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61)

#59

“아니, 저야 말로요. 미안해요. 그렇게 장난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좀 심했어요.”

“아뇨, 괜찮아요.”

화가 났음에도 현우영은 어른스럽게 대응했다. 실제로는 심은찬이 현우영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도 나잇값을 못 했다. 민망함에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저 생각해서 밥 챙겨 먹으라고 한 거 알아요. 좀 신경 쓸게요.”

“운동도요.”

“……네, 그것도.”

지금 미안한 걸 생각하면 못 한다는 대답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심은찬은 제 대답을 후회했다.

현우영은 진심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심은찬을 끌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기초 체력을 기른다며 달리기를 시켰다. 단거리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장거리는 전혀 달랐다. 달리기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마침 활동 휴식기로 이전보다는 훨씬 적은 일정만 잡혀 있었기에 스케줄 때문에 피곤해서 그러네 뭐네로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잠깐, 하아, 잠깐……, 우영아.”

숨을 헐떡거리며 달리던 걸 멈추었다. 폐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앞서 달려가던 현우영이 심은찬에게로 다가왔다.

“아직 저희 1킬로 정도밖에 안 뛰었어요.”

“……아니, 1킬, 로. 아니. ……허억. 밖에가, 아닌, 하아. 아닌데요.”

어떻게 그렇게 호흡이 자연스러운 건데.

무릎을 손으로 지지한 채로 현우영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마간 쳐다보았을까. 현우영이 먼저 눈을 돌렸다.

“그러면 오늘은 이쯤 하고 숙소로 돌아갈까요?”

“제발요.”

애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숙소 근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은 결국 천천히 걸으며 이동했다. 벤치에서 잠깐 쉬면 안 되겠냐는 애원을 현우영이 거절한 탓이다. 운동하다가 갑자기 쉬면 근육에 좋지 않다나. 알 게 뭐냐.

“아직 익숙해지지 않으셨어요?”

“저희 달리기 시작한 지 이제 3일 됐거든요.”

태연한 질문에 심은찬의 이마에 핏대가 튀어나왔다. 제가 무슨 돌연변이도 아니고 적응을 그렇게 빨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늘은 실장에게서 현우영과의 유닛 제안을 받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심은찬 개인 스케줄을 마치고 와서 바로 운동을 하니 힘들긴 했다. 그래도 하겠다고 한 건 자신이니 특별히 더 불만을 말하진 않았다. 걸으면서 어깨 부근을 주무르고 있으려니 현우영이 물어봤다.

“많이 힘드시면 업어 드려요?”

“네? 아뇨?”

갑작스러운 제안이 너무 뜬금없어서 웃어 버렸다. 어디 다친 것도 아닌데 무슨 업는다는 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였나.

“업힐 정도로 힘들어 보였어요?”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요.”

현우영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는 게 좀 새삼스럽긴 했다.

“스케줄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기력이 없진 않아요. 제가 우영이보다 한 살이 많은 거지 더 늙지는 않았거든요.”

“알아요.”

선선히 대답하는 현우영을 보며 심은찬이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운동을 하러 나와 주는 것 자체가 몹시 수고스러운 일임은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현우영은 생색 내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 두는 게 좋으려나 싶어서 입을 열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김휴인의 전화였다.

양해를 구하고 통화 수락을 눌렀다.

“응, 형. 무슨 일이야? 조금 전에 헤어졌잖아.”

오늘 스케줄이 바로 김휴인과 잡지 사진 촬영이었다. 둘에게 함께 의뢰가 들어왔던 일로 오늘 촬영에서 모처럼 만날 수 있었다.

<초승꽃>은 마지막 화에서 28.8%이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그동안은 심은찬의 그룹 활동으로, 지금은 주, 조연 배우였던 남은 4명 역시 각기 다른 스케줄로 바빠져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현우영이 멈춰 서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심은찬은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먼저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은찬이 생각나서 전화했지.

“한창 저녁 먹을 시간인데?”

-그래서 더 그랬지.

“아하하. 무슨 말이야.”

시답잖은 대화 후 안부를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우영에게 먼저 가라고 했지만 그는 심은찬의 옆에 서서 그의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갔어도 됐는데요.”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누구세요?”

“아. 휴인 형요.”

“…….”

현우영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분 이전에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확실히 그랬었다.

그 뒤로 여유가 없어서 잊고 있긴 했는데.

심은찬은 제 손에 들린 휴대폰을 응시하는 현우영을 보고 그가 지금 당장 약속을 잡으라는 무언의 의사 표시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굉장히 기대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말을 꺼냈으면서 아직까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건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았어요. 지금 연락해 볼게요.”

웃으며 대꾸한 심은찬은 바로 김휴인에게 연락을 하려 핸드폰을 바로 쥐었다. 그러나 현우영이 막아 실패로 돌아갔다.

“나중에, 아니, 일단 지금은 말고요.”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약속을 잡아 달라고 했던 게 누구였는데.

심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연락하는 게 낫지 않아요?”

“아뇨…….”

“형이랑은 거의 매일 연락하니까 괜찮긴 한데요.”

심은찬의 말에 현우영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움직였다.

“매일요? 요새도요?”

“네, 그럼요.”

“……전 왜 몰랐죠?”

“우영이가 없을 때 연락할 때도 있으니까?”

애초에 현우영에게 일일이 말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 지금 누구와 연락한다는 말을 굳이 왜 하겠는가.

“……밤 되면 추우니까 일단 가요.”

말머리를 돌린 현우영이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서늘한 공기를 인식하고 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현우영이 겉옷을 벗어 건넸다.

“괜찮은데요.”

“추운 거 힘들어하시잖아요. 저는 안 추워요. 추위 많이 타지도 않고요.”

“그럼 잠깐 빌릴게요.”

잠깐 고민하던 심은찬은 현우영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바에야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람막이를 안 입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으슬으슬한지 모르겠다. 한 겹 더 껴입자 확실히 따뜻하긴 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현우영이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옷에 체온이 남아 있었다.

심은찬은 손끝까지 덮은 소매를 주섬주섬 접었다.

“키가 어떻게 되죠?”

“저요? 184요.”

“부럽다.”

두 번 정도 접고 나서야 손목까지 온 소매를 내려다보며 심은찬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국 남자 평균 키를 따져 보면 179센티인 그도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1센티가 모자라서 180이 안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 와중 현우영은 팀에서 제일 막내이면서도 키가 두 번째로 컸다.

“준서가 185인데 준서……, 랑 비슷한가? 좀 큰 것 같기도 하고요. 숙소 가서 한번 재 봐요.”

별생각 없이 제안을 한 심은찬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현재 B the 1에서 제일 작은 것이 저였다. 조금 전에는 자신의 키가 작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작은 편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큰 편이었다. 179라는 신장은. 그래, 한국 남자 평균보다도 큰 편인데도 팀 내에서 제일 작은 키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게 좀 억울했다.

“계속 자라고 있어요?”

현우영 쪽을 한번 흘끔 보며 묻자 그가 잠깐의 생각도 안 하고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와.”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다는 것이 바로 보여 은근히 약이 올랐다. 그럴 거면 1센티는 나 좀 주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심은찬은 자신을 보는 현우영을 눈치챘다.

“왜요?”

“키를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은찬 형은 머리 작아서 비율도 좋으시니까 딱히 신경 안 쓰셔도 될 텐데요.”

갑자기 훅 들어온 칭찬에 심은찬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로 있었다. 이런 걸 본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현우영도 참 대단했다.

“뭐, 그렇긴 한데요. 1센티만 더 컸으면 180이니까 아쉬워서 그러는 거죠.”

“180이라고 하셔도 되잖아요. 1센티 차이니까요. 다들 그 정도는 하고요.”

“하지만 179는 179지 180이 아니잖아요.”

같은 한국말을 하는 거 맞나 싶은 답답함이 살짝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현우영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프로필상에서도 그렇고 방송에서도 179라고 말씀하시고 다니시죠?”

“네, 그렇죠. 그게 제 키니까요.”

갑자기 현우영이 작게 웃었다.

“갑자기 왜 웃어요?”

“아뇨. 은찬 형답다 싶어서요.”

“저다운 게 뭔데요. 아니, 그렇게 웃지만 말고요.”

입에 올리고 나니 너무 진부한 질문이어서 헉스러웠다. 이래서 드라마에서 그렇게 나다운 게 뭐냐고 하는 거였구나. 다시는 웃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현우영이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알고 싶었다. 미소한 채로 입을 다문 현우영의 뒤를 따라갔으나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궁금하긴 했으나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기에 금세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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