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장. (5/10)

5장.

범은 한참이나 선우를 안고 있었다. 선우는 가만히 안겨 세 번쯤 참다 말을 꺼냈다. 밥 달라는 말이었다.

범이 너는 낭만도 없냐 선우에게 투덜거렸다.

‘밥 있고 낭만 있지, 낭만 있고 밥 있냐.’

선우도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범이 먼저 일어나 제 등판을 내보이며 어부바, 했다. 선우는 공복이기에 그냥 업혔다. 거부할 힘이 없었다.

아침으로 나온 오징어국은 황홀한 맛이었다. 매콤하고 칼칼하고 시원했다. 어제 고기를 많이 먹어 기름졌던 속을 깔끔하게 내려 주었다. 선우는 제 몫의 밥공기를 금세 비웠다. 범과 아침부터 뜨겁게 놀아 열량 소모가 심했다. 침대에 가만 누워 노는데도 왜 이리 힘든지 몰랐다.

범이 제 밥을 뚝 덜어 선우의 공기에 놓아 주었다. 선우는 사양 않고 받아먹었다.

범이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분 좋아? 하고 물었다. 선우가 그렇다고 하자 씩 미소를 띠더니 기다랗게 잘린 오징어를 입에 물고 빼빼로 게임을 제안했다. 기분이 좋으면 받아 줄 줄 알았나 보다.

선우는 당연히 외면했고 범은 머쓱해하지 않았다. 머쓱은커녕 ‘아, 이 정도까진 아니냐?’ 하며 당당하게 굴었다.

“알았어, 알았어. 밥상머리에서 장난 안 칠게.”

범이 어른스레 선우를 달랬다. 오징어를 꼭꼭 씹으라는 훈수를 두며 식사 내내 선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먼 곳에 있는 반찬을 집어 주었다.

“저도 팔 닿아요.”

범이 피식 웃었다. 여기도 닿겠네? 하며 제 앞섶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반찬 집을 손이 있으면 그거나 만지라는 뜻이었다. 선우는 못 본 척 오징어국에 코를 박았다. 밥에 집중하고 싶었다.

‘우리 집은 왜 오징어국을 안 끓여 먹었지? 이렇게 맛있는데.’

할머니께 전화해 당장 말해 주고 싶었다. 이거 좀 끓여 먹어 보라고 말이다.

범은 선우가 먹는 모양을 보고 있다 선우의 국그릇에 든 오징어다리를 건져 가고 제 국그릇에 있던 몸통을 놓아 주었다.

그에 선우가 광대를 볼록 올렸다. 바꿔 줘서 고마웠다. 다리는 별로였기 때문이다. 요즘 아주 배가 불렀는지 주제에 별로인 것도 있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떡하나, 별로인걸.

선우는 기분이 좋아 눈알을 굴려 범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웬만큼 기운이 나서 장난이 치고 싶었다.

“그거 아껴 먹은 거예요.”

제가 생각해도 완벽한 연기였다. 웃음기 없이 퍽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범은 코웃음을 쳤다. 안 속는구나, 했는데 그는 다시 젓가락을 놀려 오징어를 바꾸었다. 순식간에 선우의 국그릇엔 오징어다리가 원상 복구되었다.

선우가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뱉었다. 저는 장난을 쳐도 뭐 이따위 장난을 쳐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걸까, 어이가 없었다. 아무튼 팔자가 사나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도 뭐, 오징어다리 좀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다. 선우는 다시 씩씩하게 밥술을 들었다.

범은 체념하는 선우를 가만 보고 있다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에게 선우의 국그릇을 건네며 팍팍 좀 퍼 오라고 했다. 삼시 세끼 이선우 밥만 차렸는데 싫어하는 것도 모르냐고 오징어다리를 가지고 면박을 주었다.

“얘가 얼마나 많이 먹는데, 내가 아줌마 밥 풀 때마다 더 푸라고 쫓아다니면서 일러 줘야 돼?”

선우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작작 하라는 의미로 범의 발에 제 발을 비볐다. 엄지발가락으로 그의 발등을 긁으며 장난을 거니 곧장 반응이 왔다.

범은 허으, 하며 한껏 느꼈다. 지갑을 꺼내 아주머니께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아줌마, 국을 아주 기똥차게 끓이네? 하며 갑자기 칭찬을 했다. 우리 똑바로 합시다? 하고 웃으며 말했다.

선우는 다중이, 라고 생각했다. 성격이 저 모양인데 저한텐 화를 안 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선우는 이상한 우월 의식에 도취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사람 마음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라고 되뇌었다.

“왜, 너도 줘?”

“네?”

하필 잠시 딴생각을 하는데 시선을 아주머니께 건넨 수표에 두고 말았다. 범은 허, 하고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주면 되잖아. 뭘 그렇게 가련하게 쳐다보고 그러냐? 오빠 마음 약해지게?”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준다니 받았다. 남편이 돈이 많은 건 좋은 일이지만 이왕이면 제 돈도 많은 게 좋았다. 눈치 보지 않고 할머니께 갖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우는 다시금 지갑을 여는 범에 슬쩍 시선을 던졌다. 그 부담스런 시선에 범은 세 장을 집어 들다 두 장을 더 집었다. 네 남편 통이 이렇게 크다, 하며 거들먹거렸다.

선우가 범의 볼에 쪽 뽀뽀해 주었다. 먹고 떨어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뽀뽀였는데도 범은 좋아했다.

“씨발, 이 맛에 돈 벌지.”

“네. 많이 버세요.”

“많이 못 벌면? 그럼 나 버리냐?”

범의 유치한 질문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벌어 놓은 걸로만 살아도 늙어 죽을 때까지 충분히 살지 않을까요?”

퍽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범은 선우가 저와 늙어 죽을 생각이 있긴 있다는 것에 혼자 감동하다 ‘아, 그 소리가 아니잖아!’ 하며 화를 냈다. ‘만약에 모르냐, 만약에?’ 하고 열을 내는 모습이 조금 우스워 선우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제 답안을 고쳤다.

“돈보다는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죠.”

“뭐, 됨됨이? 씨발, 그거 나 아니잖아.”

헐, 알긴 아는구나.

선우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범을 쳐다보았다. 자기 객관화가 확실한 그에 웃음을 터뜨렸다. 범은 웃음으로 떨리는 선우의 볼에 쪽쪽 뽀뽀를 해 주고 진득한 손길로 선우의 뺨을 쓸어내렸다. 살살 어루만지며 멋진 척 목소리를 깔았다.

“선우야, 서방 고를 때 됨됨이보다 중요한 게 뭔지 지금 방에 가서 배워 볼래? 형이 가르쳐 줄게. 형이랑 인생 공부하자.”

범이 선우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할짝할짝 핥기도 했다.

선우는 징그럽게 들러붙는 범에 항복했다. 그가 원하는 답을 던져 주었다.

“아 안 배워도 알아요. 돈 못 벌어도 자지 뜯어 먹고 살게요. 됐죠?”

“어. 형 자신 있다.”

무슨 아침밥 한 번 먹기가 이리도 힘든지, 선우는 혹시 오리도 떼쟁이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범도 이러는 마당에 오리까지 나와서 생떼를 쓰면, 어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후식으로 나온 노란 수박에 주의를 빼앗겨 골치 아픈 생각일랑 금세 던져 버릴 수 있었다.

범은 후식까지 함께 먹을 시간은 없는지 선우의 엉덩이를 툭툭 쳐 주며 형 돈 벌어 올게, 하고 출근했다. 선우는 수박을 먹으며 잘 다녀오라 인사했다.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가고 싶었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차라리 문 앞에서 빨아 달라면 빨아 주고 말겠다. 근데 배웅은 좀, 간지러운 것 같다.

출근한다던 범은 선우의 앞에 가만히 서서 수박 먹는 선우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들어올 때 뭐 사 올까?’ 했다. 선우는 급작스레 받은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범이 선우를 일으켰다. 늦었으니 문 앞까지 가면서 의논해 보자 했다. 자연스레 선우를 끌었다. 선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뭐 좀 쌈박한 거 없을까? 우리 이선우 엉덩이가 절로 씰룩씰룩할 만한 거.’ 하며 별것도 아닌 걸로 정말 진지하게 의논했다.

하지만 문 앞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쌈박한 답이 나올 리 만무했고 늦었다던 범은 그렇게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노닥거렸다. 저녁에 뭐 사 오냐는 질문은 어느덧 산으로 간 지 오래였다.

“이제 좀 가세요.”

“얘 어떡하지? 헤어지기 싫다고 질질 우는데?”

“걘 무슨 남자가 맨날 울어요?”

“내 자지가 좀 여려. 네가 너무 좋대.”

“여린 자지를 어따 써요?”

“아. 아니! 안 여려. 씨발 존나 강하지.”

이렇게 15분도 넘게 대치했다. 결국 범이 저녁에 청포도를 사 오면 선우는 방 안에서 옷을 벗고 기다리는 걸로 타협을 보았다.

범은 새끼손가락까지 내밀었다.

‘어우, 저게 새끼냐.’

선우는 범의 새끼손가락을 보며 조금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얌전히 그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범은 이제 진짜로 간다고 가는 척을 하다 우다다 돌아와 선우의 입술에 쪽, 도둑 뽀뽀를 하고 튀었다. 그를 너무 힘겹게 출근 시킨 선우는 조용해진 집 안을 느끼며 잠시 문 앞에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돌아올 사람이 있는 집은 조용해도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 댁은 한 달이나 기다려야 돌아올 사람이 생기니 외로울 것 같았다.

선우는 정신을 차리고 냉큼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노란 수박 이야기도 해 주고, 오징어국 이야기도 해 주었다.

할머니는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 별 어지러운 얘기보다도 내 손주가 무얼 먹고 사는지 듣는 게 제일 재미있다 했다.

선우는 어지러운 세상이라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할머니가 알면 얼마나 가소로울까, 어린놈이 아는 척한다 놀리겠지?

“할머니, 세상에 신기한 거 진짜 많아. 할머니도 세상을 많이 산 것 같지만 아직 아니야. 랍스터도 안 먹어 보고, 노란 수박도 안 먹어 봤잖아. 다 해 보려면 아직 멀었어. 할머니 안 해 본 거 없이 다 해 봤을 때, 그땐 내가 보내 줄게.”

할머니는 얼씨구, 그래 가지고 어디 평생 죽겠냐 시큰둥하게 나오다 선우가 서운해하자 알겠다고 선우를 달랬다. 그에 선우는 노란 수박을 베어 물며 씰룩 웃었다.

***

범은 사무실 안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발목을 까딱거렸다. 할 일 없어 보였지만 나름 생각이란 걸 하는 중이었다. 선우 생각.

그때 준석이 조심스레 노크했다. 누가 와도 부르지 말고 돌려보내라 일렀는데, 불렀다. 이 경우는 죽여 주세요 아니면 살려 주세요, 둘 중에 하나다.

들어오라 이르자 얼굴이 죄 터진 준석이 나타났다. 형님, 하며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범을 불렀다.

범은 준석의 몰골을 보고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저건 후자다. 살려 주세요. 아까까진 멀쩡하던 얼굴이 왜 저 모양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새끼, 너는 어디서 십 분 만에 상판을 갈고 왔냐? 못생겼다 그래서 반항하는 거야?”

“아닙니다, 형님!”

한숨을 내쉰 범이 목소리를 키워 부러 크게 말했다. 밖에 있을 누군가에게 아주 잘 들리라고.

“첫째 형 씨발놈이냐, 둘째 형 씨발놈이냐?”

“유랑 형님 오셨습니다.”

“왜, 그 새끼도 팔병신 되고 싶어서 왔대?”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하실 말씀은 씨발, 디지털 시대에 이족 보행 하는 새끼. 저 새끼 핸드폰 어떻게 쓰는지 모르냐? 저러니 이사회만 열리면 무능하다 소리가 나오지.”

준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지만 속으론 제 형님께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일단 그 새끼 달고 온 따까리부터 들여보내.”

준석은 범의 명대로 랑이 데려온 수하를 들여보냈다. 그는 실장이라는 감투 하날 달고 있었다. 최 실장. 준석이 최 실장에게로 가 범이 보자 한다는 이야길 전하니 최 실장은 제 형님인 랑에게 퍽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살려 달라는 뜻이었다. 허나 대차게 외면당했다. 그는 결국 혈혈단신의 몸으로 호랑이 굴에 입성해야 했다.

범은 실실 웃으며 제 앞에 선 최 실장을 위아래로 훑었다. 최 실장은 묵념하는 자세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범이 실실 웃던 낯을 대번에 굳혔다.

“씨발놈아, 인사도 안 하냐?”

최 실장이 아차, 하는 순간 범은 그의 정강이를 차 넘어뜨렸다. 쓰러진 그의 머리통을 지르밟으며 짜증을 냈다.

“씨발, 이거 이래서 갈리기나 하겠냐.”

바닥이 대리석이라 표면이 매끄러웠다. 준석에게 신경질적으로 사포를 가져오라 일렀다. 바닥에 깔려 있는 최 실장이 덜덜 떠는 게 느껴졌다. 고작 이 정도로 덜덜 떠는 새끼를 실장이라고 달고 다니는 랑도 웃겼다.

“씨발 니네 형님은 왜 남의 새끼 상판을 갈고 지랄이냐? 가뜩이나 못 봐 주게 생긴 우리 준석이 새끼 상판을, 어?”

최 실장은 번드르르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다단계 같은 걸 시키면 옥장판 꽤나 팔아 올 것 같은 인상. 양복도 꽤 좋은 걸 빼입었다. 딱 랑의 취향이었다. 랑은 이상한 허세가 있어 깡패 티가 나는 것을 싫어했다. 겉만 번지르르 하면 상놈이 양반이라도 되는 줄 알고 외부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대동해 다니는 애들이 다 이런 식이었다.

하고 다니는 짓이 깡패 짓이면 깡패다운 애들을 데리고 다녀야 능력을 보이지. 하여간 멍청했다.

범은 구둣발에 눌려 파닥파닥 거리는 최 실장을 퍽퍽 차기 시작했다. 물고기도 파닥거리면 기절할 때까지 맞는 것처럼, 범은 그가 파닥거릴 힘이 없어질 때까지 발길질을 했다. 최 실장은 가만히 있는 게 덜 맞는 길이라는 깡패의 진리도 모르는 눈치였다. 맞는 요령이 없었다.

조폭은 무슨, 반반한 얼굴로 학창 시절 일진 놀이나 하던 양아치를 데려온 게 분명했다. 범이 피식 웃었다.

그때 범의 휴대폰에 알림이 울렸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선우가 문자를 보냈다. 순간 범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여보, 오늘도 수고하세요, 화이팅.

이 셋 중에 한 마디라도 있으면 지금 밟고 있는 최 실장을 석방하겠노라 다짐했다.

「청포도 말고 옥수수로 바꾸면 안 돼요?」

여보, 오늘도 수고하세요, 화이팅은 개뿔. 철저하게 제 용건만 들어 있는 문자였다.

범은 발밑에 최 실장을 깔고 푸하하 웃었다. 저는 사실 최 실장을 봐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오 요 예쁜 거, 옆에 있었으면 콱 따먹었을 텐데. 아쉬웠다.

범이 ‘부부라서 일심동첸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동체’라는 말에 혼자 조금 두근거려 했다.

“준석아, 이 새끼 데려가서 너랑 이목구비 똑같아질 때까지 갈아 와라. 와꾸가 너 정도는 나와 줘야 깡패 해 먹고 살지 않겠냐?”

준석이 손에 사포를 들고 들어와 최 실장을 일으켜 세웠다. 예, 형님! 하고 우렁차게 외쳤다.

최 실장은 말만 하는 협박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주둥이만 산 형님을 모시고 다녀 더 그랬다. 허나 몰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는 끌려 나가며 사장실 밖에 앉아 있던 제 형님에게 살려 달라 빌었다.

사장실 안에서 최 실장의 애원을 듣고 있던 범이 키득키득 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새끼 안 살려 준다.”

네 형님 존나게 의리 없고 존나게 겁쟁인데, 같이 사우나 안 가 봤냐? 좆 없는 거 못 봤구나? 하며 얄밉게 굴었다. 그러니 아무도 안 따르지, 하고 혼자만의 감상을 다 들리게 뱉었다.

랑은 부글부글 끓었다. 아주 정곡을 찔렸다. 랑은 사람을 잘 못 휘어잡았다. ‘사람들이 너를 신임해야 나도 너를 신임하지.’ 아버지를 모시고 등산을 갈 적마다 지겹도록 잔소리를 들었다. ‘범이 그놈 사업 척척 따 오고 사람들 휘어잡는 거 봐라, 제비를 했어도 빌딩을 세웠을 놈이다.’ 하며 비교했다.

랑은 동요하지 않는 척 점잖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범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범이 씩 웃으며 형을 맞았다. 팔자 좋게 안녕, 했다.

“범아, 이쯤 그만하자.”

“왜? 최 실장 저 새끼 놔줄까? 놔주고 우리끼리 다이다이 뜰까?”

깡패 새끼들은 일자무식이어서 백 번을 못해 줘도 이럴 때 한 번 구해 주면 충성을 다한다. 허나 범은 랑이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랑은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많다는 건 겁이 많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깡패와는 안 어울렸다.

범은 예상대로 대답지 못하는 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남의 새끼를 패.”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교육 좀 시켰다. 내가 그 정도도 못 하냐.”

“허이구, 씨발 교육자 납셨네.”

범이 누구도 들이지 말라 했으니 준석은 범을 찾아온 랑에게 그의 뜻을 전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 준석 따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기분이 좆같아서 때렸겠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교육은 무슨 교육이냐.’와 ‘내가 그 정도도 못 하냐.’의 대립이 이어졌다. 범은 가소로움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뭐고, 그 정도가 뭔지 설명을 똑바로 해 봐. 형은 말솜씨가 그 모양인데 사업을 꼭 해야겠어? 일목요연도 존나 몰라, 아무튼.”

결국 먼저 기가 꺾인 건 랑이었다. 랑은 더러워서 져 준다 생각하며 범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범도 사과했다. 사과의 대상은 최 실장이었다.

“최 실장아, 때려서 미안하다?”

비아냥인지 사과인지 구분은 가지 않았다.

최 실장은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답에 매가리가 없었다.

“준석아, 저 새끼 뭐래냐?”

범이 준석에게 소리쳤다. 이미 들었지만 다시 물었다. 그러자 준석이 우렁차게 최 실장의 대답을 반복해 주었다.

“아닙니다! 했습니다, 형님!”

범은 준석의 대답을 들으며 랑에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형, 깡패면 깡패답게 굴어. 그럼 돈은 번다?”

재벌, 사업가, 기업가, 같은 게 하고 싶은 형에게 깡패나 똑바로 하라고 전했다.

랑이 주먹을 쥐었다. 범의 아가리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달려들진 못했다. 차라리 둘째였다면 욱하는 마음에 달려들기라도 했을 터이다. 왕창 깨졌겠지만. 랑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때를 보는 스스로가 더 현명하고 고등하다 여겼다.

물론 범에게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였다. 특별한 놈은 우리 선우, 라고 생각하며 어흐, 웃었다. 속으로 선우라는 이름 옆에 하트 하날 그렸다.

준석은 사-악 눈치를 살피고 대충 난리가 마무리된 것 같자 조심스레 사장실 문을 닫았다. 닫기 전에 ‘형님, 차 내올까요?’ 하고 싹싹하게 물었다. 범은 훠이훠이 손짓하며 됐다는 뜻을 전했다. 준석은 랑의 의견도 기다려야 하는 걸까 눈치를 살폈다. 사실 손님은 랑이기 때문이다.

랑은 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저도 됐다 했다. 형님들 얘기하는데 얼른 문이나 닫으라며 타박을 놓았다. 끝까지 준석에게 제 위엄을 보이고 싶어 했다.

준석은 저런 꼰대를 다루는 데엔 선수였다. ‘예, 죄송합니다!’ 하며 수그리는 태도를 취한 뒤 내시처럼 총총 문을 닫고 사라졌다.

마침내 랑은 범과 독대할 기회를 얻었다. 제가 왜 찾아온 건지 본론을 다 까먹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기억해 냈다.

“피차 바쁘니까 본론부터 얘기할게. 너 노블레스 캐고 다닌다며?”

“뭐야. 꼴랑 그거 때문에 왔어? 형 진짜 좆 없냐?”

범은 랑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심드렁히 답했다. 시선은 핸드폰에 가 있었다. 선우에게 답장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칼같이 답을 하는데 웬 똥파리들이 찾아와 답이 늦었다.

「옥수수 사 가면 형 자지로 하모니카 불어 주나?^^」

범은 미친놈처럼 키득거리며 문자를 쳤다. 선우가 화낼까 봐 웃는 모양을 치고는 만족해했다.

랑은 겉절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범의 의중을 떠보지 못하면 오늘 밤이고 내일 밤이고 발을 뻗고 자지 못할 것이다. 초조하다는 티를 낼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선우는 애새끼답게 핸드폰을 끼고 사는지 즉각 답을 보냈다. 범도 냉큼 메시지를 확인했다.

「됐어요. 그냥 청포도 사 오세요.」

아, 우리 선우는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었다. 귀여웠다. 선우의 불퉁한 입술과 부푼 볼따구니가 텍스트만 보아도 그려졌다. 범은 바보같이 허허실실 하며 답을 보냈다.

「삐지지 마라. 꼴린다.」

선우의 답이 오지 않았다. 못 본 게 아니라 씹은 게 분명했다. ‘우리 선우 삐졌잖아, 이 씨발놈아!’ 하고 형에게 성질을 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 앉아 있던 랑에게 ‘씨발 다 너 때문이다. 가만 안 둔다.’ 하며 으르렁거렸다.

범은 선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황급히 새 문자를 보냈다.

「둘 다 사 갈게요. 형 돈 많아요.^^」

머지않아 답이 왔다. 두 번째 문자엔 답을 하는 거 보니 역시 첫 번째 건 씹은 게 맞았다. 선우는 ‘감사합니다.’ 하고 ‘쪽.’도 했다.

사랑스러웠다. 온 얼굴에 침 범벅이 되도록 뽀뽀해 주고 싶었다. 범은 순간 세상이 조금 아름다워 보였다. 절로 인자해지는 것 같달까. 이제 형의 이야기를 들어 줘 볼까 했다.

“노블레스 캐고 다니는 게 뭐.”

범이 심드렁히 물었다. 묻긴 물었지만 왜 저러는지는 안 물어도 뻔했다. 제 밥그릇은 건들지 말라는 소리가 하고 싶어 왔을 것이다.

노블레스는 랑이 가장 눈독 들이는 알짜배기 사업이었다. 다 똑같은 떡장사 같아도 랑이 좋아하는 ‘고급’이었다.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마어마했다. 동네 구멍가게 같은 룸살롱 몇 개 받는 것과는 소유의 격이 달랐다. 랑은 노블레스부터 시작해 카지노까지 제가 다 먹어 버리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매주 등산에, 골프에, 아버지를 모시고 효자 노릇을 했다. 극진한 봉양 끝에 얼마 전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냈다. 한번 맡아 운영해 보라는 허락이었다. 완전히 넘겨준 것도 아니고 얼마나 잘하나 보겠다는 식이었지만 노블레스는 딱히 경영 능력이랄 게 필요치 않았다.

신생 업소도 아니고, 이미 돈 꽤나 만진다는 사람들은 노블레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입지가 굳건했다. 알아서 잘 굴러가는 돈 나오는 기계가 랑이 맡았다고 하여 부진한 성적을 거둘 리 없었다. 그러니 응당 아버지의 시험에도 떨어질 리 없을 것이다.

랑에게 노블레스는 이미 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범은 떡장사엔 영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업 구상 중 의견을 물을 때나, 운영 방식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툭툭 말 한 마디 던져 도와줄 뿐 제가 직접 하려고 들진 않았다. 맡아서 해 봐라, 제발 좀 가져가라, 그래도 안 가져갔다.

떡이 일이 되어 버리면 떡 치는 게 재미가 없을 거라나, 아무튼 별 저질스런 이유였지만 범이 관심이 없다는 건 랑으로선 축복이었다.

헌데 그런 범이, 오늘 아침 제 수하들을 풀어 노블레스에 대해 캐고 다녔다.

“범아, 노블레스는 이제 형 업장인데 그렇게 너네 애들을 풀면 거기 깔린 우리 애들이 좀 그렇지 않겠냐. 한 식구끼리 경계하는 모습도 보기 안 좋고. 뭐 알아볼 거 있으면 형한테 부탁해라. 형이 동생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줄까.”

랑은 제 추잡한 속내를 숨기기 위해 말에 포장을 덧대었다. 애들 왜 풀었냐, 기분 나쁘다, 눈독 들이지 말고 꺼져라, 진솔하게 말하면 될 것을 ‘네가 그렇게 하면 좀 그렇지.’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범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귀도, 눈도, 뇌도 피곤했다. 잠시 후- 하고 한숨을 내신 뒤 뜬금없이 준석아, 하고 밖에 있는 준석을 불렀다.

“예, 형님!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옥수수랑 청포도 좀 사다 놔라.”

“예, 알겠습니다. 형님!”

“안 단 거 한 알 나올 때마다 알지? 뒤진다 진짜.”

범은 ‘뒤진다’는 말을 뱉을 때 시선을 랑에게 던졌다. 준석에게서 알겠습니다, 하고 또 한 번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오냐, 잘하자. 우리 애 입맛 까다롭다.”

“예! 믿어 주십시오. 제가 제대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준석이 부지런히 사라지고, 범은 잠시 선우를 생각하며 머리를 식힌 뒤 다시금 랑과의 독대를 이어 갔다.

오늘 새벽, 범은 수하들에게 일 하나를 지시해 두었다. 노블레스 소속 접대부, 그 시절 이선우에 대한 조사였다. 어떤 손님들을 받았는지, 단골들은 누구였는지, 일하다 눈이 맞았던 새끼는 없었는지, 낱낱이 알아 오라 했다.

노블레스 그 자체를 탐하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랑은 범의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이리 득달같이 쫓아왔을 터다. 프락치는 심는 족족 걸려 어디 들을 구멍도 없지, 염탐하는 데 써먹던 유혁이 새끼는 병원 밥이나 축내고 있지. 어찌나 답답했을까? 씨발, 고소하다.

“좀 그렇다는 게 뭔데? 경계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으면 경계를 안 하면 되잖아. 어? 한 번만 생각하면 간단히 끝날 거를 여기까지 쫓아오니까 형이 능력 없단 소리를 듣는 거 아니야. 내가 진짜 마음이 다 아파.”

“…….”

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범은 랑이 원하는 소리를 쉬이 해 주지 않았다. 노블레스에는 쥐뿔 관심도 없으니 걱정 말라는 말.

랑은 아무리 분해도 그 말을 듣고 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범은 싸가지가 더럽게 없지만 앞에 대놓고 그러는 편이라 뒤에 가서 뒤통수를 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말만 들으면 안심이었다.

“여기까지 올 시간에 신문 좀 보고, 어? 책도 좀 보고! 형 너 주식 사는 거마다 반 토막 나지? 쪽팔리게 개미가 뭐냐, 개미가. 주식 하는 놈들 다 무지막지 배운 놈들이야. 성공하고 싶으면 공부 좀 하자. 나 봐 봐. 알아볼 게 있으면 알아서 알아보잖아.”

“…….”

“지식은 스스로 쌓아 가는 거다. 진리를 탐구하라고, 씨발아.”

범은 경상수지가 어쩌고 바이오주가 어쩌고 하며 대화의 맥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떠들었다. 랑은 제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불안해했다. 욕심과 능력이 비례하지 않을 때 나오는 불안이었다. 냉소적인 표정을 연기했지만 동공이 흔들렸다. 저한테 불리한 이야기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는 게 빤히 보였다.

범이 쏘아붙이는 동안 말을 고르고 고르던 랑이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네 애들이 무례하게 안 굴었음 우리 애들도 경계 안 하지. 그 생각은 못 하냐.”

범이 실소를 터뜨렸다.

“조폭이 예의 찾냐? 아버지한테 뭐 배웠냐? 아버지 예의 바른 새끼들 싫어한다. 예의 차리다 일 놓친다고.”

랑은 또 한참이나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끝까지 이성적으로 대처하고 싶어 말을 골라야 했다. 나는 그런 찌질한 이유 때문에 네게 찾아온 게 아니다, 내가 찾아온 건 합당했다, 해야 하는데 타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범은 상대가 안 되는 상대와의 싸움이 지루해져 그만 랑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이만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떡장사 줘도 안 가져. 형님 다 가지시고, 걱정 말고 가세요. 어? 좀 꺼져 주라. 노블레스에 불 지르기 전에.”

랑은 자존심이 짓밟혔지만 일단 확인하고픈 사실을 확인해 속이 시원했다. 제 목적을 이룬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래도 꺼지란다고 바로 꺼져 주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없어 보였다.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을 품어 주는 쿨한 형처럼 ‘새끼, 형한테 말하는 꼬라지 봐라.’ 하며 얼굴도 자주 못 보는데 식구끼리 점심이나 먹자 했다.

“아, 점심. 우리 선우 점심 뭐 먹었지?”

범은 랑의 식사 제안을 무시하고 혼잣말을 했다.

“유혁이랑 먹어.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선우랑 통화해야 돼. 가.”

랑이 아주 염병을 한다, 고 작게 읊조렸다. 그놈의 선우, 선우. 하도 의아해서 났던 화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염병 아니고 사랑 씨발아. 하긴, 네가 사랑을 알겠냐.”

씨받이로 들어간 오메가 하나에 미쳐 결혼까지 하겠다 날뛰는데 어쩌면 제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걸 범은 숨기지 않았다. 좋아 죽는 티를 줄줄 냈다. 저라면 숨길 것 같았다. 사랑 타령 같은 걸 할 여유도 없지만 만약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숨기는 게 당연했다. 언제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모르는데? 결혼은 충동이고 실상은 단순 유희가 아닐까 했다.

랑의 사고방식으로는 이게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꼴인가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은 선우를 건들지 않았다. 이기지도 못할 거면 섣불리 건드려선 안 됐다. 선우가 범의 약점이 아니라면 별다른 소득도 없이 범의 심기만 건드리는 꼴이 될 것이다. 하여 일단은 이빨을 숨기고 있었다. 약점인 게 확실해지면 그때 물어뜯을 생각이었다.

“보기 좋네. 제수씨 될 사람은 언제 보여 주냐? 아버지도 언제 데려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시던데, 결혼을 할 거면 어른들께 인사부터 와야지. 안 그럼 네 안사람이 욕먹는 거다.”

“안사람이래, 씨발. 꼴린다.”

“…….”

“근데, 누가 욕을 해? 설마 형은 아니겠지? 형은 혓바닥 뽑히는 거 무서울 거 아냐. 좆이 없어서.”

범은 얼굴엔 미소를 띠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랑이 아버지께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다닌다는 것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발악하는 게 웃겨 그저 봐주는 중이었다. 랑은 아버지가 결혼에 반대해 주길 원했다. 아버지께 은근히 선우를 깎아내리며 더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겠다는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 심어 놓은 사람이 몇인데 모를 줄 아는가 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인사 한번 와라.”

“형.”

“어?”

“진짜 뽑힌다. 조심하자.”

랑은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 않아 별 대꾸 없이 자리를 떴다.

***

범은 조용해진 사무실 안에서 발을 까딱거리며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우는 문자에 답하듯 전화도 빨리 받았다.

“우리 마누라 점심 뭐 먹었어?”

[김치찌개요.]

“그래? 맛있는 거 먹었네.”

[네. 식사하셨어요?]

선우는 ‘네.’ 와 ‘식사하셨어요?’ 사이에 텀을 두었다. 네, 만 하고 말려다가 선심 쓰듯 범의 식사도 챙겨 준 게 분명했다. 범이 피식 웃으며 귀여워, 하고 중얼거렸다.

“난 아직 못 먹었는데. 이왕 선심 쓴 거 뭐 먹고 싶냐고도 물어봐 줘.”

[…….]

전화기 너머 선우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하는데 씹어 먹고 싶었다. 선우의 갈등이 느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물어봐 달라는지 저도 뻔할 것이다. 하지만 갈등은 길지 않았다. 여태 밥도 못 얻어먹고 일한 서방이 불쌍했는지 선우는 야박하게 굴지 못했다. 이름만큼 선했다. 예쁘게.

“뭐 드시고 싶은데요?”

범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라고 답할 때 선우가 동시에 ‘너.’ 하고 따라 말했다. 심드렁히 ‘그럴 줄 알았어요.’ 하곤 자그맣게 웃었다. 장난도 걸고,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선우야.”

[네?]

“찌찌뽕.”

[…….]

“아- 말하니까 빨고 싶다.”

[……끊을게요.]

“선우야……! 선우야! 끊지 마!”

범은 선우를 다급히 붙잡았다. 좀 더 통화하고 싶었다. 누가 찌찌 빨고 싶대?! 하며 그런 거 아니다 우겼다.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 보려 했는데 선우는 그 변명에 더 질색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동정표로 나가야겠다.

범이 목소리를 깔고 퍽 진지한 투로 말했다.

“선우야, 오빠 사는 게 힘들다. 위로해 줘.”

[사는 건 원래 다 힘들어요.]

“어이구, 똑똑해. 우리 이선우도 사는 게 힘들어?”

[아니요. 먹고 자는 거밖에 안 하는데 뭐가 힘들어요.]

“안 힘들어도 막 안아 주고 싶네? 지금 간다.”

선우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감동했나? 하는 순간 옥수수를 찾았다. ‘옥수수는 다 사고 오시는 거예요?’ 했다. 범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예! 사모님. 옥수수 없이는 집에 기어 들어갈 생각도 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깍두기 말투로 장난을 치는 범에 선우도 푸스스 웃었다. 선우가 쪽, 하고 전화를 끊자 범은 쪽쪽쪽쪽 해 주었다. 뭐든 더 많이 주고 싶었다. 전화는 매정히 끊어졌지만 끊어지기 전 선우가 히죽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애가 이렇게 밝은데, 왜 죽고 싶을까.

범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다 씨발, 하고 읊조렸다.

***

지난밤.

범은 제 방에서 잠이 든 선우의 모습에 혼자 설레어 했다. 자는 선우를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쪽쪽 입술이 닿는 곳마다 뽀뽀를 하고 몸을 비볐다. 선우는 간지러운지 인상을 썼고 귀찮다고 팔을 휘저었다. 그것도 어찌나 귀여운지 몰랐다. 범은 선우가 휘저은 팔에 눈탱이를 맞고도 어흐, 하며 좋아했다. 선우는 입꼬리에 뽀뽀를 해 주면 씰룩 웃기도 했다.

자는 선우와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물을 먹이고, 수박을 먹이고, 자지는 못 먹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자위로 대충 때웠다. 얼굴을 뜯어 먹어 그런지 나름 만족스러웠다.

개운하게 자라고 몸이나 좀 닦아 줄까 했다.

물수건을 적셔 와 눈에 보이는 곳 먼저 슥슥 닦아 주었다. 다음은 사타구니. 하아, 범의 탄식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범은 잠시 고뇌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 선우 졸리대잖아 이 시발놈아, 하며 제 물건에 대고 작게 욕을 했다. 물론 범의 아랫도리는 상욕을 들어 먹고도 도통 기가 죽지 않았다. 발딱 서서 시위를 했다. 그래도 무시했다.

힘겹게 참아 내고 있는데 선우가 낑낑거렸다. ‘하, 하지 마…….’ 갑자기 하지 말라고 했다.

범은 그때까지도 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억울하다고, 이왕 억울한 김에 확 그냥 해 버려?! 하며 자는 애를 상대로 농을 던졌다. 혼자 키득거렸다. 선우가 기억을 못 해 다행이지, 제가 생각해도 병신이었다.

당연히 잠결에 하는 소리겠거니 했다. 다했다고 달래 가며 하던 걸 계속했다.

선우는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자는 듯했는데 머지않아 또 소리를 냈다. 이번엔 ‘해.’ 했다. 하지 말라고 할 때는 감지하지 못했던 이상함을 하라고 하니 느꼈다. 선우는 세상 다 포기한 어조로 해, 했다.

싸했다. 범은 제가 느끼는 싸함이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제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게 처음으로 좆같았다.

선우는 해, 죽여, 하며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이 자고 있지도 못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프다고 끙끙거리다 아픈데 안 죽는다고 슬퍼했다. 후로는 내내 죽고 싶다는 소리만 되뇌었다. 죽겠다고 악다구니라도 쓰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선우는 팔순 넘은 노인네보다도 못한 기력으로 힘없이 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죽여 버린다, 해야지. 왜 제가 죽겠대? 씨발.’

범은 분통이 터졌다. 조용히 난리를 떨었다. 나도 따라 죽을 거라고 진상도 부려 보고 창창한 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 훈계도 해 보았다.

그냥 깨울까도 했다. 헌데 깨우면 떡 치자고 깨운 것밖에는 안 될 것 같았다. 왜 깨웠냐 그럼 뭐라 그러나.

사실을 말해 줄 순 없었다. 아마 평생 말해 주지 못할 것이다. 선우는 저도 제가 죽고 싶다는 걸 모르는 애였다. 제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매사에 무던했다. 공허한 눈을 하다가도 자두 하나에 볼록 광대를 올렸고,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에 오- 하며 신기해했다. 깨어 있을 땐 오히려 살고 싶은 애 같았다.

그런 애에게 넌 속이 다 썩어 있더라, 넌 사실 죽고 싶은 거더라, 하고 말해 주는 새끼가 있다면 범은 그게 자기 자신이어도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제 속이 썩는 쪽을 택했다.

못 깨우니 애원을 했다. 자는 선우에게 제발 잘 자라고 했다. 잘 자라고 머리를 쓸어 주며 한참을 달래니 그제야 잦아들었다. 불쌍해서 봐줬나? 누가 누굴 봐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고마웠다. 선우는 무서운 소릴 내뱉던 입을 다물고 쌕쌕 잠에 들었다.

범은 그런 선우의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해가 밝으면 암울한 이선우 머릿속에도 해가 뜨길, 하고 바랐다.

***

신속 정확한 일 처리를 자랑하는 범의 정보원들이 범에게 서류철을 갖다 바쳤다. 퇴근을 앞둔 늦은 오후였다. 범은 썩 열어 보고 싶지 않은 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글씨들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온 사무실이 떠나가라 ‘씨-발!’이 메아리 쳤다. 책상인지, 책장인지, 둘 다인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울렸다.

쨍그랑 쾅, 하는 소리와 그보다 큰 범의 포효 소리가 끊일 줄 모르고 이어졌다.

범의 수하들은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범은 소파를 집어 던지던 차였다. 물소 가죽 소파를 들어 올린 범과 눈이 마주쳤다.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었다. 수하들은 제 힘으로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살금살금 사장실의 문을 닫았다. 닫자마자 쩌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파가 운명을 다하는 소리였다.

그 폭주는 준석이 양손 가득 청포도와 옥수수를 사 들고 돌아와서야 멈추었다.

“형님, 형수님 드릴 거 사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준석이 조심스레 범을 불렀다. 범은 죄 없는 A4 용지와 그 위에 찍힌 활자를 찢어발기다 준석에게 들어오라 일렀다.

“똑바로 사 왔냐?”

똑바르지 않다면 사람도 찢을 기세로 물었다.

“예! 확실합니다.”

준석은 일단 자신 있게 답했다. 문제는, 개박살이 난 사장실 광경에 너무 긴장하여 포도의 이름을 까먹었다. 오는 길에 브리핑까지 준비한 참인데 옥수수는 초당옥수수, 까지만 기억이 났다.

‘청포도는 하, 씨 샤인 뭐라 했는데. 뭐더라.’

범이 물어보기라도 하면 저는 정말 죽었다 생각했다.

다행히 범은 준석이 사 온 걸 대충 훑어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퇴근하자, 했다. 빨리 밟아라, 선우 기다린다, 하며 어깨를 빙빙 돌리고 목을 투둑투둑 꺾었다.

제 형님은 분명 애처가인데, 준석은 왠지 모르게 그의 처가 조금 불쌍했다.

***

쿵쿵쿵쿵, 다락을 오르는 계단 소리가 들렸다. 범이 출근을 한 뒤 다시 제 보금자리인 다락으로 숨어 버린 선우는 핸드폰 게임을 하다 귀를 쫑긋 세웠다.

‘오리야, 옥수수 왔다.’

오리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냉큼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범이 노크를 하기도 전에 미리 문을 열어 주었다. 덕분에 범의 표정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인상을 팍 쓰고 있던 범이 선우를 보자 환히 웃었다.

“화나셨어요?”

“어. 마누라가 각방 쓴다고 도망가서.”

“아…….”

“도망가 놓고 왜 버선발로 반겨 주고 그러냐? 심장 콩닥거리게?”

범은 제 심장에 손을 대 보라며 선우를 보자마자 치대기 시작했다. 선우가 피식 웃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도 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가슴부터 만지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안 만지면 후회한다, 너? 나 갑빠 죽여 진짜, 한 번만 만져 봐.”

범이 막무가내로 손을 끌었다.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콩닥콩닥은 무슨, 아무튼 범은 귀여운 척이 심하다.

“여보 나 많이 기다렸나 봐?”

범이 능글맞은 눈썹을 씰룩이며 거대한 착각을 했다. 물론 범도 반가웠지만 범보다 먼저 떠오른 건 옥수수였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버선발로 반긴 것도 옥수수라 할 수 있다.

선우는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굳이 이 사실을 밝히진 않았다. 대신 범의 가슴팍에 올려진 손을 놀려 토닥토닥해 주었다. 돈 벌어 오느라 수고했다는 뜻이었다. 범을 빼꼼 바라보며 속으로만 미안하다고 했다.

그의 앞섶이 불거지는 게 보였다. 그의 자지는 화가 참 잘 풀렸다. 쉬워서 좋긴 했다.

“근데 너, 옷 벗고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게 무슨 경우냐? 아무튼 이선우 너 맨날 약속 안 지키지, 엉?”

범이 선우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선우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제가 잘못한 게 맞았다. 옥수수에 눈이 멀어 애초에 약속이 뭐였는지는 아예 까먹고 있었다.

“아니……. 오기 전에 미리 알려 주셨어야죠. 계속 벗고 있을 순 없잖아요.”

“나 일부러 쿵쿵 걸었는데? 여보 옷 벗을 시간 주려고.”

아, 선우가 짧게 탄식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제 과실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을 돌릴 순 없으니 심드렁히 타협안을 제시했다.

“지금이라도 벗을까요?”

어흐, 으흐, 난리가 나셨다. 범이 스트립쇼야? 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아니, 초롱초롱하다는 건 사실 선우의 콩깍지이다. 객관적으로는 그저 음흉한 눈빛이었다.

선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쇼랄 것까진 없는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무슨 대단한 퍼포먼스를 바라는 거면 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선우가 잠시 주저하는 사이 범은 선우의 스트립쇼를 이미 다 본 것처럼 굴었다. 상상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씨발, 생각하니까 코피 난다 하더니 선우에게 달려들었다. 여보 방금 환장하게 섹시했어, 하며 쪽쪽 뽀뽀를 퍼부었다. 아무것도 안 해 줬는데 이랬다.

“여보가 팬티를 벗어서 던졌는데 그게 딱 내 자지에 걸렸지 뭐야?”

범에게는 비밀이란 게 없는가 보았다.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제 상상을 공유했다.

‘그래서 내가 여보 팬티에 자지를 비볐’, 까지 듣고 선우가 범의 가슴팍을 찰싹 때렸다. 범은 씩 웃으며 오른쪽도 때려 줘, 했다.

어우, 오자마자 징그럽게 진짜.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멀쩡한 척하고 있기가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

범은 맞아도 굴하지 않고 쉼 없이 뽀뽀했다. 온 얼굴에 침을 묻히다 손등에도, 팔목에도 입맞춤을 내렸다.

선우는 조금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퇴근하자마자 득달같이 찾아와서는 제가 좋다고 달려드는 남편이 싫지만은 않았다. 범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웠다. 가뜩이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참느라 힘이 든데 범은 옆구리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다.

선우는 결국 아악! 하고 괴성을 지르며 푸하하 웃었다. 그러자 범이 옳지, 잘하네, 더 웃어, 더! 하며 교관님처럼 굴었다.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웃어 젖히다 웃는 것도 힘이 들어 항복을 외쳤다. 그제서야 옆구리를 괴롭히던 손길이 멎었다.

범이 선우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잡고 선우와 눈을 맞췄다. 진득한 눈빛을 보내며 나도 항복, 했다.

범은 왜 항복일까, 뭐가 항복이라는 걸까? 선우는 솔직히 좀 궁금했다. 하지만 헛소리일 게 분명해 들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물어볼까, 물어보지 말까 고민하는 사이, 범이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했다.

“여보의 아름다움에 항복.”

선우는 여보의 아름, 까지 듣고 귀를 막은 뒤 우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선우도 범도 푸스스 웃었다.

선우를 빤히 보던 범이 장난기 짙었던 미소를 순간에 거두었다. 그러곤 입술을 부딪혀 왔다. 눈까지 감고서는 각 잡은 키스를 쏟아 냈다. 범은 입을 크게 벌려 선우의 입술을 먹어 들었다. 뜨거운 혀가 선우의 입 안을 샅샅이 핥았다.

선우의 심장이 요동쳤다. 잇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한참을 물고 빨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하아, 뜨거운 숨을 교환했다. 범이 천천히 눈을 떠올렸다. 느리게 깜박깜박, 선우와 눈인사를 했다.

“선우야.”

“네?”

“우리 오늘 도장 찍자.”

선우는 무슨 도장을 일컫는 건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범을 바라보다 아, 했다.

“혼인 신고요? 지금 하러 가자고요?”

“구청 문 닫았다. 일단 도장만 사-악 찍어 놔 봐. 나머진 오빠가 다 알아서 할게.”

“…….”

범은 조금 약장수 같았다. 알아서 해 놓겠다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우도 함께 구청에 가고 싶었다. ‘나도 읍사무소 말고 구청 구경하고 싶은데.’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아, 지금 구청에 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지. 이렇게 집에 인사도 안 하고 도장부터 찍어도 되는 건가? 그게 더 중한 문제였다.

선우가 단번에 대답하지 않자 범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그의 표정에 웃음이 났지만 웃지 않았다. 속으로만 키득키득하고 겉으론 심각한 표정을 걸었다.

“형이 신중하게 살라면서요.”

“내가? 내가 언제! 너는 젊은 애가, ‘못 먹어도 고.’ 모르냐?”

“그러다 진짜 못 먹으면 패가망신해요.”

“걱정 마라. 오빠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네가 어디 가서 빚보증을 서고 싸돌아쳐도 우린 패가망신 안 한다. 내가 너랑 오리랑 평생 쌀밥에 고깃국 먹일게. 맹세해.”

범은 쓸데없이 비장했다. 자기가 각오를 아주 단단히 했다며 선우의 손을 끌어다 제 앞섶에 대었다. 단단하긴 했다.

“아니 무슨 북한도 아니고, 결혼 안 해도 쌀밥에 고깃국은 먹지 않아요?”

물론 쌀밥에 고깃국이 퍽 중한 문제긴 하지만 범의 수령님식 프러포즈는 좀 놀려 주고 싶었다.

“에헤이, 거참 그 말이 아니잖아. 물론 우리 여보가 빚보증만 안 서고 들어오면 더 좋은 거 먹겠지. 근데 만약에, 어? 만약에 말이야, 네가 어디 가서 전 재산을 쫄딱 말아먹고 들어와도 내가 처자식 굶길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이지. 내 맘 알지?”

음, 무슨 마음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든든한 것 같긴 해서 선우는 네, 라고 답했다. 그에 범이 뽀뽀를 퍼부었다.

“알겠는데, 그 도장은…….”

“뭐! 뭐가 또! 왜! 왜 안 찍는데!”

귀청이 따가웠다. 선우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범이 아차, 하더니 궁색한 변명을 했다.

“화낸 게 아니고 형이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래, 응? 말을 해 보자. 도장을 왜 안 찍고 싶은지 이유를 세 가지만 들어 볼까?”

“아니, 그냥…….”

선우에게 별 이유가 없는 게 더 상처였는지 범은 오리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기마 자세로 몸을 낮추고 선우의 아랫배에 얼굴을 들이댔다. 아랫밴지 성기인지 모를 애매한 위치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리 이전에 선우의 성기에도 인사를 했다.

“선우 꼬추 안녕, 넌 이따 보자.”

하루 이틀 미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다.

성기에 인사를 마친 범은 선우의 아랫배에 대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시작했다. 너네 엄마가 아빠 따먹고 결혼은 안 해 준단다, 했다.

선우가 황급히 범의 입을 막았다. 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범은 선우의 손바닥을 핥아 제 입을 막은 선우의 손을 쉽사리 떨궈 냈다.

“아, 진짜!”

“진짜 뭐? 진짜 사랑해?”

“…….”

진짜까지 붙일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사랑은 하는 것 같은데, 선우는 말하기 부끄러워 입을 꾹 닫았다. 그럼에도 범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선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일단 내려가자 했다.

“우리 옥수수 먹고 다시 생각해 보자. 눈 딱 감고 도장 찍잖아? 그럼 나 네 거다.”

끝도 없이 뻐꾸기를 날렸다.

사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범을 가질 수 있다는 건 퍽 횡재였다. 하지만 선우는 옥수수를 먹을 때까지 결정을 유예하기로 했다. 설령 도장 먼저 찍는다 해도 범이 제 옥수수를 도로 뺏어 갈 리는 없는데,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몰랐다. 아무리 사람을 못 믿고 의심이 많기로서니, 범에게까지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무지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런 제게 결혼해 달라 매달리는 범이 있어 뿌듯했다. 치대는 그가 무거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선우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

범은 옥수수를 먹는 선우의 옆에 앉아 십 초에 한 번씩 ‘이제 찍을까?’ 하고 물었다. 선우는 다 먹고 하자고 했다. 다 먹고 난 뒤에 손을 깨끗이 닦고 찍겠다고 했다.

일단 찍기는 하겠다는 거니 범은 만족했다. 여보 나 잘 기다려요, 하며 점잖게 기다렸다.

선우는 범이 상냥한 척하는 게 세상 제일 웃겼다. 그래도 그는 진짜로 착하게 기다렸다. 옆에 가만히 앉아 많이 먹으라는 응원도 해 주었다. 심심하면 선우의 볼에 쪽쪽 뽀뽀를 하고 선우의 입가에 묻은 옥수수나 얻어먹었다.

선우가 세 번째 옥수수를 들었다. 또 와구와구 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데 범이 잘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여보, 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선우를 불렀다. 아까부터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더라니,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한 소리 하고 싶다는 티를 냈다.

빨리 도장이나 찍지 뭘 세 개나 처먹냐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선우는 눈알을 굴려 범의 눈치를 보았다. 그만 먹고 내려놓을까? 아님 이번 것까지 마저 먹을까, 고민이 되었다.

“네? 왜요?”

“선우야.”

범이 다시 한번 선우를 부르며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 얌전히 도장 찍겠다고 해야겠다.’

선우는 속으로 옥수수를 내려놓았다. 손에는 아직 들려 있었지만 곧 손에서도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모양도 거시기 한 걸 너무 꼭 쥐고 먹는 거 아니야? 좀 질투 나네?”

“…….”

이씨 괜히 쫄았네, 선우는 옥수수를 내려놓지 않았다. 범에게 또 시작이다, 라는 시선을 던져 준 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마저 먹었다.

“다 먹고 내 것도 그렇게 해 줘. 입술 막 비벼 줘.”

“네.”

“나도 입술 막 비벼 줄게.”

“어따가요?”

선우가 심드렁히 물었다.

“에이, 알면서. 부끄럽게 그런 걸 물어보냐, 너는. 구멍이지, 구멍! 하여간 내가 이렇게 화끈한 마누라랑 산다.”

부끄럽기는 개뿔, 범은 구멍이라고 진짜 크게 말했다. 선우는 오리에게 사과했다. 애가 맨날 못 들을 소릴 들으니 미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휴, 하고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주제를 빨리 바꿔야겠다 생각했다. 안 그러면 내내 저럴 것이다.

“저 근데…… 댁에 인사도 안 드리고 도장 찍어요?”

“응.”

“아……. 그럼 인사는 영영 안 해요?”

선우는 혹시 집에 저를 보이기가 조금 부끄러운가 했다. 저도 낯을 많이 가려 불편한 인사 자리에 가고 싶은 마음일랑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결혼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건 아니지. 가긴 가야 되는데,”

범은 잠시 고뇌했다. 망설이는 범에 선우는 제 추측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하긴, 창부 출신에 돈만 주면 씨받이도 하는 그런 애를 집에 들이겠다고 데려가면 소금을 뿌려도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근데 갑자기 할머니가 좀 보고 싶었다. 우리 할머니한텐 나도 귀한데, 문전 박대를 상상하던 선우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범은 웃을 일이 아니야 지금, 하며 퍽 진지하게 굴었다.

“내가 가족이라고 있는 것들이 다 좆같은 것들뿐이라 너한테 보일 면목이 없다. 이거 진짜 어디 내놓기 쪽팔려서 원.”

“…….”

“아니 근데, 씨발 나 때문도 아니고 그것들 때문에 차이면 나 진짜 억울해서 못 산다. 엉?”

아, 반대구나.

범은 선우가 창피한 게 아니라 제 가족들이 창피한 거였다. 선우는 괜한 걱정을 한 자신이 민망해져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저도 저지만 범도 참 별걱정을 다했다. 선우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 대신 범의 볼에 쪽 하고 뽀뽀했다.

“나 안 찰 거지?”

“네.”

“내가 여보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우리 일단 도장은 찍자, 어?”

“네.”

“아유, 예쁜 거. 형 믿지? 믿어라. 너 평생 딴 자지 못 먹어도 하나도 안 아깝게 해 줄게.”

“아……. 네. 근데, 결혼하면 형도 평생 딴 구멍 못 먹어요.”

선우의 노골적인 표현에 범이 어흐, 하며 좋아했다. 선우에게 야하다고 오두방정을 떨더니 씩 입꼬리를 올리며 느끼하게 답했다.

“바라던 바야.”

***

범의 서재로 들어간 둘은 오손도손 붙어 앉았다.

범이 제 허벅지 사이에 선우를 가두어 앉히고 둘은 함께 혼인 신고서를 작성했다. 사실 선우는 보고만 있었을 뿐 정말 범이 알아서 다 했다. 범은 선우의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본도 알고 등록기준지도 알았다. 한문 성명까지 거침없이 쓰는데 아주 명필이었다.

선우가 범에게 따가운 눈총을 주었다. 이 정도면 안 찍는다고 했어도 혼자 알아서 하셨겠다. 이렇게 개인정보를 막 도용해도 되는 거냐, 하는 눈빛으로 째려보는데 제 뒤로 느껴지는 범의 앞섶이 꿈틀거렸다. 구박 중인 건데 애가 참 눈치가 없었다.

“네 서방이 이렇게 준비성이 철저하다. 허락만 떨어지면 언제든 쓰려고 다 공부해 놓은 거 아니야.”

“노력이 가상하시네요.”

“싸모님, 뽀뽀 한 번 해 주시면 제가 더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우는 피식 웃으며 집중하는 범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작성을 마친 혼인 신고서에 꾹 도장도 찍었다.

이제 할 건 다 했다 생각했는데 범은 말없이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각서>였다. 꼼꼼히 읽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단 두 마디가 적혀 있었다. 바람피우지 않는다, 먼저 죽지 않는다. 궁서체로 프린트되어 있는데 이렇게 유치한 문서는 또 처음이었다.

선우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각서를 내민 범이 구렁이 담 넘듯 선우의 손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은근슬쩍 엄지에 인주를 묻혔다. 오구오구, 하고 어르며 뉘 집 아들인지 지문도 참 잘생겼다고 꼬드겼다.

못 찍을 건 없지만 왠지 모르게 버티게 되었다. 고작 두 줄의 짧은 문장이지만 왠지 지장 같은 건 함부로 찍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썩 효력도 없을 것 같은 장난스런 문서인데 그럼에도 경계했다. 신체 포기 각서를 본 적이 있어 그랬다.

범은 버티는 선우를 강제하지 않았다. 대신 제 입을 퍽퍽 때리며 자학했다.

“씨발 이 미친 주둥이야, 너나 신중해라.”

일전에 선우에게 신중하라는 소리를 내뱉은 제 입에 화를 냈다. 헌데 때리는 힘이 장난으로 툭툭 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다칠세라 놀란 선우가 하지 말라 범을 만류했다.

범은 저를 말려 주는 선우에 바보같이 좋아했다. 호 해 줘, 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제가 때려 놓고 왜 호는 내가 해 줘야 하지? 선우가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범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범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안 속네?”

“네. 초등학생도 안 속겠어요.”

“쓰읍, 차갑게 그러지 말고. 빨리 호 해 줘라.”

“안 해 주면요? 안 해 주면 어쩔 건데요?”

선우는 제가 생각해도 좀 약 오르게 굴었다. 이미 처맞고도 남았어야 할 만큼 까불었는데 범이 안 때리니 자꾸만 장난의 정도를 높였다. 저는 매를 버는 악취미가 있나 보았다.

“안 해 주면?”

범은 잠시 생각하다 ‘그럼 내가 하지!’ 했다. 선우의 귓가에 호- 하고 바람을 불어 대기 시작했다.

선우가 작게 파닥거렸다. 하지 마요, 하니 범이 선우의 뚱한 말투를 따라 하며 싫은데요? 했다. 선우는 제가 약 오르게 군다 생각했던 걸 취소했다. 범에 비하면 자신은 약과였다.

선우가 귀를 막자 범은 콧구멍에 대고 호- 했다. 얼굴에 나비가 앉아 노는 것 같았다. 간지러움에 아오, 하며 범을 밀어냈다. 범은 밀리지 않았다. 왼쪽 콧구멍을 다 불고 오른쪽 콧구멍을 불었다. 분명 짜증 나는데 웃음이 나와 억울했다. 간질간질 죽을 것 같았다. 범은 사람을 창의적으로 괴롭혔다.

선우가 범의 얼굴에 에취, 재채기를 했다. 참으려 애썼는데 선우의 재채기는 범의 끈질김을 이기지 못했다. 선우가 민망한 표정으로 범의 얼굴에 튄 침을 닦아 주었다. 얼굴에 침을 뱉어 매를 벌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소심하게 톡톡 닦아 주자 범이 피식 웃었다.

“여보, 손으로 말고. 혀로 해 줘. 난 여보 침 좋아. 레몬 맛이야.”

선우가 쿡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러자 범이 혼을 냈다.

“어허! 하늘 같은 남편 무시하지 마라. 진짜 레몬 맛 난다.”

귀도 밝은 사람이, 코도 개코인가? 아니 아무리 개코여도 그렇지 아예 안 나는 냄새가 난다고 우기는 건 사기였다. 선우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범은 서운하다고 구시렁거렸다. 도장까지 찍었는데 지아비 대우가 달라지는 게 없다, 부부 사이에 신뢰가 없다, 하며 삐졌다.

선우는 덩칫값을 좀 하는 게 어떻겠냐 구박하려 했지만 그냥 입을 닫았다. 생각해 보니 진짜 부부가 된 날이다. 오늘만큼은 친절하게 대해 주고 싶었다. 자꾸 제 맘과 달리 불퉁해지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노력이란 걸 해 볼까 했다.

선우는 범의 얼굴을 할짝할짝 핥아 주다 소원대로 범의 입술에 호- 바람을 불어 주었다. 범은 절로 치유가 된다며 좋아했다. 뜨거운 국밥을 먹는 아저씨처럼 어우 좋다, 이야- 몸이 막 낫는다 나아, 하며 오버했다.

선우가 피식 웃었다. 제가 생각해도 제 눈이 삔 것 같긴 하지만 유씨 집안 막둥이는 귀여웠다. 딸만 셋이 있는 집의 막내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던데, 아들도 마찬가지인가 보았다. 유오리도 귀엽겠지? 생각하니 히죽 웃음이 났다.

“어? 우리 마누라 기분이 좋은가 보네? 자, 이제 찍자.”

선우를 뒤에서 끌어안은 범이 불룩한 제 앞섶을 비비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선우의 엄지를 들어 올렸다. 자, 찍자 찍자, 오야오야, 옳지 잘한다, 하며 정신 사나운 소리로 어르고 달랬다.

“바람은 그렇다 치고, 먼저 죽지 않는다는 뭐예요? 이걸 제가 어떻게 약속해요. 가는 덴 순서 없는데.”

“약속을 왜 못 해! 너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갈 생각부터 하냐?”

“아니……. 갈 생각이 아니라…….”

범이 하도 으르렁거리기에 선우는 크게 항변하지 못했다. 제가 뭐 나가 죽겠다 그런 것도 아닌데, 선우는 말 한 마디 잘못한 죄로 범에게 사상을 계도 당했다. 갑자기 ‘무병장수’라고 삼창하게 시켰다. 무병장수, 무병장수, 무병장수, 매가리 없이 말해 주었다.

뭐 씹은 표정으로 성의 없이 하는데도 범은 잘한다 했다. 그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웃으니 또 잘한다 했다. 우리 마누라 잘한다, 하며 선우를 끌어안고 좌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선우는 멋쩍어 뒷목을 긁적였다.

“우리는 순서 있는 거다. 나 가고 너 간다.”

“형 먼저 죽으면 저는요? 저도 홀아비는 싫은데…….”

“아, 좀 그런가? 그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로 바꿔 줘?”

부부보다는 전우 사이에 어울리는 말인 것 같았다. 그래도 먼저 죽지 않는다보다는 나았다.

“음……. 네. 그게 좋아요.”

범은 알았어, 하며 선우의 볼에 쪽 뽀뽀했다. 선우는 범이 보지 않을 때 슬쩍 웃었다. 제 의견이 반영된 각서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이 쑥스러워 몰래 웃었다.

“다른 거 뭐, 더 넣고 싶은 거 있어?”

“없어요.”

선우가 대번에 없다고 하자 범은 조금 아쉬워했다. 그는 추가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혼잣말로 ‘하- 씨발 이거라도 일단 받을까.’ 하며 고민했다.

“형은 더 넣고 싶은 거 있어요? 그럼 처음부터 넣어 오시지 그랬어요.”

“네가 이것도 안 찍어 준다고 오빠 마음을 새카맣게 태우는데, 어? 그것까지 써 왔으면, 해 줬겠어? 오빠 진짜 서럽다.”

범은 어째 점점 더 애가 되었다. 오빠 병은 대차게 걸려 놓고 징징거리는 건 말도 못 했다.

선우가 손을 뒤로 뻗어 범의 앞섶을 주물주물 만져 주었다. 그는 만지자마자 안 서럽다, 했다. 그러고는 황급히 ‘손 떼면 또 서럽다.’하며 협박 비슷한 걸 덧붙였다.

‘아오, 안 뗀다 안 떼!’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 만져 주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입꼬리는 조금 올라갔다.

“아 그래서 뭘 더 넣고 싶었는데요?”

“섹스는 거르지 않는다.”

“그게 무슨 각서까지 쓸 일이에요?”

“하긴, 그건 그렇지? 당연한 건데.”

범이 어흐,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선우는 범의 수긍을 받아 내 뿌듯했다.

“그럼, 싸우면 꼭 섹스한다.”

“싸우고 자지로 패시려고요?”

“어. 앙금이 남아 있으면 안 되니까 허리로 털어 내는 거지, 어때?”

“그럼 형 앙금만 털리잖아요.”

“여보도 화난 만큼 엉덩이 흔들어. 아님 여보 잘하는 거, 그거 있잖아. 콱콱 조이는 거.”

범은 제가 뱉은 말에 씨발 꼴린다, 하며 좋아했다. 상상을 한 게 분명하다.

이러다가는 맨날 싸우자고 덤빌 것 같았다. ‘참나, 누구 좋으라고.’ 선우가 구시렁거렸다. 범에게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며 주무르던 범의 앞섶에서 손을 떼 버렸다.

범이 쓰읍, 혀를 차며 혼난다, 하고 정색했다. 하나도 안 무서웠다. 자지 안 만져 준다고 혼내는 사람이 무서울 리가. 혼내는 이유가 너무 허접해 혼내는 사람도 허접해 보였다. 그래도 손은 다시 갖다 댔다. 고개를 틀어 쪽 하고 범의 볼에 뽀뽀도 해 주었다. 오늘은 착하게 굴어야지 방금 전에 다짐해 놓고 또 따지고 든 게 미안했다.

“어휴, 이렇게 나오면 형이 양보해야지. 자, 그럼! 싸우면 꼭 섹스를 한다. 괄호 열고, 이선우가 원하는, 어때?”

“음…….”

선우가 잠시 고민하자 범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씩씩거렸다. 네가 잘못해서 싸워도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하는 건데 어떻게 이걸 고민하냐며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이 조항 놓치면 너 진짜 후회한다 했다.

하도 달달 볶아서 선우는 귀가 다 아팠다. 먹고 떨어져라 하듯 답해 주고 말았다.

“네.”

범은 양심 없게 ‘나 같은 남편 없지?’ 하며 칭찬도 바랐다. 선우는 옜다 하는 심정으로 또 네, 해 주었다.

“나도 너 같은 마누라 없다.”

범이 씩 웃으며 화답했다. 선우는 치, 하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지만 붉게 물드는 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범은 발그레한 선우의 볼을 놀리지 않았다. 말없이 쪽쪽 뽀뽀해 주며 ‘예쁘다’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합의를 마쳤다.

범은 글씨를 잘 썼다. 딱 어른 글씨. 학교 때 꼬장꼬장하던 한문 선생님의 글씨와 비슷했다. 각서의 두 번째 조항을 펜으로 찍찍 긋더니 협의한 대로 바꿔 적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힘 있게 쓰인 그 문장은 퍽 비장했다.

밑으로는 세 번째 조항이 추가되었다. 싸우면 꼭 섹스를 한다. 단, 이선우가 원하는 섹스를 한다. 섹스라는 단어가 멋들어진 글씨로 진지하게 적혔다.

선우는 수정된 각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지장을 찍을까 하여 엄지손가락을 드는데 범이 합의되지 않은 네 번째 조항을 써 넣었다.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었지만 그래도 뭐라고 쓰나 구경이나 해 보았다.

사는 동안 많이 사랑한다.

‘섹스는 거르지 않는다.’를 넣지 않아 그 미련에 넣은 게 틀림없었다. 사랑을 나눈다, 라고 쓰려다 찍찍 긋는 것을 다 보았다. 그래도 아름다운 말이기에 봐주었다.

선우는 만족스럽게 지장을 찍었다. 지장을 찍자마자 사랑해, 라고 속삭인 범이 짐승이 되어 달려들었다. 또 첫날밤이었다.

옷을 찢는 건지, 벗기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붉은 벨벳 소파 위에 둘은 금세 나신으로 엉겨 붙었다. 서재라는 점잖은 공간에 놓여 있기엔 너무 화려한 소파였지만 등에 닿는 감촉은 부드러웠다.

선우는 지장을 찍자마자 무섭게 달려드는 범에 제가 뭘 잘못 찍었나 살짝 불안해졌다. 잘못 찍을 것도 없는 유치한 각서였는데 왜 이러시나 했다.

범은 선우의 온몸에 입술을 마구 비벼 댔다. 그런 범을 받아 주며 선우는 가만 생각해 보았다. 방금 제가 뭘 포기한다 그랬나? 신체라든가, 뭐 그런 거.

하지만 머지않아 답이 나왔다. 범은 원래 이런다. 지금은 지장을 찍자마자 이래서 타이밍에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그가 처음 이런 것도 아니었다.

늘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놓고 하는 짓이 또 아주 무뢰배는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고 빨고 핥으면서 ‘이선우, 여기 좋아?’라고 삼백 번은 물었다. 좋아하는 데가 어딘지 빤히 알면서도 그날그날 다를 수 있는 거라며 또 물었다.

성감대가 이동도 하나? 근데 그런 것도 같았다. 범과 몸을 섞으면 여기도 저기도 다 성감대가 되는 것 같았다. 아래가 찌릿하고 살갗이 뜨거웠다. 유두를 감쳐물 땐, 읏! 하고 몸을 튕겼다.

범이 피식 웃으며 ‘여기 제일 좋네.’ 했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맞으니 할 말은 없었다. 이제 선우는 가슴에 들러붙는 범을 저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이 예민하여 아프긴 아프지만 조금만 참으면 극락을 맛보았다. 범이 그렇게 해 주었다.

선우는 ‘하으…….’ 하고 앓으며 제 판판한 가슴에 파묻힌 범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선우의 상냥한 손길에 범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떼었다.

‘아, 앞으로 떨어지게 하고 싶으면 이러면 되는구나.’

선우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쥐어뜯어도 보고, 때려도 보았는데 그때마다 절대로 안 떨어져 나가던 머리통이 쉽게도 떨어져 나갔다. 얼떨결에 큰 발견을 했다.

“왜, 왜, 왜 그러냐?”

범은 어울리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그에 선우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범은 어디가 아픈 게 아니냐 난리를 피우며 제 이마를 선우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열을 잰다고 그랬다.

범의 이마가 더 뜨거웠다. 선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저리 호들갑을 떠니 뜨겁지.’ 했다.

“열은 형이 나는 거 같은데요?”

“난 너만 보면 뜨거워져. 심장에 불이 막.”

선우는 불이 막 어떻게 나는지 기어코 설명할 것 같은 범을 만류했다. 어우, 한숨을 쉬며 범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그만 좀 하란 뜻이었다. 하여간, 도저히 받아 줄 수 없는 말들을 잘도 했다.

‘느끼해 죽겠네, 총각김치 먹고 싶다.’

갑자기 총각김치 생각이 났다. 다 범 때문이다. 총각김치는 할머니 표가 최곤데. 후루룩 짜장라면 한 젓가락에 아삭한 총각김치를 한 입 베어 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흰 쌀밥에 총각김치도 괜찮겠다. 선우가 입맛을 다시며 꼴깍 침을 삼켰다.

“너 무슨 생각하냐? 무슨 생각을 하길래 침을 삼켜? 내 생각 아니었음 알아서 한다.”

“알아서 해라도 아니고 알아서 한다는 뭐예요?”

범이 ‘알아서 해라.’는 너무 화낸 것 같지 않냐며 화내면 네가 엉덩이 안 흔들어 주잖아, 하고 답했다. 본인은 진지했다. 그러다 혼자 일인극을 했다. 가장이 가오가 있지 너무 잡혀 산다며 아이고 내 팔자야, 하다가 씩 웃으며 그래도 잡아 줘라, 했다.

선우는 도통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성기를 잡아 주었다.

“허으, 씨발 우리 마누라 역시. 척하면 척이야.”

“빨까요?”

“이따가. 나 먼저 빨고. 먹다 말았어.”

범은 다시 선우의 가슴에 들러붙어 침을 묻혔다. 선우가 아까처럼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자 엄한 목소리를 냈다.

“빨리 예쁘다, 예쁘다 다시 해라.”

선우는 참나, 하고 작게 혼잣말을 했지만 그래도 하라는 대로 했다. 범의 머리통을 예쁘다, 예쁘다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맞추는 것인지 범은 부드럽게 애무해 주었다. 혀로 선우의 유두를 살살 간질였다. 간질이기만 하니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았다. 선우가 낑낑대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자 범이 할짝이던 걸 멈추고 쫍쫍 힘주어 빨기 시작했다.

허윽……! 선우는 예쁘다, 예쁘다 하던 걸 안 예쁘다, 안 예쁘다 했다. 범의 머리통을 통통 때렸다.

“아, 아아! 하으……. 읏! 형, 형……!”

범의 입술이 쫍 소리를 내며 선우의 유두를 뱉어 냈다. 그는 너무나도 해맑게 왜? 하고 물었다. 거참 보채지 마라, 다 해 준다, 하며 알 수 없는 소릴 했다.

왜인 줄 정녕 모르는 걸까, 뭘 보챘다는 걸까.

선우는 섹스만 하면 말이 안 통하는 남편이 조금 절망스러웠다. 아, 아니다. 평소에도 썩 통하진 않는다. 오늘은 친절하기로 했으니 친절히 설명해 주자.

“너무 세요. 살살 좀 하세요.”

“살살하니까 세게 빨라고 낑낑거리더만!”

범은 자기가 제멋대로 해석해 놓고 퍽 억울해했다. 선우는 일단 때린 게 미안해 범의 머리를 살살 쓸어 주며 호, 해 주었다.

범이 허으, 하며 좋아했다. 대가리 녹는다 씨발, 도 했다. 선우는 제 가슴에 파묻힌 머리통이 무거워 대가리란 표현에 공감했다. 범은 머리도 묵직했다.

“계속해 봐라. 오빠 마음 아직 안 풀렸다.”

실실 웃고 있는 주제에 말투만 딱딱했다. 딱딱한 제 아래나 어떻게 하고선 삐진 척을 하든지, 선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와 함께한 이래로 헛웃음이든 비웃음이든 진짜 웃음이든 매일 웃고 살았다.

웃으며 사는 중이니 제게도 복이 올까? 아, 그러고 보니 오리가 왔다. 복덩어리 유오리. 선우는 오리를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오리에게 ‘나도 우리 엄마 복덩이였다.’고 말해 주었다.

“너 또 누구 생각 하냐? 아까부터 나지? 아까도 나, 이번에도 나. 그치?”

“…….”

선우는 차마 답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내려 범의 머리통을 호호 불어 주고 쪽 뽀뽀해 주었다.

범은 콧구멍을 벌렁거려 가며 웃음을 참았다. ‘뭐야, 나 아니야?!’ 하며 화를 내긴 하는데 광대는 씰룩였다. 제 표정 관리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누라가 서방 보기를 물자지로 본다며 제가 이런 거에 넘어가는 사람 같냐 열을 올렸다.

다 넘어갔고만 무슨, 선우가 피식 웃었다.

“어허, 웃지 말고. 내 생각 했다고 해라, 빨리.”

“아까는 총각김치 생각했고요, 이번엔 오리 생각했어요.”

“이제 총각도 아닌 게 무슨 총각김치 생각이야?”

“유부남은 총각김치도 못 먹어요?”

범은 선우가 내뱉은 유부남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어흐, 하고 웃었다. 그러다 씁, 당연하지! 총각은 못 먹는다, 했다.

“형이나 먹어. 유부남 형. 형 맛있다.”

‘아니 저게 말이야, 방구야.’

선우는 제가 뭔가 먹고 싶다 하면 범이 당장에 먹자 해 줄 줄 알았다. 아니, 당장은 떡을 쳐야 하니 힘들더라도 다 치면 꼭 먹자고 해 줄 줄 알았다. 줄곧 그래 왔다. 그런데 그러지 않자 조금 서운하려 했다. 사람이 호의를 자꾸 받으면 당연하다 여긴다는데 저도 그 부류 중 하나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 생각보다 되게 몰염치하구나, 선우는 서운하려던 제 마음에 채찍질을 했다. 그러니 서운함을 참을 수 있었다.

‘유오리, 오늘 총각김치 없다. 앞으로도 못 먹는다.’ 하며 오리에게 비보를 전했다.

“이선우.”

“네?”

“너는 왜 남편 앞에 두고 유오리랑만 노냐? 나 서운하다?”

선우는 서운하다 말하는 범이 얄미웠다. 저는 서운을 참았는데, 범은 안 참으니까. 입술이 절로 삐죽거렸다. 그래도 조금 삐죽거리다 말았다. 제 주특기인 잔잔한 얼굴을 연기했다.

“죄송해요. 하던 거 마저 하세요.”

그냥 하세요, 하는데 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슬픈 건가? 선우는 범의 표정이 무얼 의미하는지 읽기 힘들었다. 영문을 모르겠어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이선우.”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퍽 다정한 음성이었다. 범은 선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토닥토닥해 주었다.

“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어? 말해 봐.”

“아, 아니……. 마음에 안 든 건 아니고.”

“그럼 뭔데? 응?”

범이 차분히 물었다. 그가 막상 이렇게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선우는 부끄러워 눈을 깔았다.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그의 따듯한 눈에 대고 총각김치 이야기를 하기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사실을 고했다. 그에겐 사실대로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나도 서운하다고.

범은 가만 들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바로 사과했다. 사과할 일까진 아니었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서운할 만했네, 하며 미안! 그렇게 먹고 싶은 건 줄은 몰랐지, 했다.

선우는 쑥스러워 목덜미를 긁적였다. 뭐 그럴 것까진 아니고, 하며 웅얼거렸다.

범이 목덜미를 긁는 선우의 손을 끌어다 쪽 입을 맞췄다. ‘용서해 주십쇼, 사모님! 제가 총각 먹는다는 소리에 잠깐 돌았었나 봅니다.’ 하며 분위기도 풀어 주었다.

범의 화통한 사과에 선우가 푸스스 웃었다. 그와의 관계에선 가슴에 쌓이는 게 없었다. 사소한 거 하나도 범에게 가지는 서운은 응어리가 되어 남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그마한 섭섭함 하나 가지지 않는다는 게 가능하기도 한가 보았다.

‘하물며 우리 엄마도 나한테 섭섭한 게 있을 텐데, 장례도 제대로 못 치러 주고.’

선우는 이게 얼마나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인지 알았다. 하여 범이 제게 해 주는 사과가 참 용감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간만에 형이 형답고 멋져 보여 선우도 범에게 사과했다. 좀팽이같이 굴어 미안했다.

선우가 ‘미안해요.’ 하니 범이 ‘뽀뽀.’ 했다. 둘은 쪽 입을 맞추고 화해했다.

“지금 바로 먹을래?”

“아니요. 떡 다 치고 먹을래요.”

“너 좋아하는 건 아껴 먹는 편이구나?”

선우가 해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장난기도 비치는 미소였다.

무슨 작당을 펼치는지 손을 꼼지락꼼지락 아래로 내렸다. 방금 잘못했다 반성을 마친 범의 자지는 여전히 벌떡 서 있었다. 선우는 그 눈치 없는 것을 꽉 쥐며 범과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전 좋아하는 거 먼저 먹는데요?”

범은 조용했다. 선우의 도발을 한 자, 한 자, 되새기더니 혼자 조용히 흡수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우와 맞추고 있던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천천히 떠올렸다. 범의 동공은 눈을 한 번씩 깜박거릴 때마다 조금씩 풀려 가는 듯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제 입술을 터지도록 깨물었다.

“씨-발.”

발음이 차졌다. 욕을 참 욕스럽게 했다. 그는 ‘허으, 씨발.’을 마치 한 세트처럼 중얼거리더니 무언가를 참았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했다. 숨넘어가기 전까지 해 댈 거면서 무얼 참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너 때문에 오빠 단명할 거 같아.”

범이 투덜거렸다. 사리가 나올 것 같다나 뭐라나.

단명은 이 흉흉한 걸로 때려 맞는 내가 할 것 같은데, 어이가 없었다. 선우가 씩 웃던 표정을 거두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심드렁히 말했다.

“아 빨리 먹게 뒤나 좀 풀어 줘요.”

“허으……. 심장 씨발아, 작작 뛰어라.”

범은 하다하다 제 심장에도 상욕을 했다.

“일단 입으로 먹고 있을래? 먹는 동안 형이 싹 준비해 놓을게. 형 손가락 기똥찬 거 알지?”

그의 눈썹이 능글맞게 춤을 추었다. 찡긋 윙크도 보냈다. 피식 웃은 선우가 꼬물꼬물 밑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어허, 궁댕이는 일루 줘야지. 어디 서방님 앞에 딱- 대령해 봐라.”

“엉덩이요.”

선우가 또박또박 궁댕이를 정정해 주며 정색을 하자 범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궁댕이가 마음에 안 들었어?’ 하며 어구어구 했다. 조금 얄밉게 얼렀다. 놀리는 게 분명했다.

자존심이 상한 선우는 낑낑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아 주곤 상한 제 자존심을 범의 성기에 풀기 시작했다. 기둥을 세게 쥐고 쭙쭙 빨다가 고환을 입에 넣고 살살 굴렸다. 선우를 어구어구, 어르던 범은 어윽! 하며 앓기 시작했다.

쌤통이다. 선우가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흥분이 만족스러웠다.

범은 선우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어찌 또 느낀 모양이었다. 엉덩이가 들이밀어져 있어 안 보일 텐데, 제 고환과 자지에 닿는 느낌만으로 알아챈 거라면 실로 대단했다.

“너 웃었지? 야, 나도! 나도 보여 줘! 웃는 거 나도!”

선우가 작게 한숨지었다. 저를 열렬히 좋아해 주어 참 감사하긴 한데, 범은 조금 극성맞았다. 도대체 자지는 어느 세월에 먹고, 총각김치는 또 언제 먹을 수 있는 걸까.

“형.”

“허으, 형 찾지 마라. 꼴린다.”

“다 꼴려 계신 분이 뭘 더 꼴린대요?”

“에이, 모르는 소리 한다. 걔 더 커져.”

범이 우쭐대자 선우가 픽 비웃었다. 하여간 허세는.

비웃거나 말거나 범은 선우가 제 물건을 빨며 웃는 걸 못 봤다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아 나 유범이 이 미친 새끼. 눈깔 달고 뭐 하냐.’ 하며 자신을 욕했다.

선우는 애초에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범을 불렀었는지 까먹을 만큼 정신이 사나웠다. 아, 오두방정 좀 그만 떨고 할 일이나 빨리 하시라 말하고 싶었다. 시끄러워서 범의 얼굴을 엉덩이로 눌러 버렸다.

의미는 통한 듯했다. 범은 닥치고 빨아 주기 시작했다. 선우는 범의 성기를 입에 물고 헙! 헙! 신음을 흘렸다.

범은 성기도 아니고 구멍을 환장하게 잘 빨았다. 가만히 앉아 받기만 해 보았을 것 같은 사람이 상대를 위하는 애무에 능했다. 혀로 쑤시다 손가락을 넣어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제 전립선이 먼저 그의 손가락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선우가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쩜 이리 잘 찾아 쑤시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빠는 건 내가 프로인데 말이야.’

위기의식 비슷한 걸 느낀 선우가 다시 힘을 내어 쭉쭉 고개를 놀렸다.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고개를 점점 깊이 박았다. 목구멍에 턱턱 걸렸다. 그래도 아주 심하게 하진 않았다. 참을 만했다.

“어이, 이선우.”

“에?”

입 안이 가득 차 발음이 샜다.

범은 양 손바닥을 넓게 펼쳐 선우의 엉덩이를 둥글게 쓰다듬었다. 침을 잔뜩 묻혀 놓아 척척한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엉덩이를 희롱하며 온몸에 힘이 들어간 선우를 풀어 주었다. 마치 싸우자는 거 아니다, 하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빠는 거 가지고 너무 기합이 넘쳤나?

선우는 조금 민망했다.

“진짜 존나게 감사하긴 한데, 삼 센티만 빠꾸하자. 목 다친다.”

그래, 배 속에 애도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선우는 오리에게 못나서 미안, 하고 짧게 사과했다. 범의 성기에 깊이 박힌 제 고개를 뒤로 살짝 물렸다. 이 정도면 3센티인가?

“이앙킁여?”(이만큼이요?)

“옳지.”

허락이 떨어져 다시 고갯짓을 하려는데 범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범은 되게 소심하게 ‘하고 싶다.’고 혼잣말을 했다. 선우의 애널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엉덩이에 대고 ‘아쉽다’고도 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선우가 조소를 흘렸다. 사람이 참 쿨하지 못했다. 하긴, 근데 이해도 되었다. 빨아 준대도 못 빨게 말려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나중에 오리 나오면 해 드릴게요.”

“안 돼. 다쳐.”

“오리 다 나왔는데 뭐 어때요. 젊고 건강한데.”

“건강하면 다쳐도 되냐? 요 쌔끼 이거, 계속 건강할 생각을 해야지! 누굴 홀아비 만들려고. 어? 무병장수를 해야 될 거 아니야!”

범이 버럭 하며 희롱하던 선우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제가 때려 놓고 ‘탱글탱글 씨발.’ 하며 좋아했다. 너는 엉덩이가 출렁출렁 안 하고 찰랑찰랑한다, 하고 칭찬도 해 주었다. 이게 칭찬인가? 찰랑찰랑하여 얼굴을 비비고 싶다 하는 걸로 보아 칭찬인 것 같았다. 그러곤 진짜 비볐다. 느낌 봐라, 하며 쪽쪽 뽀뽀를 하고 난리였다.

선우도 다시 빨기 시작했다. 쭙쭙 귀두를 흡입하며 깊어 넣을 수 없는 부분은 손으로 흔들었다.

선우야, 선우야, 하는 뜨거운 음성이 내리 들었다. 선우는 씩 웃었다. 그의 응원이 마음에 들었다.

“하으……. 여보 그렇지, 거기, 거기, 혀로 막 비벼 봐, 어! 어! 윽……!”

범은 체통 없이 좋아 죽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제 할 일은 했다. 선우가 열심히 제 물건을 빠는 동안 범은 선우의 뒤에서 물소리가 튈 때까지 선우의 구멍을 흐물흐물 풀어 놓았다.

범은 마치 음식을 완성한 요리사처럼 ‘자, 다 됐다. 이제 먹어라.’ 했다. 요리사 혹은 어미 새? 그런 거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기는 한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웃긴지, 선우가 실없이 웃었다.

“씁, 섹스하다 말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범이 훈육조로 말했다.

“그러는 형은요. 형은 맨날 장난이잖아요.”

“난 다 진심인데.”

범의 단호한 답변에 선우는 아, 하고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그동안 숨 쉬듯 해 온 헛소리가 다 진심이라 했다. ‘네 뒷물에 흠뻑 젖고 싶다.’ 같은 소리를 하면서 다 진심이라는데 어쩌겠나. 그냥 ‘아, 그러시구나.’ 하고 말았다. 어쨌든 장난치지 말라기에 선우도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굴었다.

“넣으세요.”

이에 범이 ‘넣어 주세요는 안 되겠냐?’ 하고 물었다. 참 바라는 것도 많다. 선우가 팩 노려보자 범은 황급히 알았어, 알았어, 했다. 1초에 ‘알았어.’를 다섯 번은 말했다.

“우리 싸모님, 오늘은 아주 살쾡이 같으네? 섹시해. 좋아.”

“그 제비 말투 좀 하지 마세요.”

“왜, 나 제비가 꿈인데. 나 이선우 후려서 끼고 사는 게 꿈이야.”

“이미 끼고 사시잖아요.”

범은 그 대답이 되게 마음에 들었는지 어흐, 하며 바보같이 웃었다. 아유, 예쁜 게 예쁜 말만 한다며 쪽쪽 뽀뽀를 퍼부었다.

‘도대체 내가 언제 예쁜 말만 했지?’ 그냥 범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우로선 편한 일이라 기분은 좋았다.

“아우, 그만하고 좀!”

“에이, 예쁜 얼굴로 화내지 말고.”

다정한 목소리가 선우를 달랬다. 이씨, 계속 애 같았던 건 범인데. 저 한 마디에 선우만 애가 된 것 같았다.

화낸 게 아니고 범의 뽀뽀 세례가 간지러워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 거였다. 선우가 소심하게 변명했다.

“아니 뭐 화낸 건 아니고요…….”

“응, 알아.”

“……저기 형.”

“응?”

“넣어 주세요.”

애절하게 말한 것도 아니오, 살랑살랑 말한 것도 아니었다. 늘 그런 선우처럼 조용하고 무뚝뚝했다. 허나 넉살 좋게 싱글벙글 하던 범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을 본 선우가 오리를 찾았다. 오리야, 미안.

선우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손도 안 댄 성기가 벌써 세 번째 발기했다.

선우는 한쪽 다리를 소파 헤드에 걸쳤다. 스스로 의지를 갖고 다리를 벌리기엔 힘이 없었다. 그래서 툭, 하고 소파 위에 걸쳐 두었다. 벌어져라, 하고 말이다.

범은 활짝 벌어진 선우의 다리를 반겼다. 씨발 존나 예쁘네, 하고 박혀 있던 제 물건을 잠시 빼내었다. 선우의 음부를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싸고도 계속 꽂고 있더니, 좋은 구경은 또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범은 팽팽히 당겨진 구멍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엄지와 검지로 더 벌려도 보았다. 정말 진지하게 ‘오빠 눈이 호강이다.’ 했다. 그러곤 갑자기 기특하다 했다. 어째 콧구멍보다 작은 게 자기 걸 잘도 삼킨다고 말이다. 아래에 머리를 들이밀고 쪽 뽀뽀했다.

불쑥 들어온 머리통에 선우는 잘게 몸을 떨었다. 범의 머리카락이 음부를 간지럽혔다. 허나 하지 말란 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냥 놔두었다. 놔두니 알아서 그만하고 다시 삽입했다.

범은 으르렁거리며 잘 들어간다 좋아했다.

“하으……. 아! 아! 아!”

붉은 소파를 배경으로 깔고 선우는 하염없이 흔들렸다. 이젠 신음도 세게 지르지 못했다.

‘넣어 주세요.’ 이후로 이제 그만 좀 넣어라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른다. 범은 못 들은 척했다. 넣어 달란 소리엔 눈이 돌더니 그만 넣으라 하자 선우의 손가락을 들어 제 귓구멍에 쑤셔 박았다. 그런 범이 얄미워 귓불을 잡아당기니 꼴려 했다.

그 광경을 본 뒤론 선우도 포기했다. 그저 제 입이 방정이구나 했다.

‘안 그래도 넣을 사람한테 넣어 주세요가 뭐냐, 넣어 주세요가.’

같이 살면 닮아 간다더니, 선우는 뒤가 없는 범의 언행을 닮아 갔다. 생전 제 입으로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을 잘도 뱉었다. 그래도 범을 닮아 가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닮고 싶었다.

선우는 그를 닮는 자신이 좋아 힘없이 히죽 웃었다. 이선우가 오랜만에 이선우를 마음에 들어 했다.

턱턱턱턱, 살덩어리들이 더욱 빠르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더 세게 하지는 않았다.

범이 헉헉거리며 ‘형 진짜 힘들다. 웃지 마라.’ 했다. 고문이 따로 없다고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보고 고문이래, 선우가 웃는 낯을 거두고 입술을 삐죽였다. 허나 삐죽이는 걸 가지고도 한 소리 들어 먹었다.

“씹, 그것도 예쁘다.”

범은 좀 못생긴 표정을 하고 있어 보라 했다. 어쩌라고 싶은 요구에 따지고 싶었지만 신음 말고는 도무지 나오는 소리가 없어 따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선우는 그냥 입을 맞추기로 했다. 범에게 키스라는 일거리를 주면 헛소리를 멈출 터였다.

범은 입술을 들이미는 선우에 씩 입꼬리를 올렸다. 닿기 직전인 입술 사이로 범의 뜨거운 숨이 흘러 들어왔다. 범은 콧김도 뜨겁게 뿜었다. 표정으론 벌써 다 잡아먹어 놓고 ‘아 나 바쁜데.’ 하며 튕겼다.

“하여간 여보는 아래위로 너무 보채.”

위협적인 덩치로 새침한 척을 했다. 그럴 거면 목소리라도 새침하든가. 걸걸해 가지고는 막걸리를 주전자째 퍼먹은 목소리로 저러니, 기가 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보챈 기억이 없는 선우는 볼을 부풀렸다. 띠꺼운 표정을 만면에 띠었다.

범이 피식 웃었다. 심통 봐라, 하며 선우의 부푼 볼에 쪽 뽀뽀했다. 우리 마누라는 못생기기가 이렇게 힘들다, 하며 느끼한 소리도 했다.

앞니에 김이라도 붙이고 있어야 하는 걸까. 선우는 이내 띠꺼운 표정도 거두었다. 그는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던 아무 핑계나 대어 가며 꼴린다 할 사람이었다.

얼굴 안 보이게 그냥 뒤치기로 하자고 할까? 선우는 방법을 조금 강구해 보다 다 귀찮아서 다시 키스를 시도했다. 쭉 입술을 내밀어 얼굴을 갖다 붙였다.

범은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려 선우의 입술을 피했다. 뽀뽀도 ‘해 주세요.’ 해 보라고 했다. 성기를 박은 것도, 뺀 것도 아니오 어정쩡하게 끼운 채로 쉬지 않던 허리 짓까지 멈추었다. 그러곤 귀를 기울였다. 오빠 들을 준비 됐다, 하면서. 해 줄 마음도 없는데 말이다.

“됐어요. 안 할 거면 마세요.”

“에이, 삐졌어?”

“아니요.”

범이 피식 웃으며 피했던 선우의 입술을 찾아 쪽 뽀뽀했다. 삐졌는데? 하고 다시 물었다.

“진짜 안 삐졌어요.”

“근데 왜 안 해 줘? 설마, 우리 여보 부끄러워? 씨발. 부끄럽다고 하지 마라. 진짜 돈다.”

부끄러운 게 아니고 낯부끄러운 건데, 그게 그건가?

선우는 혼란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냥 해 주고 치울까 했다. 조금 갈등이 되었다.

“뭘 자꾸 돌아요.”

“너한테 돌지.”

선우가 하, 하고 짧게 탄식했다. 그냥 범의 뜻대로 해 주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가 돈을 잘 버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이 실없어 보여도 결국 이기는 건 범이었다.

선우가 키스해 주세요, 하자 범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입을 벌리고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선우는 집어삼켜지기 전에 잠깐, 하고 범을 막았다. 한 마디 덧붙이기 위함이었다.

“빨리 싸 주세요. 저 좀 배고파요.”

말은 예쁜 부탁조였지만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범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쪽쪽쪽쪽 뽀뽀를 퍼붓다 주문이 많네, 하고 읊조렸다. 그래도 걱정 붙들어 매라며 퍽 듬직하게 답했다.

“얜 네가 싸라면 싸고, 싸지 말라면 안 싼다. 말 잘 들으니까 이따 싸고 나면 칭찬해 줘야 된다?”

선우가 피식 웃었다. 대충 네, 하자 범이 허리와 입술을 동시에 들이밀었다. 그가 뜨겁게 혀를 섞어 주자 아랫배가 찌릿했다. 찌릿한 아랫배 안으로는 범의 성기가 들어와 쑤셔 댔다.

범은 제 무게로 선우를 누르지 않기 위해 팔꿈치로 소파를 짚고 버티었다. 벌어진 선우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 허리를 팡팡 잘도 튕겼다. 범의 고환이 흔들리며 선우의 엉덩이를 때렸다. 철퍽철퍽 음탕한 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울렸다.

선우는 온몸에 힘을 풀고 범이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몸이 종잇장처럼 나부낄수록 전립선은 더욱 세게 찍혔다. 성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올 게 있을지 의문이지만 벌게진 선우의 성기는 절정을 맞을 준비를 했다.

선우가 손을 뻗어 범의 엉덩이를 쥐었다. 탄탄했다. 범이 들어올 적마다 손에 쥔 엉덩이를 함께 밀어 주었다. 콱콱 박히도록 범의 허리 짓을 조력했다.

그에 범의 포효 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말을 잘 듣는다는 범의 주니어도 곧 갈 것 같았다.

읍, 읍, 읍, 읍!

둘은 서로의 입술을 물고 함께 절정을 맞았다. 거친 숨을 서로의 목구멍으로 불어 넣었다.

범은 머리가 터져 나가는 쾌감에 씨발을 읊조리며 마무리로 두어 번 더 허리를 튕겼다.

“허으……윽……!”

남김없이 전부 짜 오리에게 보냈다. 마무리로 털어 내는 행위임에도 굳이 스팟을 찔렀다.

선우가 야한 눈을 하고 몸을 잘게 떨었다. 성기도 힘을 잃고 비실비실했다. 이젠 거길 찔러도 설 힘이 없다 말하는 것 같았다.

“여보.”

“하아……. 네?”

“나 두 번 싸서 이제 오늘은 못 싸?”

“……아니, 싸자마자 또 쌀 생각을 하세요?”

“너도 아침 먹으면서 점심 생각하잖아.”

아, 맞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선우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하다 정신을 차렸다.

“네. 안 돼요. 두 번 하셨으면 그만해야죠.”

당연히 징징거릴 줄 알았는데, 범은 그러지 않았다.

“알았어. 얘가 또 마누라 말은 듣는다. 아까도 봤지?”

범이 선우를 바라보며 턱짓으로 제 아래를 가리켰다. 진심으로 제 물건이 자랑스러운 듯 표정에 자부심이 넘쳤다. 선우는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네. 기특하네요.”

“그럼 뽀뽀해 줘. 칭찬해 준다고 했잖아.”

선우가 고개를 올려 범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범이 바보같이 웃으며 좋아했다. 좋아할 건 다 좋아해 놓고 갑자기 정색을 하며 ‘아니, 입술 말고 자지에 해 줘야지.’ 했다. 이건 무효라고 떼를 썼다.

“아, 어디든 받으셨음 땡이죠.”

“와, 이선우 너무하네. 빨리 싸면 칭찬해 준다며! 싸니까 입 싹 닦냐?”

선우는 피식 웃으며 속으로 메롱을 보냈다. 억울해하는 범이 우스웠다.

“너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쩌냐? 얘 반만 싼 거래. 좀만 더 하면 십 분 내로 나머지 반도 싸겠다는데?”

선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짜장라면과 총각김치가 코앞까지 왔다가 다시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아, 진짜! 하며 범을 팩 쏘아보았다. 범은 얄밉게 어깨를 으쓱하며 몰라, 얘가 배신감 느낀다고 전해 달래, 했다. 지가 삐진 거면서 남 얘기하듯 했다.

선우는 전의를 잃어 그냥 졌다.

“……그럼 입 앞에 갖고 오세요. 힘이 없어요.”

“어휴, 그럴까 그럼? 근데 어쩌지, 얘는 집 나오기 싫다는데?”

능구렁이. 선우가 손을 뻗어 얄미운 범의 유두를 콱 비틀어 꼬집었다. 범은 탄성을 터뜨리며 선우의 안에 들어찬 걸 뭉근히 돌렸다. 선우의 입에서도 하응, 하고 신음이 터졌다.

어떻게 반격할지 잠시 고민하다 이번엔 범의 음모를 잡아당겼다. 한두 가닥 뽑혔다. 범은 또 탄성을 터뜨렸다.

“여보가 놀아 주니까 너무 좋다.”

‘아, 이대로 한 번 더 하겠구나.’

선우가 체념하려는 찰나 범은 그만 장난을 거두고 아래를 빼내었다. 다소곳이 선우의 얼굴 앞에 제 성기를 대령했다.

범은 정말 뽀뽀만 받고 떨어져 나갔다. 쿨하게 ‘밥 먹자.’ 했다.

“업어. 아, 아니다. 목마 태워 줄까?”

“걸어갈래요.”

범이 픽 웃더니 선우의 양 뺨을 감싸고 가만 눈을 맞췄다. 결혼해 줘서 고마워, 라고 했다.

솔직히 방금까지만 해도 떡 치는 거밖에 모르는 변태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사람 심장을 가지고 놀았다. 선우의 심장이 쿵쿵 난동을 부렸다. 총각김치를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의 두근거림이었다.

“나도, 얘도, 마누라 말 잘 들을게. 앞으로도 예뻐해라.”

선우는 ‘네.’ 도 못 하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짧은 한 마디도 못 할 만큼 벅차다는 걸 범은 알아주길 바랐다.

아주머니들은 퇴근을 하여 없고, 짜장라면은 별채에 있던 준석이 와 끓였다.

범이 하다못해 중식당에라도 가자며 짜장면을 사 주겠다 했는데 선우는 그 짜장이 먹고 싶은 게 아니라 거절했다. 무엇보다도 중식당에서는 총각김치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도장 찍은 날 저녁인데 정말 이거면 되겠어?”

“네. 이게 먹고 싶어요.”

“다 유오리 때문이지? 걔도 참 낭만이 없다. 누구 닮아서.”

선우가 멋쩍은 표정으로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오리를 쓰다듬는 거였다. 그러자 팬티 바람인 범이 자기 배도 들이밀었다. ‘여보 나도.’ 했다. 선우가 한심하다는 듯 가만 쳐다보자 ‘뭐! 오리만 만져 주냐!’ 하고 화를 냈다.

선우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범의 아랫배를 쓸어 주었다. 불룩 튀어나온 성기도 서비스로 한 번 만져 주었다. 라면을 끓이고 있는 준석의 눈치를 살피며 주물주물 했다. 들킬세라 과감히 만지진 못했다. 조금 만지다 냉큼 손길을 거두었다.

그러자 범이 애꿎은 준석을 잡았다. 빨리빨리 못 끓이냐? 하며 버럭 성질을 내다 선우에겐 다시 웃는 낯을 보였다. 귓속말로 이따 마저 해 주세요, 했다.

존댓말을 하면 착해 보이는 줄 아는가 본데, 왠지 모르게 범은 존댓말이 더 무서웠다. 선우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거실로 자리를 피했다.

***

식탁에 앉지 않고 거실 TV 앞에 밥상을 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가 할 시간이라며 준석이 꼭 보아야 한다 추천했기 때문이다. 범에게 은밀하게 ‘야합니다, 형님.’ 했는데 은밀한 목소리조차 너무 커 선우에게도 다 들렸다.

뭐가 얼마나 야하길래, 선우가 피식 웃었다. 관심 없는 척했지만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준석은 좋은 시간 보내라는 씩씩한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범은 오냐, 했고 선우는 감사합니다, 했다.

“오빠한텐 안 감사해?”

질척이는 범을 무시하고 밥상 앞에 앉았다. 거실 바닥에 대충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게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보다 좋았다. 마치 제집인 양 편안했다.

밥상 위엔 계란프라이가 올라간 짜장라면과 총각김치가 올라 있었다. 소고기도 푸짐하게 구웠다. 상차림은 투박했지만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선우는 충분히 행복했는데 범은 상이 너무 소박하다며 잠깐 기다려 보라 했다. 씨발 어딨냐, 하며 온 부엌을 뒤집더니 황금빛 통을 꺼내 왔다. 그것의 정체는 진짜 금이었다. 범이 소박한 짜장라면 위에 금가루를 뿌렸다. 내 마누라가 이 정도는 먹어야지, 하며 거들먹거렸다.

하여간 허세는, 선우가 못 말린다 하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먹는구나.

범의 먹자, 하는 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선우는 범이 집을 비우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다락에서 은둔하며 보냈다. 때문에 TV를 보는 일이 드물었다. 간만에 보는 TV가 너무 재미있었다. 인기가 좋다던 드라마는 그저 흔한 막장드라마였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껏 빠져서 보았다. 손은 젓가락질을 쉬지 않았고 눈은 TV에서 뗄 줄 몰랐다.

범은 한 번씩 선우의 입 앞에 총각김치를 대 주었다. 선우가 아그작 한 입 베어 먹으면 옳지, 하고 내려 두었다.

맛있는 것들을 한입 가득 넣고 씹는데 선우는 문득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개운하게 씻고 TV 앞에 앉아 저녁 겸 야식을 먹는 시간, 이게 이렇게까지 행복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선우가 TV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려 범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범은 이미 제 쪽을 보고 있었다. 계속 저를 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 쑥스러웠다. 애새끼도 아니고, 제가 생각해도 TV에 너무 빠져 있었다. 민망함에 먼저 시선을 피하려는데 범이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웬일로 눈길을 다 주셔? 뽀뽀해 주게?”

뽀뽀해 주려고 본 건 아니었지만 그냥 해 주었다. 범의 입술에 쪽 뽀뽀하자 범이 쪽쪽 두 배로 돌려주었다. 간지러워 웃음이 났다.

“이야, 웃어도 주네? 형 눈물 난다 야.”

범은 메마른 눈가에 대고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런 범이 우스워 선우는 좀 더 큰 웃음을 흘렸다.

그사이 TV에서는 뜨거운 키스신이 나왔다. 퍽 격렬해 보이는 사운드에 서로를 바라보던 둘의 시선이 동시에 TV로 향했다. 둘은 사춘기 고등학생들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들이 키스하는 걸 구경했다.

야하다더니, 하나도 안 야했다. 선우는 시시하다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집중했다. 범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눈도 한 번 안 깜박이고 보면서 심드렁한 투로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저게 뭐냐.’ 혼잣말을 했다.

키스신은 그리 길지 않았다. 둘은 키스신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눈을 맞췄다. 3초가량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눈빛 사이로 무언가가 파직 튀기는 것 같았다.

범이 드르륵 상을 밀었다. 씩 웃으며 선우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누라, 우리도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하고 꼬셨다. 눈썹이 꿈틀거렸고, 성기도 꿈틀거렸다.

저렇게 예스러운 뻐꾸기에 넘어가 주면 안 되는데, 안 된다 하면서도 선우의 광대는 자꾸만 씰룩거렸다. 떡 벌어진 범의 품을 보다 홀린 듯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고개를 살짝 틀고 입술을 벌렸다. 이대로 갖다 붙이기만 하면 그의 입술과 딱 맞물릴 것이다.

“씨발, 네가 제일 야하다.”

범의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둘은 야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막장드라마보다 더욱 뜨겁게 키스했다. 거실 바닥에 드러누운 범과 그 위를 올라탄 선우, 그렇게 선우의 뇌리엔 범과 혼인 신고서를 적은 날 또한 강렬히 기억되었다.

암울했던 과거의 기억이 들어차 있던 자리를 그와의 추억이 밀어냈다. 만족스러웠다.

선우는 범이 제 머릿속을 아주 다 점령해 버리길 바라며 그의 입술을 더욱 세게 물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범은 득달같이 일어나 혼인 신고서를 챙겨 들었다. 구청이 문을 열자마자 접수할 요량이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냐는 선우의 물음에 ‘너는 한 입으로 두말, 아니 세 말도 하는 애잖아.’ 했다. 선우는 발끈했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술만 삐죽였다.

삐죽이는 선우의 입술에 쪽 뽀뽀한 범은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구청 직원들보다도 먼저 출근할 기세였다.

선우도 함께 갔다. 구청은 어떻게 생겼나 구경하고 싶어 따라왔는데 오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범은 선우를 옆에 끼고 구청 직원에게 별소리를 다했다. 장가가는 날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모양인데, 진짜 창피했다.

범이 직원에게 가장 먼저 한 소리는 ‘제가 억지로 끌고 온 거 아닙니다.’였다. 험악한 인상이 찔리긴 하는가 보았다. 선우 역시 사채업자에 팔려 가는 가련한 인상을 심어 주고 싶진 않았기에 저 말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전부 낯부끄러운 소리들뿐이었다.

범은 속도위반을 했다며 혼인 신고와는 하등 상관없는 소식을 알렸다. 그러곤 호탕하게 웃었다. 친절한 직원은 축하한다 해 주었다. 감사했지만 범의 헛소리를 받아 주지 않았음 했다. 그럴수록 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범은 축하 인사를 받고 혼자 신나 죽었다.

참다못한 선우가 범의 귓가에 나지막이 읊조렸다.

“자랑이세요?”

범은 즉각 대답했다.

“네 모든 게 내 자랑이야.”

저런 소리를 어떻게 단숨에 내뱉는지 몰랐다. 전날 미리 생각해 두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선우는 작게 물어봤는데 범은 쩌렁쩌렁 답했다. 그 바람에 괜히 창피만 늘었다. 선우는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래. 사람들 많은 데서 얼굴 막 보여 주고 그러지 마. 여기 깜-짝들 놀라신다. 네가 또 천지가 개벽할 미모 아니냐.”

선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너네 아빠 나 멕이는 거 맞지?’ 하고 오리에게 물어보았다. 오리는 여느 때와 같이 답이 없었다. 하긴, 제가 오리였어도 외면했을 거다.

‘어우 쪽팔려.’

범이 담당 직원에게 부부 금슬에 대해 논할 땐 정말이지 그의 허벅지라도 꼬집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괜히 잘못 꼬집었다간 공공 기관에서도 신음을 뱉을 남자였다.

혼인 신고 하는 게 그렇게나 좋을까? 뭐, 달리 생각해 보면 좋은 남편이긴 했다. 혼인 신고가 설레어 아침부터 이 난리법석을 떠는 건 사랑이 넘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버릇처럼 안 좋은 생각을 하는 선우가 선심을 썼다. 제게도 좋은 날이었다.

***

내내 싱글벙글이던 범이 씩씩거리며 구청을 나왔다. 혼인 신고는 접수를 하자마자 처리되는 게 아니었다. 빠르면 3일, 길게는 일주일. 처리가 되면 문자가 온다고 했다. 범은 정말로 진지하게 돈을 좀 먹여 볼까? 이런 건 누구한테 먹여야 되나? 구청장? 하며 혼잣말을 했다.

선우는 범의 미친 소리를 멍하니 듣다 갑자기 싸늘한 기분을 느꼈다. 혼인 신고만 되었다 하면 다 잡은 고기처럼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주려 저러는 걸까? 말라 죽게 하려는 걸까, 회를 쳐 먹으려는 걸까. 밝았던 선우의 머릿속이 거뭇거뭇해졌다.

에이, 그건 아닐 거다 하면서도 그거일까 봐 긴장이 되었다.

“형.”

“응?”

“혼인 신고 다 되면 그만 잘해 주려고요?”

선우가 장난인 척 가볍게 물었다.

“미쳤냐? 더 잘할 건데.”

범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반응이었다. 그에 선우가 볼록 광대를 올렸다가 냉큼 다시 내렸다. 너무 좋아하면 긴장했던 게 티가 날 수 있으니 속으로만 많이 좋아했다.

“아니 그럼 어차피 접수도 다 했는데 가만히 기다리면 되지, 왜 이렇게 집착해요? 차분하지 못하게.”

“어? 아아, 처리되면 또 첫날밤이잖아.”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답변에 선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범다운 이유였다.

범은 엄한 목소리로 웃지 마라, 했다. ‘뭐 한다고 일주일씩이나 걸린대!’ 하며 허공에 화를 냈다. 자기는 아가리만 산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뭐든 공식적인 게 좋다 했다. ‘공식적으로다가 이선우 발닦개가 되고 싶다 이 말이야.’ 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참나, 발닦개 뭐 좋은 거라고…….”

“난 영원히 네 발닦개이고 싶어. 남은 평생 오빠 자지에 발 닦아라.”

범이 찡긋 윙크를 보냈다.

기가 차긴 하지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잠시나마 범을 의심한 게 미안했다. 선우는 미안하단 소리 대신 똑같이 윙크를 보냈다.

범이 구청 앞 한복판에서 윽! 하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선우는 그런 범과 멀찍이 떨어져 걸음을 재촉했다. 그와 일행이 아닌 척 앞서 걸었다. 등 뒤로 여보 같이 가, 하며 따라오는 범이 느껴졌다.

호랑이가 쫓아오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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