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장. (1/10)

1장.

선우가 유 회장이 붙여 준 도우미와 함께 범의 집에 도착했다. 짐이라곤 백팩 하나가 전부였다.

집은 좋았다. 굉장히 클래식한 부잣집 단독주택 같았다. 마당 연못에 잉어가 있는 그런. 마당 곳곳엔 깍두기 형님들이 보였다. 별채는 그 깍두기들의 합숙소였다. 선우가 온다는 걸 전달받았는지 그들은 아래위로 훑어만 볼 뿐 침입자 선우를 제지하지 않았다. 선우 역시 조폭이라면 이골이 나게 보아 와서 놀랍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집 내부는 음, 인테리어가 썩 세련되진 않았다. 취향은 돈 주고도 못 산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화려하긴 화려했다. 북유럽보다는 대륙의 인테리어를 지향하는 듯했다. 저 호랑이는 진짜 호랑이일까? 삼십 대 초반의 집에 호랑이 가죽이 웬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우는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 집 아니니까. 이름이 범이라더니, 집주인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정직한 인테리어에 그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우웁, 욱-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선우가 도우미 아주머니께 구조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주머니는 빠르게 화장실의 위치를 알렸고 선우는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뛰었다.

거실에서 풍겨 오는 냄새 때문이었다. 베타인 아주머니는 느낄 수 없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가 술 냄새, 담배 냄새와 뒤섞여 진동을 했다.

얼마 후 선우가 코를 막고 화장실을 나왔다. 진짜 게워 내지는 않고 헛구역질만 하다 나왔는데도 진이 빠졌다. 체력 하난 끝내줬었는데 임신을 한 뒤론 병든 닭처럼 쉽게 피로했다.

슬쩍 본 거실의 풍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소파는 뒤로 밀려 있고, 거대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몇 개를 이어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알파 셋, 오메가 여섯, 총 아홉이 누워 있는데도 자리가 남았다.

널브러진 사람 중 하나가 집주인인 범일 것이다. 유범. 아홉의 맨살들이 서로 엉키고 포개어져 구분할 순 없었다. 어떤 이는 아직 넣은 채였다.

‘개꽐라네.’

제 배 속에 들어 있는 애기 아빠에 대한 선우의 첫 감상은 심플했다.

***

선우가 이름만 아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남의 집 살이를 하게 된 까닭은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선우네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다. 선우의 아버지는 밭농사를 크게 했고 알아주는 지역의 유지였다.

부유하고 유복한 집이었지만 워낙 촌 동네인지라 선우가 동네 친구들과 남달리 구별되는 점은 없었다. 굳이 하나 들자면 옷차림이었다. 선우의 어머니는 서울에 갈 일이 있을 적마다 백화점에 들러 선우의 옷을 한가득 사다 입혔다. 한 번 입은 옷은 웬만해선 연달아 입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등굣길엔 늘 깔끔하고 단정한 도련님이었다.

이게 선우가 부자인 티를 내는 전부였다. 정말 아무 의미 없었다. 어차피 흙 묻히고, 땀 내가며 뛰어노는 건 똑같았다. 하굣길엔 거지꼴이었다. 대도시 부자들처럼 부유함을 누릴 수 있는 시설이나 환경이 충족되지 않은 동네였다.

그래도 마음만은 더 부유했을 것이다. 선우는 베타고, 알파고, 오메가고 그런 거 상관없이 동네 친구들과 잠자리를 잡으며 뛰어놀았다. 속 편하고 순수한 시골 소년이었다.

그런 선우의 평화가 깨진 건, 그 촌구석에 들어선 대형 카지노 때문이었다.

삐까번쩍한 호텔과 함께 들어온 내국인용 카지노는 선우 아버지의 무덤이 되었다. 아버지는 도박에 손을 댔다 사채업자에 신장 한쪽이 떼였고, 골골대다 저세상에 가셨다. 기네스북에라도 올려 주고 싶을 정도로 빠르게 개털이 되었다.

개털만 될 것이지, 마이너스를 물려주는 건 좀 너무했다.

사실 선우의 어머니는 제 남편에게서 도박 중독의 낌새가 보일 때, 진작에 선우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똑같이 시골이지만, 선우의 어머니가 자란 친정이 있는 옆 마을로 옮겨 갔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외할머니가 계셨다. 풍족하진 않아도 셋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버지와는 서류상으로 정리만 안 했다 뿐이지 남남처럼 살았다. 그래서 선우나, 선우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렇게 죽은 줄도 몰랐다.

빚만 잔뜩 지고 무책임하게 죽어 버린 아버지 때문에 지옥 끝까지 쫓아온다는 사채업자가 선우와 선우의 어머니를 찾았다. 써 본 적도 없는 돈을 갚으라고.

이걸 갚는 게 가능하긴 한가 싶었지만, 갚았다. 선우는 아버지의 사채 빚을 5년 만에 전부 상환했다.

문제의 카지노엔 거액의 배팅만 오가는 VIP 전용 라운지가 있었고 선우는 그곳에서 접대부를 했다. 어디론가 끌려가 눈 떠 보니 그곳이었다. 하고 싶어 한 건 아니지만 아마 건실한 노동으로 갚았다면 20년도 넘게 갚아야 했을 거다.

선우는 서울에서도 희귀하고 그 촌구석엔 전무하다 봐도 되는 우성 오메가였다. 서울에서 데려온 난다 긴다 하는 화류계 오메가들보다 훨씬 비싸게 팔렸다.

우성이라 값이 두 배였다. 옆에 앉혀 술만 따르는 거 얼마, 키스 얼마, 대딸 얼마, 펠라 얼마, 삽입 얼마, 유흥업계에서는 나름 대기업이라고 값을 체계적으로 매겼다. 감자탕에 사리 추가하듯 뭐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계속 추가되었다.

손님이 접대부에 손찌검이라도 하는 날엔 돈을 엄청 뜯어냈다. 업장 재산에 흠집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리는 손님들은 꼭 때렸다. 얼마를 부르든 상관없는 치들이 대부분이었다. 업소 입장에서도 돈이 되니 적당히 때리는 손님에겐 강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관리하는 조폭들이 어떻게 맞아야 안 아픈지 같은 걸 알려 주었다.

선우는 그곳에서 일하며 세상을 많이 내려놓았다. 중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넋 빠진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출퇴근을 반복했다. 숙식이 제공되어서 그 화려한 건물 밖을 빠져나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스무 살부터 5년간 옥살이를 하듯 그곳에서 5년을 버텼다.

그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사채 이자를 어느새 선우의 소득이 따라잡았고, 그를 전부 갚자마자 선우는 당장에 일을 그만두었다.

문제는 땡전 한 푼 남은 게 없다는 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어 가끔 손님들이 사 주는 명품까지 전부 팔아 빚을 갚는 데 썼다.

빚을 청산한 선우가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갔을 때, 할머니는 너무 노쇠해 계셨고 그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남의 집에 밭일을 다녔다. 할머니께선 저는 죽을 때가 되어 굶어도 그만이란 소리를 하시면서 선우에겐 늘 따듯한 밥을 새로 지어 먹였다. 고기를 자주 못 먹인다고 미안해 하셨다.

선우는 그런 할머니를 보며 지난 카지노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몸 파는 주제에 급을 매기자면 최고급이었다. 이상한 자부심까지 있던 몇몇 접대부들과 달리 선우는 ‘고급 창놈.’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에 혼자 피식 웃곤 했다. 할머니가 과일을 참 좋아하시는데 선우는 할머니가 생전 들어 보지도 못했을 고급 과일을 많이도 먹고 살았다. 안주였다.

효도 한 번 못 해 드리고 할머니까지 엄마처럼 그리 허망하게 보낼 순 없다고 생각했다. 선우는 딱 1년만 더 접대부로 살고 돈을 모을까 갈등했다. 이젠 빚을 갚을 필요가 없으니 수익이 오롯이 선우 몫으로 남는다면 1년만 더 해도 꽤나 큰돈을 만질 터였다.

선우는 목돈이 필요했다. 카지노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의 시골 마을로 귀농해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 하나를 사고 싶었다. 다시 무념무상 평화로운 시골 생활로 돌아가는 게 꿈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기며 과일이며 아낌없이 사 드릴 생활비가 필요했고, 연로한 할머니를 편히 모시고 다닐 차도 한 대 필요했다.

하지만 평범한 일을 해서 이 모든 걸 이루려면 이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일 것 같았다. 선우는 마음이 급했다.

자의로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는데 할머니를 생각하니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자의로 했든 타의로 했든 저는 이미 5년이나 해 먹었고, 1년쯤 더 하고 덜 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싶었다. 누가 제 깨끗함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조금 무서웠다. 그곳에서는 밤새 일하고 아침이 오면 뻗어서 자는 패턴의 생활을 반복했다. 할머니를 한 번씩이라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할머니가 지난 5년처럼 1년만 더 버텨 주시면 좋겠지만 연세에 비해 많이 노쇠해 보이는 할머니는 불안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유 회장의 제안을 받았다.

유 회장은 조폭이 베이스인 기업가였다. 대부업을 근간으로 호텔, 카지노, 유흥업소를 여럿 가지고 있었는데 선우가 일했던 곳도 유 회장 소유였다.

유 회장은 선우에게 제 막내이자 셋째 아들의 아이를 가져 달라 했다.

열성 알파인 유 회장은 우성 오메가인 부인과 결혼해 첫째, 둘째 아들을 모두 열성 알파로 낳았는데 막내만 우성을 낳았다. 그는 열성이란 것에 큰 콤플렉스가 있어 앞으로 유씨 집안의 대를 우성으로 잇고 싶어 했고, 말할 것도 없이 막내 유범을 후계자로 밀었다.

근데 이 막내 아들놈이 결혼에 뜻이 없다며 유 회장의 속을 태웠다. 유 회장은 자신이 싸고 키운 막내 놈을 속속들이 알았다. 이 새끼는 안 한다면 진짜 안 하는 새끼였다. 첫째, 둘째 아들이 우성 오메가와 결혼해 낳은 손주들도 알파, 오메가 할 것 없이 전부 열성이었다.

유 회장은 결국 제 막내아들에게 우성 씨만이라도 내놓으라고 했다. 우성 알파 손주는 제가 알아서 만들어 내겠다며 아들의 정자만 뽑아 갔다. 더 이상의 결혼 타령은 없는 걸로 합의를 보고 범도 마음대로 하시라 했다.

그렇게 유 회장에게 물색 당한 우성 오메가가 선우였다.

우성과 우성이 만나면 확률이 훨씬 높긴 하나 태어난 아이가 무조건 우성 알파로 나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선우는 우성 알파가 나오면 15억, 아닐 경우 5억을 받고 인공 수정 시술을 받기로 했다. 40주 동안 대궐 같은 집에서 챙겨 주는 밥을 먹으며 배 속에 아이만 잘 지키면 되었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걸로 계약을 마쳤다.

집에서 놀고먹는 것밖에 하지 않으니 할머니께 아무 때나 전화를 드릴 수 있었고 선금으로 받은 오천으로 할머니께 매달 용돈도 드릴 수 있었다. 한 번에 큰돈을 드리면 어디서 난 거냐 하며 또 안 좋은 일을 하는 줄 알고 속상해하실 듯해 다달이 의심스럽지 않을 만큼씩만 드리기로 했다.

선우는 제 나름 계획을 정리한 후 할머니께 결혼을 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말했다. 아주 부잣집과 결혼을 하니 걱정 말라 했다. 열 달 뒤에는 위자료를 두둑이 받고 이혼했다 할 생각이었다.

“할머니가 창피해서 결혼식에 안 부른 게 아니고, 결혼식을 아예 안 했어. 서운해하지 말구. 너무 부잣집이라 오히려 요란스럽게 하면 사람들 보기 부담스럽다고 밥만 먹고 말았어. 한 달 정도 뒤에 할머니 보러 올게.”

“서운은 무슨. 너무 자주 오지 마. 책잡히면 어떡해. 할머니 걱정은 말고.”

“할머니도 참,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쫓아내면 나와서 다시 할머니랑 살지 뭐.”

“그래. 참고 살지 마.”

“…….”

선우는 목이 메어 가만 밥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가던 날, 선우는 한동안 먹지 못할 할머니의 밥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 뒤를 죄 찢어 놓는 손님을 받으면서도 한 번 운 적이 없는 선우가 아주 펑펑 울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울지 말라기에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다시 밥을 먹었다.

선우가 좋아하는 반찬이 한 상 가득이었다. 두릅이 향긋했다. 배부르게 한 그릇을 뚝딱한 선우는 할머니가 사돈댁에 과일이라도 사다 드리라며 쥐여 준 쌈짓돈을 쥐고 상경했다.

***

선우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챙겨 준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균형 잡힌 밥상과 임산부에게 좋다는 영양제까지 받아먹고 잠자리에 누웠다.

선우가 받은 방은 천장의 모양이 지붕의 모양과 같은 다락방이었다. 포근하고 안락했다.

지금까지는 호텔 같은 병원에 있었고 원래라면 유 회장네 집에서 기거할 예정이었지만 유 회장이 어디선가 우성 알파 페로몬을 많이 받으며 생활해야 우성 알파를 낳는다는 속설을 듣고 와서는 범의 집에서 지내라 했다.

언뜻 범이 제 아버지께 생지랄을 떠는 것 같았지만 선우는 그저 유 회장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었기에 그것까진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사는지 안 사는지도 모르게 살라고 했다. 그건 선우도 원하는 바였다.

낯선 곳이라 그런지 잠은 안 오고 잡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정작 배 속에 있는 애기 아빠와는 자 본 적이 없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잡생각을 하니 잠이 더 안 왔다. 배 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저녁을 먹었는데도 뭐가 자꾸 당기고 먹고 싶었다.

선우는 애가 진짜 들은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를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며 여덟 시간 정도 뒤에 아침밥을 주겠다고 달랬다. 다행히 잠이 왔다.

그렇게 호랑이 굴에서의 첫 날 밤이 지났다.

***

잠에서 깨어난 선우가 부엌으로 나와 아침상을 받았다. 남의 페로몬 냄새엔 입덧을 했는데 어째 음식으론 입덧 한 톨을 안 했다.

아주머니는 선우에게 썩 친절하진 않았지만 제 일엔 프로였다. 사무적으로 밥을 차려 주고 사무적으로 임신 수발을 들었다. 언뜻 괄시하는 기색도 비추었지만 선우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당연하다 생각했다. 돈에 환장해 씨받이로 들어온 거니 애 가졌다 유세라도 부릴 입장은 아니었다.

선우는 집주인과 생활 동선이 겹치지 않게 범이 출근을 한 뒤 아침을 먹었다. 밥은 알차고 맛있었지만 양이 좀 적었다.

아주머니는 이십 대의 한창때인 성인 남자에게 밥을 너무 조금 주었다.

오메가들은 원래 조금만 먹는다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유 회장의 첫째, 둘째 며느리들이 임신을 했을 때도 도우미로 고용되었는데 그 바비 인형 같은 우성 오메가들은 밥을 새 모이만큼 먹었다. 첫째 며느리는 남자, 둘째는 여자. 성별은 달랐어도 둘 다 비쩍 말라 체구가 작았고, 남자라고 더 먹는 건 없었다.

선우는 키가 큰 편이었다. 늘씬하긴 하지만 뼈대가 왜소하진 않았다. 그런데 얼굴이, 그 누구보다도 우성 오메가였다. 외모가 형질 주장을 확실히 했다. 그러니 아주머니는 선우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하지만 선우는 고봉밥을 먹는 스타일이었다. 어제는 군말 없이 주는 대로 먹었는데 그 바람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내내 배가 고팠다. 오늘은 밥을 조금 더 먹을까 하여 빈 밥그릇을 들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다 들었어요? 둬요. 내가 치우게.”

“아, 그게 아니고 밥 좀 더 먹으려고요. 제가 알아서 떠먹을게요.”

아주머니는 저리 가라고 손짓하며 밥그릇을 뺏어 들었다. 선우가 살림살이에 함부로 손대는 걸 꺼려 하는 눈치였다. 텃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그러든지 말든지라 선우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제가 살림에 손을 대는 게 싫다면 안 대면 그만이었다. 내 손으로 안 떠먹고 떠다 준다는데 좋은 거지 뭐.

아주머니는 살짝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밥을 한 술 더 퍼 담아 주었다. 조금 더 먹겠다고 했다가 진짜 조금 더 받았다. 선우는 배 속에 아기를 핑계로 한 술 더 달라 그럴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냥 말았다. 양에는 안 차지만 배고플 정도는 아니니까. 반쪽은 제 핏줄인 아기를 돈과 바꾸고 떠나는 것도 퍽 쓰레기 같은 짓인데 배 속에 있을 때까지 아기를 이용해 먹고 싶진 않았다.

선우가 ‘잘 먹었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밥을 먹어 놓고 할머니가 말아 준 멸치 국수를 대접 그득 담아 먹고 싶었다.

음식 생각을 거두기 위해 잠시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했다. 월요일 아침, 거실의 풍경은 일요일이었던 어제 본 거실과 같은 집인가 할 정도로 사뭇 멀쩡했다. 난교 파티를 열고 그대로 퍼질러 주무신 듯한 생 난장판이 어느새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선우는 숨을 크게 쉬며 거실의 공기를 한 번 빨아들이다 피식했다.

애기 아빠는 조폭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상큼한 냄새를 가졌다. 라임 냄새. 환기라도 시켰는지 어제의 그 어지러운 냄새는 빠지고 집주인의 향기만 남아 있었다.

신기했다. 임신을 한 뒤로 조금이라도 타인의 페로몬 냄새가 맡아지면 구역질이 났는데 몸이 애 아빠는 알아보는지 맡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는 어떤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 아빠. 냄새는 좋았다.

하루가 너무 지루했다. 아니다, 지루한 것도 복이다. 선우는 먹고 자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아침을 먹고 잠깐 다시 눈을 붙이니 점심을 주었다.

점심까지 먹은 선우가 마당이라도 좀 거닐기 위해 산책을 나왔다. 조직원들이 너무 많이 지나다녀 불편했다. 산책 정도의 행동까지 못 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베타인 조직원들은 애만 낳아 주러 들어왔다는 선우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보았고 몇몇 알파인 조직원들은 선우를 너무 끈덕지게 쳐다보았다.

임신 중이라 페로몬이 나오지 않을 뿐 선우는 겉보기에 임신한 오메가가 아닌 그냥 오메가였다. 아직 손톱만 한 것밖에 들어 있지 않은 배는 임신한 티가 안 났다. 제 보스의 오메가도 아니고, 접대부 출신이라는 것도 전부 소문이 났을 터이다. 선우가 생각해도 자신은 껄떡거리기 쉬운 상대였다.

선우는 따먹고 싶어 안달이 난 알파의 눈빛을 지난 5년간 징글징글하게 보아 왔다. 지금은 제 몸에 귀한 분이 들어 있어 건들지 못하지만 그들은 열 달 뒤에라도 어떻게 한번 해 보고 싶은 모양인지 제가 지나가자 휘파람을 불고 수작을 걸었다.

‘깡패도 사내 연애에 로망이 있구나.’

선우가 속으로 조소할 때 한 조직원이 가까이 다가와 이름이 무어냐 물었다. 선우는 그 면전에 대고 우웁……! 소리를 내뱉었다. 네 얼굴이 토 나온다는 소리를 하고 싶던 것까진 아니었는데, 그의 페로몬 냄새에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동료 조직원들은 뭐가 좋은지 낄낄 웃으며 선우에게 수작을 걸던 이를 놀렸다.

집 안으로 달려가는 선우의 등 뒤로 상스러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마음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올릴 뿐이었다. 지금은 화장실이 급했다. ‘저 씨발년 저거 형님 애만 나오면.’까지밖에 안 들렸는데 끝까지 안 들어도 대충 알 것 같은 내용이었다.

토를 하고 나온 선우는 ‘조직원 월급으로 날 따먹다가는 패가망신할 텐데.’ 하며 우습게도 조직원의 재정 상태를 걱정해 주었다.

***

강제로 종료된 거나 마찬가지인 산책을 마치고 줄곧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기에게 읽어 주라 넣어 준 동화책을 모두 독파하고 할머니께 전화해 수다를 떨었다. 휴대폰을 좀 보다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있다 보니 저녁을 주었다.

저녁엔 범이 퇴근해 집에 있기 때문에 1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방으로 식사를 받았다. 후식으로 먹을 과일까지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선우는 저를 걱정하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내일은 부잣집에 들어와 아주 호강을 한다 말씀드릴 요량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날 밤이 저무는 듯했다.

일곱 시 반에 저녁을 먹은 선우의 배는 선우가 미처 잠들기 전에 꺼졌다. 방에 과자라도 좀 사다 쟁여 놓든가 해야지 원. 아주 돌 것 같았다. 성인의 인내심이 임신을 하면 배 속에 아기 수준으로 떨어지는가 보았다. 일단 라면이 너무 먹고 싶은데 라면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위장에 뭐라도 좀 채워 넣어 허기를 달래고 싶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선우가 결국엔 참지 못하고 고요한 새벽녘에 방을 빠져나왔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왔다. 슬쩍 눈치를 살피니 불이 모두 꺼진 것 같았다. 다행히 집주인은 자는 모양이었다.

선우는 핸드폰을 비춰 가며 불 꺼진 부엌을 찾았다. 냉장고를 열어 하나쯤 집어 먹어도 티 나지 않을 음식이 뭐가 있을까 살폈다. 오늘 저녁에 먹은 장조림 반찬 통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 불빛에 의존해 메추리 알 두 개와 고기 두 조각을 집어 먹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반찬만 먹으니 짰다. 넣어 두고 다른 걸 물색했다.

이거 조금, 저거 조금 집어 먹었다.

나름 후식이라고 방울토마토 몇 알을 집어 입 안에 우물우물 넣고 있을 때였다. 선우의 목 앞에 스윽 칼이 들어왔다. 선우는 너무 놀라 토마토를 씹던 채로 숨을 멈췄다.

“너 누구야?”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로 선우에게 정체를 묻는 이는, 범이었다. 선우는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은 이름처럼 자란다더니 생긴 것도 호랑이 같았고 근육도 호랑이 같았다. 몸에 검정색 드로어즈 하나밖에 걸친 게 없는데 뭔가 단단한 걸 두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서 상큼한 라임 향이 났다.

칼은 목에 드리워졌는데 선우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 모성애 같은 게 생겼을 리 없었다. 그저 돈줄이니 지키려고 한 것이다 여겼다.

아니 근데, 장조림하고 토마토 좀 주워 먹었다고 칼까지 들이밀 일인가?

별일을 다 겪고 산 선우는 오래 놀라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참았던 숨을 조심스레 내쉬었다. 입 안에 있던 토마토를 마저 씹어 삼켰다. 빠르게 제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을 무어라 소개하기가 난감했다.

“저, 애 가진 사람인데요.”

“……뭐?”

“다락에 사는…… 함부로 내려와서 죄송합니다.”

범은 배를 감싸 쥔 선우의 팔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칼을 내렸다.

“여기서 뭐 하는데?”

“출출해서요. 죄송합니다. 올라갈게요.”

범이 위아래로 선우를 훑었다. 깜깜한 집 안, 냉장고 불빛 하나 비추어진 선우의 모습은 귀신 같았다. 예쁜 귀신.

‘아버지도 참, 예쁘면 예쁘다 말을 하지.’

범은 하는 일이 험해 원수를 지고 살 일이 많았다. 심지어 한 식구인 형들도 범을 시기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칼부림이 하고 싶어 찾아온 침입자인 줄 알았는데 냉장고나 터는 도둑고양이였다. 새끼까지 밴 도둑고양이. 그 새끼가 제 새끼일 텐데 썩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원래 깡패들이 밥 하나는 잘 먹인다.

선우는 줄곧 기합을 받는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 했다. 한 대 맞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데 범은 그냥 뒤돌아섰다.

애기 아빠는 부엌에 불을 켜 주고 떠났다.

선우는 불이 켜진 덕에 홈바 위에 올려져 있던 바나나를 보았다. 큰 송이가 있어 하나쯤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바나나로 손을 뻗는데 아차, 하고 생각난 게 있어 다시 손을 거두었다. 바나나는 먹고 나면 껍데기가 남았다. 그걸 어디다 어떻게 버려 놔야 하는지 애매했다. 흔적이 남는 건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선우는 아기에게 ‘바나나는 내일 줄게.’ 했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애가 먹고 싶은 거겠냐, 네가 먹고 싶은 거지. 스스로에게 일침을 가했다.

다시 다락으로 가 잠을 청했다. 허기를 달래니 잠이 왔다.

***

아침 식탁에 앉은 범이 위층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눈길은 잠깐이었고 이내 수저를 들었다. 아침부터 고기란 고기는 종류별로 차려진 식탁이었다.

기존에 범의 집에 있던 가사 도우미와 선우를 담당하는 아주머니는 별개였다. 둘은 한 사무실을 쓰는 다른 회사 소속 직원들처럼 말을 섞지 않고 제 할 일만 했다.

선우를 케어하는 아주머니가 소반에 밥을 차렸다. 범이 오늘은 출근을 늦게 한다 하여 선우의 방으로 상을 올려 줄 생각이었다.

범은 식사를 하던 중 소반을 슬쩍 보고는 지나치려는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아줌마.”

“네? 네, 사장님.”

“내려와서 먹으라 그래. 나 다 먹었으니까.”

범은 명령조로 한 마디를 남기고 식탁을 떠났다. 그에 범이 먹던 음식들이 치워지고 다시 선우가 먹을 상이 차려졌다. 아주머니들은 누구 담당이냐에 따라 철저히 분업했다.

선우는 아주머니의 부름에 쭈뼛쭈뼛 다락을 내려왔다. 사장님이 계시다 하여 불편했다. 밥 생각이 없다 할까 했지만 배는 고팠다.

사장님은 집주인이자, 애기 아빠이자, 범을 일컫는 호칭일 것이다. 직책이 사장인 줄도 몰랐는데, 부를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부를 일이 있을 때 써먹기 좋은 정보였다.

부엌으로 가기 전, 거실에 있는 범이 보였다. 무시하고 지나쳐야 하는 걸까, 인사를 해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보든 말든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깡패들은 인사를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인 경우가 많았지만 경험상 안 했을 때 더 큰 지랄을 당했다.

다행히 범은 선우를 뚫어져라 훑기만 할 뿐 지랄은 하지 않았다. 알파라면 지긋지긋하게 상대해 온 선우는 그 눈빛을 쉬이 읽었는데 범의 눈빛은 조금 어려웠다. 따먹고 싶다는 눈빛인 것 같다가도 뭔지 모를 게 섞여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패고 싶다는 건가……? 잘 모르겠지만 굳이 생각진 않기로 했다.

선우는 또다시 깔끔하고 정갈한 밥상을 받았다. 여전히 양은 성에 차지 않지만 소고기뭇국이 맛있었다. 한창 먹는데 집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듯 문소리가 났다. 그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릴수록 선우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소고기뭇국이 역류했다.

우욱- 웁-

주방에 있는 사람들, 거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됨을 느꼈다. 선우는 식탁에 토를 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입을 막고 화장실로 튀었다. 얼핏 ‘시발년.’ 소리가 나지막이 들리는 것 같았다. 범의 목소리는 아닌데 익숙했다.

맛있게 먹던 국을 모두 게워 내고 화장실 밖으로 나온 선우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어제 선우에게 수작을 걸어 보려던 그 조직원이었다. 어제에 이어 두 번이나 본의 아니게 네 존재가 토 나온다, 고 몸으로 표현해 버렸다. 진짜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욕할 만도 했다.

그는 소파에 앉은 범의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에 또 헛구역질이 났다.

선우가 코를 막고 아주머니께 조심스레 부탁드렸다.

“저, 여사님. 밥하고 국그릇만 가지고 올라갔다 다 먹고 그릇 가져다드려도 될까요?”

솔직히 이런 부탁까지 해 가면서 먹어야 하나 싶지만 가뜩이나 배가 고픈데 토까지 해서 속이 너무 허했다. 선우도 이런 제 자신이 싫지만 삼시 세끼 골고루 챙겨 주는데도 자꾸 배가 고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꼴사납게 울 수는 없으니 얼굴에 철판 한 번 깐다 생각하고 뻔뻔하게 나갔다.

“속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또 먹게?”

“네. 배고파서요.”

아주머니는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작은 트레이에 밥그릇, 국그릇, 식후에 먹을 호박 즙과 영양제까지 담아 선우에게 건넸다.

저를 경멸하는 게 느껴지는데 할 일은 또 하시는 프로다움에 선우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더 따스한 시선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씹히겠지만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고, 역시나 씹혔다.

선우는 제게 전해지는 등 따가운 눈빛을 모른 척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범이 쳐다보는 건지 그 조직원이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발걸음을 빨리했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 라임 향기가 강하게 퍼져 조직원의 냄새가 묻혔다. 우성 알파라 그런지 작정하고 푼 페로몬의 세기가 다르긴 달랐다. 근데 왜 저러지? 어떤 화나는 일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상책일 것이다.

되게 강하게 푸는데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과즙이 터지듯 새콤하고 상큼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기골이 장대한 남자에게서 나기엔 어울리지 않는 향이라 선우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으로 돌아온 선우는 평화를 되찾았다.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었다. 엄마나 할머니나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 꼭꼭 씹지 않고 넘긴다고 꼭 잔소리를 했었다. 잔소리를 하면서도 김치를 얹어 주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생각이 나니 보고 싶었다.

조금 우울한 것 같아 발바닥으로 전화 받는 상상을 했다. 실실 웃음이 났다. 이러다 혼자 방구석에서 미쳐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혼자가 아니란 게 떠올랐다.

선우는 아기에게 조금 고마웠다. 늘 함께 있어 줘서 버틸 만한 것 같았다.

***

한편 아래층에선 피바람이 불었다.

선우에게 작업을 걸었던 알파 조직원은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제가 들어가자마자 또 구역질을 하며 뛰어가는 선우를 보고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저 씨발년이 어제부터 멕이나?”

선우를 죽일 듯 한 번 노려본 뒤 얼른 표정을 풀고 범에게 다가가 ‘형님, 안녕하십니까!’ 우렁차게 인사했다.

“방금 뭐라 그랬냐?”

“네?”

범이 김 실장의 정강이를 차 넘어뜨렸다. 김 실장은 넘어지자마자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열중쉬어 자세를 잡았다.

“씨발놈아, 말귀 한 번에 못 알아듣지?”

“죄송합니다!”

사람에게는 엄청난 생존 본능이 있다. 김 실장은 고막이 터지도록 맞기 전에 사력을 다해 말귀를 알아들었다. ‘방금 뭐라 그랬냐?’, 가 범의 물음이었으니 그에 맞게 선우를 향해 읊조린 말과 왜 그랬는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동문서답을 했다간 처음부터 못 알아들은 것보다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었다.

범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다 선우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검지 손가락을 입 앞에 갖다 대며 쉿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범은 잠시 선우 하는 양을 눈으로 쫓았다. 김 실장의 페로몬 냄새가 역한 듯했다. 열성이라 조절이 완벽히 안 되고 질질 흘렀다. 음식 때문이라기엔 이 와중에 밥은 또 마저 먹겠다고 챙겼다. 어젯밤 냉장고를 털던 그 모습과 겹쳐 피식했는데 아줌마 하는 꼴이 안 좋은 의미로 흥미로웠다. 저렇게 나오면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안 먹고 말 것 같은데 선우는 좆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았다. 새파랗게 젊은 애가 세상 다 산 표정이었다.

선우가 방으로 사라지고 김 실장은 어금니가 흔들릴 정도로 맞았다. 맞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이나 그 이유를 정확히 하진 않았는데 조폭이 괜히 조폭이 아닌 것처럼 폭력을 행하는 데 이유가 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김 실장을 피떡이 되도록 팬 범이 선우를 담당하는 아주머니를 빤히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머니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범은 이내 눈길을 거두고 별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

선우는 들고 올라간 밥을 다 먹고도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릇을 바로 가지고 내려가면 집주인이 여전히 거실에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밭에 일 안 갔지?”

[안 갔으니까 전화를 받지.]

“응. 가지 마. 나 맨날 전화해서 확인한다.”

[시댁 어른들이나 잘 챙겨. 한 번씩 싹싹하게 전화 드리고. 할머닌 안 챙겨도 되니까.]

“알아서 하네요. 아프면 바로 전화해야 돼 진짜. 알겠지?”

[어휴,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해. 이제 컸다고 할머니한테 잔소리를 다 하네.]

“응. 어릴 때 당했던 거 복수야.”

선우가 장난스레 말했다. 할머니와 전화할 때만큼은 어린 티가 났다. 할머니는 손주 장난에 기분 좋게 웃으셨다.

[안 불편해? 잘해 줘?]

“응. 덕분에 호강해. 내 손으로 아무것도 안 해. 그래서 시간이 많아. 자주 전화할게. 아, 할머니 용돈 준 거 아끼지 말구 써. 2주 뒤에 가니까 가서 돈 썼는지 안 썼는지 확인할 거야.”

[그 집에서 흉 봐. 할머니 알아서 하니까 돈 줄 필요 없어. 손주 사위가 애써서 번 돈인데 함부로 퍼 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괜히 싫은 소리 듣지 마.]

손주 사위라는 표현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손주 사위라는 귀여운 호칭과는 심히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잘못 귀여워했다가는 경을 칠 것 같은 호랑이를 떠올렸다.

“싫은 소리 하면 집 나가지 뭐.”

[그래, 뭐라 그럼 나와. 참고 살 거 없어.]

선우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할머니는 괜히 미움 사지 말랬다가 미워하면 박차고 나오라는 앞뒤 안 맞는 소리를 했다. 그럼에도 그게 어떤 마음인지 전해져 가슴이 찡했다.

[혹시 같이 와?]

침묵을 깨고 할머니가 물었다. 안 와도 된다더니 은근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누구? 할머니 손주 사위? 글쎄, 바빠서……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왜?”

[닭이라도 사다 놔야지. 같이 오면 꼭 미리 말해.]

“나는? 나만 가면 안 해 주고?”

“아니, 두 마리 살지 한 마리 살지 알아야지.”

[치, 할머니는! 할머니도 세야지. 오든 안 오든 무조건 세 마리 사! 아, 아니다. 사지 마. 무거워. 내가 사서 들고 갈 테니까 장 보지 마.]

선우가 온다는데 장을 안 볼 리 없지만 할머니는 대충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와 통화를 마무리한 선우가 빈 그릇과 지갑을 챙겨 일어났다. 계단을 반쯤만 내려가 보고 아직 거실에 범이 있는 듯하면 다시 올라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락방의 미닫이 방문을 드르륵 열었을 때, 선우는 깜짝 놀라 그만 들고 있던 트레이를 떨어뜨렸다.

선우는 갑자기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쳐 억 소리 나는 빚을 갚으라고 한 뒤로 겪은 갖은 풍파 덕분에 웬만한 일에는 무던했다. 그래서 오감도 무던해졌나 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문 앞에 서 있는 게 아주머니도 아니고 범이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박 즙이 들어 있던 유리컵은 깨졌는데 다행히 나머지 사기그릇들은 소리만 요란하게 나고 깨지지 않았다.

선우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배를 한 번 어루만졌다. 앞에 범이 있어서 육성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아기에게 사과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 그래도 네 아빠니까 너무 놀라지 마.’

선우는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언제부터 문 앞에 있었을까, 망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크게 말하진 않았지만 할머니와의 통화가 들렸을지 몰랐다. 할머니가 혹여 의심하고 걱정할세라 남편, 신랑, 그이, 손주 사위 같은 낯간지러운 표현을 입 밖으로 잘도 뱉었는데 오늘은 진짜 한 대 맞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배 아픈 척할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단념했다. 선우는 아기를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작전은 차마 펼칠 수가 없었다.

아기에게 한 번 더 사과했다. ‘그냥 내가 다 미안.’ 했다. 선우는 아기에게 자기 자신을 엄마나 아빠로 표현하지 않았다. 범만 아빠였다.

범이 ‘훠이.’ 하며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멍하니 있던 선우가 물러나자 범이 쭈그려 앉아 떨어진 트레이에 그릇들을 담았다. 깨진 유리 조각도 툭툭 조심성 없이 치웠다. 선우가 재빨리 몸을 숙여 제가 치우려 들자 범이 씁, 하고 혀를 찼다.

선우는 다시 입을 다물고 벌을 받듯 가만히 서 있었다. 유 회장의 독단으로 생긴 아기인데 범은 생각보다 부성애가 있나 보았다. 네 아빠 넌 끔찍한가 보다, 하고 아기에게 알려 주었다.

범이 계단 아래에 대고 아줌마를 불렀다. 깨지는 소리가 아래까지 들렸는지 아주머니는 말도 안 했는데 자그마한 핸드 청소기를 들고 나타나셨다.

다락이라 문 앞에 서 있을 만한 공간이 넓지 않았다. 범은 올라오는 아주머니께 트레이를 건네고 선우에게 훠이훠이 한 번 더 손짓했다. 뒤로 더 물러나면 방이었다. 선우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범도 따라 들어왔다. 범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선우만 어색하고 범은 별로 어색하지 않은 듯했다.

범은 입맛을 다시며 선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좀 헷갈리는 눈빛이긴 했지만 입맛을 다시는 걸로 보아 따먹고 싶다는 게 맞아 보였다.

“노블레스 출신이라며?”

“네.”

노블레스는 선우가 접대부로 일하던 카지노의 VIP 라운지를 일컫는 이름이었다. 선우는 그가 출신을 운운하기에 제 생각을 확신했다. 굳이 상스러운 출신을 되짚어 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저 아직 초기라 넣는 건 안 되고요, 빠는 건 백이요. 해 드려요?”

선우가 심드렁히 묻자 범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뚜까 패고 싶은데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범은 다시 선우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존나 하나도 안 웃긴데 말이다.

체통 없이 크게도 웃던 범이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소리로 또라이네, 했다.

“백만 원이면 돼? 더 불러.”

“……그럼 백에 자두요.”

더 부르라기에 빼지 않았다. 선우는 자두를 떠올리고 침을 꼴깍 삼켰다. 앉은자리에서 한 바구니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씨가 슬슬 더워지긴 하지만 이제야 6월의 시작이었다. 7월은 돼야 제철인데 파는 데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백이면 제값은 다 받은 거니 없으면 말고 식으로 제일 당기는 걸 불렀다.

범이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빨아 줄 테니 자두를 사 오라는 또라이는 처음이었다. 애가 살짝 미친 것 같은데 고와서 그런지 밉진 않았다. 이래서 미치려면 곱게 미치라는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범은 두 손으로 돈을 받는 선우를 빤히 관찰하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서 있었다.

옷도 직접 벗겨 주는 거 좋아하는 타입인가? 선우는 벨트도 안 풀고 저를 쳐다만 보는 범의 눈치를 살피다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자 범이 저지했다.

“아직 자두 안 받았잖아.”

“네? 아니 지금 하고 싶으시면 먼저 해 드릴게요.”

범은 됐다 그러고 방을 나섰다. 지나가는 말로 ‘딸인가?’ 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범의 말에 선우도 ‘자두 찾으면 딸인가?’ 생각했다.

선우는 범이 건넨 백만 원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삼십 분 정도를 기다렸다. 범이 외출복이었던 걸로 보아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나갈 것 같았다. 밤마다 냉장고를 털 수는 없으니 간식거리를 사러 가까운 슈퍼라도 가고 싶었다.

선우가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범은 나가고 없었다. 부엌에 선우의 점심을 준비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기웃거리는 선우를 보고 아주머니가 먼저 물었다. 선우는 솔직하게 간식거리가 필요해 슈퍼에 좀 다녀오고 싶다 말했다. 일찍 자는 편이 아니라 밤에 출출하다 고백했다. 아주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간식이 필요하면 제게 말하라 답했다.

“아, 아니요. 그럴 것까진 없고 그냥 비상용으로 초코파이나 좀 사다 놓으려고 하는데요.”

“과자 같은 거 몸에 좋은 것도 아닌데 웬만하면 들지 말아요. 회장님이 좋은 것만 먹이라고 특별히 지시했는데 그런 거 먹음 내가 욕먹어요.”

쌀쌀맞긴 하지만 듣고 보면 선우를 위한 말이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선우를 위한 말은 아니고 아기를 위한 말이었다. 귀한 생명은 과자도 함부로 먹이면 안 되는가 보았다. 더럽게 유난이란 생각을 했지만 선우는 돈을 받을 예정이므로 불평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유 회장에게 고용된 사람이고 유 회장 지시에 따르는 게 당연했다. 고로 선우가 굳이 과자를 먹고 싶다면 유 회장에게 말해야 했다. 유 회장을 통해 아주머니께 전달되어야 맞는 통로였다.

초코파이가 먹고 싶다고 회장님께 전화를 걸 순 없으니 선우는 슈퍼 털이를 포기해야 했다. 아주머니는 대신 바나나 한 개와 화학 첨가물이 안 들어 있다는 유기농 고구마칩을 주었다.

“정 배고프면 먹고 있어요. 점심시간 곧이니 너무 많이 들진 말고. 간식 많이 하는 거 안 좋으니까 앞으로는 밥 양을 조금 더 잡을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밥을 더 준다는 말에 초코파이를 사지 못해 실망한 마음이 금세 풀렸다. 없어 보이게 너무 좋아했다. 조금 민망해진 선우는 아주머니가 준 간식을 들고 냉큼 방으로 돌아갔다. 식충이 취급을 해도 상관없었다. 아기가 나오면 다신 보고 살 일 없는 사람이었다. 곧 할머니와 살 날이 올 테니 조금만 참으면 되었다.

“그렇다고 빨리 나오라는 건 아냐. 빨리 나옴 너 아야 해.”

선우가 배를 살살 문질렀다.

다락엔 창이 크게 나 있었다. 창을 열고 기지개를 켰다. 너무 움직이지 않아 갈수록 체력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격하지 않을 정도로만 스트레칭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쐤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였다.

서울에 오면 제가 자란 동네에는 없는 큰 대형 마트나 백화점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마트는커녕 여기가 서울인지 어딘지도 모르게 집에만 있어야 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가던 읍내 시장이라도 좋으니 좀 돌아다니고 싶었다. 찌뿌둥하고 지루했다.

안 맞아서 지루하냐 너는, 선우가 픽 웃었다. 네가 지난 5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떠올려 보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러니 안 지루했다.

***

저녁까지 1층에서 먹었다. 범이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까 점심부터 지금 저녁까지, 선우는 밥상을 받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밥 양을 조금 더 잡겠다던 아주머니는 정말 ‘조금’ 더 잡으셨다. 심지어 이번 저녁은 양식이라 밥도 없었다.

물론 과식해서 더부룩하거나 얹히기라도 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제가 아프면 아기도 아플 것이고, 아기가 아프면 유 회장이 아주머니에게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이리 유난스레 관리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완전히 익혔는데도 스테이크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근데 세 입 거리였다. 밥 대신 으깬 감자를 주었는데 감자는 할머니와 먹던 게 더 맛있었다. 선우는 뜨거운 걸 잘 못 만지는데 할머니는 어찌 그리 잘 만지는지, 손수 껍질을 까 설탕을 찍어 주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이번에 내려가면 감자 쪄 달라고 해야지, 선우가 혼자 히죽 웃었다.

스테이크 옆에 가니쉬로 있던 아스파라거스, 당근, 가지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싹싹 긁어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왔다. 올라올 때까지도 실실 웃었다.

그러고는 방문을 닫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삼시 세끼에 간식, 후식까지 챙겨 먹으면서 저녁밥을 먹는 내내 적다, 이따 배고프겠다, 이따위 생각만 한 자신에게 너무 짜증이 났다. 그 감정을 숨기려 애써 웃으며 밥을 먹었는데 방에 오니 갑자기 설움이 터졌다.

원래 먹기는 잘 먹지만 식탐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밥도 좋지만 잠이 더 좋아 자느라 끼니를 거른 적도 많았다. 잘만 그러던 자신이 이제는 왜 그러지 못하는지 화가 나서 울었다.

그리고 고작 이것 가지고 우는 자신이 한심해서 더 눈물이 났다. 임신은 생각보다 무서운 거였다. 감정 기복이 널을 뛰었다.

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똑바로 안 빤다고 손님이 던진 재떨이에 맞은 날에도 선우는 울지 않았다. 호강에 겨워 우는구나 싶었다.

혼자 우두커니 서서 숨죽여 울다 손으로 슥슥 눈물을 닦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울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져 기분이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 상태. 세수를 해도 눈가가 붉었는데 두어 시간쯤 지나니 운 것 같지 않은 모양새가 되었다.

책도 읽고 핸드폰으로 동영상도 보고 말동무가 없으니 배 속에 있는 아기와 내내 대화를 했다. 그러다 문득 게임을 해 볼까? 생각했다. 잘 하지도 않던 핸드폰 게임을 여러 개 다운받았다.

와, 시간 죽이는 데 이만한 게 없었다.

선우는 너무 집중을 하여 핸드폰 화면에 뽀뽀라도 할 기세로 입술을 내밀고 게임을 했다. 총 쏘고 전쟁하는 게임이 제일 재밌었는데 이는 아기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하루 딱 한 판씩만 하기로 했다. 대신 파스타 가게와 커피숍을 차려 운영하는 게임을 주로 했다. 이런 건 아기 정서에도 좋지 않을까? 하며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집중할 거리가 생겨 앞으로 이 고립의 생활을 좀 더 수월하게 보낼 것 같았다.

한창 게임에 몰두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는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던 선우는 책상에 올려 두었던 백만 원을 보고 깨달았다.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간 호랑이 앞발에 아구창이 터질 수도 있었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 있다 현실로 돌아오니 급 허기가 졌다. 밤이 늦어 누구나 출출할 시간이었다. 선우는 네가 돼지인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또 갑자기 울지 모르니 저라도 저를 달래 보았다.

범은 샤워 가운 차림이었다. 물기 남은 머리카락들이 아무렇게나 쓸어 올려져 있었는데 인상은 더러워도 잘생기긴 한 얼굴이었다. 키가 컸다. 선우는 오메가 기준 걸리버, 베타 기준 큰 편, 알파 기준 평범한 키에 속했는데 범은 그런 선우보다 십 센티는 커 보였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면 건방지다 할까 봐 선우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에 시선을 두었다.

범은 그런 선우에게 고개를 들어 보라 말했다. 얼굴 구경 좀 하자, 하니 의무적인 표정의 영혼 없는 눈동자가 옜다 먹고 떨어져라 하듯 얼굴을 보여 주었다. 기가 찼지만 예뻐서 참았다.

“먹고 빨래, 빨고 먹을래?”

헐, 자두 진짜 사 왔나? 선우는 갑자기 조금 두근거렸다. 자두의 새콤달콤한 맛을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선우는 제 감정의 동요나 변화를 잘 숨기는 재주가 있었는데 범은 어찌 읽었는지 ‘좋냐?’ 했다.

“아, 네. 빨고 먹겠습니다.”

“내려와.”

“네.”

범이 선우를 거실 소파에 앉혔다. 소파 테이블에는 백화점 종이 가방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백화점에서 파는 건 비쌀 텐데, 아직 과일 가게엔 자두가 안 나왔나?

선우에게 빠는 것 정도는 너무 별일이 아니어서 선우는 펠라를 앞두고 내내 자두 생각만 했다.

선우의 앞에 선 범이 샤워 가운을 풀었다. 우성 알파라기에 예상은 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사이즈에 그제야 살짝 걱정이 되었다. 경험이 많은 선우지만 손님들 중에도 우성 알파는 정말 간간이 보았다. 그만큼 흔치 않은 형질이었다.

애인이 크면 사랑스럽다는데 선우는 크면 한숨부터 나왔다. 크면 빨아 주기도 힘들고 박히는 것도 배로 아팠다. 턱과 목구멍이 벌써 아리는 것 같았다.

후, 심호흡을 깊게 하고 입을 벌렸다.

“으윽……! 씨발…….”

범이 선우의 머리칼을 그러쥐고 고개를 젖혔다. 제 손으로 처박지 않아도 동그란 뒤통수가 알아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범은 아까부터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절정이 다 와 가는 듯했지만 쉬이 가진 않았다. ‘와, 씨발 존나 잘 빤다.’ 하는 칭찬을 세 번가량 했다.

선우는 정말 정신없이 빨았다. 백만 원이나 받았으면 당연히 잘 빨아야지, 뭘 또 칭찬까지 해 주시고 그러냐. 혀를 내어 기둥을 크게 핥다가 범의 칭찬에 속으로 피식했다.

널리고 널린 게 성행위를 사고파는 업소인데 펠라 한 번에 백만 원을 받아먹는 가격 정책은 솔직한 말로 바가지였다. 얼마나 잘 빨길래 빠는 것만 백을 받냐 비아냥대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다. 백만 원을 만 원처럼 쓰는 도박쟁이들 주제에 괜히 시비였다.

그나저나 빨리 싸야 빨리 자두를 먹을 텐데, 범은 참 잘 버텼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선우는 매너 있는 손님들에게 관대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더 그랬다. 범은 제 허리를 튕기거나 선우의 머리통을 마음대로 흔들지 않았다.

가끔 손님들 중에 두어 번 빨아 올리면 싸 버리는 조루들이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10초 유희에 백만 원을 날린 게 아까운 건지, 그들의 정확한 심리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면 폭언을 퍼부으며 애꿎은 선우를 잡았다. 잘 빤 죄밖에 없는데. 그래서 선우는 빨리 싸는 손님만 오면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래, 빨리 싸는 것보다는 낫다.’

선우가 제 목구멍이 찔리도록 더 깊숙이 범의 성기를 담았다. 딥쓰롯은 값을 조금 더 받는데 그냥 자두 값이다 생각하고 해 주었다. 컥컥 헛구역질 소리가 나고 눈에선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범은 좋아 죽는 것 같았다. 분명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다급한 손길로 제 아래에 박힌 선우의 얼굴을 떼어 냈다. 마음이 급해 홱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놓고 머쓱한 손길로 선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다쳐. 하지 마.”

“아……. 네.”

선우는 범의 성기에 다시 머리를 묻고 하던 대로 했다. 구역질이 나지 않을 정도로 들어가는 데까지만 넣고 열심히 빨았다.

범의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터지기 직전처럼 딱딱해진 성기에 불거지는 핏줄이 보였다. 선우는 마무리를 위해 손으로 고환을 살살 굴리고 혀로 귀두를 누르면서 쭙쭙 빨았다.

“하 씹, 씨발……. 으윽……!”

범이 허벅지 근육을 꿈틀거리며 선우의 입 안에 사정했다.

끝까지 짜낸 정액을 입에 머금은 선우가 잠시 고민했다. 원래 삼키긴 하는데 아기 때문에 아무거나 배 속에 넣기가 그랬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던 범이 제 커다란 손을 선우의 입 앞에 대 주었다. 한 손만 댔는데도 큰 우물이 만들어졌다.

선우가 범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잠시 시선을 올려 범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 열렬해 냉큼 눈을 피했다. 하얗고 끈덕진 액체를 그의 손에 조심스레 뱉어 냈다. 입으로 받은 걸 뱉은 건 처음이었다. 뱉으면 뱉었다고 따귀가 날아오기 십상이라 역해도 삼켰다. 삼키다 보니 나중엔 익숙해졌다.

범은 나머지 한쪽 손의 검지와 중지를 선우의 입속으로 넣었다. 입 안에 남아 있는 정액을 싹싹 긁어 갔다.

“아. 크게 해.”

선우가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썩 깨끗한 방법은 아니지만 선우는 오히려 깔끔을 떨지 않는 게 좋았다. 샤워를 마친 범의 손가락에선 짠맛이 아닌 물맛이 났다.

범은 정액과 타액으로 범벅이 된 손을 씻기 위해 부엌 싱크대로 향했고 선우에게 자두를 들고 따라오라 일렀다.

부엌으로 따라간 선우가 식탁 위에 종이 가방 두 개를 올려 두고 그 앞에 서서 과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종이 가방 하나엔 전부 자두가 들어 있었다. 포장만 번지르르하고 한 팩에 고작 여섯 개가 들어 있는 자두의 가격표를 보았다. ‘0’이 하나 더 붙은 줄 알고 눈을 의심했다. 미쳤다고 이 돈을 주고 사 먹나 하면서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총 다섯 팩이 들어 있었다. ‘너네 아빠 손은 커서 좋다.’ 자두를 보며 아기와 수다를 떨었다.

다른 종이 가방에는 체리, 복숭아, 망고, 파인애플이 들어 있었다. 이건 저 먹으라고 사 온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선우의 침샘이 폭발했다. 특히나 깨끗이 손질된 파인애플의 빛깔이 영롱했는데 파인애플은 먹으래도 먹기가 그랬다. 임산부에겐 파인애플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선우가 자두 하나를 꺼내 티셔츠에 쓱쓱 문지른 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자두는 펠라를 해 준 값이니 눈치 볼 것 없이 제 것임이 확실했다. 먹기 전에 듣든지 말든지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했다. 아주머니한테는 매일 씹혀서 이에 대한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손을 씻던 범이 선우를 돌아보고 앉아서 편히 먹으라 했다.

그제서야 제가 앉지도 않고 자두에 눈이 돌아 입부터 갖다 댔다는 걸 깨달았다. 선우가 입에 자두를 물고 엉거주춤 의자를 빼 앉았다. 자두는 비싼 값을 하는 맛이었고, 선우는 근래 들어 가장 행복했다. 범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범은 선우의 옆에 서서 자두를 먹는 선우를 빤히 쳐다보다 나중엔 선우의 옆자리에 앉아 대놓고 관찰했다. 선우는 이 세상에 자신과 자두, 둘만 남았다는 듯 그런 범을 좆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범이 침을 삼켰다. 확실히 자두 때문에 넘어간 침은 아니었다. 범은 제게 눈길 한 번 안 주는 선우를 저 나름 다정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일 또 할래?”

선우가 입가에 자두 과즙을 잔뜩 묻히고 범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 한대도 달라질 거 없으면서 묻긴 왜 묻나 싶었다. 선우는 그저 ‘네.’ 하고 단조롭게 대답했다.

네 좆대로 하라는 투가 역력했다. 범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선우는 다시 자두에 집중했다.

“내일은 백에 뭐?”

“라면이요.”

“그건 먹고 싶음 먹음 되잖아. 널렸는데.”

“아……. 네.”

그런 인스턴트 음식 따위를 네 새끼에게 주면 안 된단다, 를 어떤 표현으로 돌려 말할 수 있을까? 선우는 설명하기 복잡해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범이 주면 범이 줘서 먹은 거다 할 수 있으니 달라 하려던 건데 그가 왜 당장도 먹을 수 있는 걸 펠라 값으로 부르냐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네, 그러네요.’ 하고 말았다. 빠르게 체념한 선우가 라면 말고 다른 건 뭘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데 범이 물어 왔다.

“지금 먹을래?”

선우는 범이 여태 본 중 가장 영혼 있는 모습으로 대번에 ‘네.’라고 답했다. 부끄러움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회가 있을 때 먹어야 했다. 안 그럼 라면 먹고 싶다고 방에 가서 또 질질 짤 수도 있었다.

범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비웃는 거겠지만 웃으니 조금 덜 무서웠다.

범이 전화를 들어 누군가를 불렀다. 선우는 다섯 번째 자두를 들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혹시나 너무 많이 먹고 탈이 나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앉은자리에서 한 바구니를 먹어도 탈이 나지 않던 위장이긴 한데 임신 후부터 줄곧 유난스런 관리를 받다 보니 괜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지레 걱정이 되었다.

“그거 먹고 되냐? 다른 것도 먹어.”

범의 말에 선우가 자두 말고 다른 과일들도 저를 위해 사 온 것임을 확인했다. 아기를 위한 거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미 자두를 네 개나 먹었는데 범은 코딱지만큼 먹는다고 중얼거렸다. 먹는 데 환장한 돼지처럼 보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라면 먹을 거니까 내일 먹을게요.”

범의 연락을 받은 준석이 도착했다. 별채에 있던 준석은 범의 부름에 라면을 끓이러 달려왔다. 액면가가 범보다 한참 위인 것 같았지만 범에게 ‘부르셨습니까, 형님!’ 했다. 설마 진짜 형이어서 형님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준석은 선우에게도 자기소개를 했다. 너무 우렁찬 준석의 목소리에 선우는 골이 다 울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준석이 친근하게 대해 주어 저도 공손히 대했다.

준석은 놀랍게도 스물일곱이라고 했다. 범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그는 조카뻘인 늦둥이 막냇동생이 있어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자기도 같이 수발을 들었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해 주었다.

“몇 개 끓일까요, 형님?”

“너 한 세 개 먹냐?”

범이 선우를 보며 물었다. 범이 기본이라는 듯 제시하는 라면의 양이 너무 푸짐해 선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다 재빨리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갠다고 맞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맞는 건 상관없는데 혹시라도 라면을 안 주는 건 상관이 있었다.

“전 한 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두 개는 기본으로 먹는데 자두도 먹었고, 먹고 바로 잘 테니 두 개나 먹으면 더부룩할 것 같았다. 몸에 좋은 걸 먹는 것도 아니니 꾹 참았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라 배가 불러도 욱여넣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순간의 욕구 때문에 아기를 아프게 하면 아기를 위해 이 모든 걸 해 주고 있는 범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선우가 하나만 먹겠다고 하니 두 젓가락이면 다 먹는 걸 누구 코에 붙이냐며 범도, 준석도 한 소리씩 했다. 그 말에 선우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제 마음을 이해받는 기분이 낯설고 좋았다.

준석은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알아서 시키지도 않은 식탁 정리를 시작했다. 조폭도 싹싹해야 해 먹고 살 수 있나 보았다. 그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딱히 대답하는 이는 없는 혼자만의 수다였지만 범이 그냥 놔두는 걸로 보아 꽤나 아끼는 부하인 듯했다.

준석이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내고 식탁 위에 펼쳐 둔 과일들을 넣었다. 그러다 임산부에겐 파인애플이 좋지 않다 범에게 알려 주었다. 범의 눈썹이 꿈틀했다.

“먹으면 안 되는데 그걸 왜 담아. 가져가서 너나 먹어.”

준석이 냉장고에 두려던 파인애플을 다시 꺼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형님!’ 했다. 준석은 라면을 뚝딱 끓였다. 선우의 앞에 냄비째로 놓아 주고 김치도 접시에 덜지 않고 통째로 주었다.

범이 그런 준석을 바라보며 씁, 혀를 찼다.

선우는 음식들을 깔끔하게 담아내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줄 알았다. 이건 이렇게 막 먹는 맛인데, 괜히 설거지 거리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아 괜찮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범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으니 그냥 나대지 않았다.

“수저 안 갖고 오냐?”

아, 그게 아니구나. 선우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눌렀다. 이 집에 오고 처음으로 사람 사는 냄새를 느꼈다.

준석은 ‘죄송합니다!’ 하고 크게 외치며 냉큼 선우에게 수저를 건넸다. 앞접시 명분으로 냄비 뚜껑도 주었다. 그러고는 범의 훠이훠이 손짓에 파인애플을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빠느라 수고했는데 많이 먹어라.”

선우가 뜨거운 라면을 냄비 뚜껑에 덜어 후후 불었다. 튀어나온 주둥이가 귀여워 범은 선우의 입술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건 안 파나?’

선우는 범이 쳐다보든 말든 후루룩후루룩 잘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범이 한 번씩 김치도 먹으라고 훈수를 두면 김치도 집어 먹었다. 할머니가 만든 갓김치랑 먹으면 정말 꿀맛인데, 내일은 할머니께 전화해 집에 갓김치가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생각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러다 아차, 하고 얼른 미소를 거뒀다.

범은 아까부터 자꾸 웃다 마는 선우에 감질이 났다. 5년이나 접대부를 했다더니 살랑살랑하게 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도도한 게 컨셉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기엔 별것도 아닌 거에 혼자 히죽 잘도 웃었다. 선우는 매번 조금 웃다 금세 미소를 거둬 갔다. 사람 안달 나게.

“빠는 거 말고 다른 건 안 팔아?”

“손으로 해 드리는 건 칠십이고요, 키스는 오십이요.”

선우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심드렁히 가격을 나열해 주었다. 사실 값은 이거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매겼다. 손으로 하다 끝에만 입으로 받아 주는 거, 키스를 하며 아래끼리 서로 비비는 거 등등 선우가 일하는 곳에서는 전부 돈이었다. 다만 그가 푼돈만 내고 뭐 하나라도 더 해 보려 더럽게 구는 진상은 아닌 듯해 굳이 그렇게까지 가르진 않았다.

“웃는 건?”

“네?”

“웃는 건 얼마냐고.”

“아……. 글쎄요, 그건 따로 안 팔아 봐서…….”

선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애당초 팔릴 일이 없는 걸 팔 리가 없었다. 사실 키스나 손으로 해 주는 대딸도 가끔이지 자주는 안 팔렸다. 차라리 조금 더 내고 넣거나 빠는 걸 시키지, 연애질 하자는 것도 아닌데 입맞춤 한 번에도 돈을 내게 하면 굳이 안 해도 된다 여기는 사람이 다수였다.

하물며 키스도 그런데, 웃는 건 누가 사나.

하하, 선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굳이 사시려는 건가 싶어 그냥 웃어 드렸다. 라면 값이다 생각하고.

선우의 로봇 같은 미소에 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우는 범의 웃음 포인트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범이 웃기에 저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앞에 있는 사람이 웃으니 자연히 따라 웃게 되는 그런 웃음이었다. 이번엔 억지가 아니었다.

“어, 그거.”

“네?”

“방금 웃은 그거. 그거 얼마냐고. 자두 먹을 때처럼 웃는 거.”

“아……. 글쎄요……. 굳이 돈 내지 마시고 자두 먹을 때마다 와서 보시는 건 어떠세요? 돈 받아도 똑같이 해 드릴 자신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양심 있는 상인 선우에 범이 다시 웃었다. 범이 웃으니 선우도 또 따라 미소 지었다. 제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오는 미소였다. 범이 ‘잘만 하네.’ 하며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스레 민망해진 선우가 다시 라면 냄비에 얼굴을 박고 국물에 동동 떠 있는 계란을 건져 먹었다. 짭조름한 라면 국물 맛이 밴 계란을 왕 하고 한입에 넣으니 자두를 베어 물었을 때와 같은 미소가 나왔다.

‘자지 빨면서 그러고 웃으면 씨발, 녹겠네.’ 하고 범이 중얼거렸다.

“네? 또 빨아요?”

“귀도 밝다. 뭔 말만 하면 빤대? 라면이나 마저 잡수세요.”

범이 선우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네.’ 하려는 선우의 단조로운 답변을 예상한 범이 선우를 따라 동시에 ‘네.’ 했다.

줄곧 속으로만 피식하던 선우가 밖으로 피식했다. 그 모습도 누군가의 눈엔 퍽 예뻤다.

다 먹은 라면을 치우려는 선우에 범이 그냥 두라 일렀다.

안 그래도 아주머니가 살림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범이 하지 말라 그러니 깔끔하게 손을 뗐다. 선우가 겪어 온 바 조폭들은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는 걸 싫어했다.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범이 올라가려는 선우를 거기 잠깐 있어 보라며 붙잡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얌전히 계단 앞에 서서 잠시 대기했다.

지갑을 가지고 나온 범이 선우에게 오십만 원을 건네며 키스를 샀다. 평소였다면 ‘감사합니다.’ 하며 수표를 받고 망설임 없이 입술을 붙였을 선우지만 이번엔 구매자에게 상기시켜 줘야 할 사항이 있어 즉시 행동하지 않았다.

“지금요?”

“어.”

“저 라면이랑 김치 먹었는데요?”

“더 맛있겠네, 그럼.”

범은 비위가 많이 좋은 듯했다. 선우는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네.’ 했다. 선우가 수표를 건네받자 범이 한 팔로 선우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가만 입술을 벌리며 기다리는 선우에 범이 씩 입꼬리를 올리고 다가왔다. 그 미소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 부끄러워진 선우가 눈을 감았다. 설렐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설레기 싫었다. 손님한테 설레는 것만큼 비참한 게 없다.

선우는 눈을 감고 적극적으로 혀를 얽었다. 누구와 하는지 떠올리지 않고 키스라는 행위만 팔았다. 그런데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아마 범이 키스를 잘해서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오십만 원짜리 굿나잇 키스를 나눴다.

***

다음 날 아침 선우는 범의 집에 온 이래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배가 고파 아침 먹을 생각만 하며 잠들던 날과 달리 아주 푹 자고 일어났다. 선우는 원래 잠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도통 밤잠을 오래 자지 못했다. 밤에 못 잔 잠을 낮에 짤막짤막 끊어 잤다. 온종일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자꾸만 변해 가는 자신이 조금은 두렵기까지 했는데 간만에 늦잠을 자니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기지개를 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범이었다.

벌컥벌컥 막 열고 들어올 것같이 생겨 가지고 꼭 노크를 했다. 범은 깡패임을 숨기기 위해 유식한 척이나 고상한 척 같은 걸 하지 않았는데 은근히 생활 매너가 있었다. 선우는 그게 조금 웃겨 문을 열기 전에 히죽 웃었다. 잠깐 웃고 다시 입꼬리를 내린 뒤 문을 열었다.

범은 선우를 보자마자 면전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매너 있다 생각하자마자 매너가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침인데 웬 보름달이 떴네. 훤하다, 아주.”

아 뭐래, 선우는 습관처럼 귀를 후비적거릴 뻔했다. 범이 저를 위협하거나 무섭게 대하지 않으니 잠시 긴장을 놓을 뻔한 것이다. 제 행동에 간신히 제동을 걸었다. 잘해 준다고 나대면 아마 참담한 끝을 볼 것이다. 선우가 아는 세상은 보통 그랬다.

범은 제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못 알아듣는 듯한 선우의 양 볼을 동시에 꼬집었다. 꼬집고 보니 생각보다 더 말랑했다. 출근 준비를 다 마친 것 같은 정장 차림으로 방정맞게 씨팔, 씨팔 거리며 선우의 볼살을 주물럭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우는 오리주물럭이 먹고 싶어 침을 꿀꺽 삼켰다.

범이 선우의 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뜬금없이 물었다.

“볼에 비비는 건 얼마야?”

“네? 볼에 뭘 비비시게요?”

“자지.”

가지가지 하는 변태였다. 그래도 선우는 아기에게 범을 옹호해 주었다.

‘우성 알파는 해소가 안 되면 돈다더라. 네가 이해해. 네 아빠도 다 사정이 있어 저러는 거겠지.’

선우는 아빠가 험히 돌아가시고 난 후로도 계속 아빠를 저주했다. 아빠가 밉고, 싫고, 죽어도 용서가 안 되었다. 허나 제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아빠인 범을 좋아했음 했다. 낳아만 주고 토낀 저는 당연히 미울 테고, 거기에 범까지 미워하면 아기의 마음고생만 심할 것이다. 누굴 미워한다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퍽 심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아빠 말고는 웬만하면 아무도 안 미워해.’

아기에게 저 나름 인생의 진리를 말해 주었다.

선우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범이 선우의 뺨을 살살 쓸며 이건 팔기 싫으냐 물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이것도 팔아 본 적이 없어서. 쌀 때까지 볼에 비비시게요?”

“아니. 그래서 평생 싸겠냐? 볼에 좀 비볐다고 싸면 그 새낀 세상 살지 말아야지.”

쓸데없이 단호한 범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진짜 손대자마자 싸는 사람도 봤는데.

선우가 웃으니 범은 예쁘다 중얼거렸다.

“잠깐 비비시는 거면 그냥 비비세요.”

“뭐 사은품이냐? 그럼 먹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걸로 말해. 다락방에서 옥살이하는데 낙이 없을 거 아냐.”

다락방이 좋은 선우는 다락방을 비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것과 바꾸라는 건 좋았다. 별거 아닌 것도 하나하나 통제 당하는 선우에겐 소중한 제안이었다.

“그럼, 오리주물럭이요.”

“그래. 이따 퇴근하고 부를 테니까 내려오라 그럼 내려와.”

“네. 안녕히 가세요.”

범이 오냐, 하고 떠났다.

선우는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기 전 세수를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범의 보름달 타령을 이해하게 되었다. 라면을 먹고 자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진짜 달덩이였다.

‘너네 아빠가 또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아니네.’

아기에게 범을 칭찬해 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침은 닭 가슴살 샐러드였다. 그간 양은 좀 적었지만 정갈하게 한식으로 차려 주던 아침밥이 풀떼기로 바뀌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건 임산부 식단이 아니고 연예인 식단 같은데?

선우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침밥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분들이었다. 그 밑에서 자란 선우는 아침부터 고봉밥을 주어도 잘만 먹었다. 그러니 샐러드는 솔직히 애피타이저를 받은 건가 했다.

갖가지 채소들이 접시 가득 푸짐히 올려져 있었지만 그래 봤자 풀떼기였다. 갓 구운 닭 가슴살도 들어 있긴 했는데 퍽퍽살을 싫어하는 선우는 닭고기의 노릇노릇한 자태에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그래. 옥살이가 괜히 옥살이냐, 주는 대로 먹어야지.

“저녁에 사장님이랑 외식한다길래 아침은 가볍게 차렸어요.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간도 세고 조미료도 많이 들어가니까 나가서 적당히 들어요. 배탈이라도 나면 약도 못 쓰고 고생해.”

“네. 감사합니다.”

이래서는 삼시 세끼 죽만 먹는 게 속 편할 것 같았다. 걱정하는 소리도 자꾸 들으니 되레 불안감만 키웠다. 아기에겐 저를 품고 있는 사람의 정신 건강도 중요치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선우는 아기에 대해 가타부타 제 의견을 낼 수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아기는 제 몸에 있을 뿐이지 제 새끼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근데, 혹시 밤에 라면 먹었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선우의 빠른 인정에 아주머니는 ‘출출하면 퇴근 전에 간식을 달래든가 하지.’ 하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언뜻 양심도 없나, 뭐 이런 말들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선우는 말없이 샐러드만 퍼먹었다. 빨아 주고 좋다고 라면이나 얻어먹었는데 양심 없는 거 맞지 뭐.

“씨발, 내가 먹였어. 뭐 불만 있어? 말해 봐, 아줌마.”

선우가 깜짝아! 하며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당연히 출근한 줄 알았던 범이 어디선가 나타나 으르렁거렸다. 숲에서 갑자기 호랑이를 맞닥뜨리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선우는 깜짝 놀라 또다시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고 아주머니는 자신을 향한 범의 화에 선우보다 더 사색이 되었다.

“아, 아, 아니요……. 회장님이 신경 써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줄곧 무표정함에 경멸을 살짝 섞은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처음으로 선우에게 다른 눈빛을 보냈다.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모르겠어 난처한 와중에 선우의 목구멍으로 닭 가슴살이 역류했다.

우웁- 욱-

불편한 상황에 놓인 스트레스를 몸이 감당하지 못한 것 같다. 선우가 화장실로 뛰었다. 배 속에 아기는 평화주의자인 모양이었다.

범이 따라 들어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침 출근길부터 남의 토를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닐 터라 선우는 괜찮다, 그냥 가셔도 된다, 말해 주고 싶었다. 허나 당장 토가 올라오는 상황에 그런 말을 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매번 혼자 변기를 붙잡았는데 누군가 따라와 등을 두드려 주니 퍽 위로가 되었다. 범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페로몬 향기에 선우의 마음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선우는 대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입 안을 헹구었다.

“너 괜찮아?”

“네.”

“괜찮은데 토를 왜 해?”

“아……. 아기가 싸우는 거 싫은가 봐요.”

선우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이건 핑계가 아니었다. 토하는 건 명백히 아기 때문에 그러는 게 맞았다. 범이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다 피식 웃었다.

“걔 내 새끼 맞냐? 내 새끼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끝에 작게 ‘너 닮았나 보다.’ 했다.

그 한 마디가 선우의 정적인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선우는 그 말이 뭐라고 울컥해 눈물을 흘렸다. 공허한 눈빛으로 멍하니 서서 눈물을 떨구었다. 몸이 잘게 떨렸다.

나를 닮은 모습은 하나도 없었음 싶은데, 그럼 너무 미안할 거 같아서.

범은 우는 것 같지도 않게 눈에서 눈물만 흘려보내는 선우를 말없이 바라봐 주다 다 운 것 같자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고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범은 여전히 멍하니 있는 선우를 끌어다 제 손으로 세수를 시켰다.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벅벅 씻겨 주는데 그 조심성 없는 손길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범이 선우의 코를 엄지와 검지로 집고 ‘킁 해.’ 했다.

선우는 차마 범의 손에 코를 풀 순 없었지만 대신 범이 사고 싶어 하던 진짜 웃음을 주었다. 보아하니 범은 나름 아이 세수도 시키고 코도 풀리는 아빠가 될 것 같은데 그가 육아를 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지독히 안 어울려 웃음이 터졌다.

에라 모르겠다, 때리려면 때려라 하고 실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 범이 입술을 붙여 왔다. 계산은 후불로 해 주겠다 했다.

선우가 아무리 입을 헹궜다지만 금방 토를 했는데 찝찝하지도 않은지 범은 선우의 입 안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서로의 타액을 빨아 먹는 소리가 화장실 안을 크게 울렸다.

입술이 떨어진 건, 선우의 배에서 울린 꼬르륵 소리 때문이었다. 츄릅 하는 침 소리 사이에 꼬르륵 소리가 꽤나 존재감 있게 울렸다. 아침 공복에 풀떼기를 집어 먹다 그마저도 토해 버려 배가 고팠다.

범이 ‘이건 그냥 서비스로 해 줘라?’ 하며 질척하게 젖은 선우의 입술에 쪽쪽 두 번의 뽀뽀를 했다. 그러곤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마침 밖에서는 형님을 찾는 목소리가 조심스레 들려왔다. 집에서 출발했어야 할 시간이 지나도 한참을 지났다. 범의 부하는 절대 독촉하는 게 아님을 어필하며 회장님께 두 번의 전화가 왔다 알렸다. 범을 독촉하면 범에게 죽을 것이고, 회장님이 급히 찾는다는 걸 전하지 않으면 회장님께 죽을 것이다. 어쩔 도리를 모르던 범의 수하는 맞아도 제가 모시는 형님께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화장실 앞에 서서 애절히 범을 불렀다.

한창 키스를 하던 중이었다면 죽었겠지만 다행히 선우의 배꼽시계가 울려 입술은 이미 떨어진 뒤였다. 범의 수하는 키스를 방해한 건 아니기에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범이 원래부터 있던 다른 아주머니께 식사를 준비하라 일러 놓겠다고 하자 선우가 괜찮다며 범을 만류했다. 제가 괜찮고 말고를 논할 주제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머니가 사시나무 떨듯 떨던 모습이 생각나 차마 외면하긴 그랬다. 자기 할 일엔 참 프로인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제 밥을 굶겼나 어쨌나, 영양제까지 빼지 않고 꼭꼭 챙겨 먹이는데 그렇게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덜덜 떨 일인가 싶었다.

“여사님이 하신 밥이 맛있어요.”

선우는 아주머니 편을 드는 게 괜히 착한 척을 하는 것 같고 민망해 그리 말했다.

“풀 쪼가리만 먹더만.”

“오늘만 그렇게 먹은 거예요. 이따 저녁 많이 먹을 거라.”

“거참, 그놈의 오리주물럭 한번 신성하게 기다린다.”

무슨 오리주물럭에 환장한 애처럼 보인 것 같지만 어쨌든 선우는 아주머니를 지켜 냈다.

물론 아주머니는 선우가 보지 않을 때 범으로부터 입 닥치고 밥이나 하라는 험한 소릴 들었다. 한 번만 더 주둥이를 잘못 나불거리다 걸리면 혀가 뽑힐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협박은 하는 이가 범이어서 단순히 협박 같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엔 백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건네며 ‘아줌마, 우리 잘 좀 합시다. 네?’ 했다.

굳이 눈 마주치기도 무서운 조폭 집안에서 일을 하는 데에는 돈 때문이 컸다. 산 채로 묻을 것 같은 기세이던 범이 갑자기 통 큰 보너스를 하사하여 아주머니는 얼떨떨한 와중에 ‘감사합니다, 사장님.’ 했다.

범은 사람을 부릴 때 늘 적절한 회유책을 섞었다. 오롯이 협박과 강요에 못 이겨 움직이게 만들지 않았다. 협박과 강요만큼 편리한 수단이 없지만 적절한 보상을 끼워 줘야 사람들은 제가 해야 할 몫을 넘어 200프로를 해냈다.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는 선우를 보는 눈빛과 내뱉는 말에서 경멸을 거두었다. 된장국을 새로 끓였고 같잖았던 텃세를 순식간에 털어 버렸다.

아주머니는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선우의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냈다. 선우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다. 매번 그러하듯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고 밥을 복스럽게 비웠다. 다 먹고 나서는 ‘잘 먹었습니다.’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사근사근하진 않지만 내 덕분에 산 줄 알아라 유세를 부리지도, 생색을 내지도 않았다.

평화주의자가 아기인지 선우인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피바람이 불던 집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화기애애하진 않지만 평화로웠다.

***

병원과 집에만 갇혀 있던 선우가 첫 외출을 했다.

할머니 댁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전에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한창 게임 중이었는데 걸려 오는 전화에 잠깐 탄식을 했지만 받아 보니 범이었다. 30분 뒤에 도착한다기에 선우는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는 십 분이면 하니 시간은 넉넉했다.

집 안에서 교복처럼 입던 트레이닝복을 벗고 하늘색 린넨 셔츠와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었다. 선우의 어머니는 사치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옷이나 신발은 좋은 걸 사서 오래 쓰라는 주의였다. 싼 거 살 돈 열 번 모아 좋은 거 하나를 사라고 했다. 명품까지는 아니어도 질이 좋은 걸 우선으로 따졌고,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 말고 언제 입어도 안 촌스러운 깔끔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선우는 거울 앞에 서서 이 정도면 됐겠지, 하며 혼잣말을 했다. 새로 산 옷도 아니고 산 지 꽤 지난 옷인데도 디자인이 워낙 기본 디자인이고 세탁을 잘 해 놓아 멀끔했다. 촌티나 싼 티가 나면 데리고 갈 범의 성질을 돋울 게 분명했다. 범의 미움을 사는 것 자체는 그다지 애정을 바란 게 아니기에 상관없지만 오리는 꼭 먹고 싶었다. 선우는 엄마의 가정 교육이 오리주물럭을 얻어먹으러 가는 데에 빛을 발해 고마웠다. 작게 ‘엄마, 고마워.’ 했다.

세수, 양치, 옷 갈아입기를 십 분 안에 마친 선우가 범을 기다리며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손주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그때그때 구체적인 자랑을 해 줘야 할머니가 걱정을 안 했다. 이번엔 오리고기를 먹으러 간다 자랑할 요량이었다. 할머니도, 엄마도 오리고기를 좋아했고 여름철엔 보양으로 다 같이 오리 백숙을 먹었다. 아마 오리를 먹는다 그러면 잘한다 하실 거다.

“할머니 저녁 먹었어? 나는 좀 이따 오리주물럭 먹으러 갈 거야.”

[어이구, 잘하네. 신랑이 사 준대?]

“응. 그리고 신랑이 할머니 용돈 드리라고 이백만 원 줬어.”

사실 빨아 주고 키스한 값이었다. 선우는 거짓말을 많이 해 지옥 불에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이미 썩 바르게 살지 못한 인생이라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거짓말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액수를 듣고 기함하는 소리에 선우가 하하 웃었다.

[그렇게 많이? 다시 돌려줘. 늙은이 혼자 쓸 데도 없는데 뭘 그렇게 많이 줘.]

“그 사람 다시 돌려주고 그러는 거 싫어해. 쓸 데가 왜 없어? 한우 사 먹고, 어? 동네 할머니들이랑 바다도 가고, 산도 가고! 하다 보면 다 쓰지. 내가 오늘 가서 먹어 보고 맛있으면 할머니도 꼭 모시고 갈게.”

[너나 많이 먹고 와. 근데, 손주 사위도 오리 좋아해? 닭 말고 오리로 삶을까?]

“그 사람 못 갈걸. 돈 버느라 바빠. 나만 가도 오리로 해 줘요.”

[알았네요.]

할머니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를 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할머니께 인사를 전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문을 여니 범이 서 있었다. 범은 선우의 외출복 차림을 아래위로 훑었다.

“와 씨발, 아주 살벌하게 예쁘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됐고 빨리 밥이나 내놓으라는 표정으로 영혼 없이 감사하다 했다. 범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연신 감탄했다. 솔직히 눈에 눈곱을 떼고 옷을 갈아입은 것밖에 없는데 범은 왜 이리 꾸몄냐 호들갑을 떨었다. 저는 시꺼먼 정장 차림이면서.

범이 선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선우의 심장이 약간 빠르게 뛰었다. 곧 먹게 될 저녁 때문일 것이다.

***

선우의 라면을 끓여 주었던 준석이 차를 몰았다. 범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식당은 오래된 곳 같았다. 깨끗한 신식 내부는 아니었지만 맛집의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식당을 통째로 빌린 건지 그냥 손님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없었다.

범과 선우가 한 테이블을 차지해 앉고 조금 떨어진 곳에 준석을 포함해 따라온 수하 넷이 앉았다. 빨갛게 양념된 오리고기가 철판 가득 지글지글 볶아졌고 그 위로 부추가 잔뜩 올라갔다.

장정 여섯이 오리를 떼로 잡아먹었다. 범은 원래 밥을 코딱지만큼 먹는 줄 알았던 선우의 실제 양을 알게 되었다. 잘 먹으니 더 예뻤다. 가족 식사를 할 적마다 조심조심 찔끔찔끔 밥을 새 모이만큼 먹던 형수들이 떠올랐다. 역시, 내가 가진 게 제일 예쁘다.

선우는 잘 익은 고기를 깻잎에 척 올려 야무지게도 싸 먹었다. 범은 고기만 먹었다. 원래 고기만 먹는다. 그런데도 선우가 사 주는 사람의 성의를 보아 제게 하나쯤 쌈을 싸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를 담아 흘긋거렸다. 헛된 기대였다.

그래도 잘 먹는 선우의 얼굴을 반찬 삼아 범도 맛있게 먹었다. 잘 먹는 건 제 수하들이 진짜 잘 먹는데 그 시커먼 덩치들 테이블엔 아주 잠시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운전해야 하는 사람을 빼고는 술을 허용했다. 덩치들은 식당이 떠나가라 ‘감사합니다, 형님!’ 했다.

감사하든가 말든가 범은 우물우물하는 선우의 볼에 당장이라도 제 것을 비비고 싶었다.

“맛있냐?”

“네. 맛있어요.”

“내 거보다 맛있냐?”

“…….”

선우는 범의 질문에 알맞은 모범 답안을 알고 있었다. 알긴 아는데, 성격상 입발림 소리를 잘 못 했다. 접대부를 하기에 최악의 성격이라 건방지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 괜히 안 맞을 것도 맞았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는 잘하는데 ‘사장님 자지가 오리 고기보다 맛있습니다.’는 못 했다.

선우는 이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계속 이어 가기 위해 범의 비위를 맞춰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5년이나 접대부를 했으면 이런 멘트쯤은 고민도 없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면 좋겠는데, 그게 쉬이 안 됐다.

선우가 고민하는 사이 범은 갑작스레 큰 웃음을 터뜨렸다. 또 체통 없이 웃었다. 참 위엄 없이 구는데 그 앞에선 누구나 깨갱 눌리는 게 신기했다. 이러니 유 회장이 우성 알파 타령을 하는가 보았다.

범은 ‘씨발, 표정 봐라.’ 하며 웃음을 쉬이 멈추지 않았다. 애가 쌈 싸 먹다 말고 얼굴에 짙은 우환이 드리워져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우는 본의 아니게 정색을 해 버렸는데도 화내지 않고 웃어 주는 범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무사히 넘어가고 보니 그 말이 뭐 그리 어렵다고 해 주고 말 걸 싶기도 했다. 그런 소릴 안 한다고 창놈이 갑자기 고고해지는 것도 아닌데.

“먹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그래, 마저 먹기나 해라. 밥 볶아 줄까?”

“네…….”

아까부터 볶음밥도 먹고 싶었는데, 범이 알아서 시켜 주기에 선우도 저 나름 최대한 양보한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기로 했다. 인생은 원래 기브 앤 테이크로 사는 법이니 말이다.

“저…… 그래도, 빨아 본 중에선 제일 맛있었어요.”

맛이랄 건 없고 페로몬 향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입에 담아 본 것들 중에선 범의 것이 제일 맛있었다. 한두 개 입에 담아 본 건 아니니 나름 표본도 많았다.

범이 씨발 꼴리네, 하며 선우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불량한 형처럼 선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선우를 제 쪽으로 살짝 당겼다.

“뒤로 먹으면 더 맛있을걸? 너 그건 언제 되냐?”

“글쎄요……. 다음에 병원 가면 정확히 물어볼게요.”

어차피 임신 중에 하게 될 일은 없을 거 같아 썩 궁금하지도 않았었다. 지금도 절대 하면 안 되는 건 아니라 알고 있지만 남자 오메가는 아기를 잡아 주는 힘이 부족하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의사는 조심 또 조심을 권했다.

“다음에 병원 같이 가면 되겠네.”

“네? 아, 네.”

병원을 진짜 아기 아빠랑 가게 되다니, 느낌이 좀 이상했다. 나쁜 쪽으로 이상한 건 아닌데 제 감정의 실체가 무언지 모르겠어 선우는 그저 볶음밥만 퍼먹었다. 옆에 들러붙은 범이 저를 쳐다보든 말든 참 맛있었다.

고기는 잘만 먹던 범은 볶음밥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볶음밥을 먹는 선우에게 관심이 있었다. 선우의 옆에 어깨동무를 하고 앉아 끊임없이 치댔다. 뒤져서 나오면 백 원에 한 대씩 때릴 것 같은 형이었다.

범이 선우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임신한 오메가에게서는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데도 체향에 아래가 동했다.

“넌 원래 무슨 냄새야?”

“저요? 저 레몬이요.”

선우가 볶음밥을 우물우물 씹으며 대충 대꾸했다. 가게 사장님이 마른 김에 볶음밥을 싸 먹으면 더 맛있다며 김을 내주셔서 조미하지 않은 담백한 김에 빨간 양념이 고루 밴 매콤짭짤한 밥을 싸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몬? 씨발, 천생연분이 따로 없네.”

범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잠시 생각하던 선우는 범의 향기가 라임 향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 비슷하네.

선우는 ‘아, 네.’ 했다. 밥을 먹기 바빠 천생연분이네 뭐네 실없는 농담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이선우.”

볼이 볼록해질 만큼 입 안에 볶음밥을 담은 선우가 동그래진 눈으로 범을 보았다. 제 이름이 불려 깜짝 놀랐다. 이름을 알고 있긴 했구나.

제가 너무 대충 답하여 화가 난 건가 했다. 선우는 배를 감싸고 범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화난 기색으로 부르는 것 같진 않았는데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얼굴이 데이는 것 같았다.

범이 배를 감싸고 있는 선우의 왼손을 끌어다 제 중심부에 얹었다. 그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얹고 중심을 살살 어루만지게 했다.

“하아…….”

범이 더운 숨을 뱉으며 여전히 뜨겁게 선우를 노려보았다. 몇 번 쓸어 주니 범의 정장 바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애초에 반발기 상태에서 시작한지라 풀발기는 시간 문제였다.

“이거 봐. 천생연분이라니까?”

그냥 잘 서시는 거 아닐까요?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 안에 남은 볶음밥을 씹었다.

‘너네 아빠 생각보다 더 실없고, 생각보다 더 변태다.’

선우는 범의 진심을 몰라주었다. 하긴, 알아도 믿지 않았을 거다.

***

식사를 끝내자마자 삽입 외에 가능한 모든 성행위를 시킬 것 같던 범은 의외로 그러지 않았다. 차에 올라도 얌전히 있었다. 홀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뜨거워진 아래를 알아서 식혔다.

아버지 생각했나? 두꺼비 같은 인상의 유 회장을 떠올리니 애당초 서지 않은 선우의 아래도 식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범은 유 회장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

‘너 웬만하면 네 아빠 닮고, 할아버진 절대 닮지 마라.’

속으로 아기에게 일러 준 선우가 혼자 피식 웃었다. 범이 그런 선우의 볼을 찔렀다.

“뭔데? 같이 웃자.”

“네?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너 나 따 시키냐? 애랑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

선우가 속으로 아기와 대화할 때마다 슬쩍 배를 쳐다보아서 알 수 있었다. 뭐가 들었나 싶게 납작한데 둘이서만 무슨 얘길 그렇게 하는지 자주도 그랬다.

어떻게 알았지? 선우가 흠칫한 표정으로 범을 바라보았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이다가도 한 번씩 제 나이 같은 앳됨이 보였다.

“왜? 내 욕했냐?”

“아, 아니요. 그냥 건강하라고 했는데요.”

범이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대충 둘러대는 것 같지만 더 이상 추궁하진 않았다. 그냥 다음엔 끼워 줘라, 하고 말았다. 범은 아기와 선우, 둘만의 세상에 초대받길 원했다.

선우는 또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서울 구경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가는데 재미있었다. 범도 조용히 있었다. 선우의 서울 구경을 방해하지 않고 저는 선우를 구경했다.

범이 데리고 간 곳은 공원이었다. 범은 선우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감방에 가도 운동 시간은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우는 안 그래도 너무 많이 먹어 좀 걷고 싶던 차였다. 격한 운동은 하면 안 되지만 요즘 움직임 자체가 부족해 체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다음번에 또 하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걸 고를 기회가 온다면 ‘밖에 걸어 다니기’를 고르고 싶을 정도였다. 마침 그러던 차에 빨아 주고, 만져 주고 그런 거 없이 공짜로 산책을 받았다. 고마웠다.

범은 보폭이 컸다. 급하게 걷는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 어느새 저 앞까지 가 있었다. 선우도 따라가려면 따라갈 수 있었지만 공원이 예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점점 뒤처졌다. 선우가 자란 시골은 사방이 자연 공원 그 자체라 이런 곳이 따로 없었는데 이렇게 도시 한가운데에 다른 세상처럼 조성되어 있는 공원을 보니 신기했다. 선우는 한 번 나왔을 때 아주 뽕을 뽑겠다는 일념으로 운치를 만끽하며 걸었다.

공원이 쥐뿔도 신기하지 않은 범은 직진만 하다 퍼뜩 옆이 허전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선우는 저 멀리서 나무 앞에 꽂힌 팻말을 읽고 있었다. 뒷짐까지 지고 있는 게 자세는 할아버지가 따로 없었다. 범은 근처 벤치에 앉아 선우를 구경하며 선우가 제가 있는 쪽까지 걸어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어떤 씨발스러운 새끼가 선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저기요.”

주목(朱木), 심재가 붉어 주목이구나, 선우는 팻말을 읽으며 혼자 중얼거리다 말소리에 뒤를 돌았다.

“네?”

“저……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요. 전화번호 좀 주실래요?”

속이 울렁거렸다. 맛있게 먹은 저녁을 토하긴 싫은데 선우에게 다가온 사람은 알파였다. 다행히 악의적으로 뿌려 대는 페로몬은 아니라 냄새가 아주 역하게 나지는 않았다. 조절을 꽤 잘하는지 냄새가 옅어 선우의 아까운 오리주물럭이 대번에 역류하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 맡고 있는다면 곧 화장실을 찾아 뛰어야 할 것이다.

저에겐 이제 아무 향기도 나지 않을 텐데, 제가 오메가인 걸 알고 이러는 건지는 미지수였다. 하긴 알파의 연애관은 자유분방했다. 같은 알파를 좋아하는 알파도 있다는데 뭔들 안 되겠나.

선우가 정중히 거절을 하려 할 때, 누군가 큰 소리를 쳤다.

“똘똘이 엄마!”

혼자 저만치 가는 것 같던 범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나 얘 엄마 아닌데…… 그냥 하는 소리겠지?’

선우가 멍하니 범을 바라보았다. 풀풀 풍기는 라임 냄새에 어지러운 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다만 제게 말을 건 남자는 범의 강한 페로몬에 어지러운 듯했다.

범은 초면인 남자에게 상욕을 서슴지 않고 뱉었다. ‘우리 똘똘이 엄마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하며 정중한 듯 물었다가 ‘씨발놈아.’로 그를 지칭했다. 평온한 목소리로 눈깔을 파 버린다는 둥 하다 마지막으로 자지라고 달린 거 토막 나고 싶냐는 협박을 하여 쫓아 버렸다.

남자는 어디 가서 지고 살 것 같진 않은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진짜로 어딜 가도 안 지는 사람과 붙으니 바로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쳤다.

선우는 그 와중에 범이 태명이랍시고 지은 것 같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다. 똘똘이가 뭐야, 똘똘이가. 범은 척 봐도 ‘똑똑하다.’와 비슷한 의미의 똘똘을 쓴 것 같지 않았다. 제 아이는 아니니 아빠인 범 마음이긴 하지만 남성기를 지칭하는 똘똘이는 아무리 애 아빠가 변태여도 좀 아닌 것 같았다. 참나 어감만 귀여우면 다냐고, 의미는 자지인데.

방해꾼이 사라지고 범은 다시 산책을 이었다. 이번엔 선우의 어깨를 감싸고 발을 맞춰 걸었다. 으슥한 데로 끌고 들어가 삥을 뜯을 것 같은 자세였지만 선우가 꽃을 보기 위해 멈추면 범도 따라 멈췄다. 삥 뜯기러 가는 선우가 둘의 발걸음을 컨트롤했다.

“너 근데 배는 언제 나오냐?”

“잘 모르겠는데……. 한 4개월 돼야 할 것 같은데요.”

“존나 오래 남은 거지? 씨발, 영역 표시를 좀 해 놓든가 해야지.”

범이 푹 한숨을 쉬며 똘똘이가 진짜 똘똘이만 하다고 중얼거렸다. 좆만 하다는 소리였다. 이로써 선우의 추측이 확실해졌다. 100프로 똘똘이는 똘똘해서 똘똘이가 아니다. 평소 같으면 그래, 네 맘이지 내 맘이냐 하겠지만 선우는 아기가 태어난 후에 아기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제가 바로잡아 줄 수 있을 때, 좆같은 의미의 태명만큼은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혹시…… 똘똘이는 왜 똘똘인가요?”

“왜, 급하게 지은 건데 마음에 안 드냐?”

“의미가 뭔데요?”

의미는 역시나였다. 범은 벤치에 앉아 선우를 바라보며 선우의 볼에 제 것을 비비는 상상을 하고 있었고, 그때 범의 머릿속에 있던 단어를 단시간에 최대한 순화한 표현이었다.

“자지 엄마! 할 순 없잖아.”

“아들 낳고 싶으세요?”

“글쎄, 그런 거 생각 안 해 봤는데. 아, 근데 생각해 보니 딸이면 똘똘이는 좀 그렇겠다. 다시 정해, 그럼.”

범은 선우의 배 쪽을 향해 ‘야야, 똘똘이 취소다.’ 했다. 무슨 동네 친구 부르듯 야야 하는데 훗날 아기도 범을 닮아 누구에게든 야야 하며 껄렁하게 굴 것 같았다. 선우가 깡패 부자, 혹은 부녀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사장님 마음대로 지으세요.”

“오리.”

“네.”

오리 정도면 뭐, 진짜 귀엽기라도 했다. 선우는 그쯤에서 타협했다. 범이 ‘우리 첫 데이트니까.’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선우는 모르지만 오리는 나름 로맨틱한 오리였다.

***

범은 산책을 마치고 아이스크림까지 사 주었다. 먹겠냐 묻기에 염치없이 넙죽 얻어먹었다. 공원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던 준석이 근처에 있던 편의점으로 냉큼 뛰어가 사 왔다.

편의점이 무슨 마트처럼 크게 있어 선우도 직접 가서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하긴, 직접 가면 눈이 돌아 진열된 과자들을 보고 침을 흘릴지도 몰랐다. 군것질이 좋은 것도 아니니 차라리 안 보는 게 속 편했다.

준석은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섞어 수하들 것까지 머릿수에 맞게 여섯 개를 사 왔다. 범이 정 없게 딱 맞춰 사 오냐며 한 소리 했다. ‘정’을 운운하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 선우는 몰래 슬쩍 웃었다.

하겐다즈는 두 개인 걸로 보아 아마 범과 선우를 위해 산 것 같았다. 하지만 선우는 우유가 들어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의 아이스크림보다 시큼하고 상큼한 게 먹고 싶었다. 하겐다즈도, 콘 아이스크림도 모두 넘기고 모히또 맛 탱크보이를 집었다. 쭈쭈바가 흘릴 일도 없고 편했다.

‘오리야, 난 이거 배 맛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게 다 있다.’

선우는 또 범을 끼워 주지 않고 아기하고만 이야기했다.

범은 아이스크림을 고르지 않고 준석에게 훠이훠이 손짓했다. 준석은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인사한 뒤 남은 아이스크림들을 들고 동료들이 타 있는 차로 향했다. 범과 선우, 둘만 남겨진 차 뒤편으로 세워진 다른 차에 덩치 넷이 모여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막내가 눈치 없이 하겐다즈를 골라 한 대 처맞았지만 그래도 먹게는 해 주었다. 때렸으니 뺏지 않았다.

범은 선우의 쭈쭈바 꽁다리를 뺏어 먹었다. 저 흉흉한 덩치로 쭈쭈바를 들고 있어도 웃길 노릇인데 꽁다리만 들고 있으니 더 웃겼다.

먹고 싶었던 건 아니고 괜히 말이나 더 걸어 보려 달라 그런 거다. 생전 입에도 안 댔던 시큼한 맛에 범이 표정을 찡그렸다.

그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이거 완전 내 자지 맛이겠네. 빨고 싶음 빨고 싶다 그러지 뭐 이런 걸 먹냐?”

선우는 웃는 낯을 거두고 의아한 얼굴을 걸었다. 저건 또 무슨 헛소리지? 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아, 모히또. 아, 라임. 아, 쭈쭈바.

선우가 깨닫는 동안에 범은 뭔가 울컥했는지 그건 돈 주고 사 먹으면서 자기 건 왜 돈 받고 먹냐 했다. 아이스크림도 선우가 돈을 낸 건 아닌데 그랬다.

“지금 빨까요?”

“아침에 토한 게 뭘 빨아? 됐으니까 아이스크림이나 마저 빠세요.”

“네.”

범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꽝꽝 얼어 잘 올라오지 않는 쭈쭈바를 먹기 좋게 부숴 주었다. 선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기억으로 앞으로 할머니 댁에 갈 날까지 옥살이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추억만 있어도 살았다.

***

집으로 돌아온 범은 선우에게 또 한 번도 팔아 본 적 없는 것의 값을 물었다.

“같이 샤워하는 건 얼마냐?”

“……글쎄요.”

샤워만 하는 건 어차피 해야 하는 일에 욕실만 같이 쓴다 생각하면 되었기에 굳이 돈을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샤워를 하다 키스를 하든, 펠라를 하든, 하게 되면 그 값을 매기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샤워하면서 하는 건 더 받아야 하나?

선우는 애초에 제가 매긴 값도 아닌 노블레스의 가격표를 더 이상 업데이트하고 싶지 않아 ‘그냥 같이 해요.’ 했다. 어차피 범에게 말고는 팔 일도 없는데 이거 저거 따지기 머리 아팠다.

“너 밥 먹이니까 인심이 후해졌다? 내일은 뭐 먹을래?”

“내일요? 아…… 음…….”

범이 오래 기다려 줄 사람은 아닌 듯해 뭐라도 빨리 말해야 할 텐데 선우에겐 소중한 기회라 웬만하면 꼭 먹고 싶은 걸로 고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배가 불러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긴 내일은 내일 먹고 싶은 게 생기겠지. 출근 전에 방에 들를 테니까 그때까지 생각해 놔.”

“네!”

선우는 시간을 번 게 기뻐 범이 들어 본 중 가장 큰 소리로 대답했다. 범이 피식 웃으며 ‘오냐, 씩씩하다.’ 했다.

선우는 별 부끄럼 없이 훌러덩 옷을 벗고 범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벗을 때까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범이 페로몬을 짙게 뿌리며 제 몸을 너무 노골적으로 감상하니 조금 민망했다. 심지어 범은 선우를 감상하며 아래를 세웠다. 애초부터 조금 서 있었던 것 같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했다고 저러나 몰랐다.

“씨발. 너 털 없네?”

범이 선우의 음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털이 없는 건 접대부 시절의 영향이었다. 노블레스의 접대부들은 전부 깨끗이 왁싱을 해야 했다. 떡 칠 때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야 성감이 더 좋다나, 뭐라나. 아무튼 수풀 우거진 게 취향인 손님들을 위해 남겨 둔 몇몇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하게 했다.

선우는 원래도 머리숱만 많고 몸에는 털이 별로 없었는데 접대부 시절에 하도 관리를 하여 이젠 얘네들이 아예 자랄 생각을 안 했다. 나더라도 모질이 워낙 얇아져 솜털같이 났다. 그만둔 후로는 관리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없다시피 했다. 종종 몸이 너무 민숭민숭한 거 아닌가 생각하곤 했는데 범의 표정을 보고 오랜만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이게 꼴리는구나.

범은 핥고 싶다, 하며 낮은 혼잣말을 내뱉고 제 것을 쥔 손을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우는 가만히 서서 범의 자위를 관람해야 했다. 심히 어색했다. 차라리 내가 해 주고 말지. 멋쩍은 투로 ‘해 드릴까요?’ 했다.

“너도 나 보면서 해. 손으로 해 주는 값 줄 테니까.”

범의 요청에 선우도 제 것을 쥐었다. 그의 페로몬으로 인해 이미 살짝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범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선우가 완전히 세울 때까지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무의식중에 범의 몸을 훑었다. 훑으며 세웠다. 그 모습에 범이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선우를 위해 한 바퀴 돌아 주기도 했다. 자기는 등 근육이 정말 죽인다며 원한다면 날개 뼈에 싸게 해 주겠다 선심 쓰듯 말했다. 근육이 정말 죽이긴 했지만 선우는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거참. 차갑다, 차가워.”

선우의 거절에 범이 입술을 삐죽였다. 근육덩어리를 매달고 지을 표정은 아닌 듯해 선우는 제 것을 흔들다 말고 슬쩍 미소 지었다. 탁, 탁, 탁, 탁, 선우의 미소에 범이 속도를 높였다. 선우도 범을 따라 속도를 맞췄다.

둘이 함께 더운 숨을 뱉어 대니 욕실 안이 사우나 같았다. 무르익은 열기와 함께 선우가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절정이 오고 있었다. 범에게 싸도 되냐 허락을 구했다. 보통 손님들은 허락 없이 먼저 가 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선우의 물음에 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제 물건을 아프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고 세게 흔들면서 여유롭게 실실 웃었다.

“싸지 말라 그럼, 안 싸는 것도 가능해?”

선우가 흔들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최대한 참아 볼 순 있다 전했다.

참아 본다는 선우의 말에 범이 질 나쁜 미소를 입에 걸고 다가왔다. 선우의 두 팔을 들어 제 목 뒤로 걸치게 했다. 한 팔로 선우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나머지 손으로 제 것과 선우의 것을 동시에 잡고 흔들었다.

“억! 억! 어억……!”

제가 만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악력에 선우는 참아 본다는 말이 무색하게 금세 가 버렸다. 만지자마자 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지만 범이 받치고 있어 무너져 내리진 않았다.

선우가 절정에 오르는 모습을 눈에 담던 범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것을 마저 흔들었다. 이윽고 화장실 안을 울리는 포효 소리와 함께 범도 절정에 올랐다.

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선우의 아랫배에 싸지른 정액을 선우의 상체에 마사지하듯 펴 발랐다. 이건 또 무슨 변태 짓인가, 선우는 의아했지만 어차피 곧 샤워를 할 테니 그 전에 마음껏 더럽혀라 하고 그냥 두었다.

“엉덩이 만지는 건 얼마냐?”

“구멍에 뭐 넣을 거 아니면 엉덩이는 그냥 만지세요.”

선우가 심드렁히 답하자 범이 ‘씨발, 이 또라이 진짜 어떡하지?’ 하며 선우의 작은 머리통을 깨물었다. 이를 감추고 깨물어 아프진 않았다.

“구멍에 이것저것 많이도 넣어 봤나 보다? 아주 내 거 빼곤 다 넣어 봤나 봐?”

범이 울컥했다.

“그래도 사장님 건 본 중 제일 크니까 안 닿았던 데까지 닿겠죠.”

선우는 범을 대충 달래었다. 죽어도 안 나오던 입발림 소리가 밥도 사 주고 아이스크림도 사 준 사람한테는 조금 나오는가 보았다. 아니면 그냥 젊고 잘생긴 사람이라 나왔을 수도 있다. 선우도 제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선우가 무미건조한 투로 던져 준 말에 범은 굉장히 흡족해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아다를 떼 준 거나 다름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마음대로 생각하게 두었다.

선우는 5년이나 접대부 일을 했지만 뒤로 하는 섹스에 제대로 된 황홀경을 맛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뒤로만 가는 건 어림도 없었고, 손님이 저 혼자 무아지경으로 박아 댈 때 대충 제 앞을 주물러 사정하는 식이었다. 사정하면 그게 오르가슴이지 뭐, 라고 생각해 왔다.

“너 분수 터져 봤어?”

“아니요.”

분수는 다른 접대부가 터뜨리는 걸 구경만 해 보았다. 선우의 대답에 범은 혼자 신이 난 듯했다. 일단 병원에 가 보고 해도 된다 그러면 분수가 터지게 해 주겠단 소리를 했다. 선우는 당연히 허세라 여겼다. 범은 좋을지언정 저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경험상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냥 ‘아, 네.’ 했다.

“야, 너 지금 안 믿지?”

“네? 아니요.”

“씨발 아니긴, 아니다 그래. 주둥이만 나불대는 애치고 진짜 잘하는 애 없지. 의심할 만도 해.”

왜 못 믿냐고 뒤집어엎을 것 같은 사람이 너무 타당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선우는 그게 조금 우스워 피식했다.

범은 제 정액을 선우의 엉덩이에 끈덕지게 펴 바르며 웃으니 예쁘다 했다.

“그래, 넌 좀 웃고 살 필요가 있어. 웃고 살면 네가 오리만 얻어먹겠냐? 소 한 마리도 거뜬하지.”

“네.”

“네, 말고 다른 말 해 봐. 예를 들면 오빠 박아 줘, 이런 거.”

선우는 저도 모르게 환멸과 한심을 담은 표정을 지었다 냉큼 거두었다. 너네 아빤 눈이 삐었는가 내 앞에 달린 게 안 보이는가 보다, 하며 오리에게 살짝 험담을 했지만 그래도 범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나쁜 짓 하고 다니는 사람은 맞는데 너나 나한테는 나쁜 사람 아니야.

“형이죠. 남잔데.”

선우의 대꾸에 범이 혀를 끌끌 찼다.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선우의 배를 바라보며 오리에게 말했다.

“너네 엄마 차-암 재미없다. 젊은 애가 유머를 몰라. 그럼 형 박아 줘, 라도 하든지.”

선우는 여전히 딱딱하게 굴었다. 아니, 어차피 박으면 안 되는데 박아 달래서 뭐 하나 싶었다.

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낙이 없다, 낙이 없어.’ 하고 중얼거리다 말하기 싫으면 키스라도 좀 해 보라 했다. 말도 안 할 거면 혀는 뒀다 밥 먹는 데만 쓸 거냐 타박하니 선우가 입술을 붙여 왔다. 또 이런 건 참 잘했다. 시키면 빠릿빠릿 빼는 법이 없었다. 범이 씩 웃으며 선우의 키스를 받았다.

낙이 없긴 씨발, 이게 낙이지.

한 번 얽힌 혀는 샤워를 마칠 때까지 한참이나 풀리지 않았다. 떨어지면 붙고, 떨어지면 붙고 하여 이 키스를 두 번으로 쳐야 하는 건지, 세 번으로 쳐야 하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범은 제 정액으로 범벅을 해 놓은 선우의 몸을 깨끗이 씻겨 주었다. 굳이 왜 묻힌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선우는 씻겨 주는 범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얌전히 받았다기보단 맘대로 해라 하고 놔둔 것이지만 범은 착하다며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엉덩이는 그냥 만지랬더니 정말 내리 만졌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 줄 때에도 만졌다. 수건을 사이에 두고도 만졌지만 다 닦고 보송보송해진 엉덩이를 수차례 맨손으로 쓸었다.

제가 이 정도 터치에 반응하는 몸이 아닌데 임신을 하여 예민해졌는지 범의 손이 훑고 지나가는 곳들이 너무 뜨거웠다. 임산부는 체온이 조금 오른다 하던데 그래서 그런 것도 같았다.

어차피 못 한다니까 참, 눈빛 한번 열렬했다. 그 눈빛을 받던 선우가 오리에게 말을 건넸다.

‘너네 아빠 공짜 좋아해서 나중에 머리 벗겨지겠다.’

말하고 보니 우스워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 발에 기대야 할 외모는 아니지만 머리를 빡빡 밀면 더욱이 조폭 같을 것 같았다.

“너는 따를 대놓고 시키는 편이구나?”

“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아주 베스트 프렌드네, 둘이. 너 그 친구를 누가 만들어 줬는데 나만 빼냐?”

선우는 ‘네 아빠 나잇값도 못 한다.’고 한마디 더 하려다 말았다. 어떻게 아는지 정말 속으로만 생각한다고 하는데 범은 저만 빼고 오리와 대화하는 걸 귀신같이 알았다. 그래도 오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더 이상 추궁하진 않았다. 선우의 배를 보며 ‘거, 쌔끼 좋겠네.’ 하고 말았다.

범은 욕실에 걸려 있던 제 샤워 가운을 선우에게 내주었다. 본인은 수건 한 장 걸치지 않았다. 좋은 몸이긴 하지만 가운데서 덜렁거리는 게 조금 남사스러웠다.

범은 알몸인 채로 욕실 밖을 나와 다락으로 가는 계단 앞까지 선우를 데려다주었다. 아주머니들이 모두 퇴근하고 없는 시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집에서 굳이 데려다줄 필요까지 있나? 마치 데이트를 끝내고 헤어지는 연인 같아 간지러웠다. 선우는 그러다 제 생각이 겸연쩍어 목 뒤를 긁적였다. 연인은 개뿔, 현실은 씨받이다.

“내 방에서 잘래?”

“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내가 뭐 잡아먹냐? 진짜 잠만 자자는 거야, 잠만.”

범이 퍽 억울한 표정으로 선우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머리통도 쪼끄만 게 이 안엔 떡만 찼냐 했다. 범이 손을 올리기에 살짝 주춤한 선우는 때리는 게 아니라 다시 긴장을 풀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갈색의 머리카락들이 범의 손에 의해 흩날렸다.

“제가 잠꼬대가 좀 있어서 얌전히 못 자요. 죄송합니다.”

사실 범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고의는 아니지만 옆에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게 있으면 잠결에 발로 찰지 몰랐다. 지난 원나잇 파트너들 중에 종종 피해자가 있었다. 범에게는 ‘툭’ 차는 수준일지 모르나 맞는 사람 입장에선 ‘퍽’이었다.

“그래, 가서 자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선우가 계단을 올랐다. 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범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자꾸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애꿎은 오리에게 너 뭐 마렵니? 라고 물어보았다. 사실 오리 때문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오리 때문이 아니면 자신은 너무 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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