 데로 이끌더라니까? 쌔끼, 안테나야 아주.”
범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제 앞섶을 내밀었다. 참 별 능력이 다 있는 자지다.
선우는 기가 차 그저 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자 범이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혀 왔다. 키스하자 벌린 건 아니었지만 그냥 했다.
범은 거북이처럼 목을 앞으로 빼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선우의 입술을 쭙쭙 빨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든, 허리를 휘어잡든 하면 안정적일 거를 이상하게 선우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엉덩이가 터지도록 주물럭대기 바빴을 거다. 만지고 비비고 난리가 나야 정상인데 손이 묶인 사람처럼 입술만 열심히 놀렸다.
고풍스런 화장실 안에 추릅추릅 침 섞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선우는 범의 키스를 열심히 받아 주었지만 키스가 길어질수록 이 어정쩡하고 불안정한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범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를 꽉 안았다. 그러다 조금 장난기가 발동해 손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범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범이 만지지 않으니 제가 만졌다. 조몰락조몰락 부러 더 더럽게 만졌다. 그가 역지사지의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길 바랐다.
헛된 바람이었다. 범은 되게 좋아했다. 선우가 재미 보려 친 장난에 범이 더 재미를 보았다. 남 좋은 일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남이 남편이라 많이 억울하지는 않았다.
“선우야.” 츕, “앞에도,” 츕.
범이 입술을 쪼아 대며 한 단어씩 말을 뱉었다. 그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무슨 소릴 하려는 건지 눈치챈 선우가 범의 엉덩이를 콱 꼬집은 뒤 손도 떼고 입술도 떼어 냈다. 앞에도 주물러 달란 소리일 거다. 주물러서 뭘 어쩌려고. 처가댁에서 해 봤으면 됐지 이젠 시댁에서도 하려고 했다.
범은 뻔뻔하게 왜 안 해 줘, 하고 물었다. 맡겨 놓으셨냐 역으로 되물으려 했는데 범이 한발 빨랐다. 자긴 엉덩이보다 자지가 예쁘다, 그립감 죽이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냐, 마누라가 몰라주면 내가 서운하다, 하며 드라마틱하게 징징거렸다. 끼어들 수가 없었다. 상대의 혼을 쏙 빼놓는 대화법이었다.
역시 돈 잘 버는 사람이 다르긴 달랐다. 길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도 팔아 올 사람. 선우는 그 생각을 하니 내심 뿌듯했지만 그래도 단호하게 나갔다.
“우리 집 가서 해요.”
순간 범이 환히 웃었다. 우리 집, 우리 집, 하고 되뇌었다. 선우가 우리 집이라 하니 진짜 가정을 이룬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이거 오늘 새신랑이 신혼 방에서 힘 좀 써 줘?’ 하며 거들먹거렸다.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지가 지 입으로 새신랑이란다. 벌써 첫날밤만 몇 번이야, 다 헐었구만.
선우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뭐, 별말도 아닌 걸로 저렇게 의미를 부여해 주니 특별해지는 것 같고 좋았다. 범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도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로맨틱도 했다. 제가 낭만과는 거리가 머니 범과 있으면 균형이 맞는 것 같았다.
천생연분이 주는 안정감이랄까, 여기까지 사고가 확장되었을 때 선우는 스스로에게 헛! 하고 놀랐다. 제 머리로 천생연분을 생각하게 될 줄이야. 범에게 주책이 옮아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냉큼 화제를 돌려 우리 집이네, 새신랑이네, 하며 신이 난 범에게 물었다.
“근데 형, 손은 왜 안 써요?”
“손? 아, 게 냄새 나서. 왜? 오빠가 안 만져 주니까 섭섭했어? 말해 뭐 해, 섭했겠지.”
“안 섭섭했는데요.”
“쓰읍, 부부 사이에 숨길 거 없다. 솔직히 말해라.”
선우가 진짠데, 라고 작게 중얼거리니 범이 진짜 섭섭했냐 달래며 뽀뽀해 주었다.
범은 귀는 밝은데 말귀엔 밝지 못했다. 못 알아듣는 척이라 확신하긴 하지만 어쩔 때 보면 표정이 퍽 순수해서 진짜 못 알아듣는 것도 같았다.
뭐 어쨌거나, 못 알아들음의 결과가 미안하다는 사과와 뽀뽀라면 나쁠 건 없었다. 그래서 선우는 말귀가 먹었냐 구박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범이 세면대에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무심코 쳐다보니 피가 맺혀 있었다. 남의 피가 아니라 범의 손이 까져 나는 범의 피였다. 선우가 깜짝 놀라 손이 왜 그러냐 물었다.
뾰족뾰족한 킹크랩 껍데기를 손안에서 바스러지도록 쥔 바람에 난 피였다. 범은 앞뒤 상황 설명 없이 ‘유랑이가 이랬어.’ 했다.
선우는 그 피해자 코스프레에 속아 넘어갔다. 제가 자리를 비운 새에 형제끼리 치고 박고 싸웠나 했다. 범은 자신이 이겼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기긴 이겼다니 다행이긴 한데, 저 나이를 먹고도 형제간에 싸우고 내가 이겼네, 네가 이겼네 하는 모양이 조금 한심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 때문에 그리 싸워 줄 것까진 없었는데, 미안하고 고마웠다.
선우가 물기 묻은 범의 손에 호호 바람을 불어 주었다. 으, 따갑겠다, 하고 걱정 어린 혼잣말을 했다.
범이 실실 쪼갰다. 우리 여보가 알고 보면 참 따수운 남자야, 하며 좋아했다. 선우가 걱정을 해 주니 잘 걸렸다 하듯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선우의 눈앞에 솥뚜껑만 한 제 손바닥을 들이대며 말했다.
“이거 봐, 이거. 살이 막 다 파인 거 같아. 네 오빠 파상풍 걸리는 거 아니야? 이게 또 손만 찢어진 게 아니에요. 마누라 없이 혼자 싸우니까 오빤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얼마나 외롭던지. 나 진짜 아팠으니까 위로해 줘.”
선우는 우수수 쏟아지는 칭얼거림에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은 부러 더 정신 사납게 구는 것도 같았다. 덕분에 제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까먹을 것 같았다.
당장 선우의 눈앞엔 커다란 덩치로 징그럽게 애교를 피우는 범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집에 가서 연고 발라요. 그럼 금방 나아요.”
“그럼 마음은 어떡해.”
“음……. 마음은, 아 몰라요. 그것도 집에 가서 어떻게 해 볼게요.”
범이 씩 웃으며 ‘우리 집?’ 하고 물었다. 선우도 슬쩍 웃으며 ‘네. 우리 집.’ 하고 답했다.
***
범은 그대로 선우를 데리고 본가를 나섰다.
선우가 회장님께 인사도 안 드리고 가냐 붙잡았는데 ‘회장님 식탁 사러 갔어.’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멀쩡한 식탁에서 밥만 잘 먹고 있었는데 뭔 식탁을 사러 가나. 그냥 제가 가고 싶으니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
근데 사실 선우도 더 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못 이기는 척 범을 따라나섰다.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인사도 없이 가 버리냐 하면 다 범 때문이라고 하면 되니까. 그래도 말렸어야지, 하면 저 덩치를 어떻게 말려요, 해야지. 선우는 저 혼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해 보았다.
‘아 재밌네 진짜. 무데뽀랑 사는 거 진짜 재밌다.’
선우는 시커먼 조직원들이 즐비한 회장님 댁 마당을 가로지르며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범이 외간 남자들 많은 데서 웃는다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어?! 하며 팔을 들었다. 선우의 얼굴을 가린답시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선우는 저를 가리려는 범을 얄밉게 요리조리 피하며 장난을 걸었다. 범은 어쩔 땐 피하게 두고, 어쩔 땐 못 피하게 막았다. 봐줄 땐 봐줘 가며, 안 봐줄 땐 안 봐줘 가며, 동네 형처럼 재밌게 놀아 주었다. 도망가는 선우를 잡아 헤드록도 걸었다. 무슨 놈의 헤드록이 하나도 안 아프고 헐렁헐렁했다.
선우의 웃음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
“너 항복할 거야, 안 할 거야?”
선우는 배를 잡고 웃으며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항복한다 답했다. 그런데 범은 항복한 걸 가지고도 잔소리를 했다. 싸가지만 보면 딱 파이터인데 애가 근성이 없다나 뭐라나. 웬 코치님 같은 투로 ‘너 앞으로 유랑이 새끼가 또 저 지랄하면 항복할 거야?’ 했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혼을 냈다.
선우는 뜬금없이 혼이 나고도 그것마저 우스워 픽 웃었다.
“누구든 시비 털면 그냥 패라. 이 형이 또 합의는 귀신같이 본다.”
미쳤는지 저 말이 멋졌다. 뒤는 제가 봐줄 테니 마음대로 살라는 말처럼 들려서. 조금 찡하기까지 했다. 생글생글 웃는 낯의 선우가 범의 볼에 쪽 하고 뽀뽀했다.
“형, 저 그때 우리 갔던 데 가고 싶어요.”
“어디?”
“그, 카섹스 명소요.”
***
무더운 여름밤, 해는 늦은 저녁까지 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선우가 차창 너머 하늘을 보며 질척이는 게 딱 범 같다,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나와 시간대 때문인지 도로가 꽉꽉 막혔다. 드라이브가 드라이브가 아니었다. 거북이처럼 찔끔 가다 서고 또 찔끔 가다 섰다.
온종일 긴장 상태였어 그런지 가는 길이 너무 피곤했다. 집에서 하루 종일 빈둥빈둥했다면 꽉 막힌 도로도 마냥 재미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나 구경하던 것도 잠시 선우는 하품을 하며 지루해했다. 제가 먼저 가자고 했지만 막상 출발하니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배 속에 든 오리 때문에 체력이 두 배로 닳는 것 같았다.
선우는 피곤이 묻은 눈으로 제 손이 올라 있는 범의 앞섶을 보았다. 불룩 텐트가 쳐져 있었다.
‘신명 났네, 신명 났어. 번복하면 죽이겠지?’
제가 카섹스 명소에 가자 했을 때, 범의 반응이 생각났다.
범은 오늘을 제 생일로 하겠다며 저는 오늘부로 다시 태어났다 헛소리를 했다. 자기가 데려가 주는 입장이면서 참 좋아했다.
선우가 나른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좀 지루해도 참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출출해? 간식 좀 살까?”
“간식이요? 간식 뭐요?”
선우는 그게 뭔지 어디 한번 들어는 봐 준다 하듯 무심히 되물었다. 사실은 흥미로워 죽겠는 주제였지만 방금까지 축 처져 있던 사람이 간식 이야기에 눈을 반짝하기가 조금 창피해 그랬다.
오리는 도대체 얼마나 쑥쑥 크려는지, 입맛이 너무 좋았다. 제가 식욕은 있어도 식탐이 있지는 않은데, 선우는 범에게 온전한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제가 간식 하나에 엄청 동요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피식 조소를 날렸다. 어울리지 않게 웬 이미지 관리냐 싶었다. 식충이로 보면 그러는가 보다 하면 될 걸. 제가 범을 정말 좋아하긴 하는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하……. 새침 씨발.”
범은 차 세울까? 라고 중얼거리다 신호가 걸리자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여보, 오리랑만 놀지 말고. 나도 좀 봐. 얘도 애기야. 오늘 다시 태어났잖아.”
범이 제 앞섶에 올라 있는 선우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얹었다.
선우가 그 손에 시선을 던졌다. 손이 참 컸다. 투박하고 거친데 손가락이 길어 그런지 멋지기만 했다. 손이 크면 거시기도 크다는 건 낭설이랬는데, 범을 보면 아주 근거 없는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거시기가 커서 손이 큰 건가?
어찌 됐든 간에 실로 멋진 남자의 손을 하고 뱉는 소리가, 어우 징그러. 품종 개량을 잘못했나 보다. 본인 입으로 애기라 주장하는 고추는 실로 거대했다.
선우가 한심하단 눈빛을 보냈다. 범은 아랑곳 않았다. 끈적한 눈빛으로 응수하며 찡긋 윙크했다.
“양심이 있으신 거예요? 애기는 이게 무슨.”
선우는 후 한숨을 쉬며 차마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뭐 양심? 오빤 말이야, 너한테 이미 마음을 다 줘 버려서, 양심에 쓸 마음이, 헙!”
선우가 범의 성기를 콱, 하고 눌러 그의 말을 멈추었다. 조용히 하시면 더 해 줄게요, 하고 무심히 말했다.
범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오빠가 아주 따-악 닥칠게, 오빠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시끄럽게 굴더니 곧장 입에 지퍼를 채우는 모션을 취했다. 그러다 눈동자를 굴려 선우를 흘긋거리더니 ‘신음은 돼?’ 하고 퍽 진지하게 물었다.
그가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우스워 선우가 픽 웃었다.
“신음은 되는데 뜻 있는 말은 안 돼요.”
“예, 사모님! 똑바로 하겠습니다!”
범은 묵언 수행을 하며 하, 하아, 뜨거운 숨을 뱉었다.
선우는 신호가 걸렸을 땐 세게 주무르다 신호가 켜지면 잠시 멈추었다. 사고가 나지 않게 강약 조절을 확실히 했다.
범은 신호가 걸릴 때마다 선우에게 열렬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자꾸만 입을 뻐끔거렸는데 선우가 허락지 않으니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선우는 범이 제 말을 잘 들으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그 충성심에 감복하여 선심 쓰듯 무슨 할 말이 있냐 물어 주었다.
“하……. 아니, 너는 운전도 잘하겠다고.”
“네?”
뜬금없는 소리였다. 나 운전하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지? 선우가 약간의 설렘을 담아 ‘왜요?’ 하고 물었다. 제 어떤 면이 운전을 잘할 것 같은지 어디 한번 편히 말씀해 보시라고 범을 따숩게 바라보았다.
“기어를 잘 바꾸네, 어흐.”
선우가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범의 앞섶에서 팩 손을 떼어 버렸다.
“아, 왜! 네가 말해도 된다며! 나 마누라 말 잘 들었는데!”
“형, 골 울려요.”
“뭐? 골이 왜 울려!”
범이 선우의 이마에 척 손을 얹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며 어디 아프냐 진심으로 걱정했다.
“형이 시끄러워서요.”
범은 잠시 눈을 끔벅이더니 아, 했다. 그러곤 미안, 하며 시원스레 사과했다.
제 잘못도 남한테 뒤집어씌울 것 같은 사람이 안 비겁해서 좋았다. 선우가 픽 웃으며 오리에게 저런 모습은 좀 본받으라 전했다.
범의 볼에 뽀뽀해 주었다. 그러자 그가 씩 웃었다.
“오리야, 너네 엄마 예쁜 짓 하는 거 좀 본받아라. 자다가도 떡이 생길 거다.”
***
선우는 뽀뽀 한 번을 해 주고 떡 대신 햄버거를 받았다. 이번엔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를 경험했다. 지난번엔 스타벅스였는데, 이제 서울 사람 다 됐다고 할머니께 우쭐거려야겠다.
범은 모자란 것보단 남는 게 낫다며 이것저것 많이도 시켰다. 덕분에 선우는 한 보따리를 품에 안았다. 범이 해피밀인가 뭔가를 시켜 장난감도 받았다. 오늘 다시 태어난 자기도 애랍시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우리 오리 것도 사야지.’ 하며 선우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빠 노릇을 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 감동이었다.
선우가 아기자기한 해피밀 박스를 구경했다. 해피밀엔 우유를 주었는데 범은 우유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훈훈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눈썹을 올리며 ‘아직 까지 말고 잘 놔둬 봐.’ 했다. 그냥 까서 벌컥벌컥 다 마셔 버릴까 보다. 선우가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허나 자두 칠러에 온 마음을 빼앗겨 우유는 가만두었다. 범이 두라 그래서 둔 건 아니라고 혼자 속으로 짚고 넘어갔다.
새콤달콤한 음료를 빨며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니 피곤이 조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선우는 내친김에 장난감도 조립했다. 사실 조립할 것도 없이 뚝딱 만들어지는 조그마한 자동차였다. 스티커도 붙이라는 대로 다 붙이고 완성품을 요리조리 살폈다. 오리의 첫 장난감이었다. 뿌듯함에 광대가 절로 올라갔다.
그나저나 오리가 이걸 가지고 놀 때까지 안 잃어버릴 수 있을까?
아주 아기 때는 아무거나 입에 넣으니 안 될 것 같고, 못해도 다섯 살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사이에 이사라도 가면 이런 건 없어지기 십상이었다.
“저기 형.”
“응?”
“우리 집, 형 자가죠?”
범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선우를 돌아보았다.
“와, 그럼 형이 가오가 있지 월세 사냐?”
“아 그냥 물어본 거예요.”
범이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걸고 선우의 볼을 콕콕 찔렀다.
“너 장가 아주 잘 왔지?”
“네.”
“명의 바꿔 줄게.”
“네?”
선우가 깜짝 놀라자 범이 아주 호방하게 당연하지! 했다. 집은 마누라 줘야지, 하고 되게 멋지게 말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조심스레 조건을 내걸었다. 공짜는 아닌 모양이었다.
“저기 그럼, 감자튀김으로 빼빼로 게임 한 번만 해 주면 안 되냐?”
“어차피 뽀뽀할 거 여러 번도 해 드릴게요.”
부창부수라고 선우도 아주 호방하게 화답했다.
범은 오늘 아주 여러 번 새로 태어난다고 좋아했다.
선우는 방정을 떠는 범을 두고 오리의 장난감을 소중히 챙겼다. ‘엄마~ 내 양말 한 짝 없는데?’ 하고 엄마를 찾던 때가 떠올랐다. 너 찾아보긴 하고 없다 그러냐, 잔소리를 하며 1초 만에 찾아 주던 엄마. 죽어도 안 보이던 물건을 후딱 찾아 주는 엄마가 참 신기했는데, 저도 오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선우가 잠시 추억에 잠겼다.
“여보.”
범이 나지막이 선우를 불렀다. 퍽 은밀한 투였다.
“그거, 내 몸에 굴려 줄 거야?”
감동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설레어 죽겠다는 범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선우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으며 참나, 했다.
“오리한테 허락받으세요. 오리 거잖아요.”
***
도착하니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여전히 황량한 게 참 마음에 들었다.
선우가 기지개를 켰다. 차 안에 갇혀 찌뿌둥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한 바퀴 슬슬 산보나 해 볼까 하여 안전벨트를 푸는데 풀자마자 범이 달려들었다.
선우가 어어! 하며 당황했다. 아무리 카섹스 명소에 오자고 했기로서니, 진짜 그 짓만 하러 왔나?
툭, 팍! 하는 소리에 좌석이 뒤로 넘어갔다. 선우는 잠시 주춤했지만 저도 함께 달려드는 편을 택했다. 하자고 온 거 맞는데 뭐, 뺄 것도 없고.
범은 좋은 냄새가 나는 손으로 날개가 돋친 양 선우를 만져 댔다. 손만큼 입술도 바빴다. 마구 침을 묻히며 키스했다. 물에 빠져 어푸어푸하는 느낌의 키스였다. 코를 물고 쭉쭉 빨기도 했고 입술을 잡아먹느라 턱이 빠지는 듯했다. 질퍽질퍽 쩝쩝한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범이 선우의 옷을 다 찢어 버릴 기세로 벗기기 시작했다. 그에 선우가 범을 팡팡 때렸다. 놓아주지 않는 입술 사이로 ‘형.’ 소리가 ‘혀으.’ 로 나왔다. 그래도 알아듣긴 했는지 범은 선우의 아랫입술을 물고 에? 했다. 왜? 일 것이다.
“옷 너무 세게 당기지 마세요.”
회장님 댁에 인사를 간다고 새로 장만한 옷이었다. 연한 베이지색의 여름 정장. 이렇게 희생되기에는 아까웠다. 업소에서 입던 휘황찬란한 벨벳 슈트도 아니오, 망사나 실크 셔츠도 아니었다. 그런 옷이 아니고서는 정장을 입어 볼 일이 없어 어찌 보면 선우에겐 제대로 된 첫 정장이었다.
“마누라 옷은 찢으려고 사 주는 건데.”
범의 진심 어린 표정에 선우가 정색했다. 근데 범이 사 준 건 맞아 제 맘대로 한다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금 우악스런 손길이 예쁜 새 옷에 내리기 시작했다. 지익- 하면 내려가는 부드러운 바지 지퍼에서 찌익- 하는 소리가 났다. 고장 났을 게 분명한 소리였다. 그 뒤로 투둑 실밥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아, 아까워.’
아직 배도 얼마 안 나와서 큰 사이즈를 살 필요도 없었다. 나중에 두고두고 입을 수 있는 옷이 허망하게 운명을 달리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선우에게 퍼뜩 할 말이 떠올랐다. 아! 하고 다시 범을 팡팡 때렸다.
제 가슴팍에 머리통을 파묻은 범을 형, 형, 하고 불렀는데 범이 얼굴을 떼지 않은 채로 푸스스 웃었다. 야옹야옹하는 거 같다고 중얼거렸다. 혼자 좋아 죽더니 ‘주먹 쥐고 때려 줘 봐.’ 같은 소릴 했다. 선우는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었다.
“사서 줬으면 이제 제 거잖아요…….”
제가 사 준 옷이라고 제 맘대로 하려는 범에게 항의했다. 범이 마누라 옷이 어쩌고 하던 순간에 받아쳤어야 하는데, 이제야 생각나 이제야 말했다. 근데 막상 뱉고 생각해 보니 다 끝난 얘기를 물고 늘어지는 좀생이 같아서 말끝을 흐렸다.
“부부 사이에 네 거 내 거 따지면 오빠 아주 서운해, 어?”
“…….”
이는 선우를 더욱 좀생이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었다.
할머니가 나누고 베풀랬는데. 아, 그러다 네가 제일 중요하다, 네 건강이 먼저다, 하며 말을 바꾸시긴 했다. 그러고 보니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보았다.
“아니다! 따져. 네 거 내 거.”
범이 수상한 눈빛을 매달고 말을 바꿨다. 눈썹이 춤을 추고 있었다.
저러니 갑자기 따지기 싫어졌다. 선우는 저를 찢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에 그냥 옷을 내어 주기로 했다. 됐어요, 안 따질게요, 하려는데 범이 한발 빨랐다.
“난 네 거. 여보, 날 마음대로 주물러 줘.”
선우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질 수 없다 생각했다.
“제 거니까 아껴 줄게요.”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선우는 언제 풀어 헤쳤는지 모를 범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앞섶은 쉬이 잠기지 않을 것 같아 바지는 놔두고 대신 셔츠를 여몄다. 그러자 범이 저를 또라이 보듯 보았다. 먼저 카섹스 하자고 꼬신 주제에 햄버거만 받아먹고 튀는 중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끼면 똥 된다.”
“형 똥 되실 거예요?”
범은 신랑한테 똥이 뭐냐고 발끈하다가 ‘코오- 너 근데 입 좀 턴다?’ 하며 감탄했다. 똑똑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선우는 그와의 의미 없는 입씨름에서 이긴 게 조금 뿌듯했다. 광대를 볼록 올렸다. 에이 기분이다, 하며 다시 그의 옷을 벗겼다.
그에 범이 환히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천진난만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진짜 오늘 다시 태어났나? 아기 같기도 하네.
“형, 우리 뒷좌석으로 가요.”
나신으로 엉겨 붙은 둘이 차 안을 달구었다.
범은 퍽 설레는 표정으로 해피밀을 사고 받은 우유를 땄다. 오리 준다고 사는 거라며 달콤한 말을 잘도 하더니. 저 좋은 짓만 했다.
선우는 범을 조금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범이 이 짓을 하겠다고 ‘한 번만.’ 하며 손이 발이 되게 빌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야오야, 오구구구 하며 이상한 소리로 달래고 있다.
선우는 제게 허락을 받는 게 대견하면서도 저 같으면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안 하겠다 싶었다. 그러니 표정이 애잔해질 수밖에. 구태여 해야겠냐,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런 거 한 번 하게 해 주면 선물이 따로 없다고 좋아하니 선우도 좋았다.
에이, 또 기분이다.
선우가 범의 검지손가락을 들어 우유에 푹 적셨다. 그러곤 혀를 길게 빼어 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손가락을 타고 내리는 우유 줄기를 핥아 올렸다.
범은 멍청한 표정으로 선우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쩍 벌린 입에선 곧 침이 떨어질 것 같았다.
“와……. 씨발.”
익숙한 욕지거리였다. 근데 좀 더 격했다. 쒸이-발. 아, 발이 아니고 빨인가? 하여간 된소리가 거세게 났다. 거세게 꼴린다는 뜻이겠지? 범은 선우의 가슴팍에 흘리겠다던 우유를 제 자지에 부으려 했다. 자기가 라임 맛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헛소리를 했다.
라임 맛 우유? 으, 안 어울리는데. 선우가 구시렁거려 보았지만 무시당했다. 그는 오두방정을 떨며 여기에도 해 달라고 아주 성화였다.
그때 범의 전화가 울렸다. 다행히 우유를 흘리기 전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엄청 울려 댔는데 그렇게 무시를 해도 계속 오는 걸 보면 급한 일인 듯했다. 범은 아오! 하며 제 열 받음을 표출했다.
“받아 보세요. 읍!”
범이 선우가 할짝거리던 제 손가락을 아예 쑥 물렸다. 선우는 범을 작게 쏘아보았지만 그래도 할 건 해 주었다. 펠라 하듯 그의 손가락을 쭙쭙 빨았다.
피식 웃은 범이 선우의 볼에 쪽 뽀뽀했다. 선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전화를 들었다.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깜박인다고 뭐 대단한 장면을 놓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선우도 피식 웃었다. 제가 웃으며 손가락을 빨아 주자 범의 행동이 다급해졌다. 귀찮게 구는 전화를 얼른 받고 치워 버리려는 것 같았다.
***
치우긴 개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우는 집, 범은 경찰서.
범은 돌아오는 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선우를 달래다 선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제 머리를 퍽퍽 때렸다. ‘전화는 밖에 나가 받아라, 이 멍청한 새끼야.’ 하며 자책했다.
경찰서에 갈 일을 만들지 말아야지, 전화만 밖에 나가 받으면 다인가. 선우의 표정이 더 썩어 들었다.
범이 선우의 눈치를 보며 미안, 했다.
깜깜한 밤, 고요한 차 안에서는 범에게 전화를 건 이의 음성이 선우에게까지 어렴풋이 닿았다. 디테일은 못 들어도 핵심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범이 신고를 당해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빤 마누라 옥바라지 안 시킨다. 걱정 마라.”
오빠는 얼어 죽을 오빠, 선우가 범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혼잣말을 했다. 선우의 냉담한 반응에 범이 다시 제 머리를 쳤다.
“아오, 유범이 이 미친 새끼. 아니아니, 유랑이 이 씨발새끼.”
범의 주먹질이 너무 거세어 선우는 그제야 눈길을 주었다. 범을 말렸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 왜 때리고 그래요, 했다. 속 썩이는 게 밉기는 미운데 그는 자기 머리도 너무 자비 없이 때려 걱정이 되었다.
‘나도 안 때리면서 왜 저는 때리냐.’
선우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다쳐요, 하지 마요, 했다.
“역시 내 걱정해 주는 건 마누라밖에 없다. 형이 평생 잘할게.”
“감옥 가서 어떻게 잘해요?”
“거참, 감옥 안 간다니까. 어이구, 내 새끼 형아 걱정됐어요?”
범이 옹졸한 모양으로 입술을 내밀고 우쭈쭈쭈 소리를 냈다.
“진짜 죽을래요?”
선우는 제가 범에게 내뱉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뱉어 버렸다. 남은 걱정되어 죽겠는데 놀리니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할 말도 못 하고 살았는데, 이젠 못 할 말을 했다. 이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어디서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고 요단강을 건널지도 모른다. 선우는 혀가 뽑혀 운명을 달리하는 저를 상상했다. 본인은 슬프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슬퍼할 모습은 떠올랐다.
범처럼 살아도 되는 힘도 없으면서 자꾸 범을 닮아 가는 것도 어찌 보면 문제였다. 뱉어 놓고 조금 쫄은 선우가 슥 눈치를 보았다. 범은 씨익 웃고 있었다. 무섭네, 했다.
‘하나도 안 무서우면서.’
“우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되는데?”
범의 말에 선우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했다. 그러곤 머지않아 입을 뗐다.
“형, 우리 엄마는 아빠가 도박을 해서 집을 나갔어요. 제 손을 꼭 잡고.”
저라고 오리 손 못 잡겠어요? 선우가 심드렁히 말했다. 차분한 협박이었다.
범은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고 기함했다. 제 협박 따위가 먹히기나 할까 했는데 이제야 경각심이 조금 드는가 보았다.
‘사모님, 한 번만 살려 주시면 평생 사모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하고 말은 잘했다. 발닦개도 하랴, 종도 하랴 아주 바쁘시겠다.
물론 무서운 척해 주는 거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선우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범도 쫄게 만드는 게 저인데 멋대로 좀 살면 어때. 마구 떵떵거리고 싶었다.
선우는 으스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무뚝뚝하게 빨리 오세요, 했다. 범이 피식 웃으며 선우의 볼을 꼬집었다.
“오냐, 걱정 마라.”
선우가 작게 끄덕였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불안한 마음이 다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리야, 너도 아빠 빨리 오세요, 해.’
“그나저나 우리 장모님이 되게 화끈하시네? 여보가 누굴 닮아 이렇게 화끈한가 했더니.”
범이 느끼한 눈빛을 매달고 선우의 사타구니 사이를 주물럭거렸다. 선우가 픽 웃었다. 엄마 칭찬은 듣기가 좋았다.
‘우리 엄마 되게 멋있죠? 엄마가 집 나오던 날 슈퍼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줬어요. 할머니는 아주 잘 나왔다 그러고. 야반도주도 아니었어요. 아빠가 대낮부터 카지노에 꼬라박혀 있으니까 해가 훤할 때 집을 나가는데도 몰랐다니까요.’
선우가 속으로 재잘거렸다. 범에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입술만 달싹이다 그냥 하지 않았다. 제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게 어색했다. 앞서 협박을 위해 했던 말도 거의 처음이지 싶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아?”
“아니에요.”
“왜, 뭔데. 너 이러면 형이 아주 서운해. 내가 또 이선우 베스트프렌드 아니냐고, 어?”
“아, 별말 아니에요.”
“네 말은 다 별말이야. 특별해.”
말해 보라는 범의 꼬드김에 선우는 ‘그냥 우리 엄마 멋지다고요…….’까지만 말했다. 쑥스러워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헌데 가타부타 설명 없이 저렇게만 말하니 범이 놀렸다. 엄마 찌찌나 찾는 애새끼 취급을 했다. 그의 놀림이 ‘우르르 까꿍’까지 갔을 때, 한 대 때렸다. 그의 원대로 주먹을 쥐고 때려 주었다.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범은 ‘씨발, 솜방망이.’ 하면서 좋아했다. 선우의 주먹을 끌어가 함냐함냐 먹는 시늉을 했다.
손가락뼈에 맞아 딱 소리가 났는데 웬 솜방망이. 선우가 참나,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지? 오빠가 찌찌는 먹을 게 없고, 대신 이건 맛있는데.”
범이 끌어갔던 선우의 주먹을 제 앞섶 위에 올렸다. 선우는 주먹을 쥔 채로 거시기도 한 대 쥐어박았다. 그에게서 어흑!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만질 기분 아니에요.”
“…….”
범이 웬일로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저런 소리 좀 한다고 기죽을 사람이 아닌데, 되게 심각한 표정을 했다.
‘안 만져 주는 건 좀 너무했나? 그 맛에 운전한댔는데.’
선우의 마음이 약해지려 할 때, 범은 슬쩍 선우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빨 기분도 아니겠지?”
선우가 풉, 하고 웃었다가 바로 아씨, 했다. 아씨, 웃으면 안 되는데. 화를 내야 하는데 왜 웃음이 나고 난린지 몰랐다.
범이 선우의 뺨을 살살 쓸었다.
“그래, 우리 마누라는 웃는 게 예뻐.”
선우가 작게 우웩- 했다. 그래도 입꼬리는 씰룩거렸다.
“조사만 받고 나오는 거야. 이 형이 또 짬이 있잖냐.”
“그런 짬은 좀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
범은 대꾸가 없었다. 대신 선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신호가 걸릴 때마다 선우를 빤히 보았다.
‘사실은 큰일이라도 난 게 아닐까?’
불안해진 선우가 범과 눈을 맞췄다. 줄곧 저를 바라보고 있던 범이 사랑해, 했다. 이번엔 토하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목소리가 듣기 좋아 그냥 두었다.
***
범을 신고한 이는 랑이었다. 동생에게 처맞았다고 경찰을 불렀다. 기절했다 깨어나자마자 병원도 안 가고 112부터 찾았단다.
덕분에 선우와의 카섹스가 물거품이 되었다.
범은 선우를 집에 내려 주고 미친놈처럼 웃어 젖혔다. 차라리 칼춤을 추지, 이 멍청한 새끼.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볼세라 발악하는 듯한데 형은 가만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걸 몰랐다. 하긴 아버지 앞에서 개쪽을 당했으니 저도 물 줄 안다, 시늉이라도 해야 했을 거다.
‘씨발놈, 이빨을 다 뽑아 버려야지.’
범이 실실 웃으며 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우리 피해자 형님 조사는 다 받으셨나?”
[덕분에. 우리 피의자 동생은 바쁘실 텐데 어떻게 전화를 다 주셨나? 합의 보시려고? 이 마음 넓은 형님은 합의해 줄 의향이 있는데, 어때? 들어 볼래?]
“이런, 합의를 다 봐 주시려고요?”
[그럼, 말이라고. 동생인데.]
가식의 향연인 통화가 이어졌다. 범을 따라 랑도 실실 웃었다.
[그러게, 너무 날뛰었다 동생아. 좋은 시간 보내다 분위기 깨서 아주 미안하네?]
범은 미행이 붙은 걸 알고 있었다. 쫓아와도 상관이 없어서 놔둔 거였다. 어차피 못 덤비고 덤벼도 이긴다. 꽤나 거리를 두고 티 나지 않게 따라붙긴 했지만 그 황량한 곳까지 따라오는데 누가 모르나. 아, 우리 둔팅이는 몰랐다. 그래 놓고 예민한 척 팩 쏘아보면 존나게 귀여웠다.
범은 형과의 통화 중 선우가 떠올라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와, 미행도 붙였어? 우리 형님 무섭네.”
[미행이라니. 그냥, 우리 동생 뭐 하고 사나 해서.]
범은 랑이 약간의 승리감을 맛볼 때까지 모르는 척 가지고 놀았다. 몰랐구나? 하길래 그러게 그걸 몰랐네, 했다.
그러다 유랑이 새끼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즈음 말했다.
“김재철이, 박태웅이 붙였더만. 사생팬이냐, 이 씨발놈아? 니 옛날에 가수 하나 쫓아다니다 신고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구나.”
실화였다. 랑은 이십 대 초반에 웬 가수에 미쳐 ‘도를 넘은 사생팬’이라는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돈은 돈대로 갖다 퍼 주고 애인이라도 되는 양 집착을 하다 신고를 당했다.
범은 ‘씨발, 사생팬이 뭔데?’ 하며 찾아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합의는 무슨 합의. 너는 어째 내 좆대가리만도 못한 대가리를 달고 사냐? 너 김 회장인가 뭐시깽이랑 라운딩 돌고 다니지?”
[……아이고, 우리 동생도 형님 뭐 하고 사나 궁금했나 보네?]
랑은 안쓰러울 만큼 초조해 보이는 여유를 부렸다. 김 회장은 카지노의 지분을 꽤나 가지고 있는 대주주였다. 요즘 랑이 아버지 다음으로 똥꼬를 빨기 바쁜 인물이기도 했다.
“아니. 난 네가 뭐 하고 사는지 좆도 관심이 없어요. 그냥 엿 먹일라고 알아본 거지.”
[…….]
“내가 이번에 경찰서 가는 김에 다 털어놓으려고. 우리 형님 김 회장 모시고 성접대 하시고, 놀다가 접대부 머리통에 술병 깨시고, 아주 지랄을 했더만. 노블레스는 장부만 존나게 나눠서 좆 빠지게 탈세를 하시더니 그거 다 김 회장 똥구멍에 박아 줬더라?”
[……참나, 세금 가지고 털면 깨끗한 집 없다.]
랑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자 범이 푸하하 웃었다.
“난 성실 납세야, 이 씨발놈아. 그리고 너는, 어? 돈을 먹일 거면 깨끗이 빨아서 먹여야 될 거 아니냐, 이 빠가사리야. 이 돈세탁도 안 하는 투명한 새끼.”
[…….]
“알지? 나 지금 경찰서 가도 조서 한 장 쓰고 바로 나온다. 그거 모를 정도로 무식하진 않잖아, 그지? 경찰서 나와서 네 강냉이 다 털어 버리러 갈 테니까 딱 기다려라.”
범은 제 할 말만 하고 뚝,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선우에게 문자를 넣었다.
「오빠 마음이 다쳤어요. 이따 치료해 주세요*^^*」
곧장 답장이 왔다. ‘ㅁㅊ’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범이 운전 중인 준석에게 무슨 뜻인지 물었다.
“미음 치읓이요? 미친이요 형님, 미친.”
“뭐, 미친?”
어흐, 나한테 미친다는 건가? 범이 혼잣말을 했다.
준석은 아니요, 그냥 미쳤다는 건데요, 하고 알려 주지 않았다. 간지러운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선우가 애기긴 애기다, 엉?”
준석은 형님이 늙으신 것 같다, 는 말도 꾹 참고 하지 않았다. 그냥 ‘예! 그렇습니다, 형님!’ 했다. 그래도 준석은 범을 본받고 싶었다. 경찰서에 가신다는 분이 참 싱글벙글했다.
하여간, 인생 한번 멋지게 사는 분이다.
***
선우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다락에 은둔했다. 범이 안방에서 자고 있든 쉬고 있든 하랬는데 매정하게 싫어요,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별채가 웅성웅성했다. 조직원들이 야심한 시각에 마당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엄마를 불렀다.
‘같이 기다려 주라, 엄마. 나 외로워.’
지잉- 하고 울리는 문자 소리에 선우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범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나도 여보한테 ㅁㅊ」
뭐래, 하고 혼잣말을 뱉었다. 그런데 곧바로 전화도 왔다. 이럴 거면 전화로 한 번에 말하지 문자는 왜 했나 몰랐다.
“네, 형.”
[네 신랑 지금 간다. 아주 아-무 일도 아니니까 이렇게 금방 가겠다, 그치?]
선우는 심드렁히 네, 하곤 혼자 씩 웃었다. 다행히 기다림은 오래지 않았다. ‘엄마, 이제 온대.’ 하고 엄마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범이 10분 남았어, 9분 남았어, 하며 도착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카운트를 셌다.
“됐고, 빨리 오기나 하세요. 끊을게요.”
[야! 야! 선우야!]
“왜요?”
[뭐 사가?]
묻는 말이 다정도 했다. 선우는 자두요, 하고 뚝 끊었다. 이 밤에 자두를 사 오라 한 건 나름의 투정이었다. 속 썩였으니 그냥 넘어가긴 싫어서. 못 사 와도 노력은 할 사람이니 구박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선우가 은신해 있던 다락을 빠져나왔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뒤졌다. 좀처럼 부엌살림에 먼저 손을 대는 일이 없는데 범에게 꼭 챙겨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어, 있다! 선우가 냉장고에 있던 두부를 발견했다. 접시 하나를 꺼내 두부를 올려놓고, 식탁에 앉아 범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자두는 괜히 사 오라고 한 것 같았다. 분명 10분도 안 남았다 그랬었는데, 자두 때문에 도착만 더 늦어지는 듯했다. 선우는 범을 힘들게 하려다 도리어 제가 더 힘들어짐을 깨닫고 후회했다.
심보가 못돼 처먹으니까 벌을 받지, 하며 자책하려는 순간 범이 현관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왔다. 그가 일러 줬던 도착 시간에서 아주 많이 늦진 않은 시각이었다.
자두 안 사고 그냥 왔구나, 싶었는데 범의 손엔 검정색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선우가 씩 웃었다.
“너는 서방 얼굴 보고는 웃어 주지도 않고, 봉다리 보고 웃냐?”
“그게 그거예요.”
범이 선우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선우는 군말 없이 쪽 뽀뽀해 주었다.
“왜 부엌에 나와 기다렸, 어?”
범은 질문을 하는 중에 두부를 발견했다. 그러곤 푸하하 웃었다. 아이고 선우야, 씨발 귀여워, 했다.
“왜요. 먹어야 다신 안 가죠.”
“여보야, 두부는 빵에 갔다 나왔을 때 먹는 거고. 이 경우엔 육개장인데? 유치장은 육개장이야.”
“유치장도 들어갔다 왔어요? 말 한 마디만 하고 오면 된다면서요!”
“아니 안 갔는데, 굳이 경우를 나누자면 그렇다 이 말이지.”
범이 침착하게 답하기에 선우는 흥분을 거두고 아, 했다.
“말 나온 김에 먹을까?”
“……네. 한 반 그릇만.”
***
와, 서울은 배달이 안 되는 게 없었다. 선우는 배달로 도착한 육개장을 신기해하며 후루룩후루룩 국물을 떠먹었다. 햄버거를 먹어 배는 불렀는데 속이 좀 느끼했어서 그런지 잘도 먹혔다.
범은 먹는 둥 마는 둥 선우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선우가 국그릇에 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이건 범이 먹어야 해서 먹는 건데 제가 너무 먹었나? 좀 민망했다.
“왜 쳐다봐요?”
“선우야.”
퍽 진지한 목소리였다. 선우는 범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어 빤히 눈을 맞췄다. 어려운 눈. 많은 걸 담고 있는 눈이었다. 그게 어른 같았다. 범은 어른의 눈을 하고 차분히 말했다.
“형 깡패 하지 말까?”
선우는 범의 말을 잠시 곱씹어 보았다. 무슨 뜻일까? 농은 아닌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백수 하실 거예요?”
“아니. 주부.”
“집안일 못하시잖아요.”
“집에 아줌마들 있는데 집안일을 왜 해.”
“그럼 백수잖아요.”
범은 선우의 냉정한 반응에 산통이 좀 깬 듯 보였다. 진지했던 얼굴을 거두고 불만스럽다는 티를 팍팍 내기 시작했다. 백수면 좀 안 되냐 구시렁거리다 ‘서방님이 분위기를 타-악 잡고 말씀을 하시는데 말이야.’ 하며 무드가 없다고 선우를 타박했다. 그러곤 되게 유치하게 ‘나 돈 많아! 좀 놀아도 돼!’ 하고 울컥도 했다.
선우는 맹한 표정으로 쩝, 입맛을 다셨다. 뜬금없이 깡패를 안 한다는 게 말 그대로 안 한다는 거구나. 물론 깡패라는 게 선우에게도 그리 달가운 직업은 아니었다. 위험한 일도 많을 테고 오늘처럼 언제 또 경찰서를 들락거릴지 몰랐다. 경찰서까지만 가면 그나마 다행이지. 감옥이라도 가는 날엔, 어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가업이 조폭이면 우리 오리는 또 어떡하나. 오리도 조폭이 되는 건가? 어휴, 이쪽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선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느라 바쁠 때, 마주 앉아 있던 범은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의자를 빼 선우 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그는 한쪽 다리를 꼬고 껄렁껄렁 다리를 떨었다. 길고 두꺼운 다리를 떠니 위협적이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미는데 왠지 돈 갚으란 소리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징징이었다. 그는 계속 구시렁거렸다.
“오빠 너무 감동이에요옹~, 은 못 해 줄망정. 내가 뭐, 마누라한테 나가서 돈 벌어 오라 그러겠냐?”
범은 콧소리까지 내어 가며 자신이 보고 싶었던 선우의 반응을 실감나게 재연해 주었다. 아무리 높여도 낮은 목소리였다. 하나도 간드러지지 않고 도리어 더 무서웠다.
오리가 배 속에서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다. 선우는 ‘알았어요, 알았어.’ 하며 그를 대충 달래었다.
“이거 아주 순 건성이야. 나의 이 뜨거운 진심을 몰라주고 말이야. 가장이 기를 못 펴니까 이제는 아주 불알까지 쭈그러들겠어.”
“불알 탱탱하시던데요?”
“어흐, 그치? 거참 부끄럽게. 여보도 안 보는 것 같더니 다 봤나 봐?”
능글맞게 웃던 범이 퍽 비장한 투로 ‘그래도.’ 했다.
선우가 ‘그래도 뭐요?’ 하고 심드렁히 받아 주었다. 안 물어 줄까 하다 그가 진짜 서운해하는 건 싫어 물었다.
“그래도, 여보 궁댕이가 더 탱탱하다. 아, 아니다. 여보 건 빵실인가?”
범은 제 발언에 저 혼자 신나 했다. 선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찡긋 윙크도 했다. 선우가 제 신남에 공감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선우는 ‘궁댕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때부터 이미 정색 중이었다.
“엉덩이요.”
“그럼 히프?”
“아 엉덩이요.”
“빵빵하니까 빵댕이?”
“아 진짜! 엉덩이요!”
“자꾸 엉덩이, 엉덩이 하지 마라. 빨고 싶다.”
제가 먼저 궁댕이네, 히프네 했으면서. 짜증이 나서 국그릇을 엎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범이 선우의 불퉁한 볼에 쪽 뽀뽀했다. 담백한 어조로 ‘예쁘다.’고 말했다.
선우는 분하게도 마음이 풀려 버렸다.
“여보, 귀 대 봐.”
“아 그냥 말해요.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누가 들어요?”
“오리 듣잖냐. 쬐끄만 게 벌써부터 이런 거 들으면 발랑 까져서 못써.”
선우가 픽 하고 비웃었다.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언젠 입조심했다고 그러세요?’ 했다.
범이 안 속네,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봐,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냥 귓속말이 하고 싶은 거면서 오리 핑계는.’
선우가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 범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는 ‘아니……. 너한테만 말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멘트가 꼭 소녀 같았다. 날건달도 이런 날건달이 없을 것 같은 자세로 궁댕이가 빵실하다는 둥 아저씨 같은 희롱을 일삼더니 저랬다.
선우는 그의 감성을 저같이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귀엽긴 했다. 아, 가만 따지고 보니 그를 귀엽다 생각하는 저 자신도 썩 평범치 못한 것 같았다. 끼리끼리 잘 만났단 생각에 선우는 몰래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난 너하고만 말하고 싶은데!”
범이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키워 무데뽀처럼 강짜를 부렸다. 선우가 푸스스 웃으며 가만 귀를 대 주었다. 무슨 비밀 얘기를 그렇게 하고 싶으신지 들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불알 입에 넣고 굴려 줘. 거기 오리 동생들 들어 있어.”
범은 저딴 소릴 감미롭게 속삭였다. 선우가 어우어우, 하고 질색하며 꼬여 있는 그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왜 때려! 탱탱하다며! 해 주겠단 소리 아니었어? 때렸으니까 해 줘.”
“그냥 똑바로 앉으시라고 때린 거예요.”
선우는 퍽 얄미운 표정으로 ‘다리 꼬지 마세요. 자세를 바로 하셔야죠.’ 했다.
“아, 맞네. 바지를 내리려면 똑바로 앉아야지. 그치?”
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범은 사람이 창의적이어서 돈을 잘 버는 것도 같았다. 선우는 문득 그의 능력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백수를 하기엔 참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짜 바지를 내리려는 범의 손목을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저기 형, 근데…… 그래도 일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아요?”
“응. 밤일 낮에도 하고 살려고.”
“아 장난치지 말구요.”
“장난 아닌데. 형 깡패 그만하고 이선우랑 살려고.”
아, 놀고먹겠다는 게 아니고 나랑 산다는 거구나. 선우의 마음이 조금 찡해졌다.
“저 때문에 깡패 안 하시게요?”
“당연하지. 이 형이, 남은 여생 오로지 이선우를 위해 살기로 딱 결정을 해 버렸다.”
선우가 ‘뻐꾸기…….’라고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말만 그랬다. 광대는 씰룩씰룩한 지 오래였다.
범이 픽 웃으며 선우의 볼을 꼬집었다. 뻐꾸기란 소리를 들으면 발끈해서 따져 댈 줄 알았는데 갑자기 또 어른스레 굴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 다정하여 선우는 뻐꾸기란 못난 평가를 내린 게 미안해졌다. 그렇다면 그런 줄 좀 알지, 하여간 미운 말만 한다. 조금 후회를 하는데 범이 제 머리칼을 넘겨 주며 타이르듯 말했다.
“뻐꾸기 아니다. 형 믿지?”
선우는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답했다. 얼굴이 달아올라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제 얼굴색이 어떤지 다 보일 텐데, 범은 놀리지도 않았다. 머리를 쓸어 주던 손을 내려 뺨을 쓸어 주었다. 호호 바람을 불어 붉어진 얼굴을 식혀 주기도 했다. 그럴수록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마음만은 고마웠다.
선우는 그 앞에서 어린애가 되는 것 같은 자신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싫지 않아하는 자신이 또 부끄러웠다. 감정이 복잡했다.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고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그래도 일은 하세요. 가장이 백수는 좀 그래요.”
“그래? 일을 하는 편이 더 섹시하겠어?”
“네.”
“무슨 일?”
“무슨 일이든 요행을 바라지 않고 성실했으면 좋겠어요.”
범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우리 오리 엄마, 엄마 될 만하네, 하며 선우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가훈으로 삼아도 될 만큼 멋진 말이라고 했다.
선우는 쑥스러운 칭찬에 뒷목을 긁적였다.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대목은 진심이었는데, 너무 제 한을 담았나 싶어 민망하기도 했다.
“걱정 마라. 도박은커녕 형은 복권도 안 산다.”
“네.”
“근데 그거 알아?”
어른스럽던 그의 얼굴에 다시금 기름기가 돌았다. 눈썹이 마구 춤을 추는 걸 보니 대단한 멘트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이를 느낀 선우가 냉큼 철벽을 쳤다.
“아니까 말하지 마세요.”
“뭔데? 모를 텐데?”
“아 알아요. 말하지 마세요.”
어른의 여유를 보이던 범이 다급해졌다. ‘아니야 선우야, 진짜로 한 번만 들어 봐. 너 감동이 막 쓰나미처럼 밀려올걸? 어? 한 번만.’ 하며 요란스레 설득했다.
“형이 진짜 네가 안 들으면 후회할 거 같아서, 안타까워서 그래.”
선우가 작게 한숨을 쉬곤 어디 한번 말해 봐라 허락해 주었다. 어차피 허락해 줄 때까지 설득할 테니 포기했다. 닭살 좀 돋고 말지 뭐.
범은 큼큼, 목까지 가다듬으며 분위기를 잡았다.
“형은 이미 너라는 복권에 인생을 꼬라박았는데 말이야.”
“당첨이었다고요?”
선우가 냉큼 끼어들어 오만 가오를 잡고 말하던 범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그를 놀려 준 게 우스워서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범은 피식하더니 선우의 장단에 맞춰 같이 키득거려 주었다.
“잘 아네. 1등이더라고.”
웃다가 우연히 눈이 맞았다.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둘에게는 시간이 많으니 미래 같은 건 차차 설계하기로 했다.
선우는 일단, 제게 인생을 꼬라박았다는 남자의 터질 듯한 앞섶을 책임져 주고 싶었다. 제 입술을 혀로 핥으며 범에게 속삭였다.
“형, 바지 내려요.”
선우는 바지를 세상에서 가장 빨리 벗는 사람을 보았다. 그 모습에 제 행동도 같이 분주해졌다. 범의 중심을 허겁지겁 빨아 젖혔다. 추릅추릅, 기둥을 핥아 올리고 탱탱한 고환도 입에 넣어 굴렸다.
선우의 머리카락을 파고든 범의 손가락에 강한 힘이 실렸다. 범은 허으 씨발, 하며 앓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냉장고였다. 아직 미련을 떨치지 못했는지 우유를 꺼내 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우가 심드렁히 말했다.
“허연 거 곧 나올 텐데 뭘 또 부어요?”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범에게선 퍽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범은 선우의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췄다. 씨발 요 귀여운 거, 하며 마구 뽀뽀를 해 댔다. 선우는 얼굴에 묻은 침을 닦으며 약간 귀찮아했다.
“어휴, 여보도 참. 무슨 그런 야한 소릴 해.”
범이 앙탈을 부렸다. ‘오빠 부끄럽게.’ 하며 어깨를 흔들었다.
선우는 속으로 너네 아빠 아주 신-났다, 하며 범을 비웃어 주었다. 오리도 배 속에서 픽 하고 웃는 것 같았다.
“너무 섹시한 마누라를 끼고 살라니까 기가 아주 쏙쏙 빨리네?”
내용만 보면 투정인데 그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다. 잇몸이 다 마를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 마라. 네 오빠 양기가 아주 넘친다, 넘쳐. 끄떡없다.”
범이 찡긋 윙크를 보냈다.
그럼 애초에 기 빨린다 투정을 부리지 말든지, 선우가 구시렁거렸다.
“됐고요. 부을 거면 조금만 부어요. 먹는 걸로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장난이라니. 오빤 늘 진심이다.”
범이 진득한 페로몬을 풀며 제 성기에 우유를 흘렸다.
‘하아…….’ 선우는 작게 신음하며 다시금 범의 중심부에 머리를 박았다. 서너 줄기로 나뉘어 흐르는 우유를 혀로 하나씩 긁어 올려 주자 범이 으르렁거렸다. ‘우유에 말아 먹어도 맛있지?’ 하고 물었다.
참나, 무슨 코코볼이냐고. 선우가 범의 성기를 입에 물고 픽 웃었다. 생으로 먹는 게 더 맛있어요, 했다. 사실 큰 차이는 없었는데 다음부턴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그랬다.
“그래? 생물이 나아? 씻어 올까?”
선우가 범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곤 더 세게 빨기 시작했다. 그에 범이 더운 신음을 뱉으며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선우가 고갯짓을 하며 만들어 내는 침 소리와 범의 포효가 부엌 안을 메웠다.
“허윽……! 이런 씹……! 씹! 선우야! 선우야……! 으윽!”
범은 선우의 가슴팍에도 우유를 붓고 제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한 방울도 놓치기 싫다는 듯 게걸스레 빨았다. 달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저도 모르게 ‘진짜는 언제 맛보나.’ 하며 입맛을 다셨다.
선우는 범의 애무에 바르르 떨다 야무진 손바닥을 날렸다. 찰싹찰싹 때리며 꿈도 꾸지 말라 했다.
“지아비의 꿈을 짓밟지 마라!”
범이 따지고 들자 선우는 꿈도 꿈 나름이지, 하고 꿍얼거렸다. 꿍얼거려도 범은 다 들었다.
티격태격 실랑이가 오갔고, 그러다 또 눈이 맞았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를 3초.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온몸에 우유 칠갑을 한 둘이 후릅추릅 소리를 내던 부엌에 철썩철썩 소리를 만들어 냈다. 식탁을 침대 삼아 미친 섹스를 했다.
“윽! 으윽……! 씹……!”
“억! 억! 형! 형! 혀엉……! 어억……!”
***
다음 날.
선우의 입에선 노인네 같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으어으, 하며 골골거렸다.
선우는 할머니 댁으로 요양을 떠나기로 했고, 그 전에 우선 병원으로 향했다.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비실거리며 진료실로 들어서자 의사가 기함을 했다.
그길로 범과 선우는 성생활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의사는 섹스를 해도 된다고 했지 이렇게까지 해도 된다고는 안 했다며 아주 단호히 선을 그었다.
범은 결코 세게 하지 않았다고 억울해했다. 제가 기술이 좋아 애가 자지러지는 거지 실상 힘은 별로 안 주었다 했다.
선우가 그런 범에게 작게 손짓했다. 형, 이리 귀 좀 대 봐요, 하고 소곤거렸다. 범이 귀를 대자 여전히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닥쳐요.
초음파 검사를 하느라 배를 깠는데 키스마크가 울긋불긋 도배되어 있었다. 피멍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의사는 다시 한번 기함했고 범은 놀란 의사에게 이건 키스마크라고 쩌렁쩌렁 해명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오해는 피할 수 있었지만 선우는 창피했다.
다행히 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하여간 남자 오메가들이 부주의하다고 혀를 찼다. 남자라고 여자보다 체력도, 힘도 좋으니 그것만 믿고 조심을 안 한다 그랬다.
선우는 오리에게 미안해져 조금 풀이 죽었다. 내내 오리만 쳐다보느라 범의 미간이 꿈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범은 선생님과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선우를 먼저 내보냈다. 그 할 말이란 게 무언지는 몰라도 기다림은 찰나였다. 이럴 거면 왜 먼저 나가라고 했나 싶을 만큼 범은 금세 진료실 밖으로 얼굴을 비쳤다.
“선우야, 선생님이 잠깐 보자시네?”
선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진료실에 들어서자 선생님은 뜬금없이 사과를 해 왔다. 선우는 어리둥절했지만 괜찮다 전했다. 괜찮다는데도 두어 번 더 붙잡혀 사과를 받았다. 너무 어색했다.
선우는 누가 봐도 이상한 선생님의 행동에 범을 째려보았다. 범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굴었다.
‘협박을 당하고 계시다면 눈을 깜박여 보라고 할까?’ 선우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이만 범을 끌고 진료실을 나섰다. 빨리 떠나 주는 게 선생님을 위해 좋을 듯했다.
그렇게 병원을 나와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께 가기로 한 날이라 가는 건 아니었다. 선우의 결단이었다. 집구석에서 눈만 맞으면 그 짓을 못 참으니 오리를 위해서라도 물리적인 제약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요양을 가겠노라 범에게 선포했다. 선우는 망연자실한 범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뜻을 관철시켰다.
범과 선우가 뒷좌석에 오르고, 운전은 준석이 했다.
“우리 선우 오늘 저기압이다. 똑바로 하자, 엉?”
“네! 알겠습니다, 형님!”
준석은 입을 딱 다물고 기계처럼 운전만 했다. 과속 방지 턱을 부드럽게 넘기 위해 온 신경을 다했다.
범은 선우를 끌어안고 선우의 목덜미에 제 코를 비볐다. 애교를 부리는 중이었다. 거대한 호랑이가 여보- 여보- 하고 울었다. 어흥도 아니고. 그는 여보 나 한 번만 봐 줘, 여보 저 외로워요, 손 한번 잡아 주세요, 하며 질척였다.
삭신이 쑤신 선우는 그를 밀어낼 힘이 없어 그냥 뒀지만 골이 난 표정을 풀진 않았다.
섹스를 심하게 했다고 심통이 난 건 아니었다. 그건 솔직히 범만 잘못했다 볼 수 없었다. ‘어흑, 형, 형! 거기! 거기! 세게! 으윽……!’ 간밤에 제가 지른 소리를 떠올려 보면 제 책임도 컸다. 잠시 성욕에 눈이 멀었었다.
선우의 볼이 부푼 이유는 범이 오리의 첫 장난감을 부쉈기 때문이다. 범은 오리에게 ‘이 아부지가 좀 쓴다.’ 하며 통보 같은 허락을 받더니 코딱지만 한 자동차를 제 몸에 굴려 달라 했다.
물론 선우도 그 변태 짓에 동조한 건 사실이었다. 자동차를 입에 물고 범의 자지에 바퀴를 살살 굴려 주었다. 그래도 얼마 안 했다. 정말 조금만 해 주다 옆에 잘 챙겨 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리의 자동차는 멀쩡했다.
하지만 선우의 살뜰한 챙김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운명을 달리했다. 자동차는, 범과 선우가 엎치락뒤치락 격정의 섹스를 나누던 중 범의 날개 뼈에 찍혀 바스러졌다.
그런 게 살에 눌리면 분명 걸리적거리고 아팠을 텐데, 아프면 좀 저리 치워 놓고 마저 하든가. 범은 섹스에 환장해 자동차를 그대로 찍어 눌렀다. 제 무게로 온전히, 아주 무식하게.
바스러진 플라스틱 조각이 범의 어깨에 상처도 냈다. 아프지도 않았는지 거사를 다 치르고 나서야 발견했다. 조금만 주의하면 안 다쳤을 거를 다쳤다. 그러니 배로 속상했다. 선우는 속상한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아 범에게 냉랭하게 구는 중이었다. 범의 치댐을 무시하고 애먼 창밖만 보았다.
범이 불퉁하게 튀어나온 선우의 볼을 살살 핥았다. 쪽쪽 뽀뽀도 했다.
“이선우.”
범이 징징거리던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에 선우가 조금 흠칫했다. 솔직히 저도 언제까지 화를 내야 하는지 그 타이밍이 조금 애매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오래 삐졌나? 사람이 1절만 해야지 적당히 안 하면 달래는 이도 짜증이 나는 법인데.’
선우가 범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넌 진짜 왜 그러냐고. 그러다 범과 눈이 맞았다. 그는 계속 삐져도 된다는 듯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선우가 눈을 맞추는 내내 그 따듯한 눈빛엔 변화가 없었다.
“형이 미안. 잘못했어.”
“네. 괜찮아요.”
선우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하지만 괜찮다는 건 진심이었다. 저리 사과만 해 주면 정말이지 다 괜찮았다.
선우는 사근사근한 답변을 못 해 준 대신 범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했다. 선우의 입맞춤 한 번에 범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에 선우도 씰룩 웃었다.
“조금만 놀다 와라. 형 너 없으면 못 산다.”
퍽 멋진 음성이었다. 허나 오래가진 않았다.
이내 범은 ‘너도 나 없으면 못 살지? 그치?’ 하며 들러붙었다. 그래도 선우는 이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 사람이 내내 멋지면 부담스럽지.
선우가 맹한 표정으로 범이 제게 한 질문을 곱씹었다. 미안하지만 못 살 건 없지 않나 싶었다. 더한 일도 겪으며 사는 게 인생인데. 힘들긴 하겠지만 살기는 할 것 같았다. 할머니랑 오리는 또 어떡하라고.
범은 선우의 대답을 기다리다 선우의 노코멘트가 길어지자 결국은 못 참고 친절하게 재촉했다. 여보~ 저 기다리고 있어요, 했다. 나긋나긋한데 무서웠다. 그때 선우의 눈에 움찔하는 준석의 어깨가 보였다. 아무래도 저만 무서운 건 아닌가 보았다.
선우는 그냥 ‘네. 형 없으면 못 살아요.’라 말해 주고 치워 버릴까 했지만 밤사이 오리에게 지은 죄가 떠올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근데 둘 다 못 살면 오리는 누가 키워요?”
범은 잠시 멈칫하더니 큰 웃음을 터뜨렸다. 작게 지독하다, 라고 읊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독하게 현실적이라는 소리였다. 하나도 안 웃긴데 계속 웃었다. 그에 선우가 심드렁히 죄송해요, 했다. 죄송하지 않았지만 죄송하다 말하고 치우는 건 잘했다.
선우는 현실에 찌든 자신을 더 이상 내보이지 않기 위해 그만 말을 멈추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이라 생각했다. 범을 질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범은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채로 선우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곤 약장수 톤으로 말했다.
“죄송은, 매력이 아주 줄줄 흐른다. 선우야 너는 말이야, 미모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해서 사상까지 그러면 사람이 좀 덜 떨어져 보일 수 있다?”
저게 무슨 개똥 같은 논리인지,
범은 손짓까지 해 가며 선우의 매력이 어떻게 흐르는지 설명했다. 시냇물 모양의 제스처였다. 그러다 찡긋 윙크를 보내며 ‘꿈과 희망은 네 엉덩이에서 찾으면 된다.’ 했다. 혼자 키득키득 좋아하더니 갑자기 준석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상하면 두개골을 빠개 버린다고 했다.
선우는 엉덩이 소리에 정색을 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찰나, 범이 선수를 쳤다.
“나 빵댕이라 그러려다 여보가 싫어해서 참았다!”
하여간 화를 낼 수 없게 했다. 선우가 픽 웃었다. 그의 개똥철학을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범 덕분에 제 현실적인 성격이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그래, 무슨 피터 팬이냐고. 나이가 몇 갠데. 현실에 사는데 현실적인 게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생각을 고쳐먹으니 히죽 웃음이 났다. 기분 좋게 웃으며 범의 볼에 쪽 뽀뽀해 주었다.
“서방 놔두고 집 나가는 주제에 매력적이지 마라. 오빠 밤새 딸딸이 치다 출근 못 한다. 깨워 줄 마누라도 없고.”
“딸딸이 적당히 치세요. 형은 너무 세게 쳐서 살갗이 다 쓸릴 것 같아요.”
“하아, 잔소리 존나 섹시해.”
선우의 시선에 파르르 떨리는 준석의 턱선이 걸렸다.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빵댕이가 웃긴 걸까, 딸딸이가 웃긴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준석의 안전 운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선우는 범과의 대화를 그만두고 그냥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선우가 졸려요, 하자 범이 제 허벅지를 팡팡 때렸다. 얌전히 범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범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토닥토닥해 주었다. 눈만 감으면 할머니의 손길과 크게 다르지 않아 진짜로 잠이 왔다. 너무 좋은 느낌이었다. 지독히 현실적인 선우도 두둥실 떠오를 만큼 좋은 느낌.
선우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제게 평화를 내리는 범이 예뻐 준석만 없었어도 빨아 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아차, 했다.
어휴, 또 그 짓 생각. 선우는 오리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범이 도착했다 저를 깨울 때까지 아주 단잠을 잤다. 차에서 잤는데도 개운하다 싶을 만큼 깊은 잠이었다.
범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가지 말라 곡소리를 해 댈 때는 언제고, 사실은 해방감 같은 걸 느끼나? 선우는 신나 하는 범이 왠지 모르게 못마땅했다. 샐쭉한 표정으로 범을 한 번 흘겨 주고 대문을 넘었다.
선우가 ‘할머니~!’ 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곧이어 범도 ‘아이고- 할머니-.’ 하며 기세 좋게 따라 들어왔다. 선우가 피식 웃으며 ‘무슨 거래처 사장님 부르세요?’ 하고 비꼬았다. 범은 선우의 싸가지에도 그저 사람 좋게 웃었다. 오구오구, 했다.
“나와바리 왔다고 또 시비 터네, 이나비.”
“저 시비 안 털었는데요?”
“아, 그럼 혹시 사랑을 속삭인 거야? 미안. 오빠가 몰라줬다. 더 해 줘.”
범은 제 고막을 녹여 달라며 귀를 들이댔고 선우는 그런 범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다시 한번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집에 없어~?”
‘어머나! 이게 누구야!’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할머니는 마침 마을 회관에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범은 할머니를 보자마자 ‘유 서방 왔습니다!’ 하고 깍듯이 인사했다. 할머니는 깜짝 놀란 채로 달려와 반기셨다.
“아유 선우야, 말을 하고 와야지~! 집에 뭐 먹을 것도 없는데 이를 어쩌면 좋아. 어떻게 왔어?”
선우는 어떻게 왔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사실은 떡을 심하게 치다 몸살이 나서 온 것이다. 그러게 육개장 멀쩡히 처먹다 말고 상을 왜 엎어서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 떠오르는 기억을 털어 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선우가 할머니께 그냥 보고 싶어 왔다 답하려는 순간, 범이 한발 빨랐다.
“어유 왜 오긴요, 처가 너무 고와서 처갓집 말뚝에 절하러 왔습니다.”
저리 말하고는 혼자 뿌듯했는지 호탕하게도 웃었다. 어우 느끼해, 선우는 질색하는데 할머닌 반색하셨다. 범의 농담은 할머니 연령대에 제격인가 보았다.
“우리 선우가 잘생기긴 했지? 이 촌구석에서 아주 인물 났어.”
“아니 여기서만 난 게 아니라니까요? 서울 바닥을 다 뒤져 봐도 저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유 서방이 절이라도 해야겠어서 온 거 아니겠습니까.”
“절은 무슨, 우리 손주 사위도 훤칠한 게 그냥 끼리끼리 잘 만난 거지.”
“이거 참, 쑥스럽지만 그렇긴 그렇죠? 제가 또 선우랑 다니면 그렇게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글쎄.”
선우는 그런 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할머니와 범은 만담 콤비처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선우는 별로 재미가 없었는데 둘은 웃고 난리였다. 할머니는 깔깔, 범은 껄껄 웃었다. 그런 둘을 보고 있던 선우도 결국은 피식 웃었다. 유머 코드는 맞지 않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웃기에 그냥 저도 웃었다.
할머니는 차려 줄 게 없어 큰일이란 앙탈을 조금 부리시다 삼겹살을 구워 주셨다. 냉동실 가득 삼겹살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넉넉한 양이었다. 준석까지 불러 장정 셋을 먹였다. 된장찌개도 뚝딱 끓여 주셨고, 밥을 어느 정도 먹자 시원한 열무김치에 국수를 말아 준다며 부엌으로 사라지셨다. 아무튼 내내 먹을 걸 퍼 주느라 바빴다.
준석은 잠시 범의 비서로 둔갑했다. 할머니께 조폭 티를 낼 순 없었기 때문이다. 범을 사장님이라 불러야 했는데 형님이 하도 입에 붙어 그냥 말을 아꼈다. 혹시나 실수를 할세라 말없이 밥만 퍼먹었다. 할머니께는 와아- 하는 감탄사와 척 들어 올린 엄지로 소통을 대신했다.
범과 선우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잘 먹었다. 장정 셋이 텃밭의 상추를 거덜 냈고, 된장찌개는 뚝배기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긁어 먹었다.
그렇게 거한 한 끼를 먹고, 범과 준석은 곧장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차 앞까지 배웅을 나간 선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범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다신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주책맞게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게 무슨 배웅인가 싶을 만큼 잘 가라, 조심히 가라, 인사도 하지 않고 땅만 보았다.
범은 그런 선우를 가만 안아 주었다. 푹 숙인 선우의 머리통에 쪽쪽 뽀뽀했다.
범이 ‘오빠 간다고 질질 짜지 말고.’ 하며 가벼운 농을 던졌다. 덕분에 선우의 무거운 기분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선우가 뚱하게 ‘안 울어요.’ 하니 범이 씩 웃으며 ‘오빠도 안 울게.’ 했다.
“근데 너 안고 있으니까 자지가 운다. 그래도 딸딸이 조금만 칠게. 마누라 말 잘 들어야 다시 데리고 오니까.”
선우가 푸스스 웃었다. 범이 기특해 그가 좋아할 만한 말을 숙고해 골랐다.
“밤에 영상 통화 할래요?”
“어. 씨발.”
범의 반응 속도를 보아선 뇌를 거치지 않고 답한 듯했다. 그에 선우가 좀 더 크게 웃었다. 다행히 웃으며 그를 보내 줄 수 있었다.
안녕, 하고 뒤돌아보고 또 안녕, 하고 뒤돌아봤다.
얼마나 떨어져 있을 거라고. 둘은 그렇게 눈꼴신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