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더 안 물어보세요?”
“말해 주고 싶어졌어요? 그러면 거절은 안 할게요. 얘기해 줘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현우영은 눈꼬리를 살짝 휘며 웃었다.
결국 현우영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굳이 왜 물어봤지. 싱겁기도 하다.
두 사람은 터벅터벅 골목길을 걸었다.
그러고 보면 팸팸들이 정도는 잘 지켰다. 여태까지 숙소 근처까지 따라와서 죽치고 앉아 기다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행동도 불사할 정도로 막무가내인 팬들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현우영과 이런 대화는 하지 못했을 거다.
“방을 바꿀까요?”
“네?”
무뜬금으로 툭 던져진 주제에 얼른 따라가지 못하는 심은찬을 두고 현우영이 말을 이었다.
“저희요. 이제 유닛 활동도 해야 하니까, 같은 방 쓰는 게 의사소통하기에도 낫잖아요.”
그럴듯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뭔가 논리가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숙소에서 같이 지내잖아요.”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는데 거기에 같은 방을 사용할 이유가 굳이 없어 보여 에둘러 거절했다. 심은찬은 지그시 바라보는 현우영의 눈길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도, 준서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할 리도 없고요.”
* * *
“좋아. 바꿔.”
이렇게 쉽게?
심은찬은 입을 벌리고 도준서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왜. 나랑 떨어지기 아쉽지? 나도 그래. 하지만 인생에 이별은 언제나 있는 법이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우리 같은 방 쓴 지 오래됐으니까 리프레시도 할 겸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도준서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진심인 듯 보였다.
“야, 은찬아. 그런 표정 할 건 없잖아. 내가 그렇게 좋았어?”
심은찬은 자신에게 머리를 비벼 오는 도준서의 머리통을 가볍게 옆으로 밀었다. 도준서는 당연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우영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어서 뭐. 그냥 새 학기 맞아서 반 갈린다고 생각해.”
신선한 비유를 들며 말한 도준서가 제 앞에 놓인 과자를 입으로 가져갔다.
“둘이서 같이 있다 보면 얘기할 시간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고 유닛 할 거면 그게 좋긴 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그렇게 들으니 확실히 안 바꿀 이유가 없긴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바꾸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바꿀 거면 빨리 바꾸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 현우영와 도준서는 각자의 방을 바꾸었다.
짐을 가지고 이동하는데 아무래도 몇 년 동안 생활했던 방이니 개인 물건이 참 많기도 했다. 결국 모든 멤버가 도준서의 짐을 옮겨 주기로 했는데 숙소의 작은 이벤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세별은 누튜브에 올릴 영상을 촬영했다.
“함께하던 준서랑 헤어지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그냥 다른 방으로 옮기는 건데요. 그래도 좀 허전하기도 해요.”
“그렇죠. 데뷔 전부터 같은 방을 사용했었으니까.”
“우리 은찬이가 저한테서 독립하는 거죠.”
도준서가 불쑥 들어와 참견을 했다. 심은찬은 팔꿈치로 그런 도준서를 밀었고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엄살을 부렸다.
“우영이랑 같은 방을 쓰게 된 각오 한마디 해 주세요.”
“각오……, 랄 건 없고요. 그냥. 잘 지내겠습니다.”
“와. 삭막하다.”
도준서의 야유에 심은찬은 저리 가라며 입술을 삐죽했다.
맥시멀리스트를 표방하며 살아와 이것저것 자잘한 짐이 많은 도준서와는 다르게 현우영은 단출했다. 심은찬은 방으로 들어온 현우영에게 침대를 가리켰다.
“어떤 층 사용하고 싶어요?”
“저는 어느 쪽이나 괜찮아요.”
“그럼 제가 1층 써도 될까요?”
2층도 나쁘진 않았는데 올라가고 내려오는 게 번거로웠다. 현우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심은찬은 이제 제 차지가 된 1층 침대에 들어가 벌러덩 누웠다.
책상이 바로 손에 닿으니 참 좋았다. 하는 김에 책상에 있던 시나리오를 집어 들고 펼쳐 보기 시작했다.
“섭외 들어온 곳들이에요?”
“네. 감사하게도요.”
함께 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시나리오를 보내 준 드라마 제작 회사가 다섯 곳이었다. 주연은 없었지만 하나같이 비중 있는 조연이었다. 이 중 뭘 할지 고민 중이긴 했다.
들어온 배역들은 <초승꽃>에서의 연운과 결이 비슷했다. 바르고 조용하면서도 단정한 느낌. 안전하게 같은 결의 역할을 하는 것도 좋아 보이긴 했다. 연기를 이제 막 시작한 시점이기에 뭘 가리는 건 아직 이르게 느껴지기도 했던 거다.
예전이랑 비교하면 정말 배부른 고민이긴 했다.
어떤 드라마에 출연을 할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니. 새삼스러움에 심은찬은 시나리오들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짐은 다 풀었어요?”
“예. 그렇게 많지 않았어서요.”
“정말 없긴 했나 보네요.”
심은찬은 상체를 일으키며 대꾸했다.
“아, 그리고 휴인이 형이랑 약속 내일 저녁으로 잡았는데 괜찮아요? 우리 스케줄 없는 날짜랑 휴인 형 스케줄 없는 날짜 계산해서 그날로 잡긴 했는데, 안 되면 말해 줘요. 그날이 안 되면 또 한참 뒤로 미뤄야 하긴 하는데 형도 이해할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형한테도 그렇게 말해 둘게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김휴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심은찬이나 김휴인이나 둘 다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긴 했다. B the 1에게 들어오는 스케줄도 제법 있긴 했지만 방송국에서 심은찬 개인에게 들어오는 섭외 요청까지 합치면 몸이 다섯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먼저 들어온 스케줄과 겹치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요청은 거의 수락하는 상황이었다. 심은찬 개인에게 들어오는 광고도 이미 서너 개는 계약했을 정도였다.
지금은 앨범 활동을 끝낸 직후라 소속사에서 좀 쉬라며 하루에 두어 개 정도의 스케줄만 할 수 있도록 조정해 주었지만 다음 주가 되면 그것도 없어진다. 휴식기긴 하지만 이번 그룹 활동을 할 때와 거의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더 바쁜 생활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민유의 특성 활성화 퀘스트를 위해 대전에 갈 시간만은 간신히 사수해 냈다.
-저녁에 맛있는 거 사 줄게. 은찬이랑 우영 씨는 몸만 와^^
곧 김휴인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용하는 이모티콘도 꼭 김휴인과 비슷한 느낌의 귀여운 것이어서 심은찬이 피식 웃었다.
“아, 그래. 우영이 이번 유닛 때 토끼 귀 써 보는 건 어때요?”
다시 한번 생각해도 정말 맥락 없이 던진,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다.
“토끼 귀요?”
“승낙?”
장난스럽게 묻자 현우영이 고개를 한쪽으로 까닥거리며 답했다.
“은찬 형이 고양이 귀나 강아지 귀 쓰시면요.”
심은찬의 별명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었다. ‘쌀고양이’나 ‘뚱강쥐’로 곧잘 불리곤 했다. 원래라면 쌀강아지나 뚱냥이였을 텐데 심은찬은 고양이와 강아지의 매력을 둘 다 가지고 있다며 팬들은 그렇게 부르곤 했다. 코스모스나 팬 사인회에서 두 단어를 섞어 불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렇게 따지면 저는 토끼 귀가 아니라 사슴 귀겠네요.”
“헐.”
본인이 말하는 것 좀 봐.
참고로 현우영의 별명은 ‘밤비’였다. 눈이 크고 예뻐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확실히 쌍꺼풀도 또렷하고 눈에 물기도 많아서 가만히 있어도 울망울망해 보이긴 했다.
“팬사가 아니라 실제 무대에서 동물 귀 쓰고 하면 역대급이긴 하겠네요.”
현우영이라면 진짜로 하자고 할 것 같았기에 심은찬이 한발 물러났다.
“근데 그거 말고 또 있잖아요. 그건 싫어요?”
“동물 귀에서 좀 벗어난 것 같은데요.”
“에이, 빼기는. 티아라 같은 것도 어울릴 것 같은데요. 팬사에서도 많이 들어오잖아요. 저번엔 엄청 큰 큐빅이 박힌 왕관 들어오지 않았어요?”
현우영의 다른 별명인 ‘공주’를 칭하며 말했다.
왕자도 아닌 공주.
첫 팬사 때 한 팬이 붙여 준 별명이 지금은 현우영의 대표 별명이 되어 버렸다. 예쁜 현우영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며 현우영의 팬들이 정착시킨 별명이었다. 덕분에 이른바 ‘팬사템’으로 들어오는 것 중에는 공주 왕관이나 공주풍 액세서리, 큐빅 등이 달린 지팡이 같은 것도 꽤나 많이 있었다. 반짝이는 큐빅이 달랑거리는 페이스 체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건 은찬 형에게도 들어오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래도 프릴이나 레이스 달린 면사포나 베일은 안 들어왔어요. 잘할 자신 있는데. 아쉽게.”
“…….”
입을 다문 현우영을 보며 심은찬이 빙그레 웃었다.
현우영이 가끔씩 보여 주는 이런 반응이 참 재미있었다. 과한 반응을 하는 건 아니지만 당황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현우영은 한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갑자기 웬 토끼 귀 얘기를 하셨어요? 토끼 좋아하셨어요?”
말 돌리기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도 재미있긴 할 테지만 심은찬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뭐든 너무 과한 건 좋지 않다. 아쉬울 때 그만두어야 한다.
“그건 아니고요, 휴인 형이 쓰는 이모티콘 보고 막 던진 거예요.”
심은찬은 김휴인에게 또 연락하겠다고 답장을 보내며 대답했다.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어서 흘긋 보니 현우영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